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행복비타민~♡/♡ 兀花道 ♡

방중술 !

by 윈도아인~♡ 2005. 6. 9.
방중술로 천하를 평정한 미실 궁주"


방중술로 세상을 뒤흔든 미실 궁주(549~606)
조선시대 최고의 탕녀를 꼽으라면 대개 '어우동'을 꼽을 줄 안다. 이는 아마도 소설 또는 영화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미지 때문이리라.

어우동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태어나 종친가의 며느리로 출가했으니 외견상으로 대단한 신분이었슴에도 불구하고 남편 하나로는 색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울 밖으로 뛰쳐나간 여인이다.

남자를 탐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친정과 시댁 양가의 영욕을 분연히 떨쳐 버린채 노비에서부터 귀족 벼슬아치를 가리지 않고 탐하여 보수 기득권층의 분노를 유발하였던 여인이다.

어우동이 섭렵한 인물들은 실로 방대하다 못해 요즘으로 치면 기네스북에 오를만 하다. 하지만 방중술로 따지자면 당대의 생불이라 일컬었던 지족선사를 한방에 거꾸러뜨린 '황진이'가 단연 으뜸이 아니겠는가.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여기서 벽계수는 황해도 벽계고을의 수령이라는 설도 있는데, 당대 왕실의 종친(宗親)이었던 벽계수(碧溪守라는 설에 무게를 더한다.

황진이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윗 시조를 통해서 풍류를 사랑하는 그녀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은 단지 풍류를 즐기는 것에 있었으며 그녀에게 있어서 섹스는 음악이나 시조와 같은 풍류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하지만 위의 경우와는 달리 달통한 섹스실력 즉 방중술을 이용해서 천하를 평정했던 여걸이 있었다. 신라 성덕왕때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 등장하는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참고문헌이지만 오늘날 그 원본은 찾을 길이 없고, 조선 후기들어 어떻게 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점잖은 문구와는 달리 문란한 성 풍속도를 담고 있다.

때문에 과거 조상님들의 역사가 무척 고상하기만를 바라는 역사가들에 의해서 위작시비가 제기된 바 있는데 사실을 증명할 다른 사료가 없어 명확하게 단언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 주변나라의 고대사를 들춰보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가 혼재된 형태로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때 성풍속도가 문란하여 화랑세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음란성을 제외한 내용은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라 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문제의 화랑세기에 '미실' 이란 여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적힌대로라면 그녀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막강한 실세로써 당대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미실은 법흥왕-진흥왕 시대를 대표하는 훈신(勳臣)인 미진부(未珍夫)의 딸로써 10세 풍월주인 미생(美生)의 한 살 위 누이이며 11세 풍월주인 하종(夏宗)과 16세 풍월주인 보종(寶宗)의 어머니(이들은 서로 씨가 다 다르다.)이며 저 유명한 김유신에게는 처조모가 된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움켜주게 된 데에는 물론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치맛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방중술에 있어서 천부적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아마도 그녀의 외할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외할머니였던 '옥진'은 당시 신라왕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는 보직을 가업으로 삼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채홍사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윗대에서부터 집안 대대로 색공 바치는 것을 가업으로 삼는 이 방면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미실은 그 방면의 명문가 답게 어릴적부터 남성을 사로잡기 위해 각종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음주가무에 대한 노우하우를 외할머니로 부터 모조리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당대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얼굴은 아름답고 몸이 풍만함은 물론 성격마저 명랑하므로 화랑세기에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精氣)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미모에 다가 최고의 방중술을 연마하였으니 '지소태후'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이었던 세종 전군(殿君·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진흥왕의 부인이었던 '사도황후'를 폐할 목적으로 미실을 이용하려 했던 지소태후는 작전에 실패하자 자신의 음모가 천하에 공개될 것이 두려워 미실에게 색기로 궐내를 어지럽힌다는 누명을 씌워 궁 밖으로 내치게 된다.

