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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동양철학

[스크랩] 동양사상의 이해

by 윈도아인~♡ 2012. 3. 17.

동양사상의 이해

  (이문주 교수의 강의록)

 

1. 동양사상이란 무엇인가?

 

 

동양사상은 동양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삶의 방식과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는 사유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때문에 주어진 환경이 다른 곳에서 형성되어진 서양의 사상과는 다르며,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사상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사유형태를 규정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마다 주어지는 새로운 역사적인 조건에 의하여 변화하고 발전을 하게 된다. 즉 사상은 최초에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후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면서 보다 발전된 사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상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동양사상을 연구하고 배우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삶과 사유방식이 동양사상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오늘의 우리의 사상을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의 동양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 발전을 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새로운 사상은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여 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동양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적으로는 동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며, 아랍이나 인도, 동남아시아는 포함이 되지 않는다. 다만 인도사상 중에서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화하여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되어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또한 동아시아의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지역에서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제외를 하고, 동아시아 전체 지역에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상으로는 유가사상, 도가사상, 불교사상, 묵가사상, 법가사상이 있으며, 송대의 성리학과 명대의 양명학, 청대의 고증학과 실학 등이 있다. 이러한 사상들을 통하여 동양사상의 형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사상은 서양사상과 구분하여 동양인의 세계관 인생관 자연관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인들의 사유는 지극히 다양하여 국가마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각각의 사상과 철학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과 민족 국가들에 영향을 미친 것을 말한다면 유교 불교 도교라고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유교 도교는 중국에서 발생을 한 것이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을 한 것이다.

 

유교는 유학 성리학 주자학 양명학 도학 이학 실학 등으로 불리어지지만 모두 중국 고대의 사상들을 자양분으로 하여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맹자에 의하여 이론적인 체계가 확립이 되고 뿌리를 내렸으며 각각의 시대와 국가 민족마다 그 시대와 국가 민족의 기질과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서 성리학 주자학 양명학 도학 이학 실학 등의 이름으로 줄기가 뻗고 또 꽃을 피웠던 것이다.

 

도교도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의 민간 사상을 자양분으로 하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노자 장자 등에 의하여 학문적 체계와 이론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유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대와 민족과 국가에 영향을 미쳤으며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는 인도의 고대사상인 힌두교의 영향 아래서 발생하여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 쪽으로 전파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중국으로 전파가 되었다. 중국으로 전파된 불교는 초기에는 도교 사상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특이한 중국불교사상이 되었다. 한말에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수당대에 가장 성행하였으며 이후 동아시아 전체 국가에 중국화 한 불교가 전파되어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고 또 영향을 주었다.

 

각 사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유학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것이 仁이라고 하는 인간 사랑의 정신으로 표현되어진다. 또 도교는 인간의 자연적인 삶에 관심이 많으며 無爲自然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도덕이나 예절을 부정하고 자연스런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다. 불교는 이 세상을 고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고통과 번뇌가 인간의 마음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마음을 끊는 空 또는 해탈적인 삶을 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사상같은 유교 도교 불교는 동양의 역사 속에서 때로는 갈등 관계를 갖기도 하였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상적인 깊이를 더하여 왔다. 특히 성리학 같은 사상은 유교적인 입장에서 불교 도교를 비판하는 이론체계이지만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불교 도교의 이론체계를 유교 속에 수용하는 역할도 하였으며 그것이 사상의 깊이를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동양철학에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형성된 제자백가의 사상들도 있으며 각 나라마다 고유한 민속 신앙과 사상들이 있을 것이다.

 

 

 

2. 동서철학의 비교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개인이나 국가나 문화로부터 받는 인상을 토대로 하여 그것의 특징은 이러이러하다고 단정을 내린다. 이 인상이 단편적일 때 단정은 속단이 될 수 있고 속단은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속단은 여러 가지 폐해를 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일반화를 시도하고, 이것으로 우리는 대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그 개념을 통하여 대상을 이해한다. 그러나 속단이 아닌 정확하고 타당한 일반화는 단편적인 인상을 넘어서 그 본질을 파악할 때 가능하다.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일반화된 개념을 가지고 그 문화의 특징을 지적하는 일은 흔히 우리가 하는 일이며 또한 불가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편적인 인상으로 일반화 할 수도 있고 본질적 파악에서 오는 개념으로 일반화 할 수도 있다. 물론 동서문화의 본질적 파악에서 오는 개념을 가지고 동서문화의 특징을 묘사할 때에 이런 묘사는 동서문화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흔히 동서문화의 특징을 말할 때 서양의 물질주의와 동양의 신비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일반화는 깊은 생각과 성찰없이 동서문화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동양에도 물질주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서양에도 신비주의가 결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현대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말미암아 세워진 물질문명을 근거로 관찰할 때, 서양은 물질주의라고 하고, 동양은 이런 물질문명이 발달되지 않아 정신주의 또는 신비주의라는 말로 묘사했는지 모르지만, 철학적 또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비교는 타당성을 잃는다. 비교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서양은 지성이요 동양은 직관이라는 특징을 지적할 수가 있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지성적이요 이성적이요, 논리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직관은 보는 것이요 전체를 관망하는 것이고, 지성은 보는 것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보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다. 먼저 보고 경험하고서 본 것을 분석하고 궁리하고 추리하고 가정하는 것이다.

 

동양의 직관도 보기만 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고 생각하고 궁리하지만 역시 직관적 관망을 강조한다. 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은 중국의 철학적 방법은 농부의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즉 농장이나 곡식과 같이 농부가 다루는 것은 모두 이들이 직접적으로 보고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들이 직접 파악한 것을 가지고 철학을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인이 사용하는 용어도 암시적이며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는 것을 그대로 말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데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정밀한 개념적 묘사가 없고 본질적으로 詩的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 문명을 토대로 하여 성장한 서양문화는 상인의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희랍의 철학자가 살았던 곳은 도시요 또 도시는 상인들의 활동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의 이성에 관한 이해가 오늘에 와서는 객관적이요 타산적이요 조작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을 보더라도 서양철학의 기본적 견해는 상인의 견해라고 할 수가 있다.

 

동서사고의 차이점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규정지은 현대철학자는 노드롭(Northrop)이다. 그는 사고의 두 가지 기본적 개념을 하나는 직관에 의한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가정에 의한 개념인데 전자는 동양인의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서양인의 사고방식이라고 보았다. 직관에 의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감지된 것으로 인하여 그 뜻이 전부 주어지는 것으로 추측을 통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보고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에 의한 개념은 연역적 이론의 가정으로 말미암아 그 전적 의미가 나타나는 개념으로 여기서 연역적 이론이란 가정과 정리로 구성되며 가정은 논리적으로 정리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가정이 주어지면 정리는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은 이 가정에 의한 개념으로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로써 이 세계가 구성되었다는 이론을 세워 최초로 서양철학에 가정에 의한 개념을 소개한 사람이다. 곧 원자라는 관찰할 수 없는 실제를 가정한 후 이로부터 연역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서양의 합리적 논리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쉘돈(Sheldon) 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대비로 동서철학을 비교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동양에서는 궁극의 실제가 이 현상세계의 데이터에 의한 논의로는 증명될 수 없으며 직접경험에 의하여 체험되어야 하며, 철학이란 인생의 길이며 그것에 대한 사고가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의 실천이다. 즉 실천과 함께 시작을 하고 궁극의 실재의 체험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본래 실천적이며 비록 논의가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이론적인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이란 실재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며 사물과 사건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가를 추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인생의 길은 아니다. 비록 논의가 바른 길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의 입증은 이성에 의하여만 증명이 된다. 즉 실재는 밖으로부터 주시하는 대상이요, 직접 경험 즉 자신의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궁극의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쉘돈은 서양은 리얼한 것을 보기를 원하고, 동양은 리얼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서양은 내가 객관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요, 동양은 자기 자신이 바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의 사유형태는 외계의 물질을 변화시켜 소위 과학문명을 이루어 풍부한 물질적인 경제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동양의 사유형태는 인간의 내적인 잠재의식을 일깨워 자시자신을 변혁시켜 도나 無我의 경지에 이르는 정신적 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서양은 객관적 외계에 관심을 두고 동양은 주관적 내적 세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 둘째로 서양은 우주론 세계사 자연철학 더 나아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주어진 세계에 대한 서양의 관심은 분화하여 화학 물리학 생물학 등에 두게 되었으며, 동양은 처음부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양은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통하여 현세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동양은 자연이나 사회상태를 개량하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세속적인 현세를 넘어 궁극의 종교적인 세계에 도달하는데 있었다. 셋째로 서양은 현세주의 창조적 진화 돌연변이 진보 등과 같이 역사적으로 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발전적인 시간의 가치와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은 자연이 갖는 시간의 경과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직 선악의 차별을 초월한 심원한 내적인 세계로 들어가 근원적인 하나와 만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서양은 그 사상의 밑바탕에 이즘(ism) 즉 어떤 主義가 깔려있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 직관주의 유물주의 실증주의 실용주의 구조주의 실존주의 등이 그것으로 이렇게 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각각의 사상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철학의 장점은 각각의 철학의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 사상을 이해하기가 쉬우며 다른 사상과의 비교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철학에 있어서는 각각의 사상간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 사상간의 유기적인 전체성을 중요시하고, 사상간의 한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결코 사상간의 무질서한 혼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동양의 논리는 조화의 논리인데 반하여, 서양의 논리를 투쟁의 논리라고 주장하거니와 실제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서양적인 이즘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동서사상을 비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현대사상의 반주지주의적인 사상들 즉 쇼펜하우어의 살려는 맹목적 의지의 부정과 니이체의 초인의 철학을 기점으로 베르그송의 생철학 칼야스퍼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에 반영된 붓다 용수 공자 등의 연구를 비롯하여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현상학 등 많은 반주지주의 철학사조들이 한결같이 서양의 전통적인 이성의 철학에 반대하여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서양의 반주지주의 철학들이 일부는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동양의 직관적 세계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을 여러 점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비관론 주정주의 절망 상실감 소외감 무력감을 나타내는 실존주의는 개별적인 주체를 우선하며, 개체는 의식을 가지고 유일하며 유한하고, 타인과 타물과 교섭하며 절대로 물건처럼 연구대상이 아니며, 어느 집단에 소속된 일원이나 전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공통된 딱지는 질색이다. 이런 개체는 자유롭다. 사물은 자연과학적 법칙으로 설명될는지 모르지만 개인은 실험 관찰 계량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유로운 반면에 그 개인은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전적인 책임을 진다. 동시에 외부로부터의 제약 즉 그것이 유일신이건 창조주이건 추상적 이성이건 사회집단이건 간에 얽매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 요청된다. 성실한 실존적 삶이란 자율성 창의성 생동감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기독교적 절대주의나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와는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삶의 밑바탕을 꿰뚫어 보는 여러 가지 직관적 혜안을 가짐으로서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할 것은 다른 서양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론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철학들은 그 어느 것도 이론이 아니라 수행과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깨달음과 해탈의 직접적인 체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가 있다. 우리가 진실로 실존과 無 혹은 죽음에 도전하려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통하여 실재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된 지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동양철학은 한갓 사상 이념 생각하는 방식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지도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흔히 종교와 철학 내지 과학과의 극렬한 투쟁으로 점철된 서양철학사를 훑어본 사람들은 동양철학과 종교와의 밀접한 연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실 기독교란 유일신 종교만이 유일한 종교요 따라서 철학은 언제나 그 독단적 교리를 파괴하는 신성모독 우상파괴의 짓거리를 자행하는 망나니로 보아온 기독교적 철학시대의 유물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에게 동양철학과 동양종교는 구분할 필요가 없고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3. 유학이란?

 

1) 유학이란 무엇인가?

 

유학은 2500년 전 중국의 노나라에서 출생한 공자(공구, 자는 중니)에 의하여 그 이전에 있었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역사 등을 종합 정리한 것으로서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태학을 세워서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며 유학사상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들어와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으로는 불교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교의 양면에서 민족사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유학사상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평가가 되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아무리 많이 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라 하겠지만 반성 자체가 과거에 대한 자학에 치우치거나 과거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결론지어질 때는 문제가 심각하여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학을 연구한다고 하는 것은 유학의 영향 하에서 형성되어진 과거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기 위하여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유학 자체가 모든 인류에게 미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할 수가 있는가 없는가를 검토하여 봄으로서 살아있는 유학 즉 지식으로 암기되어져 있는 유학이 아니라 현재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말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유가적인 생활방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하겠다.

 

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연원으로서 중국 고대사의 시대적인 배경을 알아야 하고 사상의 내용으로서 주로 하는 경전을 알아야 하며 주요한 사상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당시 사회에 어떠한 이념을 제시하였는가 하는 사상의 변천사를 알아봄으로서 오늘날 요구되어지는 유학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다. 또 사상이 형성되어지는 데는 간과할 수 없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는 즉 역사적 제약과 지리적 제약으로서 모두 인간 사유에 있어서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인 이상 사회에서 생활하고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서 형성되었던 지식의 집합인 인간의 사상이 이것의 제약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중국사상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강한 인간중심적인 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가지지 않으며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알 수 있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조건으로서 인간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뿌리깊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가혹한 자연조건 하에서의 농경생활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이외에 의지할만한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하였으며 인간만이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의 강한 신뢰감은 그들로 하여금 신을 버리고 고유의 철학체계 특히 사회사상(윤리사상) 만을 고도로 발달시키는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서 중국인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비하여 고대 그리스인이 이론과학을 중시한 것과는 좋은 대비가 된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사상의 역사적 배경은 상업문화로서 항상 고향을 떠나 각지로 통상과 무역을 하러 가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산천과 풍물과 문화 사상 등을 보게 되어 쉽게 경이스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철학이 경이스런 감정에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또 희랍철학이 식민지에서 근원하기 때문에 철학자의 생활은 아주 한가하여 실제로 사회와 정치에 책임을 가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 철학이 대부분 순수이론을 연구하게 되어 과학이론과 자연철학에 치우치게 되었고 희랍초기의 각파의 우주론과 본체론은 이러한 것이 만든 것이다.

