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구촌 좋은인연~♡/♡ 진주정(晉州鄭)

[스크랩] 진주, 진양 정씨 (晉州, 晉陽 鄭氏) 씨족 연원 안내

by 윈도아인~♡ 2007. 10. 13.

氏族 淵源  


  널리 알려진 대로 晋州  晋陽 鄭氏는 同姓同本이면서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8派 晋陽 8鄭가 있다. 元祖는 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村長 중 子山 珍支村의 촌장인 樂浪侯 智伯虎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구의 후대에 와서 晋州 晋陽 鄭氏의 본관ㆍ분파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믿을 만한 문헌은 없다. 이른바 8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鄭藝ㆍ鄭子友ㆍ鄭莊ㆍ鄭櫶을 시조로 하는 4系統으로 대별(大別)하는 것이 通說이다. 忠莊公派는 鄭藝를 시조로 하는데 高麗 門下侍中을 지냈고 후손으로는 文英公 鄭需ㆍ文良公 鄭乙輔ㆍ監正공 鄭吉輔등이 유명하다. 僉正公派는 시조를 鄭仲恭으로 하는데 고려 때 僉正을 지냈으며, 후손으로 忠毅公 鄭起龍이 유명하다. 殷烈公派는 鄭子友를 시조로 하는데 고려 때 戶長을 지냈고, 후손에 은열공 殷烈公 鄭臣烈ㆍ文忠公 鄭天益이 유명했다. 隅谷公派는 鄭溫이 시조인데, 고려 때 大司諫을 지냈다. 御使公派는 鄭澤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때 監察御使를 지냈고, 후손으로 文莊公 大提學 鄭經世가 뛰어난 분이었다. 恭戴公派는 鄭莊이 시조인데, 고려 때 僉樞를 지냈으며, 후손에는 恭戴公 鄭陟ㆍ忠節公 鄭誠謹ㆍ忠景公 鄭百亨이 유명하다. 祗侯公派의 시조는 鄭侁으로, 고려 때 祗侯에 오른 분이다. 內府事公派는 鄭安校를 中祖로 하는데,. 고려 때 判內府事를 지낸 분이다. 이렇듯 忠莊公派의 鄭藝는 다른 분들보다 앞선 시대에 나온 분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晋州 8鄭이 모두 鄭藝의 후손이라는 생각 아래 ‘大同譜’ 편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鄭藝의 후손이 8파로 나눠졌다는 文獻등 자료가 없어 아직 실현이 못되고 있고, 同祖라는 인식도 없는 상태다. 本編에서는 이런 사정을 감안 8派를 독립 소개하면서도, 등과인명ㆍ역대인물ㆍ閥閱등은 하나로 정리하였다.

 

예계藝系

시조 정예(鄭藝)의 호(號)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영절(英節)이다.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 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祿)편에 보면, 시조로부터 제학공(提學公)까지는 중간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어 제학공(提學公)을 1세로 계대(系代)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제학공 정시양(提學公 鄭時陽)인데, 그는 고려 문종조에 금자광록대부 보문각대제학(金紫光祿大夫 寶文閣大提學)을 지낸 분이다.

 

자우계子友系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의 6세손이며 고려조 현종 때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또는 8세손 좌우위보승중랑장 정진경(左右衛保勝中郞將 鄭晋卿)을 중조(中祖)로 삼는 파가 있다. 역대 인물 중 정진경(鄭晋卿)의 4세손 정천익(鄭天益)은 고려 공민왕 때 판부사(判府事)를 지냈는데, <물레>와 <씨앗>을 창안(創案)하여 이름을 떨쳤다.

 

헌계系

시조 정헌(鄭櫶)은 고려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장손(長孫) 온(溫 호(號): 우곡(隅谷))은 고려 말에 대사헌(大司憲)을, 차손(次孫) 택(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한편 정택(鄭澤)을 중조(中祖)로 하는 1파(派)가 있는데, 그의 10세손 정경세(鄭經世 문장공(文莊公))은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이외에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정효안(鄭孝安)ㆍ정지원(鄭知源)ㆍ정지정(鄭之貞)ㆍ정전(鄭?)ㆍ정지경(鄭芝卿)ㆍ정균(鄭均)ㆍ정송익(鄭松益)ㆍ정이(鄭貽)ㆍ정광원(鄭廣元)ㆍ정개(鄭愷)ㆍ정방진(鄭邦振)ㆍ정득훤(鄭得萱)ㆍ정지(鄭漬)등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가 있다고 하나 전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고, 대개 이상의 4파(派)에 합류ㆍ동보(同譜)한 상태이다.

 

장계莊系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고, 그의 4세(世)손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5세손 정성근(鄭誠謹 충절공(忠節公))은 성종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또 공대공 정척(恭戴公 鄭陟)을 중조(中祖)로 삼는 1파(派)도 있다.
 
本貫地 年革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다. 본래 백제의 겨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이 빼앗아 주(州)를 설치하였고, 신문왕때 거타주(居陀州)를 분할하여 진주총관(晋州摠管)을 서리하였으며, 경덕왕때는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고려조 성종 2년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 진주(晋州)로 고쳐 절도사(節度使)를 두었고, 현종 때는 안무사(安撫使)로 개칭하였는데,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조선조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으며, 태종때는 지금 명칭으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다.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39년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1949년 시(市)로 되고 나머지는 진양군(晋陽郡)으로 하였다. 주용 성씨로는 정(鄭)ㆍ강(姜)ㆍ하(河)ㆍ류(柳)ㆍ임(任)ㆍ강(康)ㆍ임(林)ㆍ주(周)씨 등이 있다.
派名錄 
 
영절공파(英節公派)ㆍ은열공파(殷烈公派)ㆍ진산부원군파(晋山府院君派)ㆍ첨정공파(僉正公派)ㆍ지후공파(祗侯公派)
 
主要 勢居地 
 
대표적 집성촌인 전남 나주군 봉활면 철천리(羅州郡 鳳凰面 鐵川里). 속칭 철야(鐵冶)마을이다. 덕용산(德龍山) 기슭 아늑한 분지에 1백여 호 진주정씨(晋州鄭氏)가 처마를 맞댔다.
면(面)소재지에서 비포장도로로 12km 남짓한 거리로 4백년 연륜을 자랑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속에 철야마을은 묻혀 있다. 마을 입구에 지붕을 드리운 만호정(挽湖亭)은 이 마을 유림들이 산수를 읊으며 노닐었던 유서 깊은 사교장이다. 일제 아래 철야마을은 나주(羅州)지방 레지스탕스의 본거지였다. 마을 출신 정도희(鄭燾希)ㆍ도홍(燾洪) 형제 등 9명이 하일단체인 <유신계(維新契)>를 조직, 창씨개명반대ㆍ일본인 학교입학 거부ㆍ의병활등 등으로 끈질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마을 뒤 덕용산(德龍山)은 피비린내 나는 의병 전적지다. 나주군(羅州郡)일대의 의병들은 산세가 험한 덕룡산에 숨어 일본군과 대치하며 전투를 계속했고, 밤이면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찐 감자 등 먹을 것을 감춰 산으로 날랐다고 전한다. 최근 들어 철야(鐵冶)는 술 없는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정풍회’를 조직 <알콜종자>를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자랑이다

