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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정신과 선비 학자들의 활동

by 윈도아인~♡ 2012. 3. 17.

조선시대의 선비 정신과 선비 학자들의 활동

 

16세기 선비들을 중심으로 -  申炳周 (서울대 규장각)

 


〈목 차〉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
Ⅲ. 16세기 다양한 선비 학자들의

   탄생 배경

Ⅳ. 3. 16세기 선비 학자들의

   사상과 활동
   1) 개방적인 선비 학자 徐敬德과
      李之菡
   2)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曺植과 李滉
   3) 호남의 선비학자,
      金麟厚
   4) 학문과 정치 감각을
      겸비한 선비 학자 李珥
V. 16세기 선비들의 교유관계
Ⅵ. 맺음말

 

연구논문 개요

 

[국문요약]

 

  朝鮮時代는 선비사회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큼 선비(士)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역이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官僚로서 활동하는가 하면 물러나서는 초야에 묻혀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학문이 지방사회에까지 뿌리를 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개 선비라면 답답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학자를 연상하지만 조선시대 선비의 실제의 삶은 다양하였다. 고집스레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온 몸을 걷어 부치고 나선 선비도 있었다. 출사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 재야에 은거하면서 현실 비판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을 임무로 삼은 선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淸廉과 所信, 義를 최우선의 德目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조선사회가 그나마 커다란 부정부패 없이 道德的, 精神的인 文化國家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선비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특히 일제시대와 해방 후 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體質的 限界와 現實妥協的인 處身은 전통시대 知識人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다.   특히 16세기에 접어들어 士禍가 연이어 발생하자 뜻이 있는 선비들은 出仕를 전념하고 지방에서 性理學을 연마하면서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본 학문으로 하였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性理學 이외에 道敎나 佛敎, 그리고 朝鮮後期에 이르러서는 天主敎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性理學 이외의 사상은 국가에서 公式으로 禁忌時 했지만 성리학의 체계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이들 사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선비들이 나타났다. 16세기를 살아간 선비 중에는 徐敬德과 曺植, 그리고 이들의 門人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다.   일부 선비들은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후 이황이나 이이 같은 선비 학자들은 官職에 진출하여 現實批判者의 임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직 생활을 통해 선비의 이상을 실천하였다. 또한 16세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연고지에 隱居한 선비들이 제자들의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朝鮮中期 이후 學派가 形成되는 基盤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선비들이 사회의 主導勢力으로 시대를 이끌어 나간 사회였고, 16세기 선비 사회의 典型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탄탄한 학문을 기반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후 선비사회의 모습은 學派를 母集團으로 하는 朋黨정치의 展開 함께 새로운 局面으로 접어들었다. 학문 탐구, 義理와 道德에 충실한 선비정신은 계승되었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입장보다는 이제 政派간 대립에서 우위를 접하려는 노력들이 부각되면서 치열한 朋黨政治가 전개되는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선비인 許穆, 宋時烈, 輪症 등이 黨派의 首長이 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西勢東漸의 기운이 조선을 압박하면서 전통적인 선비정신은 다시금 힘을 발휘한다. 선비정신의 맥은 衛正斥邪사상으로, 義兵抗爭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정신은 결국 開港과 近代라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묻혀 버렸고, 이들 선비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기능마저도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평가절하 되고 있다.

  經濟的, 物質的 價値가 무엇보다 우선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조선 시대 선비정신의 核心인 道德的, 精神的 價値와 義理精神은 여전히 유효하며, 선비정신의 發展的인 계승이 요청된다.

[주제어] 

선비, 선비정신, 道德, 義理, 淸白吏, 處士, 徐敬德, 曺植, 李滉, 李珥, 義兵, 朋黨政治, 衛正斥邪思想

 

Ⅰ. 머리말

 

조선시대는 선비사회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큼 선비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로서 활동하는가 하면 물러나서는 초야에 묻혀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학문이 지방사회에까지 뿌리를 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개 선비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학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실제 조선시대 선비의 삶은 매우 다양하였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온 몸을 걷어 부치고 나선 선비도 있었다. 출사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 재야에 은거하면서 현실 비판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을 임무로 삼은 선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과 청렴과 소신, 道德과 義理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조선사회가 그나마 커다란 부정부패 없이 도덕적, 정신적인 문화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선비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조선사회가 淸白吏에 대한 포상 작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인 贓吏의 자손에 대해서는 영구히 과거 응시를 금지시킨 것도1) 청렴과 소신을 바탕으로 한 선비사회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를 이끌어 간 선비들은 수없이 많다. 조선시대 학자, 관료들은 대부분 선비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선정 기준도 논자도 따라 다르다. 최근 선비들의 정신 문화에 대한 새로운 평가들이 시도되는 가운데, 조선시대 선비를 주제로 한 저서들도 상당수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책에 수록된 인물들이 저자의 기준에 따라 다양한 것이 주목된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의 선비들을 모아 1998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한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에서는2) 정도전, 조광조, 조식, 이황, 김인후, 서경덕, 기대승, 이이, 유성룡, 이수광, 최명길, 김상헌, 송시열, 허목, 유형원, 이익, 정약용, 최한기, 이건창, 황현, 최익현, 박은식, 신채호 등 23명의 선비를 서술하였고, 2002년 간행된 鄭玉子 교수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에서는3) 조광조, 이황, 조식, 이이, 김장생, 이항복, 김상헌, 허목,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송시열, 이의현, 이병연, 정선, 이익,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조희룡, 이항로, 최익현, 김윤식, 유인석, 민영익 등 25인의 선비를 다루었다. 2003년 간행된 정광호 교수의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에서는 김시습, 이장곤, 이준경, 조식, 정철, 노인, 이확, 허목, 윤증, 김만중, 김창협, 이인좌, 이광사, 정약용,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 16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4)

 

