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구촌의 사상 ♡/♡ 한국사상

한국사상사개요 1

by 윈도아인~♡ 2012. 3. 17.

한국사상사개요 1

 

한국사상사개요

동인천고등학교
김 응 규

 

차 례

 

Ⅰ. 단군신화의 의미와 기능 7
1. 단군신화의 의미 7
2. 단군신화의 기능 12
Ⅱ. 고대의 토착신앙과 제사의례 21
1. 머리말 21
2. 천신신앙 21
(1) 고구려의 천신신앙 22
(2) 백제의 천신신앙 23
(3) 신라의 천신신앙 24
3. 조상숭배신앙 25
(1) 고구려의 조상숭배신앙 25
(2) 백제의 조상숭배신앙 27
(3) 신라의 조상숭배신앙 28
4. 지신신앙 30
(1) 고구려의 지신신앙 30
(2) 백제의 지신신앙 31
(3) 신라의 지신신앙 33
5.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34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35
(2)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36
Ⅲ. 삼국시대의 사상 38
1. 삼국의 불교 38
(1)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38
1) 고구려의 불교 38
2) 백제의 불교 39
(2) 신라의 불교 39
1) 불교의 전래 39
2) 불교공인의 실상 41
3) 진흥왕대의 불교 41
4) 고승 42
원광 42
안홍 43
자장 43
5) 불교의 대중화 44
2. 삼국의 사학과 유교 45
3. 남북국시대의 사상 45
(1) 신라의 불교사상 45
1) 원측의 유식학 45
2) 원효 47
3) 의상의 화엄종 47
4) 정토교학 48
5) 밀교 48
6) 민중불교 49
(2) 신라의 유교와 한문학 50
(3) 발해의 불교 50
Ⅳ. 신라 하대 사상계의 동향 52
1. 화엄종 52
(1) 화엄종의 계보 52
(2) 화엄사상의 본질 54
(3) 신라 하대의 화엄종 56
2. 선종 57
(1) 선종의 수용 58
(2) 9산선문의 성립 60
(3) 선사상의 본질 62
(4) 농민전쟁기의 선종 64
3. 유학(도교)·미륵신앙·풍수지리설 65
(1) 관료의 등용 65
(2) 골품제의 해체와 관료제로의 이행 66
(3) 학문의 경향 68
(4) 미륵신앙 70
(5) 풍수지리설 74
Ⅴ. 고려시대 유교의 전개와 성격 78
1. 유교의 정치사상 78
2. 고려 전기의 유교 80
(1) 중세 초기의 유교 80
(2) 천명사상 82
(3) 민본사상 83
(4) 정치사회론 85
3. 고려 후기의 유교 88
(1) 주자성리학의 수용 88
(2) 천명사상 90
(3) 민본사상 92
(4) 정치사회론 94
Ⅵ.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98
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 98
2. 고려 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102
3. 고려 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 105
(1)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 106
(2)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108
4. 고려 말의 불교계 동향 110
Ⅶ. 조선 전기의 성리학 114
1. 성리학의 수용 114
(1) 성리학의 성격 114
(2) 성리학의 수용 116
2. 15세기의 유교정치와 성리학 118
(1) 유교정치 기반의 확립 118
(2) 전통적 신앙과 유교이념 120
1) 전통적 신앙의 사회적 기능 120
2) 유교질서 수립의 방향 121
(3) 관학파의 성리학 123
1) 정도전의 불교비판 123
2) 권근의 성리학 125
3) 관학파의 학풍 126
3. 16세기의 사림파와 성리학 127
(1) 사림파의 대두와 성리학 발달 127
1) 성리학적 가치의 인식 127
2) 사림파의 진출과 성리학 질서의 확산 128
3) 성리학의 심화와 정착 129
(2) 성리학파와 성리설 131
1) 퇴계학파 131
2) 남명학파 133
3) 화담학파 134
4) 호남학파 134
5) 율곡학파 135
(3) 성리학의 사회윤리 136
1) 성리학 윤리의 보급 136
2) 가족윤리 138
3) 군신윤리 139
4) 향촌윤리 140
Ⅷ. 탈주자학적 경향과 사회개혁론의 전개 142
1. 17세기 사상계의 동향과 탈주자학적 경향 142
(1) 17-19세기 사상계의 변화 142
(2) 실학 논의의 전개 146
(3) 17세기 사상계의 동향 147
2. 사회개혁론의 전개 148
(1) 17세기의 사회개혁론 : 한백겸·이수광·유형원의 사회개혁론 148
(2) 18세기의 사회개혁론 : 성호학파·북학파의 사회개혁론 151
(3) 19세기의 사회개혁론 158
3. 봉건적 사회개혁론의 한계와 좌절 161
Ⅸ. 19세기 변혁사상의 대두와 새로운 변혁세력 163
1. 머리말 163
2. 서학·천주교의 도전과 정부의 탄압 165
(1) 서학연구와 천주교 수용 165
(2) 정부의 천주교 탄압 168
(3) 위기의식 고양과 정부의 대응 170
(4) 일반민의 동향 172
3. 정치세력의 분화와 동도서기파의 정치방향 173
4. 개화파의 정치개혁구상 175
5. 갑신정변의 실패와 의의 176
6. 동학운동(동학농민전쟁) 177
(1)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 177
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178
2)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부상 178
(2) 동학의 등장과 의미 179
1) 동학의 사상적 뿌리 179
2) 동학의 기본골격과 사회적 위상 179
(3) 동학농민전쟁의 성격과 의의 180
1) 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180
2) 동학농민전쟁의 의의 181
▨ '한국사상사개요' 참고자료 183∼255

 

 

 

Ⅰ. 단군신화의 의미와 기능

 

강력한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읍락사회를 통합하면서 성립된 것이 고조선이며, 이 고조선의 성립을 전하는 것이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의 분석을 토대로 고조선 단계의 신관념 및 사회적 기능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알려진 단군신화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중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이 고조선 당시의 신화원형에 가장 가깝다. 『삼국유사』 유형을 토대로 단군신화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신화*1의 개념부터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단군전승을 신화라고 하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또 신화임을 인정하더라도 신화를 어떤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접근방법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태초(primodial time)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우주·인간·문화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과학적·경험적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적·초경험적인 논리에 입각하여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활동결과로 설명한다.
때문에 신화를 ‘진실이 아닌 이야기’·‘거짓된 이야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단군전승을 신화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도 ‘신화=허구’라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특히 현존 미개인들의 신화를 그들의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인류학적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신화에 대한 이해는 많이 바뀌게 되었다. 즉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원시·고대인들은 신화를 결코 거짓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진실된 이야기이며, 또 신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이야기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기원을 안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며 본질을 이해하면 인간의 의지대로 사물을 조작·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화는 원시·고대인에게 중요한 지식이기도 했음이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신화는 모든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지식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의 활동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본받아야 할 모범과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의례인데, 각종 의례들에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들의 행위가 재연(再演)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또 신화는 모든 것의 기원을 신성의 영역과 관련시킴으로써 도덕이나 관습, 질서와 규범을 신성시하고 정당화하는 헌장(憲章, charter)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1. 단군신화의 의미

 

단군신화 원형에 가장 접근한다는 『삼국유사』 소재의 단군관계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하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桓因, 帝釋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어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바랐는데,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三危) 태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佰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市)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렸고, 농사·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하는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웅(神雄)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때에 신은 영험있는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으리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스무 하루 동안 금기를 하여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금기를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여자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어린애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 즉위 50년 경인(庚寅) 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西京)에 도읍하고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일명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며 또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니,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삼국유사』 1 고조선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라는 두 선행문헌을 인용하여 단군기사를 전하고 있다. 이중 『위서』 인용부분은 단군문제를 살피는 데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나, 여러 가지 논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위서』의 정체가 무엇이며, 아사달에 대한 협주(夾註)가 일연이 스스로 붙인 주인지 아니면 후대인들이 붙인 주인지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군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되었음을 간단히 언급한 정도인 데 비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은 단군의 출생에 이르는 과정, 고조선의 국도 변천, 단군의 최후 등 다양한 사실을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화적 사고에 입각하여 이를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단군문제를 살펴보는 데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자료는 『고기』 인용부분이다.
『고기』의 내용을 토대로 먼저 단군신화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가라는 점부터 살펴보면, 그것은 고조선이란 나라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단군이란 시조에 의한 건국의 구체적인 과정이 아니라, 시조 단군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의하면 시조 단군의 계보는 환인(桓因)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 환인을 『삼국유사』 협주에서는 제석(帝釋)이라 하고 있다. 제석이란 수미산*2정(須彌山頂)인 도리천( 利天, 33天)*3 선견성(善見城)에 산다는 불교의 천신인데, 환인을 제석이라 한 것은 제석의 일명이 석제환인(釋帝桓因)이란 데서 연상한 것 같다. 『제왕운기』에서 환인을 상제(上帝)와 함께 석제(釋帝)라고도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단군의 조부가 제석이란 관념은 당시 꽤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러나 흔히 지적되는 바와 같이 한국에 불교가 수용되기 훨씬 이전인 고조선에서 시조의 조부를 불교의 천신인 제석으로 보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불전(佛典)에서 제석을 환인으로만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환인이란 한국 고유의 신명(神名)을 한자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환인을 굳이 제석이라고 주석을 붙인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환인이 천상적 존재(celestial being)임을 의식한 때문일 것이다. 환인이 천상적 존재임은 “아래로 삼위태백을 내려다보았다”고 한 점이나, 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에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천상적 존재인 환인이 자식을 거느리고 있으며,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며’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다’고 판단했다고 하여, 그가 인간처럼 가족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을 볼 수 있는 눈과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임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는 환웅의 아버지란 점으로 미루어 신적 존재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환인은 의인화된 하늘의 신이라 하겠지만, 하늘의 신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만큼 환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하늘의 신이냐도 문제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환인을 태양신*4으로 보는 견해와 천신(天神)*5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사실 하늘 자체의 히에로파니(hierophany)인 천신(sky god, uranin god)과 태양의 히에로파니인 태양신은 하늘의 신격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양자는 신앙의 역사도 오래며, 신앙의 분포도 넓다. 한국의 경우에도 청동기문화단계의 암각화 등에 이미 태양숭배의 흔적이 보이며, 건국신화에 천신이 등장하는 점이나 『삼국지』 동이전에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의 존재와 부여·고구려·동예의 제천의례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천신숭배의 역사도 오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전하는 「광개토왕릉비」·「모두루묘지」(牟頭婁墓志)와 『위서』(魏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자료이면서도 시조 주몽을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황천지자'(皇天之子), 「모두루묘지」에서는 ‘일월지자’(日月之者), 『위서』에서는 ‘일자’(日子)라고 한 것처럼, 당시 고구려에서는 천신을 뜻하는 천제와 태양이 거의 구별없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늘의 히에로파니인 천신과 태양의 히에로파니인 태양신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세계종교사를 보면 천신이 태양신에 의해 대체되거나 태양신과 융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신에 태양신적 요소가, 태양신에 천신적 요소가 혼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환인이 천신인가 태양신인가 하는 점은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양중택일을 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환인은 기본적으로 천신이지만 태양신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천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에서 건국의 시조를 천신의 자손이라 한 사례들이 있다. 예컨대 부여의 동명신화(東明神話)에서 고리국왕(藁離國王)이 동명을 죽이고자 했지만 죽지 않자 하늘의 아들로 여겨 동명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든가, 대가야 시조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 시조 뇌질청예(惱窒靑裔)를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의 아들이라 한 것 등이 그것이다. 또 북아시아의 신화에도 천신이 자신의 자식들을 지상으로 보내어 인간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환인이 기본적으로는 천신일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천신의 자손임을 칭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천신의 태양신화(太陽神化)를 의미한다는 지적도 있고 보면, 환인에게 태양신의 이미지가 가미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환인이 천신이라는 점과 함께 언급되어야 할 사실은 그가 한국고대 종교에 있어 지고신(至高神, supreme god) 내지 지고존재(至高存在, supreme being)라는 점이다. 지고신은 신성과 초월의 극치로서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지금까지 그 속성·종교적 의미 등에 대해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 결과 지고신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첫째, 지고신은 대체로 천신이다. 그것은 하늘이 가장 높고 무한히 넓으며 영원하다는 점에서 지고신으로 여겨지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둘째, 지고신은 모든 것에 선행하는 원고(原古)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창조하고 생명을 부여한 창조주이다. 셋째,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며 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넷째, 지고신은 인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지고한 존재인 까닭에 인간사에 무관심한 신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간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에 대해 의례를 거행하지 않으며, 신전(神殿)이나 신상(神像)을 세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교생활의 전면에서 물러난 신을 퇴거신(退去神, deus otiosus, leisured god)이라고 한다. 지고신이 퇴거신이 되어버린 경우, 태양신·폭풍신(storm god)·풍요신(fecundator) 등 보다 구체적인 형상과 기능을 가진 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지고신 중에는 퇴거신으로 물러나지 않고 종교생활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신들도 있는데, 이 경우 이들은 창조자라는 면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우주의 질서나 사회적 규범의 수호자로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지배권(sovereignty)을 행사하고 지상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며, 풍요와 다산에도 깊이 관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환인을 이와 같은 지고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며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한 환웅을 지상에 파견한 존재라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왕운기』에서 그를 상제(上帝)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의 경우 상제란 비를 내리게 하고 지상을 감시해서 화복을 내리는 최고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삼국유사』가 환인을 천제(天帝)·천주(天主)로도 일컬어지는 제석에 비긴 것도 의미가 있다.
단군신화는 바로 이 천신이며 지고신인 환인의 서자 환웅이 아버지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태백산 신단수로 내려오는 데서 시작된다. 여기서 서자란 맏아들 이외의 아들이란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시대에는 서자가 첩의 자식을 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맏아들 이외의 중자(衆子)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보굴(Vogul)족·오스티악(Ostiak)족 등에서는 천신의 막내아들을 ‘지상의 감시자’(earth watching man)라 불렀고 이에 관한 관련설화도 천신의 아들 중에서 가장 풍부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환웅이 환인의 막내아들일 수도 있다. 또 환웅은 환인으로부터 천부인 3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부와 인이 관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며 특히 부는 제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리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환웅의 인간세상에 대한 지배가 합법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하늘과 관련되는 부분, 즉 환인의 존재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부분은 원래의 단군설화에는 없는 것으로, 후대에 첨가된 것이란는 주장이 있다. 그것도 환인이란 명칭으로 미루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고난 다음에야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62년에 처음 제시된 이래 오늘날 북한학계에서 통설이 된 것 같은데, 그 근거로는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나 시조가 천제라는 것은 난생신화보다 후대적 관념으로 계급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물론 단군신화의 전승과정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난생신화는 단군신화보다 후대의 고구려·신라·가야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요소이며, 또 고조선이 계급사회였으니만큼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계급적 관념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군의 계보가 지고신 환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지상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승은 단군신화 원래의 것이며, 나아가서 이 부분이 단군신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태백산정 신단수로 하강한 환웅은 이곳에 신시를 건설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린다. 신단수는 후일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가 잉태를 기원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태백산과 신단수는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접점이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성한 곳이다. 이곳에서 환웅은 천왕을 칭하면서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농사문제, 인간의 수명과 질병문제, 형벌과 도덕문제 등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더이상의 설명이 없으나 여기에는 환웅이 곡물과 농경, 질병의 치료방법, 사회적 규범과 도덕률을 인간세상에 가져다준 문화영웅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른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6형 농경기원신화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신으로부터 불과 곡물을 훔쳐 인간세상에 전해주었다는 문화영웅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신화, 즉 곡물의 종자는 원래 하늘에만 있는 것이며 천신은 이를 인간에게 주려 하지 않았는데, 어떤 인간 내지 동물이 이를 훔쳐서 인간세상에 가져다주었다는 신화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어 원고적 존재의 주검으로부터 식용식물(주로 球根類식물)이 나왔다는 하이누벨레(Hainuwele)형 신화와 함께 농경신화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곡물을 지상으로 가져왔다는 분명한 언급이 없고, 더구나 훔쳐왔다는 언급은 없으므로 단군신화와 프로메테우스형 농경신화를 연결시키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언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환웅이 곡식문제를 주관했다는 이면에는 환웅이 천상으로부터 곡물의 종자를 가져와 지상에 농경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환웅의 반역자적인 면이 부각되지 않은 것은 단군신화가 단순히 농경기원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을 합법적인 지배자로 내세우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는 질병·형벌·선악의 문제를 주관했다는 것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다. 환웅이 인간세상에 처음으로 질병의 치료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도덕률을 세웠고 사회규범을 파기한 자에 대해서는 처벌규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단군신화의 이면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군의 모계는 곰에서 변신한 웅녀(熊女)와 연결된다. 곰이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므로 단군신화에서 곰은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단군신화연구에서도 곰의 존재를 주목하여 곰이 표상하는 문화적 기반 등이 논의되어왔고, 그중에서도 특히 곰이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어왔다. 이 문제에 대한 기왕의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곰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 내지 신적 존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곰을 신성시하는 관념은 많은 문화권에서 확인되었으므로,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은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곰이 무엇을 상징하느냐에 대해서는 토템으로 보는 견해, 지모신(地母神)·수신(水神)과 같은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보는 견해, 산신 또는 산신의 사자로 보는 견해 등으로 나눠진다. 이중 어느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인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곰이 지상을 대표하는 신성한 존재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곰이 신성한 존재라면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고 혼인을 해도 될 터인데, 왜 굳이 인간으로 변신해서 환웅과 결혼했느냐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원래의 단군신화에는 곰이 변신하는 부분이 없었는데, 후대로 오면서 곰이 인간을 낳는 것을 불합리하게 생각하여 이를 첨가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이전(異傳)을 전하는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의 어머니가 ‘약을 마시고 인간의 모습을 해서’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했다고 하여, 인간으로의 변신이 단군 출생의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 하나는 곰의 변신에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이다. 이것을 암시하는 중요한 지적은,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만 먹은 것을 성숙의 제의, 즉 성년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원시사회의 소녀성년식에서 묘령에 달한 소녀를 격리·유폐시키고 터부*7들을 준수하게 하며 여러 가지 시련을 견디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프레이저(Frazer)의 『황금의 가지』에도 많은 사례들이 보고되어 있다. 이러한 터부들 중에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다. 그것은 태양이 회임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또는 소녀의 월경이 생명의 원천인 태양을 오염시킨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유폐기간이 끝난 다음에야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 성년식 이전에 자식을 낳는 일이 발생하면 그녀는 악질(bad)로 간주되어 종족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종족은 이와 같은 불상사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희생제의를 치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곰의 시련과 인간으로의 변신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시조 단군의 출생이 필요한 모든 절차를 거친 환웅과 웅녀의 합법적인 혼인의 결과임을 말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단군은 하늘과 땅을 대표하는 환웅과 웅녀라는 신성한 존재들의 신성결혼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단군도 생래적으로 신성한 존재이다. 그러나 단군의 신성성은 암시에 끝나지 않고, 단군의 삶의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표출된다. 단군의 초인간적인 장수와 산신으로 좌정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군신화가 이상과 같은 것이라 할 때 이것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고조선이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는가라는 점이며, 이를 설명함에 있어 시조 단군의 근본을 풀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단군은 지고신(至高神)인 환인의 아들이며 지상에 풍요와 다산, 문화와 규범을 가지고 온 문화영웅 환웅이 지상을 대표하는 웅녀와 합법적으로 신성결혼을 해서 낳은 생래적으로 신성한 존재이며, 바로 이러한 단군에 의해 고조선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단군신화의 기능

 

『삼국유사』에 수록된 단군신화는 단군이란 존재가 있기까지에 초점을 맞추어 고조선의 기원을 설명했다. 그런데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유리되어 화석화한 문헌신화가 아니라 신화가 살아서 움직이는 미개사회의 신화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신화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말리노프스키(Malinowski)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다.
원주민들에게 있어 신화는 결코 허구적인 설화가 아니며 또 사라져버린 과거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화는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진실에 대한 진술이다. 그래서 신화는 원주민들의 관습·법률·도덕 속에 살아 남아 있으며, 또 여전히 원주민들의 사회생활을 통어(統御)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 및 세력의 커다란 격차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문제, 지배와 복종에 관한 문제와 같은 사회적 긴장이 발생하는 곳이라든지, 뚜렷하게 역사적 대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 신화가 특별히 기능을 가진다는 점은 명백하다(Bronislaw Malinowski, 서영대 옮김, 『원시신화론』, 무림사, 57쪽).
이러한 진술은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단군신화도 고조선이란 정치적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사회에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단군신화 연구는 주로 이것이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느냐에 초점을 두어왔다. 고조선에 관한 자료가 극히 한정된 상황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만, 아프리카 왕국의 기원신화들에서 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정치적 기능이 큰 신화일수록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상기하면, 이러한 연구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단군신화 연구에서는 이것이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냐는 점에 앞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가 고조선사회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군신화는 의례의 기원이나 사회적 관습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의 등장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의 정치적 기능으로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정치권력의 신성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것이다. 정당화의 근거를 신성성에서 찾으려는 정치권력을 흔히 신성왕권(神聖王權, divine kingship)이라고 하는데 신성왕권의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정치권력자 자체가 신(神)으로 여겨지는 경우, 신이 정치권력자의 신체에 깃들여 있으며 그가 죽으면 후계자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여겨지는 경우, 의례를 주재할 때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일시적으로 신의 용기가 된다고 여겨지는 경우, 신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경우, 신에 의해 선택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대체적인 것이며 신성왕권의 개별적인 사례에서는 이들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를 참고할 때,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정치권력이 지고신인 환인의 후예임을 내세움으로써 정치권력을 신성화하고, 이를 통해 고조선에 대한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정치권력을 정당화함에 있어 지고천신(至高天神)이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지고천신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신으로 관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한국고대 천신관념의 특징의 하나가 된다.
한국 고대의 지고천신 관념을 살펴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관계자료가 극히 적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관계자료가 적은 것은 비단 천신의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천신에 관한 자료가 적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천신이 워낙 지고하며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또 인간사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개입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까닭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관념이 막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고대인의 종교적 관심이 초월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양재초복(禳災招福, 신께 빌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부름)에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즉 신이 어떤 존재냐를 따지기보다 신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둔 까닭에, 신관념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신에 관한 자료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삼국유사』에서 전통적 천신관을 불교적 외피를 씌워 윤색해버린 경우가 많아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제한된 몇몇 자료를 통해 한국 고대의 지고천신관을 유추해볼 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고천신이 창조신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제한된 자료에 창조신관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 속단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한국인의 사고에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관념이 희박하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 지상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버리고 그래서 의례의 대상도 되지 않는 퇴거신(deus otiosus)으로 여겨졌던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은 『삼국지』 동이전이 전하는 바와 같이 부여·고구려·동예에서 제천의례가 정기적으로 거행되고 있었던 점이나, 삼한에 천신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란 종교직능자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662년(문무왕 2)에 사찬(沙찬) 여동(如冬)이 어미를 때리자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쳐 죽였다고 하며, 888년(진성여왕 2)에는 대야주(大耶州) 은자(隱者) 거인(巨仁)이 자신의 억울함을 천왕(皇天)에 호소하자 그날 밤 갑자기 운무가 끼는 등 변괴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사는 지고신이 아직 종교생활의 전면에서 물러나지 않고 인간사회의 도덕과 규범의 유지에 깊이 관계하는 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비해 지고천신이 풍요와 다산에 관계하는 신이란 관념은 있었다.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다.

