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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사회학이론~!

by 윈도아인~♡ 2012. 3. 17.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사회학이론:

 

사회질서와 인간해방을 중심으로

        

                                                           

이 혜 경

                                                            


 

<目  次>

 

 

 

Ⅰ. 들어가는 글

Ⅱ. 프로이트

Ⅲ. 마르크스

Ⅳ. 뒤르껭

Ⅴ. 베버

Ⅵ. 맺음말

 



I. 들어가는 글


본 연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은 사회학이론과 어떠한 연관이 있으며, 특히 사회질서와 인간해방에 어떠한 함축을 지니고 있는가를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모색해 보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정신분석이론을 개발하였으므로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기 위한 사회학적인 개념들을 따로 개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과 무의식 등 인간의 심리로부터 시작하여 인간과 사회의 관계 및 문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그 관심의 폭을 넓혀 왔으므로, 인간행위와 사회질서 및 변동을 다루는 사회학이론으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 특히 프로이트의 무의식, 초자아, 억압 등의 개념은 권위와 지배라는 사회학의 주요 개념으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 권위와 지배는 사회질서 및 인간해방의 핵심 개념이므로, 사회질서 또는 변동을 설명하려는 사회학이론은 권위와 지배의 본질과 변화를 다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마르크스와 뒤르껭 및 베버의 사회학이론으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가를 사회질서와 인간해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겠다.

II.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8-1939)


19세기 말 비엔나의 정신신경증 의사로서 프로이트의 관심은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는 인간의 정신에는 무의식이 있으며, 무의식 속으로 깊이 억압된 것이 환자의 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인간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 무의식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프로이트의 발견은 당대까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기반을 그 뿌리부터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무의식의 탐구로 시작된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의 성본능과 정신체계의 발달로부터 문명과 문명의 발전에 대한 이론으로 그 관심의 폭이 확대되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제1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의 대두는 그의 관심을 성(삶)본능으로부터 공격(죽음)본능으로 옮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전후 프로이트의 주된 관심은 문명이 발전하여 인간이 더 많은 자유와 평등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류는 더 불만과 불행을 느끼게 되는가였다.      


인간: 무의식의 중요성


프로이트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기쁨(쾌락, pleasure)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신체적 에너지는 물론 정신적 에너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인간 에너지의 원천은 본능이며, 인간의 본능에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체계는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드는 원초적 충동(본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원초적 충동 또는 본능 덩어리인 이드로부터 자아가, 그리고 자아로부터 초자아가 분화하여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체계의 분화과정이 사회화이며, 이 때 사회에 의해 억압된 본능은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잊혀지지만, 그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말실수나 꿈 등으로 나타나며, 지나친 억압은 신경증을 유발시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무의식이란 우리가 직접 자각(의식)하지는 못하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신과정이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즉 잊어버린 내용물이며, 이러한 잊혀진 내용물들이 모여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1) 프로이트는 인간 사고의 영역을 의식/전의식/무의식의 삼층집에 비유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된 내용물들은 주로 유아적이며 성적인 것들이며, 이러한 내용물들이 의식으로 진입하려고 하므로, 의식과 무의식간의 갈등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은 인간의 주요 본능인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원초적인 이드의 형태로 남아있는 장소이며, 자아가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장소이며, 동시에 인간관계 즉 사회관계의 핵심인 지배-권력 등이 갈등하고 있는 장소이다.


