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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병 치유 ◈/마음의병 치유 ◈

먼저 마음의 병을 고쳐라

by 윈도아인~♡ 2012. 3. 17.

먼저 마음의 병을 고쳐라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의 실천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친구들과 학문을 논하느라 편지를 서로 나누면서
한 말은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더군다나 이미 말한 뒤에 저쪽 사람은 잊지 않았는데 내가 잊은 것이 있는가 하면
저쪽과 내가 다 잊어버린 것이 있으니, 이것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거리낌없는 무례
같아서 두렵기 그지없다.


  그 동안 옛 책장을 뒤져 보존되어 있는 편지 원고들을 다시 베껴서 책상에 두고,
때때로 펼쳐 보면서 자주 반성하기를 그치지 않았었다.


  이 중에는 원고가 없어져 기록하지 못한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리지
않은 모든 편지를 다 모아서 큰 책을 만들었다 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


  퇴계 이황 씀

 

 

     마음의 병을 먼저 고쳐라

 

  마음의 병은 바로 이치를 살핌이 투철하지 못해 쓸데없는 고집으로 무리하게
탐구하며,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괴롭히고 정력을 극도로 소모하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학문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병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미리 고칠 수 있었더라면 다시는 근심될 리 없겠지만, 일찍 알아서
빨리 고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병이 드디어 생기게 된 것이다.
  내가 겪은 평생 동안의 모든 병의 근원도 다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마음의 병이
전날 같지는 않지만, 다른 병이 이미 심하여졌으니 나이 탓일까.
  당신과 같은 젊은이야 기력이 왕성하니, 그 시초에 급히 고치고 섭생과 요양을
절도 있게 한다면 어찌 계속 괴로울 까닭이 있겠으며, 또 무슨 다른 증세가 생길 리
있겠는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제일 먼저 세상의 모든 욕심을 생각밖에 두어, 마음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이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면, 병은 이미 5내지 7할 정도는 나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일상 생활에서 타인과의 만남을 적게 하고, 취미와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워 편안하고 유쾌히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며, 독서와 화초 기르기,
등산이나 물고기 기르기의 즐거움 같은, 진실로 항상 부드럽고 따뜻한, 성내고 원한
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긴요한 치료법이다.
  책을 읽어도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는 읽지 말 것이며, 몸이 아플 때는 절대로 많이
읽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마음내키는 데 따라 그 뜻을 음미하며 즐기고, 이치를
궁리함에는 모름지기 일상 생활의 쉽고 명백한 곳에서 간파하고 숙달시켜야 할 것이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그것을 음미하고, 너무 집착하는 것도 아니요 집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사이에 마음을 두고 꾸준히 공을 쌓으면, 저절로 이해되어 깨달음이
있게 될 것이다.
  너무 집착하거나 마음을 얽매여 무조건 빠른 효과를 거두려 해서는 안 된다.

 


     명예에 집착하지 말라

 

  무릇 선비의 병폐는 뜻을 세움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뜻이 높고 깊으면, 어찌 학문이 지극치 못하여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알맹이 없이 이름만 더하는 것을 옛사람들은 좀도둑에 견주었다. 이것이
내가 이름을 함부로 얻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옛사람들은 학문하는 데 반드시 효, 제, 충, 신에 근본을 두고 차례로 천하의 만 가지
일에 목숨을 걸 듯 열심히 한다고 들었다. 그 목표는 물론 무엇이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먼저 시급히 해야 할 것은 가정에서 더욱 화평 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집안일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다 함은 옛사람들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을까?
  바라건대 그 이름을 떨치려 하지 말고 실리를 따지는 것을 고치기 바란다. 어버이의
뜻을 잘 좇고 즐겁게 봉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을 오직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따라 하면, 이제까지 영위해 오던 일도 틀림없이 다 그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 자세한 것은 책 속에 다 있으므로, 오직 어떻게 그것을 살펴 가며 골라 읽고 힘써
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인간이 곧 우주이다

 

  '마음이 곧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 함은 '인간이 곧 우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치는 사물과 내가 없고, 안과 밖이 없고, 병이 있을 때마다 곧 그 약이 있다고
생각케 한다. 그런데 주자는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곧 버릴 수 있는 약이다'고 했다.
  묵묵히 공부를 더해 가며 전진하기를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익혀서 완전히
익숙해지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가 하나가 되어, 잡았다 놓쳤다 하는 병이 없어질
것이다.
  정자는 '학문은 익힘을 중히 하는 것인데, 익힘은 마음을 오직 한 곳에 집중할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엄숙하면 마음이 곧 하나로 통일되고, 그러면
저절로 간사함임 생길 수 없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일컬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익히는 방법은 마땅히 '옳지 않으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아야'하고, 몸을 움직일 때나 안색을 바르게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만 그 뜻이 참되고 노력하기에도 쉬운 것이다.
  그러한 참된 노력이 쌓이고 쌓여 시간이 지나면 얻음이 있게 된다.
  '마음에 있는 것이나 일에 있는 것이나 다만 하나의 이치일 뿐이다'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른바 한 근본이란 이치의 가장 순수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지, 마음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옳다.
  무릇 이미 하나의 이치일 뿐이라고 했으며, 이치의 핵심 되는 곳이 마음에 있지 않고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모름지기 마음에 있는 것과 사물에 있는 것이 본래 두 가지가 아님을 분명하고
투철히 알아야 비로소 참답게 아는 것임을 깨달아야겠다.
  진실로 그렇게 않고 막연하게 '하나의 이치일 뿐'이라고 한다면, 한 근본과 만
가지의 다름에 대하여 아직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내가 전에 늘 '이자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고 한 이유이다.