 

희랍철학은 이미 한가한데서 생겨났으므로 플라톤은 또 한가함이 지혜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아직까지도 서양사람은 문화가 한가한데서 생겨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이스러움에서 시작하여 한가한데서 이루었고 흥미의 철학에 근본하였다. 현실의 문제는 절박하지 않았으며 현실문제는 이미 모두 해결되어서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사물에 대한 경이스러움과 흥미를 가지게 하였다. 때문에 희랍에서 이루어진 이론과학은 인생의 여사이고 잠시 우리 인생은 밀어놓고 감정을 가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우주와 자연을 이해한데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이루어진 이론은 비록 생활과는 거리가 멀지만 스스로 독립한 계통과 정리된 세계가 있다. 서양 사람이 항상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고 사람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희랍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한편 중국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농업정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자연환경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위협을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단합할 필요에 의하여 원만한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가 많았으며 한 장소에서 장기간 지내게 됨으로서 자연에 대한 경이스러운 감정보다는 정을 기반으로 한 윤리적인 의식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던 정치의 담당자로서 聖君과 賢相들이었다. 그들은 실제 사회의 정치적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들과 더불어 슬픔과 기쁨을 같이 나누어야 하니 그 문제가 자연에 대한 경이스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 대한 사려깊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사상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하에 잘못됨이 있는 것은 오직 나 한사람에게 그 죄가 있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마음은 결코 한가한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는데 손발에 못이 박히었으며 공자가 도를 행하는데 안절부절한 것은 모두 이러한 마음의 좋은 예라고 하겠다.

 

이 때문에 당면한 삶에 대한 여러 문제에 부딪혀서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순 이론적인 연구에 종사할 여가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인 성인이 되고자 하였으며 현실적으로는 당면한 현실문제를 순리데로 해결하는 능력있는 임금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이론에 종사할 수만은 없었고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가 급하였다. 만약 희랍철학이 경이스런 감정에서 생겨났다고 한다면 중국의 사상은 현실적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한 사려깊은 걱정에서 생겨났다고 하겠다. 때문에 중국인은 항상 어려움 속에서 발전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며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걱정하는데서 발전적인 삶을 기약할 수 있으며 편안하고 나태함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 발생한 유학은 자연히 현실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윤리적인 특성을 강하게 가진 사상으로서 주어진 자연과 오래 접촉함으로서 자연이 어떠한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순환 변화하는 것을 체득하였으며 이 자연법칙을 모든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성 변화하는 완벽한 존재로 인식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가철학의 이론과 실제는 모두가 자연 속에서 실제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터득된 것으로 순수사유만을 통하여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유가철학은 구체적인 자연현상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가장 합당하고 실용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였으며 그 철학의 실천적인 목적은 인간의 세계를 자연과 같이 완벽한 질서를 갖추려고 하는데서 윤리적인 특성을 가진다.

 

유학은 한마디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儒字는 人(사람인)과 需 (구할 수)의 합자로 되어있어 인간사회에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뜻이 풀이된다.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에 바탕한 인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기독교와 비교를 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이론이 전개된다면 유학은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이론이 전개된다. 유학의 핵심개념이 仁인대 仁은 二와 人의 합자이다. 즉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구조인 너와 나라는 인간관계를 뜻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유학의 목적은 나를 닦는 修己와 남을 다스리는 治人에 있다. 수기를 완벽하게 하면 聖人이 되고 치인을 완벽하게 하면 王이 되는 것이다. 안으로는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王化를 이룩하는 것 이것이 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즉 인간의 가치를 고양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유학의 근본정신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존과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면 값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학은 만물 가운데서 인간을 근본으로 삼으니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을 근본으로 하여 인간의 갈 길을 추구하니 인도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 인간의 가치를 창조해 가니 인문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의 학문은 과학이 주도하고 과학은 자연과학이 주도하여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사유는 가치중립을 특성으로 한다. 즉 사실 자체의 究明이 문제이고 그 사실 해명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실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만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 일반이 체계적인 지식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지식일변도의 학문경향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배태되어 있던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지덕의 합일을 주장하였으나 지덕이 동일한 등식에서 합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의 우선을 인정한 합일이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지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지가 완전하면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가 근본이고 덕은 지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일사상은 이미 지의 존중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입장은 전승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최초로 지식을 지식으로 파악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양적 전통에서 발전된 현대학문이 지식일변도로 기울어진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식일변도의 학문경향은 물론 현대의 과학문명의 발달을 가져와 얼마전까지는 제왕도 누리지 못했던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지식일변도의 학문은 지와 행의 균형을 잃게 하여 인간은 내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이 갈등은 생활 주체로서의 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게 하며 인간의 자기 소외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학에서의 학문은 단순한 이해를 위주로 한 지식의 추구가 아니라 철저하게 체득하기를 강조한다. 단순한 이해는 지식으로 끝나되 체득한 지는 행동과 직결하게 된다. 여기서 유학에서의 학문은 체계화된 지식에 그치지 않고 생명의 조화로운 창달을 위한 활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유학사상의 체계화와 공자

 

공자는 한 개인의 지적 자질과 업적에 의하여 인류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는 후세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많은 전설과 일화가 그의 이름을 아주 두텁게 감싸고 있는 까닭에 그에 대한 진실을 알기가 어렵다. 진실의 왜곡과 수식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동기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독실한 추종자들이 공자를 추앙하고자 그에 대한 기록을 신성화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익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들이 다져놓은 특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왜곡시키고 거짓되게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많은 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있는 자료를 토대로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2500년이나 전에 역사적 사회적 지리적 제한 속에 살았던 공자의 사상이 현대에 그대로 재현될 수는 없을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불멸의 생명력을 가졌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현대의 찰라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현대인에게 시사하여 주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B.C 722~481) 로 이때는 이미 제철기술의 발달로 농기구 수공구등 일반적인 생산용구들이 철제품으로 사용되어 농업과 수공업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상업도 발달하여 사회 경제의 발전과 아울러 사회 전체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고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은 명목상으로는 주나라 천자의 속국이었으나 실제로는 자주적 또는 반자주적인 독립국이었다. 사회 경제의 발달과 함께 각국의 귀족들은 서로 토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한 전쟁으로 많은 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천인으로부터 해방된 자나 몰락한 귀족이나 하층 귀족출신들이 서서히 士라는 사회계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士계층은 빈번한 전쟁 속에서 군사 외교 정치 활동을 통하여 널리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들은 당시 사회변혁의 시세에 적응하면서 사회변혁의 추진작용을 수행하였다.

 

공자는 인본주의적이며 새로운 사회제도 확립을 위하여 고대의 전통문화를 정리 비판 개조하여 신체계를 수립하려는 당시의 일부 진보적 지식계층의 대변자이었다. 그 이전시대에 문화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격심한 사회변동이 일어나자 이러한 문화독점현상은 변화가 요구되어지고 몰락귀족과 하층귀족출신은 이러한 변화의 교량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문화 학술 및 각 방면의 지식을 습득하려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개인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문화를 전수하는 새로운 교육제도를 창시하였는데 공자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태어난 탁월한 교육자였다.

 

공자 사상의 근본적인 이념은 먼저 전통의 재인식이었다. 즉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이상적 사회를 찾아내고 그러한 사회를 건설할 새로운 철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모든 존재의 본질과 근원은 역사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봄으로서 공자는 현재의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으며 과거의 사실 중에서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것과 피해야 할 것을 찾아내었고 이러한 역사관은 비판적인 역사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과거와 외형적으로 동일한 체제를 세움으로서 선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한 과거의 모방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반복을 도모하였다. 영원한 개념은 과거 속에 명료하게 나타나며 공자는 과거를 조명함으로서 어두운 현재에 빛을 가져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야말로 영원한 진리의 전통에서 나온 새로움을 삶의 본질로 여긴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진리가 과거의 역사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과거를 연구하여야 하고 과거를 연구함에는 선악을 구별하여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옛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진정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溫故而知新) 그러면 공자가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낸 새로운 철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로 당시까지는 일반적으로 평민층보다 높은 계층에 속했던 조상의 후예와 명문출신의 사람을 가리키던 君子라는 말을 선과 진리와 미를 다 갖춘 이상적인 인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출생과 관계없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有敎無類) 그러나 그들의 지적능력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스스로 하고자 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으며 깨달은 이치를 표현하고자 하지 않으면 펴주지 아니하며 한모퉁이를 들어 보여서 세모퉁이를 알아내지 못하면 반복하여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不憤不啓 不비<心+非>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그는 군자의 성격 사고형태 및 거동을 소인과 비교하여 군자는 정의를 추구하고 소인은 이익을 추구하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의 마음은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넓지만 소인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에 쌓여있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군자는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소인은 위엄이 없으면서도 교만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군자는 슬픈 일을 당해도 자제할 줄 알지만 소인은 조그만 슬픈 일에도 자제심을 잃는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만 소인은 언제나 남에게서 구하려고 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군자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영화뿐만 아니라 불행도 잘 참으며 두려움없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탓하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군자는 말이 행위를 앞서는 것을 삼가기 때문에 언제나 먼저 행하고 행동에 따라서 말을 한다.(先行其言 而後從之)

 

둘째로 공자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를 버리고 자신의 깨끗한 삶만을 추구하는 은둔자들처럼 은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개조하려고 노력을 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서 단연코 후자를 택하였다.(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그리하여 그는 사회변혁과 질서유지의 수단으로서 예를 중시하게 되었다. 예는 관습에 의하여 보존되고 관습은 집단 전체의 영혼을 창조하고 또 관습은 집단전체의 영혼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관습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인간은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공자는 지금까지 타율적으로 행하여지기를 강요되었던 예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인간에서 발견하고 인간의 자아에 내재하여 있는 도덕률을 자각하여 그 사상의 기초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두었다.(天命之謂性) 공자는 인간의 본성을 仁이라고 한다. 仁은 인간성이며 도덕성이다. 仁이라는 글자는 원래 二人의 합자로서 사람의 기본적인 존재구조인 너와 나라는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을 첫째로 인간이 무엇이며 또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 사실성과 당위성의 문제로 토론하고 둘째로는 인간존재의 다양성의 문제로서 토론을 한다.

 

첫째로 인간은 되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의식적인 사고를 무시하고 본능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본능을 초월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동시에 이 본능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일반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예를 실행하여야 한다.(克己復禮) 그러나 이 예는 인간을 구속하고 질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여 있는 도덕률의 자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먼길을 가려는 사람이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면 훨씬 편하고 빨리 갈 수 있듯이 오히려 인간을 편하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바르게 실행하기 위하여 예 실현의 도구로서 형식을 익혀야 하며 예 실현의 주체로서 개인의 수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둘째로 인간의 본성은 실제적인 인간존재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인 면에서 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나 개인의 습관, 성격, 연령, 발전단계 지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性相近 習相遠) 연령의 차이에 대하여 공자는 젊을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서 여색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에는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싸움을 경계하여야 하고 늙어서는 혈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탐욕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君子有三戒 小之時血氣未定戒之在色 及其壯也血氣方剛戒之在鬪 及其老也血氣旣衰戒之在得) 그리고 공자는 인간을 네 가지의 유형으로 구별하였다. 첫째로 날 때부터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성인이 있고, 둘째는 배워서 지식을 얻는 사람이 있고, 셋째는 배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만 계속하여 노력하는 사람이고, 넷째는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다.(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學之 困而不學) 이중에서 둘째 셋째 사람은 실패를 할지 모르지만 계속하여 노력하는 사람이고 넷째의 사람은 자만하여 배우지 않거나 스스로 용기를 잃어 노력을 포기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自暴自棄)

 

셋째로 공자 사상의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道라는 개념이다. 그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夕死可矣)고 할 정도로 도를 절실하게 갈구하였다. 그러나 이 도는 과거에는 구체적인 일상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을 공자에 의하여 원리적인 의미로 전환이 된 것으로서 인간의 내면성을 탐구할 때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신념과 모든 행위에 있어 기본이 되는 준칙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모든 원리의 원리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공자는 관념적인 사색보다도 실지로 우리가 생활하는 현실의 토대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것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가운데 일상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인간이 살아나가야 하는 길인 人道를 사상의 중심과제로서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귀신을 섬기는 방법을 묻는 제자에게 "사람도 능히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며 죽음에 대하여 물었을 때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季路問事鬼神 子曰未能事人焉能事鬼 曰敢問死 未知生焉知死) 귀신이나 죽음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경험세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문제를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또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막연한 상상이나 엉터리 지식으로 표현하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당시의 봉건제후들이 하늘에 있으면서 후손들의 운명을 감찰하는 그들의 조상들의 힘을 업고 통치한다는 종교적 권위와 특권에 대한 간접적인 부정이며 그 대신 그는 통치자의 자격을 출생신분과 관계없이 인품과 역량과 학식의 함수관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이며 권세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신성한 권위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간주되었었다. 공자는 어떠한 통치자와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아주 짧은 기간만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포부를 생전에 실현하는데는 실패를 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에 몸을 바치게 되었고 그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전념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한 생애를 보냈지만 그의 사상을 길이 후세에 남겨 2500여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공자의 이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4. 老子의 생애와 사상

 

道家의 思想은 世俗的 思考方式이나 價値觀에 대한 비판이며 당시의 人間에 대한 不信과 暴力的인 戰爭과 內亂의 상태를 종식시키는 길은 名分을 밝히고 禮를 실천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名分과 禮와 같은 社會的 規範과 虛僞를 버리는 데 있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人間의 知慧, 人間의 欲求, 人間의 行爲, 人間이 規定한 世俗的 價値 등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의미에 있어서 否定의 論理가 전개된다. 禮나 名分을 밝히고 실천하는 것과 같은 人爲的 行爲는 언제나 어긋남이 따르게 마련이며 결국에는 强制的 法令이나 暴力에 호소할 수밖에 없으므로 세상은 어지러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서와 평화를 위한 정치로서 無爲的 自然主義 또는 放任主義를 주장하였다. 때문에 道家사상은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 현실의 혼란을 초래하게 한 원인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하고 거부한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혼란을 초래하게 한 원인 즉 일체의 人爲的 요소를 부정한 것이다. 그들은 人間의 常識과 固定觀念에 대하여 懷疑를 제기하고 人間의 지식과 가치판단의 상대성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人間의 모든 知識의 破棄와 모든 價値判斷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懷疑와 否定을 통하여 도달된 眞知의 世界는 日常的 相對知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세계는 말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고 한다. 즉 世俗的 價値判斷에 의한 옮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등에 差別을 두기보다는 어떤 偏見이나 先入見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 있어서도 人間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逃避나 反抗보다는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라고 한다. 이것을 통하여 진정한 人間의 자유가 획득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世俗的 知識이나 價値, 人間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자연과 사회의 필연적 법칙으로부터 人間이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는 自己否定과 現實否定이라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노자는 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그의 저서인 <노자>는 도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도가사상은 유가사상과 함께 중국 사상의 큰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도는 자연에 따른다.'란 말은 노자의 말이다. 이 철학이 동아시아 문화권에 미친 영향은 크다. 이 경우 '자연'이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으로 쓸데없는 인위적(人爲的)인 것을 보태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위(無爲)'라는 것이 노자의 인생철학으로써 또 정치철학으로써 설명되어 왔다. 노자는 말하기를 '무위로써 그러고도 하지 않음이 없도다.'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사물 사건의 어떤 측면은 강조하고 어떤 측면은 간과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특징짓는 일이 많다. 老子思想體系의 특징을 밝히려면 먼저 그의 사상이 어느 시대, 어떤 환경 아래에서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밝혀져야 한다. 이 문제는 老子書의 저작자와 저작시기를 먼저 判明해야 해결이 가능하다. 따라서 먼저 노자와 시대적 배경에 관해 살펴보고, 노자사상의 근원이 되는 道의 의미를 정리하며, 그 사상적 특색을 기술하고자 한다.