위에서 최근 간행된 책 중 선비를 주제로 한 책에 언급된 선비들을 소개해 보았는데, 조선시대의 유명 학자, 관료는 거의 망라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실학자가 다수 언급된 저술이 있는가 하면, 김시습처럼 奇人의 풍모를 보인 학자, 정선과 같은 화가, 조희룡과 같은 중인 출신의 학자, 이인좌처럼 모반을 일으킨 인물도 선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물론 책을 저술한 저자의 관점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일차적 원인이지만 여러 측면에서 선비상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사회가 선비들이 이끌어 간 사회였다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선비 학자 유희춘의 삶을 재구성한,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와5) ‘16세기 큰 선비 하서 김인후를 만나다’는 부제와 함께 김인후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책,6) 조선후기 사대부 宋堯和와 浩然齋 김씨 부부의 한평생을 유물과 유적을 바탕으로 복원한 책7) 등이 나오면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보다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이제까지 학문의 울타리 속에만 갇혀 있었던 조선의 선비들도 이제 그 틀을 깨고 점차 일반 대중들과도 가까이 하게 되는 기반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지방자치단체의 활성화와 함께 각 지역에서는 지방의 유력한 선비들에 대한 문화 축제와 학술대회를 통해 선비의 삶과 정신세계를 조명하는 행사를 추진함으로서, 선비문화의 현대적 계승에 대한 모색을 시도하기도 한다. 2001년부터 남명학연구원 주관으로 개최되고 있는 ‘남명선비문화축제’는 이러한 행사의 대표적인 것이며,8) 2002년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주로 경북 지역에서 입수한 문중유물을 중심으로 초상화를 비롯하여 선비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과 글씨, 고문서 등을 전시하는 특별기획전을 열기도 하였다.9)

 

앞에서 소개한 저술들 목록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조선 건국의 주역인 鄭道傳(1337~1398)에서 시작하여 國亡을 경험한 선비 閔泳翊(1860~1914)까지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독특한 개성을 지닌 다양한 선비들이 출현하였다. 명망 있는 선비가 배출이 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많은 선비들이 출현했던 시대였던 만큼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상과 행동을 전 시기에 걸쳐 일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을 개관하고, 사림사회가 형성되면서 선비들이 조선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기점이 되는 16세기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상과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 학자가 다수 출현하였고 이들의 모습에서 조선시대 선비사회의 구체적인 모습과 이후의 전개 양상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금장태 교수는 자신의 저술에서 선비의 개념과 연원, 선비의 수련과정 등을 밝힌 후에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비의 유형들과 활동상을 파악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선비정신과 기묘사화의 연관 관계를 지적하고 道學 선비의 세 유형으로 퇴계와 남명, 율곡을 설명하고 있는데, 16세기가 조선적 선비의 모습이 형성되는 주요한 기점임을 보여주고 있다.10)   

 

본고에서는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 학자인 徐敬德(1489~1546), 曺植(1501~1572), 金麟厚(1510~1560), 李滉(1501~1570), 李之菡(1517~1578), 李珥(1536~1584)를 중심으로 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상과 활동을 검토해 보는 한편 이들의 사상과 활동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자 한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정치의 시대가 열리면서 선비들의 활동 영역이 그만큼 넓혀졌고, 이들 인물들의 모습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다양하게 배출되는 선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들은 영남, 호남, 경기, 서울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학자로서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 서술해 나가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로 이해되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되기도 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賜藥 등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있는 청청한 마음가짐으로 특징 지워지는 선비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일제시대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인 처신은 전통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다.11)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선비’의 ‘선’은 몽고어의 ‘어질다’라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비’는 몽고어와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비’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12) 우리의 선비의식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유교문화가 점차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자, 유교적 인격체인 선비의 덕성에 관한 이해가 성장하여 갔다. 삼국시대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구려의 創助利, 신라의 박제상, 통리신라의 설총, 최치원 등을 들 수 있다.13) 고려시대의 경우에도 조선의 건국에 반대한 정몽주, 길재, 이색, 이숭인 등 三隱을 대표적인 선비로 꼽을 수 있지만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선비의 기본적인 모습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비의 자격으로 학문적 식견과 도덕적 행실이 강조되면서 ‘文士’의 의미가 집중적으로 강조된 것과도 관련이 깊다. 조선시대에 선비라는 용어가 문자로 기록되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세종대에 창제된 󰡔용비어천가󰡕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선비는 儒士, 儒生을 뜻하고 있다. 선비의 용례가 󰡔용비어천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이미 고려중기 또는 말기에 일반화되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선비가 유교적 교양을 습득한 文士로서 관료나 그 후보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14)

 

조선시대에 國是로 정해진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그리고 이 성리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대명사가 선비였다. 그러나 성리학이 지방사회에까지 정착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16세기 지방을 중심으로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성리학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성리학 이념의 보급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질서, 향촌사회의 안정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다가 훈구파들의 반격을 받고 좌초하였다.15) 그러나 조광조가 뿌렸던 성리학 이념의 씨앗들은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림들에게 전파되었고 16세기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고 선비 학자들 다수가 출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16세기에는 지방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관직 진출을 준비했던 학자들을 통상 선비라 지칭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았으나, 16세기에 접어들어 士禍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마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본 학문으로 하였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성리학 이외에 도교나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선비가 있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도교나 불교, 천주교 등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禁忌時 했지만 성리학의 체계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도교나 노장사상, 병법에 관심을 갖는 선비들이 나타났다. 16세기를 살아간 선비 중에는 서경덕과 조식, 그리고 이들의 문인들인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다.16)

 

18세기 이후에는 박지원, 박제가 등 소위 북학파 학자들 사이에서 상공업과 利用厚生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박지원이 「허생전」,   「양반전」 등에서 無爲徒食하는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허생이라는 선비를 통해 이제 선비도 경제 활동에 종사해야 함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박지원조차도 한 사회에서 선비가 얼마나 중시되고 있는지를 강조하였다. ‘천하의 공정한 언론을 ‘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士類’라 하며, 온 세상에 의로운 소리를 울리는 것을 ‘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없이 죽는 것을 ‘士禍’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사람을 ‘士林’이라고 지적한 것은17) 박지원 스스로도 조선사회에서 선비가 갖는 비중이 얼마나 큰 중요한 가를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선비가 갖는 기본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선비가 이제 변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도 동시에 역설하였다. ‘선비란 아래로 農工과 병렬되고, 위로 제왕이나 공경과 벗하니 그 지위는 등급이 없고 그 덕은 올바른 일이다. 한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혜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공적은 만 세상에 드리워진다’라고 하여 선비는 모든 계층의 사람을 소통할 수 있는 중심의 위치에 자리잡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나,18) ‘原士는 살아있는 사람의 바탕이다. ... 벼슬과 지위가 선비에게 덧붙여지는 것이지, 선비가 옮겨가서 벼슬이나 지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19) 선비를 벼슬이나 지위가 아닌 사람됨의 바탕으로 확인되는 존재임을 주장한 것은 선비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이러한 선비관은 조선후기의 새로운 선비상을 정립하는 한편 나아가 선비의 ‘실학적 역할’에도 중요한 의미를 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선비의 기본이 된 학문은 성리학으로서 조선시대의 선비와 선비정신을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사상이 성리학이다. 선비는 성리학을 주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學人으로써, 士의 단계에서 修己하여 大夫의 단계에서 治人하는 修己治人을 근본으로 하여 학자관료인 士大夫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선비의 修己는 󰡔小學󰡕에서 시작되었다. 󰡔小學󰡕은 朱子가 三代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經史子集의 여러 책에서 주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으로, 灑掃應對之節을 비롯하여 愛親, 敬長, 忠君, 隆師, 親友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소학󰡕은 수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士林派 학자들의 성향에 부합되는 측면이 많았다.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인 金宏弼은 ‘小學童子’라 칭해지기도 했으며, ‘業文으로서는 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小學󰡕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여 詞章의 한계성을 󰡔小學󰡕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다.20)