사회질서: 오디푸스 콤플렉스 및 초자아 


인간은 사회속으로 태어나므로, 남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도록 사회화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을 위하여 억압되는 본능은 성본능과 공격본능이며, 이러한 본능이 제대로 억압되지 못하면 도착증 환자가 그리고 지나치게 억압되면 신경증환자가 된다고 하였다. 이드로부터 자아와 초자아의 분화 및 발달인 사회화과정에 있어서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의 개체발생뿐 아니라 문명의 계통발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유아기로부터 성인으로 성장하는 개체발생적인 인성발달에 있어서 오디푸스 콤플렉스란 4-5세 경의 남자 아이가 처음으로 성적 욕구에 눈을 떠 그의 어머니를 욕구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라이벌인 아버지에게 적의를 키우고, 결국은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기까지 하는 심리적인 과정이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하여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대신 아버지와 동일화함으로써 주어진 사회의 금지와 법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오디푸스 콤플렉스란 순수한 욕구의 덩어리인 인간이 사회화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로 설정된다. 어린 아이는 이 최초의 중대한 본능좌절에 대한 반응으로 공격성을 보이고, 이에 대응하여 엄격한 초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원시 유목부족으로부터 문명상태로의 발달인 계통발생적 측면에서는 오디푸스 콤플렉스란 아버지의 독재적 권력에 반항하여 형제들이 연합하여 아버지를 살해하는 권력투쟁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친살해라는 인류의 원죄는 죄의식, 불안, 공포를 유발하며, 이는 다시 엄격한 도덕, 윤리, 법 등의 ‘아버지상’을 고안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프로이트/김현조 역, 1993). 따라서 프로이트에 의하면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하여 인간에게는 초자아와 양심이 그리고 사회에는 도덕과 법 등 사회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성의 부모와 자녀간의 성적갈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으나(프롬/지경자 역, 1988), 프로이트의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간의 인성발달과 역사적 문명발달에 있어서 ‘권력’에의 욕구가 근본적으로는 본능적인 성적욕망에 그 뿌리가 있다는 점이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하여 사회가 정신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이는 자아로부터 초자아가 확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자아란 양심의 근원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외부세계의 법을 대표한다. 법과 권력이 무의식적 성적욕망에 근원이 있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한편으로는 법과 권력에 대한 전통적 담론을 허구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으로 대표되는 억압적 정치체제가 그렇게 완고하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신현기, 1996: 22).

문명과 해방


프로이트는 [문명과 불만]에서 욕망과 문명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 산업사회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본능적 충동(에너지)을 노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본능에 대한 억압이 더욱 증대하였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불만족이 증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1차 대전 전까지의 프로이트가 성본능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그리고 위선적인 억압에 대하여 항거하였다면, 대전 후의 프로이트는 인간의 지나친 공격본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비관주의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보수주의로 이용당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프로이트 자신은 비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정신분석의 임무는 초자아의 지나친 욕구와 도덕적 이상주의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환자의 욕망이 부모 권위의 억압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평등한 관계로 해방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정신분석의 목표는 자아를 강화하여, 자아를 이드와 초자아로부터 독립시키어, 보다 자율적인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III.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마르크스는 1818년 당시 프러시아였던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자랐다. 마르크스는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184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서의 그의 정치적 활동은 독일당국과 갈등을 빚게 되어서 해외로 망명하였다. 오랜 해외생활중 마르크스는 특히 영국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고, 1883년 영국에서 죽었다. 마르크스의 관심과 저술은 철학, 정치학, 경제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는 19세기 독일과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그간의 봉건적 사회관계가 무너지고, 일부 자본가들의 부유함 뒤에 있는 일반 대중의 가난과 비참함을 목격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회구조와 변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타파하고 이상적인 사회로의 변동을 위하여 노력했던 혁명가이기도 하였다.  


인간: 생산활동의 중요성


마르크스의 인간관 및 역사관은 유물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행위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활동이며, 따라서 이러한 생산활동에 대한 기록이 역사인 것이다(Tucker, 1978). 그의 유물론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기존의 관념론적 전통과는 반대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의식간의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전제하면서도, 그 핵심은 인간존재의 물질적인 조건들이 인간의식의 방향(orientation)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인간정신이 물질세계(사회구조)에 대응하고, 또 그것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사회구조가 변함에 따라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매우 유사하다(R. 오스본, 1984). 즉 인간의 관념과 의식은 사회환경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라, 사회환경과 인간자신의 어떤 역동적이고 주관적인 충동들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자아란 외부 현실에 의해 변화된 이드의 일부이며, 이때 외부 현실이란 주로 사회․경제적인 조건인 것이다. 즉 자아는 사회․경제적 현실에 따라서 이드의 욕구를 제한하고 구속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아는 이드의 목적에 부합하는 보다 좋은 현실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인간과 사회간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중시하였고, 단지 마르크스의 이론은 사회로부터 인간으로, 그리고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으로부터 사회로 그 접근하는 방향이 반대였던 것이다.  