 

 

1) 시대적 배경

 

老子의 인물과 生存時代에 관해서나 「道德經」의 저자 및 저술의 정확한 시기에 관해서는 많은 異見이 있다. 老子에 대한 자료는 司馬遷의 「史記列傳」 , 第 3 章, '老子傳'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老子는 楚나라 苦懸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의 동쪽을 말함) 사람이다. 성은 李씨, 이름은 耳, 자는 伯陽, 시호는 聃이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司馬遷의 기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道德經」이 대략 春秋戰國時代에 나타난 중국의 古代思想이라는 점에는 異論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전체가 5천자로써 시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老子」는 그 글이 정밀하고 사상이 심오하여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 哲學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哲學이 나타나게 되는 시대적 상황의 인식이 중요하다. 周王朝가 周室東遷이후 약 550년 간을 東周時代라 말하는데, 東周時代는 다시 春秋時代(B.C, 770~403)와 戰國時代(B.C, 403~221)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당시 시대상의 모습은 전쟁과 흥망의 격동기였다. 기존 사회체제는 신속히 해체되어 가고 아직 새로운 사회체제는 건립되지 못한 채 학술 사상계에서는 百家가 爭嗚하며 학술토론과 사상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郡縣支配로 대체되었으며 富國强兵을 위한 제후들의 토지 쟁탈전이 치열하여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백성들은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되고 있는데, 발달된 철기 무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은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온전히 生을 유지하고자 하는 保身主義 풍조가 팽배하게 되었고 이는 老子思想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배경 아래에서 「老子」는 생겨난 것이고, 또 동시에 이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시켰다.

 

2) 사 상

 

(1) 老子的 思惟의 特徵

 

(가) 懷疑와 否定

 

老子哲學의 논리적 전개는 회의와 부정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언어적 표현들이 「無」,「不」,「非」,「未」,「莫」등의 부정사들과 「何」,「惡乎」,「 」 등의 懷疑辭로 나열되고 있고, 내용에 있어서도 老子는 오직 회의와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어 「道德經」 五千餘言 중에 否定詞가 무려 545회나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老子哲學의 부정적 사유는 왜곡되고 전락된 現象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그 본래의 상태인 "道(自然)"에로의 복귀를 강력히 요구하는 수단으로써 사용하였다고 이해해야 한다.

 

老子의 회의적 태도는 특히 학문과 지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상대적 분별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절대적 眞知, 眞實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無知, 不知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절대적 眞知를 老子는 밝은 진리라 하여 "근본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것을 「復命」이라 한다. 「復命」을 常이라 하고 常을 아는 것을 明이라 한다."고 하였다. (第 16章) 따라서 老子가 회의와 부정의 논리적 전개를 사용한 이유는 사람들에게 상대적 진리에서 벗어나 절대적 진리에로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 文明批判

 

孔子나 老子는 다같이 시대적 모순 및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공자는 舊制度(周文化)를 재건하고 作爲的 노력을 통해 인간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지만, 老子는 인생의 원리와 규칙을 인간자체에서 추구하지 않고 자연의 품안에서 찾도록 노력하였다. 따라서 儒家는 인간과 사회를 강조하였고 道家는 自然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老子는 인위적이며 비자연적인 것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녔는데 이것이「文明批判」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老子가 文明을 부정하는 것은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의 이기심도 더불어 증가하여 人間 本性을 해치므로, 문명 이전의 자연의 본 모습으로 돌아감으로써 참된 행복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道의 意味

 

(가) 根源的 存在로서의 道

 

天下의 萬物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이 그렇게 되도록 하는 存在는 무엇인가? 노자는「天下의 萬物은 有에서 生하며,有는 無에서 生한다.(40章)」고 했다. 다시 풀어 해석해 보면 「天下 萬物의 始作은 無에서 부터다.」라는 말이다. 그 「無」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認識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無에 先行되는 것은 없는가? 이런 식으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부딪치게 된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道」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道는 無形의 實體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時間과 空間을 超越한 絶對的 存在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現象界의 人間이 道의 實體를 알 수 있겠는가? 老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道가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道의 根源 : 道德經 第 1章, 25章)

 

따라서, 「道」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知覺할 수 없는 대상임과 同時에 時空을 超越하지만 그 속에 作用하고 事物에 있어 形態로서 제약이 없지만 有形과 無形, 대립과 갈등, 有物과 無物이 하나로 관통되는 本源的 存在인 것이다.

 

(나) 生成原理로서의 道

 

「道」는 萬物의 根源임과 同時에 萬物을 生成化育하는 原理이다. 道德經에

 

「無는 天地의 始初이고 有는 萬物의 根源이다. (第 1章)」

 

「萬物은 道를 따라서 生成化育되고 있다. 그러나 道는 스스로 나서서 萬物을 主管하지 않는다. 또는 모든 造化의 공을 이룩하면서도 취하는 것이 없고 萬物을 감싸고 사랑해 키우면서도 主宰하지 않는다. (第 34章)」

 

「天下萬物은 有에서 나오고 有는 無에서 나온다.(第 40章)」

 

「道生一하고 一生二하고 二生三하고 三生萬物하니 萬物은 陰氣를 포함하고 陰氣를 지녀 혼연히 일체가 되어 沖化된 化合體를 이룬다.」

 

위의 내용들은 道德經에 나타난 道의 生成을 표현한 것들이다. 결국, 天地萬物은 「道」에 의하여 生成되고 또한 復歸한다.

 

(다) 宇宙法則으로서의 道

 

老子에 있어서의 道는 無爲의 存在에서 無目的的이고 無意識的이다. 그러나 無目的的이고 無意識的인 道에 事物들이 변화하는 어떤 法則이 있다.

 

① 相反運動

 

老子에 있어서 事物의 변화는 그 事物이 發展하다. 어느 限界에 이르면 그 反對 방향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自然法則의 順理를 말함이기도 하다. 예컨대, 有와 無, 難과 易, 高와 低 또는 曲과 直, 多와 小 等 서로 相反되기도 하고 또는 相反相生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老子는 「難과 易는 相成하고 長과 頭은 相較하고 高와 下는 相傾하고 音聲은 서로 和하고 前後는 서로 따른다. (第 2章)」고 하여 相成의 관계를 克明하게 밝혔다.

 

이와 같이 道는 쉴새없이 運行하므로 萬物은 변화한다. 끝이 없이 변화를 거듭하다 어느 限界에 보면 다시 根源의 자리에 돌아온다. (道德經 第 2章에서 크면 가고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온다.) 이처럼 老子는 一切事物 事件들이 그와 반대되는 것을 그 자신의 존재성립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과 萬物萬事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전제아래 그것들이 그 반대되는 것에도 변화하는 相反運動의 法則을 주장한다.

 

② 柔 弱

 

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柔弱은 만물 속에서도 道가 활동하는 작용이다. (第 40章)」

 

「綿綿하여 존재하는 듯하며 이를 쓸지라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第 6章)」

 

위의 말은 道의 創造作用이 비록 柔弱한 것이지만, 영원하며 作用이 무궁함을 說한 것이다. 道가 創造의 과정 속에서 표현하는 柔弱狀은 바로 無爲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道에 의해서 표현되는 柔弱은 萬物로 하여금 被造되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고 自生, 自化, 自長한다는 것을 느끼게 함이다.

 

또 老子는 柔弱을 물(水)에 비유하여 어느 곳이든 미칠 수 있는 큰 활동성과 편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결국 柔弱이란 現象界에서 일어나는 事物과 事件들을 無者에 접근시키기 위한 方法내지는 法則性을 부여했다고 본다.

 

 

(3) 道와 德

 

老子는 變化하는 自然萬物의 根據를 道에서 찾는다. 道는 自然萬物을 生成하여 그 變化를 主宰하는데 그 萬物은 운행하여 다시 道에로 復歸한다. 道의 이러한 작용은 無가 有를 根據 지워주고, 有에서 다시 無를 회복하는 無의 辨證法이다. 또한 道는 存在根據이면서 同時에 萬物에 內在해 있다. 老子는 人間이 自身에 內在한 本性인 道를 자각하여 行爲法則으로 한 것을 德이라고 한다.

 

人間이 自身의 삶을 어떠한 방향으로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이겠으나, 人間이 생성, 소명하는 自然의 原理를 벗어날 수 없는 한, 이 永遠한 道에 입각한 삶을 전개해야 한다고 老子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상대적 世界에서 人間의 타락을 막는 길이며, 有限한 人間이 道의 永遠性과 一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萬物의 原理인 道를 바로 자각하여 실천하는 삶이 곧 道德的 삶이다. 그리하여 그는 德의 原理를 無爲而爲라고 하였는데, 無爲而爲는 人爲的인 것이 아닌 道와 一致하는 行爲인 것이니 人爲가 아닌 道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4) 정치사상

 

춘추전국시대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였는데, 노자는 사회 혼란의 근본원인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상층부의 욕망으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움과 사회의 발전과 기술의 향상, 그리고 과학의 발달을 들어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老子」는 이 두 가지 원인을 근거로 해서 사회를 다스리는 방안을 제시한다. 우선은 통치자가 無爲無慾(第 2章)하여 욕망을 버리고 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생각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생활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백성들의 욕망과 다투는 마음을 버려서 (第 3章), 무엇을 추구하거나 경쟁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욕심이 없게 하고 다투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노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첫째는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는(小國寡民)'것이다.

 

둘째는 우민정책이다. 「老子」는 백성들을 관리하기 힘들게 되는 원인은 백성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옛날에 백성을 잘 관리했던 통치자들은 백성들에게 많은 이치를 밝혀주기 보다는 백성들을 우둔하게 만들었던 것(第 55章)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無爲로서 백성을 변화시키고, 백성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욕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각기 그 고장에 안주하게 하고 밖으로 구하는 것이 없게 만드는 것이 至治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하기가 쉽고, 또 실천하기도 쉬운 것이다. 그런데도, 세간 사람들로서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고, 따라서 실천할 수가 없다. 그 말에는 근원이 되는 것이 있다. 또 모든 현상에는 그것을 통괄하는 궁극적인 원리가 있다. 노자의 말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도」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통괄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리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도」를 이해(체득)할 수 있으면, 노자의 말은 손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일상생활에 실천하기도 쉽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실천함에 의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확립하고, 절대로 불행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을 확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자가 지금까지 말해온 것은 결코 사람의 귀에 기분좋게 들릴 만한 아름다운 말은 아니었다. 또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결코 웅변은 아니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는 절대로 거짓은 없다. 나는 이른바 知者(지식이 많은 자)처럼 박학하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의 것은 모두 다 이야기했다. 모두 남을 위해서 다 내어놓고 주어버린 지금 나는 점점 더 풍부함을 느낀다. 정말로 자연의 이법은 만물에게 이익을 주고 또 무엇하나도 손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자연을 지키고 또 작위하는 일이 없으며, 무엇을 행하는 경우일지라도 결코 남과 다투지 않는 것이다. (第 81章)」 - 이것이 노자의 결어(끝맺음 말)이다.

 

또한, 「노자」는 유가의 일반적인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이다. 노자는 유가에서 요구하는 필수적인 예의범절조차 불필요한 욕망의 결과로 치부하며, 온전히 무위자연 속에서 자유를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범상한 사람들로서는 일상의 속진에 묻혀 꿈꾸기조차 벅찬 완벽한 자유를 실천한 노자란 인물은 확실히 굉장한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까지 가장 위대한 고전의 하나로 「노자」가 평가되고 있는 이유의 하나이다.

 

 

5. 佛敎哲學

 

1. 붓다의 生涯

 

붓다는 B.C 600~500 년 사이에 현 네팔에 있었던 카필라 왕국에서 숫도다나 왕과 그의 부인인 마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姓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다였다. 그를 붓다, 釋迦牟尼, 또는 釋尊이라고 부르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이름이다. 한 나라의 太子로 태어난 싯다르다는 세속에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고뇌하였다. 한 佛典은 그의 고뇌를 이렇게 전한다.

인생은 태어났다가 결국은 병들어 죽고 마는 것 ! 어머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님도 또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아아 인생은 허무하고 괴로운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수렁이 우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은 마치 불붙어 타고 있는 집에 있는 고통과 같았다. 방안이 불붙고 옷깃에 불길이 닿을 때 오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의 한계상황을 초탈하는 것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나고 죽는 문제, 늙고 병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求道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일체를 버리고 혼자 가는 외로운 出家의 길이었다. 왕궁을 떠나 출가한 구도자로서의 싯다르다는 오랜 수행 끝에 서른 다섯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 이때부터 45년 동안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깨달음의 길, 진리의 길을 전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첫째로 어떤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神이나 신의 아들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實相을 깨우친 覺者이었으므로 진리에 대한 독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깨친 진리는 그가 있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항상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둘째로 그는 해탈의 길을 먼저 걸었던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강조하고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였다. 셋째로 그의 가르침은 人間苦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훌륭한 처방이 병의 증상과 환자의 체질에 따라 다르듯이 그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다르게 행하여졌다. 넷째로 그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空論을 배격하고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다섯째 그는 신과 인간과의 건널 수 없는 江을 전제하는 서양종교와는 달리 붓다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였다. 또 당시 브라흐만과 수드라 등으로 계급을 나누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였으며 여성의 출가도 허용하였다. 끝으로 그는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 속에 있으며 의지할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강조하였다. 팔십에 入滅하기 전에 제자에 준 마지막 가르침은 이것을 증명한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워진 自力宗敎의 모습이고 인간의 길, 자기형성의 길을 걸었던 붓다의 참모습이다.