氏族史 
 
관향 진주(晋州)는 고려조 역대 선조들의 세거지다. 진주정씨(晋州鄭氏)는 고려의 개국에 참여한 집안으로 고려조에 이미 수많은 인재를 냈다. 정시양(鄭時陽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정신열(鄭臣烈 병부상서(兵部尙書))ㆍ정임덕(鄭任德 판도판서(版圖判書))ㆍ정유(鄭愈 예의판서(禮儀判書))ㆍ정홍단(鄭洪旦 대제학(大提學))ㆍ정수규(鄭守珪 내부령(內府令))ㆍ정연(鄭椽 삼사부사(三司副事))ㆍ정천익(鄭天益 (판부사(判府事))ㆍ정을보(鄭乙輔 찬성사(贊成事))ㆍ정세(통례지후(通禮祗侯))ㆍ정진경(鄭晋卿 중랑장(中郞將))ㆍ정유(鄭裕 좌시중(左侍中))ㆍ정균(鄭均 내급사(內給事))ㆍ정손(鄭? 종부시승(宗簿寺丞))ㆍ정중소(鄭仲紹 태자첨사(太子詹事))ㆍ정근(鄭懃 전교부령(典校副令))ㆍ정석(鄭碩 평장사(平章事))ㆍ정안사(鄭安社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ㆍ정수(鄭需 대제학(大提學))ㆍ정천덕(鄭天德 부사(府使))ㆍ정신중(鄭臣重 찬성사(贊成事))ㆍ정신열(鄭臣烈 병부상서(兵部尙書))ㆍ정현취(鄭玄就 방어사(防禦使))ㆍ정인덕(鄭仁德 참판(參判))ㆍ정거중(鄭居中 문하시중(門下侍中))ㆍ정국유(鄭國孺 평장사(平章事))ㆍ정길보(鄭吉輔 선공감정(繕工監正))ㆍ정온(鄭溫 대사헌(大司憲))등이 고려의 진주정씨(晋州鄭氏) 얼굴들이다. 이들 중 정천익(鄭天益)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사위와 함께 목화 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정천익(鄭天益)은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하여 판부사(判府事), 전객령(典客令)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정문래(鄭文來)는 소사거(?絲車 물레)와 취자거(取子車)를 통한 제사법(製絲法)을 고안했고, 손자 정문영(鄭文英)은 면포 짜는 법을 개발하는 등 3대에 걸친 연구ㆍ보급으로 후인들이 무명옷과 솜이불 등으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정신열(鄭臣烈)은 현종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당시 불교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그 보급에 힘썼다. 거란족의 칩입 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토벌에 나서는 등 문ㆍ무를 겸한 인물로 거란 평정의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金紫光祿大夫 晋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아들 정현취(鄭玄就)는 벙어사(防禦使)로 활약, 지금의 소남(召南 진주(晋州)부근)을 <방어사터>라고 함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정수규(鄭守珪)는 동국 8현(東國 8賢)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안향(安珦)의 사위이고, 정을보(鄭乙輔)는 충숙왕 때 국사시(國士試)에 장원으로 합격 당대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충혜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뒤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고려 말 창왕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정온(鄭溫)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로 가문의 절의를 지켰다. 그는 당시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쿠데타로 정계가 어지럽자 소경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智異山 靑鶴洞)에 은거했다. 조선개국 후 왕위에 오른 이성계(李成桂)가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않겠다고 끝내 장님 행세를 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포은(圃隱)의 死(정몽주(鄭夢周)의 죽음)>, <야은(冶隱)의 거(去) (길재(吉再)의 은거)>에 비겨 <우곡(隅谷)의 맹(盲) (정온(鄭溫)의 눈멈)>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조선개국 후에도 탄탄한 인맥을 형성했다.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鄭以五)와 그의 아들 정분(鄭?), 그리고 정척(鄭陟)등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이오(鄭以吾)는 자(字)가 수가(粹可)요, 호(號)가 교은(郊隱)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때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수찬(修撰)에 참여 했으며,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문장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시를 잘 지어 진주(晋州)의 촉석루에 친필시가 현판으로 새겨져 걸려 있으며, 저서로‘교은집(郊隱集)’, ‘화약고기(火藥庫記)’등을 남겼다. 경남 창원(昌原)의 구암서원(龜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분(鄭?)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다 숨진 단종조의 명신이다. 문종은 어린 세자(단종)를 남겨 놓고 숨을 거두면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 두 정승과 정분(鄭? 당시 좌찬성(左贊成))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라고 명했다. 그 후 정분(鄭?)은 우의정에 오르고 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경상도(慶尙道)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지방 순시에 나섰다. 이때(1453년)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황보(皇甫) 김(金) 두 정승은 수양대군 일파에 죽음을 당하고 정분(鄭?)은 처음에는 낙안(樂安)으로, 이어 광양(光陽)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공주(公州) 요당서원(?堂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는 당시 수양의 측근이었던 정인지(鄭麟趾)는 수양대군 옹립 모의를 하면서 “천하의 인심이 수양대군에게 기울고 있는데 형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라는 내용의 서신을 정분(鄭?)에게 띄워 은근히 그의 협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한마디로 이를 거절 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귀양지에 있는 동안에도 늘 조상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수행하는 중에게 밥을 짓게 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 서울로부터 관원이 내려와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며 그의 충절을 기리는 불조묘(不?廟)가 충남 공주군 사곡면 호계리(公州郡 寺谷面 虎溪里)에 있다. 세조~성종조의 청백리요,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정척(鄭陟)의 가문은 <효(孝)>로서 문중을 빛냈다. 정척(鄭陟)은 태종 때 무년문과(武年文科)에 급제한 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감찰(監察), 예조정랑(禮曹正郞),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등을 거쳐 세종 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후 공조(工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참의(參議), 예조참판(禮曹參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거쳐 단종 때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세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성종 때는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올랐으며, 서예, 특히 해서(楷書)에 능해서 옥쇄와 관인의 글자를 거의 그가 썼다.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1463년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撰進)했고, 현재 종묘 안에 있는 장생전(長生殿)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그가 국왕에게 건의,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지산(鄭之産)의 호는 포옹(逋翁),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버지 충장공(忠莊公)이 화를 입자 김시습(金時習)등과 공주 동학사(公州 同鶴寺)에 초혼각(招魂閣)을 세웠고 단종을 위해 3년동안 복상(服喪)하는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고종 때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고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졌으며, 공주 요당서원(公州 蓼堂書院)에 향사되었다. 성종 때의 청백리요, 유명한 효자였던 정성근(정성근 충절공(충절공))은 정섭(정섭)의 아들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지평(持平), 해주목사(海州牧使)등을 지내고 승지(承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는데, 성종이 세상을 뜨자 연산군(燕山君)의 폭정 속에서도 홀로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치렀다. 당시 연산군(燕山君)은 전군에<단상법(短喪法) 시행>을 명령했으나, 정성근(鄭誠謹)은 이를 거부하고 성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한 연산군은 갑자사화(甲子士禍)때 그를 처형했다. 그 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이조판서(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내려졌다. 그의 아들 정주신(鄭舟臣 承文院博士)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효수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식음을 전폐, 끝내 굶어죽었다. 뒤에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효행을 표창하였다. 정성근(鄭誠謹)의 일가는 대대로 효행으로 이름나, 정주신(鄭舟臣)의 아우 정매신(鄭梅臣 중종조ㆍ판관(判官)ㆍ청백리(淸白吏)), 정매신(鄭梅臣)의 아들 정원서(鄭元瑞), 주신(舟臣)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린(鄭元麟)의 아들 정효성(鄭孝成 관찰사(觀察使))등이 모두 효자로 가문을 빛냈다.
정효성(鄭孝成)의 아들 정백창(鄭百昌)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대북(大北)일파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올렸다가 파직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된 뒤 부수찬(副修撰)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ㆍ사가독서(賜暇讀書)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가쳐 도승지(都承旨)ㆍ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에 이르는 등 이름을 청사에 빛냈으며, ‘현곡집(玄谷集)’을 남겼다. 또 정백창(鄭百昌 충경공(忠景公))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 弼善), 봉교(奉敎)등을 지내고 원종(인조(仁祖)의 아버지)추존을 반대하다가 한때 관직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어 이조정랑(吏曹正郞),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이 일어나자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섬이 함락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충신정문(忠臣旌門)이세워져 충절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진주정씨(晋州鄭氏) 가문이 낳은 대표적인 학자로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있다.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의 수제자인 그는 당대의 뛰어난 성리학자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를 형성한 인물이다.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승문원부정자(承文院 副正字) 검열(檢閱), 사가독서(賜暇讀書) 등을 거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수찬(修撰)ㆍ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등을 역임했으나, 광해군 때 권신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삭직되기도 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겸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大邱)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慶山)의 고산서원(孤山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등에 제향됐고, 저서로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을 남겼다.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鄭起龍)장군도 배놓을 수 없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尙州城) 탈환전투, 정유재란 때의 성주(星州)ㆍ협천(陜川)ㆍ초계(草溪)ㆍ의령성(宜寧城)탈환 전투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수군절제사(慶尙右道水軍節制使)가 되어 남해안을 방어하다 통영(統營)진중에서 숨졌다. 그는 곤양(昆陽) 출신이어서 일분 문헌에는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다. 정명세(鄭名世 해미현감(海美縣監)ㆍ임진왜란 공신) 정감(鄭? 학자 ㆍ의무원종(宜武原從 일등공신), 정사제(정사제 임진왜란 공신ㆍ부수찬(副修撰)에 추증), 정귀세(鄭貴世 봉사(奉事))등도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전장에서 순절했다. 뿐만 아니라 정천향(鄭天鄕 참판(參判)) 정원향(鄭元鄕 군수(郡守)), 정승서(鄭承緖 중추부사(中樞府事)) 정약(鄭若 감찰(監察)) 정설(鄭說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도 임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밖에 조선조의 인물로는 인조(仁祖)때 문과 급제하여 효종(孝宗)때 감찰(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 첨지중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른 정필달(鄭必達), 효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곤직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고령 5현(高靈 5賢)의 하나로 꼽힌 정사현(鄭師賢),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입재집(立齋集)’이란 저서를 남긴 정종로(鄭宗魯)등을 꼽을 수 있다. 정희면(鄭熙冕), 정도희(鄭燾希)ㆍ도홍(燾洪)형제 등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던 당시 항일투쟁에 나선 인물들이다. 정희면(鄭熙冕)은 원래 성리학에 능한 학자이나, 1905년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아 1907년 영광(靈光)에서 왜적과 싸우는 등 항일 운동을 벌였으나 도희(燾希)형제는 선동(船洞), 철천(鐵川)등지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웠다.