미실은 옛 연인이었던 화랑 '사다함'을 재회하여 둘 만의 혼인식을 치룬 뒤 사다함을 전쟁터로 내 보냈는데 이 무렵에 전 남편이었던 세종이 또한 미실을 향한 그리움으로 상사병이 나서 위급한 지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실 스토리를 상세히 다룬 화랑세기 필사본

미실은 다시 궁으로 불려 들어갔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궁으로 돌아가 다시 세종의 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후 상사병으로 시름 시름 앓다가 그만 1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

아마도 미실이 섹스를 권력의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화랑 사다함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세종의 아내였던 미실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권력장악에 나섰다. 그녀는 먼저 진흥왕의 부인 사도왕후와 삼생 (三生· 전생·현생·후생) 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의자매를 맺었다는 뜻이다. 사도 왕후는 대원 신통에다가 미실의 숙모였기 때문에 그녀와 쉽게 권력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도왕후는 그녀의 책사노릇을 훌륭히 해냈다.

사도 왕후는 미실에게 자신의 아들이었던 동륜 태자와 사귀어 차기 왕후 자리를 노리라고 권유했다. 이를 혼쾌히 수락한 미실은 곧 태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어느날 임신한 아이의 할아버지 뻘 되는 진흥왕은 미실의 자색을 소문으로 전해듣고 색정이 동하여 은밀히 불러 들이게 되었다. 이런 얘기는 중세 유럽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왕실 족보는 개 족보라는 생각을 한다.

어찌보면 사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할 것 없이 위에 나온 거의 모든 남자들이
미실에게 작업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미실은 애인의 아버지인 진흥왕에게도 전문적인 방사솜씨를 발휘했으며 그 덕택에 왕의 총애를 입어 곁에서 직접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으로 격상 되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도교의학사에서 황제를 성교육하는 현녀(玄女)나 소녀(少女)가 그랬던 것처럼 미실은 제왕이 성적 능력을 배양케 하는 개인교사였다. 방중술가로서 우뚝한 미실의 행적은 그와 밤을 보낸 세종이 다음날 휘청거리곤 했다는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진흥왕의 총애를 입은 미실은 밤 마다 찾아오는 동륜 태자가 차츰 부담스러워지게 되었다. 그녀는 동생인 미생을 시켜 부담스러워진 동륜 태자를 환락의 세계로 유혹해내는데 성공한다.

동륜태자는 어느날 아버지인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 궁주를 후려내기 위하여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태자의 행적을 수사하던 중 태자의 수행원들이 미실과 태자 사이의 스캔들을 폭로하게 됐으며 불륜이 들통 난 미실은 원화(풍월주 이전에 여인이 화랑을 대표하던 자리)의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실은 또 다시 궁에서 쫓겨나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진흥왕이었지만 미실과의 환상적인 섹스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결국 진흥왕은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고 궁 밖으로 미실을 찾아와 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고 한다.

이때 미실은 죽은 옛 애인이었던 사다함의 씨 다른 동생이었던 제 7대 풍월주 '설화랑'과 한창 돈독한 정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다함과 외모가 비슷했던 설화랑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낀 미실은 남편인 세종을 변방으로 내 보내고 설화랑을 풍월주 자리에 앉히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물론, 결과가 성공적 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그녀는 자신의 섹스 테크닉과 특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실질적인 국정운영에 깊숙히 관여하였고 화랑의 대모로까지 불리우며 왕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설화랑의 최후는 그녀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손색이 없다. 진흥·진지·진평 등 세 왕을 모신 그녀가 진평왕 28년(서기 606년) 마침내 병에 걸리자 설화랑은 자신이 그녀의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하늘에 기원한다.

하늘이 그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신 건지는 잘 모르지만 설화랑은 마침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여기에 미실은 자기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 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너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다"라고 애도하였다.