 

나아가 이들이 기본교과서로 채택하였던 四書三經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들의 내용은 󰡔大學󰡕의 주요지침인 修身‧濟家‧治國‧平天下를 실천하기 위한 이념서이자 지침서라 할 수 있는데, 선비들은 󰡔소학󰡕을 통해 修身을 하고, 유교 경전을 철저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治國, 平天下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16세기의 학자 중 이황과 이이는 외래사상인 성리학을 조선적으로 변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황은 성리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하여 성리학을 조선의 정신으로 이념화하는데 큰 공을 세워 ‘동방의 朱子’라고 칭해졌고, 李珥는 치자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의 조선적 변용인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 문화에 토착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여겨진다. 

 

선비들의 삶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學行一致였다. 배운 것은 활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하여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과 함께 자신을 속이는 거짓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비들은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는 薄己厚人의 정신을 체질화시켜 淸貧하고 儉約한 생활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이러한 청렴 정신은 조선시대에 수많은 淸白吏를 탄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21)

 

조선시대에 청렴하게 살아간 선비들에 대해서는 淸白吏라 하여 국가에서 이들을 표창하고 청백리는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청백리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연원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그야말로 청백리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安星 등 5명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15인, 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때 34인, 명종 때 45인, 선조 때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때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때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 등 모두 217인을 淸白吏혹은 廉謹吏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청백리는 제도화되지는 않았으며, 효종에서 현종 때를 비롯하여 한동안 청백리 선발이 중지된 적도 있었다. 또 ‘청백리’와 ‘염근리’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을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淸選考󰡕에는 186인의 청백리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22) 淸白吏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인 贓吏들은 그 자손에 대해 영구히 과거 응시를 금지할 만큼 뇌물에 대해 가혹한 조처를 취한 것이나, 奔競 금지법을 법제화하여23) 관리들의 인사 청탁을 억제한 것도 그만큼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시기적으로 관리들의 부패상이 완전히 없었던 시대는 없었으나, 그나마 조선사회가 부정과 타락에 물들지 않는 도덕국가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선비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이러한 제도들이 한 몫을 하였다. 또한 선비들은 조정에 권신이나 외척의 부정이 있으면 단호한 상소문을 올려 이들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고 고발하였다. 曺植이 문정왕후를 과부로 비유하면서 까지 외척정치의 모순을 비판한 상소문을 올린 것이나,24) 趙憲과 같은 인물은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소지하는 과격함을 보이기도 했는데,25) 이러한 사례는 올바른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비들의 상소문은 향촌의 公論을 집약함과 동시에 조선중기 이후 중앙의 공론정치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26)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지역에서 배출된 선비 학자들이 이러한 도덕과 청렴을 수선으로 하는 사회 분위기와 공론정치를 함께 조성해 나간 점이 조선사회를 5백년 동안 유지시킬 수 있었던 하나의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Ⅲ. 16세기 다양한 선비 학자들의 탄생 배경

 

16세기는 50년간 지속된 네 번의 사화로 말미암아 학자들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4대 사화 중 조광조가 주축이 되어 개혁정책을 펼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좌초한 1519년의 己卯士禍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외척정치에서 파생한 1545년의 乙巳士禍는 많은 선비들에게 出仕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士禍라는 정치적 환경은 士林사회에 出仕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기풍을 조성하게 했다. 사화의 참혹함은 능력 있는 많은 인재들을 지방사회로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士禍로 인하여 많은 인재들이 지방에 돌아갔다는 것은 趙憲이 올린 다음의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오직 士禍가 혹심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에 근신하였습니다. 成守琛은 己卯의 難을 알고 城市에 은거하였고, 成運은 형이 희생되는 슬픔을 당하고 報恩에 은거하였습니다. 李滉은  同氣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禮安으로 물러났고 林億齡은 아우 林百齡이 어진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고 외지에 들어갔습니다. 徐敬德 같은 사람은 花潭에 은둔하였고, 金麟厚는 관직에 오르는 뜻을 포기하였습니다. 曺植과 李恒이 바닷가에 정착한 것은 乙巳年의 禍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鄭之雲은 金安國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이 큰 죄망에 빠진 것을 보고 이름을 숨기며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成悌元은 宋麟壽의 변을 목격하고 해학으로 일생을 보전했습니다. 李之菡은 安名世의 처형을 보고 海島를 週遊하면서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조정의 큰 그릇들이고 세상을 구제할 재목들이었으나, 기러기가 높이 날아 주살을 피하듯이 세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늙어 죽었습니다27).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成守琛․成運․李滉․徐敬德․金麟厚․曺植․李恒․鄭之雲․成悌元․李之菡 등 16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선비 학자 대부분이 士禍의 여파로 지방에 은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士禍에 자신이 직접 희생되거나 형제나 스승, 벗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사화의 여파로 16세기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대를 난세로 인식하여 출사를 단념하고 초야에 은둔한 일군의 선비들이 다수 형성되었다. 이들은 隱士, 遺逸, 隱逸, 逸士, 逸民, 徵士, 高士, 處士 등의 용어로 지칭되었으며, 이중 處士라는 칭호는 당대인들에게 자부심을 표현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曺植의 경우 임종에 이르렀을 때 문인 金宇顒이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무슨 칭호를 써야 합니까?’라고 묻자, ‘處士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는 나의 平生之志였으니 이를 쓰지 않고 官爵을 부르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28) 처사로 불려지기를 원했다.

