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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동양철학

道家의 認識論

by 윈도아인~♡ 2012. 3. 17.

道家의 認識論

이 재 권 (충남대)

目 次

1. 緖 言

2. 意識志向과 分別知

3. 意識志向의 否定과 無知

4. 明知의 體得

5. 結 語



1. 緖 言

우리가 一般的으로 哲學의 三大 問題를 形而上學(存在論), 認識論, 價値論(倫理學과 美學)이라고 할 때 中國哲學에서 가장 발달되지 않은 분야가 認識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馮友蘭은 그 이유를 우선 哲學의 方法論에서 찾고 있다. 그는 中國의 哲學者들이 명석한 槪念보다는 모호한 直觀을 좋아하며 直觀에 의존해서 哲學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그는 또 中國에서 直觀을 중시하게 된 원인을 農業과 관계있는 것으로 본다.-原始的 純樸함, 직접 理解한 것을 중시-이러한 이유 때문에 中國哲學에서는 認識論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中國의 哲學者들은 目前에 있는 것이 實在的인 것인지 幻想的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나의 정신에 하나의 觀念으로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客觀的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認識論的 問題들은-인도에서 전해진 佛敎를 제외하면-中國哲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認識論的 問題들은 主て客의 限界가 강조될 때에만 제기되는 것인데, 中國哲學에는 그런 限界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中國哲學에서는 認識主觀과 認識對象이 하나의 全體이다.

中國哲學에서 認識論이 발달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馮友蘭은 中國의 言語的 특성에서 찾고 있다. 中國哲學에서 사용하는 言語는 暗示的이고 명확하지가 않다. 따라서 하나의 槪念이 多義的으로 해석될 수 있다. 中國哲學의 言語는 어떤 演繹的 推理過程의 槪念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中國의 哲學者는 자기가 아는 것을 우리에게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말하는 것이 내용은 풍부하나 말은 간결하다. 그래서 그 말은 정확하기 보다도 暗示的이다.

本論文은 道家哲學에 있어서 認識의 問題를 다루고자 한다. 야스퍼스의 말대로 道家는 본래 形而上學, 認識論, 倫理學, 政治哲學 등을 구분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問題들을 綜合的으로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筆者는 道家哲學을 體系的으로 理解하기 위하여 그러한 問題들을 區別하지 않을 수 없다.

馮友蘭의 指摘처럼 老子와 莊子의 認識 問題에 있어서도 그들은 主て客을 區別하는 分別知를 相對的 앎(認識)이라 하여 否定하고, 主て客 未分의 狀態에서 差別的 個別的이 아닌 全體的·總體的 認識이 이루어져 主て客이 合一되는 明知를 絶對的 認識이라 하여 이것만이 참다운 앎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道家에 있어서 認識의 問題는 認識이 그 자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人間論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참다운 사람(眞人)만이 참다운 認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다운 앎(眞知)을 얻을 때-道의 體得-人間은 絶對的 自由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莊子는 그것을 無待의 逍遙라고 말한다. 筆者는 本論文을 통하여 道家에서 相對的 認識이라고 하는 分別知와 그 分別知를 否定함으로써 이루어지는 絶對的 認識, 즉 明知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問題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2. 意識志向과 分別知

