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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동양철학

無의 동양철학적 의의

by 윈도아인~♡ 2012. 3. 17.

無의 동양철학적 의의

 

金東華

 

 

근래 동서철학계를 통하여 철학상 술어에 無라는 술어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하이데거 실존철학상의 無라든가 西田幾次郞氏의 「無의 自覺的限定」 久松眞一氏의 「東洋的無」 等等의 無에 대한 諸論說을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일반 청년 찰학도들은 無의 의의에 대한 의아심과 또 어떠한 유원한 감격을 주는 호기심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無의 사상이 철학적 문제로 철학사상에 나타나게 된 것은 서양철학사보다도 동양철학사가 먼저일 것이요, 또 동양철학사상에서는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있어서는 無의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의해서는 도리어 이것이 공격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었다. 無의 철학적 의의를 잘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서 허무의 道니 또는 虛無寂滅의 道라 하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지도 말 일이요, 또 가져서는 절대로 안될 불온사상인 것이나 같이 蛇蝎視하고 惡口로써 罵倒한 적이 있었다. 현대에 와서 일반학자들이 이 無의 사상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때 실로 今昔之感을 금할 수 없다. 아마 이것도 동서철학사상 교류의 혜택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동양사상의 眞價闡揚을 위하여 매우 慶賀할 일이라 하겠다.

 

동양적 無의 사상이라 함은 어느 한 나라 한 민족만이 가졌던 단순한 사상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양의 문화라하면 인도의 문화 중국의 문화를 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無의 사상도 중국적인 無, 인도적인 無가 때를 전후하여 따로따로 일어나서 피차에 서로 영향함이 없이 독자적인 발달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서 東洋的無의 사상을 소개함에 있어서도 중국과 인도를 나누어 논술하는 것이 양민족의 사상을 분간하는데 편리할 것이다.


 

1. 중국철학사상의 無

 

중국의 철학이라 하면 의례히 유교와 노장의 사상을 연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원류인 孔孟의 사상에는 철학적 요소가 희박하다. 유교도 불교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송대 이후에는 물론 훌륭한 철학적 이론이 정비되었지마는 그 원류에 있어서는 人人 각자가 안으로는 三綱(君爲臣之綱, 父爲子之綱, 夫爲婦之綱) 五倫(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人倫의 道를 지키고 (이것이 修身) 밖으로는, 齊家 治國 平天下의 治人의 道를 밟아 나아기라는 윤리 도덕의 敎 治民經國의 政治敎로서 형이상학적 이론은 없다. 이에 대하여 노자의 사상도 그 修己 治人하는 현실적 인간의 근본교지는 대체로 유교와 동일하나 그 敎導의 방법에 들어거서는 공자의 그것과 전연 반대이었다. 그러면 그 근본교지가 동일하면서도 어째서 그 敎導의 방법은 반대이었는가? 그것은 노자의 사상은 형이상학적철리에 입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자의 윤리관이나 정치를 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방법이 다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노자의 철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인륜을 지키고 정치를 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방법이 다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노자의 철학적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이 즉 無라는 것이다. 그의 無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가. 이론적 無

 

노자의 이론적 無라는 것이 즉 우주와 인생의 원리로서의 無다. 그러나 노자학설의 표면적 원리의 名으로서는 道라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노자의 말에

「物이 있어 混成하니 天地에 앞서서 生하고 寂하고 寥하되 獨立하여 改하지 않으며 周行하되 (危)殆하지 아니하니 可히써 天下의 母가 될지니라 내 그 名을 알지 못하므로 이를 자하여 道라 하노라. (노자·道德經第25章)」이라든가 또는

「道는 一을 生하고 一(一元의氣)은 二를 生하며 二(陰과 陽)는 三을, 生하고 三(天과 地와 人)은 만물을, 生한다. (第42章)」

라고 있는 바와 같이 道라는 一원리로부터 天地人 三才와 및 일체만물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道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道의 道라 할 것은 平常의 道가 아니요 名의 名이라 할 것은 평상의 名이 아니니라. (第1章)」