 

사화 중에서도 1519년의 기묘사화와 1545년의 을사사화는 사림들이 처사의 삶을 선택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들 간에는 사화의 피해자라는 동류 의식도 커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식의 경우 19세에 경험한 己卯士禍에서는 숙부인 조언경이 희생을 당했으며, 1545년의 을사사화에서는 많은 從遊들이 희생을 당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處士로 自任하게 된다. 을사사화의 여파로 은거를 결심한 처사형 학자로는 성운, 송인수 등도 꼽을 수 있다. 成運은 을사사화 때 그의 兄 成遇가 희생되자 속리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29) 성운이 을사사화로 時名에 뜻을 잃었다는 점은 申欽 등의 기록에서 잘 나타나 있다.30) 宋麟壽는 윤원형을 탄핵했다가 을사사화 이후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청주로 돌아간 인물로,31) 성운, 송인수는 조식의 대표적인 知己이다. 서경덕의 경우에도 ‘士氣가 쇠퇴한 때에 태어나서 두문불출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周易󰡕의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는 기록에서 보이듯,32)士禍라는 정치적 환경은 서경덕의 학문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士禍로 대표되는 16세기 전반의 정치현실은 士林들 대부분에게 현실정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들 중 특히 은거를 통해 현실비판자의 입지를 지키면서 스스로 ‘處士’이기를 원했던 학자들의 대두가 현저해진다. 그리고 이들 내부에는 士禍의 피해자라는 동류의식이 커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모든 선비들이 은거를 할 수는 없었다. 일부는 자신이 소지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정에 참여하여 국가의 현안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이황이나 이이 같은 선비가 관직에 진출하여 處士로서 현실비판자의 임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직 생활을 통해 선비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Ⅳ. 16세기 선비 학자들의 사상과 활동

 

1) 개방적인 선비 학자 徐敬德과 李之菡

 

徐敬德(1489~1546)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처사형 士林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호 花潭은 그가 거처했던 개성의 화담에서 연유한다. 서경덕은 조선 성리학사에서 독창적인 해석과 개방적인 사상 경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서, 象數學을 깊이 연구하고 성리학자들이 금기시했던 道家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 등 학문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이고 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얼 출신이나 상인들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오게 한 점은 학자로서 그의 위치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

 

서경덕은 1489년 개성의 화정리에서 출생한 후 생애의 대부분을 이 지역의 화담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문인을 양성하는데 보냈다. 개성은 서울, 평양과 함께 ‘三都’로 지칭되었고, 고려왕조의 학문과 문화전통을 보존한 지역이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는 인재들이 관직으로 크게 진출하지 못하였다. 또한 개성은  임진강과 한강으로 통하는 水路의 발달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이러한 상업적 분위기는 ‘氣’를 중시하고 현실에서 변화와 다양성을 모색했던 서경덕의 학풍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

 

개성이라는 지역적 배경과 함께 그의 학풍에 영향을 미친 요소는 ‘自得之學’이다. 서경덕의 ‘자득’은 사물에 대한 강한 탐구심에서 비롯되었다. 서경덕의 집안은 農蠶을 가업으로 삼아 매우 가난하였고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독학으로 자신의 학문체계를 세워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문적 자부심도 대단히 강하여 ‘나는 스승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공력을 들인 것이 대단히 깊었지만 후학들은 나의 말대로 공부하면 나와 같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33)

 

서경덕의 학풍과 사상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독창적인 측면이 많다. ‘理’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도덕적 규범을 확립하고 ‘理’를 토대로 자연과 사회를 해석하는 것이 주요한 흐름으로 대두되었던 시기에, 화담은 ‘氣’를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였으며,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특히 󰡔주역󰡕을 중시하였다. 󰡔周易󰡕을 중시한 그의 학풍은 중국 성리학사의 발전과정에서는 소옹, 장재 등 북송대 학자들의 학풍에서 현저한 것으로 서경덕은 이들의 학설을 주목하였다. 소옹의 역학은 상수역학을 의미하는데, 그의 象數學은 도가적 상수가로부터 전수 받은 것으로 도교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장재는 선천의 氣로서 우주 만물의 본체 또는 본원으로 삼은 인물로서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장재에게서 나왔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도가사상의 뿌리가 현저한 北宋代 성리학의 학풍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서경덕의 학문에 있어서도 道家的 경향이 두드러진다.34) 

 

서경덕에 대한 평가에서 道人의 기질이 자주 언급되고, 도가의 행적을 정리한 󰡔海東異蹟󰡕과 같은 책에 그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35) 그가 도가에 심취했음을 보여준다. 도가사상에 대한 관심은 그가 성리학에만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학문세계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러한 개방적인 성향은 신분에 관계없이 문호를 개방하여 많은 학자들을 문하에 모여들게 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朴淳이나 許曄과 같이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 이외에 서얼인 朴枝華나 李仲虎, 천민 출신의 徐起, 개성의 商人 黃元孫 등은 화담 문하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음을 입증하고 있다.36) 서경덕과 기생 황진이의 사랑이 인구에 膾炙된 것도 서경덕의 개방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한 서경덕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서경덕은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저술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시나 몇 편의 철학적 논문이 중심을 이룬다. 이처럼 철학적 저술들만이 남겨져 있고 구체적인 현실관을 밝힌 글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도 주로 철학적 측면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경덕은 현실이나 민생의 문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은 선비였다. 서경덕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花潭集」에 수록된 2편의 상소문, 시문 등에 일부 나타나 있다. 상소문에는 단편적이지만 서경덕이 국가의 재정과 백성들의 생활상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경덕은 內帑이 사사로운 곳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소하였으며, 왕릉의 役事와 같은 일도 민생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37) 이러한 상소문에는 결코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던 서경덕의 사상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서경덕이 보여 주었던 학문에 대한 깊은 탐구 열정과 독자적인 해석 능력은 학문의 폭과 깊이를 보다 확충시켰으며,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학풍은 조선중기 이후 사상사의 저변을 넓혔다고 여겨진다.38) 