항렬표(行列표)

(예계(藝系)) 세(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자(字) 헌(憲) 희(喜) 종(鍾) 순(淳) 근(根) 묵(?) 치(致) 선(善) 해(海) 래(來) 대(大)

(자우계(子友系)) 세(世)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자(字) 주(周) 종(鍾) 영(永) 병(秉) 덕(悳) 균(均) 흠(欽) 호(浩) 근(根) 희(熙) 배(培)

세(世) 39 40 41 42 43 44 45
자(字) 진(鎭) 순(淳) 병(柄) 휴(烋) 시(時) 용(鎔) 제(濟)

(중공계(仲恭系)) 세(世)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자(字) 주(柱) 병(炳) 기(基) 호(鎬) 영(泳) 식(植) 섭(燮) 재(在) 석(錫) 태(泰)

(장계(莊系)) 세(世)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자(字) 화(和) 용(容) 기(基) 현(鉉) 수(洙) 동(東) 환(煥) 교(敎) 석(錫) 석(錫) 주(柱)

세(世) 31 32 33
자(字) 휴(烋) 규(圭) 용(鏞)

(헌계(櫶系)) 세(世) 31 32 33 34 35
자(字) 환(煥) 묵(?) 규(圭) 재(在) 호(鎬) 용(鎔) 영(永) 주(注) 병(炳) 영(榮)

세(世) 31 32 33 34 35
자(字) 희(熙) 휴(烋) 기(基) 곤(坤) 석(錫) 전(銓) 구(求) 여(汝) 근(根) 계(桂)

세(世) 31 32 33
자(字) 훤(煊) 현(炫) 요(堯) 균(均) 진(鎭) 종(鐘)

(택계(澤系)) 세(世) 31 32 33 34 35 36
자(字) 민(民) 우(愚) 동(東) 묵(?) 재(在) 진(鎭)
 