 

2. 불교의 근본사상

 

(1) 緣起說

 

붓다의 가르침은 깨우침을 근본으로 한다. 그의 가르침은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고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길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불교의 근본 사상을 알기 위하여는 붓다가 깨우친 내용이 무엇인지를 일아 볼 필요가 있다. 한 經典에서는 그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의혹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緣起의 法을 알았기 때문이다.] 붓다가 문제삼았던 늙고 병들고 죽는 의혹을 해결하였던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법칙이었다. 그 법칙을 붓다는 연기라고 하였다. 연기라는 말은 Paticcasamuppada로 Paticca(말미암아)와 Samuppada(일어나는 것)의 합성어로서 [말미암아(緣) 일어나는 것(起)]이라는 뜻이다. 연기는 보통 타당성있는 객관적 진리라고 하여 법(dharma)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도 한다. 연기의 의미는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관계없이 홀로 생긴 것이 아니고 1) 공간적으로 고립하여 있지 않고 [더불어] 있으며 2) 시간적으로 연기적 관계에 있고 3)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관관계에 있으며 4) 따라서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이며 그럴만한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호 관련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관계 변화하는 법칙이 있어서 이 법칙에 따라 생성소멸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 변화하는 법칙을 연기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란 다른 것과 관계하여 일어나는 현상계의 존재이다. 모든 현상은 반드시 그것이 일어나게 될 조건과 원인 아래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어떠한 원인과 조건에서 어떠한 현상이 생기고 또 멸하는가 하는 현상의 움직임에 관해 바른 지식을 가지면 그 현상이 움직이는 법칙에 따라 욕심내지 않고, 좋지 않은 현상을 제거하고 바라는 좋은 현상을 실현시킬 수가 있다.

 

(2) 十二緣起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의 법칙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습을 밝히는 보편적인 존재의 법칙이며 이것은 불교의 기본사상이다. 이러한 존재의 법칙인 연기설을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 고통받는 인간에게 적용하여 그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 십이연기이다.

 

가) 無明

 

무명이란 밝음이 없다는 것이다. 밝음이란 곧 지혜로서 사회 인생의 진리에 대한 지혜요, 바른 세계관 인생관이며, 결국 그것은 연기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무명이라는 것은 이러한 지혜가 없는 것으로 고뇌 불행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갖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 行

 

행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행위는 의식에 의한 사고작용과 말에 의한 언어작용과 신체에 의한 동작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 그 경우 행위는 선과 악의 의지를 수반하고 있다. 때문에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사고, 그릇된 지혜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에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거짓말, 이간질, 살생, 도둑질, 간음 등이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무명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 識

 

식은 행위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인식 판단의 의식 작용으로서의 식과 인식 판단의 주체로서의 식이 있다. 인식 판단의 의식 작용에는 오관(五官)에서 온 것과 의식에서 온 것이 있다. 전자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 (身識)의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후자를 의식(意識)이라 한다. 둘을 합하여 육식(六識)이라 하고 전자는 감각 작용이고, 후자는 지각작용 및 추리, 상상, 기억, 판단 등의 일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라) 名色

 

명색은 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된 물질(色)과 정신(名)이다. 즉 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명색이다. 따라서 명색은 육식(六識)의 대상으로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마) 六處

 

식의 대상인 명색을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하여는 감각과 지각의 기관, 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이 있는 기관이 육처로 육처는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의 육근(六根)이다.

 

바) 觸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화합 접촉하여 일어나는 감각 작용이다. 그것은 감각과 지각의 인식 작용 과정에 있어서 근(감각과 지각의 기관 또는 능력)과 경(대상)과 식이 접촉하는 것이고, 또는 접촉한 상태를 말한다.

 

사) 受

 

촉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고(苦), 락(樂)등의 감수 작용이다. 수에는 고수(苦受), 낙수(樂受),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가 있고 이를 다시 육체적 정신적인 방면으로 나누어 우(憂), 희(喜), 고(苦), 락(樂), 사(捨)의 5수라고도 한다. 이 3수와 5수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苦 ----------- 苦

 

| 憂 肉體的

 

三受 ----------+-樂 ------------ 樂

 

| 喜 精神的

 

+-不苦不樂-------- 捨

 

 

말하자면 고락 등을 육체적 감성적인 것과 정신적 지성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고에도 락에도 속하지 않는 감각과 감정은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감성적인 고락은 신경에 의해 좌우되는 객관적인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사람의 감수성에 따라 다른 주관적인 것이다.

 

아) 愛

 

애(愛)는 잘못된 생각에서 일어나는 맹목적 사랑이다. 고뇌가 일어나는 근본원인은 무명이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은 애다. 애에는 욕애(欲愛)와 무유애(無有愛), 유애(有愛)가 있다. 욕애는 감각적 애욕, 특히 성적인 애욕을 말한다. 유애는 죽은 뒤에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윤회에서 벗어나 완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애는 고락 등의 감수 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미움도 강렬하고 맹목적인 것이 된다.

 

자) 取

 

취는 사랑과 미움의 생각에 의하여 사랑하는 것은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미워하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 취사선택의 행동이다. 이러한 취사선택의 행동을 業이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의 선악의 행위는 이렇게 하여 생기는 것이다.

 

차) 有

 

유는 존재를 말한다. 존재에는 선악의 행위로서 존재(業有)와 그 업에서 맺어지는 고락 등의 결과로서 존재(報有)가 있다. 우리의 행위는 행위경험과 행위경험이 축적된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유란 잠재력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선악의 행위는 애요 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현존재는 과거 행위경험의 축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존재가 유가 된다. 우리의 인격이나 성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현존재로서의 인격이 기본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다.

 

카) 生

 

유는 그 사람의 미래를 규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하여 미래의 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생은 죽음 뒤에 오는 내세의 생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과 같은 부분적인 경험에서도 이를 하나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 경험의 총화로서 잠재력인 유에 의해 규정되고 좌우되는 것이다.

 

타) 老死

 

우리들이 존재하게 되면 반드시 늙음과 죽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노사란 늙고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늙음과 죽음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노사는 우리들이 받는 모든 고뇌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뇌는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에서 결과되는 것으로 그것에 의해 잘못된 경험이 쌓이고, 그것이 잘못된 욕구나 행동 때문에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것이 불안과 고뇌를 안겨주는 것이다. 이렇게 無明으로부터 生死의 괴로움이 연 기하게 되는 과정을 流轉門이라고 한다. 무명으로부터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면 생사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무명을 없앰으로서 가능하다. 무명을 滅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처가 멸하고, 육처가 멸하면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하게 된다. 이렇게 무명의 멸로부터 괴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還滅門이라고 한다. 유전문이 생사의 윤회하는 과정을 말한다면 환멸문은 윤회로부터 해탈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십이연기설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인 생사의 문제, 그리고 괴로운 실존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그를 극복하는 길을 해명하고 있다. 즉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 음과 괴로움은 결국 진리에 대한 無知로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괴로움의 극복은 어둠을 밝음으로, 무명을 지혜로 대신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심리적 생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3) 三法印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의 법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상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 연기의 존재법칙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속성을 구체화한 것이 삼법인이다. 이는 세 가지의 진실된 가르침이란 뜻으로, 印이라고 한 것은 도장(印)이 언제나 거짓이 없듯이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세가지는 諸行 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을 말한다. 첫째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제행)은 부단히 변화하고 결코 동일성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해와 달도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초목과 짐승도 끊임없이 생장과 소멸을 거듭하고 사람도 역시 변화를 거듭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일반화하여 현상계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계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실체를 현상의 이면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둘째의 제법무아이다. 제법은 제행과 같이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무아의 "我"는 항상 동일성을 보유하여 자기의 힘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아란 모든 것은 변화하므로 동일성을 가진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변화의 이면에 변화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제법무아의 의미이다. 모든 것들은 그 자신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 다른 것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연기 인과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그대로 보지 않고 실체적 동일성을 인정하려고 하나 현실적 경험과의 모순, 욕망과 현실과의 충돌, 여기에서 얻어진 불만이 쌓여서 고뇌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뇌를 없애려고 한다면 먼저 실체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실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실체를 고집하지 않게 되고, 고집이 없어지면 고뇌도 없게 된다. 이 고뇌가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이 세째의 원리인 열반적정의 뜻이다. 그것은 고뇌가 없이 마음이 안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이상인 해탈의 경지이다. 이 열반적정의 경지는 첫째와 둘째의 원리를 바르게 인식한다면 실체에의 고집이 없어지고, 고집이 없어지면 고뇌가 없어지게 되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은 진리의 인식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다.

 

(4) 四諦說

 

연기설이 스스로 깨닫기 위한 것이고 이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사제설은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고, 이론적임과 동시에 실천적이며 오히려 실천을 주로 한 것이다. 諦는 진실, 진리라는 뜻이고 사제는 네 가지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고제(苦 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는 변화무상한 현실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주관적 가치판단을 말한다. 인간들은 변화무상한 현실에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을 찾고 바란다. 이것이 인간들의 미혹이다. 그러나 세계는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 때문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는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의 여덟 가지의 고통이 있다. 오온(五蘊)은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색(色;물질로서의 육체), 수(受;감각 감수작용), 상(想; 관념, 사상), 행(行; 의지, 선악행위의 동기가 되는 내적 정신작용), 식(識; 인식판단의 의식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집제는 인간이 번뇌하는 원인으로 번뇌는 갈애(渴愛)로 말미암아 생긴다. 갈애는 인간으로 하여금 타율적이고 비자주적인 생활을 하게 한다. 이 갈애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다. 고제는 번뇌의 결과로 미혹을 말하는 것이고 집제는 미혹의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고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욕구하고 집착하여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번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의 원인을 밝혀 해탈의 길을 말하는 것이 멸제이다. 멸제는 인간이 미혹으로 말미암아 생긴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을 가르친다. 열반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욕망을 끊어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인생고의 원인인 미혹과 무명을 끊어 자각없는 현실 세계의 고뇌와 불안을 멸한 상태로 불교의 이상경이다. 도제는 멸제의 목표인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말한다. 그것은 불교의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열반에 이르는 것은 쾌락의 추구나 고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도(中道; 非苦 非樂)를 행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방법이 팔정도(八正 道)이다. 팔정도는 정견(定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정견이란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으로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라든가 사제에 관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즉 정견에 의하여 얻은 바른 생각을 실행하려는 마음으로 나쁜 마음, 탐욕스러운 마음,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 등을 억제하려는 심적 작용이다. 정어는 올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나 남을 비방하는 말, 난폭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업은 바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소극적으로는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선행을 하는 것이다. 즉 살생을 하지 않고 색욕과 음주에 빠지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정업이고,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 반성을 하여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은 적극적 정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명은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정진은 올바른 노력과 용기이다. 마음을 바로 하여 안일과 나태함을 없애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정념은 끊임없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각하여 자기와 주위의 입장을 올바로 아는 것으로 올바른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정은 정신을 통일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진정한 정신통일의 상태를 말한다. 이 四諦는 마치 의사가 병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과 같다. 즉 병을 진단하고(苦), 병의 원인을 밝히며(集), 병이 완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滅), 처방(道)을 내리는 것이다.

 

6. 墨子의 思想

 

1) 생애와 시대배경

 

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적(翟)이다. 생존연대는 확실하지 못하나 대체로 기원전 479-381년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초기 周나라 때의 전통적인 예악과 문물을 동경하여 논리적으로 이들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려고 힘썼던 반면, 묵자는 그 제도의 타당성과 효용성에 회의를 품고 이들을 좀 더 유용한 것으로 대치시키려고 하였다.

 

주대 봉건체제 하에서 왕 제후 대부들은 각각 군사 전문가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周末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이 군사 전문가들은 각기 흩어져 사용자에게 봉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인물들을 士, 또는 武士라고 했다. 묵자와 그 제자들도 무사출신이었다.

 

2) 興利

 

묵자의 중심사상은 天下의 이익을 일으키는데 있었다(興天下之利). 이익(利)이란 사회의 이익을 가리키므로 그 기원문제는 바로 '어떻게 사회생활을 개선할 것인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묵자 학설에서 제일 중요한 맥락은 功利主義였다. 공리주의의 관념으로부터 非樂 非功說이 나왔고, 권위주의적 관념으로부터 天志 尙同說이 나왔다. 그러나 이 두 가닥의 주요 맥락은 모두 兼愛說 중에 모여지게 되었다.

 

 

3) 兼愛

 

묵자는 인간이 서로 싸우는 것은 그 근본원인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不相愛)에 있다고 생각하여서 이것을 '서로 겸하여 사랑함'(兼相愛)으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兼愛는 묵학의 대표개념으로 이해되어 진다.

 

묵자는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혼란의 근원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혼란은 신하와 아들이 임금과 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아들은 자신만을 아끼고 아버지를 아껴주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를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한다. 동생은 자신만을 아끼고 형을 아껴주지 않기 때문에 형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한다. 신하는 자기만을 아끼고 임금을 아껴주지 않기 때문에 임금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한다. 이것이 혼란이다." 라고 한다. 墨子는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만을 위하고 서로 사랑을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개인 사이에도 이러하지만 가정이나 국가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大夫들은 제각기 자기 집안만을 아끼고, 남의 집안을 아껴주지 않기 때문에 남의 집안을 어지럽히고 자기 집안을 이롭게 한다. 諸侯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만을 아끼고 다른 나라를 아껴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자기 나라를 이롭게 한다. 天下가 혼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리하여 墨子는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의 가족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나라만을 위하는 利己的 慾望을 버리고, 親疏의 區別과 나와 남의 구별을 하지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고 자기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의 부모를 사랑하면 혼란이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을 똑같이 兼愛하라고 한다. 이것은 墨子가 兼愛를 주장하는 現實的인 근거이다.