 

서경덕에게 돋보이는 개방적인 사상 성향과 상업 중시 경향은 특히 그의 문인인 이지함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지함은 서경덕과 달리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39) 스승처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실천하는 개방성을 보였다. 무엇보다 학문은 민중에게 혜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국을 순력하는 이지함의 방랑벽과 신분을 초월하여 민중에게 다가서는 친숙한 이미지는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지함은 學徒들과 함께 다닐 때마다 經書와 歷史에 대해 질문을 했다고 하며40), 실록에서도 ‘평소 욕심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짚신에 竹笠 차림으로 걸어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道學과 名節이 있는 선비들과 교유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41) 이지함이 단순한 유랑자가 아니었으며, 그 교유범위도 넓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지함의 學風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다양성이다. 遺事에 의하면 그는 天文·地理·醫藥·卜筮·法律·算數·觀相·秘記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이다.42) 이러한 博學의 분위기는 16세기의 학자들인 曺植이나43), 鄭磏44) 등의 학풍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대적 조류로 해석할 수 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은 博學風과 개방성을 보였으며, 특히 사회경제 분야에서 혁신적인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의 경제사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自給과 國富의 증대로 요약할 수 있다. 백성들 누구나가 생산활동에 전념하여 財貨와 富를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공은 流民들이 해진 옷으로 걸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큰 집을 지어 수용하고, 手工業을 가르치며 간절하게 타이르고 지도하여 각자 그 衣食을 자급하게 하였다.”45)는 기록에는 백성들에게 自給을 강조한 이지함의 실천적인 활동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지함의 이러한 사상의 근저에는 사방을 유람하다가 만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적극적으로 응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이지함은 처사형 선비로서 현실정치의 참여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1573년에 포천현감에, 1578년에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이 중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인 「莅抱川縣監時上疏」에는 그가 지향한 사회경제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포천현의 형편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五臟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46) 라고 하여 당시 포천현이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타계할 수 있는 방책으로 수공업과 해양 자원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땅과 바다는 백가지 財用의 창고입니다. 이것은 形以下의 것으로써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능히 국가를 다스린 사람은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한 즉 그 이익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진실로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따라서 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데 이를 것입니다.47)        

 

生民의 이익을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던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중시되고 상업이나 수공업이 천시된 당시 사회에서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방안으로 이지함만큼 적극적으로 末業의 가치를 인정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이지함의 사회경제사상은 결국 國富의 전체적인 증대와 민생 안정책을 강구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새로운 국부의 증대 없이 미봉책으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아니며, 결국 나라 전체의 곤궁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전통적인 농업 경제에만 의존하지 말고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육지이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 이를 통해 國富를 증대하는 방안을 구상한 것이었다.

 

이지함은 處士型 선비로 있었지만 끊임없이 현실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치에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으나 결국은 현실정치의 높은 벽만을 느끼고 사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민간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바탕 위에서 끌어낸 점에서 의미가 큰 것으로서, 그의 이러한 사상은 북학파로 지칭되는 후대 학자들의 이념과 합치되는 부분이 많다. 朴濟家는 자신보다 앞선 200년 전에 이미 해외통상론까지 주장한 이지함의 탁견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北學議󰡕에서는 ‘토정(이지함)이 일찍이 외국의 商船 수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했는데, 그 견해가 탁월하면서도 원대하다.’48)고 기록하여 16세기 이지함이 주장하였던 해외통상론을 적극 평가하였다. 실학자인 柳馨遠 또한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해상통상의 원류를 이지함으로부터 찾았다.49) 이지함은 직접 백성들과 호흡하는 선비 학자의 면모를 보임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는 선비 학자의 고정된 틀을 깰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지함의 개방적인 성향과 상공업 중시 사상은 그의 스승 서경덕과 함께 16세기 선비의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도 지적할 수 있다.

 

2)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曺植과 李滉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50)

 

위의 글은 1564년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조식(1501~1572)이 이황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쓴 편지이다. 조식은 이황(1501~1570)과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이황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조식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左退溪 右南冥’으로 나뉜 것이다. 인근에 위치한 청량산과 지리산은 이황과 조식에게 각각 정신적 고향이자 거울이었다.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조식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 갔다.51)

 

두 선비 학자는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 이들이 생존하던 시절부터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宣祖代에 윤승훈은 퇴계의 학풍을 이은 上道(경상좌도)는 학문으로서 仁을 숭상하고, 남명의 학풍은 계승한 下道(경상우도)는 節義로서 義를 숭상하다고 하였다.52)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李瀷은 ‘上道는 仁을 숭상하고 下道는 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함축적으로 대비시켰다.53) 퇴계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간 모범생 유학자라면 남명은 독특한 캐릭터의 유학자였다. 敬과 義의 상징으로 惺惺子라는 방울을 지니고 칼을 찬 모습하며,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어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강한 개성은 그를 특징짓는다.54) 이러한 남명에게 퇴계의 온건하고 이론 중심적인 성리학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퇴계 또한 남명의 학문을 일컬어 ‘남명은 비록 理學으로 자부한다지만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거나55) ‘南華의 학설을 주창한다’고 하여56) 은근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두 사람의 학풍 차이는 현실인식에도 반영되었다. 퇴계와 남명은 50여년간의 사화기를 겪으면서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명종대 이후 현실의 모순이 점차 해소되었다고 판단한 퇴계는 출사하여 경륜을 펴는 것 또한 학자의 본분을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남명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곧 處士로 남을 것을 다짐했다. 퇴계가 사망을 앞두고 아들 寯에게 부탁하여 무덤 앞에 碑石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고 하자, 남명이 이를 듣고 ‘퇴계는 이 칭호에 마당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隱士라 칭하는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고 한 것은57) 그만큼 處士의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왜적에 대한 입장에서도 둘의 눈은 달랐다. 퇴계가 교린 정책을 견지한 데 비해 남명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했다. 남명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는가 하면,58) 외손녀 사위인 곽재우에게는 직접 병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고 남명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퇴계의 성리학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 간 姜沆(1567~1618)59)에 의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강항의 형은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 강항은 형에게서 퇴계의 성리학을 배웠다. 강항의 성리학에 감동을 받은 일본인 후지와라는 僧服마저 벗으면서 강항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뿌리박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60)

 