 


     먼저 실천하고 뒤에 말하라

 

  그대는 학문에 있어서 그 방법을 이미 알았고, 그 병폐의 소재도 알았다. 진실로
'빨리 나아가는 자는 물러가기도 빨리 한다'는 경계를 잘 지키면서, 배움을 오래 쌓아
습관이 이루어지면 바탕이 변하고 어진 지혜가 무르익어, 아마도 인생의 한 가지 큰
기쁜 일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급히 얻으려고 서둘다가 깨닫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부딪히는 곳마다 다 사실대로 보고, 당연한 곳에서는 곧 실천하는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음을 알면서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공자님 말씀의 '먼저 행하고 뒤에
말한다'는 교훈에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오로지 고요한 곳에서 정신 집중하여 공부하고 싶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것도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속된 일을 무조건 외면하다 보면 그 또한 학문에 해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의 일상사라면 어느 선에서 큰 뜻을 세워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반드시 고요히 공부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장 긴요하지 않은 이차적인 일이
되겠다.
  과연 그래서야 옳겠는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주의 본체가 마음에도 있고 사물에도 있다는 이론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면 이치의 알기 어려운 점을 차츰 부족한 곳 없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해는 땅 아래 있어도 틀림없이 밝게 빛난다. 이것은 그 빛이 방출되어 달의 밝음으로
연결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겨울은 사계절의 음이고, 지하는 지상의
음이다. 지상의 햇빛이 겨울에 으르러 점차 미약해지는 것은 해가 미약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음기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일 뿐이다.
  '측은 한 마음이 사람의 사는 길이다'고 한 정자의 말에 대하여서는, 주자와 그
문인들이 주장한 글에서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는데, 대개 이 산다는 '생'자는
생활이라는 의미로서, '생하고 생하여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즉 천지의 사물을 만드는 마음과 더불어 일관하여 있는 것은 다만 하나,
'생'자뿐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천지의 사물을 창조하는 마음'에 대하여 묻는 어느 사람의 질문에
답하기를, "천지의 마음은 다만 하나의 생일 뿐이다. 무릇 사물은 다 생함으로써
만물이 있게 된다. 사람이나 만물이 생하고 생하여 다함이 없는 까닭은 그 생명력
때문이다. 생명력이 없다면 곧 말라죽어 버린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폭군이나 도둑놈 또한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역시 생활이 가장
중요하다.
  몸과 마음이 포함한 것이야말로 무엇이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인은 물론 마음의
덕이고, 지혜 역시 마음이 덕일 수밖에 없다. 지각은 지혜의 일인 까닭에 마음의
덕이라 하는 것이다.
  '타고난 악도 그 사람의 본바탕의 이치다'라는 말은 괴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자 이후로 이 이치를 논해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개 사람의
본바탕은 물에 비유되는데, 맑고 고요히 흐름이 물의 본바탕이다.
  그것이 흙탕물을 만나 흐려진다거나, 험준한 곳에서 파도가 거세게 일어남은 물의
본질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물이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만난 대상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악한 기질이 비록 사람의 도리는 아닐지라도 어찌 본능의 이치라고 할 수
없겠는가?

 


     외모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변한다

 

  '외모가 흐트러지면 마음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찮게 여겨질 일이 아니다.
  마땅히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만
하더라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때 미리 쓸데없이 신경을 쓴다면 성공할 수 없다. 다만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깊고 너그럽게 인격을 길러, 말을 경솔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오래오래 노력하여 점점 익숙하게 되면 자연히 자신도 실수 없을 것이고 남을
상대하는 데도 절도에 맞을 것이다. 비록 맞지 않는 말이 있더라도 남들 역시 심하게
그대를 원망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옛 선비들이 공부한 것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학문과 스승을 공경하고 힘써 잠시의
중단도 없었다. 또한 수많은 공부를 쌓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충분히 연구하고 실천한
다음에야 지식과 행동이 자연히 순서에 따라 얻어졌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학문에 있어 너무 급하게 이루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다.
  그런 까닭에 빠른 효과를 얻으려는 것을 피하지 못하여 항상 어긋나게 행하기 쉬운
염려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계속하면 쉽사리 편견에 빠져 도리어 진리를 해칠까
염려되는데, 이는 적은 폐단이 아니다.