現象界의 認識은 認識主觀이 對象事物을 意識 속에 表象함으로써 이루어진다. 現象界는 老子가 말하는 [有名]의 世界로서 相對的이며 差別的인 有限의 世界이다. 이러한 差別て限定て對立이 現象界를 이루고 있다. 모든 經驗的 世界의 認識은 그 絶對性을 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限定하고 分別해서 槪念化, 意味化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이 <있다(有)>는 것은 일정한 對象 事物이 나의 直觀內에 대응할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달이 있다> <鉛筆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經驗的 直觀에 대응하여 對象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1>이나 <0> 또는 <√1>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할 때도, 그러한 對象이 經驗的 直觀이 아닌 純粹直觀 내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무엇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일정한 對象이 우리의 直觀 내에서 認識主體의 志向性에 一致하느냐 아니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즉 <있다>라는 言語 表象은 우리의 直觀內에 志向對象과 志向性이라는 두 개의 前提 아래서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日常生活에서 늘 나와 남을 區別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정한 形態와 性質을 가진 物體가 우리의 意識 밖에서 우리의 意識 앞에 마주 서서 있는 것으로, 즉 對象으로서 表象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意識主觀에 의한 對象的 把握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經驗事實을 一般化하는 論理的 思惟를 분명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一般化의 機能은 <하나의 事態는 언제든지 自己 同一性을 지니는 것이요, 결코 他者와는 同一하지 않다.> 즉 A=A이요, A는 非A가 아니다로 집약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論理的 思惟에 의한 一般化의 妥當性이 保障되려면 思惟의 對象은 恒常 固定되어 있거나 적어도 必然性에 예외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事物이 時時刻刻으로 變化하는 流動過程에 있는 것이라면 論理的 思惟는 그 機能을 상실하고 만다. 그 때에는 A는 非A이요, A는 A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論理的 思惟는 事物의 流動過程을 어떤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구획하고 각 마디의 과정들에서 共通된 특성만을 가려내어 一般的인 性質만을 뽑아내는 추상을 前提한다. 말하자면 한 事物의 流動過程의 각 마디들에서 共通된 一般的 性質만을 取하여 그 事物의 本質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것으로써 그 事物의 名稱을 삼는다. 이 名稱이 이른바 事物의 一般性을 표시하는 '槪念'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事物을 槪念으로 固定化하는 것은 우리가 日常生活을 영위하는데 매우 效率的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槪念은 客體로서의 事物과 이것을 表象하고 判斷하고 推理하고 추상하는 認識作用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認識現象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比較意識과 有限的인 관점 때문에 現象界는 歪曲되고 相對的인 것으로 轉落하게 된다.

老子에 있어서 相對的 現象界의 認識은 <常有欲>의 態度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老子는 "常有欲함으로써 그 氵를 본다"고 한다. 여기에서 <欲>이란 對象事物에 대한 우리의 意識의 志向性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意識은 그 무엇인가를 志向하는데에 그 本質이 있다'고 생각한다. 視覺은 일정한 색채를, 판단은 일정한 事態를, 결의는 일정한 行動目標를, 感情은 일정한 快て不快의 雰圍氣를 자기의 앞에 마주 서 있는 對象으로서 表象하며 志向한다. 우리의 意識은 意識 밖에 있는 事態뿐만 아니라, 自己 反省에 의하여 '생각하는 내가 있구나'하고 자기 자신까지도 하나의 對象으로서 意識한다. 또 때로는 外的 事物이든 자기 意識이든 간에 뚜렷한 對象을 갖지 않은 막연한 감정에 사로 잡히는 경우도 있으나, 이때 역시 막연한 그 무엇을 意識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意識의 本質은 對象을 志向하는 志向性에 있다고 규정한다. 우리는 日常的으로 主て客의 對立에서 客體를 志向하는 對象的 把握의 態度를 가지고 있다.

[道德經] 第一章에서의 <欲>이란 人間의 好て惡의 情에 의해서 對象事物의 좋고 나쁨을 分別하는 評價的 態度와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欲이란 現象界의 對象事物에 대한 知的인 意識志向을 말하는 것이지 情意的 欲求나 慾望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常有欲>은 우리가 好て惡의 情에 의하여 事物의 價値를 分別하는 評價的 態度를 取하기 이전에 그에 선행하여 가지는 知的 態度로서, <常有欲以觀>은 存在 事物의 現象的인 모습들을 意識의 對象으로 삼되 그 好て惡를 가리는 情意的 요소가 아직 介入되지 아니한 狀態에서 이를 그대로 表象하고 分別하며 捕捉하는 것이다.

그런데, 老子는 우리가 存在事物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分別的 知識과 情意的 慾望이 우리의 認識機能을 마비시킨다고 한다. 老子는, 分別知가 事物에 대한 부당한 是非와 好惡를 생겨나게 하므로, 우리의 意識이 對象을 把握함으로써 얻어지는 類의 分別的 知識에 대해서 反對한다. 그리고 우리의 主觀的 評價가 事物의 진실을 歪曲한다고 非難한다. 莊子는 이를 다음과 같이 寓話的으로 말한다.