남명이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명성을 떨쳤다면, 퇴계는 조선의 國是가 된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전념하여 조선성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퇴계가 그 보다 훨씬 연배가 낮은 학자 고봉 奇大升(1527~1572)과 편지를 통해 仁․義․禮․智의 四端과 七情에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주력한 것은 조선을 성리학의 이념이 실현되는 나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주자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 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조선중기 이후에도 성리학이 국가와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은 것에는 퇴계와 같은 인물의 역할이 컸다. 퇴계를 일컬어 ‘동방의 주자’라 칭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한편 퇴계와 남명은 서로의 명성을 알고 수 차례의 편지를 통해 안부와 건강을 묻곤 했다. 그러나 한차례의 만남도 갖지 않았다. 학풍과 현실관이 다른 학파의 首長으로서, 서로의 자존심이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내재했던 갈등의 싹은 급기야 이들의 사후 문인들의 정치적 분열로 이어진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최초의 붕당정치가 이루어졌을 때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모두 동인으로 자리잡았지만,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퇴계학파는 남인, 그리고 남명학파는 북인의 중심에 서게 된다. 퇴계학파의 수장인 유성룡과 남명학파의 首長인 정인홍은 스승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다. 특히 광해군대에 북인의 정권의 주역이 되었을 때 정인홍은 스승인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하여 퇴계를 격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이들 학파는 서로 극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61) 이 대립은 그 연원인 스승에게 이어져 東人이라는 한 배를 탔던 영남학파의 대분열의 중심에 퇴계와 남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명종, 선조대까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루며 병렬적 관계를 보였던 두 사람의 입지는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확연히 차이를 드러낸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후 남명학파의 중심인 북인은 철저히 정치적 숙청을 당한 반면 퇴계학파의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서 정치권에 발을 딛는 한편 영남지역을 조선후기 성리학의 중심지로 굳혀갔다.

 

남명이 조선후기 내내 잊혀진 학자가 되었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16세기를 대표하는 꼿꼿한 선비학자로 알려진 것과 달리, 퇴계의 명성은 조선성리학의 대명사가 되어 오랫동안 세인들에게 오르내렸던 까닭은 이처럼 조선후기 정치사, 사상사의 흐름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3) 호남의 선비학자, 金麟厚

 

김인후는 李恒․奇大升 등과 함께 16세기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선비학자이다. 전라도 장성에서 출생했으며, 5세 때 神童으로 불렸다. 1528년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正字, 修撰 등의 벼슬을 역임했으나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여 옥과 현감을 역임한 후 줄곧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62) 우선 그의 학맥은 16세기 사림파와 연결된다. 그는 김안국의 제자로서 김안국은 조광조 함께 영남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안국은 중조대 후반에 활약한 학자로 성리학 이외에 천문, 지리, 병법, 의서, 불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에 통달하였다.63) 그의 이러한 학풍은 김인후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김인후는 줄곧 호남에서 학문을 전파했으니 學脈으로 보면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하여 호남에 이어주는 역할을 한 셈이 된다. 그가 기묘사화의 부당성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伸寃을 청한 것은 스승인 김안국와 조광조와 각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16세기 사림파의 학맥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 朴祥, 宋純, 崔山斗 등 호남 사람들에게도 학문을 배운 사실이 확인된다.64) 김인후는 고향인 전라도 장성을 학문의 근거지로 한 만큼 16세기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학자라고 할 수 있다.65) 특히 그의 제자 중 정철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김인후는 造詣가 超絶하고 기상이 豪邁하여, 조선 개국이래 도학․절의․문장을 겸비한 대표한 학자로 꼽히며,66)특히 학자 군주 正祖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正祖는 김인후의 절의와 출처를 높이 평가하였으며,67) 이황과 덕이 비슷하다고까지 극찬하였다.68) 정조는 그를 문묘에 從祀하기도 하였는데, 호남의 선비 중에서 문묘에 종사된 인물은 김인후가 유일하다.

 

학문적으로 김인후는 理氣를 포괄한 大心의 철학자였다.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會通을 중시했고, 모든 사물을 같은 생명 차원에서 교감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은 과정을 중시하는 김안국의 온건한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조광조의 과격과 급진 그리고 고집과 배타 등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넉넉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69)그러나 김인후는 自得에 대해서는 깊은 경계심을 표시했다. 즉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 병폐가 頓悟의 지름길에 흐를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단계적으로 학문을 학습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현재 그의 문집이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시이고, 학문에 관한 문자는 그리 많지 않다. 김인후는 성리학자로서 도교를 맹렬히 배척하는 듯하였으나, 사실 그에게는 도교적 취향이 강했다. 이처럼 그의 내면 세계는 중층적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좀더 깊이 생각하면 16세기 조선 선비들의 일반적인 특징과도 무관하지 않다.70) 남명학파나 화담학파에게서 이러한 사상 성향이 두드러짐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다.     

 

4) 학문과 정치 감각을 겸비한 선비 학자 李珥

 

이이는 1536년 강릉의 외가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그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經史에 통하고 시문,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은 그의 초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551년 어머니가 별세하자 3년상을 치른 이이는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에 귀의했다. 금강산에서 불교의 禪學을 수행하면서 이이는 학문의 시야를 넓혔다. 그러나 이이는 1년 만에 하산을 했고, 이후에는 성리학의 본령 연구에 전념을 다했다.71) 이이에게서는 노장사상에 관심을 보인 측면도 나타나는데, 「醇言」에서 ‘以儒釋老’의 입장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72)이이는 기본적으로 조선성리학을 완성시킨 대표적인 학자지만 󰡔醇言󰡕의 저술에서 보듯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일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은 그의 성리학을 체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이는 1558년에는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한 후에는 先代부터 거주했던 고향인 파주 밤골에 차려졌고 栗谷이라는 호도 이곳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해에 이이는 성주 목사로 있는 장인에게 들렀다가 이웃한 예안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던 퇴계 이황을 만났다. 이이는 이황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학문을 묻고 시를 지었고, 이황은 35세나 아래인 이 젊은 선비의 재능과 학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면서, “젊은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학문에 뜻이 있으니 가히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고 하였다. 율곡은 돌아간 뒤로도,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노학자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기본 개념인 이와 기에 대해 토론을 하였고 이들의 토론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이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29세 때인 15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였다. 그는 이때 ‘天道策’이라는 詩題를 받고, 그 답안에서 ‘天人合一說’을 강조했다. 이때까지 그는 각종 과거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여 ‘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호조좌랑으로 시작한 벼슬살이는 명종대 사간원 정언(30세), 사헌부 지평(33세), 홍문관 부교리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68년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에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 하면서 당시의 정치 현실을 문답식으로 정리한 󰡔東湖問答󰡕을 저술하여 16세의 어린 왕에게 바쳤다. 이이는 자신이 살아간 시대를 中衰期로 인식하고 대개혁의 更張이 필요한 시기임을 강조하였다.