  또한 부모를 섬기는 일은 하늘이 준 양심과 지극한 도리가 아님이 없으니, 이치에
마땅한 것을 헤아려 지성으로 온순히 섬기고 조심하여 차츰차츰 행한다면, 어찌 위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집안 식구들이 섭섭하게 여기겠는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집안 식구들이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 급히 구하고
지나치게 빨리 하려는 때문이다.
  역시 마땅한 것을 헤아려 보지 않고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 자취가 너무 드러난
때문이 아니겠는가?
  행하여 들어맞지 않거든 자신을 반성하여 자책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몸소 장만하는 일이야말로 부모를 섬기는 일 중에 중요한
사항이다. 사는 게 풍족해지고 버릇없이 자란 자식이 많아 이것을 실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몸소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혹 부모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면, 형편에 따라 적당히 참작하여 차차 더해 가야 한다.
  문제는 마음을 다하여,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 공부


  학문이란 단번에 뛰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므로
한두 해의 공부로 효과를 기대한다거나 만약 이처럼 마음을 먹었다면 이는 참으로
꼼꼼하지 못한 짓이다.
  학문이란 죽을 때까지 닦아야 하는 일로서 비록 성현의 경지에 도달했더라도 끝났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보다 못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아플 경우, 불필요한
억지 탐색과 무리를 하지 말아야겠다. 인간의 마음이란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쳐 없어지는 법 공부만을 무작정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의 명백한 곳에 눈을 두고
마음을 여유 있게 가지면서, 이 속에서 한가롭고 편안히 쉴 필요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
결심을 굳혀야 한다. 이처럼 오랜 세월의 공을 쌓으면 마음의 병이 치료될 뿐 아니라,
흐트러짐 없는 정진의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찰의 공부를 생각에 떠올리지
말라는 말은 학자의 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의 병은 반드시 이처럼 한
뒤에야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질을 바로잡는 일이 내게 있지 남에게 있지 않다'는 말은 참으로 불변의
이론이다. 그러나 엄한 스승, 훌륭한 벗과 함께 지내면 이끌어 주고 갈고 닦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


  가난하여 농토를 사는 것은 본래 의리에 크게 손상되는 일이 아니며 값의 높고
낮음을 따져서 비싼 것을 깎아 알맞은 시세에 따르려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이다. 다만
한 번이라도 자기만을 이롭게 혹 남을 이기려는 생각이 있으면, 이는 곧 선과 악이
분별되는 분기점인 만큼 반드시 재빨리 전신을 바로잡아 옳고 그름을 판별하여야
비로소 소인배를 면하고 군자가 될 수 있다.
  굳이 농토를 사지 않는 것이 고상하다고 여길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일에 마음을
오래 쓰면 인생의 헛된 함정에 빠지기 쉬우므로 항상 마음을 착실하고 꼼꼼하게
가다듬어 타락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은, 산이 어질다거나 물이 지혜롭다고
한 말이 아니다. 또한 사람과 산수의 본바탕이 본래 동일하다고 한 말도 아니다.
  다만 어진 이는 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인데, 비슷하다고
함은 다만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뜻을 가리켜 한 말이다.
  어짐과 지혜로움의 이치는 미묘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기상과 뜻을
가리키고 반복하여 표현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그 형상을 통하여 근본을 구해
모범을 삼게 하려는 것이지, 산과 물에서 그것을 구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요산요수'라는 두요의 뜻을 알려면, 마땅히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의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의 기상과 의사를 아는 데 있어서 어찌 다른 곳에서 구하겠는가?
  내 마음에 돌이켜 결과를 얻어야 하겠다. 참으로 내 마음에 어진 지혜의 결과가
충만 되어 밖으로 나타난다면, 요산요수는 간절히 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렇게 힘쓸 줄은 모르고 한낱 높고 푸른 것만 보면서 '내가 이것으로 어진 이의
즐거움을 구한다'하고, 또 끝없이 넓게 흐르는 것만 보면서, '내가 이것으로 지혜로운
이의 즐거움을 구한다'하면 넓고 아득하여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어진 이가 산과 같다'는 것은 옳지만, '어짊이 산의 본바탕'이라 한다면
전체의 인이 아니며, '지혜로운 자가 물과 같다'는 것은 옳지만, '지혜가 본바탕'이라
한다면 지라고 이름한 본래의 뜻이 아니다.
  대개는, 사람과 산수의 본바탕이 본래 동일하다는 것만 알고 나뉘어 다른 것은 알지
못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생각하면 얻는다

 