"南海의 임금 枙과 北海의 임금 忽이 中央의 임금 渾沌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는 그 恩惠에 報答할 方法을 의논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て코て귀て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숨쉬고 먹는데 이 渾沌에게만 그것이 없다.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七日이 지나자 渾沌은 그만 죽고 말았다." 渾沌은 本質的으로 未分的인 것인데 枙과 忽이 自己네의 主觀的 觀點에서 任意로 解釋하고 定義하여 分化 改造시켰기 때문에 不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莊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오리의 다리는 짧지마는 이어주면 괴로와 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마는 잘라주면 슬퍼한다. 그러므로 본래의 됨됨이가 긴 것은 길더라도 자르지 말 것이요, 본래의 됨됨이가 짧은 것은 짧더라도 잇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물오리의 다리는 짧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다>라고 아는 것은 <常有欲以觀> 즉 對象事物의 나타난 모습을 그대로 보아(表象)서 안(知覺) 것으로서, 짧은 것은 나쁘고 긴 것은 좋다든지 혹은 너무 긴 것은 나쁘고 알맞은 것이 좋다든지 하는 價値意識이 아직 介入되지 아니한, 단순한 知的 經驗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오리의 다리가 짧아 나쁘겠으니 이어 주어야 좋겠다든지 두루미의 다리가 너무 길어서 나쁘겠으니 잘라 주어야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自己의 主觀的 情意에 의하여 對象事物을 평가한 것으로서, 이는 事物의 現象을 表象 知覺하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二次的 意識作用이다.

이와 같이 물오리의 다리는 본래 짧고 두루미의 다리는 본래 긴 것이 각기 그들 나름대로의 本性인데, 人間의 恣意와 好て惡의 情에 의해서 혹은 이어주고 혹은 잘라줌으로써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人爲的으로 파괴하는 悲劇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老子는 <常有欲以觀其氵>라 하여 一切의 情意的 요소가 介入되기 以前의 單純한 知的 態度를 가짐으로써 事物의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본다고 한다. 여기에서 <氵>란 分岐て境界의 뜻으로서 大て小て長て短て高て低て深て淺등 個別的 事物들이 가지는 제각기의 모습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認識主觀인 <心>과 認識對象인 <物>은 각기 계속해서 變化한다. 이와 같이 끊임 없이 變化하는 心과 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知識 역시 固定不變的인 것일 수 없다. 認識對象 自體로서만 보더라도 對象事物은 끊임없이 變化하고 있는데 우리의 意識이 變化중에 있는 事物의 한 瞬間을 捕捉해서 知識을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意識에 捕捉된 事物 現象은 온전한 본디의 모습이 아니라 區劃되고 斷絶된 部分的인 모습에 불과하다. 우리의 分別意識은 自己와 다른 것 즉 對象을 對立的인 것으로 본다. 老子는 이와 같이 主て客의 對立的 관계에서 얻어지는 知는 眞知가 아니라고 한다.

分別知는 사소한 것을 따지고 彼와 我를 區別하게 되므로 이것이 발전해서 사회의 價値體系와 規範을 만들게 된다. 또한 彼와 我의 區別이 지나치게 되면 결국 不幸을 招來하게 된다. 그러므로 老子는 差別的 有限的 認識 態度를 버리고 絶對的 境域에 到達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3. 意識志向의 否定과 無知

우리가 우리의 認識過程에서 체험되는 意識現象을 반성해 보면 認識主觀과 對象事物이 모두 主て客 對立의 對象的 把握에서 生滅하는 表象(對象意識)의 所産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表象하고 知覺하는 意識은 항상 'ててててて에 대한 意識'으로서 對象을 表象하는 限에서만 있는 것이요, 對境을 떠나서는 저 스스로 自性을 가지고 獨自的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主て客의 對立에서 知覺되는 一切 對象의 世界와 이를 知覺하는 認識主觀 및 이 兩者 사이에서 일어나는 意識界는 모두 우리가 主て客 對立의 對象的 把握의 입장을 取하는 限에서만 相對的으로 있는 것이요, 이 相關關係를 떠나서 제각기 저 스스로 獨自的으로 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道家에 있어서의 道는 우리의 意識의 對象이 될 수 없으므로 對象志向的인 意識에 의해서는 認識할 수 없다. 道는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어서 <無>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道를 理解한다는 것은 無를 理解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이것은 分別하는 우리의 知的 要求를 넘어선다는 말이 될 것이며, 그것은 또한 槪念化 할 수 없고, 言語로 表現할 수 없는 存在를 알고, 槪念없이 그리고 言語없이 存在와 直接 接觸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老子가 <無知> 또는 <不知>를 말했다고 해서 그가 一切의 知識을 否定한 것은 아니다. 老子가 無知를 주장한 것은 分別知를 眞知로 錯覺하는 사람들에게 眞實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老子는 主て客 對立의 關係에서 齎來하는 相對的인 認識 方法을 脫皮할 것을 企圖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時間的 制約을 超越한 永遠의 世界를, 그리고 空間的 制約을 超越한 無限의 世界를 理解하고자 하는 것이다.