고려조
정예(鄭藝 호(號): 백곡(栢谷)ㆍ諡號: 영절(英節)ㆍ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정수(鄭需 시호(詩號): 문영(文英)ㆍ대제학(大提學))
정을보(鄭乙輔 호(號): 면재(勉齋)ㆍ시호(諡號): 문량(文良)ㆍ청천군(靑川郡)ㆍ정당문학(政堂文學))
정천덕(鄭天德 부사(府使))
정자우(鄭子友 호(號): 봉산(鳳山)ㆍ호장(戶長))
정신열(鄭臣烈 호(號): 관정(官亭)ㆍ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ㆍ병부상서(兵部尙書))
정진경(鄭晋卿 중랑장(中郞將))
정진황(鄭晋璜 중랑장(中郞將))
정천익(鄭天益 호(號): 퇴헌(退軒)ㆍ시호(諡號):문충(文忠) 판부사(判府事))
정장(鄭莊 중추원사(中樞院事))
정헌(鄭櫶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ㆍ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정온(鄭溫 호(號):우곡(隅谷)ㆍ대사간(大司諫)
정택(鄭澤 감찰어사(監察御使))
정중공(鄭仲恭 첨정(僉正))
정천귀(鄭天貴 호(號): 동은(東隱)ㆍ삼사좌윤(三司左尹))
정작(鄭作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ㆍ중랑장(中郞將))
정신중(鄭臣重 찬성사(贊成事))
정식(鄭湜 호(號): 우곡(愚谷)ㆍ좌윤(左尹) )

 

▲ 조선조
정이오(鄭以吾 자(字):粹可ㆍ호(號):교은(郊隱)ㆍ시호(諡號): 문정(文定)ㆍ대제학(大提學))
정분(鄭? 자(字): 자빙(子■)ㆍ호(號): 애일당(愛日堂)ㆍ시호(諡號): 충장(忠莊)ㆍ우의정(右議政))
정지산(鄭之産 호(號): 포옹(逋옹)ㆍ호조정랑(戶曹正郞))
정광원(鄭廣元 경승부승(敬丞府丞))
정은(鄭垠 형조참의(刑曹參議))
정유산(鄭惟産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정계도(鄭啓道 대사간(大司諫))
정사현(鄭思顯 자(字): 백징(伯徵)ㆍ지평(持平))
정천경(鄭天卿 호(號):무동(茂東)ㆍ군수(郡守))
정윤표(鄭允彪 호(號): 석서당(錫鋤堂)ㆍ참판(參判))
정건(鄭? 판서(判書))
정사제(鄭思悌 자(字): 유인(幼仁) 호(號): 오봉(五峰)ㆍ교감(校勘))
정승서(鄭承緖 중추부사(中樞府事))
정감(鄭? 자(字): 옥형(玉馨)ㆍ호(號): 신재(愼齋)ㆍ학자(學者))
정약(鄭若 자(字): 순승(順勝)ㆍ감찰(監察))
정설(鄭說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정성(鄭晟 자(字):문거(文擧)ㆍ호(號):곡구(谷口)ㆍ설서(說書))
정민헌(鄭民獻 자(字):성원(聖元)ㆍ직강(直講))
정기태(鄭期泰 자(字):태연(泰然)ㆍ전적(典籍))
정건주(鄭建周 자(字):방언(邦彦)ㆍ사예(司藝))
정몽해(鄭夢海 자(字):대관(大觀)ㆍ정랑(正郞))
정택신(鄭宅臣 자(字):용관(用寬)ㆍ현감(縣監))
정명세(鄭名世 자(字):백시(伯時)ㆍ현감(縣監))
정흔(鄭昕 자(字):여빈(汝賓)ㆍ호(號):삼일재(三一齋)ㆍ감찰(監察))
정수(鄭璲 자(字):자장(子章)ㆍ호(號):문헌(文軒)ㆍ좌랑(佐郞))
정원룡(鄭元龍 교관(敎官))
정대권(鄭大權 자(字): 성중(聖仲)ㆍ호(號):인암(仁岩)ㆍ의관(議官))
정밀(鄭密 자(字):숙성(叔成)ㆍ호(號):삼계(三溪)ㆍ군수(郡守))
정대수(鄭大受 자(字):영노(榮老)ㆍ호(號):오봉(鰲峰)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필달(鄭必達 호(號):팔송(八松)ㆍ사예(司藝))
정린상(鄭麟祥 자(字): 인백(仁伯)ㆍ중추부사(中樞府事))
정규영(鄭奎榮 자(字):치형(致亨)ㆍ호(號):한재(韓齋)ㆍ비서감승(秘書監丞))
정재성(鄭載星 자(字): 취오(聚五)ㆍ호(號):구재(苟齋)ㆍ참봉(參奉))
정척(鄭陟 자(字): 명지(明之)ㆍ호(號): 정암(整庵)ㆍ시호(諡號): 공재(恭載)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성근(鄭誠謹 자(字):이신(而信)ㆍ시호(諡號):충절(忠節)ㆍ직제학(直提學))
정주신(鄭舟臣 자(字):제옹(濟翁)ㆍ박사(博士))
정매신(鄭梅臣 판관(判官))
정효성(鄭孝成 관찰사(觀察使))
정사량(鄭思亮 자(字):집중(執中)ㆍ사간(司諫))
정백창(鄭百昌 자(字):덕여(德餘)ㆍ호(號):현곡(玄谷)ㆍ도승지(都承旨))
정백형(鄭百亨 자(字):덕후(德後)ㆍ시호(諡號):충경(忠景)ㆍ장령(掌令))
정선명(鄭善鳴 자(字):성원(聲遠)ㆍ양사(兩司))
정경세(鄭經世 자(字):경임(景任)ㆍ호(號):우복(愚伏)ㆍ시호(詩號):문장(文莊)ㆍ대제학(大提學))
정비(鄭? 자(字):문중(文仲)ㆍ한림(翰林))
정도응(鄭道應 자(字):풍휘(風輝)ㆍ호(號):무■재:(無■齋)ㆍ자의(諮義))
정종로(鄭宗魯 자(字): 사경(士卿)ㆍ호(號):입재(立齋)ㆍ학자(學者))
정우묵(鄭佑? 자(字):천필(天必)ㆍ승지(承旨))
정기룡(鄭起龍 자(字):경운(景雲)ㆍ호(號):매헌(梅軒)ㆍ시호(諡號):충의(忠毅)ㆍ통제사(統制使))


등과(登科)ㆍ음사(蔭仕) 인명(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정을보(鄭乙輔 충숙왕조)
정이오(鄭以吾 공민왕조)

