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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한국사상

한국사상사의 개요 2

by 윈도아인~♡ 2012. 3. 17.

한국사상사의 개요 2

 

Ⅴ. 고려시대 유교의 전개와 성격

1. 유교의 정치사상

 

유교는 윤리도덕에 의한 교화를 정치지배의 수단으로 삼으며, 인민으로 하여금 도덕적 자각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지배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하여 중국의 역사과정 속에서 그 내용이 심화되었고, 한반도에서는 그러한 오랜 역사과정 속에서 체계화된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유교는 한반도 입장에서 보면 외래사상이고, 한반도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수용자층과 정치사회적 기능이 각각 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유교의 전개과정과 고려시대의 역사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며, 신라 하대 및 조선시대 유교와의 사상적 맥락을 아울러 검토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유교연구에 관한 정리는 이미 연구가 나와 있으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삼간다. 다만 유교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한정해서 보면, 고려시대의 유교연구는 유학이라는 학문적·교육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유교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등한시하였다. 즉 여말선초의 사회변화와 더불어 유불교체(儒佛交替)라는 사상의 변화를 말하듯이, 고려시대에는 불교만이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지배질서를 옹호하는 논리였고 주자성리학을 통해 비로소 유교가 국가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게 됨을 설명한다. 물론 유교사상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전제하고 유교사상이 실제 정치현실·사회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의 천(天)·덕(德)·예(禮)와 같은 핵심개념이 고려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어 중세사상으로 기능하였는가 하는 연구는 미약하다. 사료의 부족이 주된 요인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유교사상을 고려의 지배질서를 정당화시켜주는 지배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시각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유교의 중심개념인 천명민본론(天命民本論)이 고려사회에 적용되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유교사상은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B.C.551∼479년)와 맹자(B.C.371∼289년), 순자를 중심으로 정립된 사상이다.
유교사상은 공자가 지적하듯이 귀신보다는 인간을, 죽음보다는 삶을 중시하는 현실우위의 사상이다. 내세보다는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현실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교사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엄격히 규정하여 그 관계를 명확히 한다.
유교는 중국고대사회의 우주자연관에 따라 절대적인 질서로서의 천(天)을 상정하고 인간과 사회가 절대적 질서와 합치되는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긴다(天人合一). 인간이 하늘의 절대적 질서와 합치되는 상태는 군-신-부-자가 각각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는 정명(正名)이 구현된 사회라든가 천리(天理)로서의 인간의 규범인 인륜(오륜)을 통해서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이행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천리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현실에 있는 인간 모두가 동일하게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유교는 선한 본성, 수양 등 인간의 주체성을 중시하지만, 인간에게 존재하는 도덕적 우열을 구별하고 그 차이를 엄격히 정한다. 말하자면 유교는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보면서 도덕적 능력에 따른 인간의 차이를 명백히 한다. 그래서 유교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질서화하면서 도덕이 실현된 상태를 가장 이상시한다.
유교사상을 정치·사회현실과 관련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유교사상은 천명·천도 사상을 중심개념으로 하고 있다. 유교정치사상에서는 인간과 만물을 생성시키고, 질서를 갖추도록 하는 이법으로서 천(天)을 상정한다. 여기에서 천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주재자로 인정되므로 천이 지시하는 명령(天命)이나 천이 제시하는 질서(天道)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인간의 도리로 설명한다. “인간지사는 천명이 아닌 것이 없다”,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명제는 이와 같은 생각의 표현이다. 즉 인간사회는 천이 제시하는 질서나 명령을 순응해야 하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큰 재앙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특히 인군(人君)은 천을 대신해서 인민(人民)을 다스리는 자이므로 천의 뜻을 따르고 천이 제시하는 절대적 질서에 순응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천의 의사표시는 민의 의사, 곧 여론으로서 표현된다. 『서경』(書經)에서 하늘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민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맹자』(孟子)에서 “인민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하였고, “걸(桀)·주(紂)가 천하를 잃은 것은 그 인민을 잃은 것이고 그 인민을 잃었다는 것은 인민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의 여론은 바로 천명이며, 군주가 여론을 무시하면 그것은 곧 천명을 어기는 것이 되므로, 천이 군주에게 주었던 명령을 철회하게 되고 그 군주는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기에 방벌(放伐)*39과 선양(禪讓)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이 성립된다.
둘째, 유교정치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우열의 차이를 전제한 민본론을 전개한다. 유교사상에서는 천은 곧 민이라는 관계로 설명하여 인군은 천의 명령과 천이 제시하는 인간의 도를 정치사회에 실현할 책임을 지므로 민의 의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 곧 민본정치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곧 왕도정치(王道政治)이다.
맹자가 지적하듯이 인간을 금수와 같은 욕망의 상태에서 윤리도덕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들의 기본적인 경제적 욕구, 항산(恒産)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군된 자가 윤리도덕이 구현된 사회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민의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유교사상을 지향하는 지배층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민본론을 표방하였고, 천재지변 등으로 나타나는 자연현상들을 하늘의 경고로 이해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구체적인 정책 속에 반영시켜야 했다.
민본론을 내포한 유교사상은 도덕적 능력에 따라 인간을 구분한다. 군자·대인과 야인(野人)·소인으로 구분하는 인간에 대한 차이가 그것이다. 맹자는 성인(=통치자)이 오륜을 인민에게 가르침으로써 자연상태의 인간이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인, 곧 인륜(=오륜)을 가르치는 통치자(=지배자)는 민의 교화를 담당하는 선지자로서 나타났고, 대다수 일반민은 짐승과 같은 무질서의 자연상태로 이해되었다. 바로 여기에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인도하는 성인에 의한 치자(治者)로서의 지배와 오륜을 준수함으로써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인도되는 피치자로서의 복종이라는 차별적 논리가 성립된다. 요컨대 유교의 민본론은 하늘의 뜻을 지상의 현실에 반영시킨다는 점에서 연유하지만 인간의 차별적 논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유교정치사상은 윤리도덕적 정치론을 지향한다. 공자·맹자의 사상에서 보듯이 유교사상은 인간본성의 선한 단서와 인의를 전제하고 인간 스스로 이를 자각함으로써 윤리도덕이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공자가 “민을 인도하는 데 법률이나 제도로써 하지 말고 덕이나 예로써 한다면 민들이 부끄러움을 알고 바로잡음이 있다”고 한 것처럼 덕을 갖춘 선각자(지배층)가 법률과 제도로 강제로 인민을 통치하지 말고 덕과 예로써 자발적으로 인민을 순종시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지배층이 덕과 은혜로써 민을 통치한다면 민은 그 덕과 은혜에 감화되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지배층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유교사상은 지배층이 수양을 통해서 유덕자(有德者)가 되고 덕과 예로써 민들을 교화시켜 도덕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최상의 방책으로 생각하였다.

2. 고려 전기의 유교

 

(1) 중세 초기의 유교

 

삼국시대 유교는 삼국의 항쟁 속에서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와 상응하는 사상체계로 전환되었다. 유교는 중국에서 발생하였고 중국의 사회변화 속에서 그 내용이 정하여졌는데, 그러한 유교를 삼국의 여건에 맞게 수용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세운 태학(太學)과 경당( 堂)이라는 교육기관, 관직상에 나타나는 고구려·백제의 태학박사, 『삼국사기』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등의 금석문에 보이는 유교경전의 기록은 이와 같은 유교의 존재를 입증한다.
삼국시대의 유교는 고대의 전통적 사회기반 속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국왕이 수덕(修德)과 인(仁)을 내세움으로써 국정의 최고 책임자임을 강조하고, 관료에게 충·신의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윤리규범을 지키도록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국왕과 관료의 유교이해는 인애(仁愛)·안민(安民)·충간(忠諫)의 이념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유교는 교육기관에서 도덕교육, 특히 공동체 혹은 국가라는 조직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의를 가르침으로써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삼국시기에는 유교가 독자적인 논리와 사회운영원리로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집권체제를 지향하는 사상의 선진성을 보여주었지만 전통사상과 결합하면서 국가 혹은 공동체적 질서의 규범이나 도의를 지키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삼국시기의 유교는 삼국항쟁기를 거치면서 중세적 이데올로기로 전환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유교사상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정치사회의 운영원리로서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으므로 전통사상과 병존하면서 점차적으로 독자적인 지배이념으로 정착되어갔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삼국항쟁을 거쳐 확대된 지배체제를 새로이 개편하고 중세적 질서에 맞는 새로운 국가체제,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하려 하였다. 전쟁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일반 민의 대우와 고구려·백제계 주민의 포섭, 수취체계를 포함한 통치조직의 정비, 지배층 내의 정치세력의 재편, 중세적 통일국가의 성립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확립 등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신라 하대의 중앙집권화 노력 가운데 하나가 유교적 정치이념의 확대보급이었다. 신라 하대에는 집사부(執事部)의 설치와 지방행정조직의 재편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향하였는데, 유교적 교양을 쌓은 관료의 양성으로 합리적인 정치운영을 꾀하고, 국왕을 충으로 받드는 신하의 양성으로 진골귀족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고대적·귀족제적 잔재를 청산하고 중세적·관료제적 정치사회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의도였다. 또한 신라는 삼국항쟁과정에서 성장한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시혜를 베풀어서 신라의 지배체제에 순응시키려 했다. 일정한 양보를 통해 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 유교는 우선 현실의 군주와 신하관계를 도덕률로 설명하여 혈연적인 골품제(骨品制)를 비판하고, 국왕과 유교적 교양을 쌓은 세력의 결합을 통해 진골귀족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의 성립과 788년(원성왕 4)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설치, 717년(성덕왕 16) 당으로부터 문선왕 및 10철(哲) 72제자(弟子)의 화상을 당으로부터 가져와 국학에 안치한 것,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 등은 도덕우위의 유교사상과 유교적 수양을 쌓은 관료의 양성을 위한 시책의 일환이었다.
국립학교인 국학은 『논어』와 『효경』(孝經)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나머지 유교경전을 교과과목으로 정하여 출생이나 혈연보다는 도덕중심의 교육을 통해서 현실의 군신·부자의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익히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정한 것은 유교의 실천도덕 가운데 가정생활의 근본덕목인 효와 국가에서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덕인 인(仁)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특히 『효경』을 중시한 것은 신라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관철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의 표현이었다. 『효경』은 효보다 충을 중요시 여겨 국가에 대한 충을 통해 부모에 대한 효를 실현하도록 설명함으로써 한나라 황제의 제민지배체제(齊民支配體制)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효경』의 논리를 받아들여 국왕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의 “신하가 되어서는 충과 성(誠)이 제일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가 제일이다.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걸음은 충과 효의 양전(兩全)함이다”는 구절은 부모에 대한 효를 국가에 대한 충에 종속시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다. 즉 신라 하대의 유교수용자는 『효경』에서 말하는 충에 종속되는 효의 개념을 통해서 국왕의 일원적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 하대는 유교에서 말하는 선진적이고 합리적인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중세 초기사회의 한계였고 신라지배체제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신라 하대에는 『효경』의 효·충 개념을 중시하여 국자감의 필수과목으로 정하였지만, 그 의미를 모두 정치사회의 현실에 반영시키지는 못했다.
신라 하대 집권화정책의 일환 속에서 유교적인 충군의 윤리를 신봉하는 중앙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국학의 교육과정이나 당 유학을 통해서 윤리도덕의 유교사상을 익혔다. 이들 유학자들은 진골귀족에 대항하여 골품제를 타파하는 개혁을 내세우기도 하였으나 정치사회적 기반이 미약한 관계로 실패하였다. 그것은 중앙집권화를 추구한 이들이 정치세력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고, 중세사상으로서의 유교적 정치사상의 수용이 완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중세적 사회경제구조의 확립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의 유교는 한대의 유교처럼 왕권의 강화를 목표로 하면서 진골귀족세력의 약화를 목표로 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전면적인 지배이데올로기화는 불가능하였다.
유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정당화시키는 신분제논리를 전제하고 있고, 또 합리적인 정치운영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배층 전체에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즉, 유교는 국왕·진골귀족·6두품 모두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하대의 유교는 고대적·혈연적·골품제적 기반을 비판하면서 중세 초기의 국가인 신라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수용되었으며, 진골귀족과 절충·타협하는 가운데 제한적으로 기능하였다.

 

(2) 천명사상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유지 강화하기 위해 유교사상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왕건이 후백제와 신라의 잔존세력의 존재를 감안하여 대외적인 명분, 즉 신국가 성립의 불가피함을 인정받고, 또 국왕으로서의 즉위를 하늘의 뜻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궁예의 폭정을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함께 분노할 것”으로 단정한 것이나, 태조의 추대공신이 “혼군(昏君)을 폐하고 명군(明君)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라고 하여 왕건에게 “탕(湯), 무(武)의 일을 행하라”고 했던 ‘방벌적 혁명론’(放伐的 革命論)은 유교정치사상의 천명론(天命論)을 근거한 것이었다. 즉,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방벌적 혁명론은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국왕에 오른 것,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천명에 의해 불가피하게 행한 것으로 설명하게 되어,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정당화시키고, 그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고려왕조는 천명을 받은 왕건이 세운 왕조이고 그래서 연호를 천수(天授)라 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천도와 천명에 맞는 명분(名分)에 입각해서 민본론과 같은 유교사상을 정치사회에 구현시키려 하였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이러한 태조의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와 민본정치를 행하여 고려가 천명을 받은 왕조임을 제도적·의식적으로 과시하였다.
고려 초기는 지배체제가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천에 대한 인식과 그를 통한 제도적 반영은 성종 때 와서 본격화되었다. 성종은 제천의례(祭天儀禮)를 행하였는데 교사(郊祀)*40를 1년에 2회 행하였다. 이때 천은 일방(一方)의 천신(天神)만이 아니라 오방(五方)의 천신인 청제(靑帝)·적제(赤帝)·황제(黃帝)·백제(白帝)·흑제(黑帝)와 함께 제사지냈다. 이것은 고려가 천자의 나라임을 자부하고 천과 직결되었음을 관념적으로 표현하여 고려왕조의 절대적 권력을 상징적으로 암시해주는 것이었다. 이는 유교의 이념에서 보면 고려는 제후국으로서 명분상 위반되는 비례(非禮)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는 조선시대처럼 천자-제후의 관계가 유교이념으로 정당화된 시기가 아니었고, 사대(事大)-조공(朝貢)관계도 문화적·외교적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층은 천명사상을 통해 지배질서를 합리화시키는 이론이나 독자적인 한국사의 논리, 곧 천과 연결되는 자주적 역사인식을 갖출 수 있었다.
이렇게 고려왕조와 왕이 천과 직결되었다는 관념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41·천견론(天譴論)으로도 나타났다. 천견론은 군주는 정치와 도덕의 근원으로 그 일거일동이 천의(天意)와 감응한다는 것이다. 만약 군주가 정치를 잘못하여 민의 불평과 불만이 일어나면 사기(邪氣)가 생기고, 이것이 자연계에 난조를 일으켜 천재지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군주의 실정(失政)은 자연의 이변이나 괴이한 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늘의 경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고려의 역대 왕이나 유자들은 이러한 천견론에 의한 천인상관설을 받아들여 천재지변을 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수덕(修德)을 행하고 선정(善政)의 구현에 노력했다. 성종 때 가뭄의 원인을 왕의 부덕한 정사에 있다고 하여 자성(自省)의 방법으로 선정(善政)과 책기(責己)가 가해졌고, 목종 때는 천지의 변괴(變怪)에 대하여 왕의 선한 언동(言動)과 덕치(德治)를 힘쓰고자 했다. 문종 때 천변이 왕 자신의 부덕으로 인하여 발생함을 인정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繕)을 감하며 동시에 왕의 잘못을 직언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천재지변의 대책으로 불충·불효 이외의 죄에 대한 사면이 행해지고 조세를 감면해주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천재지변을 당하면 군주는 그 책임이 스스로의 부덕한 정사(政事)로 말미암은 것으로 믿고 부덕한 정치를 반성하고 선정을 베풀어서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런데 천재지변을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해서 왕의 부덕한 정치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불교적·민간신앙적 의식에 의한 소재도량(消災道場)이나 초제(醮祭) 등이 국가적 행사로 행해졌다. 물론 군주의 수신을 강조한 것이나 천재의 대응책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에서 유교적·합리주의적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유교적 방법은 예외적인 것에 속하며, 그것도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대응이나 군주수신론에 관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시대에는 소재도량이나 초제와 같은 불교와 도교의식이 국가적 행사로 빈번하게 행해졌고, 더욱 미신적인 자연숭배나 토속신앙 등에 의한 소재도량도 그에 못지 않게 성행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왕조가 호족과 연합해서 세운 왕조라는 성격과 관련이 있었다. 유교는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를 성립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는 의미에서 지방분권적인 호족과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한 중앙집권화 노력은 지방에 존재하는 호족 또는 그들과 연결된 제사상과 절충 타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즉 중앙집권화정책과 유교의 정치이데올로기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에는 여전히 호족이 존재하였고, 호족과 결합된 불교나 민간신앙 등이 남아 있었다. 고려왕조는 유교를 전적으로 강조할 수 없었고 다른 사상과의 타협·융합을 통해서 여러 사상을 국가의 지배사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고려에서는 국가적 재난이나 천재지변과 관련된 국가적 의식에 유교적인 방법만을 고집할 수 없었고, 불교와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의 의식도 채택하였다.
고려왕조는 천명을 받은 왕조임을 표명하면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표방하였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백성의 뜻으로 반영되어 나타났다는 관념의 표현이었다.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으로부터 듣는 것이고 하늘이 보는 것은 백성으로부터 보는 것이다”라는 인식은 민 속에 천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지배층은 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므로 위민정치를 구호로써 표방할 뿐 아니라 현실정치에서도 반영시켜야 했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천명을 받은 왕건이 세운 왕조이며, 고려왕조 자체가 천명을 받은 왕조임을 자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왕건의 뒤를 잇는 고려의 왕은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이를 내외에 과시하며 현실정치에 반영시키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서 고려왕조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하게 됨으로써 고려왕조의 성립을 통해서 만들어진 지배질서(신분질서)를 계속 관철시킬 수 있었다.

 

(3) 민본사상

 

천명사상을 기본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을 지향한 고려왕조는 그 이념적 구호를 실제 정책 속에서도 반영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천명이 단순히 하늘이 지시하는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 속에 천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왕조는 민에 투영된 천명을 전제하고 백성들의 편리함을 말하는 민본사상을 사회정책 속에 반영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사상의 인정(仁政), 왕도론(王道論)의 구현이었다.
중세봉건국가인 고려는 양인농(良人農)의 확보를 통해 국가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양인농민이 생산력을 증진시키고 국가를 유지하는 경제적 토대였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유교사상의 기본이념인 민유방본(民惟邦本)을 내세운 것은 이같은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고려왕조는 천명을 받아 탄생한 왕조이므로 민본정치를 실시한다는 것 이외에 고려의 국가질서를 위한 경제적 기반의 확보에도 민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경전에서 말하는 “민은 나라의 근본인데 먹는 것을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민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라는 이념을 전제로 민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하였다. 그것은 유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민은 농사철을 피해서 사역시킨다”(使民以時), “민으로부터 수취하는 데는 제한이 있게 한다”(取民有制), 권농정책 등이었다. 태조 왕건이 즉위하면서 조세와 부역을 면제한 것이나 성종이 노동력 수취의 제한과 권농을 말한 것, 역대 왕들의 조세경감·권농정책·사면 등은 이와 같은 민에 대한 배려를 의식적으로 감안한 조치였다.
고려시대의 일반 민은 신라 하대의 일반 민보다 한층 더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되어 있었다. 물론 중세사회 내부의 민의 성장이지만 생산력의 발전과 후삼국의 전쟁과정에서 보여준 민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고려왕조의 지배층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정책 속에 반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민본론은 민에 대한 항상적인 경제적 보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균부(均賦)·균세(均稅)를 위한 조세개혁이나 지속적인 권농정책, 더더욱 경자유전(耕者有田)에 입각한 토지개혁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이는 유교사상이 신분제를 전제하고 있었고 신분제사회인 고려가 이러한 유교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에 연유하는 것이다.
고려왕조는 토지분급제와 신분제를 통해 지배질서를 운영했다. 지배질서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물적 토대로서 양인확보가 필요하였고, 양인농민의 경제력 향상이나 신분상승은 원하지 않았다. 이는 이미 확보한 기득권을 계속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민에 대한 배려로서의 민본론은 이미 신분제를 전제한 이상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민은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도 아니고, 기본적인 생활기반을 갖춘 자립적 농민도 아니었다. 일반 민은 정치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통치행위의 객체로서 공과(公課)·공역(公役)의 제공자에 불과했다. 국가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의식은 국가의 통치객체이며 국가의 재정적 기반이 민이기 때문에, 그들을 일정한 장소에 안집시켜 국가의 존립에 기여하게 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민본론을 말하지만 신분제의 폐지, 토지개혁을 단행하거나 근본적인 세제개혁을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기득권을 전제로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일방적이고 제한적인 조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에 대해 국가의 조치는 소재지 관에서 양식과 종자를 주어 농경을 권장한다든지, 조세를 감면한다든지, 의창곡을 내준다든지 하는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대책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민본론은 국가입장에서 인민들의 생활에 대한 항구적인 경제생활의 보장이나 인격 자체의 존중보다는 일시적인 굶주림의 모면 또는 이념적인 허구, 즉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였다.
고려사회는 천의식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인민에 대한 편리함을 도모하는 민본론을 전개했지만, 신분적으로 우월한 지배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보지하려 하였으므로 민본사상은 이미 그 자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4) 정치사회론

 

국왕과 양반관료는 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한다. 그런데 양반관료는 사인(私人)으로서 토지와 노비를 통해 부를 늘리려 하고, 국왕은 양인농민과 공전의 확대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려 한다. 이 점에서 국왕과 양반관료는 대립된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을 갖는 주체가 국왕이냐, 양반관료냐의 문제는 민의 대책과 관련하여 의의가 있다.
유교사상에서 정치운영의 주체문제는 유자들의 정치론과 관련된다. 유교는 성립 당시부터 가부장적인 봉건제 논리를 가지고 발생한 것이었으므로 국왕보다는 봉건제후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한나라 때 이르러 유교가 국교화되고 황제의 일원적 지배를 관철하는 논리로 변용됨에 따라 유교사상 내부에서는 신하를 포함한 국왕중심의 정치운영론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사상에서 정치운영의 주체문제는 해당시대의 상황과 유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의 상호관련 속에서 결정되었다.
고려왕조는 지방에 세력기반을 둔 호족과 연합하여 성립하였으므로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히 왕의 권한은 미약하였다. 호족은 유교 이외의 불교나 민간신앙과 결합되고 있었고, 국왕은 유교를 통해 충을 본분으로 하는 관료를 육성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 유교는 호족과 정반대적 입장에 있는 왕권과 결합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태조는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을 수용했지만 훈요10조(訓要十條)*42에 보이는 바와 같이 불교와 여러 사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족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결과였다. 왕건과 최응(崔凝)의 대화에서 최응이 “음양부도(陰陽浮屠)에 의지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하고 필수문덕(必修文德)할 것을 요구한 데 대하여 왕건이 “정난거안(定亂居安)을 기다려서 풍속을 옮기고 교화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한 것에서 볼 있듯이, 고려 초기에는 호족과 연결된 불교나 제사상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 927∼89년)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해 고려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하가 정치운영의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최승로는 시무28조(時務 二十八條)*43를 통해서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호족들의 독자적인 지방지배를 제한하여 중앙집권화를 지향하였다. 또 그는 복식(服飾)·신분·가옥(家屋)제도 등의 사회체제를 정비하는 기준을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것에 두었는데, 여기서도 고려왕조의 성립으로 형성된 지배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방호족의 무원칙적 등용과 정치참여에 반대하며 왕권의 변동에 관계없이 제도와 기구의 확립을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귀족관료의 등용을 원했다. 즉 그는 고려의 건국을 통해 형성된 귀족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최승로의 정치적 견해는 당대의 유학자 이양(李陽)이나 김심언(金審言)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양은 봉사(封事)에서 유교경전인 『예기』(禮記)의 월령에 따라 농업의 준수를 강조하는 등 의례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하늘과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해야 하므로, 유학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심언도 『설원』(說苑)의 육정(六正)·육사(六邪)와 『한서』(漢書)의 자사(刺史) 6조령(六條令)을 중앙과 지방의 귀감으로 삼으라는 글에서 보여주듯이 신하가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말했다. 그것은 『설원』의 6정·6사나 『한서』의 자사 6조령이 모두 군왕이 군왕다울 수 있는 신하의 행위를 말한 것으로 국가의 흥망은 군왕이 아닌 신하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려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최승로·이양·김심언은 신하가 정치운영의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였으며, 계속해서 최충(崔沖, 983∼1068년)·김부식(金富軾)으로 이어지는 유학자에게 그 사상이 전수되었다. 최충은 현종 이후 귀족관료의 대두와 유교부흥운동이 추진되던 시기에 비경주계의 개경과 근기제읍(近畿諸邑) 유자의 성장 속에서 등장하였다.
최충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사학 12도를 낳았다. 구재학당에 보이는 명칭은 『중용』에서 중요시 여기는 성의(誠意)·정심(正心)에 주안을 두는 것으로 심성학적 유교를 강조한 것이다. 『고려사』의 재이(災異) 기록이 11세기 초부터 많아진 사실은 유교적 정치이념의 보급을 통해 심성학적 유교를 강조하고 천재지변에 대한 군주의 실정과 부덕을 연결시켜 군주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또한 최충은 김심언이 상소한 『설원』의 6정·6사와 『한서』의 자사 6조령을 다시 거론하여 관리의 지침이 되도록 강조하였다. 이는 김심언이 상소를 통해 밝히고자 한 정신과 이념, 즉 중앙집권적 귀족정치 이념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러한 최충을 중심으로 한 귀족관료의 사학부흥은 관학을 쇠퇴시켰다.
성종대 이후 중앙집권화정책은 지방관의 파견 등 통치조직상의 정비나 지방호족의 중앙관료화를 통해 진행되었다. 특히 후자는 자발적으로 고려왕조에 협력을 유도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고려왕조는 지방호족의 중앙관료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고려의 학제는 국가체제를 유교적으로 개편하려는 의도와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향호(鄕戶)들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자감(國子監)의 설치와 향학(鄕學)의 설립, 전국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를 파견한 것은 이와 같은 의도의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그 결과 지방호족을 중앙권력구조의 신관료로 흡수하는 동시에 향호 내지 그들의 자제에게 관료진출의 기회를 부여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국자감의 필수과목은 신라 하대의 그것처럼 『논어』·『효경』이었다. 특히 『효경』의 강조는 고려의 정치체제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이념을 제공했다. 『효경』은 전국 말기 『여씨춘추』보다 약간 앞서서 나왔는데,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지방분권적·봉건적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중앙집권적 국왕의 일원적 지배를 지향하는 분위기에서 만들어졌다. 『효경』의 효는 그 이전 공·맹의 효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맹의 효는 부모 및 그 연장으로서의 조상을 그 주된 대상으로 하여 가족 내지 종족을 실천장소로 설정하였지만, 『효경』의 효는 천하에 순종하는 도 또는 덕의 본으로 여기고, 효의 적용범위를 군주까지 확대하여 부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며 군주를 종족지배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래서 군주는 최대의 효의 실천자로서 존재하게 되고, 군주의 도덕적 권위는 천도와 결합된 효를 통해 천에 의해 보장받게 되었다. 그 결과 군주에 의한 일원적 지배, 중앙집권체제가 성립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고려왕조는 이러한 『효경』의 효를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여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그것은 고려왕조가 호족과 연합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왕권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이를 만회하여 국왕권이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자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무릇 국가를 다스림에 반드시 근본에 힘쓰는 것은 효보다 큰 것이 없다. 가문의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의 충신이 된다”는 표현은 가정에서의 효가 국왕에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군주에 의한 일원적 지배를 상위의 개념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효·충의 논리는 같은 중세사회인 신라하대의 그것이 단순히 효보다 충의 강조로 일관한 것과 달리, 한대(漢代) 유학에서 『효경』을 중요시한 배경을 내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결과였다.
고려의 중앙집권화정책은 정치운영까지도 국왕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한대 『효경』의 논리를 받아들였지만 국왕의 전제적인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정치형태는 중앙집권적인 것을 바랐지만 정치운영의 중심이 국왕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종대 이후 유자들의 귀족적 정치이념의 지향과 마찬가지로 귀족관료가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이었다.
현종조에 거란의 침입으로 유교진흥이 약화되고 사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예종과 인종은 관학진흥을 목표로, 국학 7재·양현고(養賢庫)·보문각(寶文閣)·청연각(淸燕閣)·경사(京師) 6학·향학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는 주나라의 정치체제를 모범으로 문·무 양학을 주장하며 존경적(尊經的) 유학의 지향으로 군주를 충으로 받드는 관료의 양성을 도모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경사 6학이 신분별로 입학자격을 나누어 국자감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할 수 있도록 한 것에서 보여주듯이 다분히 귀족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고려 전기 지배층이 중앙집권적 체제를 지향하면서 모두 동일한 정치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유자들은 논자에 따라서 정치운영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냐, 민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외적의 침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느냐 소극적으로 임하느냐 등등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거란의 침입에 대한 할지론(割地論)의 의견대립에서 뚜렷이 드러난 지배층 내부의 차이는 고구려적·북진적 기반을 가진 세력과 신라적·보수적 기반을 가진 세력과의 정치현실 인식상의 차이였고, 그 대응논리의 차이였다. 거란의 침입에 대한 할지론에 반대하였던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이지백(李知白)·이겸의(李謙宜)·한언공(韓彦恭)·정우현(鄭又玄) 등은 전통사상을 존중하는 부류였고, 이를 찬성한 이양·김심언 등은 유교적 합리주의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또한 1031년, 대 거란 대책을 둘러싸고 요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한 왕가도(王可道)·이단(李端) 등 27인은 전자의 계통이었고, 이를 반대한 황보유의(皇甫兪義),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김충찬(金忠贊)·최충(崔沖)은 후자의 계통이었다. 예종 때 여진정벌에 대한 주전파인 윤관(尹瓘)은 전자의 계통이었고, 주화파인 박경인(朴景仁)·김한충(金漢忠)·김인존(金仁存)은 후자의 계통이었다.
지배층은 기득권자로서 민 위에 군림하는 수탈자이기는 하지만 대응방법에 따라 제한적이나마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면이 있었다. 즉 지배층은 나름대로 상대적인 차이가 있었다. 지배층 내부의 차이는 민에 대한 이해, 체제에 대한 현실인식, 국가의식·정치사상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 이면에는 경제적 입장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정책상의 차이로 표현되었는데 송나라와의 문화교류, 유학사상의 수용 속에서 입장의 차이가 더욱 뚜렷해지고 각각의 논리가 보강되었다. 윤언이(尹彦 )의 『역해』(易解), 백수한(白壽翰)의 경전연구 등의 흐름과 최윤의(崔允儀)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김인존(金仁存)의 『논어신의』(論語新義) 등의 흐름이 각각 지배층 내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 두 흐름은 민에 대한 대책에서 차이가 나타나지만, 지배층으로서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지배층 내부의 대립 혹은 권력싸움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들은 비록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중앙집권적 귀족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명분으로 동조했지만, 이자겸의 난이 수습되면서 다시 분열하였다.
서로 다른 세력기반을 가지면서도 민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의 차이는 없었다는 점에서 지배층 내부의 권력싸움일 수밖에 없는 이 두 흐름은 묘청(妙淸)의 난을 계기로 대립 충돌하고 김부식(金富軾)·정습명(鄭襲明)·김인존 계열의 개경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개경파의 승리는 유교적·보수적·사대주의적·신라적 기반을 가진 세력의 승리로서 고려의 지배질서를 기존질서대로 재정비한다는 점에서 체제보수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묘청·정지상(鄭知常)·윤언이·문공인(文公仁)·백수한 등의 서경파는 보수주의적 유교이해와는 달리 전통사상과 결합된 유교사상을 통해서 고구려적·북진적 지향을 강구하여 문벌세력의 토지겸병과 농민의 수탈체계를 지양하고, 김부식 계열의 개경파와 대립하여 지배층 내부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두 흐름은 결국 이완된 고려지배질서를 사회변화에 맞게 정비하지 못하고 정권적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김부식은 최승로 이래의 유교적·신라적·보수적 전통을 견지하며 체제유지적 유교주의에 철저하였으며, 그것도 정치운영의 중심을 국왕보다는 신하에 두는 귀족적 정치이념을 지향했다. 그 결과 김부식의 승리로 귀결되는 개경파의 승리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을 꾀하는 중앙집권적·귀족적 정치체제의 확립인 동시에 고려의 문벌귀족체제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고려 후기의 유교

 

(1) 주자성리학의 수용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은 송대 사대부의 학문이다. 송대 사대부들은 전시대와 달리 과거제도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배계층이었다. 성리학은 사대부가 지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며, 기득권을 보장하는 논리가 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의 이(理)가 만물의 근원성과 이법을 전제하여 성(性)과 동일시되므로 사대부에게 무한한 자유정신과 인간사회의 책임의식을 자부하게 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성리학을 익힌 사대부는 성과 이의 개념을 통해 현실의 제 관계를 보다 근원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리학은 이를 갖춘 인간의 근원적 평등을 전제하므로 모든 인간을 천민(天民)으로 인정해주어야 했다. 그것은 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위민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도 긍정하게 되므로, 민의 경제대책 곧 민의 항상적인 재생산기반을 마련하여 민의 처지를 향상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에 대한 지배층의 배려는 주자성리학을 통해서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지배층이 위민정신에 입각해 은덕을 베푼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민 스스로의 요구를 지배층인 사대부가 어느 정도 수용한 결과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고려 후기 주자성리학의 수용은 중국 송대의 성리학 성립의 배경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지배층의 성장(사대부)과 그를 통한 현실관계의 합리적 설명, 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무인집권기와 원간섭기, 공민왕 이후의 고려 후기사회는 사회변동기에 놓여 있었다. 생산력의 발전과 이를 통한 토지분급제, 토지소유관계의 동요, 향소부곡을 포함한 지방제도의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생산력의 기반을 배경으로 신흥세력이 성장하였으며, 원의 간섭과 요구에 의한 외압이 이와 같은 변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주자성리학의 수용은 이러한 사회변동에 대응하는 신흥세력(선진적 지배층)의 논리의 결과였다. 주자성리학의 수용은 고려봉건사회의 내적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역으로 고려봉건사회의 사회변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13세기 전반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30년간의 전쟁을 계속한 고려의 지배층은 몽고와 타협하여 권익의 일부를 양보하고, 남은 권익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이를 위해서 대몽항쟁과 농민전쟁을 통해 지배질서에 대항하는 민을 순종시키는 이론적 무기뿐 아니라 같은 지배층내에서도 사회모순을 심화시키고 사적 권력을 지향하는 보수구귀족에 대한 비판사상이 필요하였다. 즉, 이 시기 신흥세력은 지배층으로서의 기득권을 보장받으면서 구귀족을 타파할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고려 초기 이래 불교와 유교가 이데올로기로 존재해왔는데, 불교는 이미 사상 자체에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부적격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민의 저항의 논리로 쓰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배층은 공·맹 이래 자발적으로 지배체제에 순종하는 사상체계인 유교를 보다 철저히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원에서는 이미 송대의 주자학을 관학화하면서 지배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또 원은 원과 주변국가의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그것을 주변국에 인위적으로 전파시키고 있었다. 고려지배층의 주자성리학 수용은 이 같은 내적·외적 조건에 의해 용이하게 진행되었다.
고려의 주자성리학 수용자들은 중소 재지지주적 기반을 가지면서 대토지소유자인 보수귀족층을 비판하였다. 그것은 보수귀족층과 결합된 사상이 불교였으므로, 불교와 불교신봉자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다. 당시 불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의 소유자였고 부역을 피하는 민의 은거지였다. 불교는 중앙권력층과 일체가 되었고 불교사원은 대장원주가 되어 있었다. 신흥세력(선진적 지배층)은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소유권적 토지지배를 견지하였으므로 전호농민(佃戶農民)*44의 확보가 필수불가결하였다. 이들은 중앙귀족에 의한 농장의 발달, 수취체계의 중첩화로 야기된 일반 민의 유망을 막고 대장원주이며 중앙권력층인 세신거실(世臣巨室)들과의 이해의 대립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진적 지배층은 주자성리학의 철학체계와 현실대응 논리를 통해 불교가 효·충·예의 가족·사회·국가의 윤리보다는 자기만의 해탈을 강조하고, 불교사원은 권세가의 대토지소유와 마찬가지로 인민과 토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사회모순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자(朱子)의 권농문(勸農文)을 통하여 지주와 전호의 의무관계를 규정하여 지주적 토지지배관계를 유지, 강화하려 하였다. 선진적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투쟁은 불교와 일체화된 중앙권력층 내지 대장원주인 세신거실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며, 불교에 대한 승리는 사상적 승리인 동시에 정치사회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을 받아들인 고려의 유자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주자학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선진적인 학자들은 기성관념 속에서 불교 내지 축술적·신앙적 사유형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비주자학적 방법으로 주자학을 익히게 되었다. 안향(安珦)이 승려가 부처에 예불하는 것처럼 주자의 화상에 예불하는 우상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나, 당시 유자들이 주자의 일언일구(一言一句)를 무조건적으로 암기하는 학습형태를 보인 것은 이러한 비주자학적 태도의 단면이었다.
고려 후기에 들면서 주자학 수용은 안향·백이정(白 正)·권보(權溥)·이곡(李穀)·이색(李穡)으로 이어져 점차 그 본의를 이해하게 되고, 현실정치론에도 반영되어 나타났다. 주자성리학의 수용을 주자학의 핵심인 사서(四書)의 이해과정을 통해서 보면, 고려시대 유자의 사서 이해는 1344년(충목왕 4) 사서를 과거과목으로 채택하고,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 과목으로 채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원의 과거가 1315년에 시행되었고 고려인의 응시자와 합격자가 수십 명에 달한 것으로 보아 고려의 주자학 이해는 이보다 빨랐을 것이다.
송대의 주자학은 사서를 더 보다 중시하면서 종래의 유교를 철학화·내면화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었다. 주자학에는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의 두 측면이 있고,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두 방법이 있다. 원의 성리학은 남송경략 과정에서 중국 한족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관학화되었다. 따라서 원대의 성리학은 주자성리학의 이론철학을 강조하는 궁리의 측면보다는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거경을 통한 수기의 측면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다.
고려 후기에 수용된 주자학은 원의 만권당(萬卷堂)에서 공부하던 유자 혹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鄕試)로부터 출발하여 원의 주자학을 익힌 유자들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었으므로 원의 관학 주자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원대 관학 성리학을 주도한 허형(許衡)의 학문적 경향과 그 영향을 받은 고려의 유자를 말한다. 주자학 수용의 보다 근본적인 동기는 고려 유자들이 당시 사회변동을 이해하고 대응했던 방식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고려 유자들은 고려 후기의 사회혼란을 고려왕조의 전반적인 제도개혁이나 체제정비 차원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개개인의 윤리도덕의 문제, 교화의 실현문제로 이해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도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고려 유자들은 도문학, 궁리와 같은 근원적인 탐구보다는 인간심성의 문제인 존덕성, 거경과 같은 측면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후기에 수용된 주자 성리학은 원의 영향 속에서도 수용자의 현실적 요구에 의한 존덕성과 거경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중시한 학문이었다. 원을 통해 수입된 고려의 주자학은 원 관학 주자성리학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내면을 중요시하는 주자학의 수용은 고려 중기 이래의 사상을 내면적으로 계승한 것이었다. 고려 중기 이래 최충의 심성론적(心性論的) 경학(經學)연구나 불교의 심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지적 분위기의 축적 속에서 주자성리학의 철학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신흥 유신들은 고려 중기 이후의 지적 성숙도를 배경으로 주자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자학 수입자인 이제현(李齊賢)·이곡·이색·권근(權近)은 모두 이러한 존덕성의 주자학을 익혔고, 이를 전제로 한 현실정치론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색과 권근은 여말의 사회모순에 대하여 인간의 본성을 중시한 주자학을 전제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윤리도덕적 정치론을 전개하여 고려지배체제의 구조적 제도개혁보다는 개인의 윤리도덕과 사회교화의 실현에 주안점을 두는 현실대응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여말의 사회혼란을 둘러싸고 같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좀더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려 후기 주자학 수용은 수용자의 주자학 이해방식의 차이에 따라 여말의 혼란에 대해 서로 다른 현실정치론을 성립시켰고, 궁극적으로는 고려왕조의 수성과 조선왕조의 창업이라는 정치적 변혁의 흐름까지도 결정하게 되었다.