 

1574년에는 󰡔만언봉사󰡕를 올려 시대상황에 적합한 제도와 법을 만들어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1575년에는 修己治人을 요체로 하는 제왕학의 조선적 이론서인 󰡔성학집요󰡕를, 1577년에는 󰡔소학󰡕의 이론을 보다 심화시킨 성리학 교과서 󰡔격몽요결󰡕을 저술하였다. 42세 때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은병정사는 해주 석담 부근의 다섯 번 째 물굽이에 지은 學舍로서 조선 성리학의 이상을 향촌사회에 실현하려 한 이이의 大同사회에 대한 꿈이 담겨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륜과 능력은 더 이상 그를 은병정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정에 불려나온 이이는 이조, 형조, 병조판서의 관직을 두루 거쳤고, 사망 한 해전인 1583년 2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時務 6조를 올렸는데,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를 등용할 것, 軍民을 양성할 것, 財用을 충족할 것, 藩邦을 굳건히 할 것, 戰馬를 준비할 것, 교화를 밝힐 것 등 모두가 국방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어 경연에서는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국세의 떨치지 못함이 심하니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마땅히 멸망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都城에 2만, 각 道에 1만씩을 두어 군사에게 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고,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都城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1575년 동인과 서인이 分黨한 이래 점차 당쟁이 기승을 부리면서 상대당을 마치 원수처럼 인식하는 정국에서 국가의 안위와 민생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이는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과 국방 강화정책을 정치의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士類들의 保合과 중재에 힘을 기울였지만, 그의 뜻대로 정치는 운영되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후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가 위기사태를 맞이하자 그제 서야 조정에서는 이이가 제시했던 개혁정책들에 대해 주목하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그에 관한 卒記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지녔던 학자이자 정치가 이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李珥가 죽은 후에 偏黨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 쪽을 제거시키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다시 알력이 생겨 사분 오열이 되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지왜란 때는 강토가 무너지고 나라가 마침내 기울어지는 결과를 맞고 말았는데, 이이가 평소 염려하여 먼저 말했던 것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便宜策들이 추후에 다시 채택되었는데, 國論과 백성들의 말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73)

 

李珥는 사회적 更張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살면서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선비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을 계승한 김장생, 조헌, 이귀, 황신 등이 후대에 西人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면서, 조선후기 정치, 사상사에서 이이의 위상은 보다 높아지게 된다.

 

Ⅴ. 16세기 선비들의 교유관계

 

대개 선비들은 자신의 연고지에서 후학들을 양성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서로 간에 교분이 없이 고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16세기의 경우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들은 연고지를 방문하거나, 함께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폭넓은 교유관계를 가진 사실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이론 논쟁을 둘러싸고는 서신 교환을 통한 학문적 토론이 여러 선비들간에 이어졌다. 이처럼 16세기 선비들은 다양한 교유관계를 가졌고 이것은 전 지역에 선비들이 확산되고, 학문적인 정보망을 갖추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초야에 묻혀있더라도 중앙 정계의 움직임이나 학문적 성과들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던 것도 이러한 교유관계에 말미암은 것이다. 김인후는 이황과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하였고, 이황과 조식은 만남의 기회는 갖지 않았지만 수 차례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관과 현실인식을 피력하기도 하였다.74)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과 같은 우리 유학사에서 주목되는 논쟁들이 이 시기에 자주 벌어졌던 것도 토론 문화가 성숙했던 당시의 시대분위기를 보여준다.75)

 

서경덕이나 조식처럼 서로 뜻이 통하는 선비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서로 만남의 기회를 가지면서 밤을 새워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16세기 선비들의 부단한 교유관계는 조선의 학문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선비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다음의 기록은 당시 선비들이 명산대천을 중심지로 부단한 교유관계를 가졌던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燃藜室記述󰡕에는 成運이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公(성제원)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었으나 친함이 옛 친구와 같았고 서경덕, 이지함이 또한 동행해 와서 함께 수일을 즐겼다76). 조식이 장차 떠나려하니 공이 미리 전별하는 자리를 中路에 베풀고 홀로 따라가 전송하니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중년으로 각기 다른 지방에 있으니 다시 보기를 어찌 기약하겠는가’ 하였다. 이준경이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당시에 응당 德星이 하늘에서 움직였다’고 하였다. 얼마후에 公이 죽었다77) 

 

고 하여, 지역적으로 먼 거리에 있었던 서경덕과 조식이, 성운과 성제원과의 교유를 매개로 하여, 보은에서 만남의 자리를 갖고 수일간을 즐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東洲集󰡕에도 성제원이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 서경덕과 조식, 이지함이 遠地에서 와서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음을 기록하고 있다.78)

 

이처럼 16세기 지역을 대표했던 선비들은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조선중기 학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화담학파, 남명학파, 퇴계학파, 율곡학파 등의 명칭이 이 시기에 비롯된 것들로서,79)이들 학파는 후에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붕당의 모집단이 되면서 붕당정치가 학파를 기반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단서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6세기 선비들의 개방적인 교유관계는 17세기 이후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7세기 이후 붕당정치가 격화되면서, 반대 정파간에는 禮訟論爭처럼 사상 논쟁을 넘어선 정치적 투쟁이 격렬해지는 상황에 비한다면 16세기 선비학자들간의 교유는 무척이나 활발하고 건전했다고 여겨진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선비들의 모습은 16세기 선비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다양성과 개방적 성향 대신에 보다 당파적인 경향을 띠면서 그만큼 학문적, 정치적으로 치열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16세기 지방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하는 선비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명예의 상징이었던 ‘處士’와 대비되게, 조선후기의 ‘山林’은 정치, 사상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영수로서 각 당파를 상징하는 인물로 활약하면서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80)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선비는 도덕성과 청렴성으로 무장하고 지방을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필요한 경우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학문적 이념을 실천하는 학자이자 관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선비의 기준이나 역할은 조금씩 달라졌다고 판단된다. 당쟁이 치열했던 17~18세기를 살아갔던 선비 학자나, 19세기 西勢東漸의 위기의 시기에 이를 극복하는데 매진했던 선비들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81) 시기에 따른 선비상의 변화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사상적 흐름과도 긴밀히 연결되는 것으로, 선비상의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도 보다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어갔던 주역이었던 선비들의 삶과 활동에 대해 서경덕, 조식, 이황, 김인후, 이이 등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들의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시대는 선비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시대를 이끌어 나간 사회였고, 이들은 탄탄한 학문을 기본으로 했고, 사회가 모순에 빠지면 그것을 지적하고 실천하는 용기를 가진 활동하는 지식이었다. 도덕적이면서 의리와 원칙에 충실했으며, 국가와 백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다.