▲조선조
문과(文科)
정광원(鄭廣元 경승부승(敬承府丞))
정척(鄭陟 한성판윤(漢城判尹))
정분(鄭? 우상(右相))
정은(鄭垠 황감(황감))
정유산(鄭惟産 교감(校勘))
정성근(鄭誠謹 직제학(直提學))
정침(鄭? 修撰)
정치형(鄭致亨)
정매신(鄭梅臣 박사(博士))
정사량(鄭思亮 사간(司諫))
정사현(鄭思顯 지평(持平))
정밀(鄭密 첨정(僉正))
정명세(鄭名世 현감(縣監))
정경세(鄭經世 판서(判書))
정사제(鄭思悌 교감(校勘))
정백창(鄭百昌 경감(京監))
정흔(鄭昕 감찰(監察))
정성(鄭晟 설서(설서))
정비(鄭? 한림(翰林))
정백형(鄭百亨 장령(掌令))
정필달(鄭必達 사예(司藝))
정기태(鄭期泰 전적(典籍))
정동망(鄭東望)
정선명(鄭善鳴 양사(兩司))
정건주(鄭建周 사예(司藝))
정몽해(鄭夢海 禮正)
정태주(鄭泰周)
정태형(鄭泰亨)
정재춘(鄭再春 병좌(丙坐))
정동한(鄭東翰 찰방(察訪))
정휘진(鄭彙晉 예좌(禮佐))
정택신(鄭宅臣 현감(縣監))
정중록(鄭重祿 도사(都事))
정유(鄭濡 장령(掌令))
정겸제(鄭兼濟)
정형신(鄭衡臣 첨지(僉知))
정덕수(鄭德洙 병좌(兵佐))
정징최(鄭徵最)
정계충(鄭繼忠 지평(持平))
정윤중(鄭允中)
정수(鄭璲)
정종학(鄭鍾學 승지(承旨))
정동규(鄭東奎 수찬(修撰))
정두흠(鄭斗欽 지평(持平))
정희동(鄭熙東 정언(正言))
정석오(鄭錫五 지평(持平))
정겸식(鄭謙植)
정재감(鄭在鑑 교리(郊理))
정민헌(鄭民獻 직강(直講))
정성일(鄭誠一 병참(兵參))
정의묵(鄭宜? 승지(承旨))
정우묵(鄭佑? 참의(參議))
정하묵(鄭夏? 승지(承旨))
정규삼(鄭圭三 승지(承旨))
정과병(鄭過炳)
정석유(鄭錫瑜)
정상추(鄭象樞)
정윤(鄭潤)

음사인명(蔭仕人名)

정유(鄭裕 시중(侍中))
정균(鄭均 내급사(內給事))
정중소(鄭仲紹 태자첨사(太子詹事))
정홍단(鄭洪旦 제학(提學))
정안사(鄭安社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정수(鄭需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ㆍ시(諡) 문영(文英))
정수규(鄭守珪 내부령(內府令))

정■(정■ 삼사부사(三司副事))
정을보(鄭乙輔 청천군(靑川郡)ㆍ시(諡): 문량(文良))
정천덕(鄭天德 부사(府使))
정중신(鄭臣重 찬성사(贊成事))
정이오(鄭以吾 대제학(大提學)ㆍ시(諡):문정(文定))
정명원(鄭名遠 현감(縣監))
정명홍(鄭名弘 진사(進士))
정명진(鄭名振 부사(府使))

정■(정■ 진사(進士))
정규환(鄭奎煥 진사(進士))
정인관(鄭麟寬 사과(司果))
정인보(鄭仁普 진사(進士))
정기충(鄭基忠 통정(通政))
정철주(鄭哲周 동지(同知))
정제하(鄭濟夏 가선(嘉善))
정홍식(鄭弘植 의관(議官))
정해붕(鄭海鵬 참봉(參奉))
정윤(鄭潤 참봉(參奉))
정명현(鄭名賢 봉사(奉事))
정곤수(鄭崑秀 판관(判官))
정상흠(鄭尙欽 첨추(僉樞))
정견룡(鄭見龍 병사(兵使))
정홍례(鄭弘禮 부정(副正))
정원표(鄭源表 통정(通政))
정명근(鄭明根 의관(議官))
정명룡(鄭名龍 봉사(奉事))
정종로(鄭宗魯 동추(同樞))
정중(鄭重 동추(同樞))
정극량(鄭極良 동추(同樞))
정방공(鄭邦公 동추(同樞))
정우흠(鄭禹欽 참봉(參奉))
정방룡(鄭邦龍 통정(通政))
정유흠(鄭瑜欽 오위장(五衛將))
정천흠(鄭天欽 감찰(監察))
정감(鄭? 진사(進士)ㆍ임진공신(壬辰功臣))
정응순(鄭應順 참봉(參奉))
정봉신(鄭鳳信 참정(參政))
정덕효(鄭德孝 증참판(贈參判))
정해귀(鄭海龜 동추(同樞))
정경식(鄭慶植 교관(敎官))
정해규(鄭海圭 참봉(參奉))
정방두(鄭邦斗 참봉(參奉))
정방량(鄭邦亮 도사(都事))
정순(鄭蓴 이좌(吏佐))
정득이(鄭得而 정랑(正郞))
정국상(鄭國祥 집의(執義))
정원초(鄭元招 직장(直長))
정숙인(鄭淑仁 생원(生員))
정기손(鄭麒孫 훈도(訓導))
정인손(鄭麟孫 좌부장(左部將))
정겸(鄭謙 첨정(僉正))
정관(鄭瓘 판관(判官))
정계현(鄭啓賢 감찰(監察))
정숙현(鄭淑鉉 도정(都正))
정호윤(鄭浩胤 교관(敎官))
정천귀(鄭天貴 도총제(都總制))
정주(鄭 澍 좌찬성(左贊成)
정황(鄭璜 진양군(晋陽君)ㆍ시(諡):충장(忠莊))
정함도(鄭咸道 현령(縣令))
정유(鄭維 현감(縣監))
정면(鄭綿 현감(縣監))
정덕신(鄭德新 지사(知事))
정계동(鄭繼童 찬성(贊成))
정륜석(鄭崙石 현감(縣監))
정청석(鄭靑石 부호군(副護軍))
정신(鄭伸 부장(部將))
정종필(鄭宗弼 사평(司評))
정함일(鄭咸一 찰방(察訪))
정칭(鄭秤 부호군(副護軍))
정만달(鄭萬達 통덕랑(通德郞))
정윤성(鄭潤誠 통훈(通訓))
정지각(鄭之珏 비승(秘丞))
정종훈(鄭鍾勳 의관(議官))
정치규(鄭致奎 동지(同知))
정종윤(鄭鍾允 가선(嘉善))
정명성(鄭明誠 정랑(正郞))
정지예(鄭之璿 정랑(正郞))
정두원(鄭斗源 가선(嘉善))
정홍식(鄭洪植 참봉(參奉))
정문규(鄭文奎 가선(嘉善))
정수원(鄭洙源 가선(嘉善))
정상렴(鄭相濂 의관(議官))
정희득(鄭希得 진사(進士))

