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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동양철학

《중용(中庸)》 硏究(一)

by 윈도아인~♡ 2012. 3. 17.

《중용(中庸)》 硏究(一)
- 잔잔한 삶, 깊은 미소 -*


박 정 근**외대 철학

차 례
1. 머리 말
2. 된 사람[군자(君子)]의 삶
1) 가야 할 길[道]은 멀리 있지 않다
2) 된 사람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
3) 힘써 살 때 길은 절로 드러난다
3. 맺는 말
참 고 문 헌
1. 머리 말

1) 큰 바위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바위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주는 느낌이 있다. 오랜 세월동안 비, 바람, 서리,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뎌온 묵묵한 장중함과 함께 부드러움이 큰 바위마다 있다. 큰 바위, 오래된 큰 바위는 세월과 풍상(風霜)을 이겨냈노라고 큰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을 통해 다듬어지며 비로소 모습을 찾아가는 듯이 말이 없다.
《중용(中庸)》은 삶에 대한 유가철학(儒家哲學)의 토로(吐露)이다. 자사(子思)가 할아버지인 공자(孔子)를 통해 이어받은 유가적 삶의 온전한 길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퇴색하고 변색되는 것을 걱정하여, 그 올바름을 후세에 전하고자 지은 책이다.
가르침의 주고받음이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루어진 만큼 《중용》이 주는 느낌 또한 큰 바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중용》에 담겨 있는 말들은 대중을 열광시키는 힘에 넘치는 외침이 아니다. 아니, 《중용》은 오히려 대중을 열광시키기를 거부한다. 삶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유가의 세계관이기에 유가의 관심과 사랑이 온 세상 사람과 만물 모두에게 미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유가의 온전한 삶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삶이 결코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남들 사는 대로 남들 가는 대로 그냥 저냥 따라가며 사는 삶은, 설사 그런 삶이 그런 대로 별 탈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가의 온전한 삶이 되지는 못한다. 자기가 가야할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데서 유가의 삶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삶의 중심에는 내면의 깨어있음으로부터 연유하는 홀로 있음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스스로 깨어있지 않은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논어(論語)》의 한 구절이 이것을 말해준다.

공자가 말했다. “된 사람은 (사람들과) 화목하나 무리짓지는 않고, 덜 된 사람은 무리지으나 화목하지는 않는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중용》의 가르침은 스스로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온전한 삶의 길을 애써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잔잔하고 나지막한 소리이다. 그래서 이 《중용》의 소리를 들으려면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소리는 낮고 또 크지도 않지만 그 떨림에는 천고(千古)의 세월이 배어 있는 듯한 장중함이 있다.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서 폐부를 찌르지는 않지만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마음에 잔잔한 메아리를 일으키는 소리이다.
이 글을 통해 《중용》의 ‘그런 소리’를 독자들과 함께 들으려 한다. 《중용》이 지닌 연륜의 무게를 받아들여 담담하게 그 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이 또한 《중용》을 이해하는 나무랄 수 없는 하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2) 《중용》은 유가(儒家)의 인생철학(人生哲學)으로서 그것을 밑받침하는 《주역(周易)》의 역철학(易哲學)과 함께 유가철학의 체계를 이룬다. 다시 말해서 역철학에서 밝히고 있는 유가의 우주관․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삶의 의미를 맛보며 그 길을 가는 사람, 된 사람[군자(君子)]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중용》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중용》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의 드러난 부분이고, 역철학은 바다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빙산의 드러난 부분과 숨어 있는 부분이 두 개의 빙산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그 전체가 하나의 빙산을 이루듯 《중용》과 《주역》의 역철학의 관계 또한 그렇다. 때문에 《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철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함께 알아야 한다. 아주 간략하게 역철학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역철학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변한다[易]”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모든 것은 쉬임 없이 변하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갖고 있는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새로움’이다. 모든 것은 늘 변한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데 그 새로워짐이 바로 역철학에서 보는 변화의 본질이다. 《주역》에서는 그것을 “생생함을 변화함이라고 한다[生生之謂易]”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생생함, 다시 말해서 새로워짐, 삶, 생명을 하늘이 주는 선물로 여긴다. 그것도 보통의 선물이 아니라 가장 좋은 선물로 받아들인다. “천지의 지대한 덕(德)을 생(生)이라고 이른다[天地之大德曰生]”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런데, 생명(生命), 삶, 새로워짐이 아무렇게나 해도 하늘의 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하늘의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이 움직이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새로워져야 한다.
하늘이 운행하는 법칙을 역철학에서는 ‘도(道)’라고 하는데, 그 ‘도(道)’는 밤과 낮의 이어짐이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 달의 차고 이지러짐 등등 삼라만상을 통해서 그 작용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람을 포함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법칙에 따라 변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생생함․새로워짐․삶․생명(生命)을 누릴 수 있다.
대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통해서 유가의 선각자들은 ‘도(道)’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알았고 도(道)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人之道]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을 통해서 다시 삶의 생생함, 삶의 새로움을 맛보고 생명이 하늘의 선물임을 깨닫는다.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함이 도(道)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선(善)이요, 그것을 이루는 것이 성(性)이다.
[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역철학의 기본적 내용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안에는 짚어 보아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또 앞으로 이야기하게 될 《중용》의 내용에도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들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글의 목적이 우선 《중용》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어보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느껴보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질 것은 그 후에 천천히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혹시 더 분명하게 짚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음의 글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2. 된 사람[군자(君子)]의 삶

