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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동양철학

중용(中庸) 硏究(二)|

by 윈도아인~♡ 2012. 3. 17.

2) 된 사람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

된 사람의 길은 두루 미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평범한 부부의 어리석음이라도 함께 알 수 있지만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평범한 부부의 못남으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늘과 땅의 그 큼에도 사람이 부족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된 사람이 큼을 말하면 천하도 이를 싣지 못하고 작음을 말하면 천하도 이를 깨뜨리지 못한다.
《시경》에서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고기는 못에서 튀는구나”라고 했다. 길[道]이 위 아래 가득 차 있음을 말한다. 된 사람의 길은 부부에서 시작되지만 그 지극함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찬다.
[君子之道, 費而隱.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제대로 산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라면 우리네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미련을 떨쳐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중용》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누구에게나 제대로 사는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그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된 사람의 길은 부부에서 시작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고 하니 우선 내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이가 차면 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어 가정을 꾸미고 사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살이이다. 그러나 서로 남남이던 사람이 만나서 진정한 부부로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시작도 어렵지만 그 과정은 단 하루라도 그냥 지나가지지 않는다. 부부에서 시작되는 된 사람의 첫 걸음은 어떤 것이고 또 그 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함께 떠나보자.
성인 남녀가 연분이 닿아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는 것은 정말 평범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 있는데 그 관문은 참으로 이상한 문이다. 그 문은 내가 열고 지나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아니, 실제로는 우리가 그 문을 열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 문은 더욱 단단히 잠겨서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다시 어떻게든 힘을 들여 그 문을 지나면, 다시 더욱 단단해진 그 문이 어느 새 앞을 가로막는다. 계속하면 할수록 그 문은 더욱 단단해질 뿐이고 결코 우리를 지나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문을 지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문이 스스로 열려 우리가 지나가도록 허락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난관은 또 있다. 우리가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 기다리는 한 그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다. 분명히 그 문을 지날 수 있는 길이 있다. 《중용》에서 말하는 ‘된 사람의 길’이 바로 그 길로, ‘된 사람의 길’을 가면 반드시 그 관문 너머에 다다를 수 있다. 이제 그 길을 찾아보자.
부부가 되기 위해서 두 남녀에게 꼭 필요한 것은 각기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서는 것이다. 남이나 어떤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남편 또는 아내가 되어야 한다.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의) 남편,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첫 걸음이라면 그 다음은 한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한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이다. 아내를 사랑하려면 한 남편으로서 우뚝 서야 하고 남편을 사랑하려면 한 아내로서 우뚝 서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 온전한 사랑, 그것을 《중용》에서는 ‘자기를 다하여[盡己]’ 사랑함이라고 한다. 그래서 ‘효’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남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남편이 자기 마음을 다하고 자기를 다했을 때 저절로 이루어진다. 참 이상스럽게 여겨지지만 한 사람이 자기를 다했을 때 거기 온전한 한 남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온전한 한 아들의 모습이, 온전한 한 아버지의 모습이 … 온전한 한 사람[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아내에게도 똑같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부부간에 사랑하는 것, 자녀를 키우는 것, 사회생활 이 모든 것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부모에게 효도는 하는데 부부간에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거기 반드시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 부부간에 애정은 깊은데 자녀에게는 무관심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삶의 모든 것이 하나로 관통할 때 거기 비로소 온전함이 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시키는 것은 자기를 다함[충(忠)]에서 나온다.
우리가, 아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반드시 홀로 스스로 넘어야 할 관문은 ‘나[아(我)]’이고 그 관문을 넘어섰을[진기(盡己)]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길[道]이 따로 있어 내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대로 길[道]이다. 이때 내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하고 나를 다했을 때 드러나는 하늘의 소리요[天命] 그 소리에 응답함이 내 삶이다[率性]. 그 소리의 울림․힘․작용․알맹이를 성(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다했을[盡己] 때 그 소리의 울림에 응답이 저절로 일어나고 삶이 길[道]을 드러낸다.