(2) 천명사상

 

유교사상의 핵심이 되는 천명사상은 고려 후기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그 내용이 다양해지고 심도있는 이론으로 제기되었다. 이 시기 사회변동에 조응하여 수용된 주자학은 현실의 제관계를 보다 철저히 설명함으로써 천명사상도 보다 체계적인 논리가 되었다. 특히 천에 대한 인식은 유교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고려왕조는 고려 후기에도 천명을 받은 왕건이 창건한 왕조임을 자명한 전제로 이해하여 천자국으로서의 의례를 시행하였다. 원의 간섭과 요구가 심했음에도 천자만이 행한다는 제천의례(祭天儀禮) 혁파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충렬·충선·충숙·공민왕대에 이르기까지 종묘사직과 아울러 원구제(圓丘祭) 시행이 빈번했다. 또한 이제현(李齊賢, 1287∼1367년)은 고려사 사찬(史贊)에서 국왕은 천명을 받았으니 정사를 함부로 하지 말며 천명의 뜻을 알고 보답하라는 내용을 서술하였고, 윤소종(尹紹宗)은 『시경』의 글을 인용하면서 “황천(皇天)이 백성을 낳는데 스스로 백성이 제자리를 얻게 하지 못하고 반드시 성인을 뽑아 임금이 되게 하여 황천 대신에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고, “군주는 천명을 받고 천위(天位)에 오른 것인즉 반드시 위의 천심에 순응하고 천민을 기르되 그것은 부모가 적자(赤子)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이 시기 유자들도 고려국왕은 천명을 받고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을 다스린다고 인식하였다.
고려 후기 천에 대한 유자의 이해는 고려 초기의 그것과는 좀더 진전된 형태를 띤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이(理)의 근원성과 천(天)의 시원적 이해는 이=천의 인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현실관계의 존립근거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의 군주는 천이라는 근원적인 존재 내지 이법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므로, 군주를 포함한 지배층의 모습을 좀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윤소종의 “황천이 백성을 낳는데 성인을 뽑아 임금이 되게 하여 황천 대신에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므로 왕위를 천위(天位)로 하고 백성을 천민(天民)이라고 하고 관료를 천공(天工)”이라는 규정은 주자학의 이=천의 관념을 투영하여 왕-관-민을 천과 직결시켜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그 결과 고려왕조와 고려왕은 천을 대신해서 인민을 다스리는 왕조이고 왕이므로 왕조존립의 합법성과 계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같이 수용된 주자성리학은 유교사상을 철학화·내면화한 사상이므로 천자국으로서의 의례는 비례(非禮)임을 좀더 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즉, 주자학은 덕치주의와 화이론(華夷論)*45에 입각해서 중국과 고려와의 관계를 천자와 제후와의 관계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실제 고려의 유자들은 그러한 천자-제후의 관계를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주자학 수용은 16∼17세기에 보이는 상하신분적인 명분론이 화이(華夷)의 국제관계까지 적용되어 설명되는 시기는 아니었다. 주자학을 통하여 중국과 고려의 명분적 화이론이 이해된 것은 사실이지만 주자학 수용의 초기인 이 시기에는 중국과 고려의 관계가 문화적인 관계를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원의 정치적·군사적 외압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고려의 정치사회 질서를 규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자학 수용자의 자주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주자학 수용의 미숙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원구제를 통해 천자국으로서의 자부심을 계속 견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천견론(天譴論)에 의한 재이설(災異說)도 나타났다. 주자학사상은 천의 인격적 주재자적 성격보다 자연이법적 성격을 내세웠으므로 재이에 대한 대응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도 천재지변을 왕의 부덕한 정치, 과중한 노역, 공부 및 신하들의 부당한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천의 경고로 이해하였다.
천재지변을 해소하는 방법으로는 고려 초기처럼 소재도량(消災道場), 군주의 책기(責己), 수덕(修德)과 선정(善政), 신하의 봉사(封事)·상소였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좀더 합리적인 방법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교식 소재도량의 방법을 지양하면서 군주의 수신과 현실정치의 제도적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즉 고려 초기에 보이는 천에 의존하는 재이대책보다 군주를 포함한 지배층 자신의 수덕의 문제로서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재이대책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고려 초기의 재이대책으로 소재도량이 국가적인 행사로 시행된 것에 대하여, 이 시기에는 “기도해도 효과가 없다”, “중에게 밥을 먹이고 부처를 섬기는 일만으로 재앙을 물리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천재지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은혜로 화기(和氣)를 불러야 한다고 했고, 구체적으로는 관리의 횡포를 제거하거나 자의적인 역의 동원, 과중한 조세부담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군주의 수신여부는 재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재이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군주수신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군주는 재이발생에 대하여 부덕(不德)을 인정하고, 그 대책으로 군주수신을 해야 하는데, 정심(正心)과 경(敬)·예(禮), 근경연(勤經筵)과 같은 주자학적 수양의 방법을 택했다. 특히 군주수신론은 주자학의 영향 속에서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제왕위치지본(帝王爲治之本)으로 말하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조함으로써 보다 더 합리적인 재이대책을 강구했다.
고려왕조는 이 시기에도 천명을 받은 왕조임을 표시하기 위해 민본정치를 표방하였다. 전술한 대로 고려는 임금·관료·백성을 천위·천공·천민이라 하여 군주를 포함한 현실의 지배질서를 구체적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늘의 뜻이 반영된 왕조임을 자부했다. 특히 피지배층인 민은 하늘의 의사가 반영된 실체였고, 또 지배층 자신도 구호상으로 인정하게 되므로 백성에 대한 배려가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주자학사상이 수용된 후에도 천명을 받은 왕조임을 스스로 자각하고 원구제와 같은 의례적인 행사나 위민정치를 행하였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왕조존립의 합법성과 계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신분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3) 민본사상

 

고려 후기 주자학의 수용은 천명사상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에도 보다 철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理)에 의한 보편성과 근원성의 인식은 성즉리(性卽理)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고, 모든 인간은 이의 본원성을 갖추었으므로 현실적으로 인간의 차별은 존재하지만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평등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최승로가 인간의 화복과 귀천은 선천적으로 품명(稟命)되는 것이므로 맹목적인 순종이 있을 뿐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도전이 화복은 선천적인 것에 따라 품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은 이러한 인간관의 변화의 표현이었다.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관념 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논리상으로 모든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해야 했다. 천명에 의해 피지배층인 인민을 다스린다는 유교의 원초적인 생각뿐 아니라, 주자학에서 말하는 동등한 인간의 현실적 차별을 균등화시킬 지배층으로서의 책임이 전제되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의 원리적 평등과 현실적 차이를 스스로 인정한 군주를 포함한 지배층으로서는 천명의 대행자로서 인간 내부의 우열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지배층 스스로의 논리와 정책이 당연히 요구되었다. 민에 대한 인식과 민을 위한 정책적 배려가 고려 초기보다 진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와 같은 논리의 귀결이었다.
이 시기에도 민은 국가의 근본이고 민은 식(食)을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는 인식은 계속되었고, 민을 위한 취민유제(取民惟制), 사민이시(使民以時) 정책도 존속되었다. 주자학은 유교의 갈래였고,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는 한 수용해야 할 지배층의 정치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관념적이고 구호상으로 제시되었던 민유방본(民惟邦本) 의식이 전술한 주자학사상의 영향 속에서 좀더 구체화된 정책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 시기 유자들은 『맹자』에 보이는 유항산(有恒産)·유항심(有恒心)이라는 민본이념을 알고 있었고, 민에 대한 구체적인 혜택을 생각했다. 사서가 중시된 것은 주자성리학 단계였고 특히 『맹자』가 중요한 경서로 대두된 것은 송대 이후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경세지학(經世之學)으로서의 『맹자』 이해는 송대 사대부의 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송대 사대부는 민을 토지에 안집시키고 지주제의 확립을 바랐는데, 그러한 이념적 논리로 『맹자』의 항산과 항심의 논리를 제시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 유자들은 이러한 『맹자』의 항산과 항심의 논리, 즉 민은 항상적인 생산이 있어야 항상된 마음, 윤리도덕이 발현될 수 있다는 논리로 민에 대한 배려를 생각했다. 충선왕 이후의 전민변정(田民辨整)*46사업에서 과전법에 이르는 경제정책은 이러한 민에 대한 항산을 전제한 것이었다.
초기 주자학 수용자들은 항산과 항심을 『맹자』의 이해와 정반대로 인식하였다. 항산이 없는 것은 항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회모순을 전반적인 제도개혁보다 인간의 윤리도덕의 문제로 파악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당시 초기 주자학 수용자들은 윤리도덕정치의 구현을 바로 민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로 생각하였다. 항산과 항심을 다같이 중시하였지만, 항심의 문제에 일차성을 부여한 결과였다. 전제개혁론자인 정도전·조준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논리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일단의 유학자들과 그후의 과전법을 통해서 『맹자』의 이해, 곧 항산을 전제로 한 항심론이 본격적으로 제창되었다. 과전법에서는 민의 보호조치를 법적으로 규정하여 항산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과전법에서는 국가와 양반관료가 농민으로부터 법적으로 공정하게 수조하도록 했고, 자의적인 수조를 규제함으로써 자작농민의 생산을 상대적으로 보호하였고, 또 전주가 전객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규제함으로써 자작농민의 토지지배권을 일정하게 사유권으로서 보장해주었다.
이 시기 민본론의 특색은 사대부의 책임의식의 대두이다. 유교의 민본론은 “민은 나라의 근본인데, 민은 식을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민은 관리로 최상을 삼는다”(民以吏爲天)라는 인식이 첨가되어 관리의 자격유무가 민본론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주자성리학에서는 성인가학설(聖人可學說)을 통해 사대부의 현실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인간사회에 대한 주체의식을 갖고 있다. 고려의 유자들은 주자성리학의 수용을 통해 이러한 사대부로서의 주체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즉, 민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는 식(食) 이외에도 통치하는 관리의 자질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 후기 관리의 횡포와 자의적인 수탈로 민의 생존이 어려워졌으므로 공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 관리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의 신흥세력인 사대부 자신이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자부함으로써 정치운영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士)의 사명을 강조해서 자신의 강렬한 정치참여 의욕을 합리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는 권세가와 부원배(附元輩)들의 자의적인 수탈로 민을 포함한 사대부의 경제기반이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신흥세력은 이러한 주자성리학을 통하여 자신이 주체가 되는 관리로서의 책무를 자부하고 국가의 공적질서를 확립하는 대민통치를 바랐던 것이다.
주자학에서 민본사상을 말하지만 그것은 신분제 논리를 전제한 것이었다. 주자학은 본연지성을 통해 모든 인간의 원리적 평등을 인정하지만 기질과 물욕에 의한 인간의 현실적 차별성도 긍정했다. 이색의 글에서 나타나는 본연지선(本然之善)의 원리적 평등과 기질(氣質)과 물욕(物慾)에 의한 차별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주자학에서의 차별적인 인간관과 민본사상은 고려 초기와 같은 지배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대다수 민은 위민의 대상이 되지만 정치원리의 주체가 아니라 통치행위의 객체로서 여전히 노동력 수취와 조세부담의 제공자였다. 다만 고려 초기와는 달리 모든 인간이 성(性)을 갖추었다는 원리적인 평등을 제시함으로써 피지배층도 실재적인 존재로 현실에서 긍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피지배층 일반 민을 천민(天民)으로 인식하고, 그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 항산의 배려를 정책에 반영시켜야 했다. 과전법과 노비에 대한 천민(天民)의식은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의 귀결이었다.

(4) 정치사회론

 

주자학을 수용한 유자들은 종래 유교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좀더 합리적이고 체계화된 정치이념을 전개한다. 무신집권기의 사회변화와 원에 의한 외압의 증대는 지배층의 현실대응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사회가 혼란하고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대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 당시 주자학을 수용한 유자들은 주자학의 논리를 자신의 정치사상으로 체계화하고 그것을 혼란한 현실을 타개하는 정치사회론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무인정권은 고려 문벌귀족체제의 누적된 모순이 원인이 되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사회는 정치·사회·경제 모든 면에서 무인정권 이전의 사회와 그 양상이 크게 달랐다. 특히, 정치면에서는 문벌귀족사회를 이끌던 문신중심의 정치세력이 무너지고 무신들이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무신들은 문신들을 탄압하고 문신의 지위뿐 아니라 문신의 교양과 학문까지도 부정했다. 따라서 무신집권기에 살아남은 문신은 권력과 타협한 문신이었고, 대부분의 문신은 심산이나 궁곡(窮谷)에 피신하고, 일부는 죽림고회(竹林高會)에서와 같이 은둔하였다. 최씨정권이 성립되면서 문신들의 보호육성책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문신들은 무신정권과의 타협 속에서 무인정권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논리의 제공자에 불과하였다. 무인정권에 참여하였던 대다수의 문신은 현실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 대응책의 수립이라는 의식보다는 권력과 타협하여 무인정권의 유지에 기여하였을 뿐이다.
무신집권기 이전부터 내려온 사상의 전통은 내면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는 무신집권기 이전의 문벌귀족사회의 이데올로기인 보수화된 유교에 대항하는 진보적인 성격의 유교였다. 그것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적 성격의 사상이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의 경우처럼 무인정권하에서 무인정권을 부정하지는 못하였지만, 무인정권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무신집권기 이전의 진보적인 성격의 사상을 내면적으로 계승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준(神駿)·오생(悟生)처럼 정중부란 후에 화를 피해 산문(山門)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지방자제들을 교육시켜 무신집권 이전의 사상을 계승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실비판적이고 또 다원적인 양상이었으므로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체계화된 논리로 설명되고 구체성을 띤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실제 그것은 성리학의 도입과 신흥사대부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원간섭기는 무신집권기의 사회모순이 더욱 심화되고 원의 외압으로 사회변동의 폭이 커지던 시기였다. 식자층이나 정부지배층은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무신집권기, 나아가 고려시대 이래의 지배층내의 진보적 혹은 보수적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났다. 그 가운데 신흥세력이 사회모순의 수습차원에서 수용한 사상이 주자성리학이었다. 주자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를 통해 우주만물과 인간사회를 일원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체계였으므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이 종래 유교보다 구체적일 수 있었다. 고려에 수용된 주자성리학은 존덕성·거경의 인간심성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다. 그러한 성격의 주자성리학수용은 유자들이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연유한 결과였다.
원간섭기의 고려 유자는 이러한 주자학의 학문적 성격을 전제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전제로 한 철학체계였던 만큼 현실정치론도 자연히 윤리도덕이나 교화의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안향이 “성인지도(聖人之道)는 일용윤리(日用倫理)에 지나지 않으니 효·충·예·신할 것”을 말하거나, 이제현의 성(誠)·경(敬)에 대한 태도, 이색이 본연의 선함을 말하고 경(敬)으로 치국평천하를 말한 것 등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중시한 정치론의 반영이었다. 물론 이들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규제하는 제도, 법률의 문제도 언급했다. 이들이 언급한 제도론은 제도개혁론이 아니라 제도운영개선론이었다. 즉, 고려 초기 이래의 제도는 조종지법(祖宗之法)으로 훌륭한 제도였지만, 운영하는 주체 즉 관리나 향리의 횡포로 인해 폐단이 생긴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제도론은 고려왕조 초기의 제도를 확립하고 그 운영의 합리화를 기하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원간섭기 주자성리학을 도입한 유자들의 현실대응론은 사상의 선진성을 기했지만, 사회모순을 인간내면의 문제나 교화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제도론도 제도운영개선론으로 그쳐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데에는 미흡하였다.
고려 말기는 무신집권기와 원간섭기를 통해 심화된 사회모순이 더욱 증폭된 시기이며, 동시에 주자학의 이해가 깊어지면서 합리적인 현실개혁론을 제기한 시기였다. 원간섭기 주자학의 수용을 통한 정치사회론이 원론적 수준을 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그 현실적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결과였다.
이 시기 주자학적 현실대응론의 방향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인간의 내면을 중시한 초기 성리학 수용의 흐름을 계승하면서 윤리도덕을 확립하고 제도운영개선론을 견지한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와 달리 고려 후기 모순을 전반적인 체제상의 결함으로 이해하여 재조정 및 제도개혁을 주장한 부류였다. 전자는 대토지소유화 경향에는 비판적이지만 전제개혁에 반대하였으며, 고려왕조를 수호한 이색·권근·이숭인(李崇仁)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후자는 전제개혁의 주창자이며 조선왕조 창건의 주도세력인 정도전·조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두 흐름의 중요한 사상의 차이 중의 하나는 불교에 대한 견해의 차이이다. 전자는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인정하지만, 부처의 성인으로서의 위치와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긍정했다. 후자는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뿐만 아니라 불교를 정치사상적으로도 아무 쓸모 없고 오히려 해가 되는 오랑캐의 종교로 규정하여 척불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고려왕조와 불교와의 관계를 차단하여 고려왕조의 정신적 기반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즉 고려왕조가 불교와 유교의 상호보완관계를 이루며 중세사회의 농민지배라는 원칙을 견지한 것을 부정한 것이었다. 각각 현실문제, 나아가 체제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이색과 정도전을 통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색(李穡, 1328∼96년)은 이곡을 부친으로, 이제현을 좌주(座主)로 모신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는 국내에 들어온 주자학을 이제현을 비롯한 선배들로부터 배웠을 뿐만 아니라, 원의 국자감에서도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하는 등 재원생활(在元生活)을 통해서 주자학을 배웠다. 이색의 학문적 특색은 초기 주자성리학의 성격을 받아들이면서 주자학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켰고, 유불동도론적(儒佛同道論的)인 경향을 띤다는 점이다. 이색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이(理)·기(氣)·태극(太極)·천(天)의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적(寂)·멸(滅)·공(空)과 같은 불교의 주된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색은 주자성리학 가운데서 궁리나 도문학(道問學)보다는 존덕성과 거경과 같은 인간내면의 문제를 중시하였다. 이색은 오륜(=인륜)을 사람이 날 때부터 타고난 오상(五常)의 덕인 성(性)으로 이해하여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규범으로 이해하였고, 본연의 참된 이치(理)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경(持敬)·극기복례(克己復禮)와 같이 인간의 본성을 중요시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색의 학문적 경향이 존덕성·거경과 같이 인간의 본성을 중요시한 것은 불교와의 관련 속에서였다. 이색은 유교의 태극(太極)을 적(寂)의 본(本)이라 하였고, 『대학』의 격물(格物)-평천하(平天下)를 불교의 계(戒)·정(定)·혜(慧) 등으로 설명하는 등 주자성리학의 주요개념을 불교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더욱이 유교에서 말하는 윤리도덕이 실현되고 교화가 이루어진 상태와 불교가 강상(綱常)을 회복하고 교화를 실현한 상태가 같다고 하였다.
요컨대 이색은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인정했지만 부처를 대성인으로 공경하고 불교의 심성론의 교리와 방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색은 주자성리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심성론의 영향을 받게 되어 사상적 경향이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색의 불교긍정을 통한 심성론적 경향은 단순히 사상적 특질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정치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었다. 고려의 불교는 고려왕조를 지탱하는 이념적 기반이었고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고려의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고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점은 부친인 이곡이 향리 출신으로 원에서 벼슬하고 고려에서 재상까지 지낸 것과 마찬가지로, 이색 자신이 원에서 등과하여 벼슬하고 고려에서 문하시중까지 지낸 경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색은 고려의 지배층으로 고려의 국가이데올로기인 불교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통해서 정치·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색은 유교경전 중 사서를 중요시했지만 특히 『춘추』를 강조하였다. 『춘추』에서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현실에 반영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춘추』는 군신(君臣)-부자(父子)-장유(長幼)의 명분(名分)을 유지하는 데 있어 지침서가 되었다. 이색은 『춘추』를 통해서 고려왕조의 명분질서를 바르게 하고 윤리도덕이 확립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색은 고려왕조의 명분질서와 윤리도덕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 지배질서의 전반적인 체계나 구조적 문제로 파악하여 접근하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윤리도덕의 회복, 예컨대 교육론·수양론의 강조를 통해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색은 여말의 경제변동과 신분질서의 혼란을 포함한 사회모순의 수습목표를 기존질서(고려의 지배질서)의 회복에 두었고,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체제적인 문제보다는 개별적인 문제, 사회 전체보다는 인간 개개인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색은 공민왕 초기에 대토지소유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사전(私田)의 혁파에 반대한 것에서 보여주듯이 고려의 조종지법(祖宗之法)인 과전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개혁을 시도한 것에 불과하였다.
정도전(鄭道傳, 1342∼98년)은 이색과 마찬가지로 향리 출신이면서 사회모순에 적극적인 개혁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지만 독학을 통해 주자학을 익혀 나름대로의 현실대응책을 견지하였다. 그는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이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여말의 사회혼란을 당시 지배적인 유자의 인식인 인간의 내면을 중시한 정치론보다는 고려왕조의 제도 자체, 체제이념 자체를 중시한 정치론으로 대처하였다. 그는 고려 초기 이래의 제도문란과 위민정치의 부재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고려의 정치제도·경제제도의 개혁과 아울러 척불론(斥佛論)을 주장했고, 주자학사상의 확립을 강조했다. 그는 이색이 『춘추』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주례』를 통해 고려지배체제의 전반적인 개혁의 차원에서 현실모순을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하였다. 정도전은 의식이 족해야 염치를 알고, 창고가 가득 차야 예의가 일어나며,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생긴다는 항산론(恒産論)을 제기하였다. 그는 향촌지주·향리 등의 민에 대한 중간 수탈을 배제하고 국왕이 직접 인민을 파악하고 지배하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 결과, 정도전과 이색은 같은 주자학을 수용하였지만 여말에 대한 상이한 현실인식과 그 대응책으로 서로 다른 주자학사상을 전개하고 정치적 대응을 달리하였다. 한 사람은 고려왕조를 지키는 충신으로, 또 한 사람은 신왕조를 세우는 건국 주체세력으로 각각 분기하였다.

Ⅵ.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

 

“한국사에서 불교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실마리를 풀어간다는 것은 막막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정확한 답을 내리기란 대단히 힘들 수밖에 없다. 종래에 불교사를 이해하는 분위기는 크게 양분되어 있었고, 그 수준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가령 불교학 방면에서는 불교라는 종교 그 자체에 매몰되다시피하여 대체로 불교를 옹호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기 마련이었고, 반면에 역사학에서는 불교를 일반사의 범주에 넣지 않고 특수사로 취급하여 전근대사회, 그것도 고대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나 신앙으로서 가장 꽃을 피운 것으로서만 취급할 뿐 그 실체에 대한 정확한 접근을 기피해온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고서 불교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사는 크게 보면 사상사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불교사의 인식태도는 사상사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종래에 사상사 연구를 표방하면서 발표된 글들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사상 그 자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또 하나는 사상을 일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아래서 배태된 산물이나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양자의 경우 어느 한쪽의 입장만 극단적으로 고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상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물론 심화된 사상체계와 세계관을 표방한 공시성·보편성·독창성을 갖는 사상을 과거에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사상사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역사의 무대(場)가 설정되어 역사인식의 문제가 전제될 때는 특정 사상이 어떻게 수용, 이해될 수 있었으며 또 역사발전의 방향에(실천면·운동면) 어떠한 성격을 지니면서 기여하였는가, 또 그 기능은 어떠하였는가라는 제측면이 사상(捨象)되면 사상사로서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가령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나 사상가라고 하더라도 이를 수용,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나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역사의 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사회적 여건이나 사회공통의 가치, 집단의 목적, 사회적 기능면을 중시하면서 그 기준을 인간들의 생활상과 연결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 자체를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면서도 분비물로 표현할 정도로 몰가치적으로 가볍게 취급한다든가, 또는 특정 사상이나 신앙과 연결된 인간집단의 모습과 사회상을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부분)을 이룬다는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은 재고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향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상의 오류는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사상 그 자체를 역사구조의 하나의 단면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이다. 적어도 사상은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이면서 동시에 전체상이라는 명제를 간과한 것이다. 심지어 사상(신앙)과 관련된 인간집단을 추적한다고 표방하면서도 특정 신분계층만을 개별화시켜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였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을 갖기는 힘드나, 다만 방법론상 양자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이를 보완하는 선에서 사상사에 접근하고 또 사상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특정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어떠한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사상체계를 수용,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응용·발전시켜 나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나 신앙이 전래되었을 때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 정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래·수용하는 단계와 나름대로 해석·평가하는 단계, 그리고 재해석하여 자기의 것으로 응용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떠한 내용이 특정 시기에 강조되고 유행하였는지, 또 사회전반의 발전과정 속에서 어떠한 기능과 작용을 하였는지, 아울러 새로운 사상이 정착되면서 기존의 사상과는 어떠한 상호 대응방식이 야기되었는지 등의 문제를 전체 역사상과 관련시켜서 유기적·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상 자체를 다루더라도 철학면(교리면)으로만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상과 연계되어 있는 신앙이나 의례(의식), 이들을 신봉하고 따르는 각 계층의 존재양태라든가 사회발전의 문제까지도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특정 사상의 의미를 역사의 장에서 찾으려면, 사상은 전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면서 전체상을 투영할 수 있는, 즉 다른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전제하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중세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때 무엇보다도 불교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종파의 성립은 단순하게 종파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볼 성질은 아니다. 종파가 성립된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발전의 단계를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의 문제를 해명하는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종파성립은 특정 사상이 교학면(哲學面, 體)·의식면(儀禮面, 相)·신앙면(實踐面, 用)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매체, 즉 사원(집회처)을 중심으로 조직적·체계적으로 행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사상이라고 할 때 세계성·보편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며, 종파성립의 산물로 조직된 승정체제(교단)의 확립을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또한 교학면·의식면·신앙면 등을 기반으로 한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가는 주체가 특정 계층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독점(전유)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때 종파의 성립이란 결국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역사발전의 단계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사에서 어느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체로 신라통일기 전후에 나타나는 제양상을 살펴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즉 교학·의식체계를 단순히 수용하는 단계에서 이해하고, 평가·재해석하는 단계로의 전환, 신앙을 왕실·귀족들만이 전유하는 단계에서 일반민들도 함께 공유하는 단계로의 전환, 또한 왕도(王都) 중심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인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가 종파성립의 단초를 연 단계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종파성립은 통일전쟁기라는 당시 정치·경제·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종파성립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지표를 들면 여러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불교대중화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교대중화 문제는 사회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두고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民)을 파악하는 방식과 민에 대한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매개로 한 불교대중화의 이면에는 일반 민들이 성장함으로써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를 지배층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단계와 현실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 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층의 정치·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불교대중화 문제는 특정 몇몇 승려들의 활약상과 관련된 기념비적 소산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의 경우, 그가 남긴 저술을 통해 알다시피 통일적인 교리체계를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대중화의 선봉에 서서 활약한 인물로서 그의 개인적인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원효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거의 200여 년 전에 수용된 불교가 중국으로 유학했던 원광·자장·의상 등의 승려들이 귀국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교학불교로서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과 병행하여 불교대중화를 통해 일반 민들도 신앙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한 혜공·혜숙·대안 등의 교화승들이 출현하고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학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와 불교대중화 문제는 별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래의 전반적인 발전양상과 유기적으로 관련된 현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대중화를 기반으로 한 종파불교 즉 중세불교가 성립되어 가는 시기는 언제일까. 대체로 신라 중고기의 진평왕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서히 그 단초를 열어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신라 중대에는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파불교가 더욱 세련되고 한 단계 성숙된 형태로서 그 빛을 발한 시기는 물론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종파불교의 성립단계를 중세불교로 인식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신라 하대에 전래, 수용된 선사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세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래에 불교학 방면의 연구자들은 선사상의 전래가 갖는 역사상의 의미를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선사상이 변혁사상으로서 신라 말의 사회변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밝힌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 방면에서 이룩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나말려초를 고대에서 중세사회로의 전환기로 파악한 논의에 힘입어 거의 개설화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되는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선사상 자체를 변혁사상으로 파악한 점과 또 하나 이를 수용한 주체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사상 수용의 주체를 지방호족과 6두품족으로 파악하면서 탈골품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당시 사회변동을 주도하면서 수용·표방한 선사상은 변혁사상이라는 견해인데, 과연 지방호족·6두품족을 변혁주체로 또 선사상을 변혁사상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이 견해를 따른다면 이들과 일반 민들과의 관련은 어떠했으며, 또 선사상은 일반 민들의 신앙을 어떠한 방향에서 포용했을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필자가 몇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점은,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사회변동기라고 전제할 때 선사상을 변혁사상의 주된 지표로 파악한 점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또한 선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전래·수용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한편으로 지방호족으로 불린 세력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범주로 취급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세력기반과 성격은 다양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각각 수용하고 신봉한 사상이나 신앙은 반드시 선사상만은 아니지 않았는가라는 의문 등과도 관련될 것이다.
또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변동기로 파악하더라도 사회전반의 변혁을 수반할 정도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의문은 1960년대 이후 일제시기에 식민지 역사학에서 제기되었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성과에 의해 왕조교체기를 사회전반의 변동기로 강조한 경향이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가령 나말려초기는 호족·선사상, 여말선초기는 사대부·성리학수용이라는 등식으로 대비시킨 견해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결론적으로 말해 첫째, 신라 말의 사상사의 흐름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사상 일변도로만 파악하고 있는 현 학계에 대한 반성의 의미와, 둘째, 당시 선사상이 보수적인 교학불교의 경향에 의해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메워준 역할을 수행한 점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선사상과 기존 교학불교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파악하려는 견해에 대한 반성의 의미, 셋째, 사상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짓는다면 선사상의 전래·수용이 가져다준 불교계의 파장은 컸다고 할 수 있으나 사상(교학·신앙·의례)의 사회적 기능면을 기준으로 할 때 선사상의 전래·수용에 따른 선종의 성립보다는 진평왕대 이후의 불교대중화를 단초로 하여 신라통일기에 종파불교가 수립되는 과정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 넷째, 선사상뿐 아니라 선사상과 함께 수용되었던 사상과 신앙 등의 선진문화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과정에 끼친 영향 등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다음은 중세불교의 중요한 지표로 이해한 불교대중화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한 봉건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지배층이 서서히 보수화됨으로써 종파불교는 이미 성장한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보수화된다는 것은 특정한 지배계층과 집단이 장악하고 있는 종파가 지방토호층이나 피지배계층인 일반 민의 신앙과 별개로 떨어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민의 입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단계이며, 서울과 지방사회, 지배층과 일반 민과의 간격이 벌어지는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에 접어들면 새로운 사조,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여 새로운 단계로 묶어주는, 그럼으로써 다시 합(合)의 형태로 돌아가고, 합(合)의 형태에서 다시 보수화되어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변화해나가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설명한다면 가령 신라 말·고려 중기·고려 말의 불교가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발전의 방향에 발맞추어 새로운 사조인 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또 불교계 자체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불교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수 있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렸을 때인 고려 말에는 불교의 역할이 성리학(주자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신라 말에 진골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역사발전의 방향을 몰각하고 대단히 사치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불교 수용 이후의 산물인 석탑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7세기 말∼8세기 초의 대표적인 탑으로서 경주 감은사지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규모도 크고 균형미도 갖추고 있다. 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석가탑처럼 정형미과 균형미를 갖춘 탑으로 발달되다가, 9∼10세기가 되면 탑신에다가 팔부신중(八部神衆)*47을 넣는 등 화려한 조각 일색의 탑으로 변화해간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탑의 변화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한 가지 든다면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 고려의 왕실, 권문귀족들이 금은으로 화려하게 불경을 베끼고 또 여러 형태의 관음보살상을 주조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보수화된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고수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민들의 신앙은 교리적으로 체계가 없이 신비화되었고 원래의 신앙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던 것이다. 불교계 자체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공했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극대화되었지만,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진했거나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염두에 두고 한국 중세불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주목되는 바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교사의 한 단면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러 현상 속에서, 즉 전체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교사를 특수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반사의 범주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입장에서 불교사를 인식할 때 구체적인 지표는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그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표를 가지고 각 시대별·인물별로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어떤 각도에서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정리해간다면 불교의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고려 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신라 하대에는 정치·사회적 변동과 관련하여 사상적 측면, 특히 불교 방면에서도 그 전환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신라 중대 이래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까지도 포괄하면서 왕실과 진골귀족층에 의해 체제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 교종 계통의 종파세력이 8∼9세기에 사상적으로 차츰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사회적 기반을 상실함에 따라 불교대중화 과정에서 피지배층에까지 확산된미타·미륵신앙 등의 정토신앙(淨土信仰)이 특정 종파와의 관련없이 지방사회의 토착세력과 농민·천민층을 중심으로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신앙결사(信仰結社)라든가 향도조직(香徒組織), 그리고 지방토호층이 주축이 되어 조성한 미륵불(彌勒佛)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불교계의 변동양상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회적 간격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며, 이로 인해 야기된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새로운 사조로서 전래된 선사상이 메워주었던 것이다. 선사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라왕실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지만, 신라 말에는 차츰 지방호족이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게 되자, 선사상은 이들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심지어 선사상에 바탕한 일부 선문(禪門)은 그들이 소재하고 있던 지방사회를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장악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성립된 이후 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상적 측면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개편대상은 지방호족과 결합하고 있었던 선문세력이었다.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대단히 숭상하여 각 종파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접촉하였으며, 특히 선종 승려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후삼국의 통일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에도 왕권강화를 위하여 개경의 10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사원을 건립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불교정책은 훈요10조로 나타나고 있지만 난립된 교단을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불교 교단에 대한 정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왕은 광종이다. 그는 승과(僧科)와 승계(僧階)제도를 마련하고, 국가에서 승려와 교단을 일체 관리하는 기관으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다. 또한 광종은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을 추진하였는데, 선종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일치론과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을 표방한 연수(延壽)의 법안종(法眼宗)*48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광종이 정토신앙을 선사상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 연수의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점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반 민을 기반으로 하여 왕권체계를 확립하려는 정치·사회적인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 중대 이래로 확고한 기반을 유지해온 교종에 대해서도 화엄종의 균여(均如)를 발탁하여 후삼국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균여가 신라 중대 이래의 화엄종과 법상종간의 대립을 ‘성상융화’(性相融會)라는 각도에서 극복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으며 아울러 실천신앙을 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하려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광종대에 천태학(天台學)*49 승려인 체관(諦觀)과 의통(義通) 등이 고려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태종이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고려불교의 전반적인 수준이 당시 중국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경종대의 반동정치에 의한 탄압과 성종이 최승로(崔承老)를 등용한 이후에는 유학이 집권적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불교가 가졌던 체제이념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되고, 그 결과 각 종파별·신앙별로 특정 집단만을 대변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11세기 이후 현종·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됨에 따라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정은 문벌귀족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원당을 건립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사원 자체를 장악한다든가, 심지어 그들의 자제들을 대대로 출가시켜 교단 자체를 움직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른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대표적인 교단은 화엄·법상종으로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다. 이들 세력은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무리하게 각종 교단의 장악을 시도하면서 불교계 전반의 부패를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 이들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천민층은 특정 종파와는 괴리된 채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한 조탑(造塔)·주종(鑄鐘)에 참여하기도 하고 팔관회·연등회 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들에 의해 조성된 유물로서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 있는 예는 예천 개심사(開心寺)와 약목 정도사(淨兜寺) 석탑, 거제 북사(北寺)의 종을 들 수 있다. 물론 지방의 대사원을 중심으로 많은 농민층과 부곡민들이 긴박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런 경우 이들이 예속된 사원과는 달리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면서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을 때, 왕자 출신인 의천(義天, 1055∼1101년)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에 대한 자각, 나아가 고려왕실의 가장 암적인 존재인 문벌체제에 대하여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이 활약한 당시의 왕실과 문벌세력, 또 문벌 상호간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은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단적으로 의천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숙종연간의 천태종 개창을 단순하게 새로운 종파가 하나 탄생한 것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진정벌을 둘러싼 왕실의 입장이라든가, 여진정벌을 명분으로 하여 문벌이 장악한 각 사원이 언제든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승군(僧軍)·수원승도(隨院僧徒) 등을 공적인 군사조직인 항마군(降魔軍)으로 개편한 조처와 함께 이해한다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의천이 왕권강화에 부응하여 보인 일련의 노력은 광범위한 경전의 섭렵을 통한 속장경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으로 나타났으며, 내적으로는 원효의 계승을 자처하고, 대외적으로는 송에 유학하여 흡수한 다양한 불교를 통해서 이념적 기반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의천은 기존의 보수적 성향을 띤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면서 불교통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출신종파였던 화엄종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개혁방안은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와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안목을 돌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사회의 불교현실과 기층사회의 신앙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시의 사원들이 귀족의 원당으로서 재산도피나 정권싸움의 수단이 되었던 불교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는 정신세계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귀족불교를 끌어내려 대중화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비록 의천의 불교통합의 노력이 일시적으로 왕권을 바탕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사후 문벌체제가 강화되는 추세에 따라 각 종파의 분립, 대립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던 점은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준다. 심지어 의천의 문도들조차도 균여 이래의 기존 화엄종과 맥락을 달리하는 계통과 천태종 계통으로 분리되기도 하였다.
화엄종·천태종 외에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개경 현화사(玄化寺)를 본찰로 한 법상종세력이었다. 법상종은 현종년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뒤에 경원 이씨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즉 이자연(李子淵)의 아들인 덕소(德素)가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법상종 교단을 장악한 것이라든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의장(義莊)이 현화사 교단의 유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벌귀족과 결탁된 12세기의 불교사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정에서 와해된 선종 계통은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학일(學一, 1052∼1144년)과 사굴산문에서 탄연(坦然, 1070∼1159년), 지인(之印, 1102∼58년) 등과 또 거사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 윤언이(尹彦 , ?∼1149년), 권적(權適, 1094∼1146년) 등이 출현하여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 이자현이 청평산에 들어가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선법(禪法)을 선양한 사실은] 차츰 선종의 세력이 부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학일은 의천이 송에 유학하여 귀국한 뒤 천태종을 개창할 때 이에 참여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선종 나름의 독자성을 지키려 하였다. 또 그는 1122년(인종 즉위년)에 왕사가 되고 1129년(인종 7) 이후에 운문사에 은퇴하여 이곳에 모여든 많은 승려들을 가르친 인물이다. 학일이 말년까지 운문사에 주석한 사실은 물론 운문사 일대가 고려 초 이래로 가지산문과 관련된 지역이지만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지역이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13세기 초반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야기되었던 대대적인 농민항쟁이 무신정권의 불교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일연(一然)의 출현과도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에도 선사상이 부흥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있지만, 무신란 이후 수선사 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방사회와 기층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현상일까. 당시 사회에서 농장이 서서히 구축되는 현상과 이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하고 유이민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이러한 측면도 어느 정도 관련이 되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하나는 중국의 북송대에 이르러 선사상이 크게 발전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 하나는 당시의 문벌귀족체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 정치일선에서 밀려난 문신관료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감이나 회의적인 성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북방 여진족이 금이라는 강대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무력적으로 압력을 가해오는 국제정세 속에 북송으로서는 고려와의 연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문화적·사상적으로 선사상과 성리학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 사상계 조류가 고려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가령 북송대 임제종(臨濟宗)*50 계통의 승려 계환(戒環)이 주석한 『능엄경』(楞嚴經)이 고려에 전해져 성행한 예라든가, 예종대에 활약한 선승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의 경우를 통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12세기 후반의 무신란 이후 불교계가 재편될 때 선종계가 부각되고, 수선사 계통이 중심교단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2세기 전반기에 선사상이 유행하게 된 저변에는 의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은 당시 선사상에 심취한 부류들의 은둔적이고 개별분산적인 성향과 일반 민들이 신봉하고 있던 정토신앙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는 12세기 말, 13세기 초반에 결성되는 신앙결사의 단계에 가서야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생각한다.

3. 고려 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

 

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 내용상·성격상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慧遠, 334∼416년)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51를 결성한 것을 신앙결사의 시초로 본다. 따라서 이후 혜원의 백련결사를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신앙결사로 파악하여 이의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관념적인 단계에 머문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비해 사회계층적으로 일반 민들을 포용하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거나, 아니면 일반 민들이 주체가 되었던 예는 드물었다.
신앙결사는 종파불교 성립 이후에 전 사회계층이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지역적으로 지방사회에까지 불교가 확산되어가는 추세에 따라, 지방사회의 토호세력, 독서층과 그 이하의 신분층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종의 신앙공동체까지도 넓은 의미의 신앙결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8∼9세기 이래 종파불교 성립의 산물로서 불교대중화가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주로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주근거지로 하여 결성된 향도조직은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향도조직은 단순한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하였으나 지방사회의 지역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신앙결사는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거나 아니면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신앙공동체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양면적인 양태는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기도 하지만 사회변혁기에는 변증법적으로 합일되어 운동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개념으로 신앙결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결사와 결사운동은 엄밀히 말한다면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개념이다.
신앙결사운동 조직화과정의 특징은 중앙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자적인 형태로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또 그 주도세력 및 구성원은 주로 신앙상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개인적 차원에서 참여했으며, 대체로 지방의 중간신분층과 독서층, 그 이하의 신분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

 

앞에서 신앙결사라고 할 때는 사회변혁운동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지칭한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한다면 12세기 후반의 무신란을 기점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과 관련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전개된 수선사(修禪社)·백련사(白蓮社) 등의 신앙결사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엄밀히 말해 신앙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운동의 차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왕실과 귀족에 의해 지원되던 결사라는 형식의 신앙활동과 지방사회의 토호층에 의해 주도되던 향도조직에 의한 신앙활동은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신라 하대에 성행하던 화엄 계통의 결사라든가, 고려 인종대에 지리산에서 행해진 법상종 계통의 수정사 등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8∼9세기 이래로 지방사회에서 소규모의 사원을 중심으로 조탑·주종·불상건립 등의 신앙활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이 주요 신앙형태였다.
그러면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신앙결사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눌(知訥, 1158∼1210년)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서 지방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이들의 성격을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에 힘썼다. 특히 거조사에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 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몇 년 뒤인 1204년 최충헌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고려왕실에 의해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는 1196년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당시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시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崔瑀)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수선사를 크게 부각시킨 이유는 수선사가 당시 사회에서 기존의 여타 종파에 비해 크게 호응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최우정권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慧諶)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서서히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둘째, 수선사는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하면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수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어 있던 지방사회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종래의 학계에서 간과한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염불인유경』(念佛因由經)이 발견됨에 따라 이 자료가 지눌의 저서는 아닐지라도 지눌 계통의 정토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논의는 주목된다. 그리고 혜심은 그의 대표적 편저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나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등을 기준으로 하면 간화선의 최고봉에 도달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그가 남긴 단편적인 자료로서 「금강반야바라밀경찬」(金剛般若波羅蜜經贊)과 「금강반야바라밀경 발문」(金剛般若波羅蜜經 跋文)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금강경』(金剛經)을 수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이와 영험을 강조한다든가, 또한 정통 선사상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범서대장신주』(梵書大藏神呪) 등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혜심은 선사상만을 견지하였다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실천공덕신앙과 밀교적인 요소도 포용하는 탄력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사상적인 내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수선사가 독서층과 지방사회의 향리층, 일반 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선사가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 민들의 지원을 받던 결성 초기의 단계에서 차츰 독서층의 지지를 받게 됨에 따라 사원의 규모도 확대되고, 나아가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이들의 의도와도 맞아떨어져 최우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 불교교단을 통괄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의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은 1208년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요세는 수선 이전의 천태교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러한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향을 수참(修懺 : 참회법)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法華經)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天台止觀),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와 지례(智禮)의 『관무량수경묘종초』(觀無量壽經妙宗 )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계기로 하여 요세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지원에 따라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백련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 민들을 주요 단월(檀越)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하여 최우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수선사와는 달리 1230년대 이후에 와서야 최우정권이 백련사의 단월로 부각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몽고군의 침입과 관련하여 백련사가 강력한 대몽항전을 표방한 것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2)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13세기 전후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주도세력의 출신성분이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는 13세기 전후 시기가 고려 불교사의 전환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령 지눌과 요세의 경우, 각각 황해도 서흥군의 독서층과 경상도 합천의 호장층 출신으로서 불교계를 주도한 인물들인데, 이는 이전의 문벌귀족이나 왕족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눌과 요세를 계승한 다음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수선사의 2세 주법인 혜심(1178∼1234년)과 백련사의 2세인 천인(天因, 1205∼48년)과 4세인 천책(天책, 1206∼?) 등을 들 수 있다. 혜심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그의 부는 향공진사였다. 1201년(희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그의 모친 배씨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1202년 지눌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이러한 혜심의 경우에서도 그가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인의 속성은 박씨이며 충남 연산 출신인데, 1221년(고종 8) 17세 때 진사과(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고예시(考藝試)에 제일로 뽑혔으나 그 뒤 예부시를 포기하고, 1228년에는 동사생 허적, 진사로 뽑혔던 신극정과 더불어 요세에게 입문하였다. 이 사실로 보아 천인도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천책의 경우에서도 동일한 출신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천책은 바로 천인과 함께 요세에게 입문한 진사 신극정이다. 그는 경북 상주 관내의 산양현(지금의 문경군)에서 출생했으며, 이 지역의 토호세력인 신씨 가문 출신으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그 뒤 예부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관로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포기하고 1228년 23세 때에 요세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의 자제들이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거 불교계에 투신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현상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통해 볼 때 이 시기에만 보이는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附庸)적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설적으로 이들 유학자들이 수선사와 백련사 등의 결사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면에는 사상적으로 당시의 유학의 분위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상체계를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에서 표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사상내용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피할 생각이지만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가장 선진성을 지닌 사상을 표방한 인물들이 바로 지눌과 요세를 비롯한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신앙결사를 지원한 단월의 출신을 살펴보면 비록 수선사가 최우 집정기 이후에 가서 최씨정권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들 결사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는 결사의 주도세력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토호층과 독서층이 중심이었다. 백련사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층인 최씨가의 지원에 의해 강진의 만덕산에 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수선사의 경우도 결성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향리와 지방의 민들이 주요한 단월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문벌귀족이나 왕실에 의해 독점되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 나아가 일반 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게 된 것은 13세기 전후에 야기되었던 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신앙결사운동은 13세기 중반의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하였다. 수선사는 최충헌 집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최우 집정기에 이르러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사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당시 수선사를 주도한 인물은 혜심이었다. 혜심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어 수선사 제4·5세인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단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에는 가지산문의 일연 계통이 부각됨으로써 서서히 퇴조하였다.
백련사도 요세 이후 천인, 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지배기인 1284년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인 묘련사가 건립됨으로써 백련사의 사상적인 전통이 변질되었다. 백련사 출신인 경의(景宜)와 무외(無畏)가 묘련사에 참여한 것을 볼 때 백련사의 본래적인 성격이 변질·해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묘련사를 뒤에 원지배기에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趙仁規) 가문이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원지배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수선사 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 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적인 저력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긴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명승(名僧)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경도되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한 사상적인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 주조는 다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4. 고려 말의 불교계 동향

 