 

묵자가 겸애를 주장하는 것은 혼란을 평정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애의 목적은 다분히 실용적이다. 그러므로 겸애의 주장은 반드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주장으로 제출된 것이었다. 겸애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묵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用而不可, 雖我亦將非之 <兼愛上>

사용해 보고 안되는 것이면 비록 나라도 역시 그것을 그르다고 여기겠다.

 

즉 사용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런 실효적 관점에서 묵자의 공리주의적 사상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4) 天志

 

墨子는 兼愛의 근거로서 天志를 말한다. 天志는 최고의 價値規範이고, 天은 人間에게 兼愛하기를 요구한다. 천이 사람들이 兼愛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兼愛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天志는 묵자가 승인하는 가치의 근원이었다.

 

墨子에 있어서 天은 人格的이고 主宰的인 天이다. 墨子의 天은 義를 좋아하고 不義를 싫어하며, 사람에게 賞罰을 내리며, 또 인류의 소원을 받아주며, 모든 도덕의 원천이다. 墨子는 말하기를

 

오늘날 仁義를 행하려는 자는 義가 나온 곳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義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墨子가 말하기를 義는 어리석고 賤한 자에게서 나오지 않고, 반드시 貴하고 賢明한 자에게서 나왔다.....그러면 누가 貴한가 ? 또 누가 賢明한가 ? 天이 貴하고 天이 賢明할 뿐이다. 그러니 義는 天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한다. 따라서 墨子에게 있어서 道德規範은 至高의 존재인 天이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正當性을 가지며, 이 요구를 따르지 않을 때 天은 가혹한 罰을 내리게 된다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방식으로 그것의 실행이 요구되었다. 묵자는 말하기를

 

天之意不欲大國之攻小國也, 大家之亂小家也. <天志中>

하늘의 뜻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거나, 큰 집안이 작은 집을 혼란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즉 혼란은 하늘이 원치 않는 것이니 혼란을 평정하는 것이 하늘의 뜻에 합치된다는 뜻이다. 또한 묵자는 治亂의 문제를 義와 합쳐서 말하였다.

 

天下有義則治, 無義則亂. <天志中>

천하가 의로우면 안정되고, 의롭지 못하면 혼란된다.

 

이와 같이 天志는 최고의 권위척도이며 가치규범이었다. 또 義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義에 합치되는 것을 天志에 합치되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묵자는 天과 天子를 연결시켜 말하였다.

 

天子有善, 天能賞之, 天子有過, 天能罰之. <天志上>

천자가 선하면 하늘은 상을 주고, 천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하늘이 그를 벌한다.

 

그러나 이러한 墨子의 체계가 지닌 문제점은 兼愛를 요구하는 天의 意志가 부정되면 도덕규범을 구성원들에게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墨子는 天志와 鬼神의 존재를 증명하고, 義를 公利로 해석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公利로서의 義가 人間과 관계맺는 방식을 설명하지 못함으로서 권력의 권위를 강화하여 현실의 정치권력자의 이익을 반영하는 체계로 왜곡될 소지를 남겨 두게 되었다.

 

 

5) 묵자의 정치사상

 

묵자는 위로 천지에 통하고, 아래로 만민에게까지 미치는 사회구조를 만들려고 尙同說을 주장하였다. 이 尙同說에 대한 논의는 갈라져 있다. 이는 상동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이 尙同說을 가지고 묵자의 사상이 권위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묵자가 언로를 중시한 점을 들면서 묵자를 권위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묵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묵자에게 있어서 국가는 필요에 의해 출현한 것이다. 이는 묵자가 홉스와 같이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古者民始生 未有刑政之時 天下之亂 若禽獸然生於無正長. 是故選擇天下之賢可者立以爲天子 <尙同上>

옛날에 백성들이 처음 생겨나서 아직 법과 질서가 없었을 때는 통치자가 없었기 때문에 금수와 같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천하의 어진 자를 선출하여 천자로 삼았다.

 

즉 누구나가 자신의 利害를 가지고 있으므로 천하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현명한 자를 추대하여 천자로 삼아서 만민을 관리 단속케 했다는 것이다.

 

총괄컨대 혼란을 평정하고 안정을 추구하려면 반드시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 사상을 통일하는 방법은, 즉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윗사람과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尙同思想의 主旨이다.

 

또한 묵자는 통치자 선출에 있어 신분의 차별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군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선출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왕은 모든 제후, 경대부 등 정치지도자를 어진 자면 빈부귀천의 차별없이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 묵자의 문화관

 

묵자의 문화관은 非攻, 非儒, 非樂의 3非論이다. 하나씩 다뤄보면, 비공이란 것은 겸애와 연관되는 것으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의임을 설득함으로써 이뤄진다. 묵자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했고, 정벌이 소수의 국가에만 유리하고 천하에 해로우면 正道가 아니라고 말했다. 총괄적으로 묵자는 전쟁과 정벌은 의에 옳지 않고, 利에도 소득이 없어 천하의 커다란 해로움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군자는 천하를 위해 이익을 일으켜야 하므로 非攻은 묵자의 학설 중 가장 중요한 주장이다.

 

묵학은 유학을 大敵으로 여겼다. 묵학은 유학의 예문을 허위라고 비웃었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생산에 힘쓰지 않는다고 비꼬았다. 또한 창의성보다는 옛것을 지키는 데만 치중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공자가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다른 나라를 어지럽혔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비판은 유가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은 <非樂>편을 보면 잘 나타난다. 묵자는 천하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음악'을 즐긴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관직에 있는 자는 이런 쓸데없는 일(음악을 즐기는 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民有三患, 飢者不得食, 寒者不得衣, 勞者不得息, 三者民之巨患也. 然卽當爲之撞巨鐘, 擊嗚鼓, 彈琴瑟, 吹笙芋, 而揚干척, 民衣食之財 將安可得乎? <非樂上>

백성에겐 세 가지 근심이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추위에 떠는 자가 입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것, 피로한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백성들의 커다란 근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큰 종을 두드리고 북을 치며, 거문고를 뜯고, 우와 생을 불면서,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춤을 추어야 한다면, 백성들의 입고 먹을 재물은 앞으로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묵자가 음악을 비난한 것은 음악이 일을 전폐하기에 충분하고 천하에 아무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문화관은 순전히 공리주의 및 실용주의 입장을 대변함을 알 수 있다.

 

 

7) 儒家思想과의 비교

 

유가와 묵자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묵자가 말하는 兼愛와 유가가 말하는 仁은 차이가 난다. 묵자가 말하는 兼愛는 단순하게 다른 사람들을 자기 친족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기초로 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묵자는 유가와 다르게 鬼의 존재를 인정했다. 유가는 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중시하는 반면, 묵가는 鬼와 神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제사와 같은 禮를 낭비로 생각하고 부정했다. 즉 鬼에 대한 인정은 백성들이 겸애의 도를 실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교적 정치적인 제재를 도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묵자는 공맹을 비판하기를 "그대들은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울리는 종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즉 군자는 팔짱을 끼고 있는 종(鍾)과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스스로 울릴 수 있는 종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8) 결론

 

묵자가 말한 利의 개념은 귀족생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나타낸다. 귀족의 비생산적인 생활을 묵자는 비판한다. 그 이유는 그런 생활들이 사회적 낭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묵자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는 바로 利를 증진시켜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묵자는 節用을 주장한다. 즉 재화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재화의 본래 목적을 초과한 과시소비(過示消費)를 버리고 節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과시소비를 묵자는 노동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묵자는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 모두가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런 인간의 공동체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능할 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재화를 가지고 조금씩 절용하는 속에서 가능하다고 묵자는 보았다.

 

 

7. 荀子의 思想

 

1) 人 間 觀

 

가. 性惡說

 

荀子는 孟子와는 달리 人間의 本性을 惡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人間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孟子와 荀子의 차이를 가장 특징적으로 구별하는 학설이다. 荀子는

 

人間의 本性은 惡하며, 善은 人僞, 즉 後天的 作爲의 결과이다. 생각해 보면 人間의 本性은 태어나면서부터 利益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에 따라감으로서 他人과 서로 다투며 빼앗게 되고, 서로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경향이 있어, 他人을 해치고 誠心의 德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듣고 싶어하는 눈과 귀의 감각적 욕망이 있고, 그에 따라감으로 無節制해져 禮儀나 文理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性質이나 感情에 따라가면 반드시 서로 다투며 빼앗게 되어 社會的 秩序가 무너지고, 마침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에 의한 感化나 禮儀에 의한 지도를 받아야만 서로 양보하고 社會的 秩序도 유지되고, 세계가 평화롭게 된다. 이렇게 볼 때 人間의 本性은 惡한 것이고, 善은 後天的 作爲의 결과이다.”

 

라고 한다. 따라서 荀子는 絶對的 存在로서 天의 規範性을 부정하고, 人間의 本性을 타고난 바의 자연스러운 것이고, 後天的 學習이나 努力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定義한다.

그는 善과 惡을 定義하여 “ 善이란 道理에 맞고 和平한 것을 말하고, 惡이란 偏僻되고 道理에 어긋난 亂暴함을 말한다. ” 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本性 자체가 악한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本性에 있는 利益을 추구하는 경향이나 感覺的인 慾望 등에 따르는 결과로 惡이 생겨나고, 욕망에 따르느냐 않느냐는 五官을 통제하는 天君, 즉 마음의 作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聖人은 그 天君으로서의 마음을 맑게 하여 五官의 작용을 바르게 인도하여 본래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도야한다고 한다. 따라서 荀子에 있어서 性과 욕망은 그 자체가 惡은 아니고 節制를 모르는 끝없는 욕망의 추구가 爭奪이라는 惡을 파생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荀子의 性惡은 經驗論的 根據에서 나온 結果論的 說明이다. 이것은 人間의 本性 자체가 先天的으로 惡한 것도 아니며, 本能的 追求 자체가 원래 惡하다고 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心에 의하여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실현이 결과로서 惡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荀子는 善惡을 판단하고 善을 實踐하게 하는 근거로서 心을 말하고, 이 心에 의하여 本性을 바꾸어 人爲的인 행위로서 善을 實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는 孟子의 性善說을 비판하여 “孟子는 人間의 本性은 원래 善한데, 그 善한 本性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惡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 눈은 사물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처음부터 그것을 보는 눈의 시력이 눈을 떠나지 않고, 소리를 듣는 청력이 귀로부터 떠나지 않기 때문에 눈과 귀의 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려서 惡해진다는 것은 원래 惡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善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야말로 性惡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즉 “처음부터 德이 희박한 자는 두터워지고 싶어하고, 외모가 못생긴 자는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며, 집이나 농토가 좁은 자는 넓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고 싶어하며, 신분이 비천한 자는 고귀해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만일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밖에서 구하려 하는 법이다.” 라고 논증을 한다.

人間이 善을 원하는 것은 人間에게 이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고, 없는 것은 얻고자 하는 것이 人間의 자연스런 욕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荀子에게 있어서 善은 內的인 要求는 아니고 外的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행동이다. 이것은 經驗을 통하여 체득되고 心에 의하여 人爲的으로 만들어지는 後天的인 것이다. 人間의 自然的 欲求는 自然狀態에서는 투쟁으로 나아가지만 心의 작용에 의해 방향을 전환하여 안정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때 투쟁의 상태를 惡이라 하고, 안정된 상태를 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性이 善하게 된 상태는 성 자체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心의 작용에 의한 것이므로 善한 상태에 놓여 있는 性은 僞라고 하는 것이다. 荀子에 있어서 心은 人間이 善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고, 心에 의하여 惡한 경향을 가진 性을 바꾸어 善한 행위인 人僞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 化性起僞

 

荀子는 性과 僞의 구분을 통하여 性은 人間의 自然的인 要素이고, 僞는 人間의 文化的인 要素로서 自覺的 努力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荀子는 단순히 性과 僞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性과 僞가 合一이 되도록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荀子는

 

人性은 본래 질박한 것이고, 人僞는 文飾과 條理가 융성한 것이다. 人性이 없으면 人僞를 더할 곳이 없고, 人僞가 없으면 人性의 아름다움을 다할 수 없으니, 人性과 人僞가 서로 하나로 합한 연후에야 聖人이란 이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性은 재료이고, 僞는 加工에 비유되고 있다. 僞의 작용은 性을 재료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性도 僞가 없으면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性과 僞는 그 본질은 相異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효용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聖人은 이 性과 僞를 하나로 합일한 사람이다. 그러면 聖人과 衆人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 荀子는

 

聖人이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은 타고난 本性이 같기 때문이요, 聖人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人爲的인 노력 때문이다.

 

라고 한다. 즉 聖人은 보통 사람과 性은 같지만 僞 즉 人爲的인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聖人은 僞를 최고도로 발휘한 사람으로, 이 僞는 禮義이다. 따라서 人僞로서 禮儀는 聖人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聖人이건 보통 사람이건 人性은 惡한데 어떻게 聖人은 人爲的인 善으로서 禮儀를 제작할 수가 있는가 ?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荀子는

 

人間의 性品이 惡하다고 한다면 禮儀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대답하기를 무릇 禮儀란 聖人의 人僞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본래 人間의 性品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질그릇 만드는 사람은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릇은 기술자의 人僞에서 생겨난 것이지 人間의 性品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술자가 나무를 깍아서 그릇을 만든다. 그렇다면 기술자(工人)의 人僞에서 생겨난 것이지 人間의 性品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聖人은 思慮를 쌓고 人爲的인 노력을 통하여 禮儀와 法度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禮儀와 法度는 聖人의 作爲에서 나온 것이고 人間의 性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라고 답하였다. 흙과 나무는 人間의 노력에 의하여 그릇이 된다. 즉 그릇은 기술자의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人間의 性品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聖人도 본래 善한 性品에 의하여 禮儀와 法度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생각을 하고 또 오랜 노력을 한 후에야 이기적인 욕구에 따르면 결국 자신을 해치고 불행하게 하는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이기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禮儀와 法度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荀子에 있어서 聖人은 道德的 德性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경영을 할 수 있는 才能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

때문에 荀子는 聖人이 先天的으로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노력을 하면 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荀子는 또 모든 사람이 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것과 聖人이 되는 것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발로 걸으면 온 천하를 다 갈 수 있지만 실제로 온 천하를 다 걷지는 못하고, 木手나 商人이나 農夫가 서로 직업을 바꾸지 못할 것은 없지만 실제로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되는 것은 아니요,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聖人이 되려면 어떠한 노력을 하여야 하는가 ? 그것은 人間에게 先天的으로 주어져 있는 心의 인식능력을 통하여 事理를 바르게 판단하고, 현실적 요청에 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荀子는 人間이 인식을 하는 것은 感覺과 思惟에 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認識하는 主觀과 認識 對象인 客觀, 또는 認識能力, 이 세 가지는 인식의 요소임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荀子는 人間의 主觀的 認識能力과 認識對象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心은 客觀的 法則을 인식하는 心이고, 도덕적인 心은 아니다.

