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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도(參禪道)~♡/♣ 참선학(參禪學)

정혜쌍수(定慧雙修)

by 윈도아인~♡ 2013. 9. 5.

정혜쌍수(定慧雙修)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비록 지혜를 통한 해탈이 진정한 해탈의 경지라 하지만, 선정(禪定)을 통하지 않은 지혜(智慧)는 알음알이나 바싹 마른 건혜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정과 지혜는 동시에 함께 닦아나가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선어가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있다지만 모두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수심결』)


선정-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

선정이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을 일컫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려면 모든 분별작용을 그치고 어느 한 곳에 집중해 들어가야 한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오락가락하면 사태를 올바로 보지 못한다. 마치 맑은 물에 흙탕물이 번지면 혼탁해지고 바람이 일면 이리저리 출렁거려 물속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분별심을 그치고 삼매에 드는 것을 가리켜 지(止)라고 했다. 이를 초기 경전에서는 사마타(samata)라고 일컬었다. 선정이란 이렇게 이리저리 들떠 있는 마음을 그쳐 맑은 물처럼 투명하고 고요해지는 것이다.

마음에서 모든 분별작용이 사라져 고요해졌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꿰뚫어본다. 그것을 관(觀)이라고 하고 위빠사나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무아이고 무아임을 지혜로서 통찰하게 된다. 분별을 그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지관이라 한다면, 선정에 들어 지혜를 들어내는 것이 정혜이다. 이렇게 지관과 정혜는 서로 통한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지관균행(止觀均行),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는 말도 썼다. 지눌스님이 내걸었던 성적등지문(惺寂等地門)도 이와 마찬가지다. 고요하고 고요한 선정 속에서 명철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정과 지혜와 지와 관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한편 요즘 위빠사나를 추구하는 분들은 사마타의 작용을 간과하는 듯한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위빠사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사마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가 없는 이에게 선정은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는 이에게 지혜는 없나니 선정과 지혜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실로 열반에 가까이 있다.” (디그하 니까야)


간화선-한국불교 대표적 수행법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은 조사선 전통에 서 있는 간화선이다. 조사선을 실질적으로 정립한 혜능스님 역시 정혜쌍수를 강조했다. 그러나 혜능스님은 선정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어느 고요한 곳에 머물러 좌선하는 것으로 선정을 규정짓지 않았다. 스님은 우리가 움직이는 이 생활세계 속에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아 어지럽지 않으며 지혜가 움직이는 것을 강조했다. 바로 생활 속에서 파득파득 살아 움직이는 선이었다.

혜능스님은 행자시절에 디딜방아를 찌면서 삼매를 얻고 깨달았다. 선방에 앉아서 좌선하다가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 속에 삼매를 얻고 지혜를 드러내어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견성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대혜스님도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는 정중공부(靜中工夫)보다는 시끄러운 곳에서 수행하는 료중공부(鬧中工夫)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조용하고 고요한 곳에서는 사실 누구나 마음이 너그럽고 편하다. 그러나 시끄러운 시장 통에서도 마음이 흔들리고 않고 깨어 있기란 쉽지 않다.

요즘 위빠사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선정에만 머무는 것을 뛰어넘어 이 생활세계 속에서의 알아차림과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선정을 통해 정서적 해탈에 이를 수는 있다. 그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지혜로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꿰둟어보고 집착 없는, 걸림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혜해탈(慧解脫)이다.

한국의 간화선은 정혜쌍수에서 바라보건대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번득여 걸림이 없고 자취가 없는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가면 좋겠다. 생활선이란 우리가 바로 발 딛고 있는 일터에서 일에 집중하면서 지혜롭게 움직여가는 것이다. 그 일속에서 걸림이 없고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깨달음의 별천지가 달리 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활 속의 정혜쌍수, 그것은 온갖 험한 경계, 냉혹하고 타산적인 계산과 불같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정글에서도 삼매에 들어 어지럽지 않고 코끼리처럼, 사자처럼 성큼성큼 걸어가며 앞길을 열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고명석/ 조계종 포교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