 

① 서해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서 살며 음으로 불법의 교화를 도왔는데, 한 해는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모두 말라 탐으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지방이 흡족하였다. 천제(天帝)는 이목이 월권을 했다 하여 죽이려 하니,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였고 법사는 마루 밑에 숨겨주었다. 조금 후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 앞의 이목(利木)을 가리켰는데 천사는 그것에 벼락을 때린 후 하늘로 올라갔다. 이목이 꺾이고 시들자 용이 그것을 어루만지니 곧 살아났다(『삼국유사』 4, 보양이목조).
② 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夫婁)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서는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이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내림이로다”하고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③ 탈해왕(脫解王) 9년 춘3월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샐 무렵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는데 금색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그 속에 어린 남자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모습이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삼국사기』 1 신라본기).
④ 산상왕(山上王) 7년 3월 왕이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더니 그 달 15일에 꿈에 천(天)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13년 9월에 주통촌녀(酒桶村女)가 아들을 낳으니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사자(嗣子)를 주심이라고 했다(『삼국사기』 16, 고구려본기 4).
⑤ (경덕)왕이 하루는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오”라고 했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청하고 내려와서 왕께 말하기를 “천제의 말씀이 딸을 바라면 가능하나 아들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점지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하니 천제께서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고 했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할 때 제가 또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는 어지럽게 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마을을 왕래하듯 하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엔 아예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표훈이 와서 하늘의 말을 빌어 타일렀으나 왕은 “나라가 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만족하겠소”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몹시 기뻐했다(『삼국유사』 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여기서 사료 ①은 천신(天神)이 지상에 비를 내리게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료 ② ③ ④ ⑤는 자식을 주는 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 사료 ①과 ⑤는 승려가 나오는 불교설화이니 만큼, 여기에 나오는 천제나 상제를 불교의 천신 제석천(帝釋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제석천이 원래 인드라(Indra)신이고, 인드라신은 뇌신(雷神)이며 비라는 자연현상을 표상하는 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원래 제석천을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나 자식을 점지하는 신으로 여기는 관념이 있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 경우 천제(상제)는 불교수용 이전 단계의 전통적인 지고천신 관념이 불교적으로 윤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이상의 자료가 한국의 전통적 지고천신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들은 지고천신이 비를 내리게 하며 자식을 내려주는 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비와 자식과 관련된다는 것은 곧 지고천신이 지상의 풍요와 다산의 권능을 가진 신으로 관념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고천신이 자식을 점지하는 신임을 보여주는 자료들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들이 모두 왕실에 관한 사실이란 점이다. 왕의 자식이 태어난다는 것은 곧 왕실이 유지되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왕실에 자식을 내려준다는 것은 지고천신이 왕위가 이어지고 왕조가 유지되도록 뒷받침하는 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고대의 지고천신은 단순한 풍요와 다산의 신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이 강한 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고천신의 이러한 성격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이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다.

 

⑥ 해부루왕의 상(相)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천(天)이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하고자 하니 너는 이곳을 떠나라……”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하였다(「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
⑦ (진평왕)즉위 원년 천사(天使)가 대궐마당에 내려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上皇)이 나에게 명하여 옥대(玉帶)를 전하게 했다”고 했다.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받았다. 그런 다음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는데 교사(郊祀)나 종묘(宗廟)의 제사와 같은 대사(大祀)에는 모두 이를 착용하였다(『삼국유사』 1 천사옥대[天賜玉帶]).
⑥은 부여가 동천(東遷)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지고신은 지상의 정치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신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⑦은 신라 중고시대의 왕권의 상징(regalia)인 옥대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진평왕(眞平王)이 폐위된 진지왕(眞智王)을 대신하여 즉위하였지만 당시 진지왕계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생각할 때, 이 설화는 진평왕의 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의 상황도 제석천으로 볼 수 있겠지만, 제석천이 왕에게 옥대를 준다는 관념은 불교 원래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자료를 통해서도 전통적 천신관념을 읽을 수가 있겠는데, 그것은 지고천신이 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인하고 수호해주는 정치적인 신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지고천신이 정치권력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인하고 수호해주는 것은 정치권력이 바로 지고천신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국 고대의 건국신화들이니,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을 ‘천제지자’(天帝之子)·‘황천지자’(皇天之子)라 한 것이나,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서 대가야 시조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 시조 뇌질청예(惱窒靑裔)를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의 아들이라 한 것 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앞에서 전지전능한 지고신이 퇴거신이 되어버리면 그 자리를 보다 구체적인 기능을 가진 풍요신 등이 차지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고신 자체가 우주의 질서와 사회적 규범의 수호자로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지상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며, 풍요와 다산에도 깊이 관계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고대의 지고천신은 후자의 형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도 정치권력의 권위를 뒷받침함으로써 지상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는 신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지고신이 인간사회의 정치적인 면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관념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관련자료가 우리에 비해 오랜 것일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풍부하여, 지고신 관념의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변천과정까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견이 많지만, 중국 고대의 지고천신에 대한 관념*8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지고천신의 관념은 은대(殷代)에 이미 출현해 있었는데, 갑골문에 보이는 상제(上帝)가 바로 그것이다. 상제는 인격적인 신으로서 풍우를 지배하여 농경에 영향을 미치며, 길흉화복을 내림으로써 왕을 매개로 하여 왕국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은의 왕은 상제의 대리자인 셈이 되며, 여기서 왕권의 정당성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상제는 왕실의 시조신으로서의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또 복을 내리고 화를 내리는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 즉 윤리적인 면이 약하다는 것이다.
주대(周代)로 오면서 천의 관념은 보다 뚜렷해지는데, 인격신으로서 지상의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신이란 점에서는 은대와 통하나, 상제에 비해 윤리적인 면이 강화된다. 즉 천은 군주를 무조건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있는 자에게 인간세상의 지배를 명하고 은총을 내리며, 왕의 행위가 올바르지 못하면 화를 내리고 심지어 천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이란 관념은 은주혁명(殷周革命)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제시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논리에 의하면 군주는 천(天)의 명(命)을 받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셈이 되는 바, 그의 권위는 천에 의해 뒷받침된다.
중국의 천관념은 춘추전국시대로 오면서 다시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천이 인격성을 불식당하고 우주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법(理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천의 인격성이 불식되는 정도는 도가(道家)와 묵가(墨家)를 양극단으로 하여 학파에 따라 상당히 달라 묵가의 경우는 인격신으로의 천관념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대체적인 경향은 천이 우주의 법칙으로 관념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지고신관과 한국고대의 지고신관을 대비해보면, 지고신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 내지 정치권력의 원천을 하늘에서 구한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공통성을 보인다. 특히 은대(殷代)의 상제관념에서 더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한국 고대의 지고신은 자신의 자손을 파견하여 지상을 다스리게 하는데, 은의 경우에도 시조 설(契)은 천제(天帝) 또는 천제의 사자인 현조(玄鳥)의 자식이라고 한다. 또 상제가 화복(禍福)을 내리는 것이 자의적인 신이라고 했는데, 한국고대의 지고신도 왕자(王者)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신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둘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고대의 왕자(王者)가 지고신의 아들 또는 손자로서 바로 건국의 시조가 되었는데 비해, 은의 경우는 설(契)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이 후일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한국고대의 경우, 정치권력자는 지고신의 후예임을 내세우는 것이 더 뚜렷하다. 이러한 차이는 주대 이후의 천관념(天觀念)과 비교하면 훨씬 두드러진다. 즉 중국의 경우, 주대로 오면서 정치권력자가 지고신의 자손이란 관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지고신에 의해 선택된 자=천명을 받은 자’라는 관념이 강조되면서, 정치권력자가 천신의 직계임을 내세우는 한국의 그것과 비교할 때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신관념은 환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환인의 경우는 지고천신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군장은 자신의 정치권력의 원천을 왜 천신에서 구하였을까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한국고대에 천신이 정치화되는 이유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점이다. 물론 정치권력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권력의 원천을 신성의 영역에서 찾는다고 할 때, 가능한 한 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신에서 그 원칙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천신의 후예라는 관념이 고조선단계에서 대두되는 데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고조선사회가 씨족공동체와 같은 단세포적인 사회가 아니라, 여러 사회를 통합하면서 성립된 다세포적 사회라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조선사회가 다세포적인 사회임은 단군신화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즉 고조선 성립 이전에 환웅으로 표상되는 집단과 곰으로 표상되는 집단, 그리고 호랑이로 표상되는 집단 등이 있었고, 이중에서 환웅집단과 곰집단이 고조선사회의 건설에 주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단군신화는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군신화는 이들 집단간의 관계가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준다. 곰은 인간이 되게 해달라, 자식을 가지게 해달라고 일방적으로 기원하는 존재인데 반해, 환웅은 일방적으로 기원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관계를 반영한다.
고조선이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이 점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단군신화가 후대에 날조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근거를 가진 민족전승임이 보다 확실해지게 된 것은 1920년대 최남선에 의해서이며, 1930년대로 오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한국사의 발전단계 속에서 위치를 설정해보려는 시도가 나타나는데, 그 결과 제시된 결론은 단군신화가 농업공동체 붕괴기를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로 오면서 단군신화를 고고학적 발전단계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자극한 것은 청동기시대의 존재확인이었다. 그래서 고조선을 청동기단계의 사회로 보려는 움직임들과 함께 단군신화도 청동기문화의 산물로 간주하는 견해들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연구가 출현하여 단군신화는 '신석기시대인=고(古)아시아인'이 남긴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단군신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곰이 단군을 낳았다는 부분이란 점, 곰숭배는 고아시아족의 대표적인 신앙이란 점, 한국의 신석기시대 주민이 고아시아족이란 점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단군신화는 고조선이란 계급사회의 건국신화이니 만큼 신석기단계의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 곰숭배가 고아시아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포가 매우 넓은 것이며, 나아가 곰과 호랑이가 대를 이루면서 곰이 인간의 조상이란 관념은 아무르강 유역의 퉁구스신화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남한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청동기문화단계의 신화로 보는 것이 여전히 통설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청동기문화에 대한 연구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청동기사회는 정치권력이 성장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통합이 진전되고 있었다는 정도는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무장한 성인남자의 무덤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또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그것에 비해 화재에 의해 폐기된 것이 많은데, 이중에는 동일 주거에 장기간 거주한 데 따른 실화 때문에 폐기된 경우도 많겠지만,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동기사회에서는 그만큼 전쟁이 빈발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집단들간의 통합이 진전되었다고 하겠다. 또 청동기시대의 분묘 중에는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것들이 있으며, 족장층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지석묘의 하부에서 유아의 유골이 발견된 예(春川 中島)가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사회의 계층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이념이 신석기시대의 고립성을 극복하면서 나온 것이란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많은 시사를 준다.
고조선사회로 흡수된 집단들은 원래 자기집단을 표상하는 나름대로의 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집단 내부의 결속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앞장에서 언급한 산신으로서의 호신(虎神)이 바로 그러한 예의 하나일 것이다. 이밖에도 이러한 기능을 가진 신으로는 집단의 조상신이나 토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중에는 지고신으로서의 천신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원시사회에 대한 민족지 자료들을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 원시종교에 관한 민족지들 중에는 신관념이 사회구조와 대응관계였음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즉 신들이 서열에 따라 관계하는 사회적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열이 높은 신은 보다 큰 차원의 사회와 관계하며, 서열이 낮은 신은 보다 작은 차원의 사회와 관계한다. 동아프리카 수단(Sudan)의 누어(Nuer)족의 경우가 그러한 예의 하나인데, 누어족의 사회는 왕이나 수장이 존재하지 않는 비집권화된 사회로서 부계출계집단(父系出系集團, lineage)이 기본적 정치기능의 단위가 되는 이른바 분절사회(分節社會, segmentary society)이다. 누어족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영적 존재들을 크게 상위령(上位靈, spirits of the above)과 하위령(下位靈, spirits of the below)으로 구분하는데, 상위령에는 최고신이며 천상에 있는 자를 의미하는 크워스 (Kwoth)·공중의 영(靈, spirit of the air)·번개에 맞아 죽은 사람의 영인 콜윅(col wic) 등이 있으며, 하위령에는 토템령(totemic spirit)·자연의 정령·물신(物神, fetish)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중 크워스는 창조주로서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일과 관계하는 데 비해, 공중의 영은 초씨족적인 정치지도자를 수호하며, 콜윅과 토템령은 출계집단이나 가족을 수호하며, 자연의 정령과 물신은 개인을 수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영적 존재들의 서열은 사회적 레벨과 대응관계를 이루는데, 상위의 영일수록 관계하는 영역이 넓은 반면에 그들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적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찾아지며 또 의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출계집단·가족·개인 차원과 관계하는 영적 존재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통합이 진전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비록 지고신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하위의 영적 존재들임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원시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어느 정도 일반화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고조선에 흡수된 집단들도 천신을 자기집단의 표상 내지 사회질서 유지의 근원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대신 하위의 영적 존재들에서 집단의 결속과 유지의 근거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집단들을 통합하면서 성립된 것이 고조선이라고 할 때, 고조선의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보다 높은 사회적 차원과 관계하는 지고천신에서 구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의 지배세력은 지고천신의 후예임을 내세움으로써 하위의 영적 존재들로 표상되는 집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사회의 정치적 진화과정을 군사회단계(群社會段階, band society)→부족단계(tribe)→수장국단계(首長國段階, chiefdom)→국가단계로 체계화한 신진화론(新進化論)에서 지고신에 대한 신앙이 성문화되고 영속화되는 것은 사회통합이 상당히 진전된 수장국단계부터라고 한 것이나, 통문화적 연구(通文化的 硏究, cross-cultural study)의 결과 지고신관념이 보다 뚜렷한 사회의 공통점으로 권력집중이 상대적으로 잘 되어 있음이 지적되고 있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곧 지고신 내지 천신에 대한 믿음이 고조선 성립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고조선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천신에 대한 믿음은 가장 원초적인 종교에서부터 발견되며,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가장 보편적인 종교현상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만큼 고조선 이전 단계에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지고신으로서의 천신은 고조선 단계에 오면서, 그 이전과는 달리 고조선이란 구체적인 사회집단과 관련을 맺게 되어 사회적 의미가 커지고 종교생활의 전면에 부각된 것이다. 한국고대의 지고천신이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단군신화는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 정치세력이 사회통합을 이룩하고 고조선을 성립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자신들의 권력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제시된 것이라 하겠으며, 구체적으로는 천신이 지고신이란 점에 착안하여 지고천신의 후예임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고조선의 정치권력을 신성화하여 고조선사회에 대한 지배를 합법화하는 것이 단군신화라고 한다면, 고조선의 지배자에 의해 단군신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과시되었을 것이다. 그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의례를 통한 단군신화의 재연(再演)이다. 신화와 의례의 관계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양자는 본질적으로 상호의존관계(intricate mutual interdependence)에 있다. 또 동아프리카 쉴룩(Shilluk)왕국의 경우, 왕의 즉위식 때 건국신화의 주요부분들이 상기되면서 왕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이 재확인된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고조선에서도 지배자의 즉위식에서 단군전승의 주요부분, 즉 환웅의 하강(下降), 신들의 신성결혼(神聖結婚), 단군의 출생, 고조선의 건국 등이 구송(口誦)되거나 극적으로 재연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례를 정기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고조선의 정치권력의 초월성과 신성성은 주기적으로 재확인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단군신화의 서사구조가 무교의례에서 구연되는 성주 무가(巫歌)와 일치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군신화를 재연하는 의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내지는 집단적 차원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부여의 영고(迎鼓)나 고구려의 동맹(東盟)이 국중대회(國中大會)였다고 하는데, 단군신화를 재연하는 의례도 바로 이와 같은 국중대회였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단군 및 그의 후계자들의 초월성과 신성성이 전 공동체적 차원에서 재확인되었을 것이다.
또 단군신화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것으로서 태백산 신단수로 간주되는 곳, 또는 태백산 신단수를 상징하는 곳(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神堂의 神樹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태백산 신단수 내지 그것에 비기는 곳이 있음으로 해서 단군신화의 진실성이 입증되고, 나아가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곳이 었었다면, 이곳은 신성한 곳 내지 성소(聖所)였을 것이며, 단군신화를 재연하는 의례도 이곳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단군신화의 일차적인 기능 외에도 단군신화의 기능으로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정치권력의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농사문제, 인간의 수명과 질병문제, 형벌과 도덕문제 등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고 전한다. 신화는 인간행위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지적을 상기하면, 환웅은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수장(首長)의 전형이었다. 즉 고조선의 정치권력자는 환웅이란 신적모범(divine model)에 따라 사회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라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지배자에게 자신의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주는 것인 동시에 행동을 제약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에서 기후가 고르지 못하거나 흉년이 들면 모든 책임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였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것은 부여의 왕권이 신성왕권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고조선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공인된 이상형에 충실하지 못했던 수장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둘째, 고조선사회의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이다. 앞에서 단군신화를 재연하는 의례는 전 공동체적 차원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재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 신성한 지배자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로서의 유대감을 느꼈을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사회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결국 고조선사회에서 단군신화는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며, 사회적 결속을 강화시켜주고, 또한 정치권력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단군신화는 고조선사회의 신화적 헌장(神話的 憲章, mythological charter)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Ⅱ. 고대의 토착신앙과 제사의례

 

1. 머리말

 

삼국 및 남북국시대의 토착신앙에 대해 기록한 문헌은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여태까지 이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논할 때는 불교와 유교 또는 도교에 대해서만 논하였고, 귀족들의 문화만을 언급하였다. 그 까닭은 자료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를 보는 시각 자체가 지배층 위주였기 때문이다. 물론 남아 있는 자료가 지배 엘리트에 의해 씌어졌기 때문에 지배층 위주로 사상과 문화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배층이 남긴 자료라 하더라도 그 시대 민중들의 감정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토착신앙의 경우는 불교와의 마찰을 보이는 기록들을 잘 이용하면 그 실체에 접근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논할 때 유교·불교·도교와 귀족문화에 국한한 것은 역사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료의 해석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가 전래·수용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래의 토착신앙을 신봉하였으며, 불교가 공인된 후 토착신앙과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현상이 나타났던 것을 간과하였다. 유교나 불교·도교는 모두 중국에서 전래된 사상과 종교이다. 따라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소양 없이는 가까이할 수 없는데, 당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소양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특정계층에 불과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이에 대한 소양을 갖고 있지 않아 유교·불교·도교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차단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수용된 유·불·도는 일반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대중화되면서 토착신앙화되어 가는 과정을 겪었다.
물론 피지배층만 토착신앙을 믿은 것은 아니다. 특히 피지배층만 토착신앙을 믿게 된 것은 유교와 불교·도교가 전래 수용되고 지배이데올로기화한 이후의 일이다. 외래신앙이 전래·수용되기 전에는 오히려 토착신앙이 지배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종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토착신앙이 외래신앙이 전래 수용된 뒤 그 지배이데올로기의 위치를 잃고 민간신앙화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의 위치는 잃었지만 일반 백성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따라서 지배층이 외래신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였다면 민중들은 토착신앙을 민중이데올로기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층은 외래신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면서도 각종 토착신앙의 의례를 중단하지 않고 지속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토착신앙의 편린이 남아 있는 의례를 통하여 토착신앙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고대의 토착신앙을 천신신앙·조상숭배신앙·지신신앙,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2. 천신신앙

 

우리나라의 천신숭배신앙(天神崇拜信仰)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나타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은 하늘로부터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따라서 천신신앙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한에서는 파종을 한 다음과 농경을 마치고 난 후 제천의례를 행하였다. 농경이 잘되어 풍년이 되기를 바랐으며, 농경을 마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제사의례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도 천신에 대한 신앙은 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종전의 천신신앙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천신신앙이 나타난다. 종전의 천신신앙은 자연신의 하나로서의 하늘(天神)에 대한 신앙이라면 삼국시대의 천신신앙은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신(天地神)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중국의 유교적 세계관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사상적 통일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천지신을 정점으로 하여 여러 가지 신앙을 하이어라키 구조로서 일원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천신신앙이라 하더라도 자연신의 하나로서의 천신신앙과 여러 신의 주재자로서의 천신의 성격은 다른 것이다. 이는 고대국가의 형성과 발달에 따른 사회변화가 사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결과라 하겠다. 그러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천신신앙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고구려의 천신신앙

 

고구려에서 하늘(天神)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제사지,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광개토왕비」 등을 들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과 「광개토왕비」에는 고구려가 천제의 자손임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제천의례인 ‘동맹’(東盟)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행사로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 그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을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하여 입는다. 대가와 주부는 책을 쓰는데 끝이 없으며,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혈이라 하는데 10월 대회 때 수신을 모셔다가 나라 동쪽의 위에서 제사를 지내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신다. 감옥은 없으며 죄가 있으면 제가가 의논하여 문득 죽이고 처자를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10월에 제천의례를 행하는데 그 제의는 거국적인 대회이며 그 이름은 동맹이라 하였다. 그 제의명인 동맹은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東明)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는 제천의례이면서 또한 국조신에 대한 제의로서 양면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천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천대회는 공회(公會)로서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이며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니었다. 아울러 그 공회에 참석할 때는 의복을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하는 등 대단히 화려하게 의례를 거행하였다. 따라서 이는 지배계층의 의례라고 볼 수 있다. 모자를 씀에 있어서도 대가와 소가에 차별이 있었는데 이로써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계층성이 매우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여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과시한 것이다. 제천의례를 행하는 데 있어 수혈(隧穴)에서 영신(迎神)하여 신목(神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맞이굿이나 오구굿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제사의례 중 재판과 형벌이 집행되는 것은 부여전과 신라의 금석문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제의가 규범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천의례는 종교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제사지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제천의례를 기술하고 있다.
고기에 운운…… (중략)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모여 돼지와 사슴을 잡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10월에 제천대회를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삼국사기』 제사지에서는 3월 3일에 제천의례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제사 지내는 날로 보아 돼지와 사슴을 잡는 희생의례가 있었는데 이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하늘과 더불어 산천에도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2) 백제의 천신신앙

 

백제에서도 천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삼국사기』 제사지에서는 중국의 각종 문헌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먼저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인용하여 백제의 제사의례를 논하고 있다.
책부원귀에 가로되 백제에서는 네 계절 가운데 달에 왕이 하늘(天)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 구태의 묘를 국성에 세워 해마다 네 번 지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백제에서는 왕이 하늘에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으며 제천의례가 가장 중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오제의 신과 시조 구태묘보다도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제의 신과 함께 제의가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중국문화의 영향이 깊이 침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측 기록이기 때문에 기록한 사람의 중국적 개념화의 영향일 수도 있다 하겠다.
고기를 인용한 다음의 기록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일시가 기록되어 있다.
고기에 가로되 온조왕 20년 춘2월에 단을 설치하여 천지신에 제사하였다. 동왕 38년 동10월, 다루왕 2년 춘2월, 고이왕 5년 춘정월, 동왕 10년 춘정월, 동왕 14년 춘정월, 근초고왕 2년 춘정월, 아신왕 2년 춘정월, 전지왕 2년 춘정월, 모대왕 11년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다루왕·근초고왕·아신왕·전지왕 때 제사를 지낸 해가 신왕 즉위 다음해이므로 즉위의례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온조왕·고이왕·모대왕 때의 제사는 즉위의례로 볼 수가 없다.
한편 제사의례가 행해진 달(月)을 보면 대부분이 정월이나 2월이다. 이것은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외 온조왕 38년이나 모대왕 11년에는 10월에 제사의례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삼한의 10월제와 같은 시기로 농경을 마친 수확의례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보면 제사의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온조왕 20년에 대단(大壇)을 설치하여 천지에 제사하였는데 신이(神異)한 새 다섯 마리가 날아왔다고 한다. 천신과 새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조 온조왕 때에는 동명묘와 국모묘, 천지에 대한 제사가 따로따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왕인 다루왕대에는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가 같은 해에 행해졌다. 한편 기루왕(己婁王)대·개루왕(盖婁王)대·초고왕(肖古王)대 등 약 200년간에는 시조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227년(구수왕 15) 동명묘에 대한 제사가 보이고, 다음 고이왕 5년 천지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인다.
이해 5월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鼓)과 나팔(吹)을 사용하였다. 『삼국지』 한전을 보면 5월과 10월의 농경의례인 제천대회 때 소도에서 대목을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았는데 이와 유사한 모습이다. 비류왕 10년 정월 천지에 대한 제사가 남교에서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중국의 교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이 친히 희생의례를 행하였는데 제사의례에서 희생의례가 중요한 것은 최근 발견된 「울진봉평신라비」나 「영일냉수리신라비」[미주 6]에서 확인되었다. 어떤 짐승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온조왕대 기록을 보면 사슴(鹿)을 희생으로 하였다.
한편 근초고왕대 이후에는 천지신에 대한 제사와 함께 중신임명(重臣任命) 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600년(법왕 2) 기우(祈雨) 기사는 백제에서의 제의와 불교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위 다음해 동명묘와 천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사찰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조묘 제사나 천지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요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라의 천신신앙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삼한의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귀신을 믿었는데, 국읍에 각각 1인을 세워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주재하게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천신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제천의례의 기록이 김부식의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 제사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신궁에서 천지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①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묘를 세우고 사시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친매인 아노로서 주제하게 하였다. ② 제22대 지증왕대에 시조의 탄강지지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③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오묘를 세웠는데 미추왕은 김성 시조이고 태종대왕, 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는 데 큰 공덕이 있으므로 모두 대대로 불훼지종으로 하고 친묘 둘로써 오묘를 삼았다. ④ 제37대 선덕왕대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는데 사전에 보이는 것은 모두 경내산천뿐이고 천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⑤ 이것은 대개 왕제에 이르기를 천자는 칠묘이며, 제후는 오묘로 이소와 이목과 태조의 묘와 더불어 다섯이며, 천자는 천지와 천하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과 명산대천의 그 땅에만 제사지내는 고로 감히 예를 벗어나지 않고 실행한 것이다.
종래에는 사료 ① ② ③만을 이용하여 시조묘에서 신궁으로, 신궁에서 오묘로 바뀐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사료는 ④와 ⑤를 포함시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기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여 보면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즉 ①과 ②, ③과 ④ 그리고 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①과 ②의 제도가 ③과 ④의 제도로 변화한 것이며, ⑤는 그렇게 변화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즉 ①의 시조묘가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③의 오묘의 제도로 변화하고, ②의 신궁이 ③의 사직단으로 변화하였으며, ⑤는 『예기』 왕제편을 근거로 하여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조묘가 오묘로 변화하고, 신궁이 사직단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⑤에 따르면 신궁의 주신은 천지신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제2대 남해왕 3년 시조 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를 세우고 제22대 지증왕대에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탄강한 땅인 나을에 세웠는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오묘제로 변화하고 제37대 선덕왕대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는 것이다. 즉 천자의 예에서 제후의 예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사료 ⑤로서 『예기』 왕제편의 기록이다.
그러면 이러한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소지왕 9년 2월에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태어난 나을에 설치하고, 그로부터 한달 뒤인 3월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소사에게 관도를 수리할 것을 명하고, 7월에는 월성을 수즙(修葺)하였다. 따라서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가 중앙통치력 확대과정의 일환으로써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대에 이르면 더욱 강고해진다.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증왕대의 신궁제사를 토착신앙 자체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으로 간주한다면 불교공인 이전에 왕실의 노력으로 토착신앙내의 사상적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공인은 이와 같이 자체적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신라사회의 자신감에서 이룩된 것이지 새로운 통치이념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교공인 이후에도 천지신을 모신 신궁에 대한 제사는 계속해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공인을 무·불의 교대로 파악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체적으로 사상의 통일을 이룩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외래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발전을 꾀하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외래신앙인 불교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찰내의 산신각과 장승을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가 아니라 토착신앙의 제당구조 안에 불당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로 파악한 것은 그 한 예라 하겠다.