산과 바다, 강과 들이 있는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 땅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철이 뚜렷해 철마다 천지의 조화가 온 누리에 드러난다. 철 따라 산천초목이 변해가듯 우리네 삶도 철과 더불어 모습이 바뀐다. 우리도 철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철이 바뀌면 또 옷을 갈아입고 …. 우리들의 일상살이는 늘 그런 모습이다. 철부지가 아닌 바에야 그런 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중용》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늘 그렇게 있는 바다와 산, 강과 들,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사시사철,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 ‘중용’은 단조롭게 이어지는 ‘일상의 변함없는 삶에서 제 갈 길을 바로 간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앞다투어 찾고 있는 요즈음 유행하는 말대로 ‘돈 되는 따끈따끈한 정보’도 아니고 ‘튀는’ 이야기도 아니고 일상을 벗어나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각종 ‘스캔들’도 아니다. 그것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늘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관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바보가 아니라면 왜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일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결코 바보스럽지 않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왜냐하면, 일상을 벗어났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마저 우리들의 일상이고, 그 일상이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바보스럽게’ 생각된다면, 그런 분은 죄송하지만 반드시 《중용(中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에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아는 바보가 몇이나 있을까?
‘늘 그런 삶의 제 갈 길’이란 말을 들여다보면 참 이상한 구석이 적지 않다. 우선 늘 그런 삶에 도대체 ‘갈 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늘 그런 삶인데 따로 무슨 ‘갈 길’이 있겠는가? 그 길이 그 길이고 늘 가는 길이기에 말이다. 또 ‘제 갈 길’이란 말도 이상한 말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늘 그렇게 사는데 도대체 ‘제 갈 길’이라는 것이 따로 있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보면 정말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들의 삶이 다 그렇고 그런 삶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제 삶’이 있고, 또 제 삶이 매일 매일 되풀이되는 그게 그것인 삶이지만 그 안에도 할 일 ․못할 일이 있고 갈 길․못 갈 길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할 일․갈 길을 제대로 하고 제대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제 삶에 또 제 삶의 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아득한 세월을 여기 그렇게 자리잡아온 산․바다․강․들, 매일 매일 이어지는 새벽․낮․저녁․밤, 해마다 되풀이되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그것들과 어우러져 흘러가는 우리들의 삶 또한 늘 그런 것이지만 늘 그런 가운데 스스로 새록새록 새로움을 맛볼 수 있어야 정말 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늘 그런 제 갈 길을 가는’ ‘중용’의 길이다. 그렇게 보면 《중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리 어리석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너무 기대를 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삶은 늘 새로운 것이지만, 바로 늘 새로웁기에 새로움이 느껴지질 않고 또 그런 삶에 대한 《중용》의 이야기 역시 새롭게 느껴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친숙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에 그 낯익은 모습에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새로워진다면 그와 함께 산․바다․강․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사는 이들의 그 생생한 삶을 새롭게 맛보고 함께 나눌게 틀림없다. 이제 《중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가야 할 길[道]은 멀리 있지 않다