老子의 <無知>는 곧 소크라테스적인 <無知의 知>와 같은 知的 態度이다. 그러니까 老子의 無知는 知識의 內容面이 아니라 知的 態度를 말하는 것이다. 老て莊에 있어서는 知의 反省으로써 <無知>의 自覺 段階로 들어가 知의 規定 誤謬를 摘發하고 이를 排除함으로써 純粹意識을 通해서 直接的으로 眞理 把握에 도달하는 길을 밟고 있다. 그러므로 無知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主て客 對立的인 相對的 認識態度에서 벗어나 眞理를 바로 把握하는 知的 態度를 말한다.

老子는 認識에 있어서 感覺的 經驗과 理性的 思惟를 모두 否定한다. 眞理를 제 바로 把握하기 위해서는 私慾과 妄見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感官의 구멍(兌)을 막고 생각의 門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努苦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멍을 열어 놓고 거기에서 생기는 일들을 처리하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救濟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兌와 門은 對象에 대한 感覺器官과 그에 대한 意思를 나타내는 表現器官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構成 陳述되는 知識 내용은 참앎이 되지 못한다. 또한 理性的 思惟에 의한 知識도 참앎이 아니다. 그러므로 老子는 "聖者然하는 傲慢을 없애고 智者然하는 態度를 버리면 百姓의 利益은 百倍로 늘어날 것이다"라 하고, 또 "學問이라는 것을 없애버린다면 人間에게 근심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學問이란 人間의 思惟에 의해서 얻어진 分別的 知識이다. 왜 老子는 經驗的 知識과 思辨的 知識을 다 否定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莊子가 잘 말해 주고 있다. "道란 實際로 나타나는 작용이 있고 그것이 存在한다는 證據가 있으나 행위도 없고 形體도 없다. 그것을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는 없다.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은 道의 認識을 위해서는 마음(心)을 비워서 잡념을 씻어 버리고 對象에 대한 認識의 志向性을 排除(常無欲)하여 妄見을 除去하며 內的 直觀에 의한 觀照를 해야 한다. 이러한 境地의 <心>은 아직 아는 者와 알려지는 者가 갈라지기 以前의 <心>이다. 主て客 未剖의 <心>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따라서 老子 所謂 <明白四達 能無知乎>의 <無知>는 主て客이 分化되기 이전의 <心>에 契合 또는 復歸되면, <能知>와 <所知>의 差別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無知>이다.

變化와 變形을 持續하는 現象界의 모든 만물은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心識을 비워 버리면(虛心) 現象界의 變化만 보고도 그 근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虛한 狀態가 되려면 意識이 靜에 머물러 있을 때 가능하다. 意識이 對象에 대한 志向性을 否定한 靜에 머물지 않은 狀態에서 虛의 境地에 도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靜이란 虛인 無와 直面하는 최고의 意識段階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主て客의 對立的인 區別意識은 사라지며 自我가 道에 하나로 일치된다. 우리가 相對的 迷惑의 世界를 벗어나려면 對象的 把握의 主て客 對立的인 態度를 一切 버리는 無念에 들어서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意識 밖에 超越的으로 實在한다고 믿는 一切의 事物들이 사실은 認識主觀에 의하여 表象된 對象(客體)으로서 우리 意識의 소산임을 깨닫고, 이 對象의 世界(對境) 일체를 意識하지 않는다면, 밖(外)에 對境이 없어질 것이요, 主て客 對立에서 일어나는 客體로서의 對境이 없어지는 同時에, 안(內)에 이 客體와 마주서는 한에서만 있는 主觀意識도 또한 없어질 것이니, 對象도 없고 主觀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어, 마음은 텅 빈(無念) 것이 될 것이다. 밖(外)으로 對象을 意識하는 것만이 執念이 아니라, 이 執念을 버린 無念을 意識하는 것도 또한 執念인 것이다. 그러므로 外界 對象에의 執念을 버릴 뿐만 아니라 이 無念도 意識(志向)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無念이다. 無念이란 對象을 志向(意識)하는 主て客 對立의 意識을 止揚함을 말함이요, 결코 意識 그 自體의 斷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老子는 <常無欲> 함으로써만 道를 認識할 수 있다고 한다. <常無欲>이란 存在 事物을 意識의 對象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고 이 對象을 이러 저러한 것으로 表象함이 없는 態度로서, <常無欲以觀>은 이와 같은 態度로써 存在를 직접 把握하는 것, 즉 原初的인 純粹直觀을 말한다. 이는 말하자면 主觀과 客體와의 對立 이전의 認識으로서, 識能으로서의 <心>과 對境으로서의 <物>이 마주 섬이 없이 이루어지는, 思惟 以前의 認識이다. 根源的 自在의 世界인 道를 認識하기 위해서는 主て客 對立의 對象的 把握의 態度를 一切 斷除한 虛心 無爲의 境地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老子에 있어서 道의 認識方法은 <直觀>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直觀>은 <純粹直觀>을 말한다. 純粹直觀은 感官作用과 理知作用을 超越한 것으로서 가장 잘 認識하는 方法이다.