그때 설화랑의 나이는 58세였다. 우리 역사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지만도 여러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아무래도 그녀가 유일할 것 같다.

사진은 신라시대의 자유분방한 성 관념과 문화를
짐작하게 해 주는 유물인 토우임.
여성용 자위기구인 각좆도 다수 출토된 바 있다.
숫적으로 따져보자면,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 (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섹스파트너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 그녀가 바로 미실(美室)이다.

요즘 주목 받는 몇몇 여성 정치가들을 두고 언론은 여성 대통령감이라 떠들기도 하고 그네들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란 이유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여성의 인권, 사회적 지위의 큰 상승을 보여준다고 섣불리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가까운 데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는 화랑이 출중했던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대의 여걸 '미실'에게서 진정한 여성 대통령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새삼스럽게 알게 된 미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선 득달같이 외갓집으로 달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방중술을 가르쳐 달라고 떼부터 써야 할까.

를 미실은 타고난 미색과 비전의 절기인 방중술로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 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치열한 궁중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정치가의 필수 덕목인 권력욕을 충당하기 위한 전술로 비장의 기술을 사용했다. 그럼 미실과 같은 직분을 가지고 노력하는 수 많은 다른 여인들과 구별되게 그녀가 남자들을 사로 잡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노통시절, 린다김 같은 로비스트가 무기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고위층을 상대로 로비를 했을적에 당시가 나이는 무려 40대 중반이었다. 영계백숙이나 찾던 그들에게 린다김의 몸로비가 통했던 까닭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나 아닐까.

젊은 처녀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로 볼 때 단지 보편적인 기술이나 미모로 승부했다면 당연히 미실은 젊어서 한때 라면 몰라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테크니션들에게 밀려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구중궁궐내의 수많은 테크니션들 사이에서 미실이 그렇게 독보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비법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언하건데 당대의 미실은 아마도 시대를 초월하는 소위 명기가 아니었을까. 물론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어떤 과정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명기라고 해서 단순히 잘 쪼이는 여자라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진정한 명기는 단순히 쪼이는 힘과 기술이 탁월함 만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사의 어둠을 징식하는 정인숙이나 아니면 요즘도 왕성한 활동으로 빛을 잃지않고 있는 모 여우 정도가 그 정도의 반열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미실이 사실은
이렇게 생겼을 수도 있다.

특유의 섹스어필로 남자들을 꼼작 못 하게 만드는 여인네들의 특성이란 남자를 단순히 조이는 데 있지만은 않고 스스로 오르가슴을 잘 느끼는 데에 있다고 본다.

스스로 절정을 마음껏 조절하고 즐기는 모습에서 시각적으로 남성의 성적 흥분을 최대화 시키는 동시에 남성으로써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한껏 살려주는 것이다.

섹스의 힘을 실제적인 권력으로 까지 연결시키고 남자들로 하여금 일부종사하게 만드는 테크닉이란 잠자리에서 파트너를 쥐었다 놨다 하는 고도의 집중력과 오르가즈믹한 모습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기 흥분에 빠져 이기적인 섹스를 하는 여자일수록 가장 섹시하고 남자를 쫄게 함과 동시에, 폭 빠지게도 한다는 사실은 웬만한 선수라면 다들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결국 테크닉의 기본이자 경쟁력의 핵심 요소는 여성들 스스로의 성감이 얼마나 발달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며, 결국엔 개인 각자 스스로가 먼저 본인의 성감대 찾기에 주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성감대라는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자위를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실이 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방중술을 연마하는데 가장 집중하였을 대목은 바로 자신의 성감대 개발이 아니었을까.

색공(色供)을 통하여 당대의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자유롭게 다가갔던 미실이라는 천년전의 여인을 통하여 우리는 옛 신라의 영화는 물론 그 왕조를 지탱했던 사회구조에 대해서 마치 수렴청정이라도 하는 느낌이 든다.

야후 블러그 / 글 은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