  대개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일이 있을 때나 일이 없을 때나, 뜻함이
있을 때나 뜻함이 없을 때 나를 막론하고 마땅히 존경심으로써 기둥을 삼아 그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려가 생기지 않은 때에는 몸과 마음이 비워지고
심성이 순수하게 되며, 그 사려가 이미 생겨난 때에는 바른 도리가 환히 드러나고
물욕이 물러나 하늘의 이치에 복종하므로 복잡한 근심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노력을 쌓고 쌓으면 성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학문의 길인 것이다.
  이것을 힘쓰지 않고 그때그때 저절로 생각이 나오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이것은
한가로울 때 깊은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맹자는 '마음의 일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먼저 큰 뜻을 세워 놓으면 작은 뜻이 빼앗지 못한다'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무릇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는 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곧
사사로운 욕심이 있다'하는 것은 그 말의 뜻이 정학하지 못하다.
  밝게 보고자 하는 것과 밝게 듣고자 하는 것을 일시에 합하면 하나를 생각하는
것이지 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힘씀이 오래면 자연히 각각 그 이치에
맞는다는 말도 매우 맞다. 이른바 '한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는 비록 다른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한 것은 마음을 두 갈래로 쓰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는 공부로서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보기와 듣기를 함께 하거나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여기서 만일 듣는 데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고 보는 것을 전연
돌보지 않는다거나, 손짓에만 집중하고 발짓은 되는대로 아무렇게 내버려둔다면, 어찌
일에 있어서 한 가지는 잘하고 한 가지는 못하는 것이 되겠는가?
  돌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곳에서 마음이 그 일을 당하여 마땅히 응하고
응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불분명하여 통하지 못하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을 버려라

 

  일이란 좋은 일과 나쁜 일, 큰 일과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둔다'는 글뜻은 한 군데 붙어 얽매여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꿍심을 품거나 나쁜 일을 조장하고 이익만을 따지는 여러 가지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이라는 한 글자도 알기 어려운
말이다. 이른바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요, 아니 두는 것도 아니다'란 것이 곧 이
'일'이란 글자의 뜻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하늘의 이치를 기르고, 움직이면 곧 욕심이 생기는 법, 그것이
싹트는 기미를 보일 때에 잘라 버려야 한다.
  이렇게 참된 공부가 쌓이고 노력이 오래되어 순수히 숙달되면, 일상 생활에 있어서
비록 백 가지 천 가지 일이 생겨나고 사라지더라도 마음은 제대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어서 잡스런 생각들이 절로 나의 걱정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온 정신을 한데 모아서

 

  글씨를 쓸 때엔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한다.
  글자 자체가 좋거나 나쁨을 미리 기대하지 말고 오로지 글자 쓰기에 정성을
기울인다.
  쓴 글자가 교묘하거나 치졸한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자질의 분수와 공부한 노력이
따라 절로 결정될 뿐이다. 이러한 옛 성현들의 태도는 '기를 기르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로움을 모아 하고 그 결과를 마음에 두지 말라.
  이 일을 절대 잊지 말고 무리하게 꾸미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현의 마음의 법은 반드시 글씨를 쓰는 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주자 또한 '일이 그 가운데 있으면 모든 점과 획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뜻을 멋대로 버려 두면 글씨가 거칠어지고, 예쁜 것을 취하면 글씨가
흐트러진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이른바 일이란 곧 정성을 말한다.

 


     남을 통해 스스로의 선악을 찾으라

 

  말을 타고 길을 갈 때 경치는 그곳에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지만, 사물에 관해
시를 읊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함께 관계하는 일로서, 여기서도 어찌 정성을
첫째로 쳐야 하는 원칙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독서할 때의 책을 읽는 것이나 외출할 때 옷을 입는 것에만 주력하라는 것과
비교해도 심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동쪽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만 고개를 돌렸을 때, 시선이 좇아가지 않더라도 마음은 이미 새가 앞에
날아가는 것을 헤아리는 경우이다. 사람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곳을 따라 날아가고 달려가게 된다. 이것은 '고개를 돌린 채 애써 새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몸은 이곳에 있으면서 마음은 저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뜻한다.

  사물이 통과하여 비치는 거울은 마치 불이 하늘 가운데에 밝게 탐으로써 만상이 두루
비치는 것과 같고, 사물을 좇아 비추는 것은 마치 햇빛이 일정한 사물을 좇아
내리비추는 것, 예컨대 응달진 벼랑의 뒷면이나 오두막집의 아랫부분으로 스며드는
것과 같다. 이들 두 가지 말은 매우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크게 다른 것이다.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과 남이 나에게서 구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의 마음씀씀이
구분되는 가름길이다. 남의 선악을 보고 스스로의 선악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군자의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구하면서 허물을 고치고 착한 데로 나아가며, 결점을 살펴서 고치는
곳에 어찌 사사로움이 용납되겠는가?