 

知覺하는 能力이 人間에게 있기 때문에 認識을 할 수 있고, 知覺이 對象과 合한 것을 智라고 한다.

 

認識을 하는 能力은 人間에게 先天的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고, 이것이 대상과 접촉함으로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智는 인식을 의미한다. 그는 感覺器官을 天官이라 하고 思惟器官은 天君이라고 한다.

外界 事物에 대한 認識은 感覺器官에 의하여 생겨난다. 즉 視覺, 聽覺, 味覺, 臭覺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인식이 발생하며, 感覺은 外物을 반영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思惟器官인 心에 의하여 辨別되고 實證된다. 이러한 辨別과 實證을 통과한 인식을 荀子는 徵知라고 한다. 우리의 視覺이 나무를 볼 때 그 모양을 감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나무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徵知하는 작용이다. 徵知는 반드시 감각을 근거로 한다. 荀子는

 

마음에는 徵知가 있다. 徵知는 귀를 통하여 소리를 알 수 있고, 눈을 통하여 형체를 알 수 있다. 때문에 徵知는 반드시 天官이 보고들은 것을 類別하여 본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五官이 감각을 하고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마음이 인식을 하고서도 설명을 할 수 없으면 사람들이 그를 知識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근거로 사물의 차이를 알게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우리의 認識은 感覺에 의해 知覺하며, 知覺에 의해 言語와 記號, 槪念이 성립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사물의 차이를 알 수 있는가 ? 天官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대저 같은 類, 같은 情狀에 대하여 사람들의 天官이 감각하는 것은 같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유사한 것과 비교하여 통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름을 공통되게 약정하여 서로 이해를 기할 수 있는 까닭이다.

 

라고 한다. 人間의 感覺은 서로 비슷하므로 外物에 대한 反應도 비슷하다.서로 같은 感覺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같은 知覺에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공통된 言語와 槪念이 성립하고, 이것을 통하여 서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荀子는 實踐을 認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듣지 못한 것은 듣는 것보다 못하고, 듣는 것은 보는 것보다 못하고, 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못하고, 아는 것은 實踐하는 것보다 못하다. 學問은 實踐하는데 이르러서 그친다. 실천을 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聖人이 된다......때문에 듣기만 하고 보지 않으면 아물기 博識하더라도 반드시 오류가 있을 것이며, 보기만 하고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허망하게 되며, 안다고 하더라도 實踐하지 않으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반드시 곤궁하게 된다.

 

듣는 것은 다른 사람의 經驗을 통하여 직접 經驗할 수 있는 知識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러한 經驗을 통한 知識은 實踐을 함으로서 완전한 인식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직접 經驗을 하지 않으면 오류에 빠지기 쉽고, 經驗을 하였다고 하여도 올바른 知識이 없으면 허망하게 된다. 知識이 있다고 하여도 實踐이 수반하지 않으면 바른 인식이 될 수 없으므로 荀子는 인식의 목적이 實踐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知識은 현실에 맞아야 하며, 현실에서 實踐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荀子는 인식을 함에 있어서 孟子의 性善說처럼 주관적 판단을 반대하고, 또 당시 각 학파의 논리적 獨斷도 비판하였다. 바른 인식을 하려면 자기의 獨斷과 偏見을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荀子는 이러한 偏見과 獨斷이 생기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욕심에 가리우고, 미움에 가리우고, 시작에 가리우고, 마지막에 가리우고, 먼 것에 가리우고, 가까운 것에 가리우고, 넓은 것에 가리우고, 천박한 것에 가리우고, 과거에 가리우고, 현재에 가리우게 된다. 대저 만물이 다르면 가리우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心術의 公患이다.

 

萬物은 欲과 惡, 始와 終, 遠과 近, 古와 今 등으로 서로 對立的이다. 따라서 그 일면만을 보면 그 대립이 더욱 심화된다. 그래서 全體的인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일면만을 보고 집착을 하면 偏見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荀子는

 

聖人은 心術의 폐단을 인식하고, 가리우고 막히는 잘못을 보았기 때문에 無欲하고, 無惡하고, 無始하고, 無終하고, 無遠하고, 無近하며, 無博하고, 無淺하며, 無古하고, 無今하여 만물을 兼陳하여 中을 저울대(衡)에 달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대립이 서로 가리우지 않게 되고 道理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다.

 

兼陳萬物이란 여러 각도에서 문제를 살피는 것이고, 여러모로 관찰하고 판단하여 전체적 인식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종합적 판단의 기준이 衡이고, 여러 사물들 간의 대립을 衆異라고 한다. 倫은 類이며 衡은 權이다. 權은 또 時中의 道이다. 道는 眞理이고 基準과 原則이며, 그 基準과 原則은 事物을 인식하는 원칙이 된다. 이 道는 客觀的인 原理이므로 이 道를 떠나서 주관에 의하여 판단하고 선택하면 偏見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道를 인식하는 것은 心이다. 荀子는

 

사람은 무엇에 의하여 道를 인식하는가 ? 心에 의하여 인식한다. 心은 무엇에 의하여 道를 인식하는가? 虛心, 集中, 靜止에 의하여 인식한다.

 

虛心, 集中, 靜止는 心이 道를 인식하는 필수조건이다. 虛心은 새로운 知識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고, 集中은 이미 받아들인 知識이 서로 방해하지 않는 것이고, 靜止는 夢想이나 복잡한 생각으로 인식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心의 虛壹而靜한 상태를 大淸明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작용을 통하여 聖人은 偏見을 버리고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가능하게 되고 사회적 행동의 기준과 규범으로서 禮를 만들고 實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師法之化

 

가. 行爲의 判斷과 選擇의 標準으로서 師法

 

荀子가 人性을 문제삼은 것은 현실적 사회혼란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원인이 규명되었다고 사회가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人間이 옳고 그른 것을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체적 선택으로서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선택의 지향성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시된 지향성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人性은 禮儀를 모른다. 때문에 생각하고 궁리하여 이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人性은 맹목적인 生意欲일뿐 현실적인 요청에 대하여 스스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人間에게는 또 事理를 바르게 판단하고, 현실적 요청에 바르게 대처하게 하는 心이 있다. 心은

 

心이란 肉體의 君主요, 事理를 밝게 볼 수 있는 精神의 主體이다.

 

이러한 知的自我로서 心이 현실을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능동적 태도가 僞다. 때문에 “ 聖人은 人性을 변화시켜 僞를 일으킨다.” 고 한다. 人性이 盲目的 生意欲을 추구함으로서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고 사회적 요청에 바르게 대응하려는 心의 노력을 僞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僞는

 

배워서 익힐 수 있고, 노력을 하여 이룰 수 있는 能力과 技術이 人間에게 있는데 이것을 僞라고 한다.

 

僞는 心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부단히 배우고 노력을 하여 後天的으로 획득되는 心의 能力과 技術이다. 人間은 이러한 能力을 가지고 현실적인 문제를 판단하고 처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판단하고 처리하기 위하여는 事理를 분별하여야 하고, 事理를 분별하기 위하여는 원칙과 표준이 있어야 한다. 荀子는 원칙과 표준의 필요성을 말하여

 

君子는 행동을 함에 구차하게 어려운 것을 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말을 함에 구차하게 세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명성이 구차하게 전하여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바르고 마땅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라고 한다. 말하고 행동을 함에 있어서 事理에 마땅함을 따르고 구차하게 남에게 보이거나 명성을 날리기 위한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事理는 현실적 상황에서 찾아지는 것이고, 현실을 판단하는 데는 일정한 표준이 있어야 한다. 이 표준으로 荀子가 제시하는 것이 聖人이 積僞의 결과로 만들어 놓은 師法이다. 이 師法은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무제한한 요구를 조건에 의하여 엄격히 제한하는 칸트의 道德法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현실을 판단하는 표준으로서 師法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

 

師法을 따르지 않고 제멋데로 하기를 좋아하면, 장님이 색깔을 분별하려 하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분별하려는 것과 같으니, 어지럽고 망령된 사람 이외에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즉 장님이 색깔을 분별하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분별하려는 것은 색과 소리를 판단하는 표준이 없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판단을 하게 되고 사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도 師法이 없으면 편벽되어 바르지 못하게 될 것이요, 禮儀가 없으면 난폭하여져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師法을 통하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하는지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 師法으로서 禮는 聖人이 만든 것이며, 사람은 스스로는 그것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배워서는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며, 實踐하여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 禮의 制約性과 그 作用

 

荀子 철학의 핵심은 性의 善惡 여부나 僞의 존재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惡한 人間의 성향을 바로잡고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의 本性은 惡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얻지 못하면 구하려고 애쓰고, 그러면서 地位가 같으면 원하고 싫어하는 것도 같아서 그 대상물은 넉넉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분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고, 다투면 혼란이 오게 마련이고, 혼란이 오면 모두가 궁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人間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홀로 살 수는 없다.

함께 사는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人間의 性은 惡하므로 제도적 장치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荀子가 생각하여 낸 것이 先王이다. 先王은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모든 원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이 先王이 人間 사회의 혼란을 싫어해서 만든 제도가 禮이다. 禮는 人間社會의 秩序體系이며, 人間 行爲의 準則이다. 그것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人間과, 人間이 소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이루어지는 天地의 原理를 근거로 하여야 한다. 先王이 만든 禮에는 三本이 있는데 이것은 위로는 天과 아래로는 地를 받들고, 거기서 살았던 神靈들을 존숭하여 禮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禮는 人間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행위의 준칙이며, 나라에 있어서는 亂을 다스리고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는 근본이 된다.

荀子가 말하는 禮는 그 범위가 넓어 크게는 治國의 道에서부터 작게는 個人修養, 生活敎養, 飮食, 起居 등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荀子의 禮는 人類社會를 통제해 가는 원리이며, 제도이고, 구체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禮는 모든 규범을 포함하는 원리가 된다. 그러면 荀子에 있어서 禮는 어떠한 작용원리를 갖게 되는가 ?

禮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分, 養, 節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分이다. 人間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여러 가지를 겸해서 능할 수가 없으며, 관리도 여러 가지 직책을 겸해서 행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홀로 살면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곤궁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무리를 지어서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된다. 무리를 지어서 살면 힘이나 달리기는 소나 말보다 못하지만 그것들을 부릴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性은 惡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서 살게 되면 반드시 수반되는 문제가 있다. 즉 사람의 이기적 욕구가 발동하여 다투고 혼란해지며 역시 곤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회에 있어서 서로의 권리와 소유를 나눌 필요가 있다.

 

무릇 양편 모두가 貴하면 서로 섬기는 것이 없고, 모두가 賤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다. 이것이 天道이다. 勢力이나 地位가 같은데 바라고 싫어하는 것이 같으면 그 대상은 넉넉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다툼이 일어나고 다투게 되면 혼란해지고 혼란해지면 곤궁해진다. 先王은 혼란을 싫어하므로 禮儀를 제정하여 分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貧富貴賤의 差等이 있게 된 것이다.

 

分이란 職能別 區分과 職位別 差別이다. 生産階層과 統治階層의 差別이 있고, 生産階層에는 農, 工, 商의 구분이 있어서 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다른 분야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더라도 영역에 한계가 있다. 즉 農夫는 자신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단위를 경작해야 한다. 商人은 상품을 판매함에 있어서 정해진 상품을 일정한 수량만큼 판매해야 한다. 工人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생산계층이 통치계층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안된다. 통치계층에도 士와 諸侯, 三公, 天子도 각각의 권리와 의무가 있어서 각각 자신이 맡은 바에만 힘을 쓰고 남의 분야를 침범하여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신의 지위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分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지나친 욕구의 추구로 인한 혼란을 막고 일정한 한계를 정하여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하는 養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욕망을 가진 것은 賢者나 愚者나 막론하고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 욕망이 충족되면 爭亂이 일어나지 않으나 현실적으로 재물은 한계가 있어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養이 중요한 것이다. 養은 禮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의 실현을 위하여는 分에 따라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禮에는 分과 養의 기능 외에 節의 기능이 있다. 節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節度의 節이다. 사람은 저마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판단능력이 다르다. 그리하여 喪禮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부모의 喪을 당하고도 저녁이 되면 잊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삼년도 짧다고 하여 끝없이 슬퍼한다. 여기서 聖人은 그 정황에 맞추어 알맞은 한계를 세워서 정도를 정하여 그것을 禮로 삼게 된다. 다른 하나는 節用의 節이다. 이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은 禮를 위하여 많은 재물을 사용하여 재물을 낭비한다. 한계가 있는 재물을 몇 사람이 이렇게 낭비를 하면 결국 재물이 부족하게 되니 재물을 낭비하지 말고 절도에 맞게 사용하여 모든 사람이 나누어 쓸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禮는 人情에 맞추어서 그 형식과 기간을 정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긴 것은 자르고, 짧은 것은 늘리고, 넉넉하고 부족한 것을 加減하는 것이고, 이 넓히고 줄이고 덜하는 것이 바로 節의 작용인 것이다.