정■(정■ 진사(進士))
정조규(鄭祚奎 가선(嘉善))
정종관(鄭鍾寬 통정(通政))
정각원(鄭珏源 통정(通政))
정호원(鄭浩源 통정(通政))
정돈휴(鄭敦休 참봉(參奉))
정성휴(鄭成休 참봉(參奉))
정치휴(鄭致休 참봉(參奉))
정복일(鄭復一 첨추(僉樞))
정덕휴(鄭德休 사마(司馬))
정계홍(鄭啓弘 통덕랑(通德郞))
정석명(鄭錫明 교관(敎官))
정기현(鄭奇鉉 참봉(參奉))
정승정(鄭承貞 첨추(僉樞))
정충량(鄭忠良 주부(主簿))
정득량(鄭得良 부장(部將))
정대명(鄭大鳴 직장(直長))
정환(鄭? 동추(同樞))
정시현(鄭時賢 통정(通政))
정정렬(鄭正烈 가선(嘉善))
정창규(鄭彰奎 가선(嘉善))
정안규(鄭安奎 가선(嘉善))
정영규(鄭榮奎 가선(嘉善))
정순열(鄭順烈 가선(嘉善))
정종욱(鄭鍾昱 감역(監役))
정종숙(鄭鍾淑 참봉(參奉))
정종철(鄭鍾喆 참봉(參奉))

정■(정■ 교관(敎官))
정중렬(鄭重烈 가선(嘉善))
정화규(鄭樺奎 도정(都正))
정종현(鄭鍾鉉 도정(都正))
정진원(鄭進源 의관(議官))
정동수(鄭東璲 참봉(參奉))
정항규(鄭恒奎 주부(主簿))
정종옥(鄭鍾玉 참봉(參奉))
정장원(鄭壯源 참봉(參奉))
정태하(鄭泰夏 감찰(監察))
정기학(鄭基學 가선(嘉善))
정종길(鄭鍾吉 참봉(參奉))
정만철(鄭萬澈 참봉(參奉))
정인동(鄭寅東 참봉(參奉))
정몽국(鄭夢國 참봉(參奉))
정만철(鄭萬澈 가선(嘉善))
정관휴(鄭寬休 참봉(參奉))
정종인(鄭鍾仁)
정임철(鄭壬澈 가선(嘉善))
정민구(鄭民矩 참봉(參奉))
정우열(鄭宇烈 감찰(監察))
정한규(鄭漢奎 승지(承旨))
정종순(鄭鍾順 참봉(參奉))
정종필(鄭鍾弼 참봉(參奉))
정순원(鄭順源 동돈령(同敦寧))
정주(鄭紬 현령(縣令)
정이방(鄭以方 부사(府使))
정서동(鄭緖童 통덕랑(通德郞))
정경(鄭? 감정(監正))
정우신(鄭又新 통정(通政))
정억상(鄭億尙 판관(判官))
정일한(鄭日漢 오위장(五衛將))
정억(鄭億 판관(判官))
정수일(鄭守一 참봉(參奉))
정양(鄭暘 참봉(參奉))
정봉휴(鄭鳳休 가선(嘉善))
정세거(鄭世擧 부호군(副護軍))
정휘(鄭煇 증복정(贈僕正))
정덕원(鄭德源 가선(嘉善))
정유일(鄭惟一 참봉(參奉))
정사일(鄭思一 주부(主簿))
정준일(鄭遵一 부호군(副護軍))
정현(鄭晛 진사(進士))
정병순(鄭秉恂 도사(都事))
정종호(鄭鍾鎬 통정(通政))
정석원(鄭錫源 가선(嘉善))
정창근(鄭彰根 참봉(參奉))
정삼원(鄭三源 가선(嘉善))
정성효(鄭誠涍 가선(嘉善))
정형식(鄭衡植 가선(嘉善))
정연주(鄭然周 참봉(參奉))
정현중(鄭炫重 도정(都正))
정자순(鄭子淳 공참(工參))
정설(鄭舌 호판(戶判))
정공근(鄭恭謹 司直)
정충근(鄭忠謹 예판(禮判))
정안경(鄭安敬 판추(判樞))
정유주(鄭由周 병판(兵判))
정문백(鄭文伯 직장(直長))
정희필(鄭希弼 사직(司直))
정여집(鄭汝輯 직장(直長))
정대훈(鄭大訓 참봉(參奉))
정동호(鄭東濠 통정(通政))
정동학(鄭東鶴 도정(都正))
정여주(鄭汝柱 참봉(參奉))
정대유(鄭大有 호정(戶正))
정윤조(鄭胤祖 판관(判官))
정윤모(鄭胤謨 첨추(僉樞))
정윤선(鄭胤先 통정(通政))
정서화(鄭曙和 참봉(參奉))
정찬화(鄭瓚和 군수(郡守))
정운복(鄭運馥 참봉(參奉))
정준화(鄭準和 감찰(監察))
정치재(鄭致載 감찰(鑑察))
정운익(鄭運翼 참판(參判))
정응기(鄭應基 참봉(參奉))
정주신(鄭舟臣 박사(博士))
정원린(鄭元麟 참봉(參奉))
정효성(鄭孝誠 감사(監司))
정덕방(鄭德方 통덕랑(通德郞))
정치동(鄭致童 무공랑(務功郞))
정강(鄭崗 진사(進士))
정인후(鄭仁厚 참봉(參奉))
정세좌(鄭世佐 동지(同知))
정세화(鄭世華 가선(嘉善))
정귀현(鄭貴顯 선전(宣傳))
정백교(鄭伯僑 종사랑(從仕郞))
정시범(鄭時範 판관(判官))
정시홍(鄭時洪 가선(嘉善))
정인대(鄭仁大 통정(通政))
정연복(鄭連復 도정(都正))
정기일(鄭基一 도정(都正))
정원일(鄭源一 동돈(동돈))
정인식(鄭仁植 도정(都正))
정인상(鄭仁相 감찰(監察))
정창흠(鄭昌欽 오위랑(五衛郞))
정한수(鄭漢守 참봉(參奉))
정학원(鄭鶴源 통정(通政))
정은성(鄭銀成)
정은교(鄭銀僑 현감(縣監))
정주원(鄭?源 참봉(參奉))
정인모(鄭仁模 진사(進士))
정종로(鄭宗魯 지평(持平))
정상진(鄭象晋 진사(進士))
정작(鄭作 부원군(府院君))
정종오(鄭從吾 현감(縣監))
정성오(鄭省吾 목사(牧使))
정오(鄭晤 병참(兵參))
정완(鄭浣 군사(郡事))
정득란(鄭得蘭 판서(判書))
정득훤(鄭得萱 참의(參議))
정득혜(鄭得蕙 현감(縣監))
정득손(鄭得蓀 군사(郡事))
정첨(鄭瞻 군사(郡事))
정건(鄭蹇 목사(牧使))
정량(鄭亮 목사(牧使))
정설(鄭泄 대사간(大司諫))
정호(鄭浩 부사(副使))
정숙(鄭淑 사직(司直))
정수성(鄭秀性 목사(牧使))
정혜(鄭蕙 지평(持平))
정여(鄭? 대사성(大司成))
정온(鄭蘊 대사간(大司諫))
정효안(鄭孝安 목사(牧使))
정소지(鄭紹智 주부(主簿))
정장수(鄭長壽 첨추(僉樞))
정사서(鄭嗣瑞 현감(縣監))
정사희(鄭嗣禧 사직(司直))
정숭재(鄭崇載 지평(持平))
정인원(鄭仁源 군수(郡守))
정이청(鄭以淸 부사직(副司直))
정인형(鄭仁亨 판관(判官))
정의형(鄭義亨 부사(府使))
정계증(鄭繼曾 감찰(監察))
정세(鄭洗 현감(縣監))
정온(鄭溫 첨사(僉使))
정언(鄭■ 주부(主簿))
정경(鄭涇 어모(禦侮))
정기(鄭磯 현감(縣監))
정세구(鄭世球 목사(牧使))
정희소(鄭希韶 현감(縣監))
정사회(鄭思晦 도사(都事))
정흥일(鄭興一 부호군(副護軍))
정윤표(鄭允彪 참판(參判))
정곤(鄭坤 판관(判官))
정학 (鄭鶴 사정(寺正))
정설(鄭說 첨사(僉使))
정윤필(鄭胤弼 진사(進士))
정계진(鄭繼晋 사정(寺正))
정곡(鄭谷 감정(監正))
정약(鄭若 감찰(監察))
정인덕(鄭麟德 현감(縣監))
정인후(鄭麟厚 참봉(參奉))
정곤(鄭坤 어모(禦侮))
정감(鄭? 현감(縣監))
정사선(鄭思善 성균진사(成均進士))
정건(鄭? 판서(判書))
정신립(鄭信立 판결사(判決事))
정이관(鄭以觀 도사(都事))
정이장(鄭以壯 감찰(監察))
정충걸(鄭忠傑 봉사(奉事))
정서경(鄭恕卿 통정첨추(通政僉樞))
정무경(鄭懋卿 참판(參判))
정안사(鄭安嗣 정랑(正郞))
정천경(鄭天卿 참판(參判))
정원경(鄭元卿 군수(郡守))
정보서(鄭保緖 목사(牧使))
정승서(鄭承緖 동추(同樞))
정극인(鄭克仁 사정(寺正))
정득인(鄭得仁 판관(判官))
정술(鄭述 정랑(正郞))
정광정(鄭光廷 판관(判官))
정광술(鄭光述 주부(主簿))
정호(鄭灝 동추(同樞))
정몽익(鄭夢翼 정랑(正郞))
정몽벽(鄭夢壁 참판(參判))
정몽룡(鄭夢龍 현감(縣監))
정명훈(鄭鳴勛 절충(折衝))
정진웅(鄭晋雄 참판(參判))
정진철(鄭晋喆 절충(折衝))
정석립(鄭碩立 교위(校尉)ㆍ공신(功臣))
정수교(鄭壽僑 사인(舍人))
정인교(鄭寅僑 절충(折衝))
정기창(鄭起昌 절충(折衝))
정희(鄭熙 첨지(僉知))
정두인(鄭斗寅 절충(折衝))
정해동 (鄭海東 참판(參判))
정태성(鄭泰誠 절충(折衝))
정광택(鄭光宅 승지(承旨))
정재동(鄭在東 의관(議官))
정헌익(鄭憲益 교관(敎官))
정헌기(鄭憲璣 감찰(監察))
정환조(鄭桓祚 도정(都正))
정헌채(鄭憲采 의관(議官))