사회질서: 계급관계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란 생산을 위하여 맺어진 관계이며, 생산관계에서의 구조적인 위치에 따른 관계인 계급관계로 표현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계급의 기원은 잉여로 인한 사유재산 때문이며, 이 때 소유권(경제권)으로부터 지배-복종의 정치적 권력관계가 뒤따른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계급관계의 밑바닥에는 자원의 희소성이라는 자연적 제약이 전제되었다.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의 초기에는 자연적인 자원의 희소성이 중대한 문제였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평등 분배로 인한 인위적인 희소성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관계(사회구조)의 핵심은 지배-피지배관계로 대표되는 계급관계이며, 이때 피지배계급에 대한 억압은 사회질서를 위하여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도 사회질서와 안정을 위한 필수수단인 억압을 사회․경제적 필요에 대한 반응으로 파악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능을 억제하게 된 사회적 동기란 인간노동에 대한 경제적인 필요이며, 즉 인간의 심적 에너지를 성활동으로부터 노동으로 전환되도록 이끄는 것이다(Freud, Introductory Lectures: 262, R. 오스본: 1984: 89에서 재인용).

따라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종교와 도덕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고안된 일종의 환상(illusion)이라고 본다. 두 사람 모두 부의 불평등과 특권이 잠재적인 억압으로 작용하는 사회환경 속에서는 함께 일하고 사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방법이 요구되며, 이 때 종교와 도덕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종교란 자연의 우월한 힘이 인간의 마음에 반영된 것으로,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자연의 위협을 초자연적인 힘인 종교로 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발달되면서, 인류는 자연적인 힘보다는 사회적인 힘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위협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경제적․사회적 힘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이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왜 외적인 힘을 인격화하여 이러한 무력감에 반응하고 나아가 기도와 의식을 통하여 신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는 마르크스보다는 프로이트가 더 풍부한 성찰을 제공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이는 종교를 만들어 자연적․사회적인 힘 앞에서의 자신의 약함을 보상받고자 하는 내부적 충동, 즉 인간 자신의 정신활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신이란 근원적으로는 어린아이의 눈에 비치는 당당한 아버지이며, 종교적인 인간에게는 우주의 창조와 자신의 탄생은 동일한 것이다(Freud, New Introductory Lectures: 207-208, R. 오스본, 1984: 94에서 재인용). 즉 마르크스가 종교 발생의 원인으로 인간의 무력감을 지적하고 있다면, 프로이트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무력감은 심리적으로 부친에 대한 의존을 불러 일으키고, 부친에 대한 기억인 ‘종교’에 의하여 보호와 위안을 받는다는 식으로 그 내면적인 과정을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사회규범 즉 도덕으로 자리잡게 된 일반적인 의미를 전제하면서도, 계급사회에서는 특정 계급의 이익이 사회질서의 기반인 도덕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도덕이란 초자아속에 들어온 사회적 규범으로, 양친의 금지와 명령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종교와 도덕의 사회적․계급적인 관련을 지적했다면, 프로이트는 종교와 도덕의 심리적인 관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적 해방


마르크스 이론의 목표는 사회변동(발전)의 주요 요인들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변동의 원천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나 가치보다는 경제적인 영향에 의해 일차적으로 촉진된다는 것이다. 이때 경제적인 영향이란 하부구조인 생산력과 생산과정이 계급갈등을 통하여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Marx and Engels, 1968: 35).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역사발전은 고도의 생산수준을 유지하면서도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과 경제력에 대한 예속을 타파하고 인간이 수단(도구)이 아닌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해방이란 자연(희소성)과 사회(계급관계)가 인간발전에 가하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혁명을 통한 무계급사회에서 진정한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인간해방이란 강박적이고 억압적인 ‘초자아의 도덕’을 보다 자율적인 ‘자아의 도덕’으로 바꾸는 것이며, 이는 진정으로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원숙한 성인은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하며, 따라서 사회의식이 발달된다고 보았다. 즉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어린시절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성인의 사회의식으로의 심리적인 발달이 인간 해방인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인간을 위협하는 불합리성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이 기술상의 발전을 이용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는 사회구조의 비합리적인 힘을 연구하였다면,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과학을 이용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성숙된 존재로 되는 것을 방해하는 인간심성의 비합리적인 힘을 연구한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객관적․외부적인 불합리성을 그리고 프로이트는 주관적․내면적인 불합리성을 연구한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과 사회의 탐구에 있어서 그 방향이 서로 반대이기는 하나, 이 둘의 이론은 서로 모순됨이 없이 연관될 수 있으며, 서로를 보충하여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다(R. 오스본, 1984). 프로이트 이론과 마르크스 이론을 종합하면, 인간이란 생활을 위협하는 비합리적인 힘의 지배를 받기 쉬운 동물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는 경제적․사회적 구조 속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며, 프로이트에게는 인간의 유아적 사고와 감정양식이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사회의 비합리성은 비합리적인 인간을 만들며, 이는 동시에 정신생활의 내적인 비합리성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한편 프로이트의 이론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시각으로 재해석해 본다면, 프로이트 이론의 한계는 그의 환자들의 대부분이 19세기 말 서유럽의 중상류층에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표본은 무작위 표본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발견은 그 특정 집단에게는 충분히 사실이나, 그 발견을 일반화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동시대(19세기 말) 동지역(서유럽)에 적용하더라도, 다른 집단(노동자 또는 하층계급)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2) 따라서 프로이트이론은 연구대상이 특정 계급에 한정되었다는 계급적 한계와 프로이트 자신도 계급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IV. 뒤르껭(Emile Durkheim, 1858-1917)