  남들을 비평하는 사람들의 단점은 자기 스스로를 닦는 데 힘쓰지 않고 남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그 마음이 바깥으로 치달을 뿐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하는
데에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닦아 스스로의 시비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사람들과는 그 마음씀이
결코 같지 않은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의 마음이 그 바름을 얻었을 때는 하늘과 아버지, 땅과 어머니가 같고
만민이 형제자매처럼 되며 만물과 내가 하나로 된다.
  모든 것이 뒤섞여 용납되며 측은하고 근심스러워지면서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는 절실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부모를 섬기는 것과 하늘을 섬기는
것이 진실로 하나의 이치로 통한다.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온통 이 일 아닌 것이
없고, 숨 한 번 쉴 동안의 정지도 용납되지 않으면서 뜻과 생각이 분명해짐으로써
비로소 이와 같은 것이 억지로 꾸며댄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게으름이 가장 큰 죄악

 

  공부는 뒤로 미루지 말고 순간순간 항상 정지해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어디에서나
힘써야 한다.
  험심탄회하게 이치를 관찰할 뿐 선입견을 두지 말며, 꾸준히 배움을 쌓아 익힐
것이지 짧은 시간 내에 효과를 바라서는 안 된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내버려두지 말고 평생 노력해야 한다.
이치가 완전히 이해되고 하나로 되는 것은 모두 깊이 쌓은 후에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다. 한순간에 문득 깨달았다는 사람들처럼, 어지럽고 아득한 가운데 그림자만 얼핏
보고서 큰일은 다 끝났다고 떠들어대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궁리한 다음 실천으로 이를 몸소 체험해야 비로소 진짜가 되는 것이다.
지금 비록 진리를 깨쳤다 하더라도 겉핥기를 면치 못하거나,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혹 일순간이라도 이를 잃어버리면 이에 따라 일상 생활은 한없이 문란해지기
쉽다. 처음 배울 때에는 이치를 보는 것이 진실되거나 절실하지 못하고, 지식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법으로 이 또한 우리 모두의 근심이다.

  돌이켜 세상 사람들을 볼 때 훌륭한 재주와 뛰어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은 과거 공부에 얽매여 버리고 이미 벼슬을 얻은
사람은 이해 득실에 빠져 비록 뜻이 있어도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뜻은 이들과는 다르다.
  그대가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린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대가 어렵지 않게 결단을 내린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진실로 그러한 결단의 마음을 잘 확대하여 처세한다면 비록
과거 공부나 이해 득실 문제가 눈앞에 있더라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임을 믿는다.

 


     길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궁리란 복잡다단한 것이니 만큼 한 가지 방법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한가지 일을
궁리해서 터득하지 못하였다면 이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궁리하는 사물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힘껏 탐색해도 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거나, 나의 모든 재주로써는 이를 잘 밝히지 못하여 억지로 터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우선 그 일을 놓아두고 다른 일을 궁리해야 한다.
  이렇게 이 일 저 일 궁리하는 가운데 오랫동안 쌓고 깊이 익히면 자연히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진리가 눈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때에 지난번에 풀지 못했던 미세한
뜻의 실마리를 다시 잡아내어 이미 터득한 지식을 응용해서 살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에 풀리지 않던 것이 함께 일시에 깨달아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용법이다.
  궁리하다 풀리지 않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한 가지 일에 완전히 궁리 터득된
다음에 조금씩 순서에 따라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궁리의 대원칙으로, 이와 같이
한다면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내 살을 주신 분

 

  효자가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내는 것에 대해서는 앞 시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말했다. 지극히 절박한 때를 당해서 다른 데서 얻을 수 없었을
경우에는 자기의 살을 베어 내서라도 어버이의 목숨을 건지려는 것이 자식된 자의
진실한 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원칙으로 삼아 효도하라고 사람들에게 훈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자는 그에 대해 다만 '거의 효도했다'고 말했을 뿐이요, 그것을 더없는
선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어째 해야 할 방법과 합당한 도리를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부득이
차선책을 찾아서 이에 따라야 할 것이다.

 