3. 조상숭배신앙*9

 

천신신앙과 아울러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가장 일반화된 것은 조상숭배신앙이라 하겠다. 조상숭배신앙은 계세(繼世)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순장(殉葬)과 후장(厚葬)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문헌을 중심으로 조상숭배신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한 시조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도 천신신앙과 같이 그 신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기록이 남아 있는 시조묘 제사의례를 통하여 조상숭배신앙의 편린을 유추해 보도록 하겠다.

 

(1) 고구려의 조상숭배신앙

 

고구려의 조상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묘에 대한 기록이다. 고구려 시조묘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제사지에 실린 고기를 보면 신묘에 대한 기록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동명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훙거하자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드디어 신묘를 세웠다. 태조왕 69년 겨울 10월 부여에 순행하여 태후묘에 제사하였다. 신대왕 4년 가을 9월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고국천왕 원년 가을 9월, 동천왕 2년 봄 2월, 중천왕 13년 가을 9월, 고국원왕 2년 봄 2월, 안장왕 3년 여름 4월, 평원왕 2년 봄 2월, 건무왕 2년 여름 4월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먼저 태후묘 제사에 대해 살펴보면 동명왕 14년 8월에 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그리고 태조왕 69년 10월 부여에 순행하여 태후묘에 제사지냈다. 여기서 신묘는 태후묘를 말하며 이는 기원전 24년(동명왕 14)에 세웠는데 그에 대한 제사는 기원후 121년(태조왕 69)에 단 한 번 행해졌다. 그 이전에는 왕이 직접 가지 않고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부인상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왕이 직접 행한 태후묘에 대한 제사는 태조왕 이후에는 없고, 졸본에 있는 시조묘 제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전하는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사지에는 언제 동명왕묘가 세워졌는지 기록이 없는데 고구려본기에는 기원후 20년(대무신왕 3)에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조묘가 졸본에 있었으니 졸본에 세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대왕 3년 9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10월에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다음 왕인 고국천왕도 즉위 다음해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곧 즉위 다음해에 우씨를 왕후로 세우고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한편 동천왕은 우씨를 왕후로 봉하기 직전 졸본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즉 동천왕은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을 행하고 난 뒤 우씨를 왕태후로 삼았다.
그런데 동천왕 21년조를 보면 환도성이 난리를 겪어 다시 도읍하기 어려우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를 옮겼다. 여기서 묘사는 종묘와 사직을 이르는바 환도성에 종묘와 사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조묘는 그 이전에도 졸본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졸본에 그대로 있었다. 왜냐하면 다음 왕인 중천왕 13년(260)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조묘와 종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졸본에는 시조묘가 있고, 종묘는 도읍을 옮김에 따라 함께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조묘는 시조 동명성왕이 묻힌 졸본의 시조묘 주변의 사당을 의미한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장군총의 맨 꼭대기에 건물이 있었던 흔적을 알 수 있는 기둥구멍자리가 있다. 태왕릉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의 적석총 위에는 수많은 기왓장이 흩어져 있다. 이 적석총 위에도 역시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군총과 적석총 위에 있는 것은 고인을 기리는 사당이므로 고구려의 사당은 무덤 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차츰 무덤 옆으로 위치가 옮겨진 것이다.
한편 종묘는 시조뿐 아니라 이후의 왕들을 함께 모신 사당이다. 따라서 4시로 행하는 제사는 종묘에서 행하고 왕의 즉위의례 등 특별한 경우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332년(고국원왕 2)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목적이 분명히 나타난다. 왕이 즉위 다음해 봄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함으로써 즉위의례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또 백성들의 질병을 문안하고 진휼한 것을 볼 때 시조묘제사는 순행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고국양왕 때 종묘를 중수한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시조묘와는 다른 것으로 247년(동천왕 21) 평양성에 옮겼던 묘사 등의 종묘이다. 불교의 공인과 함께 종묘와 국사를 수리하였는데, 이는 사상정책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무마책인 것 같다. 그 이후 광개토왕·장수왕·문자왕대에는 시조묘 제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약 200년간 시조묘 제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다가 521년(안장왕 3)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직후에 행한 것을 볼 때 즉위의례적 성격이 강하며 순행의 목적도 있었다. 평원왕 2년 2월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하고 3월에 돌아오면서 옥에 갇힌 주군의 죄수를 사면하여 주었다. 영류왕 2년의 시조묘 제사도 이와 같은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위 다음해인 2년 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고 4월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5년에는 동명왕모 소상(塑像)이 3일이나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멸망을 예고하는 듯하다. 고구려의 멸망은 제사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666년(보장왕 25)에 왕이 태자 복남을 당에 보내 태산에 제사를 지내는 데 시위하게 하였다. 동왕 27년에 당 고종이 이적(李勣)으로 하여금 보장왕을 소릉(昭陵)에 바치고 군용(軍容)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연주하게 하고 경사(京師)에 들어가 태묘에 바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종묘와 사직이 끝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와 같이 한 국가의 멸망은 결국 제사권을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제사체계 속에 편성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사의례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백제의 조상숭배신앙

 

백제의 조상숭배신앙도 시조묘신앙을 통해 알 수 있으며, 특히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의 시조묘는 동명묘와 구태묘 두 계통으로 전한다. 중국측 자료에서는 구태묘로, 한국측 자료에서는 동명묘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중국측 기록으로 『책부원귀』를 보면 백제에서 사계절 가운데 달마다 왕이 천(天) 및 오제지신(五帝之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국성에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오제지신은 오방(동·서·남·북·중)의 방위를 맡는 지신을 가리킨다. 백제는 천신·지신·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시조가 구태이므로 구태묘를 세워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 『수서』 백제전에도 나타나 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자가 있는데 매해 사계절 가운데 달에 왕이 천 및 오제지신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 구태묘를 국성에 세워 일년에 네 차례나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구태가 동명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북사』 백제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제사지에서는 여러 사서를 인용 비판하여 시조묘를 동명묘로 판단하였다. 해동고기에서는 시조를 동명이라고도 하고 우태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북사』나 『수서』는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있어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태는 구태를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이 시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하므로 그 나머지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 제사지를 보면 고기를 인용하여 천지신에 제사한 기록과 함께 시조 동명묘에 대한 제사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시조 동명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기에 이르되 다루왕 2년 춘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 책계왕 2년 봄 정월, 분서왕 2년 봄 정월, 계왕 2년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 모두 위와 같이 하였다.
위의 여섯 번의 제사가 모두 즉위 다음해에 이루어졌으므로 즉위의례의 성격이 분명하다 하겠다. 또한 제사의례를 행한 달도 계왕 2년 4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월에 이루어져 기풍제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천지신과 동명묘에 대한 제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백제본기를 보면 제사의례에 대해 보다 상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조 온조왕조를 보면 시조 온조왕 원년 5월에 동명묘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신라의 경우는 남해왕대, 고구려의 경우는 대무신왕대에 시조묘를 세웠는데 백제는 시조묘를 시조 온조왕대에 세웠다.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나 시조묘는 동명묘인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백제의 시조에 대한 견해는 그외에도 비류왕·구태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미주 15]. 그런데 온조왕 17년에는 국묘에 대한 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시조 온조왕대에는 동명묘와 국모묘, 천지에 대한 제사가 따로따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왕인 다루왕대에 오면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가 같은 해에 이루어졌다. 즉위 다음해 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고, 2월에 왕이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즉위 다음해 정월에 시조인 동명묘에 신왕의 즉위를 고하고 왕위계승을 고유한 다음 남단에서 백관을 대동하고 천지에 제사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기루왕·계루왕·초고왕 등 약 200년간 시조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227년(구수왕 15)에 동명묘에 대해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이해 3월에 우박이 내리고, 4월에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묘에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 시조 동명묘에 대한 제사는 이와 같이 농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책계왕 2년에도 동명묘제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즉위 다음해 동명묘에 배알한 점에서 분서왕 2년의 기사와 같다.
비류왕 9년에도 동명묘에 대한 배알기사가 보이며, 이해 4월 동명묘에 배알하고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라의 시조묘제사나 신궁제사 때 중신을 임명한 기사와 성격이 같다. 393년(아신왕 2)에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아신왕 즉위 다음해 정월에 동명묘에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으며 진무(眞武)를 좌장(左將)으로 삼아 병마사(兵馬事)를 맡겼다. 여기서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중신에 대한 임명이 뒤따랐다.
한편 전지왕 때에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즉위 다음해 정월 왕이 동명묘를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대사(大赦)하였다. 이어 2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9월에는 해충(解忠)을 달솔(達率)로 삼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사에 대한 기사이다.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 때의 중신임명 기사뿐만 아니라 대사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신라의 시조묘 제사나 신궁제사 때 함께 나타난다. 이후에는 백제 멸망 때까지 시조묘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제의 멸망을 보여주는 제사에 대한 기록만이 보일 뿐이다. 백제부흥운동을 하던 복신이 도침을 죽였는데 왕인 부여풍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만을 주관했을 뿐이다. 즉 군사적·정치적 능력은 상실하고 다만 제사권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제사권마저 빼앗김으로써 백제의 멸망을 고하였다. 곧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신라 문무왕과 만나 백마를 죽여 맹서하였던 것이다. 이때 유인궤(劉仁軌)가 맹사(盟辭)를 지었는데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신라의 종묘 안에 간직하였다. 이것으로 백제는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다.

(3) 신라의 조상숭배신앙

 

신라의 조상숭배신앙에 대한 자료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풍부하다. 시조묘 이외에 조묘(祖廟)·국조묘(國祖廟)·묘(廟)·선조묘(先祖廟)·조고묘(祖考廟)·오묘(五廟)를 설치하여 조상을 숭배하였다. 신라의 시조묘는 제2대 남해왕 3년 정월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시조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로서 일년에 사시로 이를 제사하며 친매인 아노에게 이를 주제하게 하였다. 이후 제8대 아달라왕 17년 2월에 시조묘를 중수(重修)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한편 제21대 소지왕대에 이르면 시조묘에 수묘 20가를 증치(增置)하였다. 소지왕 7년 2월에 구벌성(仇伐城)을 수축하고 4월에는 시조묘에 친사하고 수묘 20가를 증치하였고 5월에는 백제가 내빙하였다. 이때 수묘 20가를 증치한 데 대한 확실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러면 시조묘를 비롯한 묘에 대한 제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시조묘에 대한 제사기록과 그 관련기사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생략)
위의 표를 보면 시조묘의 명칭과 제사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주목된다. 시조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이나 단순히 박씨의 조상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박혁거세는 박씨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의 국조인 것이다. 따라서 시조묘 이외에 조묘와 국조묘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누가 지냈는가? 신라본기에는 왕이 친히 제사했다고 되어 있으며, 제사지에서는 친매인 아노에게 주제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계절마다 지내는 통상적인 의례는 아노와 같은 제관이 주제하고, 즉위의례 등 중요한 경우에는 왕이 친히 제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친사하는 경우에도 제관인 아노는 제사에 관여하였다. 왕은 제주(祭主)로서 제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아노와 같은 제관(祭官)은 이미 왕의 직속하에 제의의 기능적인 면을 담당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통일기 이후 신문왕대에는 대신을 보내서 조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왕이 친제하다가 통상적인 의례의 기능적인 면을 제관에게 넘겨주어 주제하게 하다가 통일기 이후 대신으로 하여금 주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례는 어떠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계급사회로 들어서면서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여러 신들의 서열화과정에서 천신이 정점을 이루게 되어 제천의례가 행해졌다. 그러나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천의 자 또는 천의 손이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천강신화를 가진 박혁거세를 위한 시조묘를 세우고 이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따라서 시조묘 제의는 고대 국가형성의 가장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며, 『삼국지』 한전에 보이는 대국(大國)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소국(小國)에서의 천신에 대한 제의가 마침내 대국에서는 천의 자손에 대한 제의로 발전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시조묘 제의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사제도가 시조묘에서 오묘로, 신궁에서 사직으로 변화하였다고 고찰한 바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를 보면 5묘나 사직이 설치된 이후에도 시조묘와 신궁의 제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시조묘에서 5묘로, 신궁에서 사직으로 변화했다고 한 것은 제사지를 분석한 내용으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제도상 그러했다는 것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통일기 이후에도 시조묘와 신궁에 대한 제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신라문화의 특징으로 제도와 실제가 다른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제도상으로는 중국을 의식하여 시조묘 대신 5묘로, 신궁 대신 사직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졌지만 신라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제사인 시조묘와 신궁에 계속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4. 지신신앙*10

 

삼국 및 남북국시대의 지신신앙은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 고구려의 지신신앙

 

고구려의 땅에 대한 신앙은 먼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이름을 수혈이라 하는데 10월 국중대회 때 수신을 맞이하여 모시고 나라에 돌아가 동쪽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들어 신좌에 모신다.
10월 제천대회인 동맹을 행할 때 하늘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제사의례를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라 동쪽의 큰 굴에서 지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 모셔다가 나무로 만들어 신좌에 모셨다. 신의 모습을 나무에 의탁한 것이다. 따라서 국중대회인 동맹이 열릴 때마다 천신과 아울러 지신에 대한 제사의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지신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요,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고, 말이 가는 대로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이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돌을 젖히게 하니 금색으로 된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뒤를 잇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여서는 태자가 되었다.
시조 동명성왕의 출계를 밝히고자 하는 서두에서 부여왕 해부루가 태자인 금와를 얻게 된 과정을 기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금와를 얻기 위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말이 곤연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거기서 신이한 장면을 목격하였고 금색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게 되었다. 해부루는 제사를 지낸 후에 이러한 신이한 일이 일어났으므로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것으로 이해하고 데려다 길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장성하여서는 신이하게 탄생한 그가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하늘에 닿아 돌에서 아이를 얻었고 그 아이는 마침내 후사를 잇게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아니고 부여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의 산상왕(山上王)도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여 알을 얻었다.
7년 봄 3월 왕이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다. 이달 15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가로되 내가 너에게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군신들에게 가로되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순순히 이야기하였으나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느냐고 하였다. 을파소가 대하여 가로되 천명은 가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상왕 7년(203) 3월에 왕이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한 것이 부여의 경우와 똑같다. 기도의 효험으로 꿈에 하늘이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이 도와주는 구조도 마찬가지이다. 부여의 경우에는 아들을 찾게 되는 과정에 말이 길잡이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돼지가 길잡이가 되었다.
12년 겨울 11월에 교시(제사에 사용하는 돼지)가 달아나자 담당자가 이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으나 머뭇거리다 잡지 못하였다. 이때 스무 살쯤 된 아주 예쁜 여자가 웃으며 먼저 교시를 잡아서 쫓아간 사람이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듣고 이상히 여겨 그녀를 보고 싶어 미행하여 밤에 그녀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 집에서는 왕이 왔다는 것을 알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여 방으로 들게 하고 그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그녀가 고하여 가로되 대왕의 명령은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자식이 생기면 버림을 당하는 것을 보기 싫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병야(새벽)에 이르러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중략)……13년 가을 9월에 주통촌녀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이 나에게 후손을 내려주신 것이라 하였다. 교시의 일로부터 시작되어 그 어미를 만났으므로 그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 하고 그 어미를 소후로 삼았다. 처음에 소후의 어미가 잉태하고 아직 낳지 않았을 때 무당이 가로되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라 하여 어미가 기뻐 이름을 후녀라 하였다. ……(중략)……17년 봄 정월에 교체를 태자로 삼았다.
제사에 희생물로 쓰이는 돼지가 도망간 것을 계기로 주통촌의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5년 전 산천에 기도하여 하늘이 꿈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된 것이다. 더구나 소후의 몸에서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꿈의 내용과 같다. 또한 그 어미의 탄생에서도 무당이 왕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왕은 이 아이를 하늘이 내려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마침내 왕태자를 삼았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꿈에서 앞일을 예언받게 되었으며 제사에 쓰는 돼지가 여자를 만나게 하였으며 마침내 아들을 낳았으며 왕태자가 되었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난리를 겪을 때는 도읍을 옮기며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함께 토지신을 모시는 사(社)를 함께 옮겼다. 247년(동천왕 21)에 환도성이 난리를 만나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를 옮겼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함께 토지신을 모시는 사를 옮긴 것을 볼 때 토지신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고국양왕 때도 종묘와 국사를 함께 수리하였다. 391년(고국양왕 9) 3월에 왕이 불교를 공인해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 여기서도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토지신을 모시는 국사가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원왕 때는 가뭄이 들자 산천에 기도하였다. 563년(평원왕 5)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임금이 평상시보다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사냥을 하고 나서도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모여 사냥을 하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슴과 돼지를 잡아 희생으로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매년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2) 백제의 지신신앙

 

백제의 땅에 대한 신앙은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백제 시조 온조왕 20년(기원후 2) 왕이 큰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낼 때 하늘과 땅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동왕 38년 10월에도 큰 단을 설치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왕인 다루왕 때에는 즉위 직후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29년(다루왕 2) 정월 먼저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고, 다음달 2월에는 남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즉위 직후에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볼 때 즉위의례적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시조묘와 하늘과 함께 땅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으며 땅에 대한 신앙과 숭배가 시조나 하늘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 제사가 가장 많이 행해진 것으로 전해진 고이왕 때도 땅에 대한 제사가 하늘에 대한 제사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고이왕 때에는 동왕 5년, 10년, 14년 세 번에 걸쳐 땅에 대한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 시기가 모두 정월이며, 하늘에 대한 제사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큰 단을 설치하였는데 남쪽에서 거행되었으며, 산과 내에 대한 제사도 함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제사의례를 행할 때는 북과 나팔을 사용하여 음악이 연주되어 축제 분위기를 자아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제의에는 희생의례가 이루어졌음을 비류왕 때의 제의를 통하여 알 수 있다. 313년(비류왕 10) 정월에 남교에서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친히 짐승을 베는 희생의례를 행하였다. 희생물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한편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신을 임명하는 예는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393년(아신왕 2) 봄에 동명묘를 배알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중신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사례는 신라의 경우 일반적이었는데 백제도 그러했던 것 같다. 하늘과 땅, 시조로부터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후 인사권을 행하였다. 땅이나 산천에 대한 제사는 홍수나 가뭄이 들었을 때도 행하였다.
402년(아신왕 11)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와 풀들이 모두 말라버려 왕이 횡악에서 제사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부여의 경우와 같이 이를 왕의 책임으로 받아들여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한편 왕의 즉위의례로서의 제의에서는 대사면령이 내렸다. 406년(전지왕 2) 2월에 왕이 동명묘를 배알하고 남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하늘과 땅, 시조로부터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고는 인사권을 행하거나 은사권을 행한 것이다.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는 풍년이 들었을 때도 행하였다. 489년(동성왕 11) 가을에 대풍년이 들어 남쪽 지역에서 복속의례를 행하자 단을 설치하여 하늘과 땅에 감사를 드리는 제사의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농경사회에서는 풍흉이 사회의 생산력을 가늠하는 것이므로 가뭄과 홍수 때는 물론 풍년이 들었을 때도 제의를 행하였다. 그런데 이후로는 백제에서 땅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무령왕(501∼523년)의 사후 장례를 치를 때 토지신에 대한 의례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무령왕의 지석(誌石)과 매지권(買地卷)을 통하여 당시 백제인들의 토지관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이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의 앞면에는 왕의 이름과 죽은 날짜와 장례를 치른 날짜가 씌어 있으며, 뒷면에는 방위가 그려져 있다. 왕비의 지석에는 왕비의 죽은 날짜와 장례날짜가 씌어 있으며, 뒷면에는 매지권이 씌어 있다. 매지권의 내용은 돈(錢) 일만문으로, 영동대당군 백제 사마왕(武寧王)이 토왕·토백·토부모·상하중관 2천 석으로부터 서쪽 땅(申地)을 사서 묘를 만들고 증서(券)를 만들어 분명하게 했으니 어떤 율령도 이 영역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왕과 왕비의 묘지를 쓸 때 토지신에게 이를 사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율령보다도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산소에 가면 먼저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개토를 할 때도 토지신에게 개토제를 지냄을 볼 수 있다.
600년(법왕 2)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크게 가물어 왕이 칠악사(漆岳寺)에 순행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402년(아신왕 11)에는 가뭄이 들어 횡악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었는데 여기서는 칠악사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이것은 384년(침류왕 원년)에 불교가 수용되어 불교가 공인되고 백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토착신앙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종래에는 가물거나 홍수가 나면 땅이나 산천에 비가 오기를 빌거나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그러나 불교가 백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부터 가물거나 홍수가 났을 때 절에 가서 비가 오기를 빌거나 그치기를 비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불교가 수용된 것은 384년이지만 불교가 국가의 공식적 의례로서 나타난 것은 600년(법왕 2)이니 그동안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이 융화되어 가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이 절에 가서 비 오기를 빌었지만 그 절의 이름인 칠악사를 통해서 산에 있는 절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토착신앙인 산신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것을 엿볼 수 있다.