13세기 초반의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불교계는 대내외적으로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원지배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의 결과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원지배기라는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 다른 하나는 13세기 전후에 이룩한 신앙결사 계통을 계승하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부각된 가지산문(迦智山門), 백련사(白蓮社)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 그 계승을 표방한 묘련사 계통, 또 주로 원에 사경승(寫經僧)을 파견함으로써 부각된 법상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무신란 이후의 최씨집정기에 수선사·백련사 계통의 인물들이 대부분 국사·왕사로 책봉 또는 추증된 것에 비해 충렬왕대 이후에는 대체로 가지산문, 묘련사 계통, 유가업(법상종) 출신들이 국사·왕사로 책봉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묘련사를 중심으로 한 경의(景宜)·정오(丁午)·의선(義璇) 등 백련사 계통의 출신 인물들은 요세·천인·천책·무기(無寄)로 이어지는 본래 결사의 경향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즉 이들이 비록 백련사 계통에서 출발한 승려라고 하나 왕실과 원황실의 원찰로 건립된 묘련사와 관련을 맺었다는 점, 또 묘련사는 뒤에 원지배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 가문에서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 또한 조씨 가문에서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만의사·청계사 등의 원찰까지도 확보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나아가 천태종 교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전반에 신앙결사에 의해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계의 모순을 척결하고자 했던 시도는 무너지고, 불교계는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을 아우르지 못하는 단계로 후퇴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단운영에 부응하여 각 사원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종교외적인 기능만을 극대화하는 온상으로 변모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불교계 내부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게 된 것이 결국 주자성리학이었다.
원지배기하에서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가지산문이었다. 가지산문이 부각된 경위는 13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일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일연은 정치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는 1258∼70년대의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는 1258년의 왕정복고에 참여한 주체세력에 의해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가지산문의 등장배경과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연(1206∼89년)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大雄長老)의 제자가 됨으로써 가지산문에 입문하였는데, 이후의 생애는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상도 현풍의 비슬산의 여러 사원에서 머물던 시기(1227∼48년), 둘째, 정안(鄭晏)의 초청에 의해 남해 정림사에 머물기도 하고, 또 지리산 길상암에 거주하던 시기(1249∼60년), 셋째,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의 선월사에서 주석한 이후 경상도 지역의 오어사·인홍사·운해사·용천사에서 주석하던 시기(1261∼76년),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서 주석하다가 연이어 국존(國尊)에 책봉되었으며 그 뒤 입적한 말년까지의 시기(1277∼89년)로 나눌 수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다음의 몇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일연은 최씨집정기·대몽항전기에는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서 잠적, 은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2세기 초에 학일이 말년을 운문사에서 보내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한 가지산문이 무신란 이후, 특히 최충헌 집정기에 ‘운문’(雲門), ‘운문적’(雲門賊)으로 불린 농민항쟁으로 인하여 그 세력이 위축된 것과 관련지어 파악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정안의 초청에 의해 정림사에서 주석한 것을 계기로 하여 대장경 조판에도 참여하였으며, 특히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갖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연은 수선사의 2세인 혜심의 『선문염송』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수선사의 3세인 몽여(夢如)와는 직접 교류를 통해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씨정권 몰락 후 1261년 원종에 의해 강화도 선원사(禪源社)에 초청되었을 때 민지(閔漬)의 표현대로 ‘요사목우화상’(遙嗣牧牛和尙), 즉 ‘멀리 목우화상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라고 하여 수선사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일연이 원종에 의해 선원사에 초청된 이후, 원종을 중심으로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배려에 힘입어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때 일연은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선·교종의 명승을 모아 대장낙성회를 주관한다든가, 1274년에는 비슬산 인홍사를 충렬왕의 사액에 의해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하고, 또 같은 해에 비슬산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는 등 일련의 활약을 통해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던 것이다. 넷째, 일연은 1277년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에 주석하고, 그 뒤 1281년 6월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의 격려차 경주에 왔을 때, 행재소에 부름을 받게 됨에 따라 승려로서는 화려한 승직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수선사를 이끌어가던 충지(沖止, 1226∼92년)는 일연과는 달리 왕의 부름도 거절한 채 여러 사찰을 순력하면서 당시 동정군 준비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일련의 시를 남길 정도로 대조적인 길을 걸었다. 이러한 충지와 비교할 때 일연이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신중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일연의 말년 행적을 비추어볼 때 그가 소속된 가지산문은 이전 시기에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수선사와 백련사에 대신하여 원지배기에 등장한 불교계의 주요세력으로 파악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1283년 국존이 된 이후 일연은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하여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그를 중심으로 가지산문이 선종계, 나아가서 전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래 일연의 문도는 아니었지만 일연의 문도로 영입된 청분(淸 )의 사례에서도 일연 중심의 가지산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청분은 바로 혼구(混丘)인데, 일연을 계승하여 가지산문을 주도하였으며, 뒤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간행하면서 몇 개의 주를 보충한 무극(無極)이다.
이와 같이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됨에 따라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지배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에 의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 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나옹혜근(懶翁慧勤) 등이 출현할 정도로 불교계의 중심세력으로 존속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 보우가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면서 한때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했던 기반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원지배기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보수적 경향의 세력에 의해 불교계가 장악되고 있을 때, 이들과 대항하면서 당시 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과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일련의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백련사 계통의 사상적 경향을 계승한 운묵무기(雲默無寄)를 들 수 있다. 무기는 14세기 초반기에 활약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의 뚜렷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단지 그가 남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무기는 이 저술에서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고 원지배기의 참담한 현실 속에 처해 있던 대다수 일반 민들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실천신앙으로의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권문들과 원당이라는 명목하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들의 일반 민들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계에 대항한 진보적인 세력들의 노력은 참담한 현실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일반 민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나 나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들이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문제를 철학면(세계관)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과 공덕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한계성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제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과 그 추진세력의 결집이 불교계 자체에서 구축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특히 14세기의 화엄종에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신앙형태도 차츰 신비적인 영험과 공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화엄종의 승려인 체원(體元)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특히 체원이 간행을 주선하면서 스스로 발문을 지은 일종의 위경(僞經)인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의 성격을 검토하면 당시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은 천태종의 요원(了圓)이 찬술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이라든가, 또 당시 왕실과 권문귀족에 의해 제작된 많은 수의 사경·불화류, 심지어 미륵하생신앙에 바탕한 매향신앙(埋香信仰)이 해안이나 도서 지역에서 유행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밀교 계통으로서 신비적인 성격이 강한 원의 라마불교의 말폐적 영향임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는 바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던 단면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원지배기의 불교사를 보수적인 경향과 이를 비판하는 진보적 세력으로 대별해 보았다. 그렇지만 원지배라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핵심적인 교단세력은 보수적인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단지 이에 대응하여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각에서 시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향까지도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 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는 등의 사회경제적 모순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불교계가 사회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서 그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 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말선초에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약 1세기 후에는 명실상부한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Ⅶ. 조선 전기의 성리학

1. 성리학의 수용

 

(1) 성리학의 성격

 

성리학은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성립된 유학사상체계이다. 5대(五代) 10국(十國)을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이 결여하였던 우주론·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공자·맹자 이래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북송 이래의 새로운 유학사상의 조류는 남송대 주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성리학은 북송대부터 남송대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철학기초를 마련하면서 성립되었는데, 성리학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로는 주돈이·장재·정이·주희 등이 있다.
주돈이(周敦 , 濂溪, 1017∼73년)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어 성리학의 우주론을 정립하였다. 『태극도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우주론은 태극(太極)에서 음(陰)·양(陽)이 생성되고, 음양이 변하고 합하여 오행(五行, 水·火·木·金·土)을 내었고, 오행이 모여서 건(乾)·곤(坤)이 되고, 건곤이 각각 남·여를 낳아 남녀가 합쳐서 만물을 이룬다는 것이다. 『태극도설』은 다분히 노장(老莊) 계통의 우주론에 근원하고 있지만, 『태극도설』의 우주론이 노장사상이나 불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를 허무하다고 보지 않고 모든 이치를 구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우주 근원의 실체인 태극은 탐구하여 획득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송대 신유학의 학풍은 『태극도설』에서 제시된 우주론을 통해 유교 본래의 합리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주돈이에서 우주론이 마련된 성리학은 장재(張載, 橫渠, 1020∼77년)와 정이(程 , 伊川, 程子, 1033∼1107년)를 거치며 이기론(理氣論)의 논리를 마련하여갔다. 장재는 기(氣)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현상세계를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기로 구성되어 있어 기가 모여서 만물을 이룬다는 것이다. 한편 정이는 성리학의 핵심적인 이(理)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정이는 우주의 근원은 이이며, 이의 원리에 의하여 만물을 구성하는 기가 생긴다고 하였다. 장재의 기개념이 현상계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데 대하여, 정이의 이(理)개념은 현상을 있게 하는 근원을 설명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기가 사물을 구성하는 물질적이며 구체적인 존재라면, 이는 기를 조작하는 원리로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인 것이다. 장재가 기개념을 가지고 현상세계를 설명한 데 비하여, 정이는 사물의 존재원인과 당위성을 찾으려는 방향에서 이개념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기와 이의 개념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때에 와서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성리학의 중심개념이 되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기초 위에 정이는 성즉리(性卽理)의 기본개념을 정립하였다. 곧 정이는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이치를 합일시킨 주돈이의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을 계승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에 근원한다는 성리학적 인간관의 기본골격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주희(朱熹, 朱子, 1130∼1200년)는 이러한 북송 이래의 사상경향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유학사상체계로 성리학을 정립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는 유교의 경전을 새로운 철학적 시각에서 해석하였다. 『논어집주』(論語集註), 『맹자집주』(孟子集註),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와 『시경집전』(詩經集傳), 『서경집전』(書經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는 신유학의 관점에서 유교의 경전을 재해석한 것이었다. 사서(四書) 삼경(三經)에 대한 주자의 해석은 주자주칠서(朱子註七書)라 하여 성리학의 가장 핵심적인 경서로 중요시되었다. 이밖에도 그는 성리학 입문서인 『소학』(小學)을 만들었고, 예서(禮書)로서 『가례』(家禮)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만들었으며, 사서로서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은 주돈이에 의하여 노장사상의 허무주의와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장재에 의한 기의 논리를 거치며 현상적인 세계에 대한 정연한 논리를 수립하였으며, 다시 정이에 의한 이의 논리와 성즉리의 사상을 매개로 하여 주자에 이르러 종래의 유학과는 다른 유학사상체계로 성립되었다. 그럼으로써 송대의 신유학은 도교와 불교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과 실천이념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유학으로서의 성리학은 송대에 부상한 사대부층에 의해 성립된 사상체계였다. 당송 변혁기를 거치면서 대두한 신흥 중소지주층은 특권적인 문벌귀족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향상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발달시켰다. 특히 남송대 양자강 유역의 수전개발에 따라 지주전호제는 크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사회조건 속에서 성립된 성리학은 중소지주층의 정치사회적인 입장을 반영했다.
성리학에서 이기론은 우주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는 논리인 동시에 인간사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다. 우주만물은 형이상(形而上)의 이와 형이하(形而下)의 기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는 물성(物性)을 결정하고 기는 물형(物形)을 결정한다. 태극이나 도(道)로도 표현되는 이는 기작용의 법칙을 의미하는 보편적인 원리이며, 기는 이의 주재를 받아 생멸하는 차별적인 현상이다. 성리학에서는 이가 보편성을 설명하는 개념인 데 비하여 기는 차별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원리로서의 이는 당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리학자들은 우주와 자연계보다는 인간의 심성과 사회질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성리학이 이전의 유교와 크게 다른 점은 정치·사회·윤리의 기초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이를 정밀한 이론으로 발전시켰다는 데에 있다.
성리학에서 인간은 하늘의 이(天理)를 받아 성(性)을 갖고, 기를 받아 형체를 이룬 존재이다. 인간은 이를 부여받아서 본래의 성(本性)은 선하지만, 동시에 기도 받고 있으므로 기의 맑고 흐림(淸濁)에 따라 선악(善惡)이 나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보편성을 가지며, 기에 의해서 선악이 나뉜다는 점에서 각각의 인간은 차별성을 이룬다. 이와 같이 성리학에서는 이에 의한 착한 본성이라는 인간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에 의한 차별성으로 인간 사이의 현실적 차별을 인정하는 것이다.
천리를 받아 이루어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리학의 인간관은 맹자의 성선설을 ‘성이 곧 이’라는 논리(性卽理)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인간관은 인간이 본래 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선해질 수 있다고 본다. 곧 인간의 학문, 도덕적 수양에 의하여 인간의 착한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리학에서 모든 인간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은 중소지주층의 성장에 따른 인간관의 변화였다. 성리학적 인간관은 인간의 주체성과 자립성을 인식하여 숙명적 인간관을 극복한 점에서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의 보편성이 기에 의한 차별성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점은 인간 사이의 현실적 차별성을 합리화하는 철학적 논거로서 기능한다.
성리학이 형성된 중세사회는 지주와 전호농민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중소지주들은 지주전호제의 한 축인 일반 농민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위에서 사회적 인간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서 도출된 이론이 명분론이었다. 명분론은 이에 의한 통일적 세계 속에서 기에 의한 현실의 차별적 인간관계는 각각의 사회적 위치(名分)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모든 사회구성원은 상하귀천의 차등적 상태를 인정한 위에 각각의 직분을 가지고 전체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집약되는 명분론 속에는 신분간의 차별, 화이(華夷)간의 차별도 포함된다.
이러한 명분론적인 인식은 예(禮)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예는 이의 구현으로서, 인간질서의 당연한 준칙인 동시에 현실에서의 실천기준이 된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명분론적인 사회질서를 예적 질서라 보고,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예의 실현을 추구하게 된다. 가족내에서는 가례(家禮)가, 향촌사회에서는 향례(鄕禮)가, 국가차원에서는 국례(國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예에 의한 정치(禮治)였다. 그럼으로써 상하차등의 분수가 지켜지는 속에서 유교적인 도덕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세계관과 인간관에 기초하여 성리학에서는 공자·맹자 이래의 인정·덕치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성리학은 인륜과 도덕을 우주질서 및 인간 심성과 통일적으로 해석하여 정치철학의 이론을 제공했다.

 

(2) 성리학의 수용

 

남송대에 성립된 성리학은 고려 후기 사대부들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지방의 향리층이 성장하였고, 이들은 휴한법(休閑法)의 극복 등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토대로 성장하면서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사대부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권문세가에 의한 고려사회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복속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새로운 사상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성리학이 제공하는 정치철학은 이들이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논거를 제공해주었으며, 지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성리학은 지주적 위치로 성장해가는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또한 북방족에 쫓겨 남송에서 성립된 성리학의 중화주의는 고려가 처한 자아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고려 유학의 수준은 상당한 정도까지 심화되어 신유학의 요소들을 배태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성리학은 지방향리 출신의 사대부들에 의하여 도입되고 수용되어갔다.
성리학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는 안향·백이정·우탁·권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향(安珦, 1243∼1306년)은 1289년 원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들여왔다. 안향의 주자학 도입은 주자학을 처음 들여오고 최초로 주자를 경모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14세기에 들어와 백이정·우탁·권보들에 의해서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백이정(白 正, 14세기초)은 원에서 10여 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연구한 뒤 정주서(程朱書)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우탁(禹倬, 1263∼1342년)은 『주역』에 대한 정이의 해석(程傳)을 최초로 해득했으며, 권부(權溥, 1262∼1346년)는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주자학을 보급했다.
한편 고려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만권당(萬卷堂)을 통한 원과의 학술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만권당은 충선왕이 1314년경에 설립한 기관으로, 한족 출신의 학자와 고려의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한족 출신의 문사로는 조맹부(趙孟 , 松雪, 1254∼1322년) 등이 있었으며, 고려의 문사로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년) 등이 있었다. 만권당을 통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문물이 수용되어 고려의 신흥사대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만권당에서 원의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고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양자강 남쪽을 여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는 원의 성리학과 아울러 주자성리학의 발상지에서 남송의 성리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한 뒤에 이색 등에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이와 같이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에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개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현이 귀국하여 성리학을 전승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제현의 문인인 이색(李穡, 1328∼96년)에 의하여 성리학이 사대부들에게 급속히 보급되었고, 사회개혁이념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의 개혁과 함께 성리학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급되고 사대부들에 의한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공민왕대에 있었던 성균관의 개수와 과거제의 정비는 신흥사대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균관에서는 이색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정몽주(鄭夢周, 1337∼92년), 이숭인(李崇仁, 1349∼92년) 들이 교관(敎官)으로 있으면서 많은 주자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학풍은 국가적 차원으로 세련되어 갔으며 성리철학에 대한 이해와 성리학 윤리의 실천도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사대부들은 고려사회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나아가 신왕조를 건국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수용한 층은 고려 후기에 성장한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극대화된 사회모순과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중앙집권력을 강화하고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에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이러한 이념을 제공한 사상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향리 출신의 사대부들은 현실비판의 근거와 새로운 체제모색의 기준을 성리학에서 찾은 것이다. 중소지주층의 사고를 반영하는 성리학이 중소지주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대부들에 의해 수용되어 개혁이념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북송에서 시작된 신유학의 학풍은 남송의 주자에 의하여 주자학으로 집대성되고, 남송의 주자학은 원을 통하여 고려에 전해졌다. 그렇지만 송·원 양대에 집적된 성리학은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북송대에는 치세에 도움이 되는 유서학(類書學)*52과 사학(史學)이 발달하고 남송대에는 성리철학이 발달하였으며, 원대에는 성리학 중에서도 실천윤리의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신유학의 계속적인 전개 속에서 고려의 사대부들은 송에서 원에 이르는 동안의 여러 학풍들을 선택해서 수용하게 되었다.
14세기 전반까지는 주로 원으로부터 성리학이 수용되었다. 원의 성리학풍은 성리철학보다는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원의 성리학계는 『소학』에 의한 실천윤리를 강조한 허형(許衡, 1209∼81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고려의 학자들이 만권당에서 접촉한 중국의 학자들도 허형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시기가 지나고 성리학 수용의 욕구가 증대되면서 양자강 남쪽의 성리학도 점차로 접촉하게 되었다. 또한 충만된 사상적 욕구로 고려사회의 개혁방향을 모색하던 사대부들은 북송대의 신유학적 흐름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의 성리학풍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여러 사상 조류들이 다양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정에서 새로이 성장하는 사대부들이 중국의 신유학을 수용하는 입장은 약간씩 차이를 보였다. 그같은 입장의 차이는 사회개혁의 방향과 정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고려사회의 개혁 및 신왕조 건국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성리철학의 측면은 주자의 사서삼경집주에 대한 해석이 주된 것이다. 이색에서 성리철학에 대한 이해가 보이지만 고려 말 성리철학의 대표적인 학자는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자신의 이론을 정리한 저술은 많지 않으나 당시에 가장 성리학에 정통하였다고, 하여,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 성리학의 시조(東方理學之祖)라고 평하였다. 한편 정도전(鄭道傳, 1342∼98년)은 성리학의 이기론으로 불교를 이론적으로 정밀하게 비판하였다.
실천윤리의 측면에서는 『소학』과 『가례』의 윤리가 중시되었다. 정몽주와 길재(吉再, 1353∼1419년)가 대표적인 인물로, 정몽주는 『가례』의 시행을 주장하였으며 길재는 『소학』과 『가례』를 중시하였다. 실천윤리의 측면을 강조한 부류의 학자들은 대체로 『춘추』(春秋)의 대의명분을 중요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분을 중요시하면서 지주층의 정치적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생각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상하 신분적 명분 의식을 강조였다. 정몽주와 길재가 전제개혁에 소극적이고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그 사상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중시하고 대의명분을 강조한 사상적 흐름은 조선 건국 뒤 사학파로 계승되어갔다.
한편 고려사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대부들은 왕권강화에 의한 중앙집권체제와 사대부들에 의한 관료정치를 추구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이러한 방향의 개혁을 원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전제개혁과 역성혁명을 주도한 부류의 학자들은 맹자의 역성혁명론과 『주례』(周禮)를 중요시하였다. 정도전이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소학』과 『가례』에 대하여는 별다른 관심을 표시하지 않은 대신 『주례』의 질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가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년)은 『주례』의 체제를 따라 만든 것이었다. 『주례』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북송대의 사상경향과 유사한 측면이다. 그리하여 전제개혁과 역성혁명까지를 포함하는 급진적인 개혁이 주장되었으며 강력한 왕권을 정점으로 한 관료제적 중앙집권체제가 추구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조선 건국에 참여한 관학파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2. 15세기의 유교정치와 성리학

 

(1) 유교정치 기반의 확립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 유교정치는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민본정치(民本政治)를 표방한다. 유교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소양을 충분히 갖추어야 했으며 국가의 제도와 의례도 유교적으로 정비되어야 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윤리가 일반화되어야 했다.
건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가 급선무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유교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유교적인 문물제도의 정비가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송대 유학의 새로운 경향을 수용하면서 주자성리학 이외에 공리적·박학적인 학풍까지도 받아들였으며,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리철학보다는 중국과의 외교와 제도문물의 정비에 필요한 사장학(詞章學)과 유서학 등이 원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불교·도교·민간신앙적인 요소가 여전히 유교적인 질서와 대립하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유교의 질서를 보급하려 하였지만 유교가 갖지 못한 종교적인 기능은 여전히 불교·도교·민간신앙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같은 경향은 지배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후 태종대를 거치며 가묘제(家廟制)·이사제(里社制) 등 유교적인 질서를 부여하려 하였으나 왕권강화의 시급성과 전통적 신앙종교의 강인성으로 제대로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 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의 전통적 사상 신앙은 유교이념의 구현이란 점에서 배척되기도 하였으나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라는 필요에서 용인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유교정치는 세종대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해 많은 학자들을 양성하여 성리학을 학습하게 하였고, 고제(古制) 연구를 통한 유교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유교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유학자군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어갔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覽), 『대학연의주석』(大學衍義註釋) 들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훈계하는 것이었다. 또한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1434년)를 간행하여 유교적인 사회윤리를 보급하였다.
그리하여 세종대에는 왕도정치와 민본사상이 함께 표방되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민본적 정치의식의 소산이었으며, 『농사직설』(農事直說),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따위의 농서와 의약서의 간행은 민생의 안정이라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의 반영이었다.
한편 세종대에는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세종대에는 명에서 만들어진 『사서대전』(四書大全)·『오경대전』(五經大全)·『성리대전』(性理大全)들이 들어와 간행되었으며, 경연(經筵)*53에서도 『성리대전』·『근사록』(近思錄)들의 성리서가 강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리서의 간행과 학습은 이 책들이 송대부터 원대까지의 여러 성리설을 집대성한 서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종대의 성리학 연구로 훈민정음이나 음악의 정리, 천문역상의 정리 등에 성리철학의 우주관과 이기론적 논리가 반영되었다. 세종대의 성리학풍은 고려 말의 성리학을 계승한 위에 유교국가로서 조선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의 유교정치와 성리학풍은 세조의 왕위찬탈로 단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여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들을 축출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조나 그의 즉위에 참여한 학자들은 성리학적 명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대에 양성된 유학자들 사이의 사상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비유교적이며 비성리학적인 경향을 띠는 방향에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 세조대에 도모되었다. 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의 요소가 부각되고 공리주의적인 방향에서 중앙집권제의 강화가 추진되었다.
15세기 말 성종대에 와서야 세종대 이래의 유교적인 의례제도 정비가 마무리되었다. 유교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인 체계가 『경국대전』으로 완성되고, 국가차원에서 시행해야 할 유교적인 의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정비되었다. 또한 북송대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이 만들어졌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지방에서 성장한 성리학자들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과정에서 누적되어온 모순과 사회의 각 부분에 부리내린 불교·도교·민간신앙의 요소들을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의하여 비판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학파를 모태로 하여 형성된 사림파로서, 관학파를 모태로 한 훈구파를 비판 공격하였다.
세종대로부터 성종대에 걸쳐서 진행된 유교적 제도와 의례의 정비는 유교정치를 지향하는 조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 외에도 사장학·유서학 등 송대의 여러 신유학적 흐름이 다양하게 원용되었다. 그것은 건국 초의 왕권안정과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라는 시대적 요청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성리철학보다는 실용적인 제도의 정비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불교·도교·민간신앙 요소들이 섞여 있어 그것들은 유교적 질서와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합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합리주의인 유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에서 연유한 것인 동시에,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전통적인 신앙종교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기조 위에 종교 신앙적인 전통을 결합하여 국가적인 일체감을 조성하고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2) 전통적 신앙과 유교이념

 

1) 전통적 신앙의 사회적 기능

 

조선을 건국한 지배층은 성리학을 내세우고 유교정치의 기틀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들은 유교윤리와 배치되는 신앙과 종교는 모두 배제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은 오랜 전통과 종교적인 욕구로 여전히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었다.
불교는 사후의 명복이나 현세의 구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종교적인 기능을 해오고 있었으며, 국가차원에서는 삼국 이래로 호국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이러한 기능으로 인하여 고려시대에도 국가차원에서나 개인차원에서 불탑의 조성, 불경의 간행과 그밖의 여러 불교행사가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조선이 비록 유교국가를 지향하고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지만 유교적인 의례만으로는 불교의 호국적 기능과 종교적인 기능을 대신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에 대한 정치·사회·경제적 탄압은 계속 강화되었으나 불교는 여전히 일반 백성들의 의식세계의 상당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15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화장 등의 불교식 장례가 지속되었고 재난을 당했을 때 사원에 가서 기원하는 풍습도 여전하였다. 사대부나 왕실에서조차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도교의례를 시행하는 기관들이 설치되어 도교적인 제사가 치러져왔다. 조선시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도교의 시행기관과 도교의례에 대한 혁파조치가 취해졌으나 소격서(昭格署)*54와 초제(醮祭)는 계속 남아서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유교의 합리주의에 의거하여 도교의 기관과 의식을 혁파하였지만 재앙에 대한 도교적인 의식을 거부할 수 없었다. 도교를 이단시하더라도 천지자연의 재난을 당했을 때 유교의 합리주의만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교적 의례를 주관하는 소격서는 조선 전기에 계속 존치되었으며 도교의 의식 중에서 초제는 계속 시행되었다.
한편 민간의 천지·일월성신·산천·성황 등 자연·귀신에 대한 숭배는 원시신앙에서 기원하는 것이지만 여말선초까지 그것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원시시대 이래의 자연숭배 및 귀신신앙은 고대국가 성립 이후로는 국가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식화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당해 산천과 성황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제사가 공식적으로 행해졌으며, 부락수호신인 성황에 대한 제사와 무당에 의한 신당(神堂)도 국가적으로 용인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중앙집권의 미숙으로 인하여 개별신앙에 대한 일원적인 체계와 통제가 결여되었지만, 고려 후기에는 국가의 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잡다한 신앙들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말에는 자연촌락을 단위로 한 신앙행위가 광범위하게 성행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의 자연촌락 성장과 연관된다. 고려 전기까지의 대규모 지역촌락이 붕괴되고, 후기로 오면서 소규모 자연촌락이 성장해감에 따라서 자연촌락들은 개별신앙으로 공동체적인 구심체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는 불교에 대한 신앙행위와 더불어 자연촌락 단위로 신당·성황 등을 구심체로 하여 산천이나 마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행위가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민간신앙들은 무당에 의하여 주관되기도 하였고, 불교 또는 도교와 접목된 형태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에 대규모적인 불교신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던 향도도 고려 말에는 자연 촌락을 단위로 개별적인 신을 모시는 공동체로 변했다. 고려 말 민간신앙은 자연촌락의 공동체적 유대를 강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민간신앙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농업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한다든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직면하여서, 또 인간의 죽음을 당하여서 일반 백성들의 의식 속에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전통적인 민간신앙적 세계관이 일시에 배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성리학에서는 불교나 도교적인 내세관을 부정하고 기의 소멸로 죽음의 문제를 설명하지만 오랜 전통적인 관습은 쉽사리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에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심성과 합일시켜서 자연적인 재앙에 대하여도 군주와 지배관료의 덕성을 함양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기하였지만, 홍수·가뭄 따위에 직면하여서는 그것이 별다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그로 인한 심리적인 보상도 유교적인 의례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재래의 종교·신앙의 기능은 성리학을 표방한 조선 초기에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에서의 신앙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유교의 합리주의적인 이념과는 상치되는 것이었으며, 분열적인 신앙형태와 그 구심점인 향도나 신당 등의 존재는 국가의 중앙집권화정책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민간에서의 자연숭배와 귀신신앙을 유교적인 이념에 합당하게 재단할 필요가 있었고 국가적인 통일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유교적·성리학적 이념은 국가적·권력적 차원에서 계속 강화되어갔다.

 

2) 유교질서 수립의 방향

 

기존의 신앙과 종교를 유교적으로 대체하는 데 대해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민간신앙·종교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 유교적인 이념으로 재구성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자연촌의 성장이라는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향촌질서의 수립방향 및 유교사회의 이념을 구현하는 방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하여 왕권의 중앙집권적인 입장과 향촌사회에 직접 생활기반을 가진 재지(在地)의 지주사족의 입장은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 초기에 중앙정부와 재지사족들은 유교적 방향이란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현실적인 기반과 사상적 지향성에서는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국가에서는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민간신앙 및 종교를 유교적인 가묘제(家廟制)와 『주자가례』, 이사제(里社制) 등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가묘제는 집안마다 사당을 설치하여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제도로서 송대에 정비된 제도였다. 『주자가례』에서는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가묘제와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지냄으로써 불교나 무속을 따랐던 상제의 습속을 유교식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상숭배의 제례를 통하여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족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통하여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가묘제는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활발히 추진되었으나 일반 사대부들조차 적극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주자가례』의 삼년상도 세종대를 거치며 점차 왕실에서 시행되면서 보급되어 갔으나 15세기 후반에도 민간에서는 불교 또는 무속적인 상제의 유풍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이사제는 향리마다 마을사당을 세워 마을사람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마을의 친목을 도모하고 경제적인 상호협력을 꾀하며 악한 행위를 한 자를 징계하는 제도였다. 이사제는 농업사회에서 전래되어온 신앙의 풍습을 어느 정도 인정한 위에서 농촌질서를 유교화하여 유교적인 윤리의 사회적 기반을 굳히기 위해 시행된 것이었다. 일반 백성들이 사적으로 산천에 제사하는 풍습을 금지하고 이사제를 수령이 관장하게 함으로써 민간신앙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다시 말해 이사제는 자연촌락을 유교적 공동체로 묶음으로써 분열된 신앙들을 일원화하는 동시에 각각의 자연촌락을 중앙정부와 직결시킴으로써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제는 태종 때에 강력히 실시하였으나 실제로 시행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지방관의 소재지에서는 이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지만 모든 지방에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연숭배에 대하여도 일정한 전범을 마련하여 국가의 의례속에 지방의 민간신앙을 질서지었다. 유교의 의례에 천자(天子)는 천지와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사직(社稷)과 경내(境內)의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대부(大夫)는 오사(五祀)에 제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조에서는 이러한 유교적 의례를 따라 하늘에 대한 제사는 금지하였으며, 자연부락 단위로 행해지는 산천과 성황신에 대한 제사를 국가차원에서 일원화하였다. 명산대천과 성황을 등급화하여 국가 또는 지방관이 주관하게 하고, 그밖의 산천과 성황에 대한 신앙은 음사(淫祀)라 하여 금지하였다. 또한 명산대천과 성황에게 호국의 작위를 부여하고 민간의 전통적 자연신을 호국지신(護國之神)이라 이름하여 불교의 호국적 기능을 대체하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군에 대한 제사도 올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군을 제사하는 것은 기층사회에 토속신앙으로 머물던 단군신앙을 국가차원로 승화시켜 신왕조의 정통성과 국가의식을 정립하려는 뜻이었다. 산천과 성황에 대한 제사를 국가차원에서 등급화하여 질서를 세우고 단군에 대한 제사를 시행하는 것도 중앙집권적체제와 군현의 지방통치체제를 강화하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전통적인 불교·도교·민간신앙을 배척하려 하였지만 그 초자연적인 종교적 기능을 유교이념으로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합리주의인 유교가 갖는 한계성에서 연유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종교 신앙의 세계관이 강인하게 존속되어 성리학 이념이 사회저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에서는 중앙집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전통적인 종교신앙을 이단·음사라고 배척하면서도 유교가 갖지 못한 종교신앙으로서의 기능을 유교의례 속에 구성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음사의 근절을 표방하였지만 중앙집권적인 왕권에 배치되는 면들만을 제거하고 민간의 사소한 신앙행위에 대하여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한편 재지사족들은 향촌질서를 사족중심으로 확립하려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한량품관(閑良品官)이라고 불리던 재지사족들은 유향소(留鄕所)*55라는 독자적인 기구를 만들어 향리세력을 억제하고 수령에 대항하면서 사족중심의 향촌질서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의 자연촌락에 강한 독자성을 부여하는 민간신앙에 대하여 훨씬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사족들은 사족이 중심이 되는 방향에서 성리학적인 이념으로 민간신앙을 대체하려 하였다. 중앙정부에서도 민간신앙을 유교적 질서로 대체하려 하였지만 중앙정부의 정책은 관권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재지사족들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면도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은 이들의 향촌사회에서의 기반마저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족이 중심이 되어 성리학적인 향촌질서를 추구하여 사창제(社倉制)*56·향음례(鄕飮禮)*57·향사례(鄕射禮) 등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재지사족의 대응은 16세기에 향약의 실시로 이어져서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뿌리내리게 되는 것이다.

(3) 관학파의 성리학

 

1) 정도전의 불교비판

 

고려시대에는, 정치는 유교로 하되 개인의 수양은 불교로 한다고 하여 유교와 불교가 공존했다.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사원의 비대화, 승려의 세속화와 더불어 불교는 시대사상으로서의 그 한계성을 노출하게 되었다. 아울러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여 유교적인 질서를 추구해감에 따라 불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고려 말의 불교비판은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만을 비판하는 온건한 부류와 근본적으로 불교를 비판하는 강경한 부류가 있었다. 온건한 입장에서는 불교교리 자체는 인정하면서 승려나 사원의 비행과 그로 인한 폐단만을 비판하였다. 이제현·이색 등이 이러한 온건한 입장에 선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제현·이색은 불교의 현상적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불교교리 자체는 인정하고, 불교와 유교가 근본적으로는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불교의 자비(慈悲)·희사(喜捨)와 유교의 인(仁)·의(義)를 같은 것이라고 보았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한 근본적 비판 내지 철저한 배격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은 물론 이론적인 차원에서 불교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이다. 정몽주·정도전 등이 고려 말 불교를 비판하고 배척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정몽주는 불교의 세계관을 『주역』(周易)의 논리를 가지고 비판하였다. 그는 『화엄경』(華嚴經)보다 『주역』이 낫다고 하여 불교의 이론을 이기는데 『주역』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고, 『주역』의 이론을 통해 불교의 윤회설(輪廻說)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유교도덕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유학의 길은 모두 일상생활에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수양을 극진히 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혼자 앉아서 일체의 현상을 공허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하였다. 정몽주는 불교식 장제인 화장을 금지하고 성리학적인 가묘제를 도입하여 『주자가례』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말선초 배불론(排佛論)의 대표적인 학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주자학의 논리로써 불교의 세계관과 논리를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심기리편』(心氣理篇, 1391년)에서 성리학의 불교·도교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였고, 『불씨잡변』(佛氏雜辨, 1396년경)에서는 불교의 교리를 상세히 비판하였다. 이들 저술들에서 보이는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사원경제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의 도덕적 측면에서 불교를 비판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가장 정밀하고 통렬한 것이었다.
먼저 정도전은 유교가 불교·도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불교는 마음(心)의 고요함만을 주장하여 무념(無念)을 강조하고, 도교는 기(氣)의 양생만을 주장하여 무위(無爲)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에서는 생각(念)의 선악이나 행위의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배제함으로써 현실세계를 도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이(理)는 심과 기의 근본으로, 이가 있으므로 기가 생겨났고 심은 이와 기가 있은 다음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근본인 이에 입각하여 심과 기를 모두 다스려서 선한 것은 행하고 악한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현실속에서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유교뿐이라고 하여 성리학의 기본개념으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주역』과 『태극도설』 및 주자의 설로써 불교의 정신불멸설과 윤회설을 비판하였다. 정신불멸설과 윤회설은 밀접히 관련되는 바, 인간의 육체는 죽어 없어져도 정신은 불멸하여 내세에 재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불멸설에 대해 정도전은 『주역』의 생생설(生生說)을 가지고 비판하였다. 생생설은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가 버리고 생겨나는 것은 계속 생겨난다”(往者去 續者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자연스러운 기의 변화(氣化)에 의해서 된 것으로, 기의 변화로 이루어진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죽으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정신불멸설을 부정하면 정신이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은 자연히 부정되는 것이다.
정신불멸설과 윤회설의 부정은 인과응보설의 부정으로 나아갔다. 인과응보설은 윤회설과 결합된 것으로, 인간행위의 선악에 따라 내생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응보설에 따르면 금생의 차별성은 전생의 업보로서 내생을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므로 현재의 차별성은 숙명적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이에 대하여 음양오행설을 빌려 자연과 인간의 차별상은 기의 차이에서 연유된 것이지 전생의 업보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견해를 따르면, 현실의 차별을 극복하는 길은 불교에서와 같이 선업에 의하여 타력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노력에 의한 도덕적인 수양으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성리학의 세계관으로 불교의 숙명적 인간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인간심성의 문제에 대하여도 정도전은 성리학의 논리로써 불교의 심성론을 공박하였다. 유교에서 심은 기이고(心卽氣) 성은 이(性卽理)이며 성은 심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기인 심은 지각력과 운동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理)인 성에는 이러한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심은 성을 살필 수 있으나 성은 심을 살필 수 없다. 유교의 “마음을 다하여 성을 안다”(盡心知性)는 것은 마음에 의거하여 이를 구하는 것으로 옳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심을 바로 성으로 여겨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의 “마음을 관찰하여 성을 본다”(觀心見性)는 것은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마음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니 모순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불교에서는 마음이 비어(空) 있다고 하지만, 유교에서는 마음이 비어 있기는 하지만(虛) 만물의 이치가 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다(實)고 본다. 그러므로 유교는 마음이 하나이지만 불교는 마음이 둘이며, 유교는 연속되지만 불교는 끊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도전은 성리학의 객관적 이개념으로 불교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판하였다.
정도전의 불교에 관한 설은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피상적인 면이 있으며, 불교의 고유개념을 유교식 개념으로 해석한 독단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성리학적인 견지에서의 논리정연한 비판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극복한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권근의 성리학

 

권근(權近, 1352∼1409년)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는 이색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태조·태종 연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학자들의 양성에 참여했다. 그는 조선 초기 관학파의 태두이다.
『입학도설』(入學圖說, 1389년)은 성리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대표적인 권근의 저술로서, 성리학의 기본적인 요점들을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본따서 그림으로 그려 초학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초학자들에게 그림을 그려 성리학을 가르치는 종류로는 정도전의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가 있었다. 『입학도설』은 『학자지남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초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정도전과 권근이 초학자를 위하여 성리학을 도설로써 풀이한 점은 관학적인 학풍과 관련하여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입학도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이다.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주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학설에 의거하여 인간심성에서 이기와 선악의 차이를 분석한 그림이다.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우주만물의 발생을 도설화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이어 인간심성의 문제까지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입학도설』은 조선 성리학사에서 도설의 비조이다. 『입학도설』은 권채(權採, 1399∼1438년)의 『작성도』(作聖圖)로 계승되고, 16세기에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거쳐 이황의 『천명도』(天命圖, 1553년)로 이어졌다. 권근의 『입학도설』은 성리론을 도설로 그린 최초의 작업이다.
권근은 기본적으로 주자의 성리설을 따라 주돈이의 우주 발생과정과 주자의 심성설을 견지했다. 그런데 이후의 조선 성리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이와 기로 나누어 배당했다는 점이다. 천인심성합일도에서 사단은 이에, 칠정은 기에 배당하였는데, 16세기 중반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권근의 천인심성합일지도에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
권근 사상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경(敬)이다. 천인심성합일지도에서 경을 강조했으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1391년)에서도 경이 중심개념이다. 천인심성합일지도에는 성리학의 이기론과 심성관에 근거하여 보통사람이라도 경을 가지고 수양하면 군자가 될 수 있고 군자가 경으로써 수양을 쌓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성리학적 인간관을 피력하였다. 『예기천견록』에서는 경을 예의 근본정신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론은 16세기 이후의 사림들에서 중시된다.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1391년)은 오경을 권근이 자신의 견해에 따라 해설한 저술인데 그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예기천견록』이다. 『예기천견록』은 이색의 가르침에 따라 만든 것으로, 각 편마다 달리 구성된 『예기』를 자신의 견해에 따라 바로잡아 재구성하고 해설하였다.
권근은 삼경(시경·서경·주역)에 구결(口訣)을 붙였다. 구결은 한문을 쉽게 해석할 수 있도록 토를 붙이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경서의 해석 및 이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시된다. 성리학이 들어온 뒤 성리학의 경서에 구결을 붙이는 것은 정몽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권근은 태종 초년에 경연의 강독을 위해 삼경에 구결을 붙였다. 그뒤 경연에서는 물론이고 성균관과 같은 관학에서 권근의 삼경구결에 의한 경서 해석을 따랐다.
권근의 성리학은 고려 말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관학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16세기 이후의 성리학계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점에서 권근의 성리학사적 위치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3) 관학파의 학풍

 

고려 말의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학으로 계승되었다. 국가에서는 향교·사학 등의 초등교육기관과 성균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교육기관에서의 주요과목은 사서삼경 등 성리학의 경서였다. 또한 과거에서도 사서삼경 등 성리학의 경서가 중심과목이었다. 국가의 이같은 성리학 진흥책 속에서 고려 말의 성리학은 조선에서 관학으로 계승되었다.
관학파는 권근과 그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성립된 학파였다. 권근이 태조·태종 연간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배출한 많은 제자들이 관학파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정도전도 조선 건국 직후에 권근과 쌍벽을 이루는 성리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자였을 뿐 아니라 『조선경국전』, 『경제문감』(經濟文鑑, 1396년) 등을 지어 건국 직후의 국가체제 정비에 기여한 경세가였다. 그는 학문적인 전수보다는 현실정치의 개혁에 몰두하여 결국 정권쟁탈과정에서 제거되고 말았지만 그의 경세적 학풍은 관학파들에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
관학파는 정치적인 제도와 의례의 정비에 나섰다. 권근의 제자 중에서는 권우(權遇, 1363∼1419년),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 맹사성(孟思誠, 1360∼1438년), 허조(許稠, 1369∼1439년) 등이 태종·세종조에 관료로 진출하여 유교적인 체제를 정비해나갔다.
권근의 성리학적인 학문은 김반(金泮)·김종리(金從理)로 이어졌다. 김반은 『입학도설』에 이어 『속입학도설』(續入學圖說)을 만들었고, 성균관에 20여 년간을 있으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김반은 사학파의 윤상(尹祥, 1373∼1455년)과 더불어 세종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혔다. 세종·세조대의 문신들은 김반·윤상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 많았다. 신숙주(申叔舟, 1417∼75년), 이석형(李石亨, 1415∼77년)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관학파는 주로 정계의 관료로 진출함에 따라 정치적인 변화에 따른 영향도 크게 받았다. 세종대의 학술진흥과 집현전 설치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는 듯했으나 단종대와 세조대의 정변은 관학파 내의 분열을 야기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대의명분에 충실하려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노정되었던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부류들은 사육신과 같이 죽음으로 대의명분을 지키기도 하고 생육신과 같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지조를 지키려 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실과 이념 사이의 극심한 갈등속에서 김시습(金時習, 1435∼93년)·남효온(南孝溫, 1454∼92년)과 같이 불교와 노장사상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관학파들은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면서 아직 완비되지 못한 제도와 의례의 정비작업에 나섰다. 성종대에 완결되는 제도와 의례의 정비는 이들 관학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성종대에 만들어진 『경국대전』·『국조오례의』·『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동문선』(東文選)·『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은 관학적 학풍의 소산이었다.
한편 세조집권에 참여한 관학파들은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들은 세조의 전제권력과 강력한 중앙집권화정책을 배경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훈구파로 지칭되면서 새로이 대두하는 사림파로부터 그 비리를 공격받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고 귀향한 학자들은 사학파(私學派)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다져가면서 개인의 교육기관, 곧 사학을 통하여 학문을 전수해갔다.
사학파는 길재(吉再, 1353∼1416년)에서 시작되어 조용(趙庸, ?∼1424년)을 거쳐 윤상으로 이어졌다. 사학파 학자들은 향촌사회에서 학문을 전수했지만, 세종대에는 중앙정계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조용의 제자인 윤상은 세종·문종 연간에 16년간 성균관에 있으면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길재와 윤상의 제자인 김숙자(金叔滋, 1389∼1456년)도 세종대에 중앙정계에 나아갔다.
그렇지만 사학파 학자들은 세조의 집권에 반대하고 다시 향촌 사회로 돌아갔다. 그들은 세조의 전제정치와 세조에 협력한 관료들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훈구파에 의해 자행되는 중앙정계의 파행성과 향촌사회에서의 수탈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적인 향촌질서를 통하여 향촌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며, 성종대에는 김종직(金宗直, 1431∼92년) 등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훈구파의 비리에 대해 공격을 하였다.

3. 16세기의 사림파와 성리학

 

(1) 사림파의 대두와 성리학 발달

 

1) 성리학적 가치의 인식

 

사림파는 15세기의 사학파에 연원을 두고 형성되었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 길재에서 비롯되는 사학파의 전통은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으로 계승되었다. 사학파의 학풍은 『소학』과 『가례』를 중심으로 성리학 이념의 실천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향촌의 중소지주층인 사학파들은 15세기부터 『주자가례』의 시행, 사창(社倉)의 보급 등을 통하여 성리학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여 가고 있었다. 이러한 성리학풍이 성종 연간에 와서 개혁이념으로 주목되면서 지식층에 공감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파는 15세기 말 성종 연간에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누적된 사회모순과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내세운 비판의 근거는 성리학 이념의 실천문제였다. 이 시기의 성리학은 고려 말의 성리학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이때 개혁이념으로 주목받은 것은 그동안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조선 초기의 중앙집권화정책은 수령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지방세력을 억제한 위에 군현제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권우위의 정책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노정된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수령의 권한을 극대화하는 정책은 수령의 수탈행위를 용이하게 하였고, 중앙의 훈구파 대신도 수령과 연결되어 사적인 이익을 극도로 추구하게 되었다.
훈구파 대신을 중심으로 한 관료층의 사익(私益) 추구는 지방 장시가 발달하고 중국과의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함에 따라 한층 부추겨졌다. 15세기 말에 대두한 지방 장시는 16세기 초에는 이미 전국화되어 있었고 중국과의 사무역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교역량이 증대되었다. 훈구파 대신들의 비리는 이러한 사회변동을 배경으로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매개로 한 것이었으며, 연산군대의 파행정치도 이러한 사회변동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일방적인 중앙집권화정책과 훈구파 대신 수령으로 연결된 침탈은 일반 농민은 물론 향촌지주층의 존립기반마저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향촌의 지주층은 향촌사회에 자치적 기능을 부여하고 유교적 도덕윤리를 함양하여 지배층의 비리를 배제하는 방향에서 사회안정의 해결책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한편 15세기 말부터는 과전법*58체제가 붕괴된 후 토지에 대한 수조권적인 지배가 무너지고 소유권에 의한 토지집적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소유권을 매개로 토지집적이 가속화되면서 지주전호제가 본격화되었다. 향촌사회의 지주층인 사족들은 지주전호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반 농민들의 경제적인 안정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으며, 동시에 전호농민들을 향촌공동체 속에 포함시켰다. 향촌사회의 구성원인 지주와 전호 사이의 관계를 신분제적인 질서 아래 규정하고 구성원간의 도덕적 화합을 강조하는 성리학적인 사회윤리는 사족지주들의 이해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림파에 의하여 주목된 성리학은 중앙정치의 파행성과 향촌사회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국왕이나 지배관료층의 도덕성과 성리학적인 향촌질서가 주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파들은 중앙정치에서는 『대학』에서 제시된 도덕정치를 구현하고, 향촌사회에서는 『소학』에서 제시된 향약적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사회모순을 극복하려 하였다. 16세기에 발달한 성리학은 이러한 사회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강화한 것으로,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학문적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초기의 사림파는 주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김굉필(金宏弼, 1454∼1504년), 정여창(鄭汝昌, 1450∼1504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초기 사림에서 보이는 특징은 소학윤리의 실천이었다. 초기 사림들은 『소학』에서 성리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소학윤리를 체득함으로써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누적된 모순과 훈구파에 의하여 야기된 비리들을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김굉필이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평생동안 『소학』만을 읽어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임하였다. 김굉필이 소학윤리 체득에 치중하였음에 비하여, 정여창은 성리학의 이기론에 대한 초보적인 관심을 보였다. 정여창의 글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사상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성리학 이론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김굉필과 구별된다.
이들 초기 사림들은 연산군의 사화를 당하여 좌절되나 성종 말 연산군대를 거치며 이들의 성리학풍은 조광조 등의 후배들에게 전수되면서 확대되어 갔다.