 

조선조 급제자 정록
광원(廣元 太宗14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척(陟 태종(太宗)14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분(? 태종(太宗)16ㆍ병갑친시(丙甲親試)ㆍ을과(乙科))
은(垠 단종(端宗)1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성근(誠謹ㆍ성종(成宗)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침(? 연산(燕山)4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주신(舟臣 연산(燕山)7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량(思亮 명종(明宗)1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사현(思顯 명종(明宗)4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밀(密 명종(明宗)13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명세(名世 선조(宣祖)12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경세(經世 선조(宣祖)19ㆍ알성시(謁聖試)ㆍ을과(乙科))
사제(思悌 선조(宣祖)24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백창(百昌 광해(光海)3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흔(昕 광해(光海)8ㆍ별시(別試)ㆍ갑과(甲科))
성(晟 광해(光海)10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심(? 인조(仁祖)2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백형(百亨 인조(仁祖)2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백창(百昌 인조(仁祖)4ㆍ중시(重試)ㆍ을과(乙科))
필달(必達 인조(仁祖)23ㆍ별시(別試)ㆍ을과(乙科))
기태(期泰 효종(孝宗)3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동망(東望 현종(顯宗)3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민헌(民獻 현종(顯宗)3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선명(善鳴 숙종(肅宗)4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건주(建周 숙종(肅宗)19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몽해(夢海 숙종(肅宗)31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태주(泰周 숙종(肅宗)43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태형(泰亨 경종(景宗)1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재춘(再春 경종(景宗)3ㆍ식년시(式年試)ㆍ갑과(甲科))
동한(東翰 영조(英祖)9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휘진(彙晉 영조(英祖)17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택신(宅臣 영조(英祖)17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중록(重祿 영조(英祖)41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유(濡 영조(英祖)44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겸제(兼濟 영조(英祖)44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형신(衡臣 영조(英祖)47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덕수(德洙 영조(英祖)49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징최(徵最 영조(英祖)49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계충(繼忠 정조(正祖)4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윤중(允中 정조(正祖)8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수(璲 정조(正祖)13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우병(遇炳 순조(純祖)15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석유(錫瑜 순조(純祖)15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성일(誠一 순조(純祖)16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상추(象樞 순조(純祖)22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재감(在鑑 순조(純祖)22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동규(東奎 헌종(憲宗)14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종학(鍾學 철종(哲宗)9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겸식(謙植 철종(哲宗)12ㆍ식년시(式年試)ㆍ병과(丙科))
두흠(斗欽 고종(高宗)16ㆍ식년시(式年試)ㆍ을과(乙科))
희동(熙東 고종(高宗)17ㆍ알성시(謁聖試)ㆍ병과(丙科))
우묵(佑? 고종(高宗)19ㆍ증광시(增廣試)ㆍ갑과(甲科))
의묵(宜? 고종(高宗)22ㆍ증광시(增廣試)ㆍ병과(丙科))
규삼(圭三 고종(高宗)24ㆍ정시(庭試)ㆍ병과(丙科))
하묵(夏? 고종(高宗)29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석오(錫五 고종(高宗)29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윤(潤 고종(高宗)30ㆍ별시(別試)ㆍ병과(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정분(鄭?ㆍ우의정(右議政)
문형(文衡): 선조조ㆍ인조조) 정백창(鄭百昌 효종조)
호당(湖當): 정경세(鄭經世 선조조)
경연(經筵): 정도응(鄭道應 현종조)
청백리(淸白吏): 정척(鄭陟 세종조) 정성근(鄭誠謹 성종조) 정매신(鄭梅臣 중종조)
절의(節義): 정온(鄭蘊 고려말 두문제현(杜門諸賢))
명륜(明倫): (효행(孝行)) 정필형(鄭弼亨 선조조ㆍ정려(旌閭)) 정도철(鄭道喆 정려(旌閭) 뒤에 증호판(贈戶判)) 정원룡(鄭元龍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 ㆍ정려(旌閭)) 정지산(鄭之産 고종조ㆍ정려(旌閭) 정대권(鄭大權 광무8년ㆍ정려(旌閭