(3) 신라의 지신신앙

 

신라의 지신과 산천에 대한 신앙은 고구려와 백제보다 자료가 풍부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뿐만 아니라 제사지에 위계적으로 잘 나타나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땅과 산악에 대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일성이사금 5년 10월에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한편 기림이사금 3년 3월에 왕이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를 지냈다. 이와 같이 신라초부터 산악에 대한 제사를 왕이 친히 지낸 것을 볼 때 산악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태백산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의지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300년(기림이사금 3)에 우두주(지금의 춘천지방)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태백산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으며 멀리서 망제를 지냈기 때문에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백제에서와 같이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실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천신신앙에서 살펴보았듯이 신궁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소지왕(昭知王) 7년 4월에 왕이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수묘 20가를 증치하였다. 그리고 소지왕 9년 2월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는데 나을은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 시조묘에 대한 제사에서 시조가 태어난 땅에 대한 제사로 옮겨간 것이다. 소지왕 17년 정월에는 왕이 신궁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으며, 지증왕 3년 3월 왕이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후 역대왕들은 즉위 직후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제사지를 보면 제22대 지증왕이 시조가 태어난 땅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궁이 소지왕 때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고, 제사지에는 지증왕 때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신궁이 소지왕 때 설치되었으나 신궁에 대한 제사가 즉위 직후에 행해진 것은 지증왕 때부터이므로 제사지에서는 제도화한 때를 기록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487년(소지왕 9)에 처음으로 신궁을 설치하고, 소지왕 17년 처음으로 왕이 신궁에 제사를 지냈으나 왕의 즉위 직후에 지내는 즉위의례로써의 제사는 502년(지증왕 3)이므로 이를 제사지에 기록한 것이다.
제사지에서는 처음 종묘에 대해서 논하고 3산5악 이하 명산대천은 대사·중사·소사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신라는 신라 영역내에 있는 명산과 대천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제사체계가 잘 짜여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신라의 영토관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사지에 기록된 내용은 통일전쟁 이후에 체계화된 것이지만 통일전쟁 전에도 이와 같은 제사체계는 있었다. 예컨대 3산에 대한 기록은 통일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 김유신조에 보면 김유신과 3산의 신들과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낭(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이 꾀하고 있을 때 백석이란 자가 그 일을 알고 낭에게 고하되 자기와 공이 함께 몰래 적국을 선탐한 뒤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낭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서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왔다. 골화천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와서 공은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하였다. ……(중략)……낭들이 고하되 공이 말하는 바는 이미 알고 있으니 원하건대 공은 백석을 그냥두고 우리와 함께 숲속에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말하겠다 하고 이어 함께 들어갔다. 낭들이 문득 귀신이 되어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혈례·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이라 하였다. 지금 적국인이 낭을 유인하는 것을 낭이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가 낭을 만류시키려 이곳에 온 것이라 하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를 통하여 통일전쟁 이전에 이미 3산의 신들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이 호국신임을 알 수 있다. 내력(나림)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습비부에 있던 산이며, 골화는 영천지방에 있는 산이다. 혈례는 종래 청도의 오리산이나 월성군의 단석산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 영일냉수리비가 발견된 뒷산인 어래산이 유력하다. 혈례산→열례산→얼레산→어래산으로 음전되어 지금의 어래산이 된 것이다. 따라서 대사를 지내는 대상인 호국삼신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대사의 장소가 신라의 국도 경주지방과 그 인접지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통일전쟁 전에는 3산5악의 위치가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통일전쟁 이후에는 국토의 영역 확대와 함께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다. 즉 3산5악의 산신신앙*11은 신라 초기의 경주지방의 산신숭배신앙에서 통일전쟁 이후 전국에 걸친 지역의 산신숭배신앙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숭배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급격히 변화하는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다.

5.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종래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무불교대(巫佛交代)라는 입장으로 단순화시켜 보아왔다. 그것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것과 이것을 그 사회가 수용하는 것, 국가가 이를 공인한 것과는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종래 연구는 이를 간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불교가 전래된 것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은 아니다. 이미 눌지왕대에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사람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양나라 사신이 왔을 때 왕실에 들어가 불교를 이해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소지왕대에는 이미 내전에 분수승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다만 국가적 공인조치가 늦었을 뿐이다.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과 대립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제장인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지으려다가 강력한 저지에 직면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내부진통을 겪게 됨으로써 독특한 신라의 불교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신각과 장승*12이라 하겠다. 즉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공인 이후를 무불교대로 보아서는 안되며 무불융화의 입장에서 신라사상의 흐름을 파악하여야 한다.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빚는 모습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이차돈*13의 순교설화이다. 이차돈의 순교설화는 『삼국사기』·『해동고승전』·『삼국유사』 및 금석문에 실려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법흥왕은 본디 불법을 존중하여 흥교할 뜻이 있었으나 군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흥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이차돈에 의해 창사의 결심을 하고 이차돈에게 왕명을 내리어 창사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군신들은 절을 지으라는 법흥왕의 왕명에 내심으로 반발하였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이에 따라 창사가 지연되게 되었다. 왕이 창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고 보니 이차돈이 왕의 허락도 없이 천경림에 창사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천경림에 창사하려는 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군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기와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고 천경림에 창사하려 한 이차돈을 왕의 입장에서 교명죄(矯命罪)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의 온건파인 법흥왕은 흥법문제에서 군신들의 촉각이 워낙 날카로워 있었기 때문에 이차돈이 군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가며 천경림에 창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창사를 할 바에는 아예 토착신앙의 본거지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흥법의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군신들의 반발이 강력해지자 왕은 군신들의 반발을 일단 완화시키고 왕명의 준엄함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흥법에 대해 온건파인 법흥왕과 강경파인 이차돈의 의견차이와, 흥법 자체에 대한 반대파인 군신들과의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불교세력이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불교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가고 불교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불교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종래 토착신앙이 갖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지배이념의 변화일 뿐 사상적으로는 두 개의 신앙이 마찰과 갈등을 겪으며 융화되어갔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토착신앙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지속되어 오히려 불교에서 배워온 것도 있고, 반대로 불교가 고유신앙의 여러 요소와 융화하여 독특한 한국불교로 토착화되어갔다. 불교는 지배층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고유신앙이 일반적 추세였다.
따라서 지배이념의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볼 때는 무불교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하여 토착화되어나갔기 때문이다.

(2)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

 

전국 어떤 사찰에 가더라도 불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대웅전 이외에 토착신을 모신 명부전·십왕전·산신각·칠성각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중국·한국에서 각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나라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모습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산문 근처나 사찰 입구에서 장승이나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산신각이나 사찰입구의 장승은 한국사찰의 특징이며, 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람(伽藍)의 배치뿐만 아니라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연등회(燃燈會)*14·팔관회(八關會)*15·탱화(幀畵)*16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토착신앙내에도 무당의 무의·무구·무신도·무속용어 등에 불교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이렇게 토착신앙과 불교는 상호 영향을 끼치며 융화되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토착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환인천제가 불교의 제석천 곧 제석환인의 신앙으로 변화한 것과 국조단군이 독성(獨聖)님이나 불교적 산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신앙이 토착신앙화한 경우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화랑국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하여 신라는 그 서울 안에 일곱 개의 가람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요, 둘째는 삼천기요, 셋째는 용궁의 남쪽이요, 넷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미요, 여섯째는 신유림이요, 일곱째는 서청전이니 모두 전시에 가람의 터로 법수가 길게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여기서 천경림·삼천기·용궁남·용궁북·사천미·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 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의 선도산 성모수희불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선도산에 산신과 신모의 신사가 있었는데 이들 산신과 신모의 도움으로 새로 불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모가 불상과 더불어 벽상에 53불과 6류성 중 제천신과 오악신군을 그려 받들며 점찰법회를 베풀어 이를 항규로 삼으라 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주기하였다. 진평왕대(579~631년)의 이 기록은 산신과 비구니, 신사와 불전, 불상과 천신, 산신탱화가 융화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일연이 주기한 오악(五岳)을 살펴보면 산신과 불사와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일연은 여기의 오악을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으로 보았으나 안흥사(安興寺)의 비구니 지혜(智惠)가 모신 오악신군은 경주평야를 우심으로 한 지역의 오악에 있는 산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산천조에 의하면 선도산이 서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이 전교활동을 하던 화엄십찰이 오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이미 이교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이교도는 바로 토착신앙을 믿는 무리들인 것이다. 결국 삼국시대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오악과 남북국시대의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 모두 토착신앙과 불교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종이 수용된 9세기 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된다. 산신이 사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산지의 가람건립과정에서 보다 확대되어갔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서낭당·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위치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되는 장승과 솟대의 동제당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토착신앙의 가람건립화에 따라 사원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기복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Ⅲ. 삼국시대의 사상

1. 삼국의 불교

 

(1)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1)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해는 372년(소수림왕 2)이다.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낼 때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경문(經文)을 가져오면서 비롯된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 5년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각각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정책은 전진과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국가의 지원이 따랐다. 순도가 머문 사찰이 ‘성문사’였음은 그것이 관청건물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 아도는 국적이 불분명하므로 개인 자격으로 고구려에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음 전진의 불교계에는 주로 대승사상이 유포되어 있었으므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도 대승경전 위주였을 것이다.
한편 동진(東晋)의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 314∼66년)이 고려 도인(高麗道人)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순도 이전에 이미 고구려 출신 승려가 남조(南朝)에서 활약하였는데, 그의 불교사상 또한 당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17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담시(曇始)는 396년에 경율(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에 가서 삼승(三乘)을 전하고 사람들을 계율에 귀의하게 한 뒤 405년에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이것은 화북(華北) 불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을 말해준다.
392년(광개토왕 2)에 내린 “불법을 받들고 믿어 복을 구하라”는 교시에는 국가가 불교를 믿게 한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성문사는 흥국사(興國寺)로, 이불란사는 흥복사(興福寺)로 고쳐 부르게 한 사실에서도 이들 초기 사찰이 호국과 기복 차원에서 육성되었다고 하겠다. 당시 고구려의 서울은 국내성이었으므로 성문사와 이불란사는 집안(輯安)에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평양에도 흥국사와 흥복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에는 광개토왕 3년에 9사(九寺)를 창건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평양으로의 천도를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흥륭에 있어 불교의 역할을 크게 기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문사와 이불란사도 이때 이름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장수왕대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 흥국사와 흥복사도 평양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은 고구려 불교의 교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삼론종(三論宗)*18이란 구마라지바(鳩摩羅什)*19가 번역한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백론』(百論)을 근본경전으로 하여 성립된 학파로서,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할 뿐 독자적인 존재성, 곧 자성(自性)은 없다고 보고 특히 공(空)을 강조하였다. 중국에서 삼론종이 성하게 된 것은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 1세기 동안이었는데 고구려에서도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중국에 체류하던 승랑(僧朗)은 중국 삼론종의 기초를 닦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구려의 파약(波若)은 중국 천태종 창립자인 지의(智 )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 고구려는 수(隋)나라와 전쟁중이었고, 곧 이어 수의 멸망과 함께 천태종도 쇠퇴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도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 백제의 불교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384년(침류왕 원년) 9월이다.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내에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경배하였다. 이보다 2개월 전에 백제는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마라난타는 백제로 오는 사신과 함께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불교가 전해진 계기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불교정책 또한 고구려의 경우와 흡사함을 아신왕(阿莘王) 원년(392)의 하교(下敎), 곧 “불법을 받들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추고기(推古紀) 32년(624)조에 실린 백제승 관륵(觀勒)의 상표문(上表文)의 “불법이 백제에 이른 지 겨우 1백 년이 되었다”라는 기사를 근거로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해는 524년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위 사료를 ‘백제에 불법이 전해진 지 1백 년이 지나’ 일본에 전해진(552년) 것으로 해석하여,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해는 452년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384년 이후 541년(성왕 19)에 이르기까지 『삼국사기』에 불교관계 기사가 없고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서울) 주변에 당시의 불교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 동진과의 교류를 참작하고, 384년설을 부정할 만한 적극적 자료가 없는 한 침류왕대설이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고로 서울 뚝섬에서 400년경에 만들어진 불상이 발견되었으므로 이 지역 초기 불교의 실재(實在)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학적인 면에서 백제불교를 보면 계율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수준도 높았던 것 같다.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 의하면 백제승 겸익(謙益)은 526년(성왕 4)에 인도에서 범본(梵本) 오부율(五部律)을 직접 가지고 돌아와 28인의 승려와 함께 번역하였다고 한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이에 대한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으며 왕은 번역된 신율(新律)의 서(序)를 지었다. 588년(위덕왕 35)에는 일본의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에 유학하여 율학을 배우고 돌아갔다.
그리고 백제승 현광(玄光)은 중국 천태종의 제2조 혜사(慧思)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귀국한 바 있다. 법왕(法王)은 599년에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민가에서 기르는 가축을 놓아주게 하고 고기잡이나 사냥도구 일체를 불사르도록 했다. 계율을 중시하던 백제불교가 형식주의에 치우치게 되었던 일면을 볼 수 있다.

(2) 신라의 불교

 

1) 불교의 전래

 

신라불교 전래에 관한 원사료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이다. 눌지왕(417∼58년) 때 고구려로부터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와 있었는데, 양(梁)나라(502∼57년) 사신이 가져온 향(香)의 용도를 왕실에서 모르자 이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4세기 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눌지왕대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사는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을 통하여 민간에 전해진 것이 잘 남아 있는 경우일 뿐이며, 유물·유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와 통하는 또 다른 경로인 영주(榮州)·안동(安東) 쪽으로도 불교는 전해졌다.
그리고 신라왕실이 불교를 접한 시기가 고구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았음은 5세기 초엽의 신라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왕족이 직접 가져왔거나 신라왕실에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묵호자를 통하여 신라왕실이 처음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제동맹(羅濟同盟)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외교나 군사면에서 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밀접하였다. 신라가 선진(先進) 불교문화를 어느 한 경로로만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지방에 숨어 있던 묵호자가 왕실에까지 불교를 포교하였다거나, 이때 시대상으로도 맞지 않는 양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계통의 불교가 전래된 사실이 하나로 중첩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라는 521년(법흥왕 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양나라에 처음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볼 때, 신라는 백제를 통해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것은 외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북조불교의 성격으로 추정되는 초전불교(初傳佛敎)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사적에 대한 아도비(阿道碑 혹은 我道碑)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263년(미추왕 2)에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掘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아도를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보고,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위(魏)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일연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아도비로서, 각훈은 고구려·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본 것이다. 아도비는 시대 착오가 심하며 설화의 인위적 구성이 짙은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아도는 진(晋)나라에서 왔다는 고려본기(高麗本記)의 기사가 있으므로,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생존연대로 보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말년 무렵 신라에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 초전승이 아도라고 하는 사료는 아도비밖에 없는데, 고기(古記)에 의하면 아도는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垢批) 다음에 세번째로 왔으며,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는 아도가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온 승려였다고 하였다. 아도는 신라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으므로, 아도를 반드시 초전승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소지왕대(479∼500년)에 모례의 집에는 몇 명의 승려가 신도들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이러한 교세(敎勢)는 왕경(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는 내불당(內佛堂)이 있고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이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인다. 이 사건은 불교를 비방하는 세력의 모함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들이 처형을 받은 사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것은 국가적인 불교수용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일률적으로 통용될 수 없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법흥왕 이전의 불교실태는 불교전래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듯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소재가 많은데, 피장자(被葬者)의 활동연대는 불교공인의 해(527년) 전후가 된다. 이것은 법흥왕 자신이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신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도 불교가 공공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 때 막연히 사용되는 ‘공인’(公認)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2) 불교공인의 실상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법흥왕 14, 丁未年)이라 하지만, 이해에 이차돈은 처형당하고 흥륜사(興輪寺) 창건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법흥왕 정미년은 공인의 해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은 해이며, 실질적 불교공인은 법흥왕 22년(乙卯年) 즉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던 해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차돈에 얽힌 이야기는 그것이 비록 종교사화(宗敎史話)라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흥륜사는 을묘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544년(진흥왕 5)에 초창(初創)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둘째, 이차돈설화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법흥왕의 신행(信行), 즉 잠시 정사(政事)를 멈추고 삼보(佛·法·僧)의 노예가 되어 입사수도(入寺修道)한 사신(捨身)의 행적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왕사신(帝王捨身)의 예는 진흥왕 말년의 행적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셋째, 법흥왕이 사신한 장소는 을묘전 이전부터 있었던 흥륜사이며 이 때문에 흥륜사는 대왕사(大王寺)라고도 불렸다.
법흥왕의 사신은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고, 이에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법흥왕이 주재(主宰)하였지만 그도 귀족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차돈의 순교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창건 명령을 전한 것이므로, 법흥왕의 사신에 대한 비난은 왕의 신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왕의 사신을 도왔던 이차돈이 처형되고 왕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즈음은 아직 왕호(王號)를 매금(寐錦)이라 칭하던 시절로서, 왕이 명실공히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현재의 사료상으로는 대왕(大王)을 칭하기 시작했던 갑인년(甲寅年, 534년) 이후가 된다.
왕 자신의 사신은 국가의 불교정책과 직결된다. 순교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던 법흥왕의 의욕은 일단 꺾였지만, 왕권의 신장에 따라 그것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간과할 때 을묘년의 흥륜사 중창(重創)을 실질적 공인의 연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미년은 왕이 불교에 대한 태도를 천명한 해이며, 이해에 조정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정미년은 신라불교사에서 하나의 기원이 되는 해이며, 『삼국사기』에서 이해에 “처음 불법을 행했다”(肇行佛法)고 한 기사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3) 진흥왕대의 불교

 

진흥왕(540∼76년)의 불교정책은 정치와 불교 양면을 관장하여 집권적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남조, 특히 양무제(梁武帝)의 정책을 본받은 바가 많다. 그는 재위중 몇 번의 사신을 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은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수(巡狩)할 때 승려를 대동하였는데, ‘사문도인 법장 혜인’(沙門道人法藏慧忍)이 진흥왕순수비문에 보인다. 수행(隨行)한 신하들 가운데 이들 승려의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할 때에는 새로 정복한 곳의 지역민으로부터 충성을 약속받고 왕과 신하는 이들을 보살필 것을 맹세하는데, 여기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맹(會盟)의 정신이 불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의 새로운 지도이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였고, 국가적인 불교의식이 이곳에서 베풀어짐으로써 황룡사는 신라사회의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진흥왕은 전몰사졸(戰沒士卒)을 위하여 팔관회를 베풀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팔관회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신도(在家信徒)가 경전에 입각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수행의 하나로서 남조에서 유행·발전한 것이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유학갔던 승려가 속속 돌아왔다. 이들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진신(眞身)을 모시게 되어 신앙면에서 차원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고, 함께 가지고 온 경전은 교학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진(陳)나라에서 명관(明觀)을 시켜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오게 됨으로써(565년) 신라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의 대다수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수용의 단계를 지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어나갔고 또한 자국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시기의 승려 중에는 학덕면에서 중국의 고승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그들 중 『고승전』에 실린 이가 몇 있다.

 

4) 고승

 

원광

 

원광(圓光, 541∼630년 추정)이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승려의 신분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섭취하기 위한 유학생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황제의 칙허를 얻어 승려가 된 그는 양무제의 사우(師友) 장엄사(莊嚴寺) 승민(僧旻)의 제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속고승전』 혜민전(慧旻傳)에 의하면 “혜민이 15세(587년) 때 회향사의 신라 광법사에게서 성(실)론을 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상으로 보아 ‘광법사’는 원광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이름을 날리던 원광은 수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가서(589년)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하고, 본국의 요청에 의해 600년(진평왕 22)에 조빙사(朝聘使) 2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진평왕 30년,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쓰라고 하자 원광은 그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신라의 신민임을 이유로 명령을 받들었다. 세속법과 불법을 이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원광의 고민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인 호국활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세속오계를 가르칠 때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과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불법의 길이 따로 있었다. 진평왕 35년에 황룡사에서 1백 명의 승려를 모시는 법회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을 때, 원광은 거기서 경전을 강의하였다. 백고좌회는 『인왕경』 호국품(護國品)에 근거한 것인데, 이 경전을 강의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수·당대 이후의 호국, 즉 밀교적 주술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법력(法力)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남조불교의 한 특징으로서, 『인왕경』은 호국경전사상(護國經典史上) 정법치국사상(正法治國思想)과 밀교적 치국(治國)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왕은 원광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참회하였다. 계율과 참회의 병행은 중국적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의 특징으로서, 그 목적은 계행(戒行)에 있다기보다 참회에 의한 죄의 소멸과 현세에서 복을 받는 데 있다. 계를 받은 왕, 즉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왕이 원광에게 의식을 손수 마련해드렸다는 일화는 과장이나 꾸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국가와 국왕에 대한 원광의 태도는 양무제 때의 숭불 태도와 흡사한 것으로서, 원광의 초기 유학시절의 견문은 귀국 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에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와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가 있다.

 

안홍

 

안함(安含)으로도 알려진 안홍(安弘, 579∼640년 추정)은 601년(진평왕 23)에 수나라에 유학가서 5년 만에 호승(胡僧)과 함께 돌아왔다. 안홍의 저서에는 참서(讖書)라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한 권이 있다. 『해동고승전』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원문과 후대의 해석문이 섞여 있어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원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머지않아 이웃나라로부터 침공을 받을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중국에 적극적인 외교를 펼칠 것, 그리고 비록 이러한 시련이 있더라도 희망찬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까닭은 선덕왕이 도리천녀(悼利天女)이므로 신라는 곧 불국토(佛國土)로서 불력(佛力)의 가피(加被)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안홍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구한(九韓)의 침공을 막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유학시절에 보았던 수나라 서울의 국찰(國刹) 대흥선사탑(大興善寺塔)의 건립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隋文帝)는 새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빌고 아홉 오랑캐(九服)가 평정되었음을 스스로 칭송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당시 수나라에는 천하통일의 당위성을 논하는 참서가 유행하였다. 즉 수문제는 사천왕(四天王)의 보살핌과 도리천 덕분에 천자가 되었다고 하는 불국토설 등이 그 내용인데, 안홍은 이러한 견문을 그대로 신라에 원용하였다. 신라 불국토설은 자장(慈藏)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지만, 자장의 이 사상은 안홍의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9층탑 건립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그뒤 통일이 되자 이 모든 것을 예언했던 안홍과 그의 참서가 새삼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비록 불교계측의 예언이기는 하지만, 신라인은 자신들의 나라가 불국토이기 때문에 외적방어의 차원을 넘어 성역(聖域)의 보전, 더 나아가 신라를 중심으로 욕계(欲界)의 인간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 때의 참문(讖文)은 이미 성취된 것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지만, 신라의 불국토설은 미래상의 제시로서 이것은 전적으로 안홍의 공적이다.

 

자장

 

자장의 아버지 소판(蘇判, 제3관등) 무림(武林)은 진덕왕대(647∼54년)까지도 국사(國事)를 논의하였던 진골귀족이다. 자장은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재상의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출가하였다. 638년(선덕왕 7) 당나라에 유학갔을 때 자장의 나이는 25세를 조금 지난 때였다. 당나라에 갔을 때나 귀국할 때 당태종(唐太宗)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자장이 유학한 데에는 국가적으로 대당(對唐) 외교사절의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자장은 먼저 법상(法常)을 찾아뵙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종남산(終南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 당시 종남산에는 중국 계율종의 종주(宗主)인 도선(道宣)이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자장이 도선과 상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자장의 저서에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 磨私記)·『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등이 있다는 사실로 보아 도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장과 도선과의 법맥(法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자장전에 나오는 설화를 그대로 믿어 자장의 나이가 도선보다 훨씬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장은 귀국하여(643년) 궁중에서 『섭대승론』을 강의하였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승려의 규범을 바로잡고, 지방사찰을 다니며 계율을 지키도록 일깨워주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나라사람으로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자가 10명 중 8,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계율존숭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승단(僧團)에는 출가득도나 의식에 있어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였고, 동시에 그러한 계율이 만들어진 의의를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나 사회적으로는 계율을 일상적인 행동규범, 즉 예나 율로 인식하여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도덕가인 승려에게서 그러한 지침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다. 원광에게 세속의 계율을 얻어듣고자 한 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많은 백성이 계를 받도록 한 것도 예속(禮俗)의 진작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자장의 저서에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와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가 있는 것을 볼 때, 정토교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을 화엄사상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후대에 점차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든 그를 어느 한 종파로 국한시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교종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활동면을 함께 보면 ‘율사’(律師)라는 전통적 호칭은 타당하다.
자장은 불국토인 신라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고자 태백산·오대산 등지를 순례하였다. 이것은 감통(感通)을 중시하는 자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절대적인 신앙에 귀의함이 없이는 계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도선의 태도와 서로 통한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았다. 그리고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고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건의하는 등 구체적인 사대(事大)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5) 불교의 대중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전도승을 후원했던 모례를 모례장자(毛禮長者)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처음 포교의 주요 대상은 지방유력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왕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점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민중에게도 불교는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불교의 평등주의 이념, 구원(救援)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피지배계급의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다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나라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고등종교에 의해 공통된 도덕률을 가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것이므로 계율 등 일부 교설(敎說)의 전파에는 적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광이 대중포교를 위해 점찰법회를 연 것은 길흉을 점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참회를 시킴으로써 중생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무한한 공덕을 갖춘 여래장(如來藏)임을 깨달아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의해 죄를 소멸시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평왕대(579∼632년)에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智惠)도 점찰법회를 열었다. 지장보살은 땅속에 감추어진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 교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혜가 지은 불전(佛殿)의 지장보살상은 선도성모(仙桃聖母), 즉 산신의 신사(神祠) 밑에서 캐낸 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불교의 보살과 재래신앙의 산신이 이렇게 맺어짐으로써 지장보살이 어떻게 친근하고 쉽게 이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설화이다.
그렇지만 원광의 대중법회는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는 측면이었지 민중 속에 살면서 그들과 같은 길을 가는 보살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국가의 여망(輿望)을 받았던 고승들이 민중을 멀리하였던 것은 자장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사(居士)가 자장을 보고자 하였으나 문전에서 쫓겨나자, 그 거사는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사자보좌(獅子寶座)를 타고 가버렸다. 이 거사는 문수보살의 진신이었다.
진평왕대의 승려 혜숙(惠宿)은 국선(國仙) 구참공(瞿 公)이 사냥을 즐기는 것을 나무랐으며, 왕의 부름도 거절하였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 하녀의 아들이었는데, 천진공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이름없는 절에서 살았던 혜공은 거리와 골목을 누비면서 민중교화에 힘썼다. 대안(大安)은 언제나 시장바닥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외쳤다. 왕이 대안으로 하여금 흐트러진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꿰어맞추라고 궁궐로 불렀으나, 그는 이것을 시장에 벌여놓고 정리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교화에 힘을 쓴 승려들은 권력을 멀리하였고, 쉬운 말로 불교의 뜻을 풀이해주었으며, 간단한 의식(儀式)을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몸소 모범을 보였다.