     세상을 위한 학문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도를 행하고 의로운 일을 사모하는 데 뜻이 있는 사람은
대개가 세상의 화를 당하는데,
  이것이 비록 땅이 좁고 인심이 야박한 까닭이라 할지라도, 역시 그 자신의 행위에
미진함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그 이른바 미진함이란 다름 아니다. 학문이 지극하지 못하면서도 지나치게 높이
자처하고, 때를 헤아리지 못하면서도 세상을 다스리려는 데에는 날쌘 탓이다.
  이것이 그 실패를 가져오는 길인 만큼, 큰 이름을 띄고 큰일을 맡는 사람이 절실히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을 위하는 길도 지나치게 높이 자처하지 말아야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도 서둘러 만용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무릇 자신의 주장에
절대로 지나침이 없게만 한다면, 이미 출세의 길로 나선 바에야 나라의 살림을 열심히
꾸려 가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할 때에는, 그 맡은 바의 걱정거리를 주로 생각하는
이외에, 항상 한 걸음 물러서고 한번 머리 숙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나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한데 어찌 나라 살림의 책무를 맡겠는가' 자문해야 할 것이다. 시대가 나의
뜻과 다를 때에는, 조금도 밖의 세상일에는 관계하지 않고 쉴 것을 청한다든지 혹은
물러설 것을 청하라.
  학문에 전념하면서 '나의 학문이 부족하므로 조용히 닦아 나아가도록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다짐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오래도록 기약하여,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학문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진리의 무궁함을 깊이 깨닫고 항상 스스로 부족한 생각을 지니고, 내 허물
듣기를 기뻐하고 착한 일하기를 즐기며 참다운 노력을 오래 쌓는다면,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지고, 공이 저절로 높아지고 업이 저절로 넓혀질 것이다.
  위에 말한 세상을 다스리고 도를 행하는 책임은 이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맡을 수
있다.

  선비가 한 번이라도 조정에 나서면 모두들 낚시에 걸린 고기꼴이 되고 만다. 그중
꿋꿋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화를 당하기가 일쑤이고, 이리저리 아부나 하는
나약한 사람들은 서로를 조심하여 너무 모나거나 아니면 굽신거리는 작태뿐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안타깝다. 출발할 시초부터 이미 소문이 사방에 퍼져 덕을 깊이
쌓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정치를 맡게 된다면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고, 완전히
믿어 주지 않는 상태에서 어리석게 떠들어대면 몸을 욕되게 하고 말 것이다. 앞사람들의
패망을 살펴보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학문에 오직 힘쓰고자 한다면 조정에 나서지 말고 물러나 있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불나비가 불에 뛰어드는 것 같은 일이나 높은 담장 밑에 서서 깔려 죽는 일을
자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부득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각기 직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데에는 반드시 확실한 법칙이 있다.
  이는 이른바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것에 개의치 않고 덕을 닦아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출세길로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일을 이와 다르게 볼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의 갈림길

 

  주자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람이란 하늘과 땅의 뜻을 받고 태어나므로 아무 느낌도 없을 때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온갖 원리를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본바탕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 본바탕이 있게 되면 곧 형상이 생겨나고, 형상이 있게 되면 곧
마음이 생겨나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없을 수 없다. 사물에 감동되면 본능의 욕구가
나오고, 여기에서 선과 악이 갈리게 된다.
  본능의 욕구가 곧 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간략하지만, 이치만은 인간의 타고난 성품에 관한 것을 다 갖추어 모든
뜻을 남김없이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정이란 '희 노 애 구 오 욕'이라는 것으로 "중용"의 '희 노 애 락'과
동일한 정의이다. 이미 마음이 있으면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없을 수 없으므로 정이
우주의 본체와 그 현상을 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물에 감동되면 선악이 여기서
나뉘므로, 정에 선악이 다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참되게 익혀 실천하는 배움

 

  나랏님의 한 마음은 온갖 정치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며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뭇 욕심이 침공하고, 뭇 간사함이 갈마들며 침해하는 곳이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지면서 방종해 진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닷가 들끊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다.

  옛날의 성스럽고 현명한 황제나 군왕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하루하루를 삼가 지내면서도 오히려 미흡하다고 여긴 나머지,
스승을 세우는 한편 바른 말을 올리는 직책을 두었고, 전후좌우에 보필하는 사람이
있게 하였다.
  소반이라든가 밥그릇, 책상, 지팡이, 칼, 들창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길이 닿는
곳과 몸이 머무는 곳에는 어디나 교훈 되는 문구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지키게끔 하는 것이 이토록 지극하였다. 그런 까닭에 덕이 날로 새롭고
나라살림이 날로 번창하여, 티끌만한 허물도 없게 되고, 나아가 큰 이름이 남게 되었다.