 

2) 사림파의 진출과 성리학 질서의 확산

 

중종 초년 1510년대에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 김안국(金安國, 1478∼1543년) 등의 사림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활동하는데, 이들을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 한다. 기묘사림들은 초기 사림의 성리학 이념을 계승하는 한편, 초기 사림들이 『소학』을 공부하는 정도였음에 비하여 『성리대전』(性理大全)과 『근사록』(近思錄)으로 성리학 연구를 진전시켰다.
중앙정계에 진출한 기묘사림들은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들의 개혁정치는 중앙정치의 개혁과 성리학 질서의 보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은 중앙정치에서는 현철군주론(賢哲君主論)을 주장하고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현철군주론은 군주가 현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국왕의 철저한 수양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조광조에 의해 제기된 현철군주론은 성리학적인 왕도정치의 구현이 일차적으로 군주의 도덕적 능력에 달려 있다는 성리학적인 군주관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현철군주론은 연산군대의 파행정치와 사화를 거치면서 군주의 타락상을 체험한 사림파의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의 결과였다.
현량과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덕행과 재주를 지닌 학자를 천거에 의하여 관료로 등용하는 제도였다. 현철군주론이 군주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군주의 수양을 요구하는 주장이라면, 현량과는 군주를 올바르게 보필할 수 있는 신하를 등용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현철군주론과 현량과로 대표되는 기묘사림의 정치론은 현인의 경지에 이른 군주를 중심으로 성리학자가 군주를 보필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성리학적인 이상정치론이었다.
기묘사림에 의한 개혁에서 또 하나의 핵심은 『소학』을 통한 성리학 질서의 보급이었다. 이들은 초기 사림의 소학이념을 계승하여 왕과 사대부들도 『소학』의 윤리를 체득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소학』의 윤리를 보급하였다. 『소학』을 한글로 옮겨 보급하고, 『소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특히 김안국은 경상·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소학』의 보급에 진력했다. 이 시기에 김안국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1517년), 김정국(金正國, 1485∼1541년)의 『경민편』(警民篇, 1519년) 등이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소학윤리 보급의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초기 사림들이 소학윤리의 개인적인 실천에 치중하였다면 이 시기의 기묘사림들은 『소학』에 담겨 있는 성리학적 윤리를 사회적인 차원까지 확대하였으며, 소학윤리를 통하여 성리학적 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기묘사림들은 소격서를 혁파하여 그때까지 유지되던 도교의식을 폐지하였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에 대한 위훈(僞勳) 삭제를 주장하여 훈구세력의 약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성리학풍과 개혁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훈구파의 공격을 받아 1519년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말았다.

 

3) 성리학의 심화와 정착

 

기묘사화로 중앙정계에서 쫓겨난 사림들은 중종 30년경부터 다시 등용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사상사적으로 특기할 사항은, 1543년(중종 38)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가 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성리학을 연구하려 할 때 세종대에 들어온 『성리대전』과 『사서대전』이 주로 이용되었다.
『성리대전』은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송에서 원에 이르는 시기의 성리설을 집대성한 경서였다. 여기에는 주자의 설 외에도 많은 학자들의 성리설이 소개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주자의 설과 다른 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성리대전』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연구는 많은 성리설을 접할 수 있지만 성리설의 정수인 주자성리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흡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이때 비로소 주자의 글을 집대성한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간행됨으로써 조선의 사림들은 주자의 설을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자대전』의 간행은 『성리대전』 중심의 성리학에서 『주자대전』 중심의 성리학으로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중종 말년에 중앙정계로 진출한 사림들은 인종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인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을사사화는 다시금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이루려는 사림들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을사사화를 계기로 대부분의 사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적인 질서를 보급하는 한편 성리학 연구에 침잠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원을 건립하여 주자성리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갔다. 잇단 사화로 좌절을 겪은 사림들은 이론적 탐구로 침잠하여 갔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의 성리학계는 『소학』·『근사록』·『성리대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심경』(心經)과 『주자대전』을 탐구하는 단계까지 진전되었던 것이다.
16세기 중반에는 성리학의 정밀한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초기 사림 이후 성리학의 방향은 분명히 설정되어 왔지만 성리학적인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전제이자 전 시대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학문적인 이론은 이 시기에 와서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언적(李彦迪, 晦齋, 1491∼1553년)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선종 불교적 요소를 비판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 花潭, 1489∼1546년)은 기를 중시하여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하였다. 이황(李滉, 退溪, 1501∼70년)이 등장하면서 성리이론의 수준은 급속히 진전되어갔다.
이황은 조선의 성리학을 주자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중종 말년 『주자대전』으로 주자학에 몰입하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1556년)를 만들었고, 『이학통록』(理學通錄, 1563년)을 만들며 송원 이래의 성리학을 정리하였다. 그는 주자학 이론에 대한 해석의 탁월성으로 사림계를 대표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는 이와 기가 모두 운동성을 갖는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여 주리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하였다.
이황에 의한 이기이원론의 성립은 주자학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황의 주리론은 전 시대 훈구세력의 비리(非理)를 비판하는 사림들의 의식이 철학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와서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주자성리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철저한 원칙을 강조하는 이황의 주리적 이기이원론으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16세기 중반에 이황에 의하여 성리학의 수준이 급속히 진전하였지만 다른 사림학자들도 나름대로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기대승(奇大升, 1527∼72년)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여 이른바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을 벌였다. 9년간에 걸친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논쟁은 성리학의 연구를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성리학은 연구와 논쟁을 거치면서 여러 학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한편 16세기 중반에는 초기 사림 이래로 추구되던 성리학적 질서도 상당한 수준에서 구축되고 있었다. 『소학』과 향약은 기묘사화 후 기피되기도 하였으나 사족들의 계속된 관심으로 향촌사회 내에 부리내리게 되었다. 16세기 중반부터 주자의 향약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여러 가지로 변용되었다. 이황의 『파주향약』(1556년)과 이이의 『서원향약』(1571년)·『해주향약』(1577년)·『해주일향약속』·『사창계약속』 따위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향약이다. 향약의 시행과 서원의 건립 등으로 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주도권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가묘제와 『주자가례』도 16세기 중반에는 사족내에서 일반화되었다. 『가례』의 삼년상이 시행되고 가부장적인 가족제가 확립되어 갔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16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가족의식이 발달하여 족보 등의 간행이 성행하고 동족부락과 예학(禮學)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이 발달하는 한편 사림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 권력을 장악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의 건설을 추구하였다. 명종 말년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마지막으로 훈구파가 제거된 뒤 선조 초년에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제 사림파가 중앙정계와 지방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15세기 말 이래의 성리학도 학문적인 연구와 성리학적인 질서의 모색을 거쳐 16세기 후반부터는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사림 중에 이이(李珥, 栗谷, 1536∼84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이는 이황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그는 『소학』 차원의 학문적 연구를 『소학집주』(小學集註, 1579년)로 정리하고, 『대학』 차원의 학문적 연구는 『성학집요』(聖學輯要, 1575년)로 집대성하였다. 『소학집주』는 초기 사림 이래의 『소학』 연구가 결실을 맺은 것이며, 『성학집요』는 기묘사림 이래의 성리학적 경세론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그는 성리학의 기본경서인 사서를 언해(諺解)하였는데, 사서삼경에 대한 언해는 동료 사림들에 의하여 1588년에 완성되었다. 이이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성과는 주자성리학에 대한 사림의 오랜 이해의 과정이 완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이는 이황의 성리설을 발전시켜 이기일원론에 의한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정립하였다. 이황의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이 현실의 비리를 극복하려는 재야사림의 처지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이이의 이기이원론은 정권을 담당하여 현실을 주도해가는 사림의 입장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황은 현실비판에 치중했으나 이이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제기하였다. 이이의 이통기국론은 이러한 사회개혁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이의 학문활동과 성리이론은 성리학의 조선적인 전개로서, 주자의 성리학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었다. 이이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후반 사림들의 활동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의 성리학을 뛰어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림들은 이황에 의하여 중국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성리학을 한 걸음 진전시켜 조선적인 성리학, 곧 조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성립시켜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와서 성리학은 이론적 수준에서도 상당히 진전되었으며 경세적 지배이념의 성격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성리학파와 성리설

 

16세기 중반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여러 성리학파가 형성되었다. 16세기 초반 기묘사림에 의한 성리학자의 증가, 지역적 확산 등으로 이러한 토대가 마련된 후, 16세기 중반 서원 등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연구를 거치면서 성리학파는 서서히 여러 학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반까지는 성리학 자체의 연구보다는 훈구세력의 척결과 성리학적 질서의 보급이 주된 과제였기 때문에 성리학은 사회개혁이념으로서의 의미는 지니지만 성리설에 의한 학파로서는 형성되지 못했다. 또한 『소학』·『근사록』에 의한 성리학 이념의 실천이 추구되어 성리학설 자체에 대한 견해 차이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종 말년 『주자대전』이 간행 보급되고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지역적인 특색, 사족들의 지위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16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여러 개의 성리학파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1) 퇴계학파

 

퇴계학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고려 말부터 사족이 정착하여 중소지주들의 토착적 기반이 강했다. 일찍부터 성리학적인 학자를 배출하여 15세기에는 길재(吉再)와 김종직(金宗直)이 선산에서 활동하였다. 16세기 들어서는 의성의 김안국(金安國), 경주의 이언적(李彦迪) 등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림들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반 이황에 이르러 학문적인 특색을 띠며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언적은 퇴계학파의 선구자이다. 그는 성리설에 대한 정연한 이론을 바탕으로 육구연(陸九淵, 象山)*59의 학문과 선학사상을 비판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의 설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주자의 『대학장구』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1549년),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의 주자학을 주자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이황은 주자의 설을 따라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이황은 우주를 도(道)와 기(器)로 나누어 파악하였는데, 우주현상의 만물은 기(器)이며 우주만물의 근원인 이는 도가 된다고 하였다. 본체로서의 도와 현상으로서의 기(器)는 서로 떨어지거나 합한 것이 아니라 서로 성질이 섞이지 않는 결합인 것이다.
이황의 이기론은, 이와 기가 섞이지 않지만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양면성 중에서 섞이지 않는다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결코 섞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황의 우주론과 이기론은 주자의 설을 따른 것이지만, 주자가 기의 운동성만을 인정할 뿐 이의 운동성은 인정하지 않았음에 비하여 이황은 이의 실재성과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태극에 움직임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 하여 태극, 곧 이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근거로 하여 이황은 인간의 심성도 이기이원론적으로 분석하여 이기호발설을 전개하였다. 순수히 선한 도(道)는 이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기(器)는 기(氣)라고 대비하여, 절대적 도덕가치를 도에 배당하고 상대적 도덕가치는 기(器)에 배당하였다. 그리고 성을 본연의 성(本然之性)과 기질의 성(氣質之性)으로 구별하고, 성이 발한 정(情)도 사단(四端,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과 칠정(七情, 喜怒愛懼哀惡慾)으로 대비시켰다. 그리하여 본연의 성과 사단은 이의 작용으로 보고, 기질의 성과 칠정은 기의 작용으로 보았다. 또 마음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으로 나누어서 인심은 칠정이고 도심은 사단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황은 절대적 도덕가치인 사단은 이의 작용이고 상대적 도덕가치인 칠정은 기의 작용이라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다.
이와 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이의 작용성과 운동성을 인정한 이황의 이기론은 절대적 가치인 이의 순수성을 강조한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본성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황의 설은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보는 기대승(奇大升)에 의하여 비판받았다. 이후 이의 운동성을 인정한 이황의 설이 이이 등 율곡학파에 의하여 비판되면서, 이의 운동성 여부는 조선 말기까지 조선 성리학계의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황은 정치에 뜻이 없었지만, 그의 정치사상도 주로 수양에 의한 도덕성 함양에 치중하여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황의 학문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었다. 그의 학문을 이은 제자로는 조목(趙穆, 1524∼1605년),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 김성일(金誠一, 1538∼93년), 황준량(黃俊良, 1517∼63년) 등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퇴계학파는 동인에 가담하였으며 남북 분당 이후에는 남인에 속하였다. 퇴계학파의 영남 남인들은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들 영남 남인들은 철저한 주리론과 명분론으로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수성을 띠었다. 향약 등에서 노비와 주인, 양반과 평민의 윤리를 매우 강조하였으며 철저한 명분론적인 의식을 고수하였다. 영남학파의 보수적인 신분관과 철저한 명분론적인 의식은 이 학파가 주리론적인 철학에 기반하였다는 점과 연관된다.

 

2) 남명학파

 

남명학파(南冥學派)는 낙동강 서쪽의 진주지방에서 형성된 학파이다. 이 지역에서는 일찍이 김굉필(金宏弼, 현풍), 정여창(鄭汝昌, 함양) 등의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는데, 16세기 중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72년)에 이르러 학파로 형성되었다.
조식의 학문은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인 토대를 갖는다. 그는 형이상학과 인성론에서 성리학적인 이론을 취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림들이 경도되었던 사단칠정 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심성의 탐구보다는 도덕의 실천이었다.
조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그는 사람의 성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어서 인(仁)과 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과 의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경으로써 마음을 지키고 의로써 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유하기를 경은 재상에 해당하고 의는 장관에 해당하여 군주인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마음을 경으로써 함양하고 의로써 성찰하면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식의 학문성향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하여 도의 실천과 출처(出處)의 대절(大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수양론에서도 경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지만, 이황이 경에 의한 궁리(窮理)의 방법을 통하여 참된 지(眞知)에 이를 수 있는 데에 중점을 둔 반면에, 조식은 내적 수양으로서의 경을 외적 행위의 기준인 의와 연결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황의 학문이 내성적인 경향을 띠는 데 비하여 조식의 경우에는 실천의 측면이 강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조식의 사상은 궁리적인 측면보다는 거경(居敬)과 역행(力行)에 의한 실천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실천에 치중하는 조직은 심성론의 탐구보다는 정치문제에 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훈구파의 비리를 과감히 척결하여 사회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훈구 척신에 의한 정치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까지 노골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서리(胥吏)의 폐단을 망국적이라고 극론하기도 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성리학에 기반하면서도 정통 주자학과는 다른 요소를 갖고 있었으며 노장사상적인 요소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주자성리학적인 색채가 옅은 것이었다. 실천과 기절(氣節)을 강조하는 그의 학풍은 심성론의 탐구로 몰입되던 당시의 성리학계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조식의 제자로는 오건(吳健, 1521∼74년)·최영경(崔永慶, 1529∼90년)·정인홍(鄭仁弘, 1535∼1623년)·김우옹(金宇 , 1540∼1603년)·정구(鄭逑, 1543∼1620년) 들이 있다. 남명학파의 학자들은 동인이 되어 퇴계학파와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남북 분당에서는 북인이 되었다.
실천과 기절을 중시하는 조식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은 임진왜란때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다. 정인홍·곽재우(郭再祐, 1552∼1617년)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남명학파는 의병활동으로 강화된 기반을 배경으로 선조 말 광해군대의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주자학적 색채가 옅은 조식의 학문은 제자대에 이르러 파행적인 양상을 보였다. 정인홍 등 북인계가 정권을 주도하던 광해군대에는 성리학의 기본질서마저 부정함으로써 율곡학파와 퇴계학파 등 다른 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조식을 철저히 추종하는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여 퇴계학파와의 학문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중앙정계에서 축출되고 남명학파와 북인은 더이상 계승되지 못하였다.

 

3) 화담학파

 

화담학파(花潭學派)는 개성 중심의 근기(近畿)지방에 형성된 학파였다.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사색을 통한 경험적인 방법으로 본체론에 접근하였다. 그는 주자보다는 장재·소옹(邵雍, 康節, 1011∼77년)의 영향을 받아 개성이 뚜렷했다. 그의 학문은 소옹과 장재의 영향을 받아 수학(數學)과 기학(氣學)이 중요한 내용을 이루었다.
서경덕은 기중심의 기일원론을 펼쳤다. 그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고 태허를 기로 보았다. 태허의 기가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이미 발한 상태를 후천(後天)이라 하였다. 그는 기를 우주만물의 본체인 동시에 만물에 일관된 실재로 보았다. 기는 다른 존재에 의해 사역되는 바가 아니고 스스로 능히 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의 작용을 그는 기자이(機自爾)라고 표현하였다. 서경덕의 성리설에서는 기가 중심개념을 이루며, 이는 기 속에 내재하면서 기가 작용할 때 바름을 잃지 않게 하는 존재이다. 곧 그에게서 이는 기의 법칙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서경덕의 성리설은 장재의 기론을 따르는 것으로, 주자의 이기론을 따르는 이황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우주의 근원을 이황은 이로 보는 데 비하여 서경덕은 기로 보았다. 또한 이와 기의 관계에서 이황이 이와 기를 이원적으로 보아 이가 기에 앞선 존재라는 점(理先氣後)과 이가 근본이고 기가 말이 된다는 점(理本氣末)을 명백히 한 데 비하여, 서경덕은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파악하여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황에서의 이는 기를 주재하여 명령하는 존재인 데 비하여 서경덕에서의 이는 기작용의 법칙을 의미한다. 서경덕은 주기론의 시초가 되며 이황은 주리론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은 수(數)와 기 등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에만 치중하고 윤리가치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별로 언급하지 않아서 큰 학파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서경덕의 제자로는 이구(李球, ?∼1573년)·민순(閔純, 1519∼91년),이지함(李之涵, 1517∼78년)·박지화(朴之華 1513∼92년)·남언경(南彦經) 들이 있으나 하나의 학파로 계속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서경덕의 제자 중 박순(朴淳, 1523∼89년)은 서인에 가담하고, 허엽(許曄, 1517∼80년)은 동인이 되었다.
서경덕의 주기론은 이후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개념을 받아들여 새로운 차원에서 이기론을 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주기론적인 학자들은 서경덕의 기론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4) 호남학파

 

호남지방에서는 김안국의 『소학』 보급활동으로 성리학이 사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반에는 이항·김인후 들의 성리학자가 배출되고, 이어 기대승에 의하여 학문적 특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항(李恒, 1499∼1576년)은 태인의 성리학자로, 이와 기를 하나로 보았다. 그는 이의 근원성과 실재성을 부정하고 이를 기와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주기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김인후(金麟厚, 1510∼60년)는 주리론적인 입장에 섰다. 그는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워 성리학에 접촉한 뒤 중종 말년 인종으로부터 『주자대전』을 얻어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저술은 많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서경덕의 학문이 사색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였고, 이항의 이기설도 비판하였다. 이황과 조식의 수양론에서는 경이 중심개념을 이루나 김인후는 『중용』의 성(誠)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기대승이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김인후와 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여 김인후의 설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
호남지방의 성리학 전통은 16세기 후반 기대승에 의하여 퇴계학파와 논쟁을 벌인다. 기대승은 이와 기는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기만이 운동성을 갖는다고 하여 이황이 주장한 이의 작용성과 운동성을 부정하였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은 근원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함에 비하여, 기대승은 칠정 속에 사단이 있는 것(七情包四端)이라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나누어 배속하는 것은 주자학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주자가 이미 그와 같이하였고, 조선에서는 권근의 『입학도설』 등 이전의 학자들도 대체로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에 나누어 배속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을 이황이 더욱 정밀하게 이기호발설로 정리하였음에 비하여 기대승은 기의 논리를 보강하여 그것을 비판하였다.
기대승의 학설은 이황의 학설에 수정을 가했으며, 이이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러나 호남학파는 독자적인 학파로 발전하지 못하고 율곡학파에 흡수되었다. 이 시기 호남 출신의 성리학자로는 기대승 외에 박순(朴淳)·정철(鄭澈, 1536∼93년) 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서인의 계열에 섰다.

 

5) 율곡학파

 

율곡 이이는 16세기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16세기 후반에 기호지방의 여러 학파를 종합하는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성리철학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도 일가견을 가진 경세가였다. 이이는 정치적으로는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추앙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을 존경하였다. 그의 사상체계 속에는 서경덕의 기론과 기대승의 설도 수용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논리체계 속에는 화엄철학의 논리도 원용되었다. 그는 16세기의 성리설들을 집대성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성립시켰다.
이이는 궁극적인 존재의 근원인 태극을 이로 보고, 이와 기에 의하여 우주만물이 형성된다고 보는 점에서는 주자 및 이황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와 기를 확연히 둘로 나누어 보는 이황의 견해에 대하여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모든 사물을 기로 보고 기에 내재한 기본원리와 원인을 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와 기를 일체의 양면으로 보아 분석하면 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라는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一而二 二而一)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만이 운동성을 가질 뿐이라고 하여, 이의 운동성을 인정하는 이황의 설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분석적으로는 나누어 보면서도 떨어질 수 없다는 면을 강조하였다.
이이의 성리설에서 기의 개념은 서경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점(理氣不相離)이라든지 기작용을 스스로 능히 하되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機自爾)으로 본다든지 하는 점에서 이이는 서경덕의 기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서경덕의 기불멸론에 대하여는 이통기국론으로 비판하였다.
이이는 이황과 서경덕의 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이기론을 정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떨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섞이지도 않는 이와 기의 양면성을 이통기국의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이통기국이란, 이는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통하여 어디에서나 관통하는 것이지만(理通), 기는 바름과 치우침, 맑고 흐림의 차별상을 이루어 구애됨이 많다(氣局)는 것이다. 곧 이이는 만물의 보편성과 차별성을 이통기국의 개념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통기국의 논리는 불교 화엄철학의 논리를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통기국론으로 대표되는 이이의 성리설은 이와 기의 문제를 나누어 보면서도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황이 주리론적 이기이원이고 서경덕이 기일원론이라면, 이이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이황에 비하면 주기적이라고 할 수 있고 서경덕에 비하면 주리적이라 할 수 있다.
심성론에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 도심과 인심을 이와 기에 나누어 분속시키는 이황의 설을 반대하였다. 그는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키는 기대승의 설을 받아들여 칠정 속에 인심·도심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였다. 인심과 도심은 이황이 말한 바와 같이 근원이 확연히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은 도심과 인심의 선한 부분이지만 칠정과 인심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심과 인심은 그 과정에서 서로 극복할 수 있으니, 인간의 의지적 노력 여부에 따라 인심도 도심이 될 수 있고 도심도 인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가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보고 도심과 인심을 설명한 것은 이와 기의 떨어지지 않는 면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16세기의 성리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이이의 사상체계는 논리 정연하고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곧 학문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며 『동호문답』(東湖問答, 1569년) 등에서 현실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의 부강과 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현실개혁에 관한 많은 방안들을 제기하였는데, 이러한 방안들을 제기하는 배경에는 이기일원론적인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도덕 가치를 지향한다. 그러나 유교적 도덕가치인 이는 현실의 기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고, 현실 속에서 도덕가치를 구현하려 할 때 현실을 도외시한 도덕가치의 추구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이는 당시의 상태를 중쇠기(中衰期)로 규정하고 제도개혁, 곧 변법(變法)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제도개혁론은 이통기국의 논리에 근거한다. 이에 해당하는 영원한 가치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는 이통기국의 논리 속에서 현실제도에 대한 일련의 개혁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미주 30]. 율곡학파는 이이를 중심으로 성혼(成渾, 1535∼98년)·정철·송익필(宋翼弼, 1534∼99년) 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서인이었다. 경세와 학술의 양면에서 일가를 이룬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이이의 제자들은 학술적인 측면에 치중하는 부류와 경세적인 측면에 치중하는 부류로 나뉘어진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년)들은 전자이며, 조헌(趙憲, 1544∼92년)·이귀(李貴, 1557∼1633년) 들은 후자를 대표하는데, 인조반정은 이귀 등 율곡학파에 의하여 주도된 것이었다. 율곡학파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성리학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3) 성리학의 사회윤리

 

1) 성리학 윤리의 보급

 

성리학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상하·존비·귀천의 현실적 차별을 바탕으로 신분질서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성리학적인 윤리는 인간의 상하귀천에 따른 차별성을 인정하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기초하고 있다. 곧 이라는 통일성 속에서 기에 의한 차별성은 각각 그에 합당한 지위를 가지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윤리는 삼강오륜으로 집약될 수 있다. 삼강오륜은 성리학에서 인간의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덕목이다. 삼강은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를 벼리(綱)와 그물(網)의 관계로 규정하여 임금과 부모와 남편은 각각 신하·자식·아내의 벼리가 된다는 것이다. 오륜은 삼강의 군신·부자·부부의 관계에다 장유와 붕우의 관계를 더해서 이루어진 윤리이다. 곧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가 있어야 하고(君臣有義),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고(父子有親),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夫婦有別),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는 순서가 있어야 하고(長幼有序),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朋友有信)는 것이다.
삼강오륜에서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 등 다섯 가지의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인간관계에 확대 적용되는 윤리였다. 처와 첩, 적자(嫡子)와 서얼(庶蘗), 주인과 노비, 사족지주와 전호농민 등의 관계도 삼강오륜의 윤리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다.
성리학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상하간의 지배와 복종을 요구하는 수직윤리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일방적인 예속과 복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복종과 아울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수직윤리이면서도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도덕적인 배려를 요구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현실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양반·사족·지주층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이었다.
성리학의 윤리는 성리학이 조선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정착되면서 보급되어 갔다. 15세기에는 유교적인 의례와 법제를 정비해서 성리학적인 윤리가 의례화되고 법제화되었다. 그렇지만 15세기에는 주로 국가가 주도하여 성리학 윤리를 보급했기 때문에 양반사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성리학적인 윤리가 국가차원에서 규정되면서 왕실·관료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 내부에서 확산되어 갔다.
16세기에 이르러 사림파의 활동으로 성리학 윤리는 일반 농민에게도 보급되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다. 향약의 시행 등으로 사족들의 향촌지배권이 확립되어감에 따라 사족들이 보급의 주체가 되어 일반 농민들에 대한 교화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조선 전기에 성리학 윤리를 보급하기 위한 책으로는 주자가 만든 『소학』과 『가례』가 대표적이었다. 『소학』은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책이었다. 『가례』는 집안에서 지켜야 할 예법들을 규정한 책이었다. 15세기부터 국가에서는 교육기관을 통하여 『소학』과 『가례』를 보급하고 과거의 선수(先須) 과목으로 『소학』과 『가례』를 시험보았다. 16세기의 사족들은 소학윤리의 실천과 『가례』의 시행으로 사족층 내에서 성리학 윤리를 심화시켰다.
한편 국가는 성리학적 사회윤리가 담긴 윤리서와 교화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세종대에는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중종대에는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16세기에는 양반자제의 교육을 위해서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童蒙先習),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일반 농민들에게도 성리학적 윤리가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국가에서는 성리학 윤리를 실천한 백성들에게 표창을 하기도 하고 국역을 면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성리학 윤리를 권장하였으며, 사족들은 향약에서 일반 농민들에게 교화서를 강론하는 방식 등으로 성리학 윤리를 확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한자를 모르는 일반 농민이나 부녀자들도 성리학 윤리를 배울 수 있게 교화서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고 한글로 된 교화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이 번역되었으며, 어린이·부녀자의 교육과 일반 농민의 교화를 위해서 윤리서들이 번역되기도 하였다.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는 삼강오륜의 실천사례를 알기 쉽게 소개한 교화서였으며, 김정국의 『경민편』도 일반 농민을 대상으로 한 한글로 된 대표적인 교화서였다.

 

2) 가족윤리

 

성리학에서 규정하는 인간관계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였다. 부모와 자식은 천리에 의하여 맺어진 가장 근본적인 관계이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에 의한 가장 친한 관계(父子有親)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출발점으로 하여 도덕가치가 다른 사람과 만물에 미친다고 보았다.
자식은 부모에 대해 효를 다해야 했다. 부모에 대한 효는 부모의 은덕에 대한 자식의 도리이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겨졌으며 모든 행실의 근원으로서 중요시되었다. 자식의 효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했다.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생각했다.
효의 윤리는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절대복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효가 부모의 자애로움을 전제로 하는 규범은 아니었다. 설사 부모가 자애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효는 자식의 주체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였다.
효는 가족윤리의 핵심이 된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 삼년상을 치르는 것도 효였으며 형제간의 우애, 부부간의 화합도 효였다. 가족뿐 아니라 친족 내에서도 효의 윤리가 적용되었다. 『동몽선습』·『격몽요결』 등 소학류의 서적은 어린이들에게 효를 중심으로 한 가족윤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가례』는 효를 바탕으로 한 가족윤리를 규범화한 예서(禮書)이다. 성인이 되면서 관례를 치르고, 혼례를 치르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는 제사를 지극히 모시는 것이 효인데, 『가례』는 이러한 규범들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관혼상제의 예법을 규정한 『가례』는 가부장적인 가족질서를 확립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 『가례』도 『소학』과 같이 조선 초기부터 보급되어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사족층 내부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시행되고 있었다.
16세기 후반에는 『가례』를 집안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려는 예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예서로는 이언적의 『봉선잡의』(奉先雜儀, 1550년), 이황의 『상제례답문』(喪祭禮答問), 이이의『제의초』(祭儀 , 1577년), 송익필의 『가례주설』(家禮註說) 등이 대표적이며 이후로도 많은 예서들이 만들어졌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남녀간의 구별과 차별로 이루어진 관계(夫婦有別)이다. 남녀간의 구별과 차별도 우주자연의 원리에 근거한다. 우주자연의 음양의 기는 차별적인 것으로, 양은 존귀하며 음은 비천하다. 하늘과 태양은 양이요 땅과 달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에 해당하여 남자는 존귀하며 여자는 비천하다. 성리학에서는 이런 우주자연의 원리로부터 남녀를 구별하고 남녀를 차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성리학의 음양관에 근원한 남녀간의 관계는 남녀간의 거처와 직분 따위를 구분하며,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계로 설정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은 순종과 정절(貞節)이었다. 남존여비의 관념에서 비롯된 순종과 정절의 덕목을 『소학』에서는 삼종지도(三從之道)·칠거지악(七去之惡)*60 따위로 표현하였다. 삼종지도가 남편은 아내의 벼리라는 삼강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칠거지악은 순종과 정절의 덕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자의 일방적인 순종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부간에는 화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부부간의 윤리도 아내의 인격적 주체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소학』에서는 이러한 점이 삼불거(三不去)*61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아내의 인격적 주체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고 해도 부부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차별적인 관계로서 아내의 절대적인 복종과 정절이 요구되었다. 기묘사림에 의한 『여칙』(女則), 『열녀전』(烈女傳) 등의 언해(1518년)는 부녀자들의 덕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가족윤리는 『주자가례』의 시행 등으로 조선 초기부터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전통적 가족제도는 남자가 처가집에 장가들어 사는 풍습과 외가를 중시하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또 제사를 지내는 것에도 장자계승권이 강하지 않았고, 재산상속에서도 남녀균분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관습에서 가부장제의 중국 가족제도를 모범으로 한 『가례』의 완전한 시행은 쉽지 않았다.
『가례』의 시행은 효의 개념을 중심으로 가부장의 권위를 높이는 것으로, 조선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적인 삼년상이 치러지고 유교적인 생활습속이 심화되어갔다. 가부장제가 확립되어 제사상속과 재산상속 등이 장자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가족 내에서도 장자가 중시되고, 적자가 중시되고, 남자가 중시되었다. 성리학의 윤리에 의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16세기 말부터의 예학 발달과 함께 더욱 강화되었다.
3) 군신윤리
임금에 대한 충은 부모에 대한 효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다. 국가를 가족의 연장으로 생각한 유교의 국가관에서 효의 대상이 임금으로 옮겨져서 충이 되는 것이다. “임금과 부모는 일체이다”(君父一體)라는 『소학』의 표현은 이러한 가족과 국가, 효와 충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효관념의 확대로서 충은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현실적으로 상하의 차별을 갖는 관계이기에 군주는 신하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임금과 신하 사이는 부모와 자식 사이같이 천륜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의로써 맺어진 관계(君臣有義)이다. 따라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의 덕목이 개재한다. 임금은 신하에게 충과 의에 따라 복종을 요구해야 하며 신하 역시 의로써 임금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군주에게 예와 의에 의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예와 의를 잘 알아 행하는 군주는 어진 임금(賢君)이 되고, 예와 의를 알지 못하는 군주는 어두운 임금(昏君)이 되며, 예와 의를 부정하는 군주는 포악한 임금(暴君)이 된다. 또한 군주는 도덕성을 바탕으로 어버이와 같은 어진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仁政). 『대학』은 군주의 도덕성에 기초한 정치를 지향하는 경서이며, 조광조의 현철군주론과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는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폭군은 축출할 수도 있다는 논리는 역성혁명이나 반정(反正)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신하에게는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세가 요구된다. 충성된 자세로 군주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신하는 군자(君子)가 되고, 이렇게 하지 않는 신하는 소인(小人)이 된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충성된 마음을 지켜 신하의 의를 다한 신하는 충신(忠臣)이 되고, 충의 맹목성에 가탁하여 임금을 의롭지 않은 길로 꾀는 신하는 간신(奸臣)이 된다. 여기에서 군자와 소인, 충신과 간신이 나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군주는 신하를 의와 예로써 대해야 한다. 군주의 신하에 대한 예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신하의 간언을 듣는 것도 군주의 예이다. 신하가 의로운 간언을 하면 군주는 들어야 하고, 아무리 심한 간언을 할 경우에도 군주는 신하의 간언을 이유로 징벌할 수 없다. 이러한 군신윤리에서 신하의 간쟁과 언로가 보장되는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 사헌부·사간원 등의 언관제도는 이러한 군신간의 윤리가 제도화한 것이었다.
또한 군주와 신하는 의로써 맺어진 관계이기에 군주가 의롭지 않은 행위를 한다면 군주를 떠날 수 있다. 부모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면 끝까지 간언해야 하지만, 군주가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할 경우에는 간언을 하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하는 군주를 떠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군주를 떠나는 것이 의에 합당할 때도 있다. 이러한 근거에서 군주의 자의적인 행위는 사족들로 구성된 신하들에 의하여 견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충에 의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신하의 주체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는 관계였다.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정치형태는 군주의 전제적인 독재는 배제되고 신하의 역할이 보장된 정치체제였던 것이다. 군주가 신하에 의하여 일정하게 견제되고 신하의 정치적인 역할이 인정되는 점은 전제정치보다 진보된 면이었다. 이러한 성리학 군신윤리는 성리학의 정치가 광범위한 사족층의 기반 위에서 전개된 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4) 향촌윤리

 

성리학적 향촌윤리는 16세기에 들어 인식되고 보급되었다. 기묘사림이 만든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에서 장유와 붕우의 윤리가 중시되고 있는데, 향촌윤리는 향약*62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기묘사림에 의하여 시행된 주자향약은 16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조선적인 특성을 띠게 되었다. 이황의 파주향약을 시작으로 많은 향약이 만들어졌는데, 이이는 수령권(守令權)과의 연결을 도모한 유형(서원향약), 유향소와 연결되는 유형(해주일향약소), 서원과 연결되는 유형(해주향약), 사창과 연결시켜 일반농민의 경제적인 부조를 강조하는 유형(사창계약속) 등 여러 향약들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향약과 향촌 규약들을 통하여 성리학의 향촌윤리는 널리 보급되었다.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향촌윤리는 장유유서의 윤리이다. 장유유서는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향촌사회내에서 주로 적용되는 윤리였다.
향촌민 사이의 순서는 나이가 기준이었다. 나이에 따른 순서는 이 시기의 모든 향약들에 표방되었다. 이이의 『해주향약』에는 20년 이상의 연장자는 부모같이 대하고, 10년 이상의 연장자는 형같이 대하고, 아래 위로 10년 이하는 친구로 대하고, 10년 이상의 연소자는 아우같이 대하고, 20년 이상의 연소자는 자식같이 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족을 벗어난 향촌민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인간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나이에 따른 순서를 표방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나이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신분제사회인 조선시대에는 나이보다는 신분이 일차적인 기준이 되었다. 사족들만으로 구성된 향약에는 신분규정이 없으나 비사족까지도 구성원으로 포함한 향약에는 대부분 신분이 일차적인 기준이 되고 나이는 같은 신분 내에서 순서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높은 관직에 있거나 덕행이 뛰어난 경우에는 특별히 나이의 순서나 신분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향촌 내에서 신분을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은 것은 사족들의 배타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반 내에서도 서얼·교생(校生)·중인 등의 비순수 사족을 구분하여 향촌사회에서의 사족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족과 양인농민, 주인과 노비 사이의 신분관계는 삼강오륜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신분관계에 대하여 삼강오륜을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이 시기 신분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이이의 『사창계약속』에는 주인과 노비와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등치시키고 있으며, 사족과 일반 농민 사이의 관계는 장유의 관계로 등치시키고 있다. 곧 노비는 신하이고 주인은 임금에 해당하여, 노비에게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에 의한 복종이 요구되었다. 또 사족은 연장자가 되고 양인농민은 연소자에 해당하여 양인농민은 사족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사족과 주인은 양인농민, 노비에게 자애로워야 한다는 도덕적인 배려를 강조하고 있는 점에 성리학적 신분관의 특징이 있다.
이렇게 사족들은 농민과 노비에 대하여도 삼강오륜의 윤리를 확대 적용하였다. 이 시기에 지주전호제가 보편화되어 사족이 지주이고 대부분의 양인과 노비가 전호농민이었음을 감안하면, 지주-전호 관계라는 경제적인 지배예속의 관계는 삼강오륜이라는 성리학적인 명분론으로 포장되고 있다. 성리학적 명분론 속에 현실의 신분적 지배복종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김정국의 『경민편』은 일반 농민들에게 이러한 성리학적인 윤리를 보급하기 위하여 만든 교화서였으며 향약도 일반 농민들을 사족중심의 성리학적인 향촌질서 속에 위치지우려는 것이었다.
한편 붕우유신은 친구 사이의 윤리를 규정한 것이었다. 친구관계는 도와 덕으로써 맺어진 관계이다. 붕우유신도 덕행이 뛰어난 경우에는 신분을 어느 정도 초월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신분내에서의 친구관계를 규정하는 윤리였다. 친구간의 윤리가 이 시기에 와서 강조되는 것은 사림파의 결속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사림파가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함에서 실천의 주체자인 사족들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덕목을 붕우간의 윤리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학연(學緣)에 의한 학문적인 동지관계가 매우 중요시되어 학파의 형성과 사족들의 결집에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

 

Ⅷ. 탈주자학적 경향과 사회개혁론의 전개

 

1. 17세기 사상계의 동향과 탈주자학적 경향

 

(1) 17-19세기 사상계의 변화

 