2. 삼국의 사학과 유교

 

불교나 유교경전을 해독하거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자의 보급이었다. 한자는 이미 철기문화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한자사용에 있어 말의 순서가 우리말 식이라든가 이두(吏讀)나 구결(口訣)을 사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체질화시켜나갔다. 이와 같이 문자생활에 있어 역량이 쌓이고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자 역사를 편찬하여 나라 안팎으로 위신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국초(國初)에 『유기』(留記) 100권을 지은 바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에 고쳐 지은 것이 『신집』(新集) 5권이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346∼75년) 때 고흥(高興)에 의하여 『서기』(書記)가 편찬되었다. 신라에서는 545년(진흥왕 6)에 거칠부(居柒夫)에 의하여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다.
율령의 반포라든가 국가제도의 정비에 있어 기본이 되는 정신은 유교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교육하였다. 신라의 청소년들이 3년을 기약하여 ‘시·상서·예·전’(詩尙書禮傳)을 다 읽고자 맹서한 것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보이며, 그들은 이러한 교육적 분위기 속에서 국가가 위태로울 때 ‘충도’(忠道)로써 임할 것을 하늘에 맹세했다. 불교를 수용하기 전에 정책적으로는 유교적 기반에 의해서 국가의례, 나아가서는 사상까지도 통일하고자 한 노력을 신라의 국가제사 편성이나 율령의 반포에서 엿볼 수 있다. 6세기 초의 금석문에 보이는 살우의식(殺牛儀式)은 그러한 실례가 된다.

 

3. 남북국시대의 사상

 

(1) 신라의 불교사상

 

1) 원측의 유식학

 

현장(玄 , 602∼64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645년)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주석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해냄으로써 중국 불교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현장의 문하에는 원측(圓測)·신방(神昉)·지인(智仁)·승현(僧玄)·순경(順璟) 등 신라 승려들이 많이 있어서 새로 전래된 유식학의 선양에 학문적인 기여가 컸다. 그 가운데서도 원측(613∼96년)은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진제(眞諦) 계통의 섭론종, 즉 구유식(舊唯識)을 배우고, 이어 현장이 귀국하자 다시 신유식(新唯識)을 배워 유식학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혔다.
현장 밑에서 함께 수학한 중국승 규기(窺基)와 그 후계자를 가리켜 자은학파(慈恩學派)라고 부르는 데 대해 신라의 원측과 그 후계자를 서명학파(西明學派)라고 일컫게 됨으로써 유식학의 계통은 양분되었다. 두 파 사이에는 대를 이으면서 활발하게 교학의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논쟁은 당나라 불교계에서뿐 아니라 신라 불교계로 이어졌고, 나아가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승려인 선주(善珠, 724∼97년)도 이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발전하였다.
원측의 학설은 유식학의 10대논사(十大論師) 가운데 안혜(安慧) 계통으로 추정되는 진제(眞諦, Paramartha, 499∼569년)의 영향이 강하여, 호법(護法, Dharmapala, 530∼61년)의 학설만을 고집한 규기의 학설과는 적지 않은 차이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측의 불교는 유식학의 입장에 서면서도 일면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견해에 따르는 등 소화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통파로 자처하던 규기 계통에게 이단시되어 배척당하였다. 그 결과 원측의 서명학파는 중국 불교계에서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으나, 신라 본국이나 돈황지방으로 전해져서는 크게 발전하였다. 원측의 제자 가운데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돌아와 원측의 유식학을 전하였는데, 그것은 태현(太賢)에게 전해져서 신라의 법상종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신라불교계에도 도증과 태현 외에 둔륜(遁倫)·경흥(憬興)·순경(順璟) 등의 학자들이 유식학을 활발히 연구하여 그 학문적 업적은 중국에 비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원측의 계통에 속하는 인물 가운데 담광(曇曠)은 서명사(西明寺)에서 수학한 뒤 730년 원측의 저술인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0권을 가지고 장안을 떠나 돈황으로 가서 선양하고, 원측의 설에 의거해서 『대승백법명문론개종의기』(大乘百法明門論開宗義記)를 저술함으로써 담광의 사상이 돈황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뒤 그 학풍을 이은 법성(法成, Chosgrub)은 티베트의 지배하에 들어간 돈황에서 『해심밀경소』를 티베트어로 번역하고 서장대장경(西藏大藏經)에 편입시켰다. 뒷날 원측의 유식학은 티베트의 불교교단을 크게 개혁한 총카파(btson-kha-pa, 1353∼1419년)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7세기 후반부터 당과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불교권에서 유식학이 크게 유행한 것은 당시의 불교계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중관(中觀)*20과 유식(唯識)*21의 대립이라는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원래 중관과 유식의 두 학파는 다같이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 학파였지만 그 사상적 입장이 서로 달랐다. 원측은 두 학파의 사상적 입장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관학파의 청변(淸辨, Bhavaviveka, 500∼70년)에 의하면 망집(妄執)의 부정은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모든 법은 공(空)이며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어 본래 고요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의 호법(護法)에 의하면, 주관적 인식의 대상(境)은 비록 공(空)하지만 인식 그 자체까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모든 법은 유(有)와 무(無)에 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공관(空觀)의 실천을 통해 부정되는 대상은 남에 의존하는 것(依他起性)에 독자적 자성(自性)이 있다고 보는 망집(遍計所執性)일 따름이요, 그러한 망집의 부정을 통해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圓成實性)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호법의 이러한 주장을 청변은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계속적인 공관의 실천에 의하면, 그러한 진실한 성품, 곧 궁극적인 진리를 세우는 것은 허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공·유의 대립을 극복할 합리적인 이론을 계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의 불교계에서도 중관·유식의 불교는 제각기 일찍부터 전래되어 왔지만, 공·유 대립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현장에 의해 신유식이 수입되면서부터였다. 당시의 유식학자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남보다 먼저 인식하였던 사람은 신라승 원측이었다.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그 대립을 화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지만 만족할 만한 해결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2) 원효

 

원효(元曉, 617∼86년)는 당대까지 번역된 거의 모든 한역(漢譯)경전을 섭렵하고 이들에 대한 자신의 저술을 남겼는데, 100부 240권을 훨씬 넘는 그의 저서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20부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불교 교학사상 가장 돋보이는 업적은 중관·유식 두 학파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가장 합리적인 도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즉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다 소(疏)와 별기(別記)를 지어 기신론을 부연함으로써 중관과 유식을 일심(一心)*22으로 종합한 이론이다.
그는 중관파의 부정론이나 유식파의 긍정론을 다같이 비판하고 세계는 오직 일심이라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일심은 상반되는 두 측면의 통일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측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일체의 현상들이 발생·발전하고 운동·변화한다고 보았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일심은 두 부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다. 원효에 의하면 진여문은 발생도 소멸도 없으며, 증감도 차별도 없는 절대적 본체인 일심의 본질적 측면을 의미한다. 생멸문은 발생과 소멸이 있으며, 증감·차별이 있는 일심의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측면이다. 이러한 일심의 두 모순적 측면인 진여문과 생멸문의 관계를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인도의 대승불교에서부터 발생하였던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는 신라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불교계의 현안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원효의 불교는 중국에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효는 중국에 간 적이 없었으나, 그의 불교는 곧 중국에 전해져서 법장(法藏)이나 이통현(李通玄), 그리고 그 뒤의 징관(澄觀) 등에게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각각의 경(經)·론(論)의 서로 다른 주장을 조화·통합하는 원효의 논리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불교의 교리적 대립을 열 가지 범주(十門)에 포섭하여 그에 대한 화쟁을 시도하였다.

 

3) 의상의 화엄종

 

당나라 법장(643∼712년)은 지배세력의 후원을 받으면서 『화엄경』의 선양과 교의체계 확립을 위해 학문연구와 문도(門徒)양성에 주력함으로써 방대한 화엄학의 체계를 세웠고 큰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화엄을 이어받아 신라에서 실천적 교단운동을 통해 화엄을 크게 선양한 사람은 의상(義湘, 625∼702년)이었다.
의상은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법장과 함께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귀국하여 화엄종을 널리 펴고 문도양성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의상의 화엄종은 통일기 신라의 교학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부석사·해인사·화엄사 등을 의상십찰(義相十刹)이라 하고, 지통(智通)·표훈(表訓)·의적(義寂) 등을 의상의 10대제자라고 일컫는 것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은 충분히 이해된다.
의상과 법장의 관계는 의상이 귀국한 지 20년 뒤인 692년(효소왕 1)에 신라승 승전(勝詮)의 귀국을 계기로 법장이 서신과 함께 자신의 저술들을 필사하여 보내왔던 사실로 보아 매우 긴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 화엄종의 법장의 불교가 이론에 치중하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였던 데 비하여, 의상의 그것은 수행에 치중하는 실천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 때문에 법장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방대한 교학적 업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4) 정토교학

 

신라시대에 위로는 귀족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 내지 노비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했던 불교신앙의 하나로서 무량수불(無量壽佛, 阿彌陀佛)에 귀의하여 극락정토*23에 왕생하고자 원(願)을 세우고 행(行)을 닦는 미타신앙*24, 즉 정토교(淨土敎)가 있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25이라 일컫는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및 『아미타경』은 다같이 미타신앙을 고취한 대표적인 경전이다.
신라승들은 대개 정토삼부경을 연구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저서로는 겨우 원효의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와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가 있으며, 현일(玄一)의 『무량수경기』(無量壽經記)와 경흥(憬興)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이 있을 뿐이다. 신라승들의 저서는 거의 일본으로 소개되어, 오늘날 없어진 법위(法位)의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와 의적의 『무량수경술의기』(無量壽經述義記)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5) 밀교*26

 

갖가지 재액과 병을 없앨 뿐만 아니라 수명장수와 번영을 위해서 또는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약사경』(藥師經)·『인왕경』(仁王經)·『금광명경』(金光明經) 등의 경전이나 주문(呪文)을 외워 부처에게 기원하는 이른바 잡부밀교(雜部密敎)는 재래의 토속신앙과도 상통하는 것이어서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래되던 때부터 널리 믿어졌다. 일찍이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외우며 선덕왕(善德王)의 병을 고쳤다는 것은 그 한 예이다. 명랑(明朗)은 671년(문무왕 11)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에 설해진 신인비법(神印秘法)에 의해서 낭산(狼山) 기슭에 오방신(五方神)을 모시고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어 바다로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사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명랑을 신인종(神印宗)의 시조로서 받들었다. 문무왕 19년에는 문두루도량을 열었던 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사천왕이란 다목천(多目天)·광목천(廣目天)·지국천(持國天)·증장천(增長天)으로서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천신이다.
한편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 인도승들이 당나라에 들어와서 『대일경』(大日經) 등 밀교삼부경(密敎三部經)을 번역하고 주술을 정화하였다. 이것은 신비적인 직관과 상징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대승의 이념을 구체화시키고자 한 것인데, 이전의 잡부밀교와 비교하여 정순밀교(正純密敎)라 한다. 이들 밀교의 삼장(三藏) 밑에서 신라승 혜통(惠通)·불가사의(不可思議)·현초(玄招)·혜초(慧招) 등이 수학한 것은 정순밀교가 직·간접적으로 신라에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혜초는 인도에까지 가서 불법을 구하고 남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으로도 유명하다. 781년(선덕왕 2)에는 혜일(惠日)과 오진(悟眞)이 당나라에 가서 밀교를 익혔는데, 혜일은 귀국할 때 밀교삼부경과 『보리심론』(菩提心論)을 직접 가지고 왔다.

 

6) 민중불교

 

빈천하고 무지한 사람도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천명한 승려는 원효다. 원효의 저서 『열반종요』(涅槃宗要)에는 선근(善根)이 부족하고 믿음이 없어 성불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 즉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면밀한 논리를 가지고 독창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이것은 원효 자신의 철저한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교의이기도 하다. 6두품으로서 자신이 일정한 신분적 제약 속에서 살았던 원효는 이러한 사상을 학문적으로 천명했음은 물론, 몸소 대승보살도를 실천해 보임으로써 민중 속에서 불교를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원효는 요석궁(瑤石宮)의 공주를 만나 아들 설총(薛聰)을 낳게 되자 환속하여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였다.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박(瓠)을 본따 도구를 만들고는 『화엄경』의 구절을 따와 그것을 ‘무애호’(無碍瓠)라고 이름지었다. 무애호를 가지고 마을마다 교화하고 다녔는데, 술집이나 창가(倡家)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거지나 아이들까지도 ‘불타’(佛陀)의 이름을 알고 ‘나무’(南無)라는 염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세에서 이렇다할 희망을 갖고 있지 못한 평민이나 노비신분의 사람들에게 정토사상은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정토왕생설화를 통해 볼 수 있는 저들의 정토신앙은 하루빨리 속세인 예토(穢土)를 떠나 서방의 극락정토로 산 몸 그대로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문무왕(661∼81년) 때에 처자를 거느리고 신(鞋)을 삼으며 살던 광덕(廣德)은 밤마다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16관(觀)을 닦다가 달빛을 타고 왕생하였다. 화전을 일구며 남악(南岳)의 암자에서 살던 엄장(嚴莊)도 광덕을 본받아 원효가 직접 가르쳐준 관법을 닦아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는데, 엄장의 부인은 분황사의 비(婢)였다.
아간(阿干 또는 阿飡, 신라 제6관등) 귀진(貴珍)의 비(婢) 욱면(郁面)은 주인이 미타사의 만일염불법회(萬日念佛法會)에 참석할 때 함께 따라가서 몰래 마당에서 염불하였다. 귀진은 욱면의 행동이 못마땅하여 매일밤 곡식 두 섬을 찧게 하였으나, 욱면은 지성으로 일을 끝내고 다시 절에 와서 염불하였다. 결국 욱면은 처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렀지만, 하늘에서 “욱면비는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욱면은 솟구쳐서 지붕을 뚫고 왕생하였다. 이 설화는 하층민이 돈독한 정토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절출입은 자유롭지 않았던 경덕왕대(742∼65년)의 사정을 말해주며, 아울러 신앙적으로는 욱면과 같은 사람들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는 교의를 전해주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의지하고 소원을 비는 관음신앙은 미타신앙과 같은 서민성을 지니면서도 보다 더 친밀감을 주었던 것으로 널리 환영받았다. 경덕왕 때 우금리(禹金里) 빈녀(貧女) 보개(寶開)의 아들 장춘(長春)은 바다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의 관음보살에게 빌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부인은 장님이 된 5세의 아들을 안고 분황사의 천수관음(千手觀音) 화상(畵像) 앞에 가서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며 빌게 하여 광명을 얻었다.

(2) 신라의 유교와 한문학

 

통일 이후 유교는 통치이념으로서 보다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을 표방하던 신라 중고시대(中古時代)의 왕족과는 달리 중대의 진골왕족에게는 유교의 도덕정치 이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682년(신문왕 2)에는 국학(國學)이 설치되었고 717년(성덕왕 16)에는 공자를 비롯해 그 제자들의 화상이 국학에 모셔졌다. 국학에서의 교육은 3과(科)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여기에서 가르친 책들은 『논어』와 『효경』(孝經)을 필수로 하고, 오경(五經)과 『문선』(文選)이 과에 따라 선별적으로 추가되었다.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이라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강의하였다.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관리채용을 위한 국가고시가 생겼다. 그것은 독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는 것인데, 시험과목은 대체로 국학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유교교육의 강화, 실력에 의한 인재등용이라는 이상은 사실상 신라사회에서 크게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그것은 수학 후 어떠한 보장이 없는 여건 때문이었다. 더구나 경주인(慶州人)이 아닌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입학이 어려우며, 골품의 규제가 여전하고, 진골귀족의 자기도태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6두품에게 국학은 출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통일전쟁이 진행중이던 때 외교문서를 작성한 강수(强首)는 수백석의 세조(歲租)를 받았고, 설총은 신문왕에게 「화왕계」(花王誡)를 바쳤다. 이들 6두품은 한결같이 도덕지상주의를 내세움으로써 사회의 새로운 가치기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설총은 이두로써 경전 읽는 법을 마련하였다. 설총의 업적은 전대(前代) 한문학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어떻든 그로 인해 중국문화를 보다 광범하고 수준높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신라인에 의한 저술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경덕왕(702∼37년) 때의 역사가 김대문이 지은 『계림잡전』·『고승전』·『화랑세기』·『악본』(樂本)·『한산기』(漢山記) 등이다. 한문을 자기체질화하고 유학에 관심을 기울이던 당시에 자기 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자신을 가졌던 그는 진골신분에 걸맞게 신라문화를 재조명하려고 노력했다.

 

(3) 발해의 불교

 

발해불교의 성격으로는 첫째, 불교신앙과 배치될 수도 있는 토착적 습관 내지 민간신앙까지를 흡수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발해는 처음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713년 당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던 해에 당에 사신으로 갔던 발해 왕자가 절에 가서 예배할 수 있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제3대 왕 대흠무(大欽茂)의 존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은 불교식 칭호이고, 그의 넷째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도 불교식으로 지었다. 그런데 이 무덤 안에서 31인분의 인골이 발견되어 그들 중 대다수가 순장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무덤에는 불교적인 성격과 전통적인 순장의 습속이 혼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불살생을 제일의 계(戒)로 준수하는 불교의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두번째 특성으로는, 연해주 지역의 절터 유물에 나타난 현상으로 불교와 토착신앙 또는 전혀 이질적인 경교(네스토리우스교)*27와의 결합이다.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발견된 치미( 尾)에는 몸체에 용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절의 앞에 흐르는 차피고우 강 속에 살고 있는 용을 표시한 것으로 본다면, 이는 곧 불교가 현지의 토착신앙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아브리코스 절터에서는 경교의 십자가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도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결합을 보여주는 예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예술면에서 중앙과 지방의 수준의 격차가 큼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발해의 영토가 광대하다는 점 외에도 발해 국가 자체가 자기 문화의 모형을 가지지 못한 채 만주 동부지역에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상의 경우, 동경성이나 반납성(半拉城) 등에서 출토된 불상은 당나라나 고구려의 것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고, 심지어 당에 금불상과 은불상을 보내었을 정도로 제작기술이 뛰어났다.
반납성에서는 석가와 다보의 2불병좌상(二佛竝座像)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法華經)에 의거한 조상례(造像例)로서 고구려의 전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발견된 불상들을 보면 사천왕상으로 보이는 불상 머리의 경우 위엄이 있거나 무서운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또 도제(陶製)의 보살상은 동경성 등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유형인데, 비록 심하게 마모되기는 했지만 얼굴이 마치 원숭이 얼굴처럼 표현되어 있다.

Ⅳ. 신라 하대 사상계의 동향

1. 화엄종*28

 

나말려초는 봉건사회의 상부구조에 강력하게 잔존하던 고대적 유제를 청산하고 봉건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과도기였다. 과도기의 사회전환에 조응하여 사상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화엄종과 유학이 자체 정비를 모색하고 풍수지리설*29이 점차 이론적 틀을 갖추는 등, 선종과 미륵하생신앙*30이 사회 전면에 등장하였다.
9세기 중엽 이전만 해도 지배이데올로기의 위치를 차지했던 화엄종은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까지 신라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영역의 축소를 보였다. 9세기에 즈음하여 받아들인 선종은 세기의 후반, 각 지방에 9산선문*31으로 대표되는 산문을 열어 화엄종의 뒤를 잇는 나말려초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하였다. 후기 신라시대에 문인으로서의 소양을 닦은 이들의 사유세계를 지배했던 유학은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의 두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지만, 사장 쪽으로 기울어가는 문약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불안정한 현실을 사는 당시의 민중들에게 미륵신앙은 미륵의 용화(龍華)세계를 맞는 전단계로서의 말법(末法)시대라는 의식과 연결되어 사회구원적 신앙으로 대두하였다. 불교의 여러 신앙과 전통신앙 중 산악신앙을 바탕으로 한 풍수지리설은 후삼국시대에 경주 밖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출현한 지방의 신흥세력들에게 지리적 개념에서 논리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화엄종과 선종의 교차를 주로 하여, 뒤이은 고려시대의 정치체계를 준비한 유학, 민중들에게 구원론적 이상을 제시한 미륵신앙, 경주 중심의 지리적 사고를 극복하게 한 풍수지리설을 하나씩 짚어나가기로 하겠다. 다만, 미륵신앙과 풍수지리설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 못한 점, 전통신앙을 다루어 균형있는 이해를 꾀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점, 뒤에 수록된 각종 표들의 경우에도 읽는 이들이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만 열어놓고 지나치게 설명을 생략한 점 등이 한계로 남는다.