라고 있는 바와 같이 노자가 말하는 道는 부득이하여 잠시로 붙인 假名으로서 그 실은 무엇이라고도 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리는 차라리 無라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니 「道常無名」(第32章)이라 한 것이 이 의미로서 無가 즉 천지만물의 원리이니

「無名은 天地의, 始요 有名이 만물의 母다. (第1章)」

라한 것이 그것이다. 즉 무엇이라고 이름도 짓지 못할 원리가 천지의 근원이요, 천지라는 유명의 것으로부터 만물이 生하다는 것이다. 우주 인생의 이 원리는 이름도 지을 수 없는 無이지마는 이것이 一主宰者가 되어, 자연으로 존재하며 古今에 불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지가 아직 개벽되기 이전에 輕하고 청한 부분(陽)이 상승하여서는 天이 되고 또 濁하고 重한 부분(陰)은 하강하여 地가 된 것으로 이것이 즉 無名이 천지의 始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와 같이 天地라는 名이 有하고 보니 이후로부터 이 천지간에 森羅萬象이 무한하게 生生化育하게 되는 고로 이것을 일러서 有名은 만물의 母라 한 것이다.

「천하의 物은 有에서 生하고 有는 無에서 生한다. (第40章)」

라고 한 것도 역시 동일한 의미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아오면 無가 우주 인생의 제일원리인 것은 다시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러면 우리가 이에서 재검토하여야 할 문제는 그 제일원리가 완전히 공허해서 전연 無內容한 完無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내용을 有라 하거나 또는 기타의 무엇이라 하기에는 그 전내용을 포섭하기에 불편하므로 부득이해서 無라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상술하 바에 의해서도 거의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後者의 성질에 속하는 것이다. 즉 無라고는 하되 결코 공허 완전무의 無가 아니다. 이것을 만약 有라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상대적인 것 불완전한 것이되기 때문에 이러한 소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잠시 無라 名하였을 뿐이요, 기실은 天地人三才 일체만물을 전개시킬 무한한 내용을 소유한 본체로서의 無인 것이다.

 

이상이 노자의 本體說 즉 원리적인 無의 사상인 바 莊子도 이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但 莊子는 이러한 無의 원리가 一切處에 遍在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敷演한 점이 그 특색일 뿐이다. 例하면 「莊子北游篇」에 東郭子가 莊子에게 묻기를 「道는 어디에에 있는가?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라.  蟻( 는 메뚜기같은 흑갈색의  으로서 土中에 穴居하는 것. 蟻는 개미)에 있다. 그것은 下賤하지 않은가.  稗(피)에 있다. 어찌 그 더욱 下賤한가. 瓦 에 있다. 어지 그 더욱 심한가. 屎溺에 있다」라고 답하니 東郭子가 다시는 答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는 道의 있지 않는 곳이 없다는 說話의 일종이다. 莊子가 老子의 無의 本體說에서 일보 溯源하여 시간의 無始를 논하고 있다. 「齊物篇」의해서 보면 始라는 것은 物의 始인바 이에서 일보소원하면 無始가 있고 이에서 또 일보 소원하면 無始도 없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니 그것은 無無始 이와같이 소원하면 무수한 無가 있다고 하였다.