뒤르껭은 1858년 프랑스의 독실한 유태교 가문에서 출생․성장하였다. 부친은 최고 율법사(chief Rabbi)였으며, 뒤르껭도 어린 시절에는 부친의 뒤를 이어 랍비가 되고자 했었다. 하지만 뒤르껭은 종교에 귀의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가문의 전통과 검약적이고 규율적인 생활태도는 뒤르껭의 퍼스낼러티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사회학 탐구의 대상으로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엘리트 양성기관인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인문학과 심리학보다는 철학과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87년 보르도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 때 집필한 [사회분업론], [사회학 방법의 제규칙], [자살론]은 그의 명성을 높혔다. 1898년 [사회학연보]를 창간하여 자신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을 중심 주제로 하는 지식인 운동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위업과 명망으로 뒤르껭은 1902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1906년 전임교수가 되었고, 1913년에 그간의 ‘교육학과’가 ‘교육학․사회학과’로 명칭이 바뀌어지도록 노력하였다. 소르본느 대학시절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를 출판하였고,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외아들을 잃자 상심하여 1917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전 사회학의 대표적인 세 거장중 마르크스와 베버가 백과전서적 사상가였음에 비하여, 뒤르껭은 평생에 걸쳐 특정한 몇가지 문제를 일관되게 탐구하였다. 뒤르껭의 과제는 1)사회학을 경험론적 과학의 기초 위에 확립시키려는 노력, 2)근대 산업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출현이 가지는 중요성을 탐구하는 것, 그리고 3)도덕적 권위의 원천과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를 평생 사로잡은 질문은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 통합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사회를 통합하는 힘은 무엇인가’였다. 즉 뒤르껭은 인간 주체의 자유와 사회질서(통합)의 본질 및 그 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뒤르껭에 의하면, 사회학자의 임무는 과학적인 사회학의 지식을 응용하여 사회의 질병과 건강을 구분하고, 질병의 원인을 진단하여 그 치료법을 개발하는 의사의 역할과 비슷하다는 것이다(A. 기든스, 1981:17). 프로이트가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다면, 프로이트는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고자 한 것이다.             


이중적 인간: 도덕의 중요성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뒤르껭도 인간은 잠재적으로 무제한적인 욕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을 강조하였다면, 뒤르껭은 인간들간의 결속(유대감)을 중시하였다. 뒤르껭에 의하면, 인간 욕망을 규제하기 위한 규범이 너무 약하면 ‘아노미 자살’을, 너무 강하면 ‘숙명적 자살’을, 그리고 집단의 연대가 너무 약하면 ‘이기적 자살’을, 그리고 너무 강하면 ‘이타적 자살’이라는 병리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프로이트가 인간을 양성적 또는 혼합적인 존재로 보듯이, 뒤르껭도 인간을 이기성과 이타성(도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사회(문명)와 본능간의 갈등을 강조하였다면, 뒤르껭은 인간 속에 잠재된 도덕성은 사회속에서 또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발화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질서: 집합감정을 통한 유대감


뒤르껭은 사회학의 연구대상을 사회 또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s)'로 보았다. 사회적 사실이란 어디에나 있으며(편재성), 인간에게 외부로부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뒤르껭에게 있어서 사회란 단지 인간들이 모여 있는 것 이상인, 즉 인간에서 영향을 미치는 실체(thing)인 것이다. 특히 사회 속에는 인간들로 하여금 집합적인 목표나 이익을 추구하도록 인도하는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사회를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함께 모여 사회적 의식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집합적인 감정․신념․가치가 발생되며, 이러한 집합감정을 통하여 서로간의 유대감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뒤르껭에게 있어서 사회(질서)란 집합의식 또는 집합표상 및 집합감정으로 표현(상징)되는 것이며, 사회(질서)의 본질은 도덕이라고 파악하였다. 이 때 뒤르껭에게 있어서 도덕이란 의무감(duty)과 선행(good)을 의미한다.