그러므로 常無欲으로써 妙를 直觀하는 것은 道의 門에 들어서는 것이며 道를 體得하는 시작이다. 常無欲으로써 妙를 直觀해야만 人生과 天地의 大道를 바로 認識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고, 得과 失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妙]는 深奧하고 微妙한 根源的 世界인 道를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老子에 있어서의 <無知>는 原始未開의 無知夢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老子가 주장하는 것은 分別知를 버리고 虛心 無爲의 態度로써 眞理를 제 바로 把握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知て不知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조차도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否定함으로써 도달한 絶對 無知의 境地, 이 眞知에 의해서 體得되는 絶對의 世界에서만 모든 차이를 하나로 감싸서 齊同할 수 있다. 이로써 道와 내가 하나가 되고 物我가 一致된다. 또한 存在와 現象自體는 根源的으로 같은 것이므로 우리가 만약 意識志向에 의한 眞存在의 對象的 定立과 事物現象에 대한 槪念的 固定化의 態度를 벗어난다면 우리는 <衆氵>를 보되 거기에서 곧바로 <衆妙>를 보게 될 것이다.

4. 明知의 體得

無知가 眞知를 얻기 위한 認識上의 方法이라면 그러한 方法에 의해서 體得한 眞理를 <明知>라고 한다. 明知는 無知에 의해서 體得되는 高次元의 知로서 分別知가 전혀 없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無知의 知이며 直觀的 知이다. 道家는 推論的 知識보다 直觀的 智慧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推論的 思惟의 限界와 相對性을 認識한 道家는 根本的으로 이로부터의 解放의 길을 걸은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요가나 힌두敎의 베단타 또는 붓다의 八正道에 比肩될 수 있다. 中國文化의 脈絡에서 보자면 道家的 解放은 특히 日常的인 分別的 相對的 認識態度로부터의 脫皮를 의미한다. 因習的 知識과 理性에 대한 不信은 西洋哲學의 다른 어느 學派에 있어서보다 道家에 있어서 한결 강하다. 그것은 人間의 理性으로는 결코 道를 體得할 수 없다는 공고한 信念에 根據하고 있다.

老子는 推論하고 辨別하며 是非하는 相對的 知를 否定하고, 道의 眞相을 알아 道의 움직임과 一切가 되는 根源的인 絶對知를 肯定한다. 明知는 知의 世界를 초월한 <無知의 知>이며, 道의 움직임의 實相을 아는 <全能知>라고 할 수 있다. ててててて이러한 知는 一次的으로 對立과 矛盾을 包越하는 根源處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老子에 있어서 無知란 知가 深化하여 相對知를 넘어서 無知로 된 것, 곧 知의 自己脫却인 것이다.