 

각 선비들은 서로 다른 학문관과 사상,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 도덕과 의리에 충실한 점,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특히 이들은 문인들의 양성을 통하여 조선후기에 이들을 영수로 하는 학파가 형성되는데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후기 선비 사회가 자리를 잡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후 선비사회의 모습은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형성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학문에 대한 탐구, 의리와 도덕, 원칙에 충실한 선비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입장보다는 이제 서로 정치적, 사상적 이념을 달리하는 정파간의 대립에서 우위를 접하려는 움직임들이 전개되면서 치열한 붕당정치의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선비는 이제 각 당파의 首長으로 자리 잡게되었다. 허목, 송시열, 윤증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西勢東漸의 기운이 조선을 압박하면서 전통적인 선비정신은 다시금 힘을 발휘한다. 不義를 참지 못하고 목숨까지 버리면서 저항하는 선비정신의 맥이 衛正斥邪사상으로, 의병항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비정신은 결국 개항과 근대라는 도도한 세계사적 흐름에 묻혀 버렸고, 이들 선비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기능마저도 보수니, 수구니, 시대착오적인 것이니 하면서 평가절하 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역대 정권마다 각종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정치인들의 기사가 날마다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곤 한다. 그리고 삶의 벼랑에 몰린 많은 사람들의 자살 소식이 최근 사회면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한다. 물질적이나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한 현재가 과연 조선시대 보다 살기 좋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경제적 잣대로만 보면 당연히 현재가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예의와 염치를 차리고 도덕적으로 처신하면서, 어려운 이웃에 따뜻한 온정을 보였던 사회, 선비들이 국가와 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도덕국가, 문화국가로 지향하려고 힘썼던 조선사회를 생각하면 꼭 현대사회가 우월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물질과 정신, 경제와 윤리가 서로 조화될 때 보다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러한 방향은 조선의 선비정신에서 그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이제는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낡고 보수적인 유산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적극 활용하여 물질 문명과 물리적 힘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를 중재, 保合해 줄 수 있는 정신적, 문화 유산으로서 재평가해야 할 시점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전통과 현대의 합리적인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연구논문 개요)

 

1. 조선시대는 선비사회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큼 선비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었다. 선비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관료로서 활동하는가 하면 물러나서는 초야에 묻혀 학자들을 양성하면서 학문이 지방사회에까지 뿌리를 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개 선비라면 고리타분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학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실제 조선시대 선비의 삶은 매우 다양하였다. 고집스레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온 몸을 걷어 부치고 나선 선비도 있었다. 출사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 재야에 은거하면서 현실 비판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을 임무로 삼은 선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과 청렴과 소신, 義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조선사회가 그나마 커다란 부정부패 없이 도덕적, 정신적인 문화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선비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던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로 이해되고 있다. 선비는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특히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賜藥 등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있는 청청한 마음가짐으로 특징 지워지는 선비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일제시대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인 처신은 전통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다.

 

2. 특히 16세기에 접어들어 士禍가 연이어 발생하자 뜻이 있는 선비들은 出仕를 전념하고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마하면서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본 학문으로 하였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성리학 이외에 도교나 불교,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에 심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도교나 불교, 천주교 등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禁忌時 했지만 성리학의 체계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도교나 노장사상, 병법에 관심을 갖는 선비들이 나타났다. 16세기를 살아간 선비 중에는 서경덕과 조식, 그리고 이들의 문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모든 선비들이 은거를 할 수는 없었다. 일부는 자신이 소지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정에 참여하여 국가의 현안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이황이나 이이 같은 선비가 관직에 진출하여 處士로서 현실비판자의 임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직 생활을 통해 선비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16세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연고지에 은거한 선비들이 제자들의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조선중기 이후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3. 조선시대는 선비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시대를 이끌어 나간 사회였고, 이들은 탄탄한 학문을 기본으로 했고, 사회가 모순에 빠지면 그것을 지적하고 실천하는 용기를 가진 행동하는 지식이었다. 도덕적이면서 의리와 원칙에 충실했으며, 국가와 백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다. 각각의 선비들은 서로 다른 학문관과 사상,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 도덕과 의리에 충실한 점,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조선후기 이후 선비사회의 모습은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형상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학문에 대한 탐구, 의리와 도덕, 원칙에 충실한 선비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입장보다는 이제 서로 정치적, 사상적 이념을 달리하는 정파간의 대립에서 우위를 접하려는 노력들이 부각되면서 치열한 분당정치가 전개되는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선비는 이제 각 당파의 首長으로 자리 잡게되는 것이다. 허목, 송시열, 윤증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西勢東漸의 기운이 조선을 압박하면서 전통적인 선비정신은 다시금 힘을 발휘한다. 不義를 참지 못하고 목숨까지 버리면서 저항하는 선비정신의 맥이 衛正斥邪사상으로, 의병항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비정신은 결국 개항과 근대라는 도도한 세계사적 흐름에 묻혀 버렸고, 이들 선비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기능마저도 보수니, 수구니, 시대착오적인 것이니 하면서 평가절하 되고 있다.

 

경제적, 물질적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조선 시대의 선비정신은 낡고 보수적인 유산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정신적 가치와 義理 정신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지조와 도덕, 품격 있는 정신문화는 물질만능의 현대문화를 保合, 중재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완충제로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통과 현대의 합리적인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naver blog~天長地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