통합 대 해방


뒤르껭은 인간 주체의 해방보다는 사회의 질서와 통합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뒤르껭 자신은 사회속에서 인간의 능력이 변화되어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며, 사회와 사회변화에 인간이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사욕에서 벗어난 공익을 위한 초월 또는 해방이라고 보았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를 풍미하던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와 과거 전통사회를 지향하는 보수적․반동적 사상의 대립속에서, 뒤르껭은 전자를 지지하되 경쟁과 계약에 의한 자유방임적 공리주의가 아닌 도덕적 개인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그러나 뒤르껭에게 있어서 도덕적이라는 말은 사회적이라는 말과 같으므로, 사회적 개인주의란 결국 집합주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사회의 집합적 표상․가치․신념을 적극적으로 깨달은 후에 적극적으로 충성하자는 집합주의인 것이다.       

뒤르껭은 19세기 프랑스와 유럽의 혼란을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현대 산업사회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에 걸맞는 새로운 질서(도덕)가 아직 수립되지 못한 도덕적 혼란으로 파악하였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종교가 몰락하자, 현대 산업사회는 새로운 종교 즉 새로운 구심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르껭은 현대 산업사회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도덕적 직업결사체’를 제시하였다. 뒤르껭이 제시한 직업결사체란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도덕적 구심점 즉 집단의 결속을 이끄는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뒤르껭은 인간 개체의 개성(해방)보다는 집단의 결속(통합)을 더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더욱이 뒤르껭은 직업결사체의 도덕적 역할은 기대했지만, 직업결사체 스스로가 집단적 이익을 추구할 경우와 상이한 직업결사체간의 갈등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못하였다.

한편 뒤르껭은 질서를 강조하며 변동을 소홀히 하였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뒤르껭 자신은 도덕적 행위와 사회변동을 연결시키고 있다. 즉 뒤르껭에 의하면, 사회의 종교적인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자극된 집합적인 열광은 혁신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뒤르껭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혁명으로 변화되는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장기적이며 점진적인 사회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했다(A. 기든스, 1981: 25). 따라서 뒤르껭은 혁신의 사회학자일 수는 있어도, 혁명의 사회학자는 아니었다. 


뒤르껭도 프로이트처럼 인간을 이기성과 도덕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이중인(homo duplex)으로, 그리고 사욕과 공욕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순덩어리로 보았다. 인간이란 한편으로는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갈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적인 사고와 도덕적 행위를 추구하는 양가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뒤르껭과 프로이트는 인간 내면의 욕구와 도덕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어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가 욕구와 도덕을 상대적으로 더 갈등관계로 파악함에 비하여, 뒤르껭은 상대적으로 더 의존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로이트는 갈등론자로 뒤르껭은 기능론자로 분류될 수 있다. 뒤르껭을 요약하자면, 태초에 사회(도덕)가 있었고, 사회로부터 또는 사회를 통하여 진정한 인간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V. 베버(Max Weber, 1864-1920)


베버는 1864년 당시 프러시아였던 독일에서 태어났다. 정치가인 아버지와 독실한 종교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법학, 경제학, 역사학, 철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4년 베를린 대학에 등록하였고, 7년동안 무보수 법률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중세 무역회사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베버는 법률경력과 학술적인 경력을 함께 추구하기로 결정하여, 1892년 전임강사직을 수락하였고, 1894년 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베버는 병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지나친 사람이었고, 학문적․법률적․정치적 경력을 함께 쌓아 나갔다.

1897년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부친에 대한 베버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여 부자는 격렬히 충돌하였고, 그 후 부친이 곧 사망하자, 베버는 심각한 신경쇠약으로 5년 이상을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베버의 신경쇠약의 원인에 대하여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절히 적용할 수 있다. 물질적이며 지나치게 독재적인 아버지와 감수성이 예민하며 소극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베버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사랑, 어머니에 대한 동정 등. 베버가 1920년 56세로 비교적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주목받기 시작하는 프로이트 이론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가족사는 물론 자신의 개념구축에 프로이트 이론을 적절히 활용하였을지도 모른다.