성(誠)은 스스로 이루고, 길은 스스로 길이다. 성은 만물의 끝이요 처음이니, 성하지 아니하면 (만)물도 없다. 그러므로 된 사람은 성함을 귀히 여긴다. 성은 스스로 자신을 이룰 뿐만 아니라 만물을 이루는 까닭이다. 자기를 이룸은 어짐이요 (만)물을 이룸은 지혜로움이니, 이는 하늘의 소리 메아리 침[性]의 축복[德]이요 (된 사람) 나와 천지만물을 관통시키는 길이다. 그러므로 때에 때에 베품이 옳도다!
[誠者, 自成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나를 다했을[盡己] 때 하늘의 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부모에게서 아내에게서 자녀에게서 그리고 세상 만물에서 그 소리의 메아리가 울림이 들린다. 하늘의 소리와 그 메아리 소리는 다른 소리가 아니다.
내가 하늘의 소리에 이끌려 응답할 때 그 길은 더 이상 나만의 길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길이고 내 삶 또한 나의 삶인 동시에 천지만물의 삶이다.
된 사람은 부모에게 따로 효도하지 않는다, 아내를 따로 사랑하지 않는다, 자녀를 따로 사랑하지 않는다, 만물을 따로 보살피지 않는다. 된 사람은 삶 전체가 부모에게 효도요, 아내에게 사랑이요, 자녀에게 사랑이요, 만물을 사랑함이다. 그래서 된 사람의 삶에서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것 같은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부모를 극진하게 모시는 모습은 어딘가는 부족함이 있다는 뜻이다. 아내에게 소홀하다거나 자녀에게 미흡하다거나 어딘가에 반드시 부족함이 있다는 것으로 그것은 자기를 다함이 어딘가에서는 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를 다함이 온전히 이루어진 삶은 그 삶의 극진함이 어디에도 미치지 않음이 없으나 무엇이 일어나든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다하여서 일어나기에 달리 드러나는 모습이 없다. 그래서 “된 사람의 길은 두루 미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 평범한 부부의 못남으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드러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시키고, 함이 없어도 이룬다.[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효도하는 길이 어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다하여 살 때, 그 삶에서 효행의 길이 드러나 보인다. 된 사람의 길 또한 그렇다.

3) 힘써 살 때 길은 저절로 드러난다

‘나를 다함[盡己]’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를 다함’이 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관건인 만큼 그 관문을 넘어야 한다. 사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룬다는 것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니(仲尼)가 말했다. “된 사람[君子]은 중용대로 하고 덜 된 사람[小人]은 중용을 어긴다. 된 사람의 중용은 된 사람이기에 때에 맞춰 올바로 행함이요, 덜 된 사람이 중용을 어김은 덜 된 사람이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앞에서 ‘중용’의 뜻을 ‘일상의 변함없는 삶에서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라고 말했었다. ‘제 갈 길을 바로 간다’에서 ‘바로’를 일반적으로는 ‘치우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는 것[불편불의(不偏不倚)]’ 또는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것[무과불급(無過不及)]’이라고 설명한다. 덜 된 사람[小人]과 된 사람[君子]의 차이는 그 삶이 ‘중용’이냐 아니냐에 있다. 덜 된 사람은 사는데 있어서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있다. 그것을 바로 잡으면 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 점이 덜 된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마치 철부지가 봄이 왔는데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겠다든지, 여름이 아직 멀었는데도 여름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철부지는 철의 바뀜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제 철에 맞도록 옷을 갈아입을 줄도 모르고 떼를 쓴다. 그러니 철부지가 떼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문제는 철을 모르는 데 있으므로 철이 들도록 하면 공연히 떼를 쓰는 것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나를 다함[盡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나를 다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비록 성인이라도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더라, 또 잘 생각해 보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정말 있다’고 알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나를 다함[盡己]’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해졌다면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말자.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이제 《중용》에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길[道]에 대해 귀를 기울여보자.

… “ … 어떤 이는 나면서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큰 어려움을 치르고서 아나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하나이다. 어떤 이는 편안하게 행하고, 어떤 이는 바라는 바가 있어서 행하고, 어떤 이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행하나 그 공을 이룸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 … 할 일을 함은 선을 가려내서 굳게 지킴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삼가해 생각하고, 밝게 가르고, 두텁게 행한다. 아예 배우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배우게 되면 능해지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묻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물으면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생각할 바에는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고, 가르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가르기로 하면 밝지 않음이 있으면 그만두지 않고, 행하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행하게 되면 두텁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한다. 마침내 이렇게 해내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질 것이고, 비록 여린 사람이라도 반드시 꿋꿋해질 것이다.”
[ … 「 …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 「 …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 學之不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 ]