  대개의 군주들이란 하늘의 명령을 받고 왕위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크고
무겁건만, 어떻게 되어서인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은 하나같이 게으르기
십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손한 태도로 스스로 성자인 체하는가 하면 오만한 태도로
수많은 백성들 위에서 교만을 떨었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일찍이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해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기자가 무왕을 위하여 아뢸 때에도, '생각하는 것을 예라
하는데, 예는 성인을 이룩한다'고 하였다. 무릇 마음이란 가슴 밑에 있는데 지극히
나약하고 미묘한 것이다.
  이성이야말로, 지극히 확실하고 알찬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확실하고 알찬 이치를 구하면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면 이해되고 성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오늘날이라 하여 틀린
말이겠는가?
  그러나 잡념이 없이 마음이 영묘하다 할지라도 만일 마음의 주재하는 능력이 없으면
일을 앞에 당하여 놓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품은 생각이 확실하더라도 만일 찾아서
처리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항상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두워지고, 생각만 하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원래 학문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두워져 깨우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점에까지 이르러야 하며, 그렇게 하고서도 그 일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운 불안하므로 반드시 배워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생각과 배움은 서로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지도자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곧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마음과 행동을 합치시키고,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을 한 가지 되게 하는 도리다. 정성스런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반드시 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엄정하게 가지며, 정신을 조용히 통일시킨 상태
속에서 이에 대한 이치를 배우고 묻고 생각하며 분별하는 것이다. 항상 궁리하며, 남이
보거나 듣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경계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더욱 엄숙 공경스럽게
하며, 혼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는 '성찰'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일을 더욱더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한 일을 익힐 때는 그 일에만 전념하여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변함없이 그렇게 하여야 하고 오늘과 내일, 매일매일
계속하여야 한다.
  혹은 새벽녘 정신이 맑을 때에 되풀이하여 그 뜻을 음미하여 보기도 하고, 혹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과 상대할 경우에도 그것을 경험하면서 키워 가야 하겠다.
  그렇게 하면 처음에는 혹 부자유스럽고 모순되는 난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때로는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한 일들도 없지 않겠으나, 이러한 것은 바로 옛사람들의
이른바 '장차 크게 나아갈 기미'이며 또한 '좋은 소식의 징조'이니 절대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더욱더 자신을 가지고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진리를 많이 쌓는 한편 오랫동안 힘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가 서로 영향을 미쳐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환히 꿰뚫듯 이해하게 되고, 익히는
것과 그 익혀진 일이 서로 익숙해져 점차로 순탄하고 순조롭게 행하여지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각각 그 한 가지에만 전념하던 것이 끝내는 모두 일치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맹자가 말한 '학문을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깨닫는 경지'이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만두지 못할 경험이다.

 


     존경의 태도를 가지면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능력을 얻어서 가장 영특하다'한 것은 순수하고 지극히
착한 본바탕을 말하는 것이다. '형체가 생기자 정신이 일어났다'는  것은 음기가
움직이고 정지하며 이루는 것이다.
  '다섯 가지 본바탕이 감동한다'함은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수 화 금 토의
본바탕을 낳는 것을 말한다.
  앞서간 성인은 힘써 닦지 않아도 저절로 이룬다.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몸을 닦는 것은 곧 군자의 책무이기 도하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도리를 거스르는 것은 소인의 짓거리이며 그가 흉하게
되는 까닭이다.
  존경의 태도를 가지면 욕심이 적어지고 사리는 밝아진다.
  욕심을 줄이고 또 적게 하다가 아예 없애 버리면, 곧게 나아가 성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아들

  하늘은 아버지며 땅은 어머니라고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자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성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친구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성인이란 그
덕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이란 무엇이든 빼어난 사람이다.
  이 세상의 늙고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경우와 같다.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세상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며, 늘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어진 일을 해치는 것을
도둑이라 한다. 악한 일을 더하는 자는 못난 놈이고,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부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부모의 사업을 잘 이어가며, 그 조화 속의 오묘함을 다 알면
그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는 일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착한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혀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원리는 하늘의 불변의 법칙이고, 인, 의, 예, 지는 인간이
가다듬어야 되는 본성이다.
  이 인간의 본성들은 원래 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는 바로 이것이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또 순리적으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인만이 그 본성이 자연스럽게 실현되어 하늘과 같이 넓어지고 털끝만큼의 힘을
더하지 않아도 온갖 착함이 다 갖추어진다.
  일반 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도리를 무너뜨리고 서슴없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다.
  성인이 이것을 가엾게 여겨 학문을 만들고 스승으로서 가르치어 그 본성의 뿌리를
북돋는 한편 그 가지를 뻗게 하였다.

  배움의 첫걸음은 우선 청소를 깨끗이 하고 손님 접대를 공손히 하며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공경하여 행동이 조금도 법도를 어김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완전히 실천하고 난 다음에 힘이 남으면 시를 외고, 글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고, 춤을 추되 모든 생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이 법도를 궁리하고
깊이 생각하여 몸을 닦음이 학문의 큰 뜻이며 목적이다.

  밝은 본성은 환하여 안팎이 없다.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혀야 곧 본래의 본성의 회복하게 된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어진 사람들이 돌아갔는 데다 예의범절이 없어지고 교육마저 해이해져, 어린이의
양육이 바르지 못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자란 뒤에는 더욱 경박하고
사치스러워 질 것이다.
  좋은 풍습이 없어지고 어진 인재가 드물며, 사리사욕으로 뒤얽혀 싸우는 바람에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의 본성은 하늘에 표준을 둔 것이어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천하를 얻으려면

 

  "대학"의 뜻은 밝은 본성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착한 경지에 머무는 데 있다. 머무를 데를 안 뒤에야 목적이 있고, 목적을 정한
뒤에야 동요되지 않을 수 있으며, 동요되지 않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다.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 일에는 시초와 종결이 있으니,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정의에 가까워질 것이다.
  옛날 큰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바로잡았고, 그 집안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했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얾을 투철히 했으니, 앎을 투철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데 있다.