5년간의 신경쇠약에서 벗어난 베버는 다시 저술활동을 시작하였고, 1904년 [사회과학․정책의 객관성]을 그리고 1904-5년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집필하였다. 이 두 편의 저서는 베버를 확고한 사회학자의 지위로 인식시켰다. 1918년 다시 대학강단에 섰으나, 2년 후인 1920년에 사망하였다.

처음부터 초지일관 사회학의 길을 걷던 뒤르껭과 달리 베버는 신경쇠약 이전에는 경제학, 법학, 역사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관심과 법률가, 학자 및 사회정책가였으나, 신경쇠약에서 회복된 이후에야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인식하였다. 20세기 초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인식한 베버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유행 속에서 마르크스주의과 구별되는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신교도적 전통 즉 프로테스탄티즘은 베버를 무겁게 짓누르는 요인이었고, 이는 위대한 사회학적 저서의 하나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베버의 학문적 과제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변동이었다. 


인간행위: 의미(동기)의 중요성


베버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간의 행위도 그 사람의 주관적인 의미와 동기를 감정이입 방법에 의하여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 인간행위에 동기를 부여하는 신념(ethos)에 주목한다. 따라서 베버에게 있어서 사회학이란 인간행위의 주관적 의미를 이해하려는 학문인 것이다.

베버는 인간행위의 네가지 유형을 구별하였는데, 이는 1)몸에 벤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전통적 행위, 2)감정에 따라 행하는 정서적 행위, 3)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하는 가치합리적인 행위, 그리고 4)수단과 목적이 지식에 기반하여 서로 체계적으로 연과되게 행동하는 목적(도구) 합리적인 행위들이다. 베버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도구합리적인 행위가 점차 여러 영역에 걸쳐 확대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합리화과정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뒤르껭에게 있어서 사회학의 연구대상은 사회적 사실 즉 집합적인 사회현상 및 제도였으나, 베버는 사회학의 연구대상이 개인의 행위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국가와 같은 실체들은 사고하거나 행위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만이 행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버는 개인 행위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당시 주류를 이루던 구조기능주의적 분석을 거부하였다. 

  

사회질서: 권위 및 지배의 정당성


베버는 인간관계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핵심은 지배-권위구조이며, 이러한 지배구조가 이익갈등을 정당한 한계내에서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베버는 지배구조의 본질과 그 역사적 변화를 연구하였다.

베버에게 있어서, 지배구조란 명령과 복종의 안정된 체계이다. 지배구조는 무력과 화폐 등에 의한 강제적 힘(coercion), 상호이해에 의한 실용적인 힘(utility), 그리고 정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의한 힘(legitimacy)의 세가지 힘(권력)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 베버는 이러한 세가지 권력 중 특히 정당성에 의한 지배인 권위에 주목한다. 베버에게 있어서 권위구조란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지배체계이다. 베버는 권위(지배구조)의 세가지 유형을 밝혔는데, 이들은 각각에 대한 정당성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조나단 터너 외. 1995: 267).

첫 번째 유형은 카리스마적 지배이다. 카리스마란 종교적인 기원을 지닌 초자연적인 비범한 자질을 의미한다. 베버에 따르면,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사회의 당면 문제들에 대한 지배적인 방식이 부적당하거나 불충분해 보이는 위기의 시대에 출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리스마적 지배는 혁명적이다. 베버의 관점에서 보면,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허풍쟁이로 판명나느냐 아니면 영웅으로 판명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히틀러도 간디도 모두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대중이 지도자를 따르도록 고무되느냐 아니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카리스마적 자질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지배구조는 전통(관습)이나 법률에 기초한 지배구조로 바뀌게 된다(조나단 터너 외. 1995: 268-269).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개념으로 바꾸어 보면, 카리스마란 외부적인 힘인 것처럼 위장된 무의식적인 경향임을 알 수 있다. 억압된 무의식적인 경향은 언제나 자아(ego)에 대한 위협이므로, 가장 효율적인 자아방어의 형태는 이 무의식적인 경향을 자아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카리스마적 비범한 자질을 믿는다는 것은 대중의 정신과정의 무의식적 경향과 연관되므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대중의 무의식적인 자원을 일깨우는 지도자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이며, 따라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만큼 막강한 것은 없는 것이다(McIntosh, 1985).