 

(1) 화엄종의 계보

 

최치원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에서 신라의 불교종파를 각각 달리 언급했다. 그에 따라 여러 종파의 존재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종파의 명칭 외에는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 역사 속에서도 화엄종과 선종만이 종파적인 존재로서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특히 화엄종은 최치원의 화엄관계 저술이 남아 있어 신라 말 화엄승들의 활동상을 알 수 있다. 이밖의 화엄자료로는 화엄사상에 관한 토론집과 참고서의 성격을 지닌 자료가 있다.
고려 때 누군가가 의상의 「법계도」*32를 중심으로 신라 중대에서 하대에 이르는 논의를 종합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 있다. 그리고 고려 광종 때 균여가 지은 『10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를 포함한 5부 10권의 책이 있다. 전자가 일종의 토론집이라면, 후자는 일종의 참고서이다.
현존하는 이 세 자료들은 각각 일정한 목적 아래 꾸며진 것이어서 일관성은 없으나, 화엄종이라는 큰 주제 아래 상호연관되는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균여의 저작은 신라 화엄승 25인의 학설과 일부 전적을 이용하였으므로, 『법계도기총수록』에 나타난 화엄종이 전수된 내용과 함께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다음에서는 참고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화엄종의 인적 계보와 사상의 본질 및 신라 하대 화엄의 경향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화엄종의 계보는 인적 계보와 특정 사원의 계보, 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먼저 인적 계보를 살펴보면, 법맥의 전수관계로 보아 의상 일맥이 꾸준히 사자상승(師資相承,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했음이 분명하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의상 이외에 어떤 이들의 사상적 영향이 누구에게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을 넓은 의미에서 화엄계 비주류라고 정의하여도 무리는 없다. 문제는 비주류로서 원효계·연기계, 제안자 스스로 철회한 법장계, 의상계 내부의 분파형성을 들어 설명할 때이다.
법장계와 의상계 분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연기계에 대해서만 잠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연기계 설정은 775년(경덕왕 14)에 제작한 『화엄경』 사경(寫經)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되어 나왔다. 이 입장은 연기가 『화엄경』 80권 본과 『대승기신론』을 중시하고 화엄사에 머물렀던 일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의상이 스승 지엄이 주관한 80권 본을 몰랐다고 보기 어려우며, 『대승기신론』은 의상계에서도 학습하고 있었고, 황룡사는 어느 한 종파에 소속되기 어려운 관사(官寺)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입장은 논리적 근거가 취약하다.
원효계는 원효 이후의 화엄승들이 원효의 학설이나 불교교리의 통합의지를 존숭하여 흠모한 것에서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였다. 신라에 태어나 원효의 가르침을 만난 것을 다행하게 여긴 견등, 원효의 학설을 의상의 학설보다 긴히 이용한 표원, 원효를 해동보살로서 추모한 의천, 의상과 원효의 발자취를 밟아 수련하며 원효보살로 원효를 추앙한 법인탄문 등이 그러하다.
노인네들이 전하는 말에, “향성산 속에 절터가 있는데, 예전에 원효보살과 의상대덕(義湘大德)께서 함께 머물던 곳이다”라 하였다. 성스러운 자취를 들은 탄문대사가 어찌 그 터로 나아가지 않겠는가? 착함을 닦아 마침내 그 옛터를 밟게 되어, 원숭이처럼 멋대로 하는 마음을 휘어잡고, 말처럼 날뛰는 의지를 누르게 되었다. 발을 쉬게 하고 마음을 가지런하게 한 지 여러 해가 되자, 성스러운 사미(聖沙彌)라는 칭호가 났다(「보원사 법인국사 승광탑비」, 『한국금석전문』, 412∼13쪽).
원효의 직계인 현륭의 법맥이 사자상승되지 않은 것과 같이, 이들의 원효에 대한 존숭이 그 맥을 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을 원효계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물론 이때의 계열은 의상보다 원효를 중시했지만, 의상 또한 존숭했다는 뜻에서 계열이라고 말한다. 비근한 예로 중국의 화엄종 4조인 청량징관은 3조 법장의 직계가 아니고 시대는 뒤임에도 불구하고, 법장의 직계제자인 혜원 대신에 4조로 숭앙받은 것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의상계와 원효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화엄승들이 있다. 이들은 소략(疎略)한 자료로 인해 정확한 계통을 찾을 수 없지만 두순·지엄·의상 또는 법장으로 이어지는 화엄의 맥을 이은 것은 틀림없다. 법해·원표·범여·지해·범수·주종이 그러하며, 의상의 사질(師姪)과 사질손(師姪孫)이 되는 승전과 가귀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역시 화엄종 비주류라고 할 수 있지만, 의상과의 일정한 관련도 배제하기 곤란하므로,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되거나 과학적인 재해석이 내려지기까지는 의상계 비주류라고 이름짓기로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의상계의 계보를 따져보면 신라 하대의 의상계는 의상의 직계법손으로 알려진 부석적손 신림(浮石嫡孫 神琳)의 제자대에서부터 헤아려진다. 신림의 바로 아래 항렬에는 순응·법융·숭업·융수·대운법사 군·질응이 있다.
순응의 해인사계는 이후에 현준과 결언으로, 현준은 희랑과 관혜의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나뉜다. 희랑의 뒤에는 균여가, 관혜의 뒤에는 영관이 배출된다. 법융의 부석사계는 범체·융불·융 질이 뒤를 이어받고, 그 뒤로는 석징·탄문·의천으로 이어진 듯 보인다.
주요사원으로도 화엄종 역사의 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화엄승의 존재가 눈에 쉽게 띄는 황룡사 등의 경주사찰들은 이름난 사찰치고 관사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절이 없어, 화엄종과의 관련을 전연 배제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온전한 화엄계 사찰이라고 하기도 매우 어렵다. 이 점에서 볼 때 경주사찰과 화엄종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설정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화엄 10찰로 알려진 사원 가운데 특히 부석사와 해인사 같은 지방사찰은 앞서의 인적 계보에서도 화엄승이 사자상승한 화엄계 사찰임이 확인된다. 8세기 중엽에 연기가 세운 화엄사는 그 뒤의 자취가 확인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지만 간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다. 9세기 말 현준과 남악사 정현이 교류하고, 후삼국시대에 해인사에서 희랑과 관혜가 남악과 북악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각각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을 후원한 기록이 그것이다. 화엄종에 관한 한, 북악은 태백산 부석사이고 남악은 지리산 화엄사를 가리킨다는 것에 이의가 없다. 이를 근거로, 후기신라의 화엄종은 부석사를 뿌리로 하여 화엄사와 해인사라는 주요한 두 가지를 뻗은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선사들과 화엄사찰의 관계도 부족한 자료를 보충한다. 곧, 9세기 전반에는 부석사가, 후반에는 화엄사와 해인사가, 그리고 이들 사찰에는 못 미치지만 보원사가 지속적으로 사세(寺勢)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부석사·화엄사·해인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의 자리를 굳힌 의상계 주류, 오늘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의상계 비주류, 의상 이상으로 원효를 숭앙한 화엄종 비주류인 원효계로 신라 하대의 화엄종단을 구분할 수 있으나, 어느 계보라 할지라도 그 바탕에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흐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화엄사상의 본질

 

신라의 화엄사상은 의상의 철학을 골격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학설을 대표하는 것에 「화엄일승 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있다. 이것은 10현문과 4법계의 연기설을 30구 210자로 응축하여 그린 것이다. 10현문은 보편과 개별, 전체와 부분, 추상과 구체, 본질과 현상, 시간과 존재의 상호규정과 상호침투(相卽相入)를 체계화한 것이다.
이(理)·사(事)·이사(理事)·사사무애(事事無碍)의 4법계는 10현문 속의 모순과 무질서를 조화와 안정의 세계로 이끄는 변증법적 세계관으로, 이것이 그 유명한 법계연기설이다. 법계연기설이 뚜렷이 표현된 것으로 흔히 다음의 구절을 지적한다.
하나 안에 모두가 들어 있고, 많은 것 안에 하나가 들어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모든 것을 전제로 이루어지며, 많은 것은 하나를 전제로 성립한다(一卽一切多卽一).
하나의 티끌 속에 세계가 담겨 있고(一微塵中亦含十方)
모든 티끌 속 또한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
이 구절을 중심으로 화엄종의 사회적 본질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진다. 단순하게 고도의 종교적 이념만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당시의 지배체제를 뒷받침한 이념인가 하는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다. 앞의 입장은 불교학계가, 뒤의 입장은 역사학계와 유물론 계열이 지지한다.
종단과 왕실의 종정유착은 중대보다 하대의 일반적 현상이라는 연구결과를 볼 때, 중대 화엄사상이 국가권력의 요구를 반영한 사상도구라는 이해에는 실증의 한계가 있다. 동시에 중대와 하대의 화엄사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하대의 종정유착이 중대의 태반에서 성장했음을 부인하기 어려우며, 화엄사상의 초역사적 보편성과 하대 화엄승들이 살아갔던 현실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의상의 사상이 당시의 고대전제왕권 또는 봉건지배계급을 옹호했다는 논리가 구체적인 이해를 결여한 도식적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법계연기론이 세속적 이념의 한계에서 승화한 대승불교의 극치라는 논리 역시 사상의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불교교리사로 환원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설령 사상의 자율성이 강조된다 할지라도, 그 사상을 수용한 신라사회의 종교적 현실 역시 함께 고려되어야만 설득력이 있다. 가령 화엄승들의 화엄관계 저작들을 주목한다면,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보아 적어도 권력의 일정한 지원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밖에 표훈이나 신림과 같이 권력과의 관계가 뚜렷한 경우는 예외로 치더라도, 도를 닦는 공간의 마련과 일상생활의 경제적 유지가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고려하면 이해가 더욱 쉬워진다. 이제까지의 이해 위에서 법계연기설을 다시 해석하기로 하자.
세계(一切)란 복잡(多)하면서도, 어떠한 사물일지라도 모두가 불성이나 진여(一, 理)와 관계가 있다. 사물 각각(事事)은 불성과 진여의 한 측면을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영상이자 체현도 된다. 체현된 개별존재(事)와 일반원리(理)가 조화(無碍)되며, 더 나아가 개별 존재들(事事)끼리도 안정과 조화의 세계를 이룬다.
사회와 연관을 시켜 해석할 때, 신도와 승려, 농민과 지주, 민중과 지배계급은 사회관계의 그물(緣起)에서 빠뜨릴 수 없는 그물코가 되어, 모든 사람이 원만무애하게 평화공존하는 생활(事事無碍法界)을 영위하는 것이 법계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엄의 사유가 당대의 신라인들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가를 이제 알아볼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이, 법상종 또한 다르지 않지만, 화엄종에 대한 수락은 당대의 이해 당사자들이 그 이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삼국통합의 새로운 질서구축을 위한 여러 제도의 정비와 나란히, 통합전쟁의 긴 전역(戰役)을 거치면서 황폐화된 농업의 복구와 안정적인 경작의 희구,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제기된 사회긴장의 완급조절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봉건지배계급에 복무했다거나, 전제왕권을 뒷받침했다거나, 승화한 종교이념이라는 주장은 당면한 승속(僧俗)세계의 현실에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편향성의 한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민중이 거부하는 것을 지배계급이 온존시키려는 노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맞물리는 현실과 유리된 이념의 성립도 울림없는 메아리처럼 공허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존재(一)가 전제된 조화와 평등의 세계관인 법계연기설은 당대의 모든 이들에게 현실의 해결에 대한 이상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관념의 제시에 그치기는 했지만, 상반되는 현상과 세력관계의 협동적·상호보완적·상호요구적 관계의 그물(事事無碍緣起)에 관한 치밀한 논리적 사고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다 역사적으로 일컬으면 봉건사회 지배이데올로기이다. 특정집단의 특정이익을 노골적으로 반영하는 고대사회 지배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일정한 편향성을 잠복시킨 채 모든 집단의 모든 이익을 반영한다는 관념적인 이상향을 제시한 것이 봉건사회 지배이데올로기이다.
모든 집단의 모든 이익을 반영한다는 화엄종의 이념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건 봉건사회 형성기에 거부될 이유가 하등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이 시기의 모순이자 대승불교의 객관적인 논리의 최고봉인 화엄종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3) 신라 하대의 화엄종

 

신라 하대, 특히 9세기 후반부터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의 화엄종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선종에게 물려주면서 특정계급에 대한 편향성을 노출시켰다. 이 시기의 자료로는 최치원이 쓴 화엄관계 저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를 통해 신라 하대의 화엄종이 선종과 융합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선종의 충격에 대응하여 화엄교학을 진전시키려 노력함과 동시에 자체세력 강화를 위한 화엄결사를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졌으면서도 계기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선종과 융합된 일면은 9세기 전반 해인사와 부석사에서 나타났다. 순응의 뒤를 이은 해인사의 이정은 선백(禪伯)이라 불렸고, 해인사 창건주 순응은 우두선(牛頭禪)을 익혔으며, 선종사찰인 선림원의 수석화상으로 생각되는 상화상(上和尙)으로도 자리했다(804년 현재). 17세(847년)에 해인사로 출가한 홍각선사 이관도 원감현욱을 만나기 이전에 선수행을 하며 떠돈 것으로 보아 해인사에서 선법을 익힌 것으로 추측된다.
해인사에 가서 여러 선지식을 뵙고, 훌륭한 가르침을 얻고자 참문(參問)하는 것이 물흐르듯 하였다. 뜻이 끝이 없고 말솜씨가 우뚝하니 나이든 승려들이 모두 다, “후배가 두렵구나”라고 칭찬하였다. 뒤에 신령한 산들에 노닐면서 두루 선림(禪林)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높은 봉우리에 머물렀다(「홍각선사비」, 『한국금석전문』, 203쪽).
부석사 또한 다르지 않다. 동리산문을 연 혜철은 부석사에 머무를 때(799∼814년) 계율과 선에서도 승려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비문에 적혀 있으며, 희양산문을 연 도헌도 840년을 전후하여 부석사에서 혜은선사에게 선을 배운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불린 신림의 제자 순응과 순응의 계승자 이정이 주지한 해인사는 물론이요, 화엄의 종주사찰인 부석사도 화엄과 나란히 선을 포용하였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초기선종의 수용과 관련지어 이해하면 되지만, 적어도 9세기 전반의 화엄종단이 교리면에서 선종을 경쟁대상으로 인정하여 멀리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선종의 충격에 대응하여 화엄교학을 진전시키려던 노력은 징관교학(澄觀敎學)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9세기 전반까지 교종에 기생하던 선종은 세기의 중반에 즈음하여 시대상을 반영하고 지도하는 독자적 사유세계를 전개하면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확장해나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9세기 후반의 화엄종은 세력이 위축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화엄을 수학한 걸출한 승려들이 선종으로 옮겨갔고, 교종사찰들이 선종사원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떨쳐 일어서는 선종에 대한 교리면의 대응으로서, 화엄종과 같은 차원으로 선종을 평가하여 융섭한 중국화엄의 4조 청량징관의 『화엄경소』를 수용하여, 신라화엄의 교학을 진전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비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화엄종단은 결사를 통해 자체의 세력강화를 꾀하였다. 결사는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실과 관료들이 맺은 것과, 지엄·의상 같은 역대 화엄조사를 기리기 위해 화엄승들이 맺은 것이 있었다. 선왕의 명복을 비는 이면에는 결사에 가담한 이들이 결사를 중심으로 정치적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화엄조사를 기린 것은 사상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데에 대한 자기반성 내지 자기방어의 의미가 있었다고 보인다. 결사의 내용과 형식은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지배계급과 밀착된 화엄승들의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중대와 달리 지방의 민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하대의 화엄승들은 쇠잔해가던 권력의 심층부에 적극적으로 기생하여 명맥을 유지해나갔던 셈이다. 대표적인 것이 헌강왕 이후 진성왕의 원찰이었던 해인사이다. 따라서 지배계급과 유착한 화엄승들의 보수적이고 자폐적인 모습이라든가, 주통(州統)이나 군통(郡統) 따위의 연락관을 자임한 중간층 승려들의 어용화 과정에서, 세속권력과 함께 몰락해가는 화엄종의 모습을 읽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여, 지지세력의 상실과 영역의 축소를 야기한 경주 중심과 진골 위주의 파행적 지배체제, 즉 고대적 유제(遺制)의 문제점을 각종 화엄결사와 「초월산 대승복사비」에서 표현하였듯, 원성왕계로 복귀함으로써 재정비하려 했던 신라 말 역대 왕들의 복고적인 시도와, 시대정신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학적 세계에 몰두하여 신앙계층과 지역이 축소된 화엄종의 역대조사로의 신앙복귀는, 시대의 격동적인 변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선종

 

나말려초의 선종을 이해하는 데는 9산선문에 속한 각 선사들의 새김글(金石文)과 선사들에 관한 신비로운 요소를 덧붙여 서술한 『조당집』(祖堂集)에 실린 일부 승려의 행적이 참조된다. 이들 중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는 『삼국유사』의 선종관계 자료와 함께 선종사를 정리하는 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다만 이 세 자료는 그것이 씌어진 신라 진성왕대, 고려 광종대, 원 지배기의 선종에 대한 인식을 담았다는 것을 주의하여 이용해야 한다.
새김글에는 9산선문의 계보에 속하지 않았던 선사들에 대한 표현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 때문에 논자에 따라서는 9산선문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어휘로 대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어 일종의 공인된 개념어로 정착된 이 어휘를 대신할 만한 과학적인 개념어가 아직은 창출되지 않았다. 또한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법맥전수관계를 시간의 순서대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희양산문(봉암산문)
△△신행-지증도헌-정진긍양
② 가지산문(북악)
원적도의-보조체징-선각형미-진공△운
③ 실상산문(남악)
선정홍척-수철△△
④ 봉림산문(혜목산문)
원감현욱-홍각이관-진경심희-진공충담-자적홍준-원종찬유
⑤ 동리산문
적인혜철-선각도선-광자윤다-통진경보
⑥ 성주산문(숭엄·숭암산문)
낭혜(광종)무염-원랑대통-대경려엄-법경현휘-홍법△△(?)
⑦ 사자산문
철감도윤-징효절중-법경경유
⑧ 사굴산문
통효범일-낭원개청-낭공행적
⑨ 수미산문
진철이엄
⑩ 기타
쌍계사 혜소/서운사 순지/ 갈항사 혜거

 

새김글은 선사탑비의 문장격식에 따라 당시에 유행했던 짝맞춘 글투(46변려체, 四六騈儷體)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김글이 30여 개나 남았을 만큼 풍부하다는 점이고, 더욱이 새김글이 승려들의 행적을 정리했을 뿐 아니라 그때의 사회상까지 담았다는 점이다. 좀더 덧붙인다면, 선종사 외에 교종·유학·미륵신앙·풍수지리설에 대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요, 관변사서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나말려초의 격동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요긴한 자료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선종의 수용, 9산선문의 성립, 선사상의 본질, 농민전쟁기의 선종에 대해 알아보되, 시기상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진성왕대의 농민전쟁 발발 전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할까 한다. 선종의 수용은 선교의 교차를 준비한 9세기 전반의 교종과 선종의 상호규정과 이해에 대해, 9산선문의 성립은 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산문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지지기반에 관해, 그리고 선사상의 본질과 농민전쟁기의 선종은 농민전쟁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앞뒤의 선종이 사회모순의 심화와 폭발에 어떻게 대처하고 변화했는가를 논의의 중점으로 삼기로 하겠다.

 

(1) 선종의 수용

 

선종의 전래자인 법랑은 선덕왕과 진덕왕대(632∼47년)에 당에서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자인 신행(704∼79년)의 비문에서 활동의 편린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중국 선종의 4조 쌍봉도신을 이은 법랑의 선맥 이외에 신수의 북종선*33을 계승한 신행은 60세 이후에는 단속사에서 선법을 폈던 것 같다. 신행의 제자 삼륜이 왕실과도 관련을 맺어 813년 무렵에는 단속사를 확장하기도 했으나, 김헌창의 난(822년)의 여파로 선법의 확대전파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선맥의 계보를 전혀 알 수 없는 9세기 초의 선종에 관한 산발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804년(애장왕 5)에 선림원의 종이 이루어졌고, 817년(헌덕왕 9)에 경주 흥륜사에서 영수선사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결성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와 함께 앞에서 언급한 화엄종이 선종과 융합된 일면을 고려하면서, 초기 선종의 수용에 대한 선교 양쪽의 인식이 어떠했던가를 짚어나가기로 하겠다.
단속사는 신행이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곳이다. 그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은 아니며,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선림원 종(鐘)의 조성기록에는 선사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나, 우두선을 익힌 해인사 창건주 순응화상이 수석화상으로서 간여했다고 되어 있다. 영수선사가 예불향도를 결성한 흥륜사는 527년(법흥왕 14)에 창건한 왕실의 원찰이었다. 어느 하나 선종 독자의 사원은 찾아볼 수 없다. 단속사와 화엄종 사찰을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해인사와 부석사 역시 화엄사찰이다.
그렇다면 초기의 선사들은 교종계 사원에 의탁하여 선법을 전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추측컨대, 교종승들이 불교의 새로운 조류인 선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선사들을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스스로 익히기 위해 수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때의 선종을 고려시대나 오늘날 인식되는 선종의 개념으로써 규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이러한 인식으로 볼 때 주목되는 것이 「단속사 신행선사비」 이다. 비의 지은이 김헌정은 신행의 행적을 기술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도 집어넣었다.
마음의 지경이 맑지 않으면서 어떻게 3학의 마루에 오를 수 있겠는가만, 바라는 것은 나의 반딧불 같은 반짝임으로 선사의 밝디 밝은 햇빛 같은 광휘를 나름대로 돕겠다는 것이다. 선지식들께서 남보다 앞서 헤아리신다지만, 손가락을 꺾어놓고 달을 찾으라고 하거나, 달걀을 깨뜨리고 나서 새벽을 알리게끔 울라고 시키실 리가 있겠는가?(『한국금석전문』, 161쪽)
이 대목에서 지은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3학이란 어휘를 구사한 것이 주목된다. 김헌정이 비를 지을 때의 선종에 대한 불교계, 즉 교종계의 인식을 반영하여 사용한 어구가 3학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닫는 요점이자 분류의 한 방법이기도 한 계정혜(戒定慧) 3학을 일컬음으로써 선종에 대한 규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석사 수학기의 혜철이 화엄(혜)뿐만 아니라 계율(계)과 선(정)에서도 승려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사실 계율 쪽은 이미 자장율사가 관단(官檀, 정부에서 인정하는 수계마당)을 설치한 이래 계속 율사를 배출하였다. 지혜에 속하는 교종은 사·법사·대덕·대사·화상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정에 속하는 승려들은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던 터였다. 이런 점에서 해인사 2대 주지인 이정을 선의 거장을 뜻하는 선백이라 일컬은 것은, 그가 선에 주력한 경력을 참조한 의미있는 경칭임이 확실하다.
이렇게 이해할 때, 이밖에도 크게는 교종계와 작게는 화엄계 사찰에서 선사를 포용한 흔적이 산발적으로 나타난 의미를 바로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교종의 범주 안의 한 분류인 계정혜 3학의 균형잡힌 조화를 꾀하고자 선정의 전문가를 환영했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교종과 대비되는 사유체계를 함유한 선종의 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는 말도 된다.
예컨대, 이내 뒤이은 도의를 본격적인 선의 전래자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설악산 진전사로 은둔하였고, 홍척이 흥덕왕 때 귀국하여 지리산 실상사에서 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나 왕실 종친 몇몇과의 교류에 그쳤으며, 범패(梵唄)로 이름난 쌍계사의 혜소는 그 맥이 사자상승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선종의 공간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던 9세기 전반의 사회와 불교계의 제한된 이해와 영역에서의 활동상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수용 초의 선종이 교종사찰에 의탁한 것은 3학체계 속의 선정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로서 선사들이 이해되어 가능했으며, 교종과 대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선종 전파가 그때까지 제한될 수밖에 없었으나, 이후의 선종이 교종과 마찰없이 퍼져나갈 길을 닦아주었던 셈이다.

