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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해

by 윈도아인~♡ 2012. 3. 17.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해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주의자라는 도식이 희랍 철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구분

 

공리적인 기하학체계에 깊이 매혹되어 인간의 적합한 모든 지식이 몇몇 제일 원리로부터 논 리적으로 도출되는 통일적인 공리체계로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 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어느 정도 차이를 갖는 각각의 학문의 독립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그 관련된 목적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었다.

1. 우리가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를 다루는 실천학 - 윤리학, 정치학 등.

2. 사물의 제작에 관련된 창작학 - 시학, 수사학 등.

3. 그 목적이 실제적인 행위나 창작이 아니라 오직 진리인 이론학

: 이것은 그 대상에 따라 다시 수학, 자연학, 제일철학(신학과 형이상학이 혼용)으 로 나뉨.

1) 자연학(physika)은 우주의 물질적(공간 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고 운동의 원인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일부분을 다루고 수학은 물질에 구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측면을 다룬다.

2) 제일철학은 그와 달리 변화(운동)하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다루 는데 이것은 개별 존재자들에 선행하는 최고의 존재자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신학이며 또한 보편적인 존재일반을 즉, 소위 '있음으로서의 있음'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형이상학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이 다루는 존재자가 일차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또한 보 편적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신학과 형이상학을 제일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서 포섭하는 아 리스토텔레스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모든 진지한 탐구는 있는 것을 다루는데 형이상학자는 어떤 특별한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의 단 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에 속하는 바로 그 측면을 다룬다.

3) 개별과학은 그와는 달리 존재의 어느 한 부분을 쪼개어 이 부분의 성질을 연구한다. 그러므로 있음으로서의 있음을 연구하는 제일철학은 가장 보편적이다.

형이상학 Z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 실체에 대한 탐구를 동일 시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실체란 무엇인가?

 

2.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술어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것의 큰 줄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상의 유형은 곧 존재상의 유형을 반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범주와 다른 여타의 범주(성질, 관계 등)를 나누고 실체의 범주가 일차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른 범주들이 단지 실체와의 관련 하에 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의 조건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것은

1. 문장에서 주어가 되며 술어가 되지 않는 것.

2. 다른 것에 내속하지 않는 것, 즉 존재적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을 소위 제일 실체로 분류하는 데 여기에는 개체들이 속하며, 종(species)이나 유(genus) 등은 이러한 의미에서 엄밀히 실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일 실체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것들 을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라고 분류하고 있다. 범주론에서의 그의 설명은 실체의 독 립성을 강조한 것이다. 실체는 어떤 (특정한) 성질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성질들은 단 지 어떤 실체의 성질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보편적 성질들 에 일차적인 존재를 부여하고 개체들은 단지 이러한 보편자에 참여함으로 그 성질을 얻 는다는 플라톤의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실체 개념

 

(1) 합리론자들

○ 데카르트 : 실체를 의식하는 자아와의 관계에서 파악.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것 또는 우리가 감각하는 성질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실체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질은 없는 것의 성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다른 곳 에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것, 즉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역시 실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정신, 물질, 신에 세 가지 실체인데 존재적으로 말하면 실체의 개념에 적합한 유일한 존재는 신이라고 말 한다.

○ 스피노자 : 데카르트의 두번째 실체의 정의를 이어받아 신이자 우주인 전체로서의 우주가 곧 실체라고 주장.

○ 라이프니쯔 :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규정 중에서 변화의 중심으로서의 그것과 주 어가 되고 술어가 되지 않음의 성질을 받아들이고 있다.

(2) 경험론자들 : 실체의 개념이 어떤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성질들의 가정된 기반이라고 주장. 이렇게 성질들이 그것에 붙어 존속할 수 있는 실체의 개념은 성질이 어떻게 실체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 지 못한 채 단지 우리가 너무 쉽게 상상해낸 것일 뿐이다.

○ 흄 : 이러한 비판을 물질적 실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체, 그리고 자아에까지 확대 해서 이러한 개념들은 단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공허한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3) 칸트 : 실체의 개념을 (그가 다루는 다른 전통적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대상 세계 의 기초적인 존재단위에서 인간이 그들의 경험을 정리하는 하나의 범주로 격하시켰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 -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현상에 대한 연구자들이 그들의 탐구과정에서 물을 네가지의 내 용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4원인설이다. 이 때의 원인은 현대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각각의 설명의 유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질료인 : 사물이 그것으로 구성되는 질료를 그 사물의 원인으로 봄.

형상인 : 사물의 형상이 또한 그 사물의 사물됨의 원인이다.

작용인 : 변화의 원천.

목적인 : 그 사물이 담고 있는 목적.

아리스토텔레스 : 대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은 이러한 네가지 원인을 전부 앎으로써 얻 어질 수 있다.

 

5. 아리스토텔레스의 '변화' - 「자연학」

 

엘레아학파는 그들의 'einai -이다(혹은 있다)' 동사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토대로 다수 성을 부정하고 진정한 실재에게는 아무런 운동도 변화도 없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이러한 주장을 그의 「자연학」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그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의 세계, 운동과 변화로 충만한 세계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이 자연학의 성립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증의 핵심은 사물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einai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는 그의 범주를 원용하여 실체와 성질, 양 등의 서로 다른 범주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둘째로, 그는 동일성을 나타내는 존재사로서의 einai와 주어와 술 어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계사(predicate)로서의 einai를 구별하여 엘레아학파의 논리를 공격한다.