주자학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또 하나의 기둥은 과거제도였다. 두 개의 기둥인 과거제도와 주자학 양자는 서로 상호보완하는 관계에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에서는 초시(初試)의 경우 지방수령의 조흘강(照訖講)을 거쳐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응시자가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 중에서 임의로 지적된 부분을 암송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배송을 통하여 시험받는 제도였다. 따라서 사서의 암송없이는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주자학의 기본경전인 사서만 암송하면 오륜의 질서가 철두철미하게 체화되는 터이므로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이념으로서는 안성맞춤의 사상체계요, 그러한 사상주입을 제도적 장치로서 한층 강화시킨 것이 과거제도인 셈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도 그것만으로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주자학적인 이념의 껍질을 벗고 그 속에서 생겨난 새로운 사상체계가 실학사상이다. 그것은 17세기 이래의 사회격변과 무관하지 않으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체계였다. 이 실학사상을 배태시킨 것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의 격화이지만 이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서양 과학기술의 수입과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63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증불신(無證不信) 불편주일가(不偏主一家)가 청조 고증학의 기본골격이라 할 수 있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거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의하여 집대성되는 이른바 토지제도의 모순을 사회개혁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일군의 사상가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에 이어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로 이어지는 이른바 북학파 학자들은 남인계 학자들과 달리 노론계의 학자들로 당시 이적시하고 있던 청으로부터도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상업을 중시하는 경향이 농후한 도시적 체질의 학자군이었다. 세기별로 이들의 사상을 대표적인 실학사상가의 사상을 통하여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17세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반청북벌(反淸北伐)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부국유민(富國裕民)에 기본목표를 둔 사회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반계 유형원(1622∼73년)으로 상징되는 17세기의 실학사상은 바로 북벌을 목적으로 한 부국유민을 사상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모든 개혁은 토지제도의 개혁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으로 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균전제를 바탕으로 정확한 토지측량을 하고 이에 의거하여 조세·역역(力役)·신역(身役) 등을 부과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公擧制)를 실시할 것과 관료제도 면에서는 문무일치, 겸직제 철폐, 궁중관계 관아의 간소화 등을 주장하였다.
군사제도도 병농일치(兵農一致)에 입각한 오위(五衛)제도의 환원과 진관(鎭管)체제의 강화를 아울러 주장하였다. 반계가 살던 17세기에는 한백겸(韓百謙)·이수광(李 光) 같은 실학사상가도 있었다. 이때에는 서양 과학기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을 통하여 수입되고 있었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천문도(天文圖)·홍이포(紅夷砲) 등 서양문물과 천문·지리·역산(曆算)에 관한 책을 구해온 것을 시발로 1644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서양선교사 탕약망(湯若望)에게서 상당량의 서양문물을 수입하였다.
이때 김육(金堉)은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時憲曆)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수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1653년 시헌력은 조선에 알맞게 고쳐서 다음해에 정식 채택되었다. 당시 연행사의 북경방문은 서양문물 수입에 제일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8세기는 이른바 성호학파와 북학파들이 사회개혁을 주장하던 시기로 17세기에 비해 일층 급격히 사회가 변화하던 시기이다. 사회신분제도도 이때에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18세기 중엽이 그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도망노비 등으로 외거노비가 실질적으로 소멸하여 노비제도가 근저에서 뒤흔들리게 되며 사회적 관행으로서의 상속제도도 자녀균분상속에서 적장자 우선상속으로 바뀌고 있던 시기이다.
성호 이익(1681∼1763년)이 중심이 되는 성호학파의 경우 성호우파는 안정복(安鼎福, 順菴, 1712∼91년), 윤동규(尹東奎, 邵南, 1695∼1773년), 이중환(李重煥, 淸潭, 1690∼1753년) 등이며, 성호좌파는 권철신(權哲身, 麗菴, 1736∼1801년), 이벽(李蘗, 曠菴, 1754∼86년) 등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였다.
18세기는 조선시대에서 당쟁이 가장 격화되던 한 시기로서, 성호는 이것을 동서반의 관직수는 500여 소로 일정한데 식년시에 합격하는 문과의 생원·진사 합격자만도 233명으로 한 관직자의 평균 재임기간을 30년으로 계산할 경우 2,330명으로 4대 1의 비율을 훨씬 넘으니 이들의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하였다.
성호는 이같은 사회현실에 대처하고 변혁하기 위해서는 지배층 내부의 당색싸움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근본적 원인을 제시하고 이를 타파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사회적 격변의 진원은 하층민중의 저항이므로 그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신분적 차별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서(中庶)·서북인·노비들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경제적 평등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토지의 균등한 소유를 위한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했다. 물론 양반의 몰락을 막아보려는 입장이 근본적인 것이긴 하다. 현존하는 토지소유관계를 인정하고 한 호가 소유할 수 있는 영업전(永業田)의 상한선을 정하여 그 한도 이상의 매매는 인정하나 그 이하의 것은 매매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매매와 상속에 의한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기대하는 것이다.
성호의 경우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이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한다고 간주하고 이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데 대한 자구책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18세기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가군으로 일컬을 수 있는 북학파는 성호학파와는 달리 상업을 중시하고 중국에서 이용후생에 관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일군의 학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홍대용(洪大容,湛軒, 1731∼83년), 박지원(朴趾源,燕巖, 1737∼1805년), 박제가(朴齊家,楚亭, 1750∼1805년), 이덕무(李德懋,靑莊館, 菴, 1741∼93년), 유득공(柳得恭,惠風, 1748∼?) 등이 그들이다. 이중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은 서자이며 이들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은 연암이다. 그는 사회의 부조리와 양반사대부들의 존화사상과 명분론을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양반전』(兩班傳)·『호질』(虎叱) 등이 양반사대부들의 존화사상과 명분론을 비판한 것이라면, 『열녀함양박씨전병서』(烈女咸陽朴氏傳倂序)와 같은 것은 과부의 개가를 묵시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강렬히 비판한 경우가 되겠다.
연암은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과 서울 중심지에 가까이 모여 살며 밤낮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들의 학문적 관심은 이용후생의 북학으로, 연암의 중국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그 면모가 드러나있다. 청의 문물과 중국인의 생활, 과학기술 등을 관찰한 것과 청나라의 많은 학자들과 벌인 문학·역사·종교·자연·과학 등 광범한 문제에 관한 토론 등이 실려 있다.
연암의 제자로 더욱 적극적인 북학론을 전개한 인물은 초정 박제가이다. 『북학의』는 그의 저술로 1778년 1차연행에서 돌아와 지은 것이다. 이 『북학의』와 1781년의 「병오소회」(丙午所懷), 1799년의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 등에서 그는 중상주의적 입장의 북학사상을 개진하였다.
재물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면 가득차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는 적극적인 중상론을 개진하면서 전 인구의 반이나 되는 비생산적인 양반들을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에서 중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과의 통상을 주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으로 군왕 정조도 그 급진성을 우려할 정도였다.
이같은 북학파들의 사상은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의 행정도시가 상업도시화하고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그것의 정치적 역할까지 심각히 운위되던 시기에 상공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측면이 있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조선은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 대청·대일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은화가 축적되고 있었는데, 일본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통교하여 무역함으로써 대일·대청 중개무역의 융성이 퇴조하고 있을 때 북학파는 이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상업계의 희망도 반영하고 있었다.
이때에는 상업의 융성과 관계된 천문도가 제작되었다. 아담 샬의 1,800개 이상의 별이 그려져 있는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베껴 천문도를 만들었고, 중국의 서양선교사 쾨글러(戟后賢)가 만든 천문도를 모사한 「신법천문도」(新法天文圖, 속리산 법주사에 현존)도 1742년(영조 18)에 관상감에서 제작했다. 1708년에는, 중국에서 활약하던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만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모사한 세계지도 「건상곤여도」(乾象坤輿圖, 최석정의 발문이 있고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관상감에서 제작되었다.
이같은 세계지도와 짝하여 18세기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백리척의 축척을 사용한 『농포문답』(農圃問答)의 저자인 정상기(鄭尙驥, 1678∼1752년)의 「동국지도」(東國地圖)가 만들어졌다. 이같은 천문도와 지도의 제작은 당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위하여 제작된 측면이 강하며, 또한 그들의 지향의 일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들 지도의 제작은 당시의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 변혁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을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조선봉건사회가 그 말기적 경직성과 페쇄성이 강화되던 시기로서 사회적 모순이 극점에 달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여 년 가까이 지속된 시기로서 일당독재의 부패가 만연하던 때였다. 사회적으로는 지주전호제가 일층 강화되어 대주주의 이해와 시전체제의 이해가 강화되는 등 봉건적 반동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같은 봉건반동의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조선왕조의 재조(再造)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일군의 사상가들이 이때에 등장하고 있다.
정약용(茶山, 1762∼1836년), 서유구(徐有 , 楓石, 1764∼1845년), 김정희(金正喜, 秋史, 阮堂, 1786∼1856년), 김정호(金正浩, 古山子 ?∼1864년), 이규경(李圭景, 五洲, 1788∼?), 최한기(崔漢綺, 惠崗, 明南棲 1803∼79년) 등이 그들이다. 이중 다산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조선왕조를 재조(再造)하기 위한 포부를 피력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비롯하여, 새로운 조선왕조의 재조는 지방수령들의 자질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아 그들의 자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목민관들의 심득서(心得書)로 쓴 『목민심서』(牧民心書), 이들 지방수령들의 백성통치의 주요항목이 되는 범죄의 올바른 징치를 위하여 중국 청나라와 조선시대 영조·정조 연간의 판례를 집대성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그가 18년간의 유배기간 중에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것이다. 그는 그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도 이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스스로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왕조내에서의 개혁이라는 전제에서 집필한 저작으로서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그 개선안으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목민심서』의 예전(禮典) 변등조(辨等條) 등에서는 노비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다산의 사회개혁안은 조선왕조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혁명성을 가지는 저작들이 그 대종을 이룬다. 그의 사상의 혁명성은 그의 정치사상·경제사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탕론」(湯論)과 「원목」(原牧) 등이 그의 정치사상의 혁명성을 보여주는 논설로서, 백성이 주체가 되는 하이상(下而上)의 민주적 방식에 의하여 군왕도 선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개진되었으며, 군왕이 백성에 의하여 교체될 수도 있다는 백성에 의한 군왕교체 방법의 혁명성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정치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그의 전 사회개혁안의 핵심이 되는 「전론」(田論) 7편에서 개진한 여전제(閭田制)는 자연촌락의 단위가 되는 30가(家)를 1여로 삼고 여장(閭長)을 원목(原牧)의 논리처럼 민주적으로 선출하며, 선출된 여장의 지휘하에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는 것이다. 이때에 노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여장의 일역부에 매일의 노동이 기록되며 추수기에는 공세와 여장의 녹봉을 제외한 나머지를 연인원의 총노동일수로 나눈 것이 1일 노동대가가 되며 각인의 노동일수에 1일 노동대가가 곱해진 것이 1인의 개인소득이 되는 제도이다. 따라서 농사짓는 자만이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고 농가짓지 않는 자는 대가를 받을 수 없는 제도이다. 이밖에도 상공인에 관한 규정과 지식인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으며 병농일치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이 여전제는 1804년 다산의 강진 유배시절의 소작(所作)임이 그의 시(詩)에서 확인되었다. 2,700여 수의 다산시는 그의 사환(仕宦)시절, 18년간의 유배시절(장기·강진), 해배되어 돌아온 이후 만년의 그의 생활을 자세히 알려준다. 조선사람은 조선시를 써야 한다는 조선시 선언 등은 해배되어 고향 마제에 돌아온 이후 스스로의 일컬음처럼 초부(樵夫)로 한거할 때의 생각으로, 그를 평가하는 데 새로운 논거를 제공한다.
다산의 토지개혁안은 『경세유표』의 정전제와 여전제로 개진되었는데, 양자를 선후관계로 평가할 수 없다. 전자는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의 개혁안이며, 후자는 현실의 토지소유 관계를 혁명적으로 극복하는 이상적 개혁안인 것이다. 정전 9구(區) 중 중앙의 1구는 8부(夫, 1夫는 1區의 경작이 가능한 단위임)가 공동경작하여 공세에 충당하고, 나머지 8구는 8부가 각기 경작하여 그 소출을 소유하는 제도가 정전제인데, 중앙 1구는 국가에서 구입하여야 한다고 다산은 주장했다. 이 정전제의 경우 현실의 토지소유 관계를 인정하고 능력에 맞게 경작되어야 한다는 점 등은 국가 조세수입의 확보가 최대의 목표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같은 정전제의 기저에는 여전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는 정신이 흐르고 있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시 무전무전농민(無田無佃農民)의 이해를 다산이 대변한 것으로, 그의 전제개혁사상은 1894년의 동학농민군의 강령의 하나가 되었다. 이같은 다산의 혁명적 개혁안은 당시 농촌의 공동농업노동조직인 두레조직에서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두레조직의 원칙과 여전제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19세기 중후반은 기존의 봉건체제가 새로운 질서로 접어들어가던 때에 해당된다. 서울에서 선진문물을 접하고 그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오주 이규경이나 혜강 최한기와 같은 지식인들은 다산보다 좀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사상을 개진하였다.
특히 혜강은 근대적인 시민사상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1857년에 쓴 『지구전요』(地球典要)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소개하고 그림까지 그려놓았으며 서양 각국의 사정도 소상히 적었다. 이 책은 중국에서 1842년 출간된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인데, 바로 그 영향으로 세계지도를 국내에서 다시 목판으로 인쇄한 「곤여전도」(坤輿全圖)가 김정호(金正浩)를 자극하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사회는 사상의 큰 전회없이는 개선될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하여 있었으므로 혜강은 그것을 당시인들에 인식시키기 위하여 심혈을 경주했다.

 

(2) 실학 논의의 전개

 

지금까지 조선 후기 사상사 연구에서 가장 많은 연구업적을 내고 있는 분야는 실학사상에 관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경향으로서 실학에 관한 연구는 1930년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잉태되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민족운동이 바로 문화운동이었고, 문화운동의 한 내용이 조선학운동이었으며, 조선학운동의 주요한 실체로서 제시된 것이 다산 정약용과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다.
1936년은 다산 서거 100주년이어서 각 신문·잡지에서는 다산에 관한 특집을 실었고, 다산의 사상을 조명하는 가운데 이른바 실학의 줄거리가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학운동에 악장을 선 이는 안재홍(安在鴻, 1891∼1965년)·정인보(鄭寅普, 1892∼?)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 여기에는 백남운·최익한 등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이 반계 유형원에서 시작하여 성호 이익의 단계에서 학파가 형성되고, 다산 정약용에서 집대성된다는 이른바 실학의 기본적 개념틀은 이때 형성되었다.
해방후에도 남북한의 역사학계·철학계에서는 실학에 대한 제반 연구가 진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역시 실학의 개념에 관한 문제였고, 이러한 문제와 함께 실학의 범주문제 및 근대사상과의 연관관계가 주로 다루어졌다.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미 고려 초기에 최승로가 불교에 대해서 유교를 실학이라고 한 데서 찾아볼 수 있으며, 나아가 고려 후기에는 이제현이 사장학(詞章學)에 대하여 경학(經學)을 실학이라고 지칭한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실학의 개념을 논의할 때 조선 후기에 나타난 새로운 사상경향만을 유독 실학이라고 하는 데는 난점이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
이에 대하여 18세기 이후의 새로운 학문경향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으로서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경세론(經世論)을 실학이라고 한다면 실학의 개념이 내포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사실상 그것을 역사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라고 하는 사회적 모순이 격발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사회모순을 개혁하려는 진보적 사상으로서의 실학사상을 개념화하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위와 같은 실학의 개념문제와 아울러 문제가 된 것은 실학의 범주문제이다. 다만 경세론을 실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시기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조선 후기이고 경세론이나 실용적인 학문, 실증적인 학문방법을 가진 학자들을 우리는 실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학사상은 분명 봉건적인 사상, 봉건체제를 강화하고 복구하려는 사상이지만 그러한 봉건사상 가운데 진보적인 사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진보적인 실학사상과 근대사상과의 연관관계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는데, 흔히 북학파·북학사상과 개화파·개화사상의 인적·사상적인 연관관계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점에 있어서도 봉건적 실학사상과 근대사상의 연관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에 주자학 일변도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당시의 사회모순을 직시하고 그를 개선하려는 사회개혁론을 개진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개혁론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17∼19세기에 걸치는 조선 후기 300년을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탈주자학적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는 17세기의 사회와 그 시대의 사상에서 출발하여 18∼19세기의 사회개혁론을 편의상 한 세기를 단위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3) 17세기 사상계의 동향

 

17세기의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봉건국가질서를 복구하고 새로운 국가질서를 수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왜란과 호란은 내적으로 국가적 생산력의 파괴라는 점에서 손실이 큰 것이었지만, 외적으로는 왜족의 침입에 대한 대명(大明)의 원조, 여진족의 침입과 굴욕에 이어지는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수립은 전통적인 조선의 화이관(華夷觀)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실학사상이 태동하는 17세기의 사상계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반청북벌(反淸北伐)사상이었다. 특히 효종대의 북벌계획은 논의의 단계를 넘어서 실천으로 옮겨지는 단계였고, 조야(朝野)의 분위기도 그에 적극 동조하는 태도였다.
이러한 반청북벌론은 물론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지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3학사를 영웅시한다든가,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계속 사용한다든가 하는 반청의식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국강병에 기본목표를 둔 사회개혁론이 대두된다. 이 시기 사회개혁론의 대표로서 이해되고 있는 유형원의 『반계수록』도 바로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씌어졌다. 즉 유형원의 목표는 북벌에 있고, 북벌을 위해서는 나라가 부유하여 강한 군사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17세기 사상계의 또하나의 주제는 예론(禮論)이었다. 효종과 효종비의 상(喪)에 인조의 계비가 몇 년 복(服)을 입느냐가 주요한 논쟁점이었는데, 물론 그러한 예론이 활발히 전개된 것은 주자학적인 예학이 크게 발달한 데 기인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파간의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예송(禮訟)*64으로 비약되어 그 학문적 성격은 크게 후퇴되었다. 예론이 전개되면서 문제가 된 것은 물론 복상(服喪)의 기간문제이고 나아가 왕권의 정통성문제이지만, 이러한 논의과정에서 주자학 이외의 여러 주소(註疏)가 참조되면서 주자학적 해석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결국 비주자학적인 해석이 사문난적(斯文亂敵)*65으로 몰림으로써 사상계에서 주자학 일변도의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상과 같이 17세기의 이른바 초기 실학자들의 사상은 국제적인 정치적 격변기를 당하여 부국유민(富國裕民)함으로써 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18∼19세기의 사회적 상황은 17세기와는 많이 달랐다. 18∼19세기는 정치적으로도 붕당정치기(朋黨政治期)에서 탕평정치(蕩平政治)·세도정치기로 변화하는 시기였고, 17세기의 전후 복구결과 농업생산력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에 따라 봉건적 신분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18∼19세기의 지식인들을 17세기와 똑같은 반열에 놓고 논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부국유민이라는 봉건적 공리주의 내지는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이와 같이 정통주자학이 북벌론과 결합하여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해나가는 이면에는 새로운 사상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16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양명학(陽明學)*66과 17세기 이후 청나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서학이다. 양명학은 퇴계 이황(李滉)의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이후 겉으로 전수되지는 못하였지만 소론계 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었고, 서학도 실세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학문적 대상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사회개혁론의 전개

 

(1) 17세기의 사회개혁론 : 한백겸·이수광·유형원의 사회개혁론

 

17세기는 임란 이후 흐트러진 봉건적 질서가 재편성, 강화되는 시기였다. 즉 17세기 초반은 임란 이후 양전*67사업·군제재편·대동법*68의 확대실시 등 체제복구작업이 계속되는 한편 광해군대의 대북(大北) 정권의 도덕성 상실과 이로 인한 인조반정, 대외적으로는 광해군대의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가 깨지면서 후금(後金)의 침략과 청에 대한 복속으로 나타나고, 비록 형식적으로는 오랑캐에게 패하였지만 언젠가는 복수설치(復讐雪恥)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표적 실학자로는 한백겸(韓百謙, 久菴, 1552∼1615년)과 이수광(李 光, 芝峰, 1563∼1628), 유형원(柳馨遠, 磻溪, 1622∼73)을 들 수 있다.
구암 한백겸은 대대로 벼슬을 해온 세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의 저자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으나 정작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즉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파의 선구적인 저술인 『동국지리지』에 나타난 그의 역사지리 연구에 대한 성과에 대해서는 많은 글들이 있으나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근년에 몇 편의 글이 있을 뿐이다. 그는 대동법 시행 제안자의 한 사람이었고, 후대 실학자들의 기전론의(箕田論議)의 단서를 열었다.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의 학문방법은 문헌고증의 실증적 방법에 기초하였다. 그가 『동국지리지』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읽고 거기에 저술된 3한과 4군의 위치비정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고 이를 시정해보려는 욕구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이는 종래의 학설이나 견해를 그대로 묵수하지 않는 그의 비판적·실증적 학문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나아가 그가 역대의 역사지리에 대해 관심을 갖는 현실적 동기를 본다면 당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형세와 관방(關防)의 위치를 파악해보려는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동국지리지』는 이전의 다른 사서(史書)와 비교해볼 때 역사적 사실의 진부(眞否)에 관심이 있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치적 평가나 도덕적 평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그만큼 한백겸의 학문적 태도가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데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경전을 근거로 해서 선유(先儒)들이나 주자의 견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적 태도와 문헌고증적인 그의 학문방법은 초기유학에로 복귀하려는 고전적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학문태도는 『동국지리지』뿐만 아니라 『구암유고』(久菴遺稿)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그의 글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조석변」(潮汐辨)이나 「접목설」(接木說)에서 사물에 대한 과학적 관찰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기전도」(箕田圖),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은 비록 근년의 발굴조사 결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기전의 유제를 실측하여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학문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그것을 기전의 유제로 오해한 것도 그만큼 토지소유의 불균등에 대한 그의 현실인식이 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토지소유의 불평등한 현실을 개탄하고 균등한 토지소유의 이상사회를 꿈꾸다보니 평양도성 밖의 토지구획을 기전의 유제로 오인한 것이다. 이것이 오해임에도 불구하고 균등한 토지소유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후대의 실학자들이 한백겸의 「기전유제설」을 반복한 것은 당시의 불평등한 토지소유의 현실이 갈수록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그는 예설이나 이기론에 관한 글들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이기설은 주리설이나 주기설이 아닌 하나의 독특한 학설로 뒤에 반계의 이기설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다음으로 검토해야 할 사람은 지봉 이수광이다. 전주 이씨로서 부친은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다. 그는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가 되었으며, 그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1590년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그는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30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만나 경상도 방어사 조경(趙絅)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기도 하고 함경도 지방의 의병에게 격문을 보내 고무시키는 등 조선을 침략한 왜군과의 전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597년에 다시 명나라에 전각(殿閣) 소실(消失)에 대한 진위사(陳慰使)로 다녀왔으며, 그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안변부사·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611년 그는 다시 세자관복(世子官服)의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북경에 가서 월남·유구 등에서 온사신들과 교류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귀국후 대사간·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순천부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었으나 그는 더욱 중용되어 홍문관 제학, 이조참판, 좌우참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627년에는 후금이 침략해오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강화에 들어가 국가와 신명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이듬해 그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재직중 병몰(病沒)하였다.
그의 저술로 『지봉집』(芝峰集)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이 남아 있는데, 그외에도 순천부사로 재직시에 편찬한 『승평지』(昇平誌)가 남아 있어 그의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자세를 논할 때 으레 언급되는 것은 그가 1625년(인조 3)에 올린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 소위 萬言封事)이다. 이는 그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한 것으로서 당면한 국가의 병폐를 12항목으로 나누어 처방을 밝히고 그 처방의 요체는 무실(懋實)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밝힌 12항목의 무실은 ① 학문에서 근면을 강조하는 근학지실(勤學之實), ② 인주(人主)가 먼저 정심(正心)할 것을 강조하는 정심지실(正心之實), ③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이치가 한결같으므로 하늘의 뜻에 따를 것을 강조하는 경천지실(敬天之實), ④ 민본을 강조하는 휼민지실(恤民之實), ⑤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는 납간쟁지실(納諫諍之實), ⑥ 국가와 기강의 관계를 몸과 원기에 비유하여 기강을 떨칠 것을 강조하는 진기강지실(振紀綱之實), ⑦ 군주가 대신에게 국사를 맡기는 당위성을 강조한 임대신지실(任大臣之實), ⑧ 현재(賢才)를 양성하는 이유와 방법을 말한 양현재지실(養賢才之實), ⑨ 붕당의 폐단을 말하고 붕당을 없앨 것을 강조하는 소붕당지실(消朋黨之實), ⑩ 군사를 잘 선발하고 군비를 잘 닦을 것을 강조한 칙융비지실(飭戎備之實), ⑪ 명분을 바로잡고 교화를 진작시킬 것을 강조하는 후풍속지실(厚風俗之實), ⑫ 교화와 함께 법제를 밝힐 것을 강조한 명법제지실(明法制之實)이다. 이러한 12항목의 실을 거둘 것을 강조한 요체는 무실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봉이 강조하였던 12항목의 무실론이 기왕의 다른 경장론이나 개혁론과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었다. 즉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거나 교육제도·과거제도·관리임용제도·군사제도 등을 개혁하자는 등의 개혁론은 이전의 정암이나 율곡의 경장론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한편 그의 실학적 특징을 드러내는 저술로 우리는 『지봉유설』을 들 수 있다. 『지봉유설』은 348종의 책을 인용하여 과학기술이나 정치·도덕·문화일반에 관한 25개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한 백과사전이다. 물론 『지봉유설』은 편찬물이기 때문에 지봉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각 항목마다 간간이 지봉의 견해를 드러내어 그의 과학적 자세를 볼 수 있게 한다. 즉 천문에 관한 설명에서 그는 “하늘은 실지 형태가 없으며 지구 위에 빈 곳이 곧 하늘”이라고 설명하여, 하늘이 초자연적 존재로서 인간과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관념론적 견해나 종교적 환상을 배격하였다. 이외에도 고조선에 관한 문제, 안시성의 위치 문제 등 역사지리에 관한 항목, 동서 해 어류의 생태와 이동을 규명하는 등 생물학에 관한 항목에서 독창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백과사전적인 『지봉유설』의 저술은 이후 이익의 『성호새설』(星湖僿說)이나 안정복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같은 백과사전적 실학저술의 한 전통을 성립시켰다.
이 시기의 사회개혁론의 결정판은 역시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이라고 하겠다. 17세기의 학자들 중 이른바 실학의 범주 속에 집어넣어서 논의해온 학자로서 반계 이외에도 앞에서 논의한 구암 한백겸과 지봉 이수광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도 전혀 사회개혁론을 내놓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백겸의 경우는 『동국지리지』의 저자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역사지리학의 선구적인 학자로,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백과사전적 저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실학은 우리의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가지는 점에서 민족적 성향이 있다고도 하고, 다양한 지식을 정리해주는 백과사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17세기 실학을 이야기할 때 반계 유형원의 10여 년 저작물인 『반계수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유형원은 『수록』 이외에도 다수의 저작이 있다고 하나 현재는 『수록』만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 특히 사회개혁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유형원의 사회개혁사상을 알아보기 전에 『수록』의 저작 동기부터 이해해보자. 유형원은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에 우거하며 31세에 『수록』을 쓰기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하였다. 『수록』은 「전제」(田制)에서 시작하여 「병제」(兵制)로 완결되는 하나의 방대한 국가의 전범(典範)이라고 하겠는데, 그 기본적인 저술의 목적은 부국유민에 있다. 그가 부국유민을 이루려는 기본목표는 그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북벌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후배학자인 순암 안정복이 정리한 그의 「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형원은 15살 때에 병자호란을 만나 원주로 피난을 하였다. 삼전도(三田渡)에서의 국치 이후 국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러하였지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함께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인 오랑캐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41세 때에 『중흥위략』(中興偉略)을 처음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청에 대한 복수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대명(大明)이 망하고 국치(國恥)를 설욕하지 못하여, 부안에 있으면서 매일 달밤에 이한음 조금자탄(以漢音 操琴自彈)하였으며, 집에 준마를 길러 하루에 3백리를 달리면서 양궁·조총으로 가동(家童) 및 이인(里人)들을 가르쳤고, 오랑캐 지형의 험색(險塞)과 수륙참정(水陸站程)을 일일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한 46세 때에는 표류해온 중국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명의 영력(永曆) 황제가 남방의 4성(省)을 보유하고 있으며 종사(宗社)가 아직 바뀌지 않았음을 알고 더욱 오랑캐에 복수할 날을 기다렸다 한다[미주 9]. 따라서 그가 『수록』을 저술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도 ‘부국유민’을 통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하고 그를 기반으로 하여 ‘북벌’을 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의 사회개혁사상은 토지제도·조세제도·교육제도·과거제도·관리임용제도·군사제도·국방체제 및 군사제도·군현제 등 체제전반에 걸치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개혁은 토지제도의 개혁에서 출발한다고 파악하였다. 직전제(職田制)가 무너지고 궁방전(宮房田)·둔전(屯田) 등의 확대와 은결(隱結)이 격증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정전법(井田法)을 이상으로 하는 균전제(均田制)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균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결부법(結負法)을 폐기하고 경무법(頃畝法)을 사용하여 정확한 토지를 측량한 위에 균등한 조세·역역(力役)·신역(身役)·공물 등의 징발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그는 문란한 과거제를 폐지하고 읍학(邑學)-5영학(營學)-태학(太學)-진사원(進士院)으로의 단계적 교육제에 입각한 공거제(貢擧制)*69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관료제도에 대해서도 문무일치, 비변사 폐지, 겸직제 철폐, 궁중관계 관아의 폐지, 체아직(遞兒職)*70의 정비 등을 기초로 하여 관직 및 관아의 간소화를 주장하였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병농일치의 원칙하에서 신분에 따라 병종을 정리하고 조선 초기의 5위제로의 환원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반계의 사회개혁론은 이이(李珥, 栗谷, 1536∼84년)·조헌(趙憲, 重峰, 1544∼92년) 등 부패한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던 선배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반계사상의 철학적 기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흔히 실학을 말할 때, 반주자학적 또는 탈성리학적 사상이라고 하고, 또한 주기론적인 경향을 띤다고 한다. 그러나 반계는 그의 사상적 기반을 성리학에 두고 있으며, 인식론적인 기초도 철저히 주리론적인 입장에 서 있다. 비록 현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반계의 철학사상을 고찰할 수는 없으나, 성호 이익이 쓴 「반계유선생전」에 의하면, 반계는 『이기총론』(理氣總論) 1권, 『논학물리』(論學物理) 2권, 『경설』(經說) 1권, 『주자찬요』(朱子纂要) 15권 등 철학적 저술을 남기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유기론(唯氣論)에 경도되었으나, 공부가 숙성함에 따라 주리론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친구인 정동직(鄭東稷)에게 고백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서 반계의 철학적인 기초는 성리학에 있었으며, 특히 주리론에 기초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성명(性命)·인의(仁義)는 물론이고 예악(禮樂)·형정(刑政)도 이(理) 자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실학이라는 범주조차 애매한 사상 모두를 주기론적인 경향을 가진 사상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2) 18세기의 사회개혁론 : 성호학파·북학파의 사회개혁론

 

17세기에 정착된 새로운 학문경향으로서의 실학은 18세기에 들어와서 하나의 학파로 형성됨으로써 더욱 발전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형성된 학파로서 우리는 근기(近畿)지방에 살면서 성호 이익을 종장(宗匠)으로 하는 성호학파(星湖學派)와 서울에 거주하면서 서로 교환(交驩)하여 공통된 사유체계를 가질 수 있었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정유 박제가 등 일련의 북학파(北學派) 학자들을 들 수 있다.
성호학파와 북학파는 생활양식과 사유체계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성호학파는 주로 근기지방에 살면서 관도(官途)에 항상 관심을 가지면서도 농촌에 생활의 근거를 두어서 농본주의적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당색으로 분류한다면 이들은 주로 실세(失勢)한 남인에 속한다. 이에 대해 북학파학자들은 서울시내에 거주하고 특히 연행(燕行)에 자주 참여하여 선진적인 문물에 접하였고, 따라서 상업과 유통의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말하자면 중상주의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들은 주로 집권노론에 속해 있었으나 신분적으로 낮은 서얼층이었던 박제가나 이덕무는 그다지 출세하지는 못한 편이었다.
먼저 성호학파의 개혁론을 검토해보자. 성호학파에 속한 학자로서 이익(李瀷, 星湖, 1681∼1763년)을 위시해서 성호우파로 분류되는 안정복(安鼎福, 順庵, 1712∼91년)·윤동규(尹東奎, 邵南, 1695∼1773년), 이중환(李重煥, 淸潭, 1690∼1753년) 등을 들 수가 있고, 성호좌파에 속한 학자로서는 권철신(權哲身, 鹿菴, 1736∼1801년)·이벽(李蘗, 曠菴, 1754∼86년) 등을 들 수 있다. 성호좌파에 속한 학자들은 당시 들어오고 있는 서양문물, 특히 서학에 관심을 가졌고 전통 주자학에 대해 보다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성호는 양반지배층의 분열이 격화되는 당쟁의 화란 속에서 몰락하기 시작한 남인의 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호의 부친 이하진(李夏鎭)은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로 남인이 청(淸)·탁(濁)으로 분열되었을 때 대사간에서 진주목사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모두 쫓겨날 때 파직을 당했다가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성호는 그 다음해 부친의 적소(謫所)인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는 25세 되던 해인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였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회시(會試)에 응하지 못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중형(仲兄) 잠(潛)이 왕세자를 모해하려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장살(杖殺)당하였다. 이러한 당쟁의 와중에서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과업을 포기했으며, 이후 평생동안 궁경실학(躬耕實學)에 몰두하였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정치적인 몰락이 그의 첫번째 충격이었다면, 경제적인 몰락은 그의 두번째 충격이었다. 그의 경제적 몰락은 일반 농민들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저작으로는 여러 유교경전(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심경·주역·서경·시경)에 대한 『질서』(疾書)가 있고, 경세론은 『곽우록』(藿憂錄)과 『잡저』 및 서간 속에서 엿볼 수 있다. 『곽우록』은 그의 경세론을 요약한 것으로, 경연(經筵)·육재(育才)·입법(立法)·치민(治民)·생재(生財)·국용(國用)·한변(한邊)·병제(兵制)·학교(學校)·숭례(崇禮)·식년시(式年試)·치군(治郡)·입사(入仕)·공거사의(貢擧私議)·선거사의(選擧私議)·전론(錢論)·균전론(均田論)·논과거지폐(論科擧之弊)·붕당론(朋黨論) 등 19부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율곡과 반계의 사상을 경세론의 모범으로 보고,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의 저술로서 일찍부터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성호새설』이다. 『성호새설』은 그가 독서하고 사색하여 얻은 성과를 그때마다 적어둔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 5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이외에도 그는 『백언해』(百諺解),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 『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이자수어』(李子粹語),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시문 및 잡저들을 모은 70권 26책의 『성호선생전집』, 19세기에 이를 다시 간추린 27책의 『성호선생문집』과 문인인 안정복이 편찬한 『성호사설유선』도 전한다. 그의 문인·제자들로는 순암 안정복, 하빈(河濱) 신후담(愼後聃, 1702∼61년), 소남 윤동규 등이 있다. 순암 안정복은 성호의 사상을 보다 보수적인 측면에서 계승하였고, 특히 그의 사론을 계승하여 『동사강목』을 완성하였다.
안정복은 성호우파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겠는데, 성호와 마찬가지로 중앙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학자로서 그는 학식과 이상을 크게 펴볼 길이 없었다. 그는 과업을 하지 않아서 40세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만녕전(萬寧殿) 참봉(參奉)을 비롯한 미관 말직을 얻어서 하고, 60세가 넘어서 왕세손을 보도하는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이 되었다. 목천현감(木川縣監)을 한 적은 있었으나 국가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천현감을 하면서 그는 『임관정요』(臨官政要)에 보이는 바와 같은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실천하였으며, 전통주자학적인 향촌교화정책을 실현하려 하였다.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그는 경제적으로도 그리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곳은 그의 조부인 안서우(安瑞羽)가 가권(家眷)을 데리고 우거하던 친척 윤씨네 집이었으며, 4세에는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건천동의 외가 이씨댁에서 살았고, 6세에는 다시 모친과 함께 전라도 영광의 외가의 농장에서 기식하였다. 9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대문 밖 남정동에 살았다. 14세에는 조부의 임지인 경상도 울산에 갔으나 1년 만에 조부가 울산부사에서 해임되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밑에서 살기도 하였다.
그가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의 선영하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은 24세 때였다. 그는 광주에 살면서 근처에 살고 있던 성호에게 사사를 하게 되었거니와, 광주에 정착한 후에도 몇 이랑의 박토로 겨우 생활을 지탱했다. 따라서 그는 책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책을 빌려다가 베껴두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그의 ‘초서롱’(抄書籠)계 저술의 기초가 되었으며, 따로 그는 ‘저서롱’(著書籠)을 두어 자신의 독창적인 저술을 보관하였다.
이어서 성호학파의 개혁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청담 이중환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치·경제개혁사상과 사회관 등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먼저 그들의 정치개혁사상을 보기로 하자.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은 조선시기에서도 가장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성호는 자신이 당쟁의 참화를 겪은 장본인이면서도 당쟁의 원인에 대하여 가장 탁월하고 객관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당쟁의 원인이,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익이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두 개의 당이 생기고 넷이면 네 개의 당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 이익의 원천인 관직은 제한되어 있는데 관직진출 자격자인 과거합격자가 남발되어 관직을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동서반의 관직수는 모두 500여 자리에 불과한데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의 문과·생원·진사 합격자만 하여도 한 관직자의 평균 재임기간인 30년간에 무려 2,330명이 배출되어 관직을 둘러싸고 싸움이 잃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에 남발된 부정기시험인 증광시·별시 등으로 과거합격자가 폭증하여 당쟁은 더욱 격화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는 과거시험의 횟수를 대폭 줄이고 시험내용도 문장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보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아가 신분적 차별현상을 타파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람을 쓰는 데 문벌을 숭상하고 인재를 천시하여 중서(中庶)나 서북인·노비들은 모두 버려지게 되는 것을 개탄하였다. 또한 양반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당색이 다르면 또한 버려지게 된다고 하였다. 성호는 비록 노비세전법을 반대하고, 노비매매를 반대하는 등 기본적으로는 노비의 처지에 대하여 동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으나, 노비제도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양반의 균등한 재산소유를 위하여 토지에서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한 것과 같은 입장에서 양반의 재산의 한 원천인 노비소유의 상한을 주장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호의 붕당론은 청담의 정치운영론으로 이어진다. 이중환은 인심이 나빠진 것을 당쟁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바로 당쟁은 문반관직 임명에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전랑(銓郞)을 둘러싸고 일어난다고 보았다. 품계는 비록 정6품, 정7품에 지나지 않은 하급관리에 불과하지만 문반임명권과 자대권(自代權)을 가지고 있는 전랑의 권한은 막강한 것이어서 각 당파가 자기 사람을 전랑을 시키려고 하여 당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호학파의 경제개혁사상을 검토해보자. 실학자들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사는 역시 토지문제였다. 특히 당시의 토지가 모두 권세있는 궁방·아문·양반·토호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힘이 없는 농민들은 송곳 하나 세울 땅 없는 비참한 처지를 스스로 목격한 상태에서 그들은 토지제도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급선무라고 보았으며, 그것은 유교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였다. 성호는 토지가 모두 권세가·부호층에 들어가서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소작료와 조세를 내고 나면 일년을 살아갈 방도가 막연하다고 하였다. 성호는 천하의 토지가 모두 왕토라고 하는 왕토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성호가 내놓은 토지개혁안은 한전론이었다. 그는 현존하는 토지소유관계를 인정하고 한 호가 소유할 수 있는 영업전(永業田)의 크기를 정하여 그 한도 이상의 것의 매매는 인정하지만 그 이하의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매매와 상속에 의한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성호의 토지개혁안은 불철저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처지에서는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상업 및 수공업의 발전에 대한 견해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는 상업이나 수공업의 발전이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를 이상화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 것을 강조하였다. 기교와 사치한 생활을 반대하여 수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억제하고 동전의 유통을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그에 따라 전통적인 자연경제가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오직 농업생산의 증가를 위하여 농업노동력을 늘릴 것만을 생각하였으며, 장시(場市)도 모든 고을에서 같은 날에 열어서 농민들이 농업에서 이탈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 북학파의 사회개혁론을 검토하기 전에 시기적·사상적으로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중간쯤에 위치한 유수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자. 유수원(柳壽垣, 聾菴, 1694∼1755년)은 『우서』(迂書)의 저자로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유수원은 성호학파나 북학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서』를 저술하여 실학자로 알려졌다. 원래 『우서』는 그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의 사회적인 모순을 서술하고 그 개혁안을 제시한 저술로만 알려져 있었다. 최근 『우서』의 저자가 유수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유수원의 생애와 사상을 논의한 여러 편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유수원은 문화 유씨 봉정(鳳庭)의 장자로서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는데, 그가 출생할 때만 하더라도 조부인 상재(尙載)가 보덕(輔德)으로, 종조부(從祖父) 상운(尙運)이 이조판서로, 종숙(從叔) 봉서(鳳瑞)가 검열(檢閱)로 벼슬하고 있었고, 증조부 성어(誠語)의 처조카인 박세채(朴世采)는 좌의정이었다. 이러한 벌열 가문에서 태어난 유수원은 약관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5세 때에는 문과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들어섰다. 29세 때(경종 2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으나 영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탄핵한 것이 화근이 되어 예안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파직되었다. 이후 그는 낭천현감, 사헌부 지평, 단양군수,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50세도 안되어 관직에서 떠나 10여 년 간을 초야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1755년(영조 31) 5월에 역모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그해 2월에 있었던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71과 그에 뒤이은 토역경하정시(討逆慶賀庭試)의 변서(變書)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유수원의 생애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불우했던 시절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서』는 77개 항목의 문답체로 저술되었는데, 6개 항목은 서론, 69개 항목은 본론, 마지막 2개 항목은 결론에 해당된다. 서론에서는 『우서』의 저작동기와 조선의 문물제도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조선이 지향해야 할 부국안민의 방책이 제시되었다.
즉 그는 신분질서의 개혁을 통한 4민(사·농·공·상)의 비계급적 개편과 이에 기초한 전문화된 분업의 수행만이 부국안민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본론에서는 신분질서의 개혁을 위한 방안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학교제도와 과거 및 관리임용제도의 개선을 통하여 모든 백성이 신분이나 가업에 구애받지 않고 균등하게 교육을 받고, 능력에 따라 ‘사’(士, 관리후보자)로 선발되어, 사는 비신분적인 직업인으로서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선발된 사를 관리로 수용함에 있어 관료기구의 조정, 즉 6조의 기능강화, 3사의 과도한 기능억제를 통하여 합리적인 운영을 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한 개혁안들이 제출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논전폐」(論錢弊), 「논상판사리액세규칙」(論商販事理額稅規則),「논한민」(論閑民) 등은 화폐의 유통과 도매상의 장려·분업·전업화 등을 주장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통한 사회발전을 주장한 점에서 북학파들의 경제론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겠다.
다음은 18세기에 가장 선진적인 사상을 전개했다고 볼 수 있는 북학파에 대하여 검토해보자. 북학파에 속한 학자로는 홍대용(洪大容, 湛軒, 1731∼83년)·박지원(朴趾源, 燕巖, 1737∼1805년)·박제가(朴齊家, 楚亭, 貞 , 1750∼1805년)·이덕무(李德懋, 靑莊館·炯菴, 1741∼93년)·유득공(柳得恭, 惠風·冷齋, 1748∼?)을 들 수 있겠다. 이중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은 서자들이었다.
먼저 홍대용의 생애와 사상을 검토해보자. 홍대용은 1731년(영조 7)에 나주목사 역(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을 배웠으며, 1765년(영조 41) 계부(季父) 홍억(洪檍)의 연경사행에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그는 이때 그의 평생의 지기라고 할 수 있는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세 사람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44세에야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 미관에 머물렀다. 그는 1783년(정조 7) 53세를 일기로 갑자기 별세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술인 『담헌서』에 담겨 있는 바, 『담헌서』는 내집(內集) 4권, 외집(外集) 6권 총 10권으로 구성되었다. 내집에는 「심성문」(心性問), 「소학문변」(小學問辨), 「가례문의」(家禮問疑), 「사서문변」(四書問辨), 「삼경문변」(三經問辨), 「미상기문」(渼上記聞) 등 심성설(心性說)과 경의(經義)에 관한 것과 「사론」(史論), 「계방일기」(桂坊日記)와 서발류(序跋類) 및 그의 경세론·세계관을 볼 수 있는 「임하경륜」(林下經綸), 「의산문답」(醫山問答)이 실려 있다. 외집에는 연경에서 결의형제를 맺은 육비·엄성·반정균 등과의 서신왕래를 모은 「항전척독」(杭傳尺牘), 연경에서 그들과 필담한 「건정필담」(乾淨筆談), 「연기」(燕記) 및 수학·천문기상학에 관련된 저술을 모아놓았다.
이중에서 사회경제론의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임하경륜」이다. 「임하경륜」은 담헌의 경세제민의 포부와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서술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전국의 행정조직·통치기구·관제·전제·학교제·교육제·고선제(考選制)·군사제·용병제 등을 언급하고 있다.
홍대용은 4민(사·농·공·상)평등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명분을 너무 중요시하여 양반들은 생활이 궁해서 굶어죽게 되어도 농사를 짓지 않으며, 다른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노는 자가 많으니 어찌 궁하지 않겠는가” 하고 놀고먹는 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나아가 그는 “재능과 학식이 있으면 농민이나 장사꾼의 아들도 조정에 앉아 외람될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으면 정승이나 판서의 아들도 가마꾼, 하인이 되어 한스러울 것이 없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민의 자식들이 모두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인정하는 4민개학론(四民皆學論)을 내놓았다. 홍대용의 경제사상은 기본적으로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전론의 입장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요구하였다.
홍대용의 사상에서 높이 평가할 부분은 정치나 경제개혁사상보다는 몇 차례의 연행을 통하여 몸소 느낀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실용의 학문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몸소 궁리·연구한 천문학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가상인물인 허자(虛子)와 실옹(實翁) 두 사람을 설정해놓고 세속적인 번문허식(繁文虛飾)을 숭상하고 체면이나 지키며 공리공담을 하는 도학자인 허자를 비판하고 새 지식을 가진 실옹의 입장에 설 것을 주장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천문·지리뿐 아니라 천도·인도 등에 대해서도 종래의 설을 비판·수정하였다. 그는 지전설 등 새로운 천문학지식을 소개하거나 발견하였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무릇 땅덩어리는 하루에 한번씩 돈다.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다. 9만리의 큰 땅덩어리가 12시간에 맞추어 움직이면, 그 빠르기가 번개나 포탄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전설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학설에 영향을 받은 흔적도 있지만, 동양적 논리의 전개나 지구의 자전설만을 말한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다른 측면도 있다.
북학파의 구심적인 인물은 역시 박지원이었다. 박지원은 그동안 학자로서보다는 문인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노론 집권당에 속해 있었지만 그 자신은 일찍이 부·조부를 여의고 16세까지 글공부를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6세 때에야 비로소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년 동안 발분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는 제자백가를 비롯하여 현실적인 병(兵)·농(農)·전곡(錢穀) 등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홍대용과 함께 천문학·지리학 등 서양의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그가 20∼30세 시절에 지은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의 소설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측면과 양반사대부층의 존화사상과 명분론에 사로잡힌 망상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명성은 30세 때에 이미 널리 알려져서 서울의 중심지에 가까이 모여 살고 있던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함께 밤낮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는 1780년, 44세 때 사신으로 가는 족형(族兄)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중국에 갔다. 그는 명분론에 사로잡힌 일반학자들과 달리 청의 문물, 중국인의 생활과 과학기술 등을 주의깊게 관찰하였고, 많은 학자들과 문학·역사·음악·종교·자연과학 등 광범한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이러한 그의 북학사상을 다양하게 피력한 중국여행기이다.
그는 1786년, 50세 때에야 비로소 벼슬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으로 임명되었으며, 사복시 주부(司僕寺注簿),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을 역임하고, 55세 때에는 한성부 판관(判官)을 거쳐 안의현감에 임명되었다. 1797년에는 면천군수에 임명되고 여기에서 그는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정조의 구언(求言)에 답하였1으며,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는 당시의 세론에 대응하였다.
그는 서얼은 아니었지만, 박제가·이덕무 등 서얼들과 교유하면서 서얼이나 노비들의 불우한 처지를 누구보다도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얼의 통청(通淸)을 주장하고, 시노비(寺奴婢)를 해방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면천군수로 있으면서 『한민명전의』를 지었는데, 그는 면천의 경우를 예로 들어 토지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 속에서 그는 이익의 한전론과 유사하게 호당 토지소유 상한을 제시하여 토지소유의 균등화를 꾀하였다.
북학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한 사람은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였다. 박제가는 1750년 우부승지 박평(朴坪)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한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 다른 시각에서 사회현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영·정조대의 서얼소통책으로 1779년에 설치된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초대 4검서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13년 동안 규장각의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그곳에 비장된 장서들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었고 국내외의 지식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그는 전후 네 차례나 연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 기회를 통하여 청조의 건륭(乾隆)문화를 대표할 만한 기균(紀鈞)·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석학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1778년 1차 연행에서 돌아와 『북학의』를 지었으며, 1781년에 올린 그의 「병오소회」(丙午所懷)와 1799년 「구농서윤음」(求農書綸音)에 응하여 바친 『진소본북학의』(進疏本北學議)를 통하여 그의 북학사상을 개진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극히 중상주의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여, 실용적인 학문으로서 북학을 주장하였다. 그는 반계나 성호와 같은 선배 실학자들과는 달리 농본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중상주의적 입장에서 부국론을 전개한 것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천시하는 당시의 봉건적 분위기에서 양반까지도 상업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 인구의 반이나 되는 비생산적인 양반들을 도태시켜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병오소회」에서 “무릇 수륙으로 왕래하면서 장사하는 일을 모두 사족에게 맡겨서 혹은 자장(資裝)을 빌려주고 혹은 전포(廛鋪)를 지어주며 혹은 뚜렷한 자를 발탁함으로써 권장하여 날로 이를 추구하게 한다면 점차로 유식자(游食者)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하였다. 즉 양반들을 도태시켜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종래의 문벌제·신분제적인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상업이 발달하려면 교통기관이 발달하여야 하고, 따라서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수레를 쓰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확대되어 생산물의 수요가 증대되며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다같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를 그는 『북학의』에서 재물을 샘물에 비유하여 “재물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면 가득 차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화폐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보다도 진보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정부에 의한 악화(惡貨)의 남발을 반대하고 화폐의 질을 높일 것을 주장하였으며, 은의 해외유출 방지와 중국상품의 수입을 반대하고, 밀무역을 양성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외에도 18세기의 실학자들로서는 우하영(禹夏永, 醉石室, 1741∼1812년), 이긍익(李肯翊, 燃藜室, 1736∼1806년)·이종휘(李種徽, 修山, 1731∼?)·한치윤(韓致奫, 冽水, 1765∼1814)·신경준(申景濬, 旅巖, 1712∼81년)·황윤석(黃胤錫, 齋, 1729∼91년)·위백규(魏伯圭, 存齋, 1727∼98년) 등을 들 수 있다.