지배의 두 번째 유형은 전통적 지배이다. 이는 정당성이 예로부터 내려온 규칙과 권력의 신성함에 의거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왕실에서 첫째 아이가 합법적인 왕위계승자가 되는 것이 오랜 세월동안 전통이 되었고, 이는 종교적인 재가를 받는다(조나단 터너 외. 1995: 269). 따라서 전통적 권위의 정당성은 종교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

베버에게 있어서 권위란 복종에의 의무가 있는 정당성이므로, 이는 프로이트의 윤리적,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의 기능과 같다. 프로이트는 종교발생의 근원을 ‘아버지상’의 재구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동강령이란 부모의 가치관이 초자아를 통하여 투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베버의 전통적(종교적) 권위가 어떤 의미에서 외부화된 무의식적인 힘이냐를 밝혀야 한다. 왜냐면 베버에게 있어서 카스마적 권위는 내면화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전통적 권위는 외부로부터의 처벌의 두려움과 보상에의 열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우선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베버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오디푸스 콤플렉스-후반부’의 초자아이며, 전통적(종교적) 권위는 ‘오디푸스 콤플레스-전반부’의 초자아에 해당된다. ‘오디푸스 콤플렉스-전반부’란 ‘억압적 아버지’를 의미하며, 원시적인(primitive) 초자아가 발달되는 시기이다. 이 때 원시적인 초자아의 특징은 무서운 아버지 또는 무서운 신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복종(동기)은 외부적인 보상과 처벌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권위란 ‘오디푸스 콤플렉스-후반부’에 발달된 초자아이며,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하여 아버지를 내면적으로 깊숙히 받아들인 경우이다. 따라서 전통적 권위의 무서운 신(아버지)에 비하여, 카리스마적인 예언자는 덜 무섭고 덜 억압적이다. 즉 초자아와 자아 사이의 통합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카리스마적 예언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광과 구원을 통해,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자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초자아가 덜 억압적이며 덜 처벌적이므로, 죄의식이 의식 속으로 들어 오며, 이는 참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과정과 비슷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신이란 이렇게 이상화된, 내면화된, 억압된, 그리고 외부로 치환된 아버지상이다. 신의 명령이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인 양 인식하는 것이 무의식을 피하는 방법이며, 초자아에 의하여 자아가 흔들린다고 인식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권위에 대한 복종의 주된 동기는 엄격한 신으로부터 처벌을 피하고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베버의 생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지도자(왕)가 실제로 카리스마적 자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인 지도자의 명령이 신성한 종교적인 힘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리스마적 왕의 권위는 그가 소유한 카리스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왕국의 종교적 신의 카리스마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지배의 세 번째 유형은 법에 토대를 둔 합법적 지배이다. 법적 지배는 성문율에 의거한다는 베버의 생각은 어떠한 법적 규범도 절차상으로 적법한 법 제정에 의하여 생성되거나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합법적 지배의 정당성은 그 절차에 있는 것이다. 특히 베버는 개인의 지배로부터 법의 지배로 바뀌는 경향(probability)을 현대화과정으로 보고 있다.3)

따라서 베버의 이념형에 의하면, 합법적(이성) 지배와 카리스마적(감정) 지배는 서로 반대인 개념이다. 물론 실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그렇게 단순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왜냐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자연법은 성스러운 기원을 가진 것처럼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법적인 지배의 정당성은 카리스마스적이며 동시에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베버가 느끼기에 자연법이 성스러운 카리스마적 정당성과 결별하고 합리적인 본질에 의하여 정당화될수록 자연법은 그 카리스마적 힘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다. 

프로이트는 자연법에 대하여 직접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합법적 지배란 정신발달이 성공적으로 청년기에 도달한 성숙한 인성에 비유될 수 있다. 즉 초자아가 충분히 발달하여 부모나 그 대체물의 태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 자아와의 갈등이 적어지고, 따라서 초자아는 더 이상 외부적 지원(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연법의 세속화는 그 카리스마적 힘을 잃게 되는 것이란 베버의 생각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해석되는가? McIntosh(1985: 906)는 세속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의 정신발달 단계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합법적 지배의 원칙은 대중의 지지를 받기에는 너무 높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정신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진 진정한 성인들로부터만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오디푸스 단계에 고착되어 있거나, 아니면 구순기나 항문기 단계로 퇴행해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모든 대중행동은 어느정도는 퇴행적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이를 뒷받침한다.


