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마음의병 치유 ◈/마음의병 치유 ◈

마음을 다스리는 길

by 윈도아인~♡ 2012. 3. 17.

마음을 다스리는 길

 

 

사람의 마음은 행복을 추구하여 움직이면서도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다.

순탄하기를 바라면서 자기의 삶을 챙기려드나 오히려 그 마음으로 인해 어려움에 빠져든다.

이것은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모습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비우는 일이고 하나는 채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면 그때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할 때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인해 괴롭고 힘들지만은 않다. 오히려 쓰기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채워야 할 내용물로 채우는 길이 있음을 알게 하는 증거가 된다. 공자와 맹자는 이것을 인의(仁義)로서 설명한다. 어질고 마땅한 도리를 의미하는 인의(仁義),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그대로의 덕이고 아름다운 생명의 본질이다.

 

비우고 채우는 일은 어느 것 하나만으로 그 의미가 온전할 수는 없다. 둘은 하나의 짝으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켜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어느 하나만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비우고자 하는 것은 채우기 위함이며 또 무엇으로 채우고 있다는 뜻도 된다. 채워야 한다는 것은 지금 채우고 있는 내용물이 올바르지 않다는 뜻이며 그것을 동시에 비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채우고 비우는 일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둘이 하나의 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매사가 바로 이와 같다. 채워야 한다면 혹 지금 채우고 있는 마음의 내용물이 올바르지 않거나 비어 있기 때문이다. 채운다면 동시에 비울 수 있어야 가능하다. 비워야 하고 비우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반면 우리는 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을 항상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비워야 한다고 말하면 비우는 일의 중요성만을 생각한다. 채워야 한다고 말하면 채우는 일의 소중함만을 떠올린다. 채워야 할 사람은 채워야 하고 비워야 할 사람은 비워야 하며 채우면서도 비워야 하고 비우면서도 채워지는 이치의 당연함을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그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갖가지 형태의 주의주장은 단순한 가능성을 전제로 한 논리일 뿐 그 논리가 지닌 허점을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피해가기 어렵다.

 

역에 견주면 비워야 할 것은 마음의 천박한 자의식이고 채워야 할 것은 밝고 총명한 하늘의 명이다. 그때 비워야 하는 천박한 마음의 자의식은 나를 괴롭히는 자기의 마음이고 채워야 하는 하늘의 명은 자기를 항상 격려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성인의 바른 가르침이다.

 

신령스러운 마음의 자각

 

마음을 활용하면서 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것은 마음이 그만큼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마음은 자취가 없어 텅 비어 있는 모습이면서도 실제로는 움직임이 다양하여 비어 있는 모습만도 아니다. 비어 있으면서도 항상 채워져 있고, 채워져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자취도 없다. 마음은 아지랑이 같고 마음은 이슬 같으며 마음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추하고 냄새나는 쓰레기처럼 바라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대한 우리의 느낌일 뿐이다. 아지랑이 같고 이슬 같고 꽃이나 쓰레기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마음의 다양한 움직임은 그만큼 신비하고 묘한 세계다. 만물이 힘입어 비롯되는 하늘의 작용이고, 하늘의 덕에 힘입은 땅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채워야 하는 이치는 하늘의 성스러운 덕을 우리가 자각하는 일이고, 만물을 낳아 양육하는 땅의 두터운 덕이다. 반면 비워야 하는 일은 하늘의 성스러운 기운과 땅의 두터운 덕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허상에 대한 삶의 집착이다.

 

마음을 비워야 하는 이유.

 

그 까닭에 마음을 비우는 일은 마음의 다양한 움직임이 신비로워 묘한 이치임을 먼저 자각하는 데 있다. 마음의 움직임이 신비로워 묘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움직이고 난 뒤에 생겨나는 충동으로부터 더 이상 속박 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신비로움을 자각하기 전의 내가 나라고 여겨지는 나도 허상이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허상이며, 성(聖)과 속(俗), 귀(貴)와 부(富)도 심지어 수행을 추구하는 일도 어디까지나 허상일 뿐이다. 하물며 찌꺼기뿐인 욕구로 채워진 마음의 잡스러움이겠는가. 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당연히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삶의 본질을 자각하고 노력해야 하는지를. 대답은 분명하다. 자기의 마음이 하늘의 이치로 채워진 그 길 위에 서 있을 때라야만 스스로 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따뜻함과 당당함, 삶의 충만한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손순효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자기의 마음이 따뜻하고 자기의 마음이 평안하며 자기 스스로 성스럽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도깨비 같은 마음이 빚어내는 삶의 허상에 자기 자신을 맡겨두고 오히려 그것을 빚어내는 마음의 신비로운 작용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지혜로운 인간의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출처/daum cafe ~ ㅈ역으로 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