(3) 19세기의 사회개혁론

 

17세기 봉건적 체제를 재정비하는 시기를 거쳐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봉건체제의 전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의 비리 속에서 광범한 인재 등용의 길이 막혀 있고, 집권당인 노론벽파가 아니면 크게 등용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정치체제하에서 사회·경제적으로도 여러 면에서 기존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삼정의 문란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기에 봉건적인 체제의 위기를 수습하고 강력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은 봉건지배층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것은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도 요구되는 것이었고, 재야의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는 존재하였다. 즉 전자가 지주의 입장에 선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농민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바로 후자의 입장에서 사회개혁론을 제시한 이들이 이른바 실학자들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우리는 정약용(丁若鏞, 茶山, 1762∼1836년)·서유구(徐有 , 楓石, 1764∼1845년)·김정희(金正喜, 秋史·阮堂, 1786∼1856년)·김정호(金正浩, 古山子, ?∼1864년)·이규경(李圭景, 五洲, 1788∼?)·최한기(崔漢綺, 惠岡·明南樓, 1803∼79년)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최종 집대성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서예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상 그러한 고졸(古拙)하고 경박(勁樸)한 추사체를 만들어내는데는 금석문에 대한 실증적인 깊은 천착과 탐구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오주 이규경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의 손자로서 북학파의 전통을 이어서 그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선진적 연구성과들을 흡수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방대한 백과전서를 편찬하고 각 항목에 간간이 자기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혜강 최한기도 오주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선진적인 분위기 속에 살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진적인 지식을 정리하여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산은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려도 좋을 만큼 많은 저술과 개혁안을 남겼다. 다산 정약용의 생애는 초기의 사환기(仕宦期)와 후기의 유배기(流配期)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사환기에는 남인이면서도 영정조대의 탕평책에 힘입어 정조의 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정조의 총애 속에 왕의 측근에서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며 자신의 뜻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은 다산을 정치적 역경 속으로 몰아넣었고, 다산은 이후 그의 뜻을 펼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유배생활 속에서 후세를 기다리며 저술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초기의 사환기에는 「전론」(田論)·「탕론」(湯論)·「원목」(原牧) 등 이상적인 정치·경제개혁안을 내놓았으며, 후기의 유배기에는 본격적인 저작활동에 들어가서 그의 현실적인 개혁안인 1표2서, 즉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와 경학서(經學書), 예서(禮書)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찬술하였다.
먼저 다산의 정치사상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다산의 정치사상의 중심에는 강력한 봉건국가가 놓여 있었다. 이 봉건국가를 둘러싸는 울타리는 사족양반이며, 사족을 사족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노비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족들의 노비소유를 정당하게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사족들이 단약(單弱)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노비에 대한 종모종량법(從母從良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다산은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던 임란 때 국가를 지켜낸 것은 사족들의 의병에 있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사족들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는 1811년 홍경래란이 일어났을 때 강진에 유배중이면서 의병을 일으키는 통문을 돌렸는데, 거기에 호응하는 인사가 별로 없었다. 다산은 그 원인을 사족이 노비를 소유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파악하였다.
다산의 초기 정치사상의 근저에는 민본주의적인 사상이 놓여 있었다. 「전론」이 다산 초기의 토지개혁사상이라면, 「탕론」과 「원목」은 그의 초기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글이라고 하겠다. 「탕론」과 「원목」에서 그는 민이 주체가 되는 ‘하이상’(下而上)의 공선제(公選制)·계선제(皆選制)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이상이었고, 구체적인 실행안인 『경세유표』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대폭 수정되어 나타났다.
다음으로 다산의 경제사상을 보기로 하자. 다산의 초기 경제사상은 「탕론」과 「원목」에 나타나는 그의 정치사상과 짝하는 이상적인 경제개혁론인 여전론(閭田論)을 담은 「전론」에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은 「전론」에서 토지에 대한 사유를 부인하고 공동소유·공동경작·노동에 따른 수확의 분배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이상적인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전체의 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지주가 70퍼센트의 소작농민을 착취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여전제에 의한 토지개혁안을 내놓은 것이다. 여전제의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얻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얻을 수 없다.
② 자연적인 지형에 따라 30호 안팎을 기준으로 한 개의 ‘여’(閭)를 만든다.
③ 1려의 토지는 여 안의 사람들이 여장(閭長)의 지휘 밑에서 공동으로 경작하고, 여장은 매일 여민(閭民)들의 일역(日役)을 일역부에 기록한다.
④ 가을에 수확하여 모두 여의 창고에 넣었다가 먼저 공세를 나라에 바치고, 다음에는 여장의 봉급을 주고 나머지를 일역에 따라 여민들에게 분배한다.

 

이외에도 수공업자·상인에 관한 규정과 놀고먹는 양반층을 생산적인 일에 종사토록 규정하고 있으며, 여장의 지휘 밑에 군사훈련과 군역·군포에 대한 규정도 들어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토지개혁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산은 후기의 보다 현실적인 개혁론인 『경세유표』에서는 정전론을 주장하였다. 『경세유표』 속의 「전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앞부분은 토지의 국유화를 지향한 개혁론이고 뒷부분 「정전의」(井田議)는 십일세(什一稅, 10분의 1세)를 위주로 한 세제개혁안이다.
다산의 사상은 물론 정치·경제사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산의 사상은 봉건적 국가체제를 대변하는 조선왕조의 양심적 지식인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정치·경제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당시 농촌사회의 최대의 문제점이었던 삼정, 즉 전정·군정·환곡 등의 제반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개혁안을 내놓고 있다. 『경세유표』가 국가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장한 것이라면, 『목민심서』·『흠흠신서』는 국왕을 대신한 목민관인 수령이 지방을 통치할 때의 한 규범으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외에도 국방·언어·문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저작물을 남기고 있어 말하자면 ‘다산학’으로서 하나의 학적체계를 갖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의 사상사에서 먼저 제기할 문제는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기반이 18세기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즉 17세기 이후 농업기술의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전개, 신분제의 동요 등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인 선진지역에서는 기존의 봉건체제가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19세기 중후반 서울에서 그러한 선진문물을 접하고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던 이규경이나 최한기 같은 지식인들은 좀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오주 이규경은 1788년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4검서(檢書)로 일컬어지던 이덕무의 손자이고, 역시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광규(光葵)의 아들이다. 이덕무는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에서 여러 서책을 편집할 때에 참여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문원보불』(文苑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학문적인 전통을 이어서 그도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1,400여 항목, 6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백과전서를 편찬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은 한대 이후로 끊어진 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중략) 나는 이러한 유용(有用)의 학에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단서도 모르나 마음에 이를 좋아하여 세월이 쌓이는 동안에 혹은 책 중에서 얻은 바도 있고 혹은 생각을 마음 위에 일으킨 것도 있으니 총계하면 무릇 약간 조가 된다”고 하여 백과전서적인 학문을 전통적인 명물도수의 학에 접목시키고 있다.
이러한 백과전서적인 학문과 조잡하기는 하나 사물들에 대한 변증(辨證)적인 태도는 당시 성숙해 있던 서울의 시민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조금 뒷시기의 혜강 최한기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철학적으로도 체계화된다.
최한기는 실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실학자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사는 시간적·지역적 공간은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마지막 단계의 최선진적 공간이었다. 즉 그는 19세기 중후반에 문화적 선진지역인 서울에서 살면서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최근의 지식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반계나 성호, 다산처럼 전통적인 양반질서를 고집해야 할 신분적 명분도 없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나 신분적으로는 서울의 경화벌열(京華閥閱) 양반들과는 다른 중인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다른 실학자와는 달리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는 분위기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1803년 아버지 최치현(崔致鉉)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치현은 10권의 문집을 남길 정도의 문사였으나 그가 10세 때에 별세하여 종숙(從叔)인 최광현(崔光鉉, 당시 武郡守)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그의 먼 조상으로 세종대의 명재상 최항을 내세우고 있으나 그의 직계 조상 10여 대를 내려오면서는 단 한사람의 문과급제자도 내지 못하였다. 그의 집안에는 겨우 무감찰(武監察) 1명, 음군수(蔭郡守) 1명, 생원 1명, 무군수(武郡守) 1명 정도이고 자신도 생원에 합격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60세 되던 해에 그의 장남인 병대(柄大)가 문과에 합격하여 청요(淸要)의 길에 접어들었다. 최근에 이건창(李建昌, 1852∼98년)의 『명미당산고』(明美堂散稿) 중에서 「혜강최공전」(惠岡崔公傳)을 발견하여 그의 삶이 좀더 조명되었으나 그의 많은 저작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생활을 말해주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육해법』(陸海法)·『신기통』(神氣通)·『강관론』(講官論)·『추측록』(推測錄)·『기측체의』(氣測體義)·『인정』(人政)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이중 그의 사회사상을 많이 담고 있는 저술은 『강관론』과 『인정』이다[미주 30].
그는 그의 사상의 핵심인 기(氣)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유기론(唯氣論)을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는 기가 만물의 구성요인이고 기가 바로 운동변화하는 물 자체의 내재성이라고 파악하고 이(理)는 바로 이 기가 운동변화하는 법칙성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즉 전통적인 주자학파의 주리론에서 탈피하여 주기론의 입장에 선 것이다.
기를 알지 못하면 이를 알지 못하고 기를 보지 못하면 이를 보지 못한다. 기를 모르는 사람은 성리(性理)를 중히 여기어 다만 이가 천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줄 알게 된다. 그러니 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허리(虛理)에만 골몰하여 모두 신령(神靈)의 이를 말한다. 그러나 대개 사람은 기에서 생기고 또 평생을 기를 쓰며 있는 것이다(『인정』 권 9).
이러한 주기론적 인간관·자연관·우주관에 기초하여 그는 그의 사회사상을 전개하였다. 즉 기는 대기운화(大氣運化)와 통민운화(統民運化)의 조화를 통하여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운화의 기는 천기(天氣)와 인기(人氣)로 구별되는데 기가 운화하는 가운데 인간의 세계에서 활용될 때 이는 통민운화로 구현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운화에 적응한 공론은 현실사회의 정당한 공론이라고 하였다.
무릇 정치를 치평하게 하는 도는 백성을 취하되 인심을 취하고 몸을 닦음으로 근본으로 하는데 모든 백성에게 이것이 징험된다(『강관론』).
고 말하고, 나아가 그는 종래의 봉건적인 왕권은 인정하지만 그 왕권은 천리를 존중하는 왕권, 즉 왕이 운화기에 적응하여 인사를 순조롭게 하는가의 여하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경제·사회사상에도 이러한 주기론적 사상이 반영되었다. 그는 사·농·공·상의 차별적 신분관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고, 인간은 원래 평등한 기의 소산이므로 그 기의 운용인 현상적 인간과 사회도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기운화와 통민운화의 상관작용으로 경제유통이 원활히 이루어져야 하므로 그는 공·상에 대하여 “그 운화의 통·불통이나 민용에 이로운가 이롭지 않은가에 따라 그 귀천과 우열이 나타난다”(『인정』 권 25)고 하여 적극적인 경제윤리관을 개진하였다. 따라서 그는 인재를 쓰는 데 있어서 신분적 억압, 직업의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이 소지한 각 개인의 능력을 정확히 측정하여 그 잠재력을 개발하고 교육하여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여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농(衆農)에서 전사(田師)를, 중고(衆賈)에서 고사(賈師)를, 중공(衆工)에서 공사(工師)를, 중사(衆士)에서 사사(士師)를 선발하고 이들로 하여금 천하의 사·농·공·상을 가르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한기의 선진적인 사상은 19세기 중후반 서울의 선진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체제에 대하여 집착할 신분적인 명분도 없었다. 그의 사상은 거의 무너져내려 형태만 남아 있는 봉건적 왕정에 대하여 기존의 틀은 존중하지만 내적으로는 19세기 이후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반영한 근대적인 시민사상의 싹을 담고 있었다.

3. 봉건적 사회개혁론의 한계와 좌절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사상의 흐름을 진보적 사상과 보수적 사상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경우, 실학파의 농업론은 민란·항조(抗租) 투쟁기의 진보적 사상이다. 그러한 진보적 사상은 농민전쟁기에도 허전(許傳)이나 강위(姜瑋), 이기(李沂) 등에 의하여 “우리의 전통사상이 스스로 개척한 사회개혁사상, 근대화론”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실학자라고 불리는 일련의 지식인들의 사회개혁론은 기본적으로는 근대적 개혁론을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왕조의 틀 안에서 양심적 지식인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었다.
한편 실학과 근대사상과의 연관관계에 대한 검토가 60년대의 내재적 발전론에 힘입어 사상사적인 측면에서의 내재적 발전론으로 이어졌다. 즉 실학 특히 북학파의 사상과 초기개화파의 사상의 연관성이 깊이있게 추구되었다. 연암 박지원과 그의 손자인 박규수, 그리고 그의 문인(門人)들이라 할 김윤식·김옥균·박영효 등은 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박제가·김정희 등 실학자들과 중인개화파 인사인 오경석·유대치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초기개화파 인사들과의 관련성도 인정된다. 특히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결고리로서 박규수의 사상이 최근 주목되기도 하였다.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다산의 「원목」이나 「탕론」에 보이는 바와 같은 ‘밑에서부터 위로’(下而上)라고 하는 원시적 정치 형태의 원리를 음미해보지 않은 바는 아니나 현실정치는 그러한 사고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사상의 측면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균전론·정전론 등을 내세워 소농민의 안정된 재생산기반의 확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균등한 분배문제 역시 기본적으로는 봉건적 체제 안에서의 문제이며, 정작 봉건적인 체제의 안정을 저해하고 근대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촉진하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는 실학파 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봉건적 소농민의 재생산기반을 확보하고 봉건적 농촌의 자급자족적인 체제의 유지를 바랐던 중농적 실학자들은 상품경제의 발달과 화폐유통을 반대했던 반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국가적 생산력을 극대화하려 했던 중상적 실학자들은 상품화폐경제의 권장을 적극적으로 촉진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중상적 실학자들의 사상의 선진성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사상을 실학이라는 한 범주로 논의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여러 사상들의 차이점을 적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사회개혁론의 흐름은 전통적인 주자학의 범주 속에서 체제의 안정을 지향하는 개혁론이었다고 한다면, 18세기 후반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북학파들은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문화적 선진지역으로부터의 문물섭취에 따라 보다 근본적인 체제개혁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학자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은 외래문물에 접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급자족적인 가내경제체제의 타파를 주장하고, 미세하지만 근대적인 상품경제체제로의 지향을 요구했다.
이러한 북학파의 흐름을 좀더 발전시키고 체계화시킨 것이 서울의 시민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최한기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더 나아가서는 개화사상으로까지 발전하여 근대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커다란 물결 앞에 그러한 흐름은 저지되고 말았다. 비록 자율적인 근대로의 발전의 길은 저지되고 말았지만, 전통적인 사상 속에서 조그마한 변혁사상이 싹트고 체계화된 이론으로까지 정립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사상이 거둔 커다란 수확의 하나라고 하겠다.

 

Ⅸ. 19세기 변혁사상의 대두와 새로운 변혁세력

 

1. 머리말

 

역대의 반왕조세력은 곧잘 도참(圖讖)*72·비기(秘記)를 이용했다. 신라 말의 3국과 고려 말의 이씨왕조가 그러했다.
이런 도참사상은 중국 한고조의 사례에서 빌려온 바가 많았는데 나라나 왕조의 운수가 천명(天命) 또는 예정(豫定)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이성계는 역시 이를 빌려 이씨왕조 건설에 이용하였는데, 조선을 건국한 뒤 이들 비기의 전파를 금하였다. 그리고 소장자에게 형벌을 가하고 수집된 것은 불태워 없앴다.
그러나 정여립(鄭汝立, ?∼1589년)이나 허균(許筠, 1569∼1618년)이 이를 이용하여 변란을 꿈꾸었고 그후 민간에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왕조 곧 정씨왕조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 비기가 임진왜란 후 늘어나 『정감록(鄭鑑錄)』*73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된 것은 18세기 초였다. 이것들이 서북지방에서 널리 퍼지자 조정에서는 조사관을 보냈고, 이를 수색해서 불태운 사례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정감록』은 계속 유행하여 영조 연간에도 이를 금하는 엄명을 내렸고 정조 연간에는 홍복영(洪福榮) 등이 이를 이용하여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그후 19세기에 들어와 관서농민전쟁에서 홍경래가 이를 이용한 뒤, 변란세력들에 의해 더 널리 이용되거나 전파되었었다.
이와 함께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될 적에 미륵신앙도 함께 일어났으나 왕조 말기에는 이것이 변란세력에 의해 이용되어왔다. 왕건(王建)이 비기를 이용했다면, 궁예(弓裔)와 진훤(甄萱, 姓일 경우 진으로 발음)은 미륵을 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여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구세주로 우러러보게 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미륵신앙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을 중심으로 변혁세력과 일정하게 연결되었다. 그중에서도 숙종 연간 여환(呂還) 등이 ‘미륵이 출현했다’고 세력을 모아 궁궐을 침범하려 하다가 발각된 사례가 있다. 또 이와 함께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이 싹트기 시작했고 유불선(儒佛仙)합일설도 태동되었다. 후천개벽은 혼돈의 선천(先天)시대가 가고 무극대도(無極大道)의 후천시대가 온다는 것으로 주역(周易)의 이론을 빌린 것인데, 19세기에 와 김항(金恒, 1863∼1945년)*74에 의해 정역(正易)으로 발전되었다.
유불선 합일설은 세 교의 가르침 가운데 그 종지(宗旨)를 뽑아 세상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으로,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 857∼?)이 주창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널리 전파되어 반유교적 사상으로 수용되었다. 이어 19세기에 들어와 최제우(崔濟愚, 1824∼64년)에 의해 체계화되어 동학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조 말 정진인(鄭眞人)이 출현하여 불의와 불평등 그리고 고통이 없는 왕조를 건설한다는 믿음으로 발전했고, 미륵이 출현해서 병을 없애고 원통함을 풀어주는 이상사회인 용화세계(龍華世界)가 건설된다는 사상으로 굳어졌다. 미륵과 진인은 메시아와 같은 의미를 민중들에게 심어주어 변혁세력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미륵불을 찾아 기원하는 풍조로 번지거나 10승지(勝地)를 찾아 자신과 자손의 안녕만을 도모하는 도피적 분위기가 깔려있기도 했고 때로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이들 비기·미륵신앙은 변혁사상으로 굳어져 변혁세력들에게 이론적인 틀로 이용되었고, 그 운동수단을 19세기로 넘겨주었던 것이다.
다음은 새로운 변혁세력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이들 변혁세력은 그전 시기와는 달리 비밀결사를 통해 조직화되고 행동화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 비밀결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갑자년(1684년, 숙종 10)에 왜국의 국서(國書)가 온 뒤에 시끄러운 소문이 날로 더하여 피난하느라 짐을 싣고 동문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연이어졌다. 이 틈을 타서 무뢰의 무리가 서로 모여서 계(契)를 만들었는데 살략계(殺掠契)라고도 하고 홍동계( 動契)라고도 하고 검계(劍契)라고도 했으며 혹 밤에 남산에 올라 퉁소를 불며 군사를 모으는 형상을 하고 혹 중흥 골짜기에 모여 군사연습을 하는 형상을 하기도 했다. 더러는 피난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으면서 간혹 인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청파 근처에는 또 살주계(殺主契)가 있었는데 목래선(睦來善)의 종도 여기에 들어서 목래선이 곧 잡아 죽였다. 좌우포도청에서 기찰하여 예닐곱을 잡고 계책(契冊)을 입수하였는데 그 약조의 하나에는 양반을 죽일 것, 하나에는 부녀를 겁탈할 것, 하나에는 재물을 빼앗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살략계·홍동계·검계·살주계 등 네 가지 조직체의 이름이 나온다. 검계는 하급무사 중심으로 이루어졌겠으나 이들 모든 비밀조직체에는 양반과 벼슬아치를 제외한 민중의 범주에 드는 계층이 그 구성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칼을 차고 남대문이나 벼슬아치의 집에 방문을 붙였는데 “우리를 깡그리 죽이지 못한다면 종당에는 너희들 배에 칼을 꽂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을에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양반아내를 삼을 수 있다”라고 하기도 하고 “양반의 음부는 매우 좋다는데 이제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들이 조직적 행동을 보이며 서울을 비롯 곳곳에서 소동을 벌이자, 조정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히 따지고 수색하여 엄벌에 처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와 함께 향도계(香徒契)도 횡행하였다. 향도는 남의 상여를 메어주고 그 품삯을 받는 무리인데 이들이 결사를 하고 사대부집이나 궁가(宮家)의 상여를 멜 적에 장난하고 싸우고 때리며 작폐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런 이들의 결사와 행동이 위의 검계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다른 비밀결사도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1741년(영조 17) 숙천부사가 평안도의 도둑두목 지용골(池龍骨)을 잡았다가 놓쳐서 부사가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 이 기록으로 볼 때 각 지역에 비밀결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에 관동·관북·관서·해서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각각 단호(團號)를 만들어서 도둑질과 겁탈을 행하였다. 서울에 있는 자들은 후서강단(後西江團)이라 불렀고 평양에 있는 자들은 폐사군단(廢四郡團)이라 불렀으며 재인(才人)들은 채단(彩團)이라 불렀다. 기회를 틈타 도둑질을 해대서 관가의 창고를 습격하여 털어갔으나 군사들이 잡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여 특별히 명령을 내려 기찰했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서울·평양 등의 도시에서 천민·유민같은 하층민이 결사를 하여 의적과 같은 행동을 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중들은 그전 시기의 홍길동이나 임꺽정의 활동을 더욱 발전적이고도 조직적으로 계승하여 사회혼란을 가중시켰다.

2. 서학·천주교의 도전과 정부의 탄압

 

(1) 서학연구와 천주교 수용

 

조선 후기에는 농업생산의 증대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급격한 농민층 분해와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반주자학적 입장의 실학사상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봉건제 해체기의 양상들은 지주전호관계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농민들의 항조투쟁(抗租鬪爭)을 고양시켰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바탕 위에서 농민들의 부세투쟁(賦稅鬪爭)이 격렬해졌다. 이른바 ‘민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그만큼 봉건지배층의 위기의식이 가중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경우,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모든 사람이 난(亂)을 생각할 만큼 심각한 위기의 시대라고 단정할 정도였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 천주교의 수용과 서학연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결과라는 외부적 요인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희구하던 조선사회의 내재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이시기 서구자본주의 열강이 조선에 형태를 달리하면서 봉건지배층 및 민에게 새로운 위기의식의 대상으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비롯한 중상주의국가는 그들의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지리상의 발견에 가장 열을 올린 포르투갈의 경우,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포르투갈은 1510년에 동방진출의 거점으로서 고아를 공략하였고, 1511년에는 말레이시아 반도의 말라카에 진출하였다. 또한 1557년에는 중국과 일본에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마카오를 강점하였다.
에스파냐의 경우, 마젤란은 1519∼22년에 대서양을 거쳐 남아메리카주 남단에 있는 마젤란해협을 돌아서 필리핀제도에 이르렀으며, 세계일주를 완수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했다. 그후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어 마닐라에 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 나라가 아시아 침략에 열을 올린 것은 종래 이슬람 상인의 독점을 제치고 인도나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을 서로 독점하려는 데 있었다.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의 식생활에서 향신료는 귀중하고도 고귀한 물건이었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는 아시아 진출에서 다 같이 무역과 포교를 배합하는 방법을 채택하였으며, 아시아에서 획득한 식민지를 무역 이권과 종교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그들은 “무엇 때문에 동양에 가는가”라고 물으면 “스파이스와 이나마(영혼)를 위하여”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아시아에서의 전도활동에도 양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각 교파간의 갈등이 생겼다.
포르투갈은 제수이트교단의 동방전도에 대한 후원자로 나섰다. 즉 제수이트교단을 통해 중국에 진출하였는데, 1582년 제수이트교단의 신부 마테오 리치의 경우가 그러하다. 1589년에는 광동성(廣東省) 소주(昭州), 1595년에는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 1599년에는 남경에 전도기지를 꾸리는 데 성공한 리치는, 1601년에는 드디어 북경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는 1610년 5월에 별세할 때까지 서학을 수단으로 하여 중국황실과 사대부들 속에서 선교사로서의 본래 목적인 천주교전도에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면 조선에는 서학(西學)·천주교(天主敎)가 언제쯤 들어왔으며, 어떻게 변화·발전되었는지 알아본다. 우선 서학연구단계를 서학·천주교의 수용과 관련지어 살펴보자. 안정복(安鼎福)은 서학·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서양서(西洋書)는 선조 말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왔다. 저명한 관리와 석유(碩儒)들 중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서양서 보기를 제자도불(諸子道佛)의 종류 같이 하여 서실(書室)의 완구(玩具)로 준비하였다. 그러나 취한 것은 천문·역법이었을 뿐이다. 여러 해 이래 사인(士人)들이 있어 사행(使行)을 따라 연경에 가서 그 책을 구입해 와 계묘갑진(癸卯甲辰)부터 젊은 사람 중에 재기가 있는 자들이 천학지설(天學之說)을 제창하였다.
이와 같이 관리와 학자들이 서학과 천주교, 특히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북경을 방문한 연행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란 책을 통해서 서학을 이해하였다. 학자로서 연경에 들어가 그곳의 외인 선교사와 교유하여 천주교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서양의 진품을 가져온 자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이명(李 命)을 들 수 있다. 그는 서양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인 반면 천주교에 대해서는 혹평하는 입장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 학자들이 개별적인 차원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들 수 있다. 그는 화이적(華夷的) 명분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서양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서학의 기적(器的)인 측면인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주로 천문·역법의 실용적 가치를 높이 샀다. 그러나 이적(理的)인 측면인 기독교적 윤리·종교체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또 천주교의 사천(事天)·존천(尊天)·외천(畏天) 등의 설은 시경·서경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칠극』(七克)을 읽고 “우리 유학의 극기지설(克己之說)”로 단정하였으며, “유학에서 밝히지 못한 바도 밝히고 있으며 복례(復禮)에 크게 도움이 되는 바도 있다”라 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천당론 등은 불합리하다고 여겨 마침내 “모두 유망(幼妄)한 것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실용주의적 측면이 있다고 하여 불교와는 차등을 두어 인식하기도 하였다.
이익은 서학과 천주교를 갈라서 전자는 긍정하고 후자는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조선의 지식층이 주자학으로 일색화된 환경 속에서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서학을 수용하기 위해 가졌던 이해체계라 하겠다.
그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어떠했는가. 봉건지배층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는 더이상 선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체제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지배층은 그들의 기존체제를 고수하는 한편 북벌론(北伐論)을 제기하여 대내적 사회모순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북벌론이 두 전란 이후 사회체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에 반해 두 전란 이후 기존의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갖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는 한편 농업생산력의 증대, 지주제 개혁의 문제 등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구상이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른바 실학(實學)이다. 아울러 그 일부는 시대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서구근대과학에 대한 호기심이라든가 더 나아가 서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요컨대 서학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향은 조선사회의 내재적 환경 자체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우선 조선에서는 농업생산력의 증대라는 생산력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이 시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농업기술 전반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는 한편, 많은 농서들이 농민들의 농업경영을 위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아울러 실학자들은 상공업진흥책을 내놓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실학자들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박제가(朴齊家)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중국의 흠천감(欽天監)에서 책력을 만드는 서양인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으며, 이용후생의 방법에 능하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관상감에서 소비하는 비용으로써 그들을 초빙하여 대우하고 나라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천문과 도량형, 농상, 의약, 홍수와 가뭄의 대비법, 궁실이나 성곽·교량의 축성법, 구리나 옥·유리의 채굴·제조법, 외적 방어를 위한 화포의 설치법 등을 배우게 된다면 불과 수년 안에 세상에 도움이 되고 쓸모있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 그들의 종교는 천당과 지옥을 믿음이 불교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세상 생활에 도움을 주는 재능은 불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 10가지를 취하고 하나를 금한다면 득이 있는 셈입니다. 다만 적절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불러도 와주지 않을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서학·천주교 특히 서학이 왜 주목받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은 다산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산은 1797년(정조 21)의 상소문에서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천문(天文)·역상(曆象)·농정(農政)·수리(水利) 등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관념적 이론에 그치는 주자학이 붕괴되어가는 조선 봉건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못하게 되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 실용을 주장하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연경을 통해서 들어오는 서양의 실제적인 학문이 그들의 탐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실학자 일부가 주자학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에 기반한 사상체계를 수립하려는 모색의 과정에서 서학·천주교가 주목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성호좌파학자들에게서 보이는 데 특히 다산 정약용에게서 잘 드러난다. 다산은 주자학에서 자연과 인간을 통하여 하나의 이법(理法)이 존재한다고 본 것을 비판하고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생각했다. 그것은 자연의 차별성 원리를 인간세상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자 인간은 인격적 존재인 천(天)으로부터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은 천지질서의 주재자로서 비쳐진 인격적 존재이다. 비록 다산의 저작에서 나타난 천이 천주교의 천주와 등치시킬 수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다산이 천주교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조선사상사 자체의 발전선상에서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천관(天觀) 속에서 인성의 만민평등과 실천을 강조하고 성범(聖凡)의 구별까지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중세적 신분관을 부정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서구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침투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하여 근대적 사유체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진보적 학자들의 노력의 발로였다. 봉건적 신분관의 부정, 가부장주의에 대한 도전 등이 바로 이들 사상의 주내용이었다. 따라서 서학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모색되었다.
학문적 대상이었던 서학의 관심과 함께 천주교도 곧 얼마 안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신앙적 차원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현상은 성호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미주 17]. 대표적으로 이벽(李蘗)을 들 수 있다. 그는 1783년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교리실천방법에 대한 의문을 밝히고 동시에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오기를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과연 북경남당을 방문하여 포르투갈 사교 구베아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할 때 교서 『천주실의』와 십자가·성패 등을 받아왔다.
이승훈의 귀국 후 1784년부터는 이벽뿐만 아니라 중인 김범우(金範禹)를 중심으로 사대부·중인 수십 인이 김범우집에 모여 예배를 보았다. 그 중심인물인 이벽을 위시로 하여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권철신(權哲身) 형제 등은 남인계통의 학자·사대부들이며, 그외에 이가환(李家煥)·윤지충(尹持忠)·권상열(權尙烈) 등도 마찬가지였다. 천주교신앙이 전파되어 가면서 정조 중반에 이르러서는 더욱 치열해지고 교서의 간행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서울 사대부층에 퍼졌으며, 심지어는 삼남지방에까지 퍼졌는데 특히 유림의 본고장인 경상도에까지 퍼져나갔다.
이러한 전파는 단순히 교리의 전파 차원을 넘어 신앙실천운동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가령 정조 연간에는 천주교도들이 사당을 부수고 제사를 폐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무리가 해서로부터 관동에 걸쳐 번성하였을 정도였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실천운동의 주체는 실학파 학자 등의 양반층을 벗어나 일반 하층민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천주교가 단순히 양반층 중심의 보유론(補儒論)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일반 민들의 신앙차원으로 발전했음을 반영한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천주교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양반층이 대거 탈락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즉 당시 일반 민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1798년 충청도에서 처형된 이도기(李道起)는 “나는 무식하여 선비들의 몫으로만 되어 있는 공맹지도(孔孟之道)는 알지 못하며, 불도는 중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를 보유론의 차원에서 인식하려던 경향과 함께 천주교가 유학과는 다르나 모든 이를 위한 정도(正道)라는 인식이 병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인식은 양반층보다도 일반 민에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런 연유로 당시 봉건지배층은 천주교 신도들에 대해서 ‘우맹’(愚氓)‘우잠’(愚蠶) 또는 ‘촌맹무지각자’(村氓無知覺者)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배층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즉 그들은 천주교신도가 반란음모에 연루되어 처벌된 왕족이나 불평을 품은 양반층, 그리고 시정잡배나 농부·아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에 주목하면서 이들 천주교도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뒤엎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2) 정부의 천주교 탄압

 

서학연구 기풍이 생겨나고 일반 민간에 천주교가 유포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정부는 이를 일시적인 현상이며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서학연구가 활발해지고 드디어 신앙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는 정부는 주자학체제에 대한 도전이라 단정하여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론적인 면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배격하는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영조대의 신후담(愼後聃)은 『서학변』(西學辨)에서 서학을 배격했으며, 정조 초의 안정복은 유가의 서학 배격·척사위정의 논리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확립하였다. 안정복의 논리는 『순암집』(順庵集)에 실려 있는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 등을 통해 미루어 살필 수 있다. 그는 「천학고」에서 서학의 중국전래와 조선유입을 밝히고, 「천학문답」에서는 서학을 과학으로서의 서학과 종교로서의 서학으로 나누었다. 그는 과학으로서의 서학이 우수함을 인정하면서도 주자학적 정통의식에서 이를 부인하려 애썼으며, 종교로서의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니는 일면의 타당성을 수긍하면서도 현세적인 유가의 무신론적 입장에 서서 내세 위주·금욕주의·천당론·기적론·천주구속론·영혼불멸설 등을 논박하였다. 한편 중국역사상의 농민봉기가 종교적인 비밀결사와 연결되었음을 들어 그 문제점을 논증하였으며, 요·순에서 주자에 이르는 유학은 성학(聖學)·정학(正學)으로 내세우고, 주자학 이외에 비정통적인 중국의 여러 학문인 불(佛)·노(老)·양(楊)·묵가(墨家) 사상과 양명학(陽明學)은 서학과 더불어 이단이며 사설(邪說)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천학문답」의 풍부한 식견을 배경으로 한 척사론은 이후 모든 유학의 서학 배격론의 지표가 되었다.
주자학사상에 사로잡힌 지배층들은 명분론과 존화의식에 근거하여 이질적인 사상체계에 대하여 탄압을 가했다. 이는 그들의 주자학체제를 수호함으로써 체제의 동요를 막아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것은 봉건사회의 신분이데올로기에 대해 서학·천주교가 갖는 진보성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척사 상소문이나 대간대책문을 보면 천주교도들을‘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徒)·‘금수지도’(禽獸之徒)·‘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徒)라 하였으며, 천주교를 ‘절륜패살지도’(絶倫悖殺之徒)니 ‘황탄괴설불경지외도’(惶呑怪說不敬之外道)라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천주교를 조사하여 탄압하였는데, 천주교도들이 조선사회의 전통적 예속인 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철폐하는 신앙행위와 신분과 문벌을 초월한 평등논리가 신분차별·서얼차대·문벌중시에 입각한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파탄시킬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천주교는 주자학적 신분질서에 터전한 조선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동요시키는 사학체계(邪學體系)로 인식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는 척사논리가 강화되었다. 더군다나 천주교가 학문적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나아가면서 봉건지배층의 의구심은 가중되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신자라 할 정약종의 경우, 유교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다. 심지어 그는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요, 집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라 하여 종전의 유교지배질서를 부정하였다.
또한 18세기 말 제수이트교단의 퇴진과 함께 제례를 둘러싸고 북경당국과 천주교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른바 윤지충(尹持忠) 사건을 시발로 전면화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국왕인 정조와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경우, 정학(正學)을 강화시키면 사학(邪學)은 자연히 소멸한다는 입장에서 온건하게 처리함으로써 이 문제의 확산을 방지하는 한편 서양학문을 지속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제례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갖는 반체제적 입장에 대한 봉건정부의 탄압을 알리는 단초였다. 정조 사후, 순조의 등극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반대파인 남인의 정치적 잔명마저 일거에 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봉건정부의 대응은 정적의 제거를 넘어서서 봉건이데올로기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을 물리치고자 한 봉건지배층의 사상통제의 일환이었다. 여기에서 봉건정부는 천주교도들을 “세상의 변혁을 바라는 자”, “반란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 파악하여 중국사상에서 등장하는 민중반란집단인 황건적*75·오두미적(五斗米賊)*76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봉건정부는 천주교도들을 흉도(凶盜) 또는 사적(邪賊)으로 인식해서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시켜 ‘서학쟁이’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한편 향촌사족 역시 통문을 돌려 향촌제를 강화하고 천주교서적의 유포를 금지한다든가 천주교도들을 색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다.
더군다나 종전의 교화주의적 방법을 버리고 강상지변(綱常之變)으로 파악하여 엄형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대탄압은 체제도전세력인 천주교를 일거에 제거하는 한편 채제공(蔡濟恭)을 영수로 하는 남인시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유박해이다.
한편 봉건정부의 대탄압은 천주교신도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봉건국가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 결과 1801년에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일어났다. 황사영은 당시 노론벽파가 주도하는 정국을 “정사가 괴란(乖亂)하고 민정이 차원(嗟怨)”하다고 신랄히 비판하는 한편 정조 사후 봉건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한 내용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교회와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방안을 건의하였다. 우선 조선의 종주국인 청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으로서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의 감호를 요청하여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여 서양 배 수백 척과 병사 5∼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도록 강박해주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운동은 봉건지배층을 경악에 이르게 하였다. 내적으로 농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치고 있던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러한 천주교의 도전은 봉건지배층에게는 실로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황사영 백서사건은 봉건정부가 천주교를 탄압할 수 있는 호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상통제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황사영의 몽상은 당시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에까지 퍼져있는 해상세력의 조선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중시킴으로써 봉건정부가 대탄압을 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3) 위기의식 고양과 정부의 대응

 

1860년 12월 9일 조선정부를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다. 곧 북경함락 소식이었다.
경악한 조선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철종은 비변사의 제언에 따라 곧바로 열하(熱河)에 문안사(問安使)를 파견했다. 조선의 봉건지배층이 가장 우려했던 점이 현실화되었다. 즉 통상매매의 허용에 따른 아편수입의 자유화와 기독교 포교의 허용이 그것이다. 전자는 차치하더라도 후자는 봉건정부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이것은 봉건정부의 사상적토대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당시 철종은 조정의 중신회의에서 자기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뇌자관(賚咨官)의 수본(手本)을 읽으니 중국의 일은 정말로 걱정스럽다. 천하를 장악한 중국의 거대함으로도 오히려 적을 막지 못하였으니, 서양의 무력이 표한(慓悍)함을 알 수 있다……. 연경은 우리와는 순치(脣齒)와 같은 관계이다. 연경이 위태로우면 우리나라라고 어찌 편안하겠는가. 또한 그들이 강화라고 한 것은 단지 교역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며, 윤상(倫常)을 없이하고 망치는 술(術)을 사해(四海)에 전파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그 해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물며, 그들의 선박의 우수함은 일순에 천리를 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조선정부가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해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위기의식이 단순히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야기될 강상(綱常) 이데올로기의 붕괴에 대한 우려에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조선정부는 이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우선 문안사(問安使)라는 구실로 사신을 파견하여 서양열강의 동정과 청의 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문안사 일행으로는 정사(正使) 이원명(李援命, 뒤에 趙徽林으로 바뀜), 부사(副使) 박규수(朴珪壽), 서장관(書狀官) 신철구(申轍求)가 결정되었다.
문안사 일행은 다음해인 1861년 1월 18일에 출발하여 5개월 뒤인 6월 19일에 귀국하였다. 이 동안에 그들은 중국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생생히 전하면서 태평천국을 비롯한 반란이 장기화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또 그들은 서양의 중국진출 의도와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탐문하면서, 양이(洋夷)가 토지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통상과 기독교·천주교 선교에 치중하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됨에 후일의 폐단이 일어날까 우려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중국의 국내정치의 문란과 그 원인을 전하면서, 특히 인사의 문란과 기강의 해이를 손꼽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국제질서의 분위기와 중국의 내정을 탐문 함으로써 이후 조선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크게 내치와 외교문제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는 상호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었다.
우선 외교정책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조·중·일 사이에 공동보조를 맞추었던 동아 3국의 쇄국정책 속에서 제1차중영전쟁에서의 중국의 패배, 그리고 일본이 강제로 개국됨으로써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체제인 사대교린질서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조의 수도인 북경이 영불연합군에게 점령됨으로써 조선정부는 청조의 속방이라는 구실 아래 쇄국정책을 펴나가던 방식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즉 조선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종전까지 중국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새롭게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조선정부가 독자적으로 외교문제를 풀어나가야 했다.
따라서 봉건정부는 새로운 대책들을 모색하였다. 대표적으로 내수양이론(內修攘夷論)이 거론되었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1862년 농민항쟁과 결부되어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미 문안사로 파견됐던 박규수가 진주민란을 안핵(按劾)하면서 “내홍(內訌)이 같으면 외우(外虞)가 두렵다”라고 언급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맥락에서 1860년 동지사행으로 북경을 다녀온 신석우(申錫愚)의 경우, 삼정문제를 개선하자는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를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지속되었다. 가령 최익현(崔益鉉)의 경우, “내수의 정치에 노력하고 외양의 방책을 써서 보국안민할”것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삼정개선·개혁 문제와 함께 국방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좌참찬(左參贊) 신관호(申觀浩)는 훈련대장으로서 각 장관과 더불어 훈련국의 폐단을 논의하고 그 변통을 강구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는 내수책(內修策)으로 부세의 균평을 내세웠다. 다른 한편 정부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이양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믿어지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일련의 박해사건은 이를 잘 말해준다.
더 나아가 내수양이론은 정치사회적 측면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의 경제적 침탈 등을 인식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서양면포가 해당시전에서 공공연히 독점매매되며 그것이 일종의 공납품으로 되어 있었다.
정부측에서는 교역하는 자를 먼저 참수한 후 보고하도록 정부측에서는 교역하는 자를 먼저 참수한 후 보고하도록 엄령을 내리기도 하였다.기정진(奇正鎭)의 경우, 상소를 통해 서양물건의 수입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내수양이론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봉건정부의 방책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동아시아질서 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조선정부가 독자적으로 서구열강의 침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체계를 고수하면서 내수(內修)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새로운 방책들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는 개국부강론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규경(李圭景)의 경우, 서양에 대한 완고한 쇄국정책을 반대하고 교역에 의한 유무상통(有無相通)을 주장하였다. 1832년 영국선 암 허스트호의 통상요구를 정부가 거절한 것에 대해 이규경은 그들에게 약조를 엄수하도록 하면서 특별히 개시(開市)를 허락하여 적이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최한기(崔漢綺)는 서구의 실용문화를 취하여 쓰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이지 천주교의 만연은 근심할 것이 못된다 하며 천주교에 대한 봉건정부의 민감한 반응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재야에 그치지 않았다. 정부내에서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가령 박규수의 경우, 1861년 문안사로서 중국의 국내정세와 국제정세를 탐문하고 돌아온 후, 기존의 서양관에서 벗어나 서양과 자주적으로 외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북학사상의 부국론을 토대로 서양의 장점을 받아들여 서양을 막아야 한다는 해방사상(海防思想)의 논리를 수용하여 개국부강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서구열강의 침투를 둘러싸고 조선의 조야는 서서히 두 입장으로 갈리면서 각자의 논리들을 체계화해 나갔다. 그러나 1860년대는 여전히 중국의존의 외교질서를 고집하면서 내수양이론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4) 일반민의 동향

 