카리스마적 해방


마르크스는 사회변동을 혁명적․필연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고, 뒤르껭은 사회변동을 점진적․필연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베버는 사회변동을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지는 않으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혁명적 변동의 가능성도 지적하였다. 권위의 세가지 유형에 대한 베버의 분석은 그의 사회변동 모델을 함축하고 있다.

베버에 의하면, 역사의 지속적인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가치와 신념, 행위유형, 그리고 심리적인 지향 사이의 부조화가 나타나는 위기의 시대에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하여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카리스마적 지배는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전통적 지배나 합법적 지배로의 일상화과정을 밟게 된다. 마르크스와 뒤르껭이 역사발전에 있어서 필연성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베버는 개연성(probability)을 강조하고 있다. 베버에게는 여러 가지 역사적 대안들 사이의 선택은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우연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배가 일상화되는 과정은 원래의 카리스마적 충동을 희석시키고 파괴한다. 따라서 원래의 카리스마적 운동을 일으켰던 감정들이 계속 남아 있다면, 또는 새로운 감정들이 발생하다면, 새로운 카리스마적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따라서 베버에게 있어서 카리스마적 권위와 관료제적 권위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이 서구 문명발전의 주요 원동력이었다(박영신, 1978: 7-36).

  

이상과 같이 베버의 사회질서 및 변동(해방)에 대한 이론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연관시키어 살펴 보았다. 베버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지배-복종관계로 보았으며, 특히 정당성에 의한 지배인 권위를 카리스마적, 전통적, 합법적 지배로 유형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세가지 권위유형 사이의 투쟁이 역사변동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역사의 위기 순간에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나타나게 되며, 카리스마적 지배란 기존의 사회체계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베버의 세 가지 권위(지배)유형은 프로이트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베버의 지배-복종구조와 변동에 대하여 프로이트 이론이 시사하는 바는 사회의 성원들로 하여금 복종하거나 반란하게 만드는 절절한 감정의 심리적인 근원은 사람들의 가족관계내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다(McIntosh, 1985).


VI. 맺음말


이상과 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마르크스, 뒤르껭 및 베버의 사회학이론으로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를 사회질서 및 인간해방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 보았다. 마르크스와 뒤르껭 및 베버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학계의 충분한 주목을 받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프로이트 사상이 이들 고전 사회학자의 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들 고전 사회학이론을 프로이트의 사상과 연관시켜 재해석할 수 있음을 살펴 보았다. 특히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과 뒤르껭의 종교이론 및 베버의 카리스마에 대한 이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활용함으로써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해짐을 살펴 보았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20세기 후반 문화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정신적 바탕이 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의 현대 사회학이론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진지하게 논의하거나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4) 물론 현대 사회학이론도 각각의 영역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즉 인성의 발달 및 사회화, 성차, 종교, 권위에 대한 복종 및 집합행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프로이트를 참조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각 영역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단지 개괄적인 수준으로 소개될 뿐이지, 현대 사회학이론이 프로이트 이론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세기 후반 현대 사회학이론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철학과 심리학 등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하여 사회학이 뒤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간 후발주자로서의 사회학 자체의 정체성 확보에 주력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사회학의 전통이 심리학과의 차별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대 사회학이론은 상대적으로 주관주의보다는 객관주의쪽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사회학이론이 과거의 메타이론적 경향에서 벗어나 ‘과학성’ 또는 ‘합리성’의 바탕 위에서 사회학적 전문화를 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후반부의 현대 사회학이론은 미국을 중심으로 실용주의적 전통위에서 경험적 연구와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현대 사회학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인 딜렘마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행위와 사회질서 및 변동을 다루는 어떠한 사회이론도 결코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회이론에 비하여 사회학이론은 상대적으로 더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며, 즉 과학적 이론수립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제프리 알렉산더, 1993).

그러나 최근의 사회학계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다루는 ‘정서사회학’의 출현은 물론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및 거시이론과 미시이론의 간격을 좁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은 인간행위와 집단행동에 있어서 수치심과 정열과 같은 ‘감정’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롯한 과거의 이론들에 대한 더욱 활발한 해석과 재해석을 통하여 사회학이론은 더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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