 

나. 실천적 무

 

老子의 윤리적 實踐要目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교의 그것과 같이 修己와 治人의 二大要目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대요목을 실천할 이론적 근거는 역시 그 철학적원리인 無의 本體說에 있는 것이다. 인생은 無의 本體로부터 출생하였으므로 그 본체에 복귀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常德은 어기지 않고서  兒에 복귀한다. 常德은 어기이지 않고서 無極에 복귀한다. (道德經 第28章)

常德이라 함은 인생이 본래부터 本具하고 있는 無의 德으로서 이 德은 언제든지 吾人의 몸을 떠나지도 않고 또 어기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無의 德을 발휘하면 無私無慾 천진란만한  兒 즉 無에 또 만물이 아직 전개되기 이전의 상태인 無極에 복구한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윤리관이다. 그러면 이러한 실천을 하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修己 즉 자기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修己의 방법은 간단히 그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修己의 방법은 간단히 그 덕목만을 열거한다면 無慾恬淡(第12章)謙下不爭(第8章) 無爲自然(第18章)으로 살아나아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자신을 수양하면 盛德의 人이 되어 현상계의 繁縛을 벗어나서 無의 본체에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그 盛德의 人이 되면 범도 능히 그를 害할 間隙이 없고 칼도 능히 그를 베일 間隙이 없는 즉 死地가 없다고 (第50章) 한다.

 

그다음에 治人이라 함은 정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 치인의 방법은 修己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즉 이를 身에 修하면 그 덕이 이에 眞하고(修身), 이를 家에 修하면 그 덕이 이에 餘하여(齊家), 이를 鄕에 修하면 그 덕이 이에 長하고 이를 邦에 修하면 그 덕이 이에 豊할 것이며 (治國) 이를 천하에 修하면 그 덕이 이에 普한다.(平天下)(第54章)고 본 것이 그 것이다. 治者 즉 人君이 되어서 정치를 하는 데는 慈 儉 敢不爲天下之先의 三寶가 있다고 한다. (第67章).

인민을 자애하면 그 은혜가 만민에 덮히고 儉約하게 하면 國費가 감소되므로 국민으로부터 租稅를 경하게 하며 겸손하면 인민이 그 덕에 服하게 되어 無爲而自化 즉 유교와 같이 仁義禮智 三綱 五倫의 敎니, 형벌이니 하는등 諸種의 정책을 강행하지 않아도 자연으로 정치가 잘 된다는 것이다.


 

2. 인도고대철학상의 無

 

인도의 고대철학이라 함은 유교 이전의 吠陀 奧義書等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고대인들은 이 우주인생의 제일원리를 무엇이라 보았던가? 吠陀의 「無有歌」의 第一偈에

「그 태초에는 無도 없고 有도 없으며 空界도 없고 그 위의 天界도 있지 않았다. 무엇이 이를 掩蔽하였는가? 어느 곳에 있는가? 누가 이를 옹호하였는가? 저 水는 어떻게 밑없이 깊었는가?」

또 그 第四偈에

「그가 전개하여 이에 처음으로 愛가 있다. 이것이 識의 최초의 종자다 이것이 곳 有와 無와의 연쇄로서 聖者 等은 그 달성에 의하여 마음(心)에 찾아서 발견한 바이다.」

라고 한 것등이 인도 고대인들의 第一原理觀關의 일단이다. 그 第一偈의 의미는 그 제일원리의 상태는 아무것도 없는 無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無로부터 어떻게 해서 有가 생기게 되었는가?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 第二偈이다. 즉 無가 전개해서 愛가 생겼으니 이 愛는 識의 최초의 種子(動態)라는 것으로 이 愛에 의하여 有의 현상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無가 本體界요, 有가 現象界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노자의 사상과 동일한 사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原理觀이 고대 인도인들의 일반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후세에 奧義書에 이르러서 Udd laka- runi 같은 학자는 「或者는 말하기를 태초에 우주간의 일체만유는 無로부터 生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태초에 있어서 우주간의 일체만유는 모두 有로부터 生한 것으로 이 有는 唯一無二의 원리다」라고 반대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 본다면 우주의 본체관에 대하여서는 이 유무의 二說이 가장 유력하였던 것만은 명확하다. 후자의 설에 있어 물질적 현상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 본체를 有라 하였지마는 그러나 유형 무형 대소 장단등 일체만유를 전개시킬 제일원리라 한다면 그것은 有라하기보다는 無라하는 것이 도리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 같은 奧義書상에서도 그 제일원리를 체득하여 들어가는 실천면에 있어서는 그 형태를 어떻다 명령할 수 없어 一非 日非라 否定詞로써 표현하였던 것이다.