서울에서는 청황제의 열하피난 소식과 조정의 문안사파견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양 오랑캐의 침략설이 나돌았다.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피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또 이러한 위기감은 지방에까지도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대외 위기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일반민들 사이에는 각종 비기와 도참류의 이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1860년 북경함락과 그 4년 후인 갑자년을 기화로 참위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정감록』(鄭鑑錄)을 들 수 있다. 『정감록』은 전통적인 유교의 사상체계를 초탈하여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참위서라는 성격과 함께 그 사상적 기조가 주로 난세관과 말세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병란(兵亂)과 결부되어 있다. 가령 『정감록』에는 외침 즉 전란에 대한 공포의식이 충격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감결」(鑑訣)을 보면, 전란으로 인한 처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심(沁)이 말하길, 세 사람이 상대하였으니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갑년(甲年) 춘(春)3월, 성세(聖歲) 추(秋) 8월에 인천·부평 사이에 밤에 배 천 척이 닿고, 안성·죽산 사이에 쌓인 송장이 산과 같고, 여주·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원히 끊어지고 수성(隋城, 수원의 옛 이름)·당성(唐城, 한양의 옛 이름)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고, 한남백리(漢南百里)에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없고, 사람의 목소리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아울러 「무학전」(無學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지나간 일로 살펴보면 중간에는 서얼(庶孼)의 추(秋)와 적자(賊子)의 변(變)이 항상 일어났다. 그 연수를 생각해보면 병사(兵事)는 갑·자·진년에 있다.
여기서 진(辰)은 임진(壬辰)년, 자(子)는 병자(丙子)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과거의 난을 이야기한 것이며, 다음에 올 난은 갑자(甲子)가 든 해(1864년)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병란이 일어났을 때 보신을 위한 피난처로서 “산에도 이롭지 않고 물에도 이롭지 않으며 양궁(궁궁, 弓弓)이 가장 좋다”고 하고 그곳은 “병화도 흉년도 들지 않는 보신처로서 구체적으로 풍기·예천을 비롯한 10승지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정감록』이 더욱 유포되어, 당시 민들의 의식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작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외 위기의식이 가중되는 가운데 정감록 사상과 함께 이단사상으로서 동학사상이 등장하여 민중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는 서양인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는 우리나라에 진출할 것이니 변란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고,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고 보국안민할 방도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그중에서도 직접적인 계기는 1860년 북경함락이었다.
그는 「권학가」에서 경신년(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킨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천주교의 유포를 우려하였다.
그러면서도 최제우는 “서양도적놈들이 나타나면 주문과 검무로써 적들을 막아내고 천신의 도움을 얻을”것이라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 도둑놈들이 화공하면 갑병(甲兵)은 대적하지 못하며 오로지 동학만이 그 무리들을 섬멸할”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동학사상은 보국안민사상으로서 민중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이제 조선의 지배층과 민중들은 봉건사회의 여러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과제와 함께 서구열강의 외압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3. 정치세력의 분화와 동도서기파의 정치방향

 

개항으로부터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의 국내정치세력의 근대적 지향과 노선을 모두 개화사상 또는 개화파의 운동이라 하여 온건 및 급진개화파, 또는 개량적·변법적 개화파로 분류하는 방법이 답습되어왔다.
이광린은 임오군란 이전에 이미 개화의 방책을 둘러싼 견해에 따라 급진개화파 및 온건개화파로 분열되었다고 하였다. 강재언은 임오군란의 처리에서 대원군의 납치문제를 둘러싸고 이전부터 있어왔던 두 파의 사상적 차이가 표출되어 특히 청국과 수구파에 대한 자세에 따라 변법적 개화파와 개량적 개화파로 분화되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1880년대 초기, 정부주도의 개화시책 즉 초기 근대화정책의 사상적 배경도 개화사상이고 정책도 개화파의 운동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필자는 초기 근대화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동도서기론이며 담당주체가 고종과 정부내의 개명관료들이었고 정책목표가 양무적인 자강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개화사상 내지 개화파의 확대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완재는 온건 또는 개량적 개화파로 표현되는 김윤식 등을 동도서기파라 하여 개화사상 내지 개화파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은 내용이 다르며 각기 별개의 사상체계를 갖고 있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 한때 중단된 정부주도의 초기근대화정책은 군란 후 다시 추진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청·일의 무력개입과 특히 대원군의 납치 등,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이 강화되자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쇄국파에 반대하던 당시의 집권세력인 개항파 내부에 분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개항 초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노선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즉 청국과의 전통적인 종속관계를 유지하면서 청국과의 협조를 통해서 양무적인 자강과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한 동도서기파(초기 자강파)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부국강병론을 주장하고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화를 모델로 한 개화파로 분화되어 나갔다. 전자인 동도서기파로는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인 개화파로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유길준·윤치호 등을 들 수 있다.
개항 초기의 연구상황은 대체로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에서 조선근대화의 유일한 계기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도서기파를 상대화시켜 일정하게 평가하면서 청일전쟁 이전의 조선근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고, 전자를 사대파, 후자를 개화파로 구분하는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동도서기파의 정치방향도 일률적으로 말하기 곤란하고 김윤식과 어윤중의 정치적 지향도 반드시 모든 면에서 합치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동도서기파도 시기적으로 일정한 사상적 변용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홍집의 경우,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임무를 마치고 귀국 후 국왕과의 문답에서 강조한 자강은 단순한 부강이 아니고 전통적인 유교도덕과 정치제도의 개선·정비로 인민과 국가를 내정면(內政面)에서 안정되게 하고, 동시에 군비와 기술의 증강을 통해서 외국과 틈이 생기지 않도록 대응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수단으로 부국강병책을 상정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동도서기의 논리가 관류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김윤식은 조선과 같은 약소국은 청국과의 정치 및 문화적인 사대관계의 틀을 이용해서 근린열강의 외압에 대처하는 것이 국가이익 수호에 유리하고 그것이 조선의 자주권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상정하는 근대화의 방향은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부정이나 체제개혁이 아니라 열강과의 분쟁을 없애면서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초기근대화정책이 중단되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부활되자 당시 천진에 있던 김윤식은 어윤중과 협의한 끝에 사대관계를 이용하여 청국의 무력으로 대원군의 행동과 일본의 보복을 억제하고자 했고, 조·미 조약과 청국과의 무역장정에서 속방조항의 삽입을 인정하고 종속관계의 강조로 대외억지력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의 대청협조론(對淸協調論)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조선의 자강을 전제로 한 국가독립구상이었으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청국의 종주권의 강화와 상병정책을 자초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어윤중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문의관으로 청국에 파견되어 귀국한 후, 정치적 지향도 일정한 전환을 보여주고 있으며 김윤식에 비해 보다 전진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윤중은 귀국 복명에서 시국대책으로 부국강병책의 필요성을 표명했다. 그는 조선이 국정개혁을 하는 데 근본적인 장해는 유교적인 풍토라고 진단하고 과거제도 폐지와 연소기예(年少氣銳)한 인재등용 그리고 능률적인 정부운영을 강조하였다.
어윤중은 메이지유신 후 일본의 근대화를 평가하면서도 인민생활의 곤궁화와 침략성 등 일본 근대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가 상정하고 있던 부국강병책도 기본적으로 동도서기론적인 자주·자수(自修)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이용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한편 청국과의 종속관계도 점진적으로 청산하고자 했다. 그리고 청국이 인정하는 자주의 테두리 안에서 외교와 상무(商務)를 추진하여 자강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4. 개화파의 정치개혁구상

 

개화사상의 원류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 특히 18세기 후반의 북학사상의 계보를 잇는 박규수(朴珪壽)와 역관출신 오경석, 한의 출신 유대치 등 봉건권력 내부의 개명관료와 선각적인 중인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개항직전 형성된 개항론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쇄국·양이론에 반대하는 개항파는 그후 동도서기파와 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개화파의 형성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개항 후인 1880년 전후에 형성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같은 개화파의 형성은 조선의 사상적 유산 속에서 진보적 측면을 사상내재적으로 계승하고, 개항 후의 외발적 요인에 촉발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의 사상과 행동의 최종적 지표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있었다. 개화파의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 표면에 나타난 것은 대체로 임오군란 이후였다. 임오군란 후 당시의 집권세력 특히 상층실세들이 청국에 정치·상업상의 특권을 양여하면서 종속성을 심화시켜가자 김옥균 등 개화파는 청국군이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나라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보다 첨예화된 청·일 두 나라 사이의 모순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옥균·홍영식 등은 국왕을 사적으로 면접할 수 있는 별입시(別入侍)의 특권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신군 양성, 유학생의 파견, 그리고 박문국(博文局)의 창설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창간(1883년 10월)하였다. 박영호는 1883년 2월 한성판윤(漢城判尹, 지금의 서울시장)이 되자 치도국(治道局)과 순경국(巡警局)을 설치하여 수도 서울에 근대적 도시행정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홍영식은 1883년 이전의 역마제를 개편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도입할 것을 우정국을 창설하게 하고 그 총판이 되었다.
서재필의 회상에 의하면 김옥균은 유학생들에게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된다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김옥균은 근대적 개혁에 소요되는 재정상의 곤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1883년 4월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로 있으면서 그 사업을 담보로 3백만 원의 재정 차관을 얻고자 했다.
당시 일본재야의 유력자이며 문명개화의 기수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통해 일본정부에 접근하여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정부는 김옥균이 의도한 3백만 원이라는 거금의 차관을 공여할 의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김옥균은 1884년 4월 실망 속에 귀국했다. 당시 개화파 인사는 대체로 소장관료로서 실권파에 의해 점차로 소외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이 일어나고 이와 관련하여 임오군란 이래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의 절반인 1,500명이 철수하였다. 청국이 프랑스에 연패하자 일본은 개화파에게 지원을 약속하는 등 조선문제에 적극성을 띠게 되고 개화파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급하게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결국 3일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개화파의 정치적 좌표와 정치개혁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14개 조항을 위시하여 『김옥균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지운영사건 규탄상소문(1886년), 견미사절 홍영식 복명문답기, 박영호의 조선내정개혁에 관한 건백서(1888년), 『서재필자서전』, 이노우에 가쿠고로우(井上角五郞)의 『강연』(講演),(1929년), 유길준의 『서유견문』 등을 참작하면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국가주권의 독립, 구체적으로는 대청독립론(對淸獨立論)을 들 수 있다. 김옥균은 임오군란 후,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이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자수자강(自修自强)하는 대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했다[미주 41]. 갑신정강 제1항에서도 대외적인 민족의 독립과 정치적 독립의 입장에서 임오군란 때 청국으로 납치된 대원군의 조속한 귀국과 친청사대외교(親淸事大外交)의 폐지를 제기하였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주성은 강조되고 있으나 일본을 포함한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김옥균 등 개화파의 대외관 특히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있는 낙관적인 국제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김옥균의 대청독립론은 객관적으로 이 시기 일본의 조선정책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화파는 청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정치·외교의 자주자강을 방해하는 정부 안의 친청사대인물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는, 정치체제의 개혁론이다. 개화파는 정강 제4항과 제13항 및 제14항 등에서 사실상 내각제도의 창설과 정부조직의 개편을 제기하였다. 즉 모든 정령(政令)은 대신(大臣, 長官)과 참찬(參贊, 次官)으로 구성되는 의정소(議政所, 장·차관회의)에서 협의하여 의정한 후 국왕에게 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국왕의 정치적 전제권을 제한하는 것이며 입헌군주제의 초기형태인 입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내각제도의 창설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부조직은 개편하여 6조(曹)로 하고 6조 이외의 불필요한 부서는 폐지하며 특히 내시부(內侍府)와 같은 전근대적 부서는 모두 폐지하고 왕실사무와 국가행정사무를 구별할 것을 제기했다. 그러나 개화파는 소수의 엘리트 양반의식으로 갑신정변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민을 주체가 아닌 정치적 객체로 간주하고 있었다.

 

셋째는 경제개혁의 구상이다. 개화파는 나라의 근대적인 기반조성을 위해서는 봉건적인 경제수탈을 제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조선의 산업이 부진한 요인을 양반 관리의 자의적인 인민수탈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었다.
개화파의 경제개혁 구상은 갑신정강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① 국가재정의 통일, ② 지조법(地租法)의 개혁, ③ 탐관오리의 중간수취 근절, ④ 환곡제도의 폐지, ⑤ 보부상 등 봉건적 특권상업의 폐지 등이다. 그러나 개화파는 조선사회의 근대화개혁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였던 지주·전호관계로 집약되는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폐지를 제기하지 않았다.

 

넷째는, 사회·교육개혁의 구상이다. 조선사회 내부의 불평등의 근원은 신분제와 그에 기초한 문벌제도였다. 김옥균은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인재등용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갑신정강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사람의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인민평등권의 제정(정강 2항)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적극적인 평가도 있으나 수구적인 집권문벌세력의 제거를 위한 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화파의 민권에 대한 관심도 그들의 엘리트 의식과 관련하여 인지(人智)의 개발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종교(구체적으로 기독교의 도입을 상정한 듯)를 도입할 것을 제기하였다. 인민에 대한 교육의 중시와 유교의 극복은 개화파와 공통되는 주장이기도 하였다.

 

1883년 6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온 홍영식도 미국의 대중적 교육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고 유길준에 이르러 한층 높은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같은 개화파의 정치개혁구상과 대외인식은 조선이 당면하고 있던 청·일의 외압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5. 갑신정변의 실패와 의의

 

3일 천하로 끝나긴 했지만 갑신정변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개화파의 개혁안 중 정치면에 있어서는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 국왕의 전제와 척족의 국정간섭을 막고 내각제도에 의한 국정운영을 모색하였다는 점, 사회·경제부분에 있어서는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지조법개정과 탐관오리와 국가기관의 정비, 국가재정기반의 확립 등을 제시한 점 등이 높이 평가된다. 그리하여 갑신정변은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으로서, ‘위로부터의 부르주아개혁’의 시발로 평가된다.
끝으로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과 영향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동안 정변이 실패한 원인으로 국제적 환경 등의 외적 조건과 대외정세 판단의 오류,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미숙성, 개화사상이 위로부터의 개혁사상이었던 관계로 일반민중에 침투하지 못했던 점 등이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와 개화사상의 한계 등은 정변 직전 발생한 것이 아니었으며, 국제적 환경과 정세판단의 정확성 여부 또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할 것이다. 정변실패의 최대원인은 김옥균 등이 정변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정치·경제·군사적 역량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를 이용하여 정변을 시작한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화파가 정변에 동원한 세력들은 개화파 관료들의 시종, 신식군대 일부, 부상을 포함한 상인 등으로 볼 수 있다. 정변 당시 동원하였던 병력과 인원은 『갑신일록』의 12월 4,5일 기록에 나타나는 인원과 사관생도 그리고 정변 후 정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인물과 수배자를 더하면 총 64명이 된다. 그밖에 동원된 신식군대는 정변 발발시 전영 소대장 신경완 지휘하에 50명 정도였고, 가장 많을 때가 전영·후영 합쳐 약 400명 정도였다. 이와 같이 개화당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동원인원은 500~600명이었고, 그들이 기대하였던 일본공사관의 병력규모는 120명 정도였다. 청불전쟁 격화 이후 서울 주둔 병력의 절반이 철수하였지만 당시 서울에 있었던 청군의 규모가 약 1,500명으로 추산된다. 실로 당시 개화파가 가지고 있었던 힘의 열세는 객관적으로 너무나 뚜렷했다. 이러한 점은 정변 직전 김옥균이 만난 유대치나 정변 당시 행동대의 일원이었던 이규완 그리고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화인물 윤치호 등도 이미 지적한 바 있었다.
정변의 실패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개화파가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궁을 피로 물들게 함으로써 개화파에 우호적이었던 왕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반 국민들로부터 막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을 왜곡하고 불신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개화운동·근대화운동 발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6. 동학운동(동학농민전쟁)*77

(1)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

 

19세기로 접어들자 그전부터 성장해오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각 분야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를 지탱해주던 중심적 고리들의 이완·붕괴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는 봉건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조직적으로 투쟁을 벌였는데 불시에 관료와 지주들을 습격하여 봉건지배계급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19세기로 접어들자 이러한 투쟁은 보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도 최고의 형태를 보인 것으로는 관서농민전쟁―이른바 홍경래란(洪景來亂)―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면서 당시 성장하고 있던 사상인(私商人)층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몰락양반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것은 그후 농민투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쳐 농민투쟁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로 이른바 변혁세력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들은 관서농민전쟁 후 사회가 어수선해지고 지배세력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홍경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조선정부를 전복하려 하거나, 남조선왕국을 세우려는 등의 계획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한편 같은 시기인 1833년(순조 33)에는 쌀값폭등에 대한 도시빈민들의 저항이 서울에서 일어났다. 이 쌀폭동사건은 당시 상당히 진전되고 있던 상품화폐경제가 도시에서 어떠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을 지나자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은 더욱 빈번하고 강력해졌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주들의 지나친 지대착취에 저항하여 항조운동(抗租運動)의 일환으로서, 그리고 봉건말기적 조세수탈에 저항하여 일어난 소빈농층의 봉기였다. 소빈농층이야말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기본계급으로서 조선봉건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층세력이었다.
빈농 유계춘(柳繼春)이 이회(里會)를 열고 직접 통문을 만들어 돌림으로써 시작된 농민봉기는 악질지주와 탐관오리의 집을 부수고 진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1862년(철종 13)의 임술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을 선두로 전국적으로 번졌다.
1876년(고종 13)에 강요된 개항을 맞이하자 농촌경제는 더욱 무너져내렸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농민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79년에는 울산에서 농민들이 관아로 쳐들어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방면시켰다. 이들은 아전들이 마구잡이로 거두어 들이는 조세에 불만을 품어왔던 것이었다. 1880년 황해도 장련에서도 같은 성격의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1883년 동래에서도 비슷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성산·여주·원주·북청·정선·인제·광양·함흥 등지에서도 해마다 농민들이 지방의 탐관오리와 악질지주에 대항하여 횃불을 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농민봉기와는 달리 명화적(明火賊)이라는 일정한 조직을 갖춘 농민도적떼들이 경향(京鄕) 각지에서 출몰하여 부호의 집을 털기도 하고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이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올리기 전 곧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이 한창 진행되던 1893년 한 해만 해도 평안도의 함종·중화, 경기도의 인천, 황해도의 재령·개성·황주, 충청도의 청풍·황간, 강원도의 금성 등지에서 연이어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봉건정부는 민씨집단의 부패타락한 정치로 인하여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2)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부상

 

19세기에 들어와 사회변혁의 한 요소가 된 민중사상, 이른바 『정감록』의 도참사상·미륵출현사상, 『주역』의 후천개벽사상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전국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기층민의 정서와 결합되면서 확산되었던 이러한 민중사상은 19세기의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변혁세력의 적극적 활용에 힘입어 지배계급의 성리학에 대항하는 기층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이는 곧 동학(東學)으로 연결되고, 또 갑오농민전쟁 당시 일반 농민군의 정서와 상당히 일치된 변혁론이었다는 점에서 19세기 조선사회의 특질을 발견하게 된다.
19세기는 확실히 조선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앙을 주던 사상들 사이에 서서히 내적 교류가 이루어져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한 시대였고, 동시에 그런 사상들이 반봉건운동에 강력한 이념적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려는 여명기였다.

(2) 동학의 등장과 의미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과 동학을 결부시켜 그 명칭을 ‘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동학민중운동’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깊은 관련성과 농민전쟁에 끼친 동학의 기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농민전쟁 지도자가 동학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이분법적 발상에서 농민전쟁과의 관련성을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표피적인 질문을 통해서 동학과 농민전쟁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동시에 1894년의 농민전쟁을 명명하는 데 있어 동학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근원적으로 답을 줄 수도 없다. 그러면 우선 동학사상이 어디로부터 근거하여 형성되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1) 동학의 사상적 뿌리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던 1860년 농촌사회는 봉건사회의 모순과 농민층분화로 그 안정적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최제우에게도 이런 농촌현실이 그대로 보였고, 자신도 급속히 몰락해가는 양반집의 서자로서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켠으로 밀려가는 데 예외일 수 없었다.
혼란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고, 이런 틈을 타 사회일각에서는 서학(西學)이 기층민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서학을 하나의 사상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구도에 들어갔다. 최제우는 당시 기층민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여러 사상들을 정리한 후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즉 『주역』의 선후천 순환논리를 받아들여 자신이 지은 「검가」(劒歌)에서 5만 년의 시운으로써 후천이 열린다고 확신하였다. 다음 그는 당시 기층민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도참사상을 받아들였고, 장생불사 신선사상도 흡수하였다. 하지만 하늘나라의 신선이 아니라 지상신선으로 바꾸었다.
위와 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는 가운데 동학이 완성되었고, 이때 동학은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 운(運)은 하나이고 도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논학문」, 『동경대전』)고 논파한 대로 서학에 대응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2) 동학의 기본골격과 사회적 위상

 

이렇게 하여 탄생한 동학은 여러 사상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학은 크게 두 가지의 사상적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첫째는 기일원론적 우주관 속에서 하날님을 바로 자기와 일체화시킨 인간관 제시이다. 이런 기론(氣論)에 바탕한 인간관은 그 지극한 기를 자신의 정성에 따라 내 몸속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侍天主), 그리하여 하날님과 하나가 되는 이른바 인내천(人乃天)사상의 초기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조화 속에서 천도운행에 따른 선후천 순환운동론 확립이다. 무위이화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그리하여 그 조화가 이미 정해져 있는 부분이다(造化定).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후천에서는 역전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대 골격은 따로 떨어져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21자 주문 속에 통일적으로 압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학사상은 당시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인간생활 중심의 질서를 내세움으로써 지배구조의 전도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한계는 그가 기층민의 염원을 반영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면서도 이러한 종교적 입장에 안주하여 현실의 가파른 모순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최제우가 선택한 것은 급박한 현실에 대한 우회적 대응론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회적인 방법론을 가지는 동학까지도 당시 조선 봉건체제 속에서는 불온한 것이었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최제우는 결국 1864년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3) 동학농민전쟁의 성격과 의의

 

1) 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그동안 학계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깊이 있게 진행되어 왔다. 이는 크게 주도세력과 기본동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대체로 주도세력으로는 19세기 변혁세력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봉준 등으로 대변되는 호남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잡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척왜양운동 때부터 세력화되어 고부봉기를 거쳐 본격적 농민전쟁단계에 이르기까지 농민전쟁의 기본동력과 결합하여 농민전쟁을 이끌었다. 다만 이들을 동학교단과의 관계에서 다시 언급한다면 교단의 남·북접계열과는 다른 전봉준계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농민전쟁의 기본동력으로서는 그동안 크게 부농주도론과 빈농주도론 그리고 북한에서의 입장인 농민대중 일반론으로 나뉘어왔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농민전쟁의 기본동력은 조선 후기 농민층 분화과정에서 형성된, 그리고 19세기 이후, 짧게는 개항 이후 일어난 농민항쟁을 통해 결집된 소빈농층이었고, 이들은 1·2차 농민전쟁과정에서 탐관오리·지주 토호세력·부농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본동력의 구성에는 도한·재인·역부·야장·승도,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부·중농도 끼어 있었다.
이상 주체세력의 사회·경제적 지향은 농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확보와 나아가 소상품 생산자로 성장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에 장애되는 사회적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향에 따라 이들은 구체적으로 탐학관리의 축출에서 출발하여, 외국인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것과, 부당한 신분차별의 철폐와 지주 토호들의 무단을 제거하는 데 투쟁목표를 두었다.
주체세력의 정치·이념적 지향은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토양 속에서 출발하여 척왜양운동기에는 초보적 반외세의식과 민회라는 서구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까지 보이다가 1차기병을 거쳐 집강소 농민통치 및 청일전쟁을 경험하고서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국내외문제와 2차기병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2차기병의 목적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데 있고 또 농민군 스스로 의병이라고 부르는 데서 나타나듯이 궁극적으로 봉건체제를 지양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근대민족주의로의 지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구체적으로 1차기병에서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에게 참가를 호소한 데서, 집강소 통치기간에 폐정개혁 실시와 김학진과 같은 중앙관리를 포섭한 데서, 2차기병에서 “경군과 영병 그리고 이교(吏校)와 시민들”과의 반일대연합전선을 구축하려한 데서 그 단계적 발전과정이 추적된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근왕적 사고를 탈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국 농민군간의 보다 견고한 지역·조직적 결속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또한 일본의 경복궁침입으로 인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담당할 세력과의 제휴가 차단된 상태에서 농민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할 수 있고, 그 결과 공주대회전 이후 정부·일본 연합군 및 보수유생 등의 반농민적 보수연합세력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2) 동학농민전쟁의 의의

 

이제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의 1·2차기병이 몇몇 개인의 탐학과 거기에 대한 저항, 그리고 사적인 욕망들에 의하여 촉발되었거나 전개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동학농민전쟁은 19세기, 특히 개항 이후 조선사회에 노정된 내외적 모순의 총체적 폭발로 일어났으며, 거기에는 전봉준계열이라는 주도세력의 오랜 준비와 기본동력인 소빈농층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다. 이들은 전주화약 이후 전취(戰取)된 집강소 조직을 통해 농민통치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담당하였고 근대민족국가로의 길을 여는 데 힘을 쏟았다.
농민통치가 비록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지 않고 비록 호남지방 및 인근 일부지방에 한정되었다고는 하나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전쟁을 통해 주체적으로 중앙의 봉건권력을 차단하고 일정지역을 장악하여 농민적 권력의 집행과 재분배를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봉건사회의 말기적인 모순들이 농민들을 내리누르고, 세계자본주의 열강―무엇보다도 일본의 경제·군사적 침략―까지 농민들을 조를 때 안팎의 거대한 장벽들을 서로의 연대의식과 자신들의 독자 역량으로써 완전히 돌파해버리고 근대민족사회로의 터전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농민군이 공주대회전에서 패하자 농민통치의 경험, 즉 아래로부터의 치열한 개혁은 반농민적 보수연합세력의 진압에 의해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귀중한 경험과 값진 성과는 그냥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는 곧 봉건지배층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고, 그로 인해 내부에서는 심한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으며, 갑오개혁*78을 시작으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으면 통치의 정당성이 유지될 수 없을 만큼 통치체제의 변화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외세와의 야합과 강제 아래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을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민족의 근현대사에 커다란 역사적 부담이 되었고, 그 역사의 무게는 아직도 도처에서 우리를 누르고 있다.

'한국사상사개요' 참고자료

 

차 례

 

1. 신화(神話, myth) 187
2. 수미산(須彌山) 191
3. 도리천( 利天, Trayastrimsa) 191
<참조 1> 천(天, deva) 191
<참조 2> 도솔천(兜率天, Tusita) 192
<참조 3> 인드라(Indra) 192
<참조 4> 인도신화(印度神話, Indian mythology) 193
4. 태양신화(太陽神話, solar myth) 194
<참조> 태음신화(太陰神話, lunar myth) 195
5. 천신(天神, Sky god) 195
6.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195
7. 터부(taboo) 196
8. 중국사상에서의 천(天) 197
9. 조상숭배(祖上崇拜) 198
10. 토지신(土地神) 199
<참고> 도교 199
11. 산신(山神) 201
<참조> 산악숭배(山岳崇拜) 201
12. 장승(長丞) 202
13. 이차돈(異次頓, 506∼527) 203
14. 연등회(燃燈會) 203
15. 팔관회(八關會) 203
16. 탱화(幀畵) 204
17. 격의불교(格義佛敎) 204
18. 삼론종(三論宗) 204
19. 구마라습(鳩摩羅什, Kumarajiva, 344∼413) 205
20. 중관파(中觀派, Madhyamika) 205
21. 유식사상(唯識思想) 206
<참조 1> 유식학파(唯識學派, vijuaptimatravadin) 206
<참조 2> 법상종(法相宗) 207
22. 일심(一心) 207
23. 정토(淨土) 208
<참조 1> 정토문(淨土門) 208
<참조 2> 정토종(淨土宗) 208
24. 미타신앙(彌陀信仰) 209
<참조>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yus Buddha) 209
25.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210
26. 밀교(密敎) 210
<참조 1> 태장계(胎藏界, garbha-dhatu) 211
<참조 2>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 garbha- dhatu-mandala) 211
<참조 3> 만다라(曼茶(陀)羅, mandala) 211
27. 경교(景敎, Nestorianism) 212
28. 화엄종(華嚴宗) 212
<참조> 화엄경(華嚴經) 213
29.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214
30. 미륵신앙(彌勒信仰) 215
<참조> 미륵(彌勒, Maitreya, 270 ?∼350 ?) 216
31. 9산 선문(九山禪門) 216
32.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系圖) 218
33. 북종선(北宗禪) 219
<참조> 남종선(南宗禪) 219
34. 최치원(崔致遠, 857∼?) 220
35. 변려문(騈儷文) 220
36. 다라니(陀羅尼, dharani) 221
37. 가섭(迦葉, Mahakasyapa, ?∼?) 221
38. 도선(道詵, 827∼898.3.10) 221
39. 방벌(放伐) 222
<참고 1> 선양·방벌(禪讓放伐) 222
<참고 2> 역성혁명(易姓革命) 223
40. 교사(郊祀) 223
41.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223
42. 훈요 십조(訓要十條) 224
43.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 224
44. 전호(佃戶) 225
45. 중화사상(中華思想=華夷思想) 226
46.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226
47. 팔부 신중(八部神衆) 227
48. 법안종(法眼宗) 227
49. 천태종(天台宗) 228
50. 임제종(臨濟宗) 229
51. 백련사(白蓮社) 229
52. 유서(類書) 229
53. 경연(經筵) 230
54. 소격서(昭格署) 231
55. 유향소(留鄕所) 231
56. 사창(社倉) 232
57. 향음례(鄕飮禮) 233
58. 과전법(科田法) 233
<참조 1>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 234
<참조 2> 직전법(職田法) 235
59. 육상산(陸象山, 1139∼1192) 236
60. 삼종 칠거(三從七去) 236
61. 칠출 삼불거(七出三不去) 236
62. 향약(鄕約) 237
63. 고증학(考證學) 238
64. 예송(禮訟) 239
65. 사문난적(斯文亂賊) 240
66. 양명학(陽明學) 240
67. 양전(量田) 241
68. 대동법(大同法) 242
69. 공거제(貢擧制) 243
70. 체아(遞兒) 243
71. 나주 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 243
72. 도참 사상(圖讖思想) 244
73. 정감록(鄭鑑錄) 245
74. 김항(金恒, 1826∼1898) 246
75. 황건의 난(黃巾-亂) 246
76. 오두미도(五斗米道) 246
77. 동학(東學) 247
<참조 1>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248
<참조 2> 동학 20개조 폐정 개혁안(東學十二個條弊政改革案) 250
<참조 3> 천도교(天道敎) 251
<참조 4> 시천교(侍天敎) 254
78. 갑오개혁(甲午改革) 254

1. 신화(神話, myth)

 

어떤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승적(傳承的) 설화. 신화를 뜻하는 myth는 그리스어의 mythos에서 유래하는데, 논리적인 사고 내지 그 결과의 언어적 표현인 로고스(logos)의 상대어로서, 사실 그 자체에 관계하면서 그 뒤에 숨은 깊은 뜻을 포함하는 ‘신성한 서술(敍述)’이라 할 수 있다.

 

【신화의 정의와 특성】 신화에는 여러 종류와 갈래가 있고 그 구조와 성격도 복잡하여 간단히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각종 신화에 공통되는 일반적·기본적 성격을 든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기원(起源)에 관한 신성한 전승설화인데, 그것은 단순히 태고에 있었던 사실에 관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 있어서의 자연·문물·인간의 행동에 대해서까지도 규제력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신화는 여러 가지 현실적 존재인 우주·인간·동식물, 특정의 인간 행위, 자연 현상·제도 등이 어떻게 하여 출현하였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창조’에 관한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창조역사의 주역은 여러 가지 초자연적 존재들이고, 그들은 태초에 맡은 역할로 알려져 현재의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의 창조활동을 설명하고 그 활동의 성스러운 성격(초자연성)을 나타내며, 또한 성스러운 것의 현실에 대한 참여(參與)를 의미한다. 인간이 죽어야 할 존재이고 양성(兩性)으로 나뉘었으며, 서로 싸우는 등의 현상은 초자연적 존재의 간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진실성은 실제로 존재하고 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으로 증명된다. 이를테면, 우주창조 신화가 진실인 것은 세계가 현존함으로써 증명되며, 죽음의 기원신화(起源神話)의 진실성은 죽음이라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또한 신화는 인간의 일상행동을 규제하는데, 그것은 신화가 말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행위와 그 성스러운 힘의 표현이 인간의 모든 중요 행동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뉴기니의 카이족(族)은 그들의 생활양식을 바꾸기를 거절하는데, 그 이유로서 신화상의 조상인 넴이 행동한 대로 그들도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나바호족(族) 제식(祭式)에서의 영창자(詠唱者)는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태초에 성스러운 조상들이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실의 사물이나 행동을 신화로써 정당화하는 예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신화·전설·옛이야기】 모든 설화는 신화와 전설과 옛이야기로 나뉜다. 신화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일, 특히 우주·인간·문화(사물)와 같은 인간생활에 있어 본질적 의미를 갖는 존재의 시원(始源)에 관한 설화이며, 전설(saga, legend)은 어떤 시대에 일어났던 큰 전쟁이나 큰 사건과 같은 실제 사실에 관한 설화이다. 가장 유명한 예로서 트로이 전쟁의 전설이 있다. 이처럼 전설은 신화와는 달리 태초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태초와 현재와의 사이의 어느 한 시기에 실제로 있었다고 믿어지는 인물이 특정한 장소에서 벌인 사실을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설은 신화처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약하고, 또한 성스러운 성격이 부족하며, 현실에 대한 규제력에 있어서도 모자란다. 반면에 구체적인 역사에 보다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어 전설을 전달하는 당사자는 그 내용이 구체적인 사실(史實)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한편, 옛이야기(folk tale)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사건을 “옛날 옛적에 어떤 곳에…” 하는 식으로 말하는, 주로 오락적인 내용의 이야기이다. 《콩쥐팥쥐전》이나 《신데렐라》와 같은 설화는 세계 도처에서 전승되고 있지만, 그 진실성이 박약하여 사실(史實)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옛이야기는 특정한 시대에 일어났던 1회적(的)인 사건을 말하는 신화나 전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옛이야기는 어떤 지역에서 한번 유행하기 시작하면 언어나 지리적 장벽을 넘어 무한정 퍼져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외눈의 거인설화를 호머의 작품이나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예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형식이 정리된 옛이야기가 퍼져 있는 곳은 대개가 고대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이나 그 주변지역이다. 신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의미를 지니는 모든 사회의 주민들은 신화를 ‘진실된 이야기’라고 믿으며, ‘거짓의 이야기’라고 일컫는 일반적인 설화와 엄격히 구분한다. 북아메리카 토인인 포니족(族)은 진실의 설화를 3단계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초자연적이고 성스러운 존재에 의한 이 세상의 창조를 다룬 설화이고, 둘째는 괴물을 쫓아내고 기아(飢餓)나 그 밖의 재해로부터 주민을 구하며, 여러 가지 자비로운 행위를 한 부족의 영웅설화이고, 셋째는 초자연적 힘을 가진 주술사(呪術師)나 주의(呪醫)에 관한 설화이다. 이에 비하여, 그들이 거짓 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코요테(평원의 늑대) 따위의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설화이다. 이처럼 신화는 인간에게 있어 존재론적·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신화의 분류】 신화는 그 종류가 지극히 많고 다양하여 종래에도 그 구성 요소의 성격·특징·계통 등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정리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신화의 내용은 자연과 문화 모든 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정연(整然)하게 조직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크라프는 신화를 하늘과 땅에 관한 신화, 대광체(大光體)의 신(神)에 관한 신화, 해·달·별에 관한 신화, 대기(大氣)·화산·물에 관한 신화, 타계신화(他界神話), 반신(半神)의 신화, 우주기원 신화, 인류기원 신화, 재앙신화, 사적(史的) 신화로 나누었다. 이 분류는 어떤 일정한 기준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서로 관계가 있음직한 내용을 한데 모아 배열한 느낌을 준다. 민족학자 J.H.헤켈은 우주기원 신화, 신(神)들의 신화, 원초 상태에 있어서의 신화, 원초(原初)와 변용(變容)의 신화, 종말론적 신화, 자연 및 우주론적 신화로 나누고 있다. 이 경우도 일정한 기준이 애매하여 기원(起源)의 대상이 된 우주나 인류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기원과는 관계 없이 신들의 신화나 자연신화에 따라 분류하는 등, 통일성이 결여된 느낌을 준다. 이 밖에도 자연신화와 인문신화, 저급신화와 고급신화, 기술(記述)신화와 해명(解明)신화 등 여러 기준에 의한 분류가 있으나 신화의 특성에 비추어 충분한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신화는 원초에 있었던 일에 의해 자연·인류·문화의 상태를 설명하고 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설화이기 때문에, 모든 신화는 적든 많든 간에 기원신화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점을 중시하여 여러 가지 신화를 정리·분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① 우주기원 신화, ② 인류기원 신화, ③ 문화기원 신화이다. 하늘과 땅, 그 밖의 자연에 관한 신화나 홍수신화 등은 우주기원 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한편 홍수신화가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범위 안에서는 인류기원 신화의 일부이고, 원초상태에 관한 신화가 원초에 있어서의 문화의 창조를 설명할 경우, 그것은 문화기원신화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신화는 우주기원신화인 동시에 인류기원신화나 문화기원신화인 경우가 흔하다. 어떤 문화영역에 있어 우주·인류·문화의 기원신화가 각기 따로 설명되고 있을 경우에도 3가지가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신화가 갖는 다면적 성격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원신화와 그 분포범위】 3가지 기원신화에 관해서 몇 가지 구체적인 예와 분포범위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우주기원 신화:① 초자연적 존재가 단독으로 우주를 창조하는 전형적인 예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지만, 뉴질랜드의 마오리족(族)과 그 밖의 예도 있다. ② 초자연적 존재가 인간이나 동물의 협력을 얻어 바다 밑에서 흙덩이를 주워 올려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경우를 잠수신화(潛水神話)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예를 시베리아·내륙아시아·동남아시아 및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다. ③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지 않고 어떤 종류의 물질이나 요소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하여 우주가 생겨났다는 예는 폴리네시아·일본 등에서 볼 수 있고, 알에서 우주가 태어났다는 난생(卵生)신화는 유럽이나 남·북아메리카의 고문화지대(高文化地帶)에 분포되어 있다. ④ 세계의 종말에 초자연적 존재와 그 협력자가 함께 나타나 파괴된 우주를 재생시킨다는 식의 신화는 전세계의 고문화지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⑵ 인류기원 신화:① 초자연적 존재가 단독으로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였다는 신화의 전형적인 예는 《창세기》에서 볼 수 있지만, 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의 미개민족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② 초자연적 존재가 그 협력자와 함께 인류를 창조하였다는 신화는 내륙아시아에서 동(東)유럽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③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지 않고 알이나 식물 또는 동물에서 인류가 생겨났다는 신화는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과 남아메리카·북유럽에 분포되어 있고, 신라의 박 혁거세에 관한 전설도 알의 기원설화에 속한다. ④ 초자연적 존재의 시체에서 인류가 태어났다는 예는 고대 인도나 중국 신화에서 볼 수 있고, 하늘이나 땅속에서 인류가 나왔다는 예는 아프리카·동아시아·폴리네시아 등지에서 볼 수 있다. ⑤ 죽음의 기원신화는 인류기원신화의 일환으로 다루어지는데, 죽음의 기원은 인류가 신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아프리카), 시조(始祖)가 영원한 생명의 묶음과 유한한 생명의 묶음 가운데서 잘못 선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아프리카), 인구과잉을 막기 위하여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에스키모·남아메리카) 등이 있다. ⑥ 신(神)들의 기원신화도 인류기원 신화에 포함되어 전 세계에 걸쳐 분포되고 있다.
⑶ 문화기원 신화:이 신화는 인류의 문화 전반에 관계되기 때문에 그 종류도 많은데, 그 중 주요한 것은 태양·불·빛·계절·물·가축(동물)·식물·지혜 등과 관련된 것들이 있다. 이 가운데 불의 기원신화는 태양이나 빛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일반적으로 문화영웅적 존재가 어떤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불이나 빛을 훔쳐 온다는 모티프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들 수 있다. 또한 불과 성교(性交)를 결부시킨 신화도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불은 원래 체내에 있었으나 성교에 의해서 지상으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한다.

 

【신화의 연구】 신화가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확립되기까지는 실로 많은 사람의 노력과 연구를 필요로 하였다. 신화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어학·고전학·민족학 등, 관련 학문의 발달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여러 학문과의 관련에 있어서의 신화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속한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 신화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해 후세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론이 몇 가지 나타났으나 그 주된 것은 우의설(寓意說)과 에우헤메리즘(euhemerism)이다. 이같은 두 가지 이론은 모두가 신화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으로, 우의설에는 테아게네스가 말하는 《일리아드》에서의 트로이측(側)과 그리스측의 싸움이 여러 원소(元素)의 싸움이라는 설과, 크리슈포스가 말하는 그리스의 신들은 물리적·윤리적 여러 원리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한 에우헤메리즘이란, BC 3세기 초엽에 에우헤메로스(시칠리아 출생의 신화학자)가 신들의 기원은 고대 영웅을 신격화한 것이라고 하면서 초자연적 존재를 역사적 실재 인물과 관련지어 해석하려고 한 입장을 말한다. 이 이론은 커다란 파문을 던져 당시의 많은 학자나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護敎論者)들은 그리스 신들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다시 말하면 그리스 신들의 비실재성(非實在性)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근대의 신화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은 영국의 언어학자 막스 뮐러이다. 그는 태양신화설을 주창하였는데, ‘언어의 병(病)’이라는 논리로써 그 이론의 기초로 삼았다. 즉 천체 현상의 신화화는 ‘언어의 병’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어서, “해가 새벽을 쫓는다”라는 말에서도 해나 새벽의 원래의 뜻이 점차 잊혀지고 희미해진 데다가, 해나 새벽이라는 명사가 문법상의 성(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격화되고 더 나아가 신격화됨으로써, “해의 신이 새벽의 여신을 쫓는다”고 하는 신화가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랑그는 타일러의 애니미즘설(說)에 입각하여 인간의 애니미즘적 정신기능이 자연현상과 그 밖의 것을 인격화함으로써 신화가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프레이저를 비롯한 영국의 인류학파는 신화에 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그들은 고대 중근동(中近東) 및 그리스의 신화를 주술의례(呪術儀禮)의 견지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의례는 신화에 선행(先行)하는 것이며, 신화는 의례의 설명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의 신화의례학파는 신화와 의례의 상호관계에 관한 학설을 내놓았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후크나 빈덴글렌 등이다. 그들은 설명하기를 고대 중근동에 있어서의 국왕은 신을 대신하여 국가와 세계의 안녕·질서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의례의 중심이 되었고, 이 관념이 나중에 이란이나 유대의 구세사상(救世思想)을 낳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근대의 신화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사회인류학자들인데, 그들은 신화가 실제로 살고 있는 미개사회를 실지 조사함으로써, 그곳에서는 신화가 진실한 이야기이며 인간생활에 의미를 부여하고 규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특히 말리노프스키를 위시한 많은 학자들은 신화의 구조와 의미와 기능을 밝혀내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신화의 기능】 여기서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행동에 있어서의 의미와 규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템적 신화는 주로 신화적 조상이나 토템 동물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태고시대에 초자연적 존재가 어떻게 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고, 긴 여행을 떠나 때로는 어떤 곳에 머물면서 어떤 종류의 동식물을 낳고, 자연의 풍경을 바꾸며, 마침내는 지하세계로 사라지는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신화가 가르쳐 주는 것은 호주 원주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 하면 신화는 원초에 있어서의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창조행위를 어떻게 반복하는가에 관하여 가르쳐주고, 어떤 종류의 동·식물을 어떻게 증식시키는가의 방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성인식(成人式)이 있을 때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게 되는데, 그것은 알려준다기보다는 실천되며, 원초의 사실이 재확인되는 것이다. 신화의 지식에는 주술적·종교적 능력이 따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신비적 성격을 띤다. 즉 어떤 사물이나 동물 또는 식물 등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증식시키며 재생시킬 수 있는 주력(呪力)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파나마의 큐나 인디언들은 사냥감의 기원을 알고 있는 사냥꾼은 운이 좋은 사람이며, 어떤 동물의 창조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 그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이나 뱀의 기원을 알고 있으면 작열하는 쇠나 독사도 손에 쥘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티모르섬에서는 벼가 싹틀 무렵에 쌀에 관한 전승(傳承)을 알고 있는 사람이 논에 나가 쌀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외우면서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새운다. 그들은 쌀의 기원신화를 외움으로써 원초에 있어서와 같은 풍요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단순히 신화를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게 된다. 신화를 이야기하고 신화에 의거하여 행위를 함으로써 원초에 일어났던 기적적인 창조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시원(始源)에서의 초자연적 사건이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개사회에 있어서는 신화가 실제로 살아 있고 인간은 신화 속에 삶으로써 일상적·세속적 시간에서 벗어나 태고와 무한의 성스러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생활에 대하여 근원적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의 규범과 범형(範型)이 되는 기능을 다하고 있다.

 

2. 수미산(須彌山)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수미·소미루(蘇迷漏) 등은 산스크리트의 수메루(Sumeru)의 음사(音寫)이며, 약해서 ‘메루’라고도 하는데, 미루(彌樓:彌漏) 등으로 음사하고 묘고(妙高)·묘광(妙光) 등으로 의역한다. 이것이 불교에 도입되어 오랫동안 불설(佛說)로서 신봉되어 왔다. 세계의 최하부를 풍륜(風輪)이라 하고 그 위에 수륜(水輪)·금륜(金輪:地輪)이 겹쳐 있으며, 금륜 위에 구산팔해(九山八海), 즉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8개의 큰 산이 둘러싸고 있고, 산과 산 사이에는 각각 대해가 있는데 그 수가 8개라고 한다. 또한 가장 바깥쪽 바다의 사방에 섬(四洲)이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섬, 즉 남염부제(南閻浮提)에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미산은 4보(寶), 즉 황금·백은(白銀)·유리(瑠璃)·파리(璃)로 이루어졌고, 중허리의 사방에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으며,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주인인 33천(天)의 궁전이 있고,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한다.