(2) 9산선문의 성립

 

9세기 전반 교종사찰에 의탁하여 터를 닦은 선종은 세기의 중엽을 고비로 신라의 지방 곳곳에 여러 산문을 세워 뿌리를 내렸다. 당에서는 회창년간(841∼46년)에 폐불사건이 일어나 사부첩(祠部牒)이 없는 외국승들을 본국으로 귀환하게 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이에 의해 유학승들이 돌아왔다. 최치원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서 귀환승 가운데 왕의 스승 노릇을 할 만한 이들로 12명을 꼽았다.
이들 중 지력문·신흥언·용암체·진구휴에 대하여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논의하기 어렵다. 나머지 여덟 명 중에서도 북산의·남악척·혜목육·쌍봉운·고산일의 자료는 빈약하거나 후대의 설화로 윤색한 것들이어서 참고에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그 후예들과 나머지 세 명의 자료로 9세기 중반 이후의 선종사 검토는 충분히 가능하다.
9산선문 전반의 윤곽은 이미 여러 곳에서 소개된 바 있다. 사회 여러 세력과 선사들의 관계를 통해 9산선문이 성립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과 그 지지기반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다소 거칠지만 산문별, 산문의 1대와 2대별로 선사들의 사회관계가 정리될 것이다.
가지·동리·성주·사굴·희양산문의 1대들은 왕실과 거리를 둔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성주·사굴·희양산문과 오관산 서운사에는 집권왕실 외 다양한 신분을 지닌 이들(왕위계승 도태왕족, 부유한 민, 신흥세력가)의 후원이 계속 또는 일시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산문이 일단 정착되거나 중인들의 추앙을 받은 뒤에 왕실의 초청이 있었지만, 선사들은 초청을 계속 거부했다. 왕실에서는 집요하게 접근하여 초청에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한 경우에는 더욱 성대한 예우를 올렸다. 진감혜소의 경우가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매양 사신이 말타고 와 왕명을 전해 멀리서나마 법력을 빌었다. 그런즉 말하기를, “무릇 왕의 땅에 살면서 승려 노릇하는 자로 누구인들 불법을 보호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 임금을 위해 복을 쌓지 않으리오만, 또한 어찌 반드시 임금의 말씀을 마른 나무와 썩은 기둥 같은 저를 위해 멀리에서 더럽히십니까? 사신들이 굶주려도 먹을 수 없고 목말라도 마실 수 없는 실정을 생각해주십시오”라 하였다.―선사의 죽음은 문성왕 시절에 있었다. 왕은 측은히 여겨 맑은 시호를 내리고자 했으나, 스님의 유언을 들음에 미쳐 그 뜻을 거두었다(「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70쪽).
이와 같이 왕실의 산문 접근은 매우 집요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는 왕실의 대산문정책이 거의 불가항력이었음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신분계층의 지지를 의식한 행위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는 신라 하대의 화엄이 왕실과 종정유착한 상황과는 판이하다. 오히려 선종은 중대의 의상계 화엄이 유지한 건강한 종정관계, 곧 일정한 긴장관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교종이 누렸던 지배이데올로기의 영역을 선종이 인수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주목할 만한 일은 교종 단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보다 진보된 사회상을 산문들이 반영했다는 점이다. 곧 왕실의 사후결재가 뒤따르기는 했지만, 거대규모의 사원조성이 이전과 달리 지역사회 신도들의 자발적이고 공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실상·봉림·사자산문의 1대와 나머지 5산산문의 2대들은 왕실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현욱·도윤·수철처럼 왕실 일변도의 편향성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대부분 앞의 선사들과 마찬가지로 사원인가나 왕실의 강요로 인한 대면요청을 극력 거부하기는 어려웠다고 보아야 한다. 생선장수 출신 혜소와 같이 대통(大通)과 이관(利觀)이 민출신이라는 정태적 분석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들 역시 민중과의 관련을 배제하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사나 후원자의 다양한 신분에서 불충분하나마 사회적인 힘의 격동적인 변화와 민중들의 사회적 성장 면모를 느낄 수 있으나, 왕실의 허가와 지원 없이 일정규모의 거대사원을 조성할 수 있었던 내면에서 그 본질이 보다 잘 드러난다. 지증도헌(智證道憲)이 부유한 민출신의 심충(沈忠)에게 시주받은 문경 가은현 희양산 기슭에 봉암사를 건설한 과정은 이를 잘 대변한다.
게다가 산의 신령스러움이 갑옷을 입힌 말과 같이 앞으로 치달리는 기운이 있다 하여…… 산이 울타리를 친 듯 사방으로 열을 지어 봉황이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듯하고, 물줄기가 사방을 둘러싸 마치 이무기가 바위에 누운 듯했다.…… 뒤를 막아 터를 닦고, 기와와 처마를 세우되 사방에서 물을 끌어다 기운을 누르고, 철로 부어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호위하게 하였다(「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93쪽 ; 최영성, 『주해 사산비명』, 아세아문화사, 1987, 188쪽과 200쪽).
국가와의 관계가 전혀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암사를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 시기 지방사회의 역동성과 민중들의 힘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선종 승려를 둘러싼 토대와 상부구조의 힘 겨루기에서 토대 쪽의 힘이 상부구조의 암묵적 양해를 획득할 수 있을 만큼 맞설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원조성의 물적 기반은 현존하는 유물과 유적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즉 선종사원의 조성시, 당대에 유행했던 쇠부처의 주조에 드는 쇠와 쇠장이(鐵匠)의 마련, 절의 조성에 소요되는 경제력, 건축·조각·미술 등의 기술 및 예술의 지원, 노동력의 투입, 대토지 소유의 확보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었다.
이러한 물적 토대 위에서 민중들의 지지가 가능했으며, 그 배경에는 지방문화의 여러 부문에 걸친 성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즉 쇠부처의 주조로 알 수 있는 자유로운 사철(私鐵)의 개발과 제조, 전근대사회의 종합문화를 자체적으로 구현한 선종사원의 공개적인 조성지원에서 나타나는 지방문화의 성장, 중앙의 통제와 압력을 괘념치 않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민중 속에서 사상·경제·기술·산업·예술이 고루 성장했던 것을 뜻하며, 중앙권력이 하대의 정쟁을 거치면서 사실상 경주 일원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힘의 약세를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볼 때 바로 뒤이은 농민전쟁의 발발은 민중들이 확보한 힘에 무력적 측면만을 더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상의 사실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들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9산선문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적인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 이외의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그 기반을 세웠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3) 선사상의 본질

 

선은 자체적으로 논리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논리체계를 사상이라고 규정한다면, 이 점에서 선에는 사상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억지로 틀을 잡으려 할 경우, 주관적인 무논리의 논리를 선사상이라고 굳이 규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름대로의 방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잘 알려져 있는 4구표방이다. 4구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견성성불은 중국 양대에 편집한 『열반경』의 주석서에 보이며, 중생이 지닌 불성에 눈뜨는 사고방식을 논한 것이다.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라는 직지인심이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의 의미도 두 구절과 같으며, 불립문자가 강화된 것이 교외별전이라 할 수 있다. 사상의 연원이야 보다 앞당겨지겠지만 『조정사원』(1098년)에서 교외별전이 처음 등장하였다.
나말려초의 선종이 지향한 방향성은 불립문자의 시기에 속하는 셈이다. 불립문자는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라는 중국화된 선의 경구(警句)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자칫 문제의 소지가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다. 교종을 적대시하거나 교종과 대결할 수 있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실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외별전의 시기가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불립문자 시기에는 교종에 대한 비판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며, 이것은 이 시기의 선종이 논리기반이 허약해 어쩔 수 없이 교종에 근거해야 했던 데서 연유한다. 이 때문에 고려 중기의 화엄승 의천과 선승 지눌이 천명한 논리 뒤에 숨어 있던, 상대를 상대로서 의식하는 것과 같은 언급은 이때의 선사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불교현실도 이미 보아온 것처럼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보호 속에 초기 선종의 싹을 키웠다.
세기의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내 뒤따른 농민전쟁과 후삼국 쟁패로 인해 그 이상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선문 가운데 최대규모를 자랑한 성주산문의 개창조 무염은 선종과 교종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사정없이 일축시킨다.
누군가는 선이 교와 같은 점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가르침을 보지 못했다. 근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야 너무나 많지만,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다. 대략 나의 뜻을 밝힌다면, 같다는 주장도 허여할 수 없고, 다르다는 주장도 그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럴 겨를이 있거들랑) 좌선하여 번뇌의 기미를 그치게 하는 것이 승려의 차림이다(「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한국금석전문』, 221쪽).
불립문자의 다른 표현인 본리문자(本離文字)를 쓴 법경경유에게서도 후대의 교외별전 시기에서야 가능했던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경유도 무염과 같은 정신세계를 말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종의 문은 본디 글월을 떠나(本離文字) 매양 마음자리를 생각하여 끝내 속세의 번뇌를 터는 것인데도, 치우친 견해로 의심하여 도리를 얻으려 헤매인다(「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 앞의 책, 330쪽).
이제 선종의 방향성에 대한 해석과 오류의 검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선종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겠다. 선종의 사회적·논리적 성격은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들 상호관계의 규명에서 선종의 본질이 찾아진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먼저 사회적 성격으로는 평자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노동관의 도입, 종교실천성의 회복, 개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성향, 직관강조의 접근 가능한 단순성 등이 선종의 특성으로 대개 표현된다. 이전의 교종단계와는 다르거나 진보된 모습을 선종이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무염의 일상에서 잘 드러난다.
도반(道伴)들을 반드시 선사라고 불렀고, 손님들을 대접할 때 준비에 따라 공경을 다르게 한 적이 없었으므로, 방안에 가득한 자비에 뭇 무리들이 모시기를 즐거워했다. 닷새 동안 기간을 두어 도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질의하게 했다. 제자들에게 일깨우기를, “마음이 비록 이 몸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몸도 마음의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이요, 너희들이 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거니와 도가 어찌 너희들을 멀리하리요. 가령 시골뜨기라도 세상의 얽매임을 털어 벗어날 수 있느니라. 내가 달리면 마음도 치달리는 것이니 도사(道師)나 교부(敎父)되는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 것이 나의 목마름을 풀어줄 수 없고, 저 사람이 삼킨 것이 나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없으니, 어찌 스스로 먹고 마시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장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자신을 낮추는 일을 기본으로 삼아, 먹을 때에는 식량을 달리하지 아니하고, 의복은 반드시 균등하게 입었고, 무릇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에도 뭇사람보다 먼저 일했다. 매양 말씀하시기를, “조사들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밟아 다진 일이 있거늘 내가 어찌 잠시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겠는가?”라 했다. 심지어 물을 긷는 일과 땔감을 지는 일까지도 몸소 하셨다(「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앞의 책, 221쪽).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속(聖俗)을 통일시킨 인식지평의 확대, 신앙공동체의 자급자족적 노동관의 전개, 신앙공동체 내부의 계급평등성을 지향하는 진보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선종의 사회적 성격의 진보성은 논리적인 면에서의 주관적인 무논리의 논리체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체계는 원시불교 이래 반야(지혜)와 선정 사이의 갈등과, 대승불교 논리 속의 반야와 신앙 사이의 상호환원되는 기준의 모호함과, 인도와 중국의 사회구조의 이질성이 빚는 성속체제의 마찰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한 결과이다. 물론 이것은 선승 개개인의 주관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떠맡긴 논리체계이다. 객관적 논리체계로써 설명과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선종의 이러한 주관적 무논리의 체계가 대안(代案)으로서 제시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와 같은 선종의 주관적 이해가 전제된 사회적 성격의 진보성은 이를 맞이한 여러 신분집단들에게 각각의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야말로 화엄의 객관적 논리체계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존재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현상적으로는 화엄과 선이 객관과 주관의 정반대되는 대극점에 위치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출발한 원점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앞과 뒤가 사실상 같은 뫼비우스의 띠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다소 진보적인 색채를 지니긴 했으나 선종은 분명히 신라 말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했던 선종은 수용한 지 불과 50여 년 만에 사상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거의 혁명적이라고 일컬어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거꾸로 말하여 선종의 수요가 혁명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곧, 고대질서의 유제가 강제하여 봉건질서의 재편성을 준비하도록 유인한 이 시기의 역동적 상황이 이전까지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유세계로는 도저히 설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관적이고 무논리적인 해석을 제시한 선종의 대안을 사회 모든 세력이 두 손을 들어 반기지 않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봉건사회 지배이데올로기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4) 농민전쟁기의 선종

 

나말려초의 격동하는 사회변화에 따라 산문의 사회적 관계도 변화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신라 멸망의 주요한 계기가 된 농민전쟁기(886∼900년)의 선종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겠다.
진성왕대의 농민전쟁은 정강왕이 즉위한 해(886년)부터 일어난 농민봉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정강대왕께서 불교를 흠모하고 숭앙함이 이전 임금보다 아래가 아니어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제자될 뜻을 멀리서나마 사뢰었다. 이때 시대의 운이 상사(喪事)와 화란(禍亂)에 해당한 어려운 때에 속했다. 국가의 위험이 쌓을 수 없는 달걀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로워, 문득 곳곳마다 병란이 일어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절문까지 이르렀다(「흥령사 징효대사 보인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159쪽).
농민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공부(貢賦)를 조달받지 못하자, 국가재정이 고갈된 정부가 조세납부를 독촉함으로 말미암아 농민봉기가 전국화한 것이 진성왕 3년(889)에 폭발한 농민전쟁이었던 것이다.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진성왕이 국사로 봉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전쟁기의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세상이 온통 오랫동안 혼탁해졌습니다. 반딧불로 기나긴 밤의 어두움을 걷어낼 수 없고, 아교로 황하의 거센 탁류를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마다 악의 길이오니, 사실 삶의 행로 자체가 싫어집니다(앞의 책, 161쪽).
절중(826∼900년)이 반딧불과 아교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음을 편지를 띄워 답을 한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농민전쟁 이후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와 한반도 주도권 쟁탈이 시작되기까지, 선사들은 절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전쟁 이전에 다양한 신분집단과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했던 선사들이 886년 이후에는 농민군의 약탈과 위협에 시달린 것이다.
이 시기에 선사들과 농민군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잘 나타난 것이 앞에서 본 절중의 새김글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진성왕 2년(888)에 절중은 영월에서 공주를 거쳐 진례군(금산) 경계를 지나다 농민군에 의해 길이 막힌 일이 있었다. 그 뒤 896년 이전 어느 때인가 농민군이 충돌하는 곳이라 하여, 당시까지 머무르던 무주 분령군(숭주 안락면) 동림사에서 배를 타고 당성군(경기 남양)을 거쳐 수진(강화) 은강선원에 머무르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유골과 사리는 그를 상징했던 사자산 흥령선원이 이미 891년에 병화(兵火)로 불탔으므로 동림사로 안장하게 되었다.
흥령선원에서 남하한 목적은 삶을 정리할 겸 전남 화순 쌍봉사에 있는 스승 철감 도윤의 탑비에 참례하는 데 있었다. 무주 동림사를 떠날 때는 중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풍랑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시대상황을 고려한 면이 있다고 보아야겠지만, 절중도 지배계급과 밀착한 선사는 아니었다. 헌강왕과 정강왕의 예우를 받았으나 대면한 적은 없었으며, 진성왕의 예우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당시의 비교적 양심있는 지성에 속하던 절중도, 체제에 대한 농민의 분노가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상태로 치달은 농민전쟁기에는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껴 타의에 의한 유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족세력과의 관계로 잘 알려진 사굴산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미주 54]. 범일의 임종을 지킨 낭원개청과 낭공행적은 굴산사에 머무르는 동안 농민군의 침탈을 여러 번 받았다]. 이밖에 다른 산문의 경우에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세기의 막바지인 900년까지 그 예가 나타난다. 이는 900년대 초 후삼국이 정립되고서야 적고적(赤袴賊)·초적(草賊)·구적(寇賊)·산융(山戎)·야구(野寇)·구융(寇戎)·초구(草寇) 등으로 불린 농민군이 해체되거나, 일부 농민군의 지도부가 호족으로 변신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후삼국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즉,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 의탁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3. 유학(도교)·미륵신앙·풍수지리설

 

(1) 관료의 등용

 

신라 하대에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거나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군인·승려·문인의 길이 열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삼국통합전쟁이나 하대 초의 정쟁기간 동안 전공에 의한 초탁(招擢, 규정을 뛰어넘어 등용하는 것)의 예가 드물게 보이며, 우징을 도와 신무왕으로 즉위케 한 장보고(弓福)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승려의 길은 일반민 출신의 선사들이 국사나 왕사가 된 것에서 확인되었다. 문인의 경우 어려웠을 터이나 가능성의 길은 열려 있었다.
국가의 행정에 필요한 각급 실무자들과 상층지배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문인들의 필요는 개인의 신분상승과 유지를 바라는 욕구와 서로 맞물려 있었다. 이와 직접 관련된 것이 국학(國學)과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와 당 유학제도였다.
증감의 예외를 둔 9년의 수학연한을 기준으로, 관위가 없는(無位) 자로부터 대사위(大舍位-12위)에 있는 자까지 입학할 수 있었던 국학에서는, 15세에서 30세까지의 학생을 받아들였다. 『논어』·『효경』을 기초과목으로 하고, 『예기』·『주역』, 『춘추』·『모시』, 『서경』·『문선』의 세 과목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과거제도의 시원적 형태인 독서삼품과는 『춘추』·『예기』·『문선』을 기초과목으로, 『논어』·『효경』, 『곡례』·『논어』·『효경』, 『곡례』·『효경』 세 과목을 독서능력에 따라 상중하 3품으로 나누되, 만일 5경과 3사와 제자백가를 겸비한 이가 있으면 초탁하였다.
그런데 국학의 실제적인 기능, 국학 학생의 신분, 독서삼품과의 초탁조항은 좀더 검토해야 할 부분에 속한다. 국학에 대한 앞의 법규는 국학을 규정하는 원칙만 실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국학관계 기사에 따르면, 관료 지망생의 교육 이외에도 왕의 임시 독서당 역할을 했고, 과목 또한 유학 이외에 천문·의학·산학·율령 등 여러 분야(諸業)가 있었다.
수학연한 증감에 관한 예외조항 설정과 마찬가지로 조기입학의 예도 엿보이고, 독서삼품과의 초탁조항에 있는 유학 외에 3사와 제자백가의 과목을 특별히 가르쳤을 것이며, 원칙적으로는 신분제한의 규정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골품제의 운용면에서 유학의 능력을 통해 관료진출을 꾀하려 했던 6두품들에게 국학은 하나의 지름길이었으며 5두품들 역시 그러했다. 일반민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관료들의 진출에서 지방과 서울, 궁 밖과 안, 하급기관과 상급기관, 기관의 하부조직과 상부조직의 구성은 신분편차에 따른 차등기용이 관철되었다. 문제는 봉건사회의 신분제에 따른 차별논리가 적용되어 하부조직의 구성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왕실의 허드렛일에 복무했던 이들에 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일반민들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관직으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직관 중에 나오는 자료로 남녀와 상하를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해당부서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학에서 관료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일반민들이 학문을 배웠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출가 전 경주와 지방에 거주했던 선사들의 수학관계에서도 유추된다. 대체로 국학이나 지방학교에 대략 10여 세 앞뒤로 입학하여, 독서삼품과의 특례조항이라 할 수 있는 초탁을 목표로 삼아, 유학과 3사와 제자백가(5교 9류)를 수학한 것으로 정리된다.
조기입학은 여러 신분집단 중 우수한 인재의 발탁이나 진골 후예의 빠른 관직입문과 승진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보이며, 신분제한의 철폐란 원칙도 현실적으로는 허용이 제한과 마찬가지인 봉건사회의 일반적인 여건 아래 내려진 조치였을 것이다. 예컨대 초탁의 경우도 말만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많은 승려 가운데서도 국사와 왕사나 이에 비견할 고도의 지적 능력자들이 선사비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이 출가를 결심한 배경에는 초탁의 어려움보다 초탁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범용한 학생들은 신분에 따라 독서삼품과나 각종 전문분야로 진출해 안정된 신분유지나 수평이동을 꾀했을 터이지만, 경주의 국학학생이나 9주 5소경의 지방학교 학생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의 생애 지상목표는 독서삼품과의 초탁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골품제의 해체와 관료제로의 이행

 

당 유학은 또 하나의 길이었다. 유학의 시초는 신라의 진골자제를 당의 인질로 간주되는 숙위(宿衛) 학생으로 국자감에 입학시키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6두품을 주로 하여 이하 신분집단의 자제들이 당으로 갔다. 9세기에 들어와 유학열을 한층 자극한 것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당의 빈공과(賓貢科) 제도였다. 대부분 관비유학생이었지만 사비유학생으로 짐작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귀국하여 임시로 지방수령과 같은 외직이나 당의 교섭사절로 파견되기도 했으나, 보통은 근시(近侍)기구인 중사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문한(文翰)기구인 서서원과 숭문대의 학사로서 재직했다. 국학출신보다 대우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나 신분이라는 굴레에 막혀 명예직에 가까운 학사로서 머물렀으며, 주요 행정직으로의 참여는 거의 봉쇄되었다.
그런데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이 최치원*34의 직함이다.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지은이로 파악되는 최치원은 894년 무렵 장군의 직함을 받았다. “당에 입조하여 하례를 받들고 천자의 수레를 따라 동쪽 서울까지 모신 검교우위장군이자 사궁대 △△△△”(入朝奉賀 △駕遷幸東都使 檢校右衛將軍 司宮臺 △△△△)에서 검교우위장군이 그러하다. 장군은 진골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직위였으며 최치원은 6두품으로 알려져왔다. 6두품이 장군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이 시기에 와서 골품체제가 해체되고 관료제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검교직은 관료제의 운영체계에서 비롯되는 직위였다. 해당 관직의 정원 외에 인원이 늘 경우 주는 임시직이었다.
이를 보강하는 자료로는 최치원이 받은 자금어대가 있다. 종래에는 이를 중국에서 받은 것으로 생각했으나, 최치원의 직함을 시기순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의 조정에서 받은 것이 확실해진다. 앞에는 중국에서의 활동이, 뒤에는 신라에서의 활동이 뚜렷이 나열되어 있다.
전서국 도통순관(前西國都統巡官)/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
회남입본국 송국신조서등사 전동면도통순관
(淮南入本國送國信詔書等使前東面都統巡官)/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
입조하정 겸 영봉황화등사(入朝賀正兼迎奉皇花等使)/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서서원학사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賜紫金魚垈臣崔致遠).
입조봉하 (수)가천행동도사(入朝奉賀(隨)駕遷幸東都使)/
검교우위장군 사궁대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檢校右衛將軍司宮臺賜紫金魚垈臣崔致遠).
어대는 반드시 공복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라의 공복제도는 자(紫)·비(緋)·청(靑)·황(黃)으로 이루어져, 자색은 제1등급인 이벌찬에서 제5등급인 대아찬까지의 진골이 입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승무랑 시절인 헌강왕 11년부터 진골 신분의 처우를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최치원전과 함께 각 시기별 새김글에 나타나는 관직의 변화를 정리하면, 승무랑(885년)-조청대부(892년)-아찬(894년)-장군(894∼98년)으로 이어지는 관계(官階)·관등·관직의 상승흐름을 타다가 면직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강왕 무렵에는 이전의 신라 지배계급의 조직원리인 골품제가 와해되어 관료제와 뒤섞여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대제(魚袋制) 연구에 의해서도 이는 뒷받침된다. 9품 관계체제를 전제로 경문왕 13년(873) 이후 헌강왕 10년(884)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대제는 관직과 관계의 불일치를 조정해주는 넓은 의미에서의 행수제(行守制) 기능을 하였다[미주 74]. 이러한 고찰은 앞서의 검토를 설득력있게 받쳐주는 것이다.
따라서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비록 산직이지만 진골만이 앉을 수 있던 장군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신라 하대에 와서 더욱 비중있는 압력을 가한 하부지배계급의 상승과 상부지배계급의 상층권력 독과점이 갈등을 빚으면서 계급제도의 발전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신라 말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논의에서 골품제를 폐기하고 관료제도의 운용 쪽으로 조직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국학 교육은 범용한 이들의 영역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게 되었다. 나아가 회유와 견제의 양날을 지닌 당 유학 및 독서삼품과 초탁조항의 실시는 고대적 신분유제의 강제에 의해 좌절을 맛보면서도, 미약하나마 진정한 관료제도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3) 학문의 경향

 

배움의 길은 원칙적이고 부분적이나마 열어놓고, 관료의 길은 이전 신분에 의해 억제되었음을 알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배계급의 문화에 젖은 이들에게 불유도(佛儒道) 삼교의 융합 경향과 함께, 은일(隱逸)의 풍조와 시가중시의 사장(詞章)적 흐름이 강조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은일한 이들은 현학의 세례를 받은 『노자』·『장자』·『주역』이나 불경들을 읽으면서, 술에 취해 비파를 타고 시를 읊조리며, 사회모순에 대한 자조를 일삼고 신선을 꿈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좌절한 입신양명이라는 꿈의 성취를 영민한 자제들을 통해 보상받고 싶은 심리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양면성으로 보아 이들은 기존의 모순구조를 깨뜨릴 혁명적 계급집단으로 전화하기 어려운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 집단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으며,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국학과 지방학교의 운영이 충효이념에 물든 무리들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장의 유행은 상층지배집단에서 나타났다. 상층지배집단은 현실개혁에 대해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편, 그 이면에서는 개혁정치의 구상과 실천은 아랑곳없이 시가의 구상에 몰두하는 사장의 풍조에 젖어 있었다.
문성왕은 혜철에게서 봉사(封事)로 올린 약간 조항의 글을 받았고, 헌안왕은 856년 무염에게 좋은 말을 듣기를 요청했다. 무염은 『예기』 단궁 하편에 나오는 주풍이 노나라 애공에게 말한, “임금이 예의와 충신과 성실함이 있어야 백성이 믿고 따른다”는 내용을 좌우명으로 삼도록 답장했다. 헌강왕도 878년에 나라 안에서 진언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흥리제해책(興利除害策)을 바치도록 한 일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현실정치와 사회구조에 대한 민심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변죽만 울린 것이었다. 사실 문성왕 이후의 왕들은 하대 초의 정쟁을 의식하여 기득권자들의 특권 일부마저 같은 지배계급 안에서 재분배하기 어려웠다. 경세치민의 경학을 숭상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과 관료들은 음주가무하는 무대를 꾸며 시가를 읊조리고 민심을 한탄하는 사장학으로 빠져드는 문약함을 드러냈고, 저자거리에는 세태를 반영하는 참요가 절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에 의하면, 경문왕은 글을 짓기를 좋아했고, 헌강왕은 미리 생각한 것처럼 짝맞춘글투(4·6 騈儷體)*35로 시문을 곧잘 지었다고 한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도 두 왕이 도헌과 주고받은 편지나 대화가 짝맞춘글투로 남아 있다.
경문왕은 이찬 윤흥을 시켜 거문고의 맥을 잇게 한 일이 있다. 헌강왕은 왕 7년(881) 무염을 송별할 때 임해전에서 함께한 신하들에게 가사와 시를 짓게 하였고, 왕 9년(883)에는 삼랑사로 거둥하여 시 한 수씩을 짓게 했다. 경명왕은 923년에 진경심희의 죽음을 기리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를 지었다.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포석정에서 놀다 원치 않았던 죽음을 맞이한 경애왕도 925년을 앞뒤하여 지은 시가 한 수 남아 있다. 다음은 그가 낭원개청을 국사로 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청을 흠모하여 지은 시이다.
개울 남쪽에서 선정에 드니
복덕, 지혜의 샘 길이 흐르고
산 밖으로 나투심에
맑고 서늘한 달빛 보듯 우러르노라
川南止觀
長流福慧之泉
嶺外言歸
仰見淸凉之月
―『한국금석전문』, 305∼306쪽.
왕실의 사장중시 경향은 왕실에 봉사하던 관료들의 시문집을 성행시켜 적지 않은 시문이 지어졌다. 최승우의 『호본집』 등의 이름이 전해오고, 최치원의 『계원필경』이 온전히 남아 있다. 이밖에도 『동문선』과 『천재가구』 등에 시문이 단편적으로 실려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최로 불린 최치원·최인곤·최승우와, 그리고 김운경·김악·박인범·김가기·최광유·왕거인 등을 들 수 있다. 시(詩)에는 박인범, 예(禮)에는 김악, 문(文)에는 최승우와 최인곤이 특히 알려졌다. 이들은 대부분 당 유학생 출신으로 그곳에서 유행한 짝맞춘글투의 문장을 구사하였고, 절구·율시·고시·각종 비문 등을 남겼다. 대야주(합천)에 은거하던 왕거인은 진성왕 2년(888)에 무고로 수감을 당하자 감옥의 벽에 원통함을 읊은 시(憤怨詩)를 남겨 유명하다.
우공의 통곡으로 세 해 내내 가물었고
추연의 슬픔으로 5월에 서리 왔네
이제 나의 수심 예와 비슷하건만
하늘아, 말없이 푸르기만 하구나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삼국사기』 신라본기 11, 진성왕.
왕거인이 애소한 지배계급의 무능력과 무정견에 대해 이 시기의 민중들이 대응했던 시가가 참요이다. 헌강왕 5년(879)에 「지혜로써 다스릴 이들은 거의 도망하여 나라가 부서지리라」(智理多逃都破都破)는 참요가 지어졌고, 진성왕 2년(888)에는 「나무망국 다라니」(南無亡國陀羅尼)가 나돌았다. 둘 다 외우고 부르기 쉽게 불교의 다라니*36 투를 빌린 것이었다.
나무망국 찰리나제
판니 판니 소판니
우, 우, 삼아찬
부∼이 사바하
南無亡國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삼국유사』 2, 기이 2, 진성여왕·거타지.
일연은 다라니 중에서 찰리나제는 진성왕을, 소판과 아찬은 썩어빠진 벼슬아치를, 부이는 진성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을 가리킨다고 설명하였다.
요약하면, 신라말의 학문경향은 불유도 삼교융합의 경향과 은일풍조와 시가중시의 사장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지식인들은 자신과 후예의 신분상승을 지향하는 경학이 중심이었으나, 왕실을 둘러싼 상층지배계급은 문약한 기풍을 조장하는 사장학에 탐닉했음을 알 수 있다.