 

3. 불교철학상의 無

 

불교사상이 일반에게 오해되게 된 가장 큰 단서가 된 것은 이 無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불교라 하면 無가 연상될만큼, 불교의 교리와는 중요한 교리인 것처럼 알려져 있고 이러한 점에서 불교를 악평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를 단평하는 사람은 허무주의, 無父父君主義, 비도덕, 비윤리, 非國家等等 主義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릇된, 판단이다. 불교에서 無라는 문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주의적인 無도 아니요, 人倫破壤의 無도 아니며 염세적인 無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철학적 진리를 밝히고 또 그 진지를 얻게 하는 일종의 무기나 도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불교적 無에 대한 단평이 일게 된 것은 불교의 교리를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昔日에 속하는 일이요, 적어도 철학이 발달되어가는 금후에 있어서는 그런 단평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불교적 無의 의의는 무엇인가? 불교의 그것은 노자나 인도고대철학상에서 인정하는 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로서의 無가 아니다. 불교는 도대체 형이상학적인 우주통일의 유일한 원리의 존재라는 것을 許하지 않는다. 어떤 유일의 객관적 원리로부터 이 우주와 인생이 전개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객관적존재나 인생자체는 다 각각 인생자체의 정신으로부터 전개하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할는지 모른다. 즉 객관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객관적인 우주통일의 원리조차도 이를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반드시 신의 존재를 인정하여야만 한다는 어떤 선천적인 규범은 없지 않은가? 신의 존재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하는 종교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일종의 의견일 것이다. 만약 신을 주로 하는 종교가 신본주의의 종교라 한다면 불교는 인간을 주로하는 인본주의의 종교일 것이다. 그리고 불교철학은 정신철학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원리로서의 無를 인정치 않으니 노자와 불교이전의 철학과 근본적으로 틀린다.


 

가. 理論的無(空論)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無의 의미는 여하한 것인가? 無는 有에 대한 대립적 槪念이다. 어떠한 존재에 대한 한 사람의 의견이 有라 한다면 그에 대한 반대로 그것을 無라고 부정하는 知的인 판단이다. 불교사상의 三大綱領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三法印說을 예로 들어서 본다면 객관적인 모든 존재의 시간적 판단을 한 것이 諸行無常印이요, 또 그의 공간적 판단을 한 것이 諸法無我印이라는 것이다. 諸行이라 하나 諸法이라 하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서 모든 존재라는 의미의 句다. 세상사람들이 이러한 존재를 대할 때 각자의 主意的인 욕구심에서 그것을 영원불멸하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또 執著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 실 그 내적인 모든 존재는 시시 각각으로 변화, 변환하여 잠시도 정체된 상태에 놓여서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한 가지의 현상도 상주하는 것 없이 마치 用流과도 같이 무한한 변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常住不變하는 존재인 것처럼 착학한다. 그런 고로 불교는 이러한 현상의 실태를 가리켜서 無常이라하여 常住의 착각을 시정한 것이 즉 無의 의미다. 그 다음에 諸法無我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공간적 관찰에서 내려진 판단으로서 모든 사람은 공간적인 모든 존재에 대하여 그것이 어떠한 실체가 있어 영구히 실재하는 것인 것처럼 착각한다. 예한다면 인생각자의 자체는 육체적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다. 또는 정신적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착각된 固執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실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의 요소가 집합하여 일정한 기간내에만 존재할 수 있는 假의 존재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고로 이러한 그릇된 자아관, 물체관, 즉 실체관에 대하여 무실체한 것이라고 단안한 것이 諸法我의 無의 의미다.