공자가 말했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에게서 멀다고 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도끼자루 찍네. 도끼자루 찍네. 그 본이 멀지 않네”라고 했다. 도끼자루를 들고 도끼자루를 찍으며 바로 못보고 멀리서 찾는다. 그러므로 된 사람은 사람의 도리로 사람을 다스려 고쳐지면 그친다. 충서(忠恕)는 도(道)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나에게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으면 남에게도 행하지 않는다. 된 사람의 도가 넷이 있는데 나[丘]는 하나도 아직 못한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 섬기기를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왕을 모시지 못하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모시지 못하고, 친구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베풀지를 못한다. 일상적인 도리를 행함과 평소의 말을 삼감에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하지 않고 남음이 있어도 감히 다했다 하지 않는다. 말은 행실에 맞아야 하고 행실은 말에 맞아야 하니 된 사람으로 어찌 독실치 않을 수 있겠는가!“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而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이 글은 《시경》을 인용하여 제대로 살아가는 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주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도끼자루를 구하러 나선 사람이 도끼자루로 알맞은 나무가 어떤 것인지를 몰라 눈앞에 있는 적당한 나무들을 놓아두고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맨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자기가 들고 있는 도끼의 자루가 바로 자기가 찾고 있는 도끼자루의 본보기인데도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삶의 올바른 길[道] 역시 나와 우리들 안에 있는 데도 그것을 멀리서 찾는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도가 우리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별 문제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면 어느 날에는 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도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도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모르는 줄도 모르고 도를 찾아 헤맨다면 그것은 도끼자루를 손에 쥐고서도 도끼자루로 쓸 나무가 도대체 얼마나 굵고 얼마나 길어야 하는지를 몰라 공연스레 이리 저리 헤매고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세상 어디에도 “내가 도끼자루감이요!”하고 써 붙이고 있는 나무는 없다. 찾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아야 한다.
공자(孔子)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도(道)’를 ‘충서(忠恕)’라는 말로 넌지시 드러낸다. ‘자기를 다하는 마음[盡己之心]’이 충(忠)이고 그런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침[推己及人]’이 서(恕)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제대로 사는 삶에서 그리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원하지 않을 터이고, 그러니 남에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도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된 사람의 길 네 가지도 전혀 어렵지 않은 평범한 이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면 그렇게 평범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공자(孔子)같은 분도 다하지 못하셨다고 하니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된 사람은 독실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정말 사람답게 사는 길[道]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행하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글은 좀더 살펴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것은 ‘충서는 도에서 그리 멀지 않다[忠恕 違道不遠]’는 말이다. ‘충서’는 유가철학에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길[道]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진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느니라” 하였다.
증자가 “예”하고 아뢰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무슨 말입니까?”하고 물었다.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뿐이다”라고 말했다.
[子曰 :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 「唯.」 子出, 門人問曰 : 「何謂也?」 曾子曰 :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논어(論語)》에서는 도(道)를 충서(忠恕)로 이해하고 있는데 《중용》에서는 왜 도에서 멀지 않다라고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아마도 그 같은 차이는 ‘충(忠)-진기지심(盡己之心)-’을 어떤 깊이에서 말하는가에 따라서 생긴 것이라고 보여진다. ‘자기를 다하는 마음[盡己之心]’을 충(忠)이라고 할 때, 우선 과연 ‘자기를 다한다[盡己]’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효(孝)를 예로 들어보자. 효는 부모님께 대한 자녀의 도리이다. 다르게 말하면 부모님께 대한 자녀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부모님께 대한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잘 해야 한다. 그렇지만 잘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부모님을 사랑할 때도 올바르게 해야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을 우리는 ‘효하는 길-효도(孝道)-’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효도한다’는 말은 부모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동시에 부모님을 사랑하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 ‘효성(孝誠)이 지극하다’고 한다. 그리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말을 풀어 말하면 ‘(참되고 성실한)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김이 더할 수 없는데 이르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다시 풀어 보면 ‘마음을 다하여[盡心] 부모를 섬김이 자기를 다하는[盡己] 데 이르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를 다하는 것[盡己]은 곧 ‘(자기) 마음을 다함[盡(己)心]’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자기) 마음을 다하여[盡心] 자기를 다할[盡己] 때’의 마음은 자기 마음이 다해져서 ‘자기를 다함이 (드러나는) 마음[盡己之心]’이다. 그러므로 ‘진기지심(盡己之心)’의 심(心)은 자기의 마음[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다한) 마음[(盡己之)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기 마음’과 ‘자기 마음을 다한 마음’은 별개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결코 같지도 않다[非二而非一].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하여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조금만 읽어보자. 다음 장면은 원효(元曉)가 얼마동안 함께 지낸 두 소년 소녀와 헤어지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언제까지나 따라나오는 두 소년 소녀를 산모퉁이에서,
“그만 들어가거라”하고 명하였다.
“스승께서 부르실 때까지 저희들은 무엇을 하오리까?” 아사가가 두 손으로 읍하고 이렇게 원효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늙으시고 어머니 병드셨으니 지성으로 시봉하여라.”
“도를 닦는 일은 어찌하오리까?” 사사마가 이렇게 물었다.
“부모께 효도하는 것이 도니라.” 이것이 원효의 대답이었다.
“효도의 길은 어떠하니이까?” 아사가가 물었다.
“그때그때 네 스스로 생각하면 알리라. 마음속에 내가 없고 오직 부모만 있으면 효도니라.”

