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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이기(理氣)사상

주리론(主理論) 과 주기론(主氣論)

by 윈도아인~♡ 2012. 3. 17.

 

주리론(主理論) 과 주기론(主氣論)

 

 

1. 주리론(主理論)  

 

 

주리론(主理論)을 글자 그대로 풀면 ‘이(理)를 위주로 하여 이기론(理氣論)을 펼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리론과 대립각을 세웠던 주기론(主氣論)도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理)라는 영원불변의 표준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보았던 점에서 주리론과 주기론은 공통적이다. 주리론이 주기론과 차이점을 보이는 측면은 아래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이(理)는 능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규율하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주기론은 이(理)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결단코 이(理)가 능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규율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무언가 규율하고 명령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이(理)가 될 수 없다. 움직임이 있는 것, 형체가 있고 냄새가 있는 일체의 유형의 것은 기(氣)일 뿐 이(理)가 아니다. 이(理)는 마치 법률처럼 아무런 능동적 행위도 하지 않은 채 원리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현실은 기(氣)를 통해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주기론은 이론적 엄밀함을 확보하는 대신 윤리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언가 윽박지르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존재가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선한 일을 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게 되는지 주기론으로는 적절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합격하자!>는 푯말을 책상머리에 붙이고 자율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주기론자의 입장인 반면 늘 곁에서 회초리 들고 무섭게 노려보는 어머니가 계셔야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주리론자의 입장이다. 이를테면 주리론이 말하는 이(理)란 <공부의 신>에 나오는 강석호 선생처럼 다그치고 타이르는 존재이다. 주기론이 철학적이고 이론적이라면 주리론은 윤리학적이며 신학적이다.

 

주리론적 입장은 이황(李滉)을 비롯한 영남학파가 취했다. 그들의 관심은 이론보다는 현실에 있었다. 이론적 정합성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현실에서 강력하게 윤리적 강제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이(理)가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명령한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물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희의 어록인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황의 주리론을 뒷받침해주는 문장, 즉 이(理)가 움직이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내용의 문장이 있긴 있다. 그러나 그거 하나뿐이다. 주희의 전체 사상을 개관할 경우 주희가 이(理)의 능동성을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주희의 생각과 조금 다르면 뭐 어떤가? 주희와의 차이점이 오히려 이황 사상의 개성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조선철학자들은 명목상 늘 주희의 사상만을 추종해 왔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처럼 주희 사상의 미묘한 균열 사이에서 창의적이고 적실성 있는 논의들을 추구해 왔다. 주리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지 않았다면 조선철학사는 황량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조선조 중반기까지 주리론자들은 현실 참여보다는 은둔을 택했다. 수없는 관직 제수를 고사하고 안동에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던 이황의 태도에서 전형적인 주리론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주기론자들은 현실 주리론자들보다 참여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활발하게 관직 생활했던 이이의 모습에서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철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조선 초반기의 혼란을 이겨내고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확고히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정착시키게 된다. 주기론은 이런 성리학 일변도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을 부정할 만큼의 부조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현실(氣)은 주기론자들의 손안에 있어 보였다. 그래서 주기론자들은 적극적 참여를 거부하지 않았다.

 

반면 주리론자들은 이(理)의 이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성리학이 뿌리박은 중기의 현실조차 인정하지 못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기(氣)의 현실에서 벗어나 더욱 더 이(理)가 추동하는 내면의 명령을 발견하고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현실을 거부하고 은둔을 택했다.

 

물론 이런 특징은 대체적인 것일 뿐 일괄적으로 주기론자들이 현실에 참여하고 주리론자들이 전부 은둔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완전히 정반대 양상으로 변한다. 외래 문물이 침투하고 열강이 조선을 침략하던 무렵 주기론자들은 오히려 은둔을 택했고 주리론자들은 당당히 현실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변화된 양상 역시 그들의 철학적 입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주기론자들은 성리학이 뿌리째 부정되는 변화된 현실을 맞아 당황하게 된다. 현실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상황이 도래했지만 그들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理)는 결단코 움직임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기(氣)를 통해서만 사태의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결국 새로운 변화된 현실이 도래하기 전까지 은둔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주리론자들은 성리학이 뿌리째 도전받는 지경에 다다르자 오히려 분연히 떨쳐 일어선다. 성리학이 주도적 역할을 하던 때엔 주기론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은둔하여 더 깊은 이(理)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으나 성리학이 근본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이(理)의 명령을 직접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理)는 단지 법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명령하는 존재가 된다. 항일투사로 나서라고 명령하고 타락한 현실을 꾸짖는 준엄한 능동적 존재로서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실제로 주기론자 가운데 항일투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영남을 근거지로 한 주리론자들은 격렬하게 대외항쟁에 나선 바 있다. 철학적 입장의 차이가 시대와 현실에 따라 어떻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주리론은 서학(西學)과 손을 잡기도 한다. 그 중심에 정약용(丁若鏞)이 있다. 그는 주리론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학을 도입하여 이(理)의 이념성과 능동성을 극단화시킨다. 그가 서학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신(神)이었다. 신은 이(理)보다도 더 능동적이고 더 준엄하고 더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는 신을 통한 구원이 곧 궁극적으로 유교적 구원이라고 여겼다. 서학과 주리론은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천주교에 귀의했던 세력이 주리론자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주리론과 서학의 이론적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주리론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서구문물에 반대했던 주리우파는 조선말기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반면 주리론적 입장에서 출발하면서 서학까지 받아들인 주리좌파는 조선말기 실학의 양대 세력 가운데 하나를 구성하게 된다. 똑같이 주리론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좌우파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2. 주기론(主氣論)  

 

 

주기론(主氣論)을 글자 그대로 풀면 ‘기(氣)를 위주로 하여 이기론(理氣論)을 펼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기론을 일종의 기학(氣學)이나 기철학(氣哲學)으로까지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기론이란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다. 주기론은 다음의 입장을 근거로 이기론을 펼친다.