(4) 미륵신앙

 

불교는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앙의 대상을 중심으로 아미타·관음·지장·미륵신앙이 있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믿는 신앙보다 더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아미타불과 미륵불을 믿는 신앙이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공존하거나 우열을 보였지만, 이 두 부처를 믿는 종교행위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신앙성격의 변화가 나타났다. 신라 중대에 보이는 아미타신앙의 열기가 미륵신앙을 압도하였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와 달리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약 150여 년간은 아미타신앙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미륵신앙이 신앙세계의 주도적 위치로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리바뀜은 신라 하대 이래의 역동적인 사회변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전의 미륵신앙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신앙의 성격에 일정한 변화가 보이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으로부터 인류가 멀어져 갈 때 다음 불타가 출현할 것이라는 예언은 거의 모든 경전들에 씌어 있다. 그 미래의 불타가 바로 미륵(彌勒, maitreya)이며, ‘사랑’, ‘평화’, ‘맹약’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이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미래불은 일찍이 석가모니불의 가장 우수한 제자로서 실재했던 인물이고, 현재 도솔천(兜率天, tusita-eva)이라는 하늘에서 신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장래 땅에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믿어지는 부처이다.
주요 미륵경전인 미륵삼부경은 『불설 미륵보살 상생도솔천경』, 『불설 미륵 하생성불경』, 『불설 미륵 대성불경』이다. 성립시기와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상호간에 일관성있게 맥락이 연결된다. 도솔천을 생각하며 계율을 지키고, 열 가지 착한 도리를 닦으면서 한 찰나만이라도 미륵의 이름을 염불한다면 나고 죽는 죄로부터 벗어나며, 도솔천에 왕생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미래에 미륵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 3회 설법을 직접 듣고 위 없는 깨달음의 도리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미륵삼부경은 원효와 경흥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에도 전해졌다.
나말려초의 미륵신앙을 거론할 때,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한 일과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일을 즉각 떠올릴 만큼 잘 알려져 있는 반면에, 갖가지 해석이 나올 정도로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새김글에 나타난 미륵신앙 사례를 주의깊게 살피면 후삼국기를 앞뒤한 시기의 일정한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검토하면, 미륵신앙에 관한 논의를 했던 이들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이었으며, 내용에서는 미륵신앙 가운데서도 하생신앙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사들이 관련되었던 산들을 마하가섭*37이 입적한 계족산과 동일시하였다. 이는 과거에 나타난 석가모니불과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의 중개자로서 특별한 사명을 띤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중개자로서 선사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설정했던 것이다. 또한 계족산 신앙을 밑바탕으로 하여 풍수지리설·진신신앙·화신신앙 등 대승불교 설화에 자주 나타나는 여러 불교신앙들이 함께 배어 있었다.
이제 이러한 현상에서 드러난 여러 특징들의 상호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나말려초 미륵신앙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규명하기로 하겠다.
첫째, 나말려초의 미륵신앙은 이에 관한 논의를 하는 이들이 왕실의 문신관료들로서 신앙면에서는 하생신앙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나말려초라는 급격한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자, 왕실을 중심으로 한 문신관료들의 서술이 자신들의 시대를 이상화하는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서 단의장 옹주가 지증도헌을 미래불로서 세상에 오신 분이라고 일컬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함통 5년(864) 겨울에 미망인인 단의장 옹주(端儀長翁主)가 미래의 부처님(當來佛)께서 오셨다고 귀의하였다. 경건하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 오신(下生) 분에게 공양을 올려 두텁게 힘입고자 합니다”고 하였다(「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92쪽).
미륵불의 하생과 중생구제가 이루어진 청정국토에서 옹주가 산다는 광신적 종교열망과 비현실적 사회관을 드러낸 것은, 급변하는 사회정세에 발맞추지 못하는 지배계급 상층부의 자기 방어기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층지배집단의 성향은 신앙지역의 분포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둘째, 이 시기의 미륵신앙은 지역적으로 경남 산청·경북 경주·충남 보령·전북 익산·경북 봉화·전남 강진·경남 창원·황해 해주·전남 광양으로 나타나, 경주의 왕성을 포함한 전국적 분포상을 보였다. 왕명에 따라 문신관료들이 선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글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매우 간접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왕이나 문신관료는 신도의 한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선사들을 직접 기린 것은 부도탑이 있는 지역의 승려와 신도들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미륵의 용화세계가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기원하면서 선사의 부도탑을 신성지역으로 가꾸고 예배한 무리들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문신관료들의 서술이 자신들의 시대를 이상화하는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의 신도들 역시 자기 지역 내지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신앙행위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는 그 대표적 사례이다.
두 해 뒤에 제자들이 감실을 열어보니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울부짖으며 유해를 받들어 백계산의 동쪽에 있는 운암산(雲巖崗)에 탑을 세우니, 돌아가신 스승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그곳은 안개 서린 산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구름 비춘 시내가 거울처럼 맑아, 진실로 경사가 쌓여 있는 신령한 구석이요 돌아가신 이를 위한 비밀한 집이라 하겠다. 그분이 계족산에서 돌아가신 가섭과 같다면, 미륵불이 오시기를 기다려 말과 수레로써 연이어 맞이할 사람들이 우리가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 『해동금석문 보유』 1권, 32쪽).
계족산의 석실에서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는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통진경보는 운암산의 부도탑에서 미륵불을 기다리고, 김정언 등은 미륵이 하생하여 제도하는 96억(億)의 제자 중 하나가 되리라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왕실에 종사하는 김정언의 이런 바람과 해당지역 신도의 바람이 달랐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도탑을 중심으로 미륵의 이상세계를 기원하는 행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지배층의 합목적적인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 이상이 합일된 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바람이 동일한 욕구와 방향을 지향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들 승려나 신도는 교단의 일원이었지만, 동시에 사회 여러 집단의 상이한 성원이었기 때문이다. 나말려초라는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동에 따라 상이한 사회집단이나 계급은 각기 다른 영향을 받고 다른 욕구를 갖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급박한 현실일수록 이상향에 대한 갈구가 증대되며, 이상향에 대한 욕구는 지배계급보다는 피지배계급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갖게 된다. 피지배계급은 기존질서에 대치되는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지만,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이익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선에서 이를 수용함으로써 개혁을 표방하는 데 그치기 십상이다.
앞에서 본 단의장 옹주의 예는 지배계급의 성원들이 개인구원적 신앙형태로 미륵하생신앙을 사려깊게 수용하였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곧 이것은 현실에 대한 불안한 인식이 미륵의 용화세계를 맞는 전단계로서 말법시대라는 의식과 연결되어, 당시의 민중들에게 사회구원적 신앙으로 변모하였음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나말려초의 미륵신앙은 신라 중대와 달리 동반한 신앙이 일관성을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계족산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풍수지리설·진신신앙·화신신앙 등 대승불교 설화에 자주 나타나는 여러 불교신앙들이 함께 배어 있다. 물론 미륵신앙에 동반된 신앙들에 전혀 차별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륵하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계족산 신앙이 역시 중요하다. 『미륵성불경』과 『미륵하생경』 이외에도 많은 대승경전이 미륵의 하생을 다루고 있지만, 미륵신앙류만큼 직접적인 것은 선종의 계보에 대한 기록들이다.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여기에서는 신라 하대의 선승들이 실린 『조당집』 가운데 일부분만을 소개하기로 하겠다.
45년 동안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시고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나에게 맡기셨는데,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늙었다.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 옷을 가지고 계족산에 들어가서 미륵불께서 태어나시기를 기다리겠다. 그대는 부처님의 분부를 잘 받들어 바른 법을 퍼뜨려서 끊이지 않게 하라” 하였다(『한글대장경 조당집』 1, 동국역경원, 1986, 47쪽).
불교의 수행승들은 성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고, 일단 거기까지 도달하면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하가섭도 아라한인 이상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미륵불이 출현하는 시기까지 기다리라는 특별한 사명 때문에 계족산에서 입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불교의 2대종사로 추앙된 마하가섭은 선종승들에게는 중국선종의 1조인 달마조사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나말려초의 선사들과 관련된 산들을 마하가섭이 입적한 계족산과 동일시한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과거에 나타난 석가모니불과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의 중개자로서 특별한 사명을 띤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중개자로서 선사들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설정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이다.
스님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올해로 법을 맺은 인연이 마땅히 다하리니 반드시 저 세상에 갈 것이다. 나와 대왕은 옛날부터 맺은 인연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서로 만나 모름지기 직접 인사를 나누고 마음에 기약한 것을 덧붙일까 하노라” 하였다. 곧 행장을 끌고 길을 돌아 서울에 이르렀다. 이때에 임금은 용의 깃발을 휘날리며 잠시 마진(馬津)에서 죄를 묻고 있었다. 스님은 병이 심해 몸이 허약하고 파리해져 임금이 계신 곳에 혼자서 마음껏 나아갈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남기기를, “가섭이 열반하여 미륵님의 하생을 기다리는 계족산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합니다. 어찌 오직 옛날 천축에서 가섭이 아자세왕의 섭섭함 속에 이별하고, 일찍이 중국에서 노자가 함곡관 수문장의 탄식 속에 하직하듯 해야만 하겠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어깨로 멘 수레를 타고 오룡산(五龍山)에 이르자 턱짓으로 제자들을 모아 말하기를, “부처님의 엄한 가르침이 있으니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하였다(「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128쪽).
장소와 인물만 바뀌었을 뿐, 마하가섭의 입멸에 따른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찍어낸 듯했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과 고려의 수도 개경, 왕사성의 문지기와 왕건과 관계있던 개경의 사람들, 아자세왕의 낮잠과 왕건의 토벌로 인한 상봉의 불발, 계족산의 두타제일 마하가섭과 오룡산의 병약한 진철리엄이 똑같이 연출된 것이다.
미륵신앙에 동반된 신앙이 다양했다는 점은 그만큼 다양한 시대성격을 선사들이 종교적인 면에서 적극 수용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 용화세계를 잇는 중개자로 선사들을 설정한 것은 중대 미륵신앙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미륵경에 입각한 법상종 계열이 아닌 선종 계열의 전등류(傳燈類)를 강조하여 하생신앙으로 일관시킨 선사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말려초의 미륵신앙은 선사를 중심으로 왕실지배집단과 지방민들을 같이 수용하는 양상을 연출했다. 선사들의 부도탑을 중심으로 미륵의 이상세계를 기원한 행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지배층의 합목적적인 의도와 민중의 구원론적 이상이 합일된 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5) 풍수지리설

 

풍수지리설은 음양론과 5행설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논리구조로 삼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이자, 길함을 좇고 흉함을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땅을 살피는 기술학이다. 우리나라의 풍수설은 산 자의 주거선정이나 취락입지의 방법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영면장소를 찾는 일까지 포함하는 점에서 독특하다. 지와 관련된 음택(陰宅)과, 주택 및 도읍과 관련된 양기(陽氣 또는 양택) 풍수로 나뉘며,항상 일정하기보다는 시대와 사회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며 기능을 다했다.
풍수적 사고의 기본관념은 고구려의 4신도나 왕릉의 위치에서도 엿보인다. 그러나 본격적인 풍수사상의 전래는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이후 당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해져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받아들인 계층은 경주 중심의 지배세력에 국한되었으며, 주로 왕자의 권위를 수식하기 위한 도읍의 지리적인 설명이나 왕자의 궁실과 능묘의 선정에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나온다. 원성왕의 죽음(因山)을 맞아 곡사(鵠寺)의 자리가 풍수지리설에 의해 좋은 땅으로 채택되자 절터가 왕의 무덤(幽宅)으로 바뀌고 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능묘란 아래로는 땅의 맥을 가리고 위로는 하늘의 뜻을 헤아리며, 반드시 묘지에다 사상(四象)을 포괄해 천만대의 후손에게 미칠 경사를 보존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이다.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만 하겠는가?(최영성 주해, 앞의 책, 252쪽)
국토재계획안의 성격을 띤 나말려초의 풍수지리설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 외 당시의 다른 신흥세력들은 자체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김암과 『고려사』 세계(世系)에 나오는 감관 팔원의 예로 미루어, 신라말에 이르면 이전과는 달리 풍수지리설의 내용과 보유계층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풍수지리설이 지방에 전파되고 경주 중심의 명승 개념이 변방지역까지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새로운 명승지와 비보사탑이 탄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경 봉암사의 지증도헌이 희양산 기슭에 봉암사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물줄기를 끌어들이고 철불상으로 기운을 눌렀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비보사탑의 사유가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승의 개념은 하대 초에 북종선을 도입하여 신행의 주검을 가매장한 주변의 지세를 설명한 데서도 보인다.
묻힌 곳은 낭떠러지가 만길이나 되게 높고 흐르는 물은 천심이나 깊으니, 헛된 이름에서 도망하여 귀를 씻을 만한 은거처요, 세상을 버리고 자취를 감출 만한 그윽한 쉼터이다. 선정의 샘이 깊고 맑아 깊이 햇빛 같은 지혜의 광명을 갈무리하고, 공의 숲(空林)이 아주 고요하므로 길이 선풍(禪風)의 메아리를 이끌 만한 곳이다. 북쪽으로 홀로 선 높은 산을 기대고 서쪽으로 삼장(三藏)의 먼 골짜기를 이웃하여 구름에 잠긴 달을 산머리에 걸고 보배를 못 깊숙이에서 건질 수 있으니, 어찌 다만 지리(地理)로서의 산만 높은 곳이겠는가? 다시 보면 신령스러운 신들이 사는 동굴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계족산의 석실에서 마하가섭이 부처의 옷을 지켜 미륵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는데, 어찌 이곳이 아니겠는가?(「단속사 신행선사비」, 『조선금석총람』 상, 115쪽)
구원의 미래불인 미륵불의 하강(下生)신앙과 관련시킨 점이 매우 주목을 끌며, 이러한 경향은 다른 선사비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또한 풍수지리설은 태장계(胎藏系) 밀교로부터 사상적인 영향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사상적 연원을 캐려 들면 들수록 쉽지 않은 것이 이것인데,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알려진 도선*38이 이전까지의 지리설을 집대성했다고 한다.
또한 선사들이 각자 인연 있는 곳에서 산문을 개창할 때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사원의 자리를 결정한 예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사굴산파의 2조 낭공행적이 신덕왕의 초청으로 경주 남산 실제사에서 머무르다가 시주인 명요부인의 요청에 따라 915년(신덕왕 4) 남산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그는 뛰어난 땅을 두루 찾다가 석남산사에 이르러 뛰어난 형세를 보고 마침내 삶을 끝마칠 장소로 삼았다. 이밖에도 진경심희의 봉림사, 사자산파 2조 징효절중의 흥령사, 실상산파 2조 수철화상의 심원사, 진감혜소의 쌍계사, 법경경유의 오룡사, 특히 지중도헌의 봉암사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이는 대중교화의 한 방편일 뿐 아니라, 땅의 형세가 수백 명의 대집단을 수용할 만큼 넓게 트인 곳이어야 하고, 도적들의 침입을 막기 편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에 풍수지리설이 부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절터뿐만 아니라 선사들의 부도터와 새김돌터 선정에도 풍수지리를 이용한 예가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수철화상·선각형미·대경려엄·법경경유의 예에서 나타난다.
풍수지리설과 비보사탑의 상관관계의 밑바탕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고의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산악신앙이었다. 전래 민속신앙·고유신앙·민중신앙·토속신앙 등으로도 불리는, 그러한 성격을 대표하는 신앙의 한 형태였다. 풍수와 비보는 산악신앙이라는 다리 하나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세 다리로 유지할 수 있는 솥(鼎)과 같이 균형감있는 설득논리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가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이다.
제자인 수인(粹忍)과 의광(義光)이 각각 지리산의 북쪽 들판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한 들판이자 ×××한 평원으로 빼어난 땅이라서 짝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곳의 이름을 나라에서 법운사(法雲寺)라 붙였으니,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 절경의 절을 따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십지경』(十地境)이라는 책을 지어 세 곳의 산(三山)을 누른 것은 그 감응에 응한 것이기도 하다.
××× ×××하구나! ×××한 배가 저절로 ×××한 칼과 ×××하게 다르지 않아, 기이하고 ×××한 △추로 ×××할 수 있었다.
먼저 첫단락의 내용은 『십지경』을 지어 3산을 누른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머무른 법운사가 있는 지리산을 언급하며, 3산을 누른다는 표현을 이끄는 데서 산악신앙과의 관련성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둘째 단락을 살펴보면, 풍수지리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비보사탑(裨補寺塔)의 사고가 담겨 있다.
산악신앙의 잔존 흔적은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경문왕 6년(866)에 원랑대통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스승인 낭혜무염을 승엄산 성주사에서 모시다가 다음해 여름 월악산 월광사(月光寺)로 이주했을 때의 일을 전한다.
다음해 봄에 그 산문을 나와 ×××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여름나절 꿈속에서 월악산 산신령이 나타나 그곳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또한 새벽녘에 사형인 자인선사가 편지를 보내와 권하기를, “월광사라는 절은 신과 같은 스님이던 도증(神僧 道證)이 창건한 곳일세. 과거 우리 태종대왕께서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가슴 아파하고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 우리 삼한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온 나라를 통일한 때에, 부처와 보살들의 가호에 힘입어 길이 삼계의 재앙을 물리치셨다고 하여 특별히 이 산을 봉해주었으니, 일찍이 『금강경』에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선기』(仙記)에도 그 이름이 전해오네. 맑고 시원한 개울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라든가 사방에 즐비하게 서린 빼어난 신령한 기운 속에 불전 또한 갖추어져 있으니, 자네는 그곳에 머무시게나” 하였다(「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85쪽).
이주를 권한 사형 자인선사의 편지는 월광사에 얽힌 중요한 사실들을 압축하고 있다. 월광사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신통력이 있던 도증이 창건한 곳으로 불전이 보관되어 있으며, 태종 무열왕이 삼국통합 이후에 부처와 보살들의 가호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월악산을 봉하였고, 『금강경』과 『선기』에도 이름이 전하는 훌륭한 풍수지리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는 것이다.
월악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4, 충주목과 청풍군조에 나온다. 특히 청풍군조에는, “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으로 불렀으며 작은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여, 신라 성립기 이래 작은 제사를 거행하던 명산대천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제사(小祀) 지역으로서의 월형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 32, 잡지 제사조에서도 확인된다. 산 이름이 바뀜으로써 고대의 산악신앙이 중세불교의 약사여래신앙으로 전화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이와 함께 산신령의 출현은 여전히 산악신앙이 강하게 잔존해 있음을 읽게 한다. 따라서 약사신앙과 산악신앙이 개울·안개, 신령한 기운과 같은 풍수지리의 주요요소와 잘 부합된 곳이 월광사라고 자인선사는 보았던 것이다.
풍수지리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비보사탑의 사고는 선승 수철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지증도헌의 예에서 잘 나타난다.
아직 확고한 지혜의 경지로 들어가지 못한 심충이란 사람이, 스님의 칼날 같은 선정과 지혜가 천지를 꿰뚫고 교화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며 일반 학술에도 정밀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뵙고 공경히 절을 올리고 나서 사뢰기를, “제자가 갖고 있는 부스러기 땅인 희양산 안쪽은 봉 같은 바위와 용 같은 골짜기로 차 있습니다. 놀랄 만한 경치인지라 스님께서 참선하실 절(禪宮)을 지었으면 합니다” 하니, “나는 아직 몸을 둘로 나눌 만한 능력은 없으니, 어찌 그럴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심충의 간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의 신령스러움이 갑옷을 입힌 말과 같이 앞으로 내달리는 기운이 있다’고 하므로, 이에 지팡이를 짚고 나뭇길을 밟으며 두루 산의 형세를 살폈다.
산이 울타리를 친 듯 사방으로 열을 지어 봉황이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듯하고, 물줄기가 사방을 둘러싸 이무기가 바위에 누운 듯했다. 매우 놀라서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은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도적굴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마침내 따르는 무리들에게 솔선수범하여 뒤를 막아 터를 닦고, 기와와 처마를 세우되 사방에서 물을 끌어다 기운을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호위하게 하였다(「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조선금석총람』 상, 93쪽).
천문지리에 통달한 지증도헌이 경북 문경 가은현에 희양산 봉암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희양산의 형세를 관찰한바, 산과 물의 흐름이 봉황과 이무기로 형상화되어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닦고 물줄기를 끌어들이되 철불상으로 호위하게 했다는 것이다. 곧 천문지리의 한 유형으로서 풍수지리설이, 불교적 풍수 대처수단으로 비보사탑설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야 여느 절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절을 세우는 명분과 그러한 명분을 수용하는 사회적 관념체계라는 지지기반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창건한 법운사에 대한 수철의 발언은 사원조성에 관한 정당성을 부여했음을 알게 한다. 결국 지리산은 칼과 ×××와 같은 배와 다르지 않아, 배를 정박하는 추(錘)의 역할을 하는 절의 창건만이 그러한 기운을 누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9산선문이 세워진 지방 먼 산골짜기까지 침투했던 지리설을 권력의 부침이 상존하는 나라의 중심지로 되돌린 것은 후삼국의 지배자들이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골격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무대를 차지한 후백제 견훤의 경우도 충분히 그러했으리라 상정된다. 궁예는 5행설에 의한 연호 수덕만세(水德萬歲)를 채택하고, 산천의 형세를 고려해 철원으로 도읍을 정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 뒤에 「훈요 10조」를 정하였고, 후삼국 쟁패기에는 충남 천안을 다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곳(五龍爭珠之處)이라고 선전하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새로이 일어난 큰 세력가와 지리업에 밝은 이들과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신라 말 지방사회에서 민중 깊숙이 침투했던 풍수지리설은 후삼국을 분수령으로 역전현상이 일어나 다시 지배자의 전유물로 전락하였다. 다시 말해, 신흥세력들이 자신의 근거지를 새 역사의 중심무대로 내세움으로써 세력형성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데 이용하였다면, 왕건의 「훈요 10조」는 그것이 권력의 정점으로 독점되어 극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