다음 장면은 원효가 자신을 숨기고 감천사(甘泉寺)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절의 누구도 원효인 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방울스님이라 불리우는 노스님과의 대화이다.

“소승이 화엄(華嚴) 강백(講伯)이라구요?” 원효는 놀라는 빛을 보였다.
“응, 아마 원효대살걸.”
“과연 소승은 원효입니다. 그런데 시님께서는 어떻게 소승이 원효인 줄을 아십니까?”
“원효시님이 아직 도력이 부족하여서 내 눈을 가리울 힘이 없는 게지. 그렇지만 감천사 수십 명 중의 눈을 가리운 것만 해도 시님의 도력이 어지간하시지. 그렇지만 시님이 아직 신장의 눈은 못 가려. 어, 내가 또 부질없는 말을 했군!”
“귀신의 눈에 안 띄는 법이 어떠합니까?” 원효는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이 비면 아무의 눈에도 아니 뜨이지!” 방울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마음이 비이자면?”
“나를 없이해야지. 시님께 오욕(五慾)이야 남았겠소마는 아직도 아만(我慢)이 남았는가 보아. 오욕을 떼셨으니 잡귀야 범접을 못하지마는 아만이 남았으니 신장의 눈에 띄어. 시님이 아주 아만까지 버리시면 화엄 신장도 시님의 종적을 못 찾소이다. 아만 - 내가 이만한데, 내가 중생을 건질텐데 하는 마음이 아만야. 이것을 깨뜨리자고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금강경을 설하신 것이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거요.”