 

“이(理)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주리론(主理論)은 이(理)가 움직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주기론과 주리론은 이(理)의 능동성 여부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라진다. 이 사소한 입장 차이가 커다란 철학적 쟁점을 만들어냈고 현실 속에서도 크나큰 정치적 대립을 낳게 된다.

 

이기론 구도는 주희(朱熹)가 창안해냈다. 주희는 주돈이(周敦頤)가 강조한 태극(太極) 개념을 받아들여 이(理)로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태극이 가지고 있는 기(氣)의 요소들을 제거해 버렸다. 또한 주희는 장재(張載)가 강조한 기(氣)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장재가 말한 기(氣) 개념에서 태허(太虛)로서의 원리적 측면을 제거해 버렸다. 즉, 원리적 측면과 물질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던 기존의 태극 개념과 기 개념을 완전히 분리해서 원리적 측면은 이(理)와 배속시키고 물질적ㆍ에너지적 측면은 기(氣)에 배속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주돈이가 말했던 태극과 음양오행이라는 애매한 개념 및 장재가 말했던 태허와 기라는 불명확한 개념들은 이기론이라는 새로운 구도 속으로 헤쳐 모이게 되었다. 이(理)는 시원적 원리이면서 현실을 규율하는 명령이다. 기(氣)는 물질이면서 에너지로서 온 우주의 과학적ㆍ윤리적 측면을 설명해주는 수단이다. 이(理)와 기(氣)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구분된다.

 

그러나 주희가 제시한 새로운 이기론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기론의 불완전성은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불리부잡(不離不雜), 즉 ‘서로 떼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서로 뒤섞여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 주희의 애매한 입장에서 확인된다. 이(理)와 기(氣)는 개념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늘 함께 한다. 원리 없는 물질ㆍ에너지란 있을 수 없고 물질ㆍ에너지가 없다면 원리가 있을 수도 없다. 명백히 구분되면서도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특성으로 인해 이기론은 수많은 쟁점들을 만들어낸다.

 

이런 쟁점들은 기(氣)가 가진 윤리적 측면 때문에 발생한다. 기(氣)가 순전히 과학적 대상의 역할만 했다면 애초에 쟁점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理)와 기(氣)는 정확히 과학적 법칙과 물질의 개념에 대응되었을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기(氣)를 윤리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맑고 깨끗한 기(氣)를 선(善)한 기라 간주하고 탁하고 더러운 기(氣)를 악(惡)한 기라 간주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어떻게 완전무결한 과학적ㆍ도덕적 원리인 이(理)와 달리 기(氣)는 이처럼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정도에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주기론자들은 이에 대해 일관되게 답한다.

 

“기(氣)의 윤리적 차이는 오로지 기(氣) 자체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설명은 주희의 원래 구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이(理)는 원리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오로지 기(氣)로 설명될 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기(氣)가 맑은지 탁한지, 깨끗한지 더러운지 여부는 기(氣)만 보면 파악할 수 있다. 현실의 기(氣)를 원리로서의 이(理)에 대조해 보아 차이가 크면 악한 기(氣)가 되는 것이고 차이가 적을수록 선한 기(氣)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이(李珥)를 비롯한 조선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주로 취했다. 그들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보게 되는 선한 행동의 근원을 기(氣)에서 찾는다. 이(理)는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선한 행동의 지남철 역할만을 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 법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했다고 하자. 이때 법은 그 선한 행동에 아무런 직접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저 법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현실 속의 인간이 그 법을 좇아 성실히 행동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주기론은 이론적으로 주리론보다 더 정확하다. 주희도 여러 차례 이(理)가 결코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무언가 움직임이 있고 명령하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氣)인 것이지 이(理)일 수는 없다.

 

그러나 주기론에는 크나큰 맹점이 있다. 이(理)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하지 못하고 단지 법률처럼 원칙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원천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는 점이다. 법이 있어도 법망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원리가 있어도 원리의 눈을 피해 교묘히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규율할 수 있겠느냐고 주리론자들은 반박한다.

 

주기론은 이론적 정합성을 확보한 대신 윤리적 실천의 측면에서 약점을 보이며, 주리론은 이론적 정합성에선 다소 무리가 있는 대신 강한 실천윤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주기파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기파의 세력 근거인 기호(畿湖)지방은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을 여당의 지위로 보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외부로부터 뿌리째 도전받는 상황이 닥치자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정권의 핵심세력이었던 기호의 주기론자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설명할 방도도 없었고 이(理)의 능동성에 의지해 현실을 변화시킬 이론적 토대도 없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것은 은둔이다. 변화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웠던 집권자들은 논외로 치자. 그런 부류는 논해 봤자 입만 더러워지니까.

 

한편 이런 변화된 현실까지도 인정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기론자들도 있었다. 홍대용과 최한기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이(理)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기론적 입장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주기론이라는 이기론적 틀 자체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주기좌파라 규정된다. 반면 앞서 말한 은둔형 주기론자들은 이기론적 틀을 고수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기우파라 규정된다.

 

주기좌파 가운데 더욱 래디칼한 입장을 보였던 건 최한기이다. 그는 이(理) 자체를 완전히 격하시켜 물리적 원리의 의미로 끌어내렸다. 명령은커녕 어떠한 도덕적 원리로서의 의미도 없는 것으로 재규정했다. 이에 따라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새로 갖춰지게 되었다. 주기좌파는 주리좌파와 함께 실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출처/naver blog ~ 명랑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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