 

그 다음에 주관적 無를 말하는 것이 三法印中의 涅槃寂靜印이다. 열반은 불교의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滅度, 寂, 滅, 無生, 無出, 無爲, 吹消等等

이라 번역되는 것인 바 이는 모두 소극적이요, 부정적이다. 만약 이러한 것이 불교의 구경적 목적이라 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허무주의라는 혹평을 들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吾人一心中의 모든 착각적 고집을 부정하는 의미다. 즉 吾人이 諸行無常의 진리와 諸法無我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常住, 有實體의 고집을 가지는 것은 오인 각자의 일심중에 모든 번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다. 불교의 眞目的을 직설한다면 그것은 正智, 正體智, 眞如智의 체득에 있는 것으로 이것을 불교 즉 覺이라 한다. 이 覺을 초래하는 전단계가 즉 열반이라는 것이다. 吾人이 覺을 얻는데는 먼저 吾人의 一心中에 항상 일어나고 있는 모든 번뇌를 滅無해야 한다. 이 번뇌의 滅無하는 상태 이것을 涅槃이라 하고 이것이 곧 正覺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심을 滅無하는 것이 열반의 無의 의미다.

 

이상과 같이 보아오면 불교의 無의 의미가 여하하다는 것의 일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無의 의미는 존재에 대한 공간적 正智와 시간적 正智, 正覺等을 얻게 하는 지식과 지혜를 開導하는 일종의 규범적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그 초기에는 有의 고집을 타파하는 銳棒으로 無와 空을  用하다가 후세에는 無는 거의 사용치 않고 空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無는 객관적 存의 完無 즉 전연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 떨어지기 쉽다. 상술한 바의 삼법인의 無의미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完無하다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도리어 바르게 존재하는 상태를 바르게 알게 하는데 그 적극적인 진의가 있는 것이다. 吾人이 대상에 대한 正智를 얻는다는 것은 객관상태의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주관심에 달려있는 것이다. 즉 주관심의 「레엔스」가 잘못되는 고로 대상을 대상 그대로 바로 비추어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주관심을 고쳐야 하는 것인 바 그 고치는 방법에는 無가 아니면 空이다. 그런데 無라 하면 一心이 없다는 의미가 되어 시실에 背馳가 되는 고로 無자를 피하고 空자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즉 일심은 엄연히 있으되 그 일심상에 일어나는 번뇌망상만 空해버리면 正智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空은 순전한 주관적 고집의 지양방법만은 아니다. 이에는 객관적존재가 空하다는 의미도 있다. 객관의 실상을 闡明하는 것이 공론이라 하면 주관심을 空하는 것은 空觀이다. 즉 전자는 이론적 실체적 空說임에 대하여 후자는 실천적 공설이다. 실체적 공설 있어서는 객관적 제존재가 다만 空하다는 내용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즉 객관적 존재물은 그 실체로는 空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면으로는 또한 엄연한 존재이니 이러한 점에서 그 空에는 假(有)가 대립된다.

 

다시 말하자면, 有와 無의 대립이다. 그러면 空(實)이 존재의 전부인가, 불연이면 假(現象)가 존재의 전체인가, 그것은 空假兩面을 합한 것이라야 그 전체가 될 것이다. 이 兩者 합한 것을 中이라 한다. 즉 존재의 진상, 全相은 空, 假, 中으로서 이것을 三諦라 한다. 만약 이것을 주관적 사상개념상으로 본다면, 假(正)라는 개념이 수립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空(反)이라는 개념이 대립된다. 이 양개념은 어디까지나 대립의 상태로 병진할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양개념이 다 같이 포섭되어야 하나니 이것이 즉 中(合)이라는 개념이다. 有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無 즉 공이나 그러나 이 공은 單空, 完空이, 아니라 中에로 반드시 연장될 개념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 無라고 하지 않고 空자를 사용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空이라하면 의례히 中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 空의 개념이다. 그 다음에 실천적 無의 의의를 논술할 예정이었으나 부여된 지면이 이미 초과되었다.

(출처/네이트통~sajud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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