이렇게 다수성과 운동, 변화를 구제한 후 그가 설명하는 변화의 세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우선 변화의 시점과 종점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성질이다. 하지만 이것만 있어서는 변화가 아닌 생성과 소멸이 있을 뿐이다. 변화의 기저에는 변화를 겪 으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기체 (hypokeimenon ; substratum)라고 부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각각 실체의 측면(생 성, 소멸), 질의 측면(변질), 양의 측면(증가, 감소), 장소의 측면(운동)에서의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분류에서 실체의 변화는 특별한 지위를 가지는데 그것은 다른 변화에서 는 어떤 개체가 변화의 기체로서 얘기될 수 있는 반면 실체의 변화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실체를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고 생성과 소멸의 경 우에 있어서는 질료가 그 기체의 역할을 하낟고 설명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변화의 기본단위를 물, 불, 공기, 흙이라고 하는 엠페 도클레스의 운동설명에 비교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운동에 관련된 질료들을 넘 어서 어떤 운동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일반적 구조를 지적하여 운동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대상세계의 존재방식 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이러한 논의를 일상언어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통 해 전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Aristotle의 정의론  

<국가>에서 플라톤의 정의론: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폴레마르코스.

-> 문제: 미친사람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광의의 의미로 정의는 성격의 탁월성과 동일한 것이고 부정의는 성격의 나쁨과 동일한 것. 동의어는 아님.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넓은 의미의 “완전한 정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정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평한 몫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

분배적(distributive)정의와 시정적(rectificatory) 정의를 구분. 현대법의 민사적 정의와 형사적 정의의 특징과 비슷하다.

0 분배적 정의: 시민들 간의 명예와 부의 적절한 분배를 보장하는 것과 관련

0 시정적 정의: 어떤 불공평이 일어났을 때 공평한 몫을 되찾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배적 정의가 국가의 시민들에게 명예와 부를 분배하는 것과 1차적으로 관련된 것으로서 다룬다. 시민을 납세자가 아닌 수혜자로서 다룸. 공평한 분배는 신청인들의 업적에 비례하여 부 또는 명예를 제공하는 것.

시정적 정의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서 불공평한 이득을 취했다면, 시정적 정의를 시행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상황을 회복시켜야 한다.

<중용 이론의 영역 안에서의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

분배에 있어서 정의로운 분배는 너무 많이 얻는 것과 너무 적게 얻는 것 간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정의는 중용이다. 정의는 중용을 목표로 하고 부정의는 극단적인 것들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는 칸트주의나 공리주의와 대조를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행위 중심적이기보다는 행위자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어야 하며 또한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련의 규칙체계를 제시하는 대신에 성품과 성향의 덕을 의미하는 덕의 목록을 제시한다. 유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행위만이 아니라, 덕에 대한 양식과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규칙들은 현실적인 삶의 상황이 갖는 미묘한 측면들을 모두 반영하기아려운 까닭에 우리는 유덕한 사람을 모방함으로써 유덕하게 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0 문제 : 우리 자신이 유덕하게 되기 이전에 유덕한 인간을 알아보는 방법이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는 이 문제가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누가 유덕한 시민인가를 알고 있었고 모든 사람이 용기와 호탕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른 문제 : 그러한 성품이 덕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성품들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에 덕이라고 생각.

덕의 윤리는 안정되고 통일된 사회의 존재를 가정한다.

현대의 도덕적 상황은 우리의 사회적 삶의 바로 그 근저에까지 맞닿아 있는 미해결의 위기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철학의 중심 과제는 현대 문화의 인식론적, 도덕적 위기의 원천을 분석하고 그것에 내포된 복잡하고 다원적인 가치관들의근거를 이해하는 일. 현대에 와서 덕의 윤리가 재론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사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근세 이후 의무 중심적 윤리설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발하면서 덕 윤리설을 주도하는 학자는 매킨타이어이다. 그에 따르면 근세 이후의 지배적인 윤리학의 패러다임은 그 내재적 요인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윤리적 상대주의에로 귀착하게 되며 현대사회와 같은 분열된 사회를 결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칸트의 윤리설은 그 자체로서 실패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적인 전통의 퇴락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계몽주의적 기획의 상이한 입론들이 갖는 전망과 실패를 추종한 니체적 허무주의이든가 하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전통에로 복귀하는 것이다.

 

 

Aristoteles의 덕론에 나오는 우정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이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는 세가지 유형의 우정을 구별하는데 중요성을 추구하는 우정(오늘날 사업 관련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여흥과 즐거움을 위한 우정(브리지 게임 파트너나 재치있는 재담꾼), 그리고 참된 우정으로서 좋음을 추구하는 우정(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서로 바라는 사람들의 우정)이 그것이다. 처음 두가지의 우정은 상대가 제공하는 유용성이나 즐거움을 대상으로 삼는것이기 때문에 참된 우정이 아니며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편 세번째 우정은 참된 우정으로서 좋은 사람들과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상호 호혜적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우정이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적 관계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쌍방이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부자관계, 부부관계, 지배관계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들을 국가의정부형태들과 연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참된 우정은 좋은 삶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잘 살아가고 편히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좋은 사람에 있어서 이타적인 사회적 관계로서의 참된 우정이 본질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정의 주요 특징은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좋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도 우정의 특징이 참이라면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참이어야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사람은 자기 친구를 위해 행동하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의지가 약한 사람은 나쁜 의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죽으리라는 것은 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큰 고귀함을 얻는 것이다. 그는 하찮은 즐거움을 버리고 짧은 순간의 큰 즐거움을 얻기를 더 좋아하고 자질구레한 행동들보다 하나의 훌륭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든 칭찬받을 만한 행위들에 있어서 좋은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큰 몫의 고결성을 배정한다.

 

(출처/만갑이네 글판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