禮의 세 가지 기능인 分, 養, 節은 禮의 製作原理이자 行動의 原則이라고 할 수 있다. 分은 사람들의 직분과 직책과 계층 간의 구별을 하는 것이고, 養은 禮를 실행한 결과 그 효용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고, 節은 구체적으로 禮를 어떻게 실행하여야 하는가 하는 행동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3) 荀子 禮說의 特徵과 問題

 

가. 現實에 대한 客觀的 理解

 

荀子가 人性을 惡하다고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人間의 삶을 經驗的으로 관찰하고 내린 결론이다. 그는 人間은 생물학적으로 利欲을 좋아하고, 利欲을 추구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드디어는 萬人에 대한 萬人의 鬪爭이 일어나는 것이 人間社會라고 진단한다. 때문에 그는 이러한 투쟁적 현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孟子처럼 內面的 精神의 세계로 그의 사상을 전개시키지 않고 外面的 社會의 世界로 사고를 전환하게 된다. 그는 人間은 자신의 利益만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惡이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것이 惡의 발생을 막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人間은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욕망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것은 외적인 제도와 규범을 통한 강제에 의하여 교정과 교화를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荀子에 있어서 욕망의 억제와 자제는 욕망의 부정은 아니다. 人間은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의 부정은 있을 수 없다. 다만 人間의 무한정한 욕망의 추구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는 人間의 욕망과는 상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人間의 욕망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사회적 혼란에 이르지 않는 방법을 後天的으로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禮이고, 이러한 禮는 아무나 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聖人만이 제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荀子는 聖人의 人性도 善한 것은 아니고 惡한 것을 변화시켜 僞로서 善을 人爲的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荀子에 있어서 善은 행위 주체로서 人間의 내적 욕구와는 관계를 가지지 않고, 행위의 결과로서의 善惡을 말하는 것이다. 禮는 이러한 聖人의 僞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僞는 人間의 본래적 경향성과 같은 것은 아니고, 後天的 노력을 통하여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聖人의 性도 惡한데 어떻게 하여서 聖人만이 僞로서 善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荀子는 人間에게는 事理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事理를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人間들의 욕구와 욕구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결과주의 윤리학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즉 荀子는 어떠한 행위를 판단하고 선택할 때 그것이 어떠한 의도로 행하여졌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유용한 것인가 아닌가만이 善惡을 판단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 人間에 대한 不信과 主體性 脆弱

 

荀子는 經驗的 입장에서 현실을 판단하고 人間을 이해하였다. 때문에 현실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구체적이고 현실의 사회적 혼란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禮를 말하였다. 그는 사회적 혼란이 人間의 이기적 욕구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이러한 人間의 이기적 욕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人間을 근본적으로 惡한 존재로 규정을 하고 있다. 때문에 人間은 스스로 善을 행할 수 없으며 聖人이 作爲의 결과로 만들어 놓은 師法 즉 禮를 따라야 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때는 제재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荀子에게 있어서 善은 人間의 內的 道德性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단지 현실적으로 판단할 때 그렇게 행동을 할 때 더 커다란 利益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선택이다.

荀子는 禮의 제정자로서 聖人의 性도 惡하다고 하여 철두철미하게 人間의 도덕적 본질을 부인하고 人爲的으로 惡한 性品을 개조 교화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荀子가 禮를 강조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때문에 人間을 믿지 않고 외적으로 주어지는 제도나 행위규범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자신의 내적인 도덕성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聖人이나 그 외의 권위가 있는 자에 의하여 부여되고 실행이 강제되는 것이다. 荀子의 제자인 韓非子가 人間을 철저하게 功利的 존재로 규정하여 人間의 도덕적 가능성을 부정하고 군주의 절대 권력을 근거로 한 法治를 주장하게 된 것은 荀子사상의 이러한 요소가 발전 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荀子사상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적 도덕성에 근거한 人間의 주체성을 부인함으로서 권위주의적 정치이론화 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 法家思想

 

法家는 周代의 문화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現實的이고 實用的인 입장에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法家는 기본적으로 人間은 원래 自身의 利益만을 추구하는 功利的 存在이기 때문에 항상 기회가 생기면 지금보다 더 높은 地位, 더 높은 名聲, 더 많은 富, 더 강한 權力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꺼리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人間은 上下左右의 구별이 없이 항상 대립 투쟁의 관계로 본다. 대체로 法家의 사상은 人間의 功利性이 뿌리가 깊고 절실함을 통찰하여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말하였다. 法家가 정치에 있어서 法의 絶對性을 강조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法家는 國家權力의 强化와 絶對君權의 確立을 위하여 劃一的인 支配를 특히 강조한다. 이들의 法治論은 人間의 도덕적 능력을 불신하는 입장, 즉 인성을 기본적으로 惡하고 利益을 탐하는 存在로 인식하는 人性論의 당연한 귀결이었고, 동시에 春秋時代 이후 共同體의 解體 및 各國이 領土擴張 전쟁으로 광대한 영역이 통합한 결과, 相異한 地方의 傳統과 慣習을 초월한 普遍的인 規範과 秩序原理가 요구된 역사적인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法治는 단순한 法에 의한 劃一的인 統制보다는 法의 强制力을 이용하여 君權을 頂点으로 戰時體制를 確立하여 富國强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法治論者들은 法令으로 모든 慣習을 대체하여 마치 慣習에 따르듯이 法令에 복종하는 획일적 지배를 주장하였고, 그 목적은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일사불란하게 전쟁에 종사할 수 있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法家는 國家나 君主의 公道仁義의 絶對性을 말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고 私道를 지켜 私利를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고 처벌을 하였다. 예컨데 任俠이나 烈士,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 것을 옳다고 하여 본받고자 하는 자, 仁義나 道德을 말하는 儒者, 墨者, 才知가 있는 弁者, 私利를 추구하는 商人, 君主의 측근에서 시중하며 사사로이 권력을 휘두르는 자 등을 비난하고 조금도 그들의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公道나 仁義의 필요를 말하는 것은 法家만은 아니다. 人道主義에 선 儒家도 이것을 역설했다. 다만 같은 公道仁義를 말하였어도 양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仁을 예로 말하면 儒家는 仁을 人間에게 내재하는 內的 道德性으로 보지만, 法家는 人間을 功利的 존재로 보기 때문에 仁愛의 행위를 하여도 그것은 人間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는 것으로 본다. 정치에 있어서도 儒家가 말하는 仁義에 의한 德治는 백성을 오만하게 하고 화근을 일으키는 것으로 본다. 때문에 法을 믿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法家는 儒家의 禮治가 백성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에 부족한 主觀的인 人治主義라고 비판하고, 效率的인 法을 강조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에는 道德은 무력하고 法治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法家가 禮治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사회의 변동기인 戰國時代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封建的 血緣關係가 동요하기 시작하여 賢人政治, 貴族政治가 法治主義, 實力政治로 변혁되어 가는 戰國時代에는 列國이 항쟁하기 위하여 權力政治가 구상되고, 法에 의한 法治主義가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法家는 전통적 봉건제를 부정하고 귀족에게까지 法을 적용하도록 貴族階級을 끌어내리는 대혁신을 단행하였다. 이것을 現代的으로 말하면 法앞에서 平等인 것이다. 이에 따라 劃一的인 法이 제정 공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初期의 法家는 自然法의 원리에서 法의 원리를 구하였으나, 後期의 法家에 이르러서는 法의 權威를 自然法的 原理에서 구하지 않고 君主의 意思에서 구하였고, 이에 따라 법의 내용은 군주의 의사에 따라서 결정되게 되었다. 君主는 그때 그때의 功利的 打算에 따라서 政治를 하게 되었다. 法家의 정치이론은 百姓本位에서 君主本位로 되었다. 이러한 法家의 法의 特徵은 公開性, 平等性, 客觀性, 統一性, 安定性, 嚴格性, 强制性 등이라고 할 수 있다.

 

 

9. 한비자의 생애와 사상

 

I) 韓非의 시대상황

 

봉건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周나라가 천하의 제후를 통솔한 능력을 상실하게 되니, 제후들 가운데에서 강성한 자가 나타나 스스로 覇者가 되어 여러 제후들을 지배하는 春秋戰國時代가 시작된다. 춘추시대에는 오히려 尊周攘夷의 기치를 들고 나와서 宗主國인 周室을 높이고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것을 겉으로나마 구호로 삼았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구호마저 포기하였다. 그야말로 名分도 義理도 없이 그저 弱肉强食을 위한 힘의 대결이 있을 뿐이었다. 서로 치고 싸우는 동안에 백 수십개나 되었던 나라들은 전국시대의 말기에는 드디어 秦楚燕齊韓魏趙의 이른바 戰國七雄으로 줄어들었다.

 

이 일곱 나라들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또 천하를 제패하기 위하여 피의 角逐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정치이론과 縱橫無盡한 역량을 가진 人材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드디어 百家爭鳴의 상태를 빚어내었다. 누구나 자기의 정치 사상이나 경륜을 어느 군주에게 進言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당장에 부귀를 누릴 수 있고 자기의 사상이나 포부를 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諸子百家라고 하는 思想家가 나와 서로 自家의 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들 설에는 儒家 . 道家 . 陰陽家 . 名家 . 墨家 . 縱橫家 . 法家등이 대표적이며 이중에서 가장 정치사상으로서 비중이 크고 또 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儒家와 法家이다. 法家는 멀리 춘추시대의 管仲에서 유래하며, 전국시대에는 商鞅의 法 . 申不害의 術 . 愼到의 勢 등의 사상이 있었고, 이것이 韓非에게 계승되었다.

 

 

2) 韓非子의 生涯

 

한비자(韓非子: B.C. 약 280~233)는 한(韓)나라 귀족 출신이며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제자이다.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기원전 233년 한나라가 진(秦)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 진나라에 강화 사신으로 파견된 한비자는 순자의 같은 제자이면서 당시 진나라의 재상이던 이사의 모함 때문에 옥중에서 자살했다. 그는 당대에 자기의 정치 철학을 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 철학은 그를 모함했던 이사에 의해 진나라의 지도적 사상이 되었으며,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정치 철학으로 작용하였다.

 

여러 학파의 說을 채용하고 비판하여 제자백가의 최종 주자가 되었던 韓非子는 오직 문장에 의해서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였고 부자유한 辯說을 보충하듯이 문장이 예리하였다. 타고난 말더듬이었던 그는 기원전 3세기 초엽에 韓王 安의 庶公子로 태어났다. 전국 7웅 가운데서 작고 약한 나라였던 韓은 특히 강국 秦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이를 늘 개탄하던 한비자는 당시의 대표적 학자였던 荀子에게로 가서 수업을 하였다. 그 결과 순자의 성악설과 노자의 무위자연설을 받아들이면서 商鞅과 申不害의 '법'과 '술'을 종합하여 독자적인 '법술'이론을 완성하고 이것을 국가 통치의 근본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반드시 형벌을 엄중하게 하여 법으로써 다스리고 쓸모없는 무리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한비자의 간언을 韓王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의 시황은 달라서 그의 <孤憤>과 <五蠹>논문을 보고 "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 후에 韓이 평화의 사신으로 한비자를 보내자 시황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였으나 李斯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주장은 秦始皇이 강력한 專制體制를 확립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문장을 모은 것이 『韓非子』 55편이다.

 

 

3). 韓非子의 思想

 

한비는 이전 국가통치의 최고원리인 禮를 분명하게 法으로 대체시켜 제자백가 중 法家를 종합한 전국시대 마지막 대학자이다. 그가 주장한 法治사상은 한마디로 法과 術로 요약된다.

 

一. 도덕에 대한 法의 우위

 

한비자가 배움을 받은 순자는 예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유가의 사람이었을 뿐, 도덕을 부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비자에 이르러 여러 가지 각도에서 법의 도덕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이 강조된다. 이것은, 정치의 유일한 방법은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위 法律 萬能의 정치 사상이다. 韓非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란 철두철미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本性이 善이란 설은 믿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그 속의 속마음을 파헤쳐 보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성이 가슴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익은 항상 상반되기 마련이다. 君主의 이익과 신하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으며, 군주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 사이에도 이해는 상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각자의 노리고 추구하는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특히 임금과 신하는 본래부터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 남과 남의 사이이며, 임금과 백성의 사이는 지배와 피지배자의 힘에 의한 관계이다. 그러한 신하들에게, 백성들에게 충성심만을 기대하는 정치란 성립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하와 백성들을 仁義니 道德이니, 仁政이니, 恩愛니 하는 것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은 법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을 바르게 세우고 그것을 잘 운용한다면 천하의 臣民들은 법의 궤도 안에 매이게 되어 나라의 질서는 저절로 井然하게 될 것이다. 법이 잘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는 형벌을 엄하고 중하게 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잘 운용한다는 말은 법을 그야말로 만인에게 평등가게 적용하여 어떤 경우에도 추호만큼의 私도 두지 말아야 하며, 조금의 寬容이나 溫情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의 정치 사상이다.

 

二. 법 운용의 기술(術) 1. 刑名參同의 설

 

법이 아무리 정비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임금된 자는 이익이 상반할 수도 있는 신하들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오직 임금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여 주도록 신하들을 잘 부려야 할 것이다. 그 신하를 잘 부리는 데는 術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術의 제 1은 형명참동이라 하는 것이다. 形은 구체적인 실질, 名은 표면의 名義라는 의미이어서, 名實이 일치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어느 직명을 가진 관리가 그 직명에 따라서 실적을 거두고 있는가 어떤가를 검토하는 것이, 즉 형명참동이다. 그 직명 보다도 이하의 실적을 거둔 경우에는 물론 벌하지만 그 직명을 벗어난 실적을 거둔 경우에도 벌한다. 이 직명을 넘은 실적이 있는 자를 벌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것 같지만 사실은 법의 일률적 적용이라고 하는 점에서 근대법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법의 운용은 재판관의 인정에 의한 것이 모범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관의 개성이라 하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강해지고 법 적용의 공평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손상된다. 근대법은 이같은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인정이라고 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법문을 기계적 형식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적용하고자 한다. 한비자의 형명참동의 사상은 근대법의 정신을 앞서 가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한비가 말한 法은 오늘의 국민을 主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법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때의 법이란 군주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러니 法과 術을 아울러 사용하면 군주의 지배는 더욱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三. 법 운용의 기술 2. 虛靜無僞

 

한비자의 법술, 즉 법 운용의 기술 중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법의 운용자인 군주가 가능한 한 虛靜無爲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여, 도가의 노자 사상을 채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대단히 기묘한 결합이다. 법가는 극단적인 통제 주의의 입장에 있는 것에 대해서 도가는 無爲自然을 역설하여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양 극단에 있는 사상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면 한비자는 노자의 말을 자기의 입장에 유리하게 해석해서 이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비자는 군주는 虛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정하면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물을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또 군주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군주가 스스로를 욕망의 밖에 두어버리면 신하가 이로 인하여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군주는 무위이어야 한다. 군주는 형명참동이라는 무기가 있으므로 정치의 실무는 모두 신하에게 맡기어 조용히 이것을 관찰하면 된다. "명군이 위에서 무위하면 군신은 아래에서 두려워 긴장한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生道篇)

 

이와 같이 허정무위라 하는 말, 그것은 노자와 똑같지만 그 내용은 훨씬 법가적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거리지 않는다고 하는 법가특유의 음험함이 살펴진다. 따라서 한비자가 이용한 노자의 사상은 노자 본래의 성격과는 다르다.