“마음속에 내가 없고 오직 부모만 있으면 효도니라”라는 원효의 말에서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다한[盡己心] 마음[盡己心之心]’을 읽을 수 있다. 이 마음은 ‘방울스님’이 말하는 ‘아만(我慢)-내가 이렇게 효도하는데-’이 떼인 텅 빈 마음[虛心]이니 차라리 ‘마음 없음[無心]’이라고 해야 옳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의 진기지심(盡己之心), 곧 충(忠)은 ‘부자지도(夫子之道)’로서의 충(忠)이고 그대로 도(道)이다. 이럴 때 자녀의 마음에는 ‘마음을 다하여’라든가 ‘나-자기-를 다하여[盡己]’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효도한다’라는 생각조차 없다. 이때 자기를 다함[盡己]이 이루어진다. 자기 마음이 다해져서 ‘자기를 다함[盡己]’이 드러날 때 그 ‘자기를 다함[盡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내[아(我)]’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나’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리고 그때 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말이나 모든 움직임은 그대로가 효이고 도이다.
《주역》의 “역은 생각 없이, 행위 없이, 고요히 움직임 없이 감응하여 천하의 이치에 통한다. 천하의 지극한 신묘함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럴 수 있겠는가?[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라는 말도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이 말은 점(占)치는[易] 데 있어서의 마음가짐과 자세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나는 일-감응하여 천하의 이치에 통함-을 보여준다. 물론 점을 치고 있지만 점을 친다는 생각, 점을 치는 행위까지 모두 마음에서 사라져 고요하게 움직임이 없을 때 비로소 감응하여 천하의 이치에 통하게 된다. 그것이 곧 제대로 점을 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다해서’나 ‘나를 다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효도한다’는 생각조차 마음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참되게 ‘효도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의 충(忠)을 《중용》에서는 ‘성(誠)’ 혹은 ‘지성(至誠)’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도(道)와 어긋남이 없다고 본다.
한편, 효도하려는 마음가짐이 그리고 나아가서는 내 마음을 다하고 나를 다해서 효도하려는 마음가짐이 남아 있을 때는, 이 때의 충(忠)은 앞서의 충(忠)과는 같지 않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다해서 효도하고자 (생각)하지만 그런 내 마음가짐과는 어긋나게, 오히려 그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음, 그리고 앞에서 인용된 아만 등등 때문에 참된 효[孝道]와는 거리가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의 ‘나를 다하는 마음[忠]’은 ‘도에서 그리 멀지 않다[違道不遠]’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진기지심(盡己之心)’을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처음에 시작했던 대로 ‘자기를 다하는 마음’이다. 이때의 마음은 당사자의 마음 곧 내 마음 혹은 자기 마음이고, 이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誠之]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人之道].
다른 하나는, ‘자기를 다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마음’은 사실 설명하기가 곤란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를 다한’ 마음이기에 이미 사라져버린 ‘자기’의 마음은 아니라는 점이다. 억지로라도 말하자면 하늘의 마음[天之心]이라고 할 수 있고, 이 경우에 천(天)의 의미는 하늘․땅․만물[天․地․萬物]을 합친 (生生하는) 천(天)이다. 이 하늘의 마음이 거스름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 된 사람[君子]이고, 때로는 성인(聖人)이라고도 한다. 또 거스름 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기를 다한[盡己]’이라고 말하고 이때의 충(忠)은 곧 그대로가 도(道)이다.
그런데 이때의 ‘충(忠)’도 ‘하늘의 마음’처럼 역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기를 다했음[盡己]’에 이르지 못하여 아직 남아 있는 자기가 있고 그 남아있는 자기를 다하여 갈 때는, 다시 말하여 진(盡)하여 갈 때는 진(盡)하여 감이 드러나고 눈에 뜨이지만 이미 ‘자기를 다한[盡己]’ 경우에는 ‘자기를 다했다[盡己]’는 것이 도대체 무엇 하나 드러나는 것이 없다. 때문에 이 때의 충(忠) 또한 어떤 것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전혀 드러남이 없기 때문에 도무지 말할 여지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서 인용한 ‘방울스님’의 이야기를 다시 음미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중용》에서는 이 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 성(誠)이란 힘들이지 않아도 맞아지고 생각지 않아도 얻어져 저절로 도(道)에 맞으니 성인이 그러하다. 성(誠)하려 하는 것은 선을 가려내서 굳게 지킴이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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