위의 글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온 마음과 온 힘을 쏟으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남들이 어떤지는 따져볼 일이 아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알든지 남들이야 한 번에 하든지 열 번에 하든지 그것은 그 사람들의 삶이고 나는 내가 알아야 하고 내가 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내 삶이다. 여기에 어떤 심오한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이치인데 그렇게만 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여린 사람도 반드시 밝아지고 꿋꿋해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된 사람[君子]은 지금 그 자리에서 행할 뿐 그 밖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지금 부귀(富貴)하면 부귀를 누리고, 지금 빈천(貧賤)하면 빈천하게 산다. 지금 오랑캐 나라에 있으면 오랑캐로 살고, 지금 환난(患難)에 처해 있으면 환난을 겪는다. 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스스로 얻지 못하는 법이 없다.
윗자리에 있다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다고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 빌지 않으니 탓함이 없다. 위로 하늘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된 사람은 쉽게 지내며 하늘의 소리를 기다리는데, 덜 된 사람은 위태롭게 굴며 공떡을 바란다.
공자가 말했다. “활쏘기는 된 사람과 닮은 데가 있다.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자신에게서 허물을 찾는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不陵,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위의 글에 나오는 된 사람[君子]은 엄격하게 말하면 된 사람이기보다는 된 사람이 되려고 자기를 다하고 있는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기를 다하여 사는데도 때로는 허물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그 허물의 탓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스스로 다하지 못함을 메워간다. 이런 사람은 이미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마주 대하여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다하여 살아갈 때 ‘자기를 다함[盡己]’이 비로소 가능하다. 하늘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온갖 것을 탓하며 사는 사람은 사실 자기의 삶이 없다. 그 삶의 주인이 그렇게 많은데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 자기를 다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기를 다하여 살 때 ‘자기를 다함’이 일어난다. 된 사람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 된 사람의 삶이 삶의 길[道]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삶의 길이,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닌 다른 된 사람에게서 드러난 삶의 길이 곧 내 삶의 길이지는 않다. 내 삶의 길은 내 삶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관건이다! 길[道]은 그렇게 드러난다.

3. 맺는 말

큰 바위가 스스로 제 모습을 만들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몸이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참된 자기 모습은 자기를 다했을[盡己]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바위는 단지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세월의 풍상을 꿋꿋이 견디는 일-을 하면 저절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세월을 꿋꿋이 견디는 일[성지(誠之)]과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는[성(誠)] 것은 다르지 않다.
된 사람의 길[도(道)]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할[성지(誠之)] 때 자기를 다함[성(誠)]이 이루어지고 길이 드러난다.
‘내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이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다. ‘답’뿐만 아니라 질문 또한 대신해 줄 수 없다. 내 삶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면 그 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나를 찾는 공부이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삶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알게 된다. 내 삶의 맛은 사실 나의 맛과 다르지 않다. 《중용》에서는 그것을 성(性)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의 맛’이 제 맛을 내기 위하여는 내 삶이 자기를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의 맛은 참된 내 맛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참 맛’을 볼 때, 그 맛은 단지 ‘나의 맛’이 아니라 나와 천지만물이 하나인 삶의 근원으로부터의 맛이다. 왜냐하면 ‘나의 참 맛’을 낼 때의 나는 이미 자기를 다한[盡己] 만물과 하나를 이루는 ‘나’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늘 아래 온전히 자기를 다해야 그 맛을 다 내고, 그 맛을 다 내면 사람의 맛을 다 내고, 사람의 맛을 다 내면 만물의 맛을 다 내고, 만물의 맛을 다 내면 하늘과 땅의 보살핌을 도울 수 있고, 하늘과 땅의 보살핌을 도울 수 있으면 하늘․땅과 더불어 셋을 이룰 만하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위의 글을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온전히 자기를 다함[지성(至誠)]’에 달려 있다. 정말이다! 《중용》의 소리는 온전히 자기를 다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국화(菊花) 옆에서
서정주(徐廷柱)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시인은 국화꽃에서 하늘의 울림을 듣는다. 무서리와 함께 피어난 노오란 꽃잎은 그 울림에 응답함이다. 그 모습이 가냘프더라도 그 한 송이의 꽃에는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는 국화의 모든 것이 담아져 있다. 그 메아리가, 그 떨림이 작더라도 그 소리는 하늘의․근원의 소리와 다르지 않다.

하늘의 명함이 성이요, 성에 따르는 것이 길이요, 길을 (닦아)가는 것이 가르침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의 부름을 받아 그 소리에 응답함이다. 그 응답이 삶이다. 응답하는 소리의 떨림-메아리-은 그 삶이 온전할 때 하늘의 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만물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메아리 소리는 모두 다 다르다. 그 다름이 하나 하나의 사물, 하나 하나의 삶이 지니는 의미이다. 나는 내 삶의 소리, 나의 소리를 내어야 한다. 나와 당신은 서로 다른 자기만의 소리를 그러나 하늘의 소리와 다르지 않은 소리를 내어야 한다. 하늘의 소리와 다르지 않은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몫이고, 그 몫은 자기를 다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삶에는 떨림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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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철학의 근본개념〉, 《외대논문집》(제26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서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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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性敏, 〈戴震의 考證學的 氣一元論에 대한 硏究-乾嘉 考證學과의 知性史的 關聯을 中 心으로-〉, 高麗大學敎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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