  사물의 이치가 밝혀진 뒤에 라야 앎이 투철하여지고, 앎이 투철하여진 뒤에 라야
뜻이 진실하여지고, 뜻이 진실하여진 뒤에 라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라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이고 난 뒤에 라야 집안이 바로잡히고, 집안이
바로잡히고 난 뒤에 라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라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지도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백성이 다스려지는 법이 없으며, 후덕하게 해야 할 데에
야박하게 굴고, 야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덕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부터 잘 다스리라

 

  주의가 가만히 살펴보니, 옛날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뜻은 어느
것이나 다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알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지, 한갓 읽은 것을 외는 데 힘쓰고
문장을 일삼음으로써 명성이나 구하고 이익이나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와 다르다.
  그러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법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책을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치의 당연함을 안 후에 자신을 다스려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한다면, 지켜야
할 법칙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뒤에 지키려 하겠는가.
  요즘 학교에는 규약이 있지만, 스승을 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그 법이 또한 결코
옛사람들의 뜻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라

 

  어진 사랑이란 만물을 창조하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천지 변화가 아직 생기기 전에도 마음은 갖추어져 있었지만, 오직 어진
사랑만이 4계절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어진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천지의 마음은 그 특성을 네 가지 갖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것이다.
  이것들이 운행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만드는
기운은 네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 의, 예, 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동하면 사랑과 공경심, 아름다움과 헤어짐이라는 정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사랑이 그것이다.
  참으로 어진 사랑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진 사랑을 찾는 일'에 두는 까닭이다. 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참사랑을
알면 어진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 하늘의 뜻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생기게 되며 이 마음의 작용이 다 이루어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손한 태도를 가지며, 일을 볼 때에는 정성의 태도를
가지고, 남을 대할 때에는 받드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우애로 형을 섬기고, 너그럽게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잘 다스리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세상에서는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생명을 사랑하라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은 욕심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어른이 되면 벌써 욕구에 눈을 뜬다. 어른 된 마음이란 의리가 다 갖추어진
이성과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도덕심이란 곧 의리를 깨달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두 가지의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바깥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그에 따른 인생이 없을 수 없게 되고 생명을
사랑하면 도덕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개미까지도 밟지 말고

 

  옷차림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똑바로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공부해야 한다.
  발놀림은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고,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까지도 밟지 말고 돌아서 가자.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작은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하고, 잡념 막기를 성곽처럼 튼튼히 하며,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함이 없어야 한다.
  동쪽을 가야 할 때 서쪽으로 다지 말고, 북쪽을 가야 할 때 남쪽으로 가지 말며,
일을 할 때에는 오직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한다.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모아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한다.
  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는 것을 곧 '정성을 지닌다' 하니, 움직일 때나
조용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잡히도록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나쁜 욕심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도 차가워진다.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지며 배움 또한 못 쓰게 될 것이다.

 


     밤은 곧 아침으로 돌아오느니

 

  새벽에 잠을 깨면, 이런저런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바로 그 때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자.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 있게 세워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바로 입은 다음 단정히
앉는다.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마음의 상태를 엄숙하게 갖고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여러 성현들이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학우들의 질문을 반복해서 참고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곧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하늘의 뜻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을 끝내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갖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자연의 움직임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수 있다.

 


     물 속의 달은 달이 아니다.

 

  달이 여러 시냇물에 비치매 곳곳마다 둥근 달이 있다는 이야기는 옳지 않다.
하늘이든 물 속이든 비록 같은 하나의 달이라 하더라도 하늘의 것은 진짜이지만 물
속의 것은 달 그림자 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달을 가리키면 실상을 얻지만, 물 속의 달을 잡으려 하면 얻지
못한다. 대체로 물에 있는 달은 물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고, 물이 움직이면 달도
움직인다.

  그 움직일 때만 하더라도 그렇다.
  고요히 흐르는 물, 광경이 또렷이 드러날 정도로 맑은 물에서는 달의 움직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물이 아래로 급히 흐르는데 바람이 불어 물결을 일으키기도 하고 돌에
부딪혀 물을 튕기게 되면 달은 부서져 이리저리 번득이다가 심하면 마침내
없어지고 만다.
  고요한 때는 정숙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사이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인격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정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은다.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한다.
  그 심신을 양심으로써 밝게 길러 나가라.
  밤은 곧 아침으로 돌아오느니 이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밤낮으로 쉬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나가야 한다.

 

 

(출처/daum blog ~ 아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