 

晉州 鄭氏에서 昆陽 鄭氏 始祖가 된 鄭起龍

任亂時 不敗의 上昇將軍, 鄭起龍

 

임란(任亂)때에 불패(不敗)의 상승군(上昇軍)을 이끌고 조자룡(趙子龍)과 같은 용맹과 제갈량(諸葛亮)의 지략을 발휘한 정기룡(鄭起龍)장군을 아십니까?


날쌘 말과 지용(智勇)을 겸한 기병을 이끌고 스스로 돌격선봉장이 되어 삼남(三南)을 지킨 청년 용장 정기룡은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조자룡의 용맹을 지닌 장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도량이 넓어 천하를 삼킬 듯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이러한 기질을 아는지라 굳이 글공부를 시키지 않고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하게 하였습니다. 13세 되는 해 그는 아버지를 여의고 16세부터는 다시 무예에 전념했습니다. 18세 때 이웃 고을에서 본 향시(響試)의 초장(初場)에 급제했으나, 때마침 그의 형 인수(仁壽)의 상을 당해 포기해 버렸습니다. 24세에 강(姜)씨와 혼인, 그 해에 무과(武科) 별시(別試)에 합격하였고, 그 후부터 4년간 변방으로 종군하였습니다. 29세에는 탄금대(彈琴臺) 배수진으로 유명한 신립(申砬)의 막하에 군교로 있다가 30세에는 전력부위훈련원봉사(展力副尉訓鍊院奉事)에 재직, 그후 임란 때 조경의 막료로 참전 돌격선봉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돌격선봉장 정기룡은 무서움에 떠는 군졸들에게 조자룡(趙子龍)과 같은 용맹을 보이면서 아군을 격려하고 첫 싸움을 단숨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 조경의 실수로 완전히 적의 포위망에 둘러 쌓이게 되자, 그는 단지 나무몽둥이 하나로 좌충우돌하면서 부하들을 데리고 적의 포위망을 뚫은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였습니다.

 

그때 그의 뒤를 따라 살아난 김태허는 병사(兵使)가 된 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합니다.
"정장군은 언제나 적병만 보면 더욱 용기가 솟구치고 찢어질 듯한 눈은 더욱 커졌다. 노기에 차서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든든했었다."

 

그리고 정기룡 그는 언제나 자기가 벤 수급(首級)을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김태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다음 번에 갖겠다고 하고서는 또 그 다음 전투에도 마찬가지로 남에게 적의 수급을 주어 공을 세우게 해 주었다. 생각하면 오늘날 나의 지위도 정장군의 덕택이다."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 때까지 만해도 상주목사였던 정기룡은 성주, 고령 등지에까지 이르러 한사코 적을 방어했습니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정기룡에게 토왜대장(討倭大將)의 특명을 내렸고 그는 이에 보답이나 하려는 것처럼 이동현(李同峴)아래 벌판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원익은 다시 그를 경상우병사로 임명했고, 그는 황간과 영동의 적 주력부대 300명을 궤멸시키고 연이어 보은에서 가토오(加藤淸正)의 수천 대군과 접전, 제갈량의 계략을 이용하여 불과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개를 이용해서 한발의 후퇴도 없이 적을 막는 한편, 인근백성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하게 피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정기룡이 자리잡은 경상도 일대에는 왜놈들이 꿈쩍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호남에 창궐하는 왜병을 격멸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말을 달리는가하면 명(明)군과 연합하여 경주성을 탈환하고 울산으로 적의 주력을 쳐부수는 등 그의 전적은 실로 눈부신 바 있었습니다. 그가 경상우도를 비우고 타처로 진군할 때 경상우도가 다시 어지러워지자 그는 급히 회군(回軍)하여 거창, 함양, 상주등지에서 왜병을 크게 무찔러 빛나는 전과를 잇달아 세웠습니다.


그가 임란을 통해서 겪은 전투는 통 털어 100회가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기룡은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고,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탄에 한번도 몸을 상한 일이 없었으며, 항상 유격전술을 써서 훈련되고 정예화된 왜군의 허를 찔러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전장에서 갈증이 나면 왜병을 죽여 간을 꺼내어 목을 추길 정도로 용맹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정기룡의 3대 선조를 추봉(追封)하고 그에게 용양위 부호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가선대부(嘉善大夫), 김해군호부사가 주어졌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되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선조가 베푼 그에 대한 애정은 삼도통제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宣祖가 항상 말하기를,


 

"鄭起龍이 아니었으면 嶺南이 없었고, 嶺南을 잃었으면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


라고 한 것을 보아 임진왜란과 鄭起龍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빛나는 민족의 수호신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역할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널리 퍼져 상주 등지에서 호랑이나 용도 정기룡에게 꼼짝못했다는 전설과 황소에게 갑옷을 입히고, 그 꼬리에 불을 질러 왜적의 진중을 교란케 함으로서 승전고를 올렸다던가 하는 사화가 그것들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의 武勳과 백성들의 그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전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실로 그는 단순한 명장을 넘어서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武人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출처 : ♡ 晋州鄭氏 종친회 올링크 ♡
글쓴이 : 올아 鄭義道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