우리가 眞知를 얻기 위해서는 道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一切의 障壁을 除去해야 한다. 그래서 老子는 "學問을 하면 날마다 더해 가지만, 道를 體得하려면 날마다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學問을 하면 知識과 慾望이 增加하지만, 道를 體得하면 一切의 相對的 知識과 慾望이 사라진다. 또한 學問을 한다는 것은 對象事物에 관한 經驗的 知識과 思惟 分別을 쌓아감으로써 그 目標를 達成할 수 있다. 그러나 道를 體得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意識 가운데서 經驗的 知識과 思惟 分別을 덜어(損) 나가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道를 認識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先入觀 내지 偏見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除去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意識을 거울처럼 맑게 해야 한다. 그러면 眞理가 훤하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옳다고 하는 것도 無窮한 變轉 가운데에 있고 그르다고 하는 것도 無窮한 變轉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우리는 相對的인 是非의 分別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絶對의 明知에 依據해야 할 것이다." 道의 認識은 間接的 推論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直接的 直觀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道를 體得하게 되면, 門 밖에 나가지 않고도 天下를 알 수 있으며, 창문을 통해서 밖을 보지 않고도 天道를 알 수 있다. 우리가 對象의 世界를 향하여 멀리 가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게 된다. 그러므로 聖人은 돌아다님이 없이 모든 것을 알며, 보지 않고도 理解하며, 無爲로써 모든 것을 성취한다." 이처럼 聖人은 明知를 體得한 者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常이라 하고, 常을 아는 것을 明이라고 한다." "萬物이 根源으로 돌아가는 것을 靜이라고 한다. 이것을 自然스러운 性命으로 돌아감이라고 한다. 自然스러운 性命으로 돌아가는 것을 常이라 하고, 常을 아는 것을 明이라고 한다." <常>은 永遠히 계속된다는 의미이며, <明>은 洞察해서 마음 속에 아무런 疑心이 없다는 의미이다. 萬物이 각각 그 스스로 그러한(自然) 本性(命)으로 돌아가면 부단한 運動變化 가운데에 永遠한 不變의 法則이 있으니 이것이 <常>이다. 이 不變의 法則을 통찰해서 認識하고 了解하는 것을 <明>이라고 한다. 우리의 意識 가운데서 一切의 觀念的 造作과 經驗的 判斷을 除去하면 無心의 狀態에 도달하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存在의 참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 老子는 A라는 存在를 바로 把握하기 위해서는 A의 입장에서 보아야지, 다른 입장에서 보아서는 A라는 存在를 제 바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을 아는 者는 智慧있는 者이지만 자신을 아는 者는 더욱 明察함이 있는 者이다"라고 말한다.

老子는 <無知의 知>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最上이요,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病幣이다"라고 한다. 이는 分別知에 대한 철저한 否定의 態度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否定만이 아니다. 自己 自身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自覺하는 것은 知て不知를 超越한 것으로서 絶對的인 知이다. 또한 老子는 眞知는 言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참으로 아는 者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者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이는 言語를 완전히 否定하는 것이 아니라 眞理는 말로써는 다 言表할 수 없다는 뜻이다.

老子에 있어서 明知의 體得은 마치 거울에 事物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우리의 意識 속에서 다른 어떤 媒介를 사용하지 않고 存在와 意識이 原初的으로 만남으로써 存在가 意識 가운데에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5. 結 語

이상에서 筆者는 道家哲學에 있어서 認識의 問題를 살펴 보았다. 本文의 內容을 要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우리의 意識志向에 의해서 얻어진 分別知는 眞知가 아니다. 우리의 主觀的 評價는 事物의 진실을 歪曲한다. 現象界의 認識은 常有欲의 態度에서 이루어진다.

2)道의 認識은 意識志向의 態度를 버리고 (즉 常無欲함으로써) 마음을 비워(虛)버린 虛靜의 狀態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을 비우기(虛) 위해서는 差別的 認識態度를 버리고 無知의 態度를 가져야 한다.

3)無知에 의해서 體得한 眞理가 明知이다. 이것은 高次元의 認識으로서 無知의 知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明知의 體得은 感覺的 經驗이나 理性的 思惟등의 어떠한 媒介도 없이 우리의 意識과 存在가 직접 만남으로써 直觀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道家는 分別知를 否定하여 無知를 자각하고, 明知를 體得하여 窮極的 存在인 道와 合一될 때 비로소 참다운 앎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莊子에 있어서는 差別的 認識論으로서 懷疑論, 不可知論, 相對論을 問題삼고 있다. 그러나 이 問題는 다음 機會로 미루어 둔다.

또 하나의 問題는 老子의 認識論에 있어서 主觀과 對象이 없고 言語와 槪念도 없이 直觀的 方法에 의해서 道를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한 方法이 과연 具體的으로 무엇인지? 이 問題도 앞으로 계속 硏究해야 할 課題로 남겨둔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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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구름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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