 

IV. 韓非子에 대한 評價

 

韓非 政治哲學의 긍정적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객관적 정치규범으로 한비 이전의 정치철학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있다. 한비 정치철학의 효능은 실제정치의 운용에서 새로운 처방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儒墨道 三家는 생명의 價値理想에 있어서 우월성이 있고 지극히 높은 경지와 체계가 있으나 戰國같은 亂世에 대처하기 위해서 꼭 실행해야 할 구체적 조치나, 능히 적용될 수 있는 운용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儒家에서는 人性의 본원을 발휘해야 한다는 成德敎가 되었고, 墨家는 天志를 본받고 표준으로 삼는 겸애주의가 되었으며, 道家는 자연에 돌아가는 無爲의 정치이상을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이상들은 결국 객관화와 제도화가 되지 못하였고, 그것이 객관적 정치체제와 정치국면이 되도록 다리를 놓고 추진할 수 없어서 끝내 현실 정치에 낙착되지는 못 했다. 즉 법이라는 매개를 통한 객관적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한비는 이러한 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둘째는, 법의 표준과 제도화, 勢로써 통치권력의 확보, 術에 의한 통치방법의 모색을 통하여 정치를 道德敎化의 영역에서 멀리 독립시켰다. 적어도 한비는 정치를 도덕교화로 부터 독립시켜 무엇이건 금할 수 있는 勢와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의 공로를 감독하는 術의 운용은 하나의 국가를 강하게 할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봐야 한다. 한비는 그의 정치철학에서 君勢를 강화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국토가 넓고 國事가 복잡한 전국시대에 군세가 强固하지 못하고, 통치권력의 통치 중심이 견실하지 못하면, 법의 표준성도 확고하게 성립되지 못하고, 術의 治道를 실행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군세를 강고하게 함이 정치철학의 첫 번째 전제이다. 그러나 法과 術만을 唯一 無二의 방법으로 하는 한비자의 정치 사상은 그 사상 자체에, 시행의 과정에서, 또 결과에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점이 많다.

 

인간은 그 본성은 철두철미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은 儒敎에서 말하는 性善說과는 너무나 상반된 견해이다. 아마 한비의 性惡說의 유래는 그의 스승인 筍子의 영향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惡하다고 하였으며 이것은 전면적으로 인간을 不信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世道 人心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당연하다. 또 仁義니 도덕이니 寬容이니 온정이니 하는 것을 일고의 여지도 없이 배격하였으니 그것은 인간 사회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너무나 냉담하고 비정하고 서로의 감시와 敵對의 冷戰場으로 보게 한다. 실상은 인간이란 반드시 그렇게 서로 노려보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에서 알고 있다. 또 인간에게 본래부터 그러한 비정한 일면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善으로 유도하여 인간 사회를 따뜻한 것으로 만들어 살맛이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고 지도자가 필요하고 敎化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비의 정치 사상은 어떻게 하면 군주의 지배르 완벽하게 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국민 생활을 따뜻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된다. 국민의 참마음에서 나오는 협력을 기대하지 않고 힘만을 편중하고 마음의 소중한 것을 살피지 않는 정치라고 하겠다. 이 점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힘만의 정치는 오래 유지 못하다. 秦王政은 한비의 정치사상을 채용하여 한때 부국 강병을 이룩하고 천하를 힘으로 통일하여 천자가 되었었다. 그는 유명한 暴君 진시황이 되어, 위에서 말한 것처럼 焚書坑儒를 감행하고, 냉혹하고 까다로운 법을 세웠으며, 만리장성을 쌓고, 천하의 쇠붙이를 죄다 모아 거대한 쇠사람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이 兵器를 만들 여지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겨우 二代만에 멸망하였다. 종래에는 『한비자』에서 가혹한 벌의 시행을 주장함으로서 人性이 무시된다고 하여 惡書라는 지적을 받아 금기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2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부분의 정치사상이 겉으로는 儒家思想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체제는 실로 法家的 요소가 많았다. 즉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였다는 점이 이것이다.

 

그것은 도덕이나 인의 권장하고 칭찬할 일이기는 하나 그것은 마음에 속한 일이고 善行에 속한 일이니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인간의 공동 생활을 가누어 나가는 데에는 일정한 질서가 없을 수 없다. 서로가 공동으로 지키지 않아서는 안될 일들이 많다. 그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는 자에게 지키도록 강요해야 할 일정한 표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법이다. 법이 없이 국가 . 사회의 질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 국가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비록 치우친 점은 있었으나 한비가 법을 주장한 것은 역시 현명하였던 것이다.

 

仁義나 道德만에 의존하여 현대의 국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空疎한 仁義니 도덕이니 하는 설교보다는 우리는 적절한 법이 세워지고 그것이 그야말로 만인에게 공정하게 되어지기를 바란다.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법으로 정하고 법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한비의 법치 사상은 현대인의 사고에 공감을 준다.

 

또 한비가 인간의 本性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世道 人心을 살펴볼 때 유감이기는 하나 그것을 『아니다!』라고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선인지 악인지, 白紙인지 단언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본성이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다. 실지로 그러한 점이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人性이 그렇게 악하기만 하다고 우리는 보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를 살피는 눈이 비정하게 예리하다. 그러나 그의 설은 항상 치우친다. 그의 불우한 환경 때문일까? 우리는 법의 사상을 외친 한비의 현명을 존경하면서도 한비의 숱한 많은 단점에는 비판의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10. 公孫龍의 白馬非馬論

 

 

1.

 

중국의 戰國時代에는 많은 논객들이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설득과 논쟁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설득의 성공과 논쟁의 승리가 이권의 획득과 권력확장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변론 기술의 연마와 청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연구하였으며, 당시에 이들을 辯者, 辯士 또는 察士라고 불렀다. 특히 권력계층은 그들을 후대하여 정략과 모략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논객은 어느 학파를 불문하고 배출이 되었었는데 특히 궤변으로 유명한 桓團, 公孫龍 등에 이르러 그 유행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거의 저작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들 가운데 환단, 공손룡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주장 아래 모였던 학파도 아니었다.

 

漢代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名家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개념 또는 그 표현인 名과 실체인 實의 관계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史記’의 自序에는 陰陽家, 儒家, 墨家, 名家, 法家, 道家를 六家에 넣고 있다.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먼저 형상을 초월한 철학을 한 것은 명가에 의해서 이다. ‘莊子’ 秋水篇에서 공손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同과 異를 합치시키고 堅과 白을 분리시키며, 옳지않은 것을 옳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며, 모든 사람들의 지식을 곤란에 빠뜨리고, 많은 사람들의 논증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것은 공손룡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당시 일반인들이 변자에 가지고 있던 인상이었다. 天下篇에는 "桓團과 公孫龍 등 辯者의 무리들은 사람의 마음에 사기성이 농후한 마술을 걸어 그들의 뜻을 바꾸고 남의 입을 이길 수는 있었으나 남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이것이 변자의 약점이다. 司馬談은 論六家要指에서 "名家는 복잡한 명제들에 있어 사소한 문제들을 철저히 검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사를 반박하지 못하게 하였고 오로지 名을 해결하려다 상식에서 벗어나고 말았다."고 평하였다.

 

 

2.

 

공손룡은 전국 말기에 활동한 변사로서 趙나라 사람이고 字는 子秉이다. 기원전 279년 무렵부터 조나라에서 벼슬을 해서 조나라의 재상인 平原君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다. ‘漢書’ 藝文誌에 의하면 그에게는 공손룡자 14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白馬, 指物, 通變, 堅白, 名實의 5편 및 후에 사람들이 편집한 전기인 跡府를 포함하여 6편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주된 5편은 매우 난해한 데다 과연 그의 저작인지도 의문이다.

 

■白馬~편은 白馬라는 개념이 말이라는 개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색깔을 표현한 것이며 후자는 형태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전자는 白+馬로 분석할 수 있지만 후자는 단일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실로 독창적인 분석이지만 白馬는 말이 아니다 라는 표현은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指物~편은 존재자인 物와 그 명칭인 指 사이에 생기는 일치와 배반을 지적하여 판단의 논리적 전제를 확실히 함으로써 일종의 인식론을 전개한 것인데 점차 형식논리로 기울어진다.

 

■通變~편은 전반부에서 개념의 異同을 설명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유 개념을 수립하여 비교할 것을 주장하면서 세속의 조야한 개념 규정과 무질서한 비교에 반대하였다. 또 후반부에서는 오행사상을 포함하여 靑과 白을 예로 들면서 상반하는 존재는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하여 군신 사이의 조화를 언급하였다.

 

■堅白~편은 堅白石을 예로 들어 인간의 정신이 촉각, 시각을 미묘하고도 자연스럽게 통일시켜 개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자연에의 순응을 충실히 함과 동시에 무익한 분석을부정한다.

 

■名實~편은 만물의 특성을 바르게 주장하는 것을 正名이라고 부르고 그 타당성 여부에서 治亂이 분기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5편은 개념을 바르게 분석하여 조잡한 일반 사고를 수정하고 확실한 지식 창조에 의한 정치에의 기여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통일적인 세계관의 결여와 강렬한 정치적 관심은 자신의 개념분석의 영역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게 하여 결국 사고 원칙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3.

공손룡은 하나의 표준 혹은 관점을 제시하여 이것으로 형상세계나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보편자를 발견해냈는데, 그는 이를 [旨]라고 했다. 그가 보편자를 [指]라고 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첫째 指란 名이 가리키는 것을 뜻한다. 名이 가리키는 것은 개체이다. 공손룡은 名은 實을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實은 개체를 뜻한다. 그러나 名이 가리키는 것은 보편자이다. 예를 들면 馬란 名은 이 말 저 말 등 개체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馬라는 보편자를 가리킨다. 또 白이란 名은 흰 물건 저 흰 것 등의 흰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니 白의 보편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 指는 旨와 통한다. 공손룡이 말하는 指는 서양철학의 관념이고 이 때의 관념은 주관적 관념이 아니고 객관적 관념이요 보편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공손룡이 말하는 白馬非馬論의 주요 내용은 백마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을 변론하기 위하여 사용한 증명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馬는 形을 가리키고 白은 색깔을 가리킨다. 색깔을 가리키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白馬는 非馬이다." 이것은 馬라는 名과 白이라는 名의 內包로 말한 것이다. 馬라는 名의 내포는 말의 모양이고, 白이라는 名의 내포는 색깔의 일종이다. 馬와 白 그리고 白馬 셋은 각각 그 내포가 다르다. 따라서 白馬는 非馬라는 것이다.

 

둘째 "馬를 구한다고 하면 黃馬 黑馬나 모두 가능하다. 白馬를 구하면 黃馬나 黑馬는 안된다. 그러므로 황마나 흑마는 모두 馬에는 해당이 되나 백마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백마는 비마임이 분명하다. 馬는 색깔이 포함된 것도 포함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黃이나 黑이나 모두 응할 수 있다. 그러나 백마라는 용어는 색깔을 포함하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한다. 황마 흑마는 모두 색깔 때문에 배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백마만이 그 요구에 응할 수가 있다. 배제함이 없는 것은 배제함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백마는 비마이다." 이것은 馬와 白馬의 外延으로 말한 것이다. 馬의 외연은 일체의 말이다. 백마의 외연은 단지 백마만 포괄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馬를 구한다면 황마나 흑마가 모두 가능하지만 백마를 지정하여 구한다면 오직 백마만이 그 요구에 응할 수가 있다. 馬의 외연과 白馬의 외연이 다르기 때문에 백마는 비마이다.

 

세째 "말은 확실히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마가 있다. 말에 색깔이 없다면 단지 말 그 자체일 뿐이니 어찌 백마를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흰 것은 말이 아니다. 백마는 白과 馬이나 白과 馬는 白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비마이다." 이는 馬의 보편자와 白의 보편자, 그리고 白馬의 보편자로 말하는 것이다. 馬의 보편자는 일체의 馬가 공유한 성질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는 어떤 색깔도 들어 있지 않다. 단지 그러한 말일 뿐이다. 백마의 보편자는 일체 말이 공유한 성질에 백의 성질이 덧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백마는 비마이다. 백마는 비마일 뿐만 아니라 희지도 않다. 그는 말하기를 "백은 흰 것을 특정시킨 것이 아니며 그것에 대한 망각이 허용된다.

 

그러나 백마는 흰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흰 것으로 특정된 것이 백의 보편자는 아니다." 이 흰 물건 저 흰 물건 등에서 표현된 백은 구체적으로 흰 것으로 특정된 것의 백이다. 특정되었다는 것은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흰 물건에서 보여진 흰 색은 이 흰 물건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백의 보편자는 백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흰 어떤 물건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정되지 않은 백이다. 특정되지 않은 흰색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이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이 허용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흰 것에서 특정된 흰 색은 특정되지 않은 흰색은 아니다. 백마의 백은 흰 물건의 백이다. 구체적으로 흰 물건으로 규정된 것은 백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비마이다.

 

4.

 

명가가 중국철학에 끼친 공헌은 형상세계를 비판하여 형상을 초월한 세계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공손룡은 "名과 實의 관계를 바로 잡아 천하를 교화하여 한다."고 했으며 스스로 內聖外王의 道를 강구하였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명가는 그들이 탐구해 낸 형상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실제생활에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명가 사상가에 대한 도가의 비판은 아주 통렬하다.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고 짐승을 얻었으면 올가미를 잊어라." 토끼를 잡았으면 이제 개를 요리하고, 새가 죽었으면 활을 창고에 넣어 두어라." 강을 건넜으면 다리를 부숴버려라" 라고 하여 언어에 붙들려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명가를 비판하였다.

 

  (출처/만갑이의 글판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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