3. 도리천( 利天, Trayastrimsa)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 ‘도리’는 33의 음사(音寫)이며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의역한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Sumeru)의 정상에 있으며 제석천(帝釋天:Indra)의 천궁(天宮)이 있다. 사방에 봉우리가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에 8천이 있기 때문에 제석천과 합하여 33천이 된다. 이 33이란 숫자는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라, 이미 《베다[吠陀]:Veda》에 천(天)·공(空)·지(地)의 3계에 33신(神)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상이 불교에 수용되어 하나의 우주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후세 대승불교의 정토(淨土)신앙은 이 도리천 사상이 발전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참조 1> 천(天, deva)
인도의 상상적 신(神), 또는 신이 사는 세계. 물리적 하늘은 허공이라고 하여 ‘천’과 구별된다. 초기의 불교교단에서는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궁극목적이었으나 재가(在家)의 신자에 대해서는 주로 생천(生天)이 권장되었다.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하면 ‘천계(天界)’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인도의 일반민중의 신앙으로서, 불교는 그것을 세속적 교리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후에는 다양하게 그 계위(階位)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구사론(俱舍論)》 <분별정품(分別定品)>에 의하면, 범부가 생사에 왕래하는 세계를 욕계(欲界:탐욕의 세계), 색계(色界:탐욕을 떠난 물질의 세계), 무색계(無色界:일체의 물질적인 것이 없이 心識만이 있는 세계)의 3계로 나누어, 욕계에 6천, 색계에 17천, 무색계에 4천, 합하여 27천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육욕천(六欲天)’은 아래쪽부터 사왕천(四王天:세계의 중심에 있는 상상적인 산인 須彌山의 중턱에 있다)·도리천( 利天:三十三天이라고 하며 수미산 정상에 있다. 이상의 둘은 지상에 있으므로 地居天이라고 한다)·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覩史多天)·낙변화천(樂變化天: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색계’는 선정(禪定)의 단계에 따라 초선(初禪)·제2선·제3선·제4선으로 분류된다. ‘초선’에는 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3천, ‘제2선’에는 소광천(少光天)·무량광천(無量光天)·극광천(極光天:光音天)의 3천, ‘제3선’에는 소정천(少淨天)·무량정천(無量淨天)·변정천(遍淨天)의 3천, ‘제4선’에는 무운천(無雲天)·복생천(福生天)·광과천(廣果天)·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善見天)·색구경천(色究竟天:阿迦"天)의 8천으로서 계17천(이상 空居天)이 있다. 혹은 제4선에 무상천(無想天)을 더하여 18천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무색계’에는 색계의 물질적인 사고대상을 배제하여 완전한 자유의 정신세계인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허공까지 포함한 일체의 사고대상을 배제하여 마음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세계인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사고대상을 모두 배제했다고 하는, 사고 그 자체도 떨쳐버린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이러한 생각마저도 떨쳐버린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천은 아직도 윤회의 범주 안에 있는 생존형태로 간주된다. 즉 육도(六道) 윤회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의 생존양식도 해탈의 입장에서는 궁극적으로 부정된다. 그러면서도 후세 대승불교에서의 정토(淨土) 신앙은 이러한 ‘천’사상이 발달한 형태이다. 정토는 절대의 경지로서, 피안은 완성을 의미하지만, 천의 경우와 같이 일반민중에게는 사후의 이상향으로 간주되었다.

 

<참조 2> 도솔천(兜率天, Tusita)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 중의 제4천. 통속적인 어원해석으로는 ‘만족시키다’의 의미로 설명하여 지족(知足)·묘족(妙足)·희족(喜足), 또는 희락(喜樂) 등으로 번역한다. 그 내원(內院)은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라고 하며, 석가도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여기에서 설법하며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정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미륵보살 신앙은 역사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백제 무왕은 미륵불의 하생을 바라는 마음에서 익산에 미륵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참조 3> 인드라(Indra)
고대 인도의 무용신(武勇神)·영웅신. 인다라(因陀羅)라고 음역(音譯)된다. 이 신의 유서(由緖)는 다른 신들보다 오래되어 소(小)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란에도 알려져 있다. 《리그베다》에서도 가장 많은 찬가가 그에게 바쳐지고 있으며(전체의 약 1/4), 원래 뇌정신(雷霆神)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점차 의인화하였다. 다갈색의 거대한 체구로 우주를 제압하고 폭풍의 신 마르트를 거느리고 있으며, 신주(神酒) 소마로 슬기를 기르는가 하면 애용하는 무기 바주라[金剛杵]로 악마를 쳐부순다. 서방(西方)으로부터 인도로 침입하여 원주민과 싸워 이들을 정복한 아리아인(人)의 보호신 인드라 속에는 왕년의 아리안 전사(戰士)의 이상상(理想像)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후기 힌두교 신화에서는 그런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나 제신(諸神)의 우두머리로서 천계(天界)에 군림하고, 많은 악인(樂人)과 미녀에 둘러싸여 전장(戰場)에서 명예로운 전사(戰死)를 한 용사의 내방을 환영하는 무용신의 성격을 끝까지 간직하였다. 한편, 불교에서는 석제환인(釋提桓因:강력한 신들의 우두머리) 또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불리어 호법(護法)의 선신(善神)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조 4> 인도신화(印度神話, Indian mythology)
인도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전해오는, 인도문화의 정신적 모태를 이루는 신화. 인도 신화는 베다 신화와 힌두교 신화로 크게 나뉜다.

 

【베다 신화】 《베다》에 등장하는 신들 가운데는 태양·불·바람·비·번개 등 천연현상(天然現象)에 연원하는 것이 많다. 뇌정신(雷霆神)의 양상을 띤 인드라는 동시에 무용(武勇)의 신으로서 금강저(金剛杵)를 가지고 있고, 신주(神酒) 소마로 슬기를 기르며, 풍신(風神) 마루트를 거느리고 악마 브리트라를 물리치는가 하면, 인간세계에 대망(待望)의 물을 가져다 준다. 제사(祭祀)의 뜨락을 비치는 화신(火神) 아그니는 신들의 선도자(先導者)가 되고 제주(祭主)의 손님이 되어 불에 바쳐진 제물을 천상(天上)으로 운반한다고 여겨졌다. 율법신(律法神) 바르나는 천지와 인륜의 이법(理法) 리타를 지니고, 일월(日月)의 운행과 사계(四季)의 순환을 주관하며 탐정을 보내어 인간의 행동을 감시, 동아줄로 악인을 징계한다. 이 신은 계약의 신 미트라, 관대(款待)의 신격화인 아리아만과 함께 아디티야 3신(神)으로 알려졌는데, 예로부터 물과 관련이 깊다. 일체 만상(萬象)을 키우고 생물류에 활기를 불어넣는 태양은 수르야·사비트리·푸샨·비슈누 등의 이름으로 숭배된다. 여신으로서는 그리스의 ‘로고스(말)’와 비교되는 언신(言神) 바치, 일체를 간직하고 풍양(豊穰)을 베푸는 대지의 신격화인 푸리티비, 밤의 정령(精靈) 라트리, 숲의 정령 아라니야니, 강의 정령 사라스마티 등이 있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동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새벽녘의 신 우샤스로, 그 묘사 속에 고대 인도인의 가련한 처녀상(處女像)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신화와 비교할 때 《베다》의 신들은 종교적 색채가 짙고, 또한 각자 독립성이 강하여 신들 상호간의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계보가 분명하지 않다. 후세의 철학적 사변(思辨)에 영향을 크게 끼친 것으로서 우주의 창조신화가 있다. 망망한 물 속에 ‘황금의 태아(胎兒)’가 잉태되어, 거기에서 신들이 태어나 태양과 교접(交接)함으로써 산과 바다가 생겨났다는 것, 유(有)도 무(無)도 없던 태고의 암흑 속에서 잠자고 있는 유일한 중성적(中性的) 원리에서 일체가 개벽(開闢)했다는 것, 또한 원인(原人) 푸르샤를 신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 신체의 각 부분에서 삼라만상과 4계급(四階級)이 생겼다는 거인해체(巨人解體)신화 등이 이 속에 포함된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홍수 신화, 오직 혼자 살아남은 인간의 조상 마누가 겪은 고행 덕분에 인류가 번영하였다는 전설도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힌두교 신화】 힌두교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신들은 브라마[梵天]·비슈누·시바 등 세 신이다. 이 세 신은 삼위일체적으로 ‘트리무리티(trimuriti:三柱의 神)’라고 불리며, 각각 우주의 창조·유지·파괴를 주관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브라마는 이름뿐이고 신자를 모은 일도 드물었으나, 비슈누·시바 두 신은 많은 교도를 모아 힌두교의 2대(大) 종파를 형성하였는데, 이에 관한 수많은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비슈누는 태양신으로서 제식(祭式)과 관련이 있어 명랑하고 정통적인 색채가 농후한 데 비해, 시바는 산중에 있으면서 가축떼의 우두머리로서의 원래의 성격이 반영된 탓인지 제사의 적이며, 흉폭하고 음산한 양상을 띠고 있다. 대해(大海)의 바닥에서 신비(神妃) 슈리 라크슈미[古祥天女]를 껴안고 뱀의 왕 셰샤를 베개삼아 편안히 잠자고 있는 비슈누는, 일단 유사시에는 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악마를 물리치고 정의를 지킨다. 이 신에게는 크리슈나·라마 등 10개의 화신(化身)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난세에는 하늘에서 내려와 인수(人獸)의 형상으로 지상에 나타나 불의를 무찌르고 올바른 질서를 희복시킨 뒤 하늘로 돌아간다고 하므로, 이런 점에서는 구세주적 성격도 띠고 있다. 따라서 이런 성격이 유일신교적(唯一神敎的) 신애(信愛)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에 비하여 시바 신은 요괴와 괴물의 우두머리로서, 화장터를 방황하며 전신에는 시체의 재를 바르고 코끼리가죽을 걸치고 있으며, 대사(大蛇)를 띠로 두르고 심산영봉인 카이라사에서 심한 고행을 하는가 하면, 히말라야산의 딸 우마와 파르바티 등을 아내로 삼는다. 군신(軍神) 스칸다의 부신(父神)으로서의 시바 신과 이들 여신이 광폭하고 방탕한 성격을 농후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크샤 프라쟈파티의 제식(祭式)에 불청객으로 쳐들어가 제사를 방해하고, 사슴이 되어 도망치는 제사행렬을 쫓아가 고행에 장애가 되는 사랑의 신을 불태워 죽인 후, 흉폭한 산간민(山間民) 키라타의 우두머리로서 군림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가무음곡의 수호신이 되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예작품이 이 신에게 바쳐지고 있다. 이 밖에 세계의 수호신으로서 동서남북으로 인드라·바루나·야마[閻魔]·쿠베라가 있는데, 앞의 두 신은 베다 신화의 신이다. 야마는 원래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불교의 염라대왕)으로서 밝은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힌두교에서는 검붉게 빛나는 피부에 누런 옷을 걸치고 손에는 새끼줄을 들고 있어, 인간의 몸에서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영혼을 사정없이 뽑아가 버리는 사신(死神)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사신이라기보다 악인을 징계하는 율법적 성격이 강한 것은, ‘다르마라자(dharmaraja:법의 왕)’라는 별명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쿠베라는 재보(財寶)의 신으로, 히말라야의 카이라사 산정에 있는 아름다운 아라카 궁전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원래는 요괴(妖怪)·야차(夜叉)·나찰(羅刹)의 우두머리로서, 명랑한 성격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이 신들은 옛날 유해(乳海)를 휘저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묘약 아무리타를 만들어 이것을 마심으로써 불사의 힘을 얻었다고 한다. 악마 라푸는 아무리타를 마시는 신들 틈에 몰래 끼어들었다가 일월(日月)의 최고신에게 발각되어 최고신이 그를 죽였으나, 아무리타는 이미 그의 목을 넘어갔기 때문에 목만이 불사의 부분이 되었다고 한다. 고자질에 원한을 품은 라푸는 가끔 일월을 침식하여 지금도 목부분을 보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4. 태양신화(太陽神話, solar myth)

 

태양을 주제로 한 신화. 태양은 우주의 중심적 존재인데, 그 빛과 열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 때문에, 예로부터 전지전능·불멸불사(不滅不死)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고대 이집트나 남아메리카 페루의 잉카 제국에서의 태양숭배는 특히 두드러진 것이었다. 태양신화에서는 독수리·매·까마귀·늑대·사자 등이 태양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서 자주 등장한다. 또한 태양과 불의 관계는 깊어서 태양에서 불을 훔쳐 왔다는 신화는 널리 알려진 것인데,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민속학자 W.슈미트는 토테미즘 문화의 신화는 태양이 중심이 되어 있다고 보고, 태양신화를 부권(父權) 토테미즘적 고급 수렵민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슈미트뿐만 아니라, 종래의 독일·오스트리아의 역사민속학의 신화 연구에서는 부권문화와 태양신화, 모권문화와 태음신화(太陰神話)라는 도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상정은 오늘날에 와서는 인정하기 어렵게 되어, 태양신화나 태음신화가 모두 특정한 여러 문화에 있어서만 발달한 것이라는 견해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

 

<참조> 태음신화(太陰神話, lunar myth)
달을 주제로 한 신화. 월신화(月神話)라고도 한다. 달과 태양은 흔히 한 쌍의 존재로 생각되어, 부부신(夫婦神)·오누이·쌍둥이 등의 형태로 신화에 등장한다. 또한 양자를 천공신(天空神)의 양눈이라고 하는 신화도 많다. 달에 관한 신화 가운데 독특한 것은 달의 차고 이지러짐에 관한 신화와 달 표면의 반점에 관한 설명신화이다. 달의 차고 이지러짐은 달에 사는 천자(天子)나 계집아이가 규칙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기 때문이라는 신화가 있다. 달 표면의 반점에 관해서는, 한국의 경우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다는 설화가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중국이나 인도에도 같은 설화가 있다. 이 밖에도 달에 사는 게 또는 요정이라는 설명도 있다. 또한 가지가지의 월식신화(月蝕神話)는 곧 일식신화와도 연관되어 있는데, 독일의 민족학자 W.슈미트는 태양신화가 부권수렵민(父權狩獵民) 문화권에 속하는 데 대해 달의 신화를 모권재배민(母權栽培民) 문화권에 속한다고 하였다.

5. 천신(天神, Sky god)

 

하늘 그 자체가 인격화된 신. 종교를 그 기원론적 입장에서 볼 때, 천신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이탈리아 R.페타초니의 우라니즘, 즉 천신설(天神說)이라는 것이 있다. 페타초니는 지극히 미개한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지상신(至上神)의 전지성(全知性)은 실상 전시성(全視性)이며, 그것은 천신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예컨대 그는 안다만 제도의 지상신 풀루가가 ‘대낮에는 전지(全知)’라고 믿고 있는 사실에 따라 이를 천신으로 보았다. 사실 극히 미개한 민족의 지상신 중에는 번갯불을 무기로 삼아 죄지은 자를 벌하는 등 천신으로 생각하는 지상신이 많다. 그러나 W.슈미트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천신숭배가 성행하는 것은 목축문화권이라고 하였다. 천신으로서 유명한 것은 투르크 타타르족(族)의 바이율겐, 중국의 상제(上帝), 인도의 디아우스, 그리스의 제우스, 로마의 유피테르 등이 있다. 반미개 민족이나 문명 제족의 천신숭배에는 대개 지모신(地母神) 숭배가 따르고, 천부(天父)와 지모의 결혼신화가 따르며,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중국·이집트 등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천신숭배가 항상 지모신 숭배를 수반한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해와 달을 그 눈이라고 보는 천신관념도 있으나,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이 각각 독립된 신인 경우도 많다.

6.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族)의 이아페토스의 아들.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뜻한다. 주신(主神) 제우스가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줌으로써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판도라라는 여성을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냈다. 이때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뒤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는 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일어나고, 인류의 불행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제우스에게 밝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코카서스(카프카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서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웅 헤라클레스에 의해 독수리가 사살되고, 자기 자식 헤라클레스의 위업(偉業)을 기뻐한 제우스에 의해 고통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원인에 관해서는, 제물(祭物)인 짐승고기의 맛있는 부분을, 계략을 써 제우스보다 인간 편이 더 많이 가지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인간을 흙과 물로 만든 것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전설도 있다.

7. 터부(taboo)

 

폴리네시아어 터부(tabu)에서 나온 말로 ‘금기(禁忌)된’의 뜻. 1777년 영국 선장 J.쿡이 여행기에 쓴 이후 영어가 되었다. 터부는 또 광범위한 폴리네시아 여러 섬에서 터푸·카푸·아푸 등으로 각각 다르게 발음된다. 또 이와 같은 어족(語族)은 미크로네시아나 멜라네시아에서도 발견된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언어계 속에서 이 말은 주로 ‘금지하다’ 또는 ‘금지되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금지에 대해서 이 말을 쓴다. 행동과 의례의 규칙, 추장의 명령, 손윗사람의 소지품에 손을 대지 말라는 아이들에 대한 타이름의 말,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말도 터부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초기 폴리네시아 여행자들은 이 말을 특별한 금지사항에 관해 사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쿡은 터부를 특히 일종의 종교적 금제(禁制)의 뜻으로 해석한 듯하다. 예컨대 폴리네시아 민족 사이에서는 초생아(初生兒) 혹은 추장의 시체 등은 터부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가능하면 그것들을 접촉하지 말라는 뜻이다. 금기된 것을 접촉한 사람은 즉시 스스로도 금기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우선 금기된 사람은 스스로 몇 가지 특별한 제약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은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가 관습상 주의할 점을 태만히 하면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위험한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접촉한 그 물체와 같은 의미로 금기되어 있다. 만일 그가 음식물을 요리하는 도구나 불에 접촉하면 그 위험은 음식물에까지 미치고 심지어 그 음식을 먹은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금기된 사람은 부정을 없애고 몸을 맑게 하는 의식을 거쳐 여느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때 그는 다시 터부의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노아(속세)에 돌아왔다고 한다. J.G.프레이저가 1886년경 터부의 사회적 제도를 문제 삼았을 때 아직 인류학자들은 이것을 오세아니아의 여러 민족에 한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명칭이 여러 가지로 다르고, 또 부분적으로 차이는 보이지만 이것을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된 미신체계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 뒤 라도크리프 브라운은 본질적으로는 폴리네시아에 있어서의 여러 예와 흡사한 세계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이와 같은 여러 민족의 관습을 터부로 부르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터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차라리 이런 종류의 관행을 ‘의례적 기피’ 또는 ‘의례적 금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의례적 상태’와 ‘의례적 가치’의 두 개의 기본개념과 관련시켜 정의하려 했다. 그 의례적 금지란 행동의 규칙이며, 위반했을 때는 그 규칙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의 의례적 상태에 좋지 않은 변화가 생긴다는 신념과 결부되어 있다. 이 의례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회에서 여러 가지 양식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본인에게 크고 작은 불행이 가해질 것이라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시체에 접촉한 폴리네시아 사람은 좋지 않은 의례적 상태에 빠진다고 믿는다. 그가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는 그 불행은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심하여 그 위험에서 벗어나 본래의 의례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정해진 의례를 행한다. 라도크리프 브라운은 이 의례적 기피, 즉 터부의 대상은 사람·물체·장소·말·사건·주일(週日) 등 모든 것이 의례적 가치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폴리네시아에서는 추장·시체·초생아 등이 의례적 가치를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의례적 가치는 어느 사회에나 여러 가지 형태로 바꾸어 존재하고 있다. 터부 또는 의례적 기피는 결국 기피나 금기와 같은 것으로서 사회적(세속적) 기피와 주술종교적 기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터부와 그것을 깨면 반드시 신령의 제재가 가해지거나 자동적으로 위해를 받게 되는 신성한 터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함께 조금은 강력한 사회적 구속력을 가진 점에서 공통된다. 의만(擬娩) 풍속이 있는 부족으로서 터부에 좇지 않고 남편이 아내의 분만 흉내를 내지 않으면 갓난아기는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소속된 사회집단은 분명히 불쾌한 생각을 표시하고 집단적인 벌을 가한다. 또 세계 모든 민족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은 터부로 삼고 있다. 타이완[臺灣]의 고산족(高山族)에서는 변사자(變死者)의 상(喪)을 입고 있을 때 외인이 그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터부로 삼고 있다. 또 고산족 가운데 아미족에서는 이민족의 머리를 베러 갔다가 적의 머리를 베어온 자는 다음 수확제(收穫祭)까지 성관계를 절대 터부로 한다. 만일 이 금기를 범했을 때는 자기집은 물론 부락에도 신벌이 가해진다고 믿고 있다. 터부 또는 금기는 이를테면 소극적인 관습법을 범하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집단적인 제재가 가해지고 본인이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반응을 보이는 데 그 특징이 있다.

8. 중국사상에서의 천(天)

 

중국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우주 운행을 관장하는 원리. 각 시대의 철학사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문자 그대로 하늘이며, 천지라는 말로 자연계를 나타내듯이 그러한 자연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지만, 거기에 의지적인 신성(神性)을 발견하고 합리적인 이법성(理法性)을 인식하였다. 때로는 신비로운 불가지(不可知)의 존재로서 운명의 근거로 삼기도 함으로써,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요한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은왕조(殷王朝)를 타도한 주(周)나라 사람들이 왕조교체를 천명에 의한 것이라 선전한 것이 ‘천’의 개념의 시초이며, 아마도 이는 오랜 천신신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천’을 최고의 궁극적 결정자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 공자(孔子)는 자신의 종교적 심성으로 ‘천’을 숭배·경외하였으며, 이를 윤리의 근원으로 삼았다. ‘천’은 여의치 않은 운명으로 인간능력을 제약하는 동시에, 이로써 인간존재를 보증하며, 특히 인간의 도덕활동을 강하게 지지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나가는데, 공자의 ‘천’ 숭배는 공자 자신의 내면적 문제였고, 또 유교윤리를 지키는 근원이었으나, 공자는 ‘천’ 숭배를 사람들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공자의 유교가 종교로 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노장(老莊) 사상에서는 ‘천’이 윤리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으며, 자연으로만 파악되었다. 그러나 그 자연성에 이념적인 가치를 찾아내고, 거기에 명합(冥合)하는 것을 인간생활의 이상으로 여긴 점에서는, 역시 ‘천’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중국사상의 주류는 ‘천’을 근거로 하고 모범으로 삼는 ‘천’과 ‘인(人)’의 합일사상이었다. ‘천’을 우위에 두는 이러한 천인합일의 사상은 한대(漢代) 이후 정치사상으로서 완성된다. 한대에서 ‘천’은 신비적인 존재로서, ‘천’의 아들인 천자(天子)의 절대적 권위를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정치를 감시하고 정치의 선악에 따라서 서조(瑞兆)와 재이(災異)를 내린다고 생각하였다. 송대(宋代)에는 이러한 미신적 신비성은 거의 없어지고,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 새 유학에서는 ‘천’을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중심인 궁극절대(窮極絶對)의 이치와 결부시켜 설명하고 있다. 즉 천리(天理)라는 말은 이를 함축한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는 인욕(人慾)과 대조되는 것으로, ‘인욕을 억눌러 천리로 돌아감’을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라고 여겼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으로는 천자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사상에서 ‘천’은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에 대한 백성의 반항을 도와주는 ‘천’도 있다. ‘천’을 대신하여 주벌(誅罰)한다는 반란의 구호는 이를 의미한다. ‘천’은 원래 왕조의 교체를 인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현재의 왕조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덕하고 나쁜 권력자는 ‘천’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구호가 생긴 이유이다. ‘천’은 여기서는 소박하기는 해도 건강한 생명을 전한다. 다만 여기서도 ‘천’이 불가지의 존재로서 일종의 초월성을 가지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천’을 부정하는 사상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사상은 순자(荀子)로부터 시작되어 각 시대로 흩어졌으며, ‘천’을 단순한 자연으로서만 파악하려고 했다. 이는 중국사상의 역사에서는 이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천’을 자연으로서 추방할 뿐이지, 사상가들이 이를 자연으로서 탐구하려는 자세는 대체로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천’을 보편적·초월적 존재로 보고 천자가 전하를 통치한다는 사상은 옛 중국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이 중국인의 정신생활을 강하게 규정하였다.

9. 조상숭배(祖上崇拜)

 

가족·씨족·민족의 조상을 존숭하여 제사지내는 풍속. 이와 같은 풍속은 사자(死者)에 대한 애착과 사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며, 생전에 유력한 사람의 영혼은 사후에 더욱 강력해진다는 생각, 또는 사자는 반드시 다시 태어나 현실 사회로 되돌아온다는 생각, 사자의 영혼에 대한 막연한 외경(畏敬)의 관념 등에서 조령(祖靈)을 받드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하여진다. 일반적으로 개별적·가족적 숭배가 대부분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씨족·부족·국민 등의 집단 전체가 행하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영웅 등 특정한 조상은 다른 조상보다 우선적으로 받들고, 단순한 사령(死靈)의 개념을 넘어 신격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관습이나 의례는 고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민족과 유럽 민족에도 존재하였지만, 아시아·아프리카 등 미개사회에서 더욱 현저하다. 특히 중국의 조상 숭배는 유교의 발전과 함께 효도 사상과 결부되어 복잡한 의례가 일상 생활 속에 침투되었다. 삼례(三禮:周禮·儀禮·禮記)를 비롯하여 송대(宋代)에 이루어진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은 한국과 일본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왕조 500년간은 이와 같은 유교적 제례에 의한 조상 숭배 정신이 사회 기강을 바로잡는 국가적 기반이 되었고 치국(治國)의 근본 이념이었다. 양반·상인(常人)이 모두 4대(四代) 봉사(奉祀)를 실천하여, 조상 숭배 정신은 조야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위로는 역대 임금이 조상을 모시는 종묘를 비롯하여 성인을 모시는 문묘·향교, 충신·열사를 모시는 서원은 물론, 사가(私家)에는 모두 조상을 모시는 가묘(家廟:사당)를 설치하고, 차례(茶禮)라는 각 절사(節祀)를 비롯하여 기제사(忌祭祀)·생일제·묘제(墓祭) 등의 조상 숭배 의례를 지켰다. 제례는 《주자가례》 《사례편람(四禮便覽)》과 같은 제도화된 예서에 의해 고려 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이전에도 한민족에게는 조상 숭배의 관습이 있었다. 옛날 각 가정의 아랫목이나 시렁 위에 놓아둔 ‘조상단지’가 그것이다. 조상단지는 지방에 따라 제석(帝釋) 오가리, 세존(世尊) 단지 등의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종손 집에만 전하였다. 형태는 작은 오지그릇, 뚜껑이 있는 대바구니, 대바구니에 백지를 바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안에는 조상들의 이름을 써 넣기도 하고 햅쌀이 나오면 먼저 이것을 조상단지 안에 가득히 채우기도 하였다.

10. 토지신(土地神)

 

중국 민간신앙의 하나로 부락을 다스린다는 수호신. 성벽(城壁)이 있는 도시에서 제사지내는 서낭신[城隍神]과 그 발생·직능·성격이 같은 신인데, 농촌에서 그 고장의 토지와 부락민의 보호·안전·행복을 지배한다고 여겨 왔다. 이미 주대(周代)부터 토지신으로 제사지내 오던 사(社:土神)의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토지신과 농민의 일상생활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여, 가족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외에 부락 또는 가정 내의 모든 문제가 제기되며 가축의 도망문제까지 호소하게 되고 부락민의 집회장소가 되기도 한다. 신상(神像)은 백발흑의(白髮黑衣)의 노인이 많고, 제삿날은 지방에 따라 다르나 떠들썩한 고악(鼓樂)이 벌어진다. 토지신은 또 저승세계의 관료(官僚)로서 사후(死後)의 세계를 관장한다고도 믿고 있으며, 현세의 관료조직을 모방하여 공적이 있으면 승격시키고 과실이 있으면 면직도 시키는 인격신(人格神)으로 그 최고위는 옥황상제(玉皇上帝)이다. 민간전설에 의하면 살아 있는 동안 그 지방에서 공로가 있는 인물이 임명되고 연애나 결혼, 음주나 투쟁까지도 행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한국에서는 집터의 주재신(主宰神)이라고 일컫는 터주신이 이 토지신에 비교되며 지신(地神)도 이와 유사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참고> 도교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 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교리의 체계화】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제신과 경전】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무시천존(無始天尊)·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문창제군(文昌帝君)·후토(后土)·서낭신[城隍神]·조군(君:五祠 중의 한 神)·화합신(和合神)·삼관(三官)·재신(財神)·개격신(開格神)·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옥결(玉訣:秘試)·영도(靈圖:鬼神像)·보록(譜錄:敎法의 연혁)·계율(戒律:修道의 율법)·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방법(方法:귀신을 쫓는 術策)·중술(衆術·鍊丹類)·기전(紀傳:老子 등의 전기)·찬송(讚頌:神典의 偈)·표주(表奏: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

 

【도교의 방술】 금주(禁呪)나 부록(符)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 특정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胎息法)으로 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內丹), ② 황금·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外丹), ③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房中術)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수련 결과, 상자(上者)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에서 사는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尸仙:人仙)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도교】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무속(巫俗)·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1. 산신(山神)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신.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精靈)이 있고 그 정령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원시신앙인 애니미즘에서 나온 것으로서, 신체(神體)는 대개 호상(虎像)이나 신선상(神仙像)으로 나타난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신제 또는 산제(山祭)라 하며, 우리 민족이 이 산신제를 지낸 것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는 “먼저 천신과 지신을 제사지내고 산곡신에게까지 미쳤다(先祠神祗及山谷之神)”고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오악 삼산신(五岳三山神)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산신은 중국식으로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정하고, 오악(五岳)은 동은 토함산(吐含山), 남은 지리산(智異山),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太白山), 중은 부악(父岳:大丘)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주관하여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행운을 빌었다.
 

 

 <참조> 산악숭배(山岳崇拜)
산악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숭배하는 동시에 산악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하는 일. 산악신앙(山岳信仰)이라고도 한다. 산악숭배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 하나는 산 자체를 인격화하여 그 양감(量感)·위엄(威嚴)·수려(秀麗)·운무(雲霧), 접근 곤란, 등산의 위험, 암석의 낙하, 기묘한 소리, 메아리, 화산폭발 등을 두려워하고 존숭(尊崇)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에 있다고 믿어지는 신령(神靈), 즉 산신에 대한 외포감(畏怖感)에서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멕시코에서는 산 자체를 인격시하여 밤새도록 불을 피워 밝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인도의 토다족(族)은 닐기리산(山)에 산신들이 산다고 믿고 있으며, 하와이의 킬라우에아산이나, 마사이족(族)의 킬리만자로산에 대한 신앙도 산신숭배의 좋은 표본이다. 이러한 신앙은 문화민족에도 나타나 있어 아라비아의 알라파트산, 그리스의 올림포스·파르나소스,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산, 인도의 히말라야산에 대한 숭배가 있으며, 중국의 우타이산[五臺山],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에 대한 숭배도 널리 알려진 일이다. 특히 중국 도교(道敎)의 곤륜산(崑崙山) 숭배에는 신화적 요소가 곁들인다. 한편 산에는 악령신(惡靈神)이 살고 있다는 신앙도 있어, 준험하고 사방을 위압하는 경이감(驚異感)을 지니고 있는 시에라리온의 맘바산에는 악령이 살고 있다고 하여, 등산로를 내거나 돌을 채취하는 일 등을 금하고 있다. 우간다에 있는 어떤 산은 야수(野獸)들의 죽은 혼이 산다고 믿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는다. 한국 남해의 사량도(蛇梁島) 옥녀봉(玉女峰)의 옥녀신은 결혼하는 신부를 투기한다고 하여, 신부의 가마가 그 앞을 지날 때는 내려서 걸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신은 선신으로 숭앙되며 그 산은 성지(聖地)로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 한국도 산악숭배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 못지 않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가야(伽倻)·신라·고구려 등의 개국신화를 보면 한결같이 하늘에서 천자(天子)가 높은 산에 강림하여 산신과 연결된다. 이것은 천신 → 산정강림 → 산신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신관(神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신라시대에는 산신을 숭앙하여 삼산오악신(三山五岳神)을 제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송산신사(松山神祠)·동신사(東神祠)를 비롯하여 각지에 산신당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동산(東山:駝駱山)의 산신을 호국지신(護國之神)에 봉하는 등 명산의 산신령을 호국지신으로 봉하였고, 주(州)·군(郡)에도 진산(鎭山)을 두어 제사지냈다. 이러한 풍습은 전국으로 퍼져 동네마다 산신당을 짓고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동제(洞祭)의 일부로 산신을 모시는 유풍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12. 장승(長丞)

 

한국의 마을 또는 절 입구, 길가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으며, 전국에 분포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의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온 것,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 목장승은 솟대[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立石]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 ‘장생(長)’ ‘장승(長丞, 張丞,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장성·벅수·법수·당산할아버지·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다. 장승의 기능은 첫째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둘째 이정표 구실, 셋째 마을의 수호신 역할이다.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다.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표시도 없으며, ‘천하대장군’류의 표시도 없고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서 주로 액병(厄病)을 빌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상원대장군(上元大將軍)’이라 새겨 있으며,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하원대장군(下元大將軍)’ 등의 글이 새겨 있다. 장소에 따라 채색·형상·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장승에 쓰는 장군명에는 민속적인 신명(神名)이 등장하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고 써서 세워, 축귀하는 민간 신앙의 성격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산신당·솟대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에는 제사를 지냈다.

13. 이차돈(異次頓, 506∼527)

 

신라의 승려,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 자 염촉(厭觸)·염도(厭都). 거차돈(居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 속성 박(朴).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던 끝에,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산(北山)의 서령(西嶺:金剛山)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절이 창건되었다. 817년(헌덕왕 9) 국통(國統)·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14. 연등회(燃燈會)

 

고려 때부터 국가적으로 벌인 불교 법회(法會). 소회일(小會日:음력 1월 14일)과 대회일(大會日:정월 대보름)이 있어, 왕궁·서울·시골 할 것 없이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불을 찬란하게 밝히고, 주과(酒果)와 음악·가무백희(歌舞百戱)로 대축연(大祝宴)을 베풀어 제불(諸佛)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던 제전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매년 정월 보름날에 행하여지다가 1010년(현종 1)부터는 음력 2월 15일로 변경되었다. 1352년(공민왕 1)부터는 4월 초파일에 궁중에서 연등회를 열어 궐내에서 100명의 승려에게 공양하였는데, 이 풍습은 조선시대에 전승되어 건국 초부터 연등회를 열었다. 이 불사(佛事)는 8·15광복 후 다시 성행하게 되어 매년 석가탄신일에는 전국 각처의 사찰들이 중심이 되어 연등회와 연등행렬 등의 행사를 벌인다.

15. 팔관회(八關會)

 

고려시대에 국가적으로 행한 의식. 태조의 십훈요(十訓要) 제6항에 의하면 팔관회의 대상은 천령(天靈:하느님)과 용신(龍神:山川神靈)이었다. 고려의 역대 왕은 모두 이 팔관회을 열었으며 이 고려민의 하느님 관념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경(中京)에서는 음력 11월에, 서경(西京)에서는 10월에 각각 팔관회를 열었으며 이날은 등불을 밝히고 술과 다과 등을 베풀며 음악과 가무 등으로 군신이 같이 즐겼으며 천신(天神)을 위무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아울러 기원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식에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는데,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고 궁중 등에서는 하례를 받고 군신의 헌수(獻壽), 지방관의 축하 선물 봉정 및 가무·백희(百戱)가 행해졌다고 한다. 이 의식은 고려 500년을 통하여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고려 말기까지 국가의 최고 의식으로 계속되었다.

16. 탱화(幀畵)

 

불교의 신앙내용을 그린 그림. 내용은 신앙대상이 되는 여러 존상(尊像)만을 그리는 존상화와 경전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지닌 것이 있다. 탱화는 기능에 따라 본존의 후불탱화(後佛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로 나누어지고 신중탱화는 다시 팔부(八部)신중탱화와 사천왕(四天王)탱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후불탱화가 본존불의 신앙적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중탱화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띤 것이다. 다만 후불탱화의 경우 본존불이 무슨 불(佛)이냐에 따라 탱화의 구도가 달라지고 신중탱화의 경우에도 수호의 기능을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내용과 구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한국의 사찰은 어디든지 신앙대상으로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뒤에 탱화가 걸려 있게 마련인데 일본이나 중국 등지의 사찰에는 이와 같은 탱화가 없다. 물론 한국 탱화와 비슷한 불화(佛畵)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들 불화는 한국 탱화와 같이 직접적인 신앙대상으로 봉안되거나 불상의 뒷벽에 거는 후불탱화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한국 탱화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석굴암의 석조탱(石彫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멀리 신라시대까지 소급된다.

17. 격의불교(格義佛敎)

 

불교 이외의 가르침에 그 의미·내용을 적용시켜 불교를 이해하는 일. 예를 들면 중국의 위·진(魏晉) 시대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여, 불교의 반야(般若)의 ‘공(空)’을 노장의 ‘무(無)’로써 설명 해석하는 방법이 행해졌다. 이런 방법으로 이해된 불교를 격의불교라고 한다. 이는 불교의 중국화에 기여하기도 했으나 폐해도 적지 않아서, 도안(道安) 등은 이를 배척하였다.

18. 삼론종(三論宗)

 

용수(龍樹)의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을 주요경전으로 삼고 성립된 불교의 종파. 성종(性宗)·공종(空宗)·파상종(破相宗)이라고도 한다.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계(中觀系)·유가계(瑜伽系) 가운데 중관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번창하였다. 제법공무상(諸法空無相)·팔부중도(八不中道)의 교리를 내세우고, 용수를 시조로 하여(그 전에 석가·문수·마명이 있다) 제바·라후라(羅羅)·청목(靑目) 등으로 계승된 다음, 구마라습(鳩摩羅什)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와 그의 제자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 등에 의하여 종지(宗旨)가 크게 선양되었으나, 후에 남북으로 갈라져 한때는 교세가 부진하였다. 그 후 길장(吉藏)에 이르러 종래의 학풍을 일변시켰고 또 《삼론현의(三論玄義)》 등이 성립됨으로써 삼론종학이 대성하였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순도(順道)가 이 종파였으므로 고구려에서 크게 발달하였고, 뒤에 신라의 원효가 삼론학의 종요(宗要)를 지었으며, 백제에서는 혜현(慧顯)이 삼론을 강설하였다. 또 고구려의 혜관(慧灌)은 625년(고구려 영류왕 8) 일본에 건너가 일본 궁중에서 삼론을 강설하였으며, 이보다 앞선 595년에는 혜자(惠慈)가 도일하여 황태자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간 혜총(慧聰)과 함께 새로 낙성된 호코사[法興寺]에서 삼론을 강설하
였다.

19. 구마라습(鳩摩羅什, Kumarajiva, 344∼413)

 

인도의 승려.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중국명)라고도 한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鳩摩羅炎:Kumarayana)을 아버지로, 구자국(龜玆國)왕의 누이동생인 기바(耆婆:Jiva)를 어머니로 하여 구자국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7세 때 출가하여 여러 곳을 편력하다가 인도 북쪽 계빈(賓)에서 반두달다(槃頭達多)에게서 소승교(小乘敎)를 배우고, 소륵국(疏勒國)에서는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로부터 용수(龍樹)의 대승교(大乘敎)를 배운 다음 구자국으로 돌아와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율(律)을 배웠다. 그 후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를 포교하였다. 383년 진왕(秦王)이 여광(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공략하였을 때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양주(凉州)로 갔으나, 그 뒤 후진(後秦)이 양주를 쳐서 후진왕 요흥(姚興)이 401년 구마라습을 장안(長安)으로 데리고 가 국빈으로 대우하였다. 그는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 등에 있으면서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성실론(成實論)》 《십송률(十誦律)》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중론(中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등 경률 74부 380여 권을 펴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론(三論) 중관(中觀)의 불교를 위하여 많은 힘을 기울여 이를 확립하였으므로 오늘날 중국·한국·일본에서는 그를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부르고 있다. 그의 제자 3,000명 가운데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를 가리켜 습문(什門)의 4철(四哲)이라 한다. 413년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69세로 죽었다.

20. 중관파(中觀派, Madhyamika)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학파.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중관론의 약칭)을 근저로 하여 반야 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로서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되었다. 《중론》의 설은 모든 존재가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라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데에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는 《백론(百論)》 등을 저술하여 외도(外道)와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제바의 제자 나후라발타라(羅羅跋陀羅)는 《중론》의 팔불(八不)의 의의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중관파가 학파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불호(佛護) 시대부터인데, 고학의 근본은 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공의 입장이다. 불호 이후 공의 인식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2파로 나뉘었는데, 불호의 계통인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 또는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와 청변(淸辨)으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이다. 전자로부터는 월칭(月稱)이 나와 중론의 주석서 《Prasannapada》를 쓰고, 《중관에의 입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티베트에 널리 유포되었다. 후자에는 같은 시기에 관서(觀誓)가 나오고, 또한 이어서 적천(寂天)도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중요한 논서를 저술하였다. 8세기에는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가 중관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한 입장에서 중관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 계통은 티베트로 전파되어 번영하였는데, 그 대표자가 아티샤(982∼1055)이고,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을 소의(所依)로 하는 삼론종(三論宗)이 발전하였다.

21. 유식사상(唯識思想)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는 불교사상.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에서 정립된 사상으로 유가학파의 근본 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로부터 생긴 것으로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하여 생긴, 결국 자기 자신의 인식수단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세친의 10대 제자인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에 의해 주석서가 나오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지어 유식사상의 기반을 다지며 이것이 중국에 전해져 중국 법상종의 성립을 가져온다. 유심사상(唯心思想)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은 있으나 유심사상이 《화엄경》과 기신론의 진여연기설에 기초를 두었다면, 유식사상은 아뢰야식의 나타남에 근거한 인식론적 철학적 해명이며, 유심사상은 우주론적인 존재인 진여에 근거한 존재론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한국의 경우 신라시대 일찍이 유가업(瑜伽業)이라는 유식학문이 화엄업과 함께 정립되어 유식사상의 대가를 배출하는데, 원측(圓測)·원효(元曉)·태현(太賢) 등이 그들이다.

 

<참조 1> 유식학파(唯識學派, vijuaptimatravadin)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 6파철학의 일파이기도 하다. 수행방법으로서 유가행(瑜伽行), 즉 유가(요가)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파조는 파탄잘리. 대승불교의 다른 한 파인 중관파(中觀派)와 대립하면서 300∼700년간에 발전·변천하였다. 이 학파의 초기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이고 그 성립연대는 3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미륵(彌勒)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켰다. 미륵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著)은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을 저술하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구조 및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관의 실천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하였다. 무착의 동생이며 제자가 된 세친(世親)은 미륵·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여 많은 저작을 하였으며, 또한 종래의 여러 사상을 집성하여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지어 유식사상을 대성하였다. 세친 이후는 《유식삼십종》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파가 발전하였다. 덕혜(德惠)의 뒤에 안혜(安慧)가 나와 많은 주석서를 썼는데, 그 계통에서 조복천(調伏天)이 나왔다. 또한 안혜와 거의 같은 계통의 진제(眞諦)는 중국에 들어가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섭대승론》과 석(釋)을 번역·강의하여 그 문하에서 섭론종(攝論宗)이 성립·발전하였다. 한편 진나(陳那)는 논리학[因明]을 대성하였는데, 그 계통에서 무성(無性)·호법(護法)이 나왔으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을 지어 유식설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계현(戒賢)에 의해 계승되었다. 구법(求法)차 인도에 갔던 현장(玄)은 계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성유식론》 및 그 외의 많은 유식학파의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의 문인(門人) 규기(竅基)는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하였으며, 또한 유식학파에는 난타(難陀)·승군(勝軍)의 계통도 있으며, 논리학 계통으로는 상갈라주(商羅主)·법칭(法稱) 등이 있다.

 

<참조 2> 법상종(法相宗)
통일신라 때 성립된 불교 종파.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법상종의 교의(敎義)가 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유가행파(瑜伽行派)의 교학(敎學)으로 중국에서는 현장(玄)이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켰다. 이 종파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의 사상(事相)에 대한 고찰과 분류 해명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다고 하여 법상종이라 하였는데, 규기가 자은사(慈恩寺)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역시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圓測)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그 제자들에 의해 유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가 순경(順憬)·태현(太賢) 등에 의해 종파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법상종의 조사(祖師)로 알려진 진표(眞表)의 점찰법(占察法)은 법상종의 한 계통으로 생각되며 법상종의 정통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법상종은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교종(敎宗)의 2대 종파가 되었는데, 《대각국사묘지(大覺國師墓誌)》에는 불교 6학파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법상종은 보수적인 귀족세력과 연결되어 교리면에서 관념화되고 불교의식 등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에는 인주이씨(仁州李氏)의 후원을 받아 왕실 및 기타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대립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자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유가업·유가교문·유가종·자은종으로도 부르다가 자은종으로 통칭되어 조선 초에까지 이어졌으나, 교세는 매우 위축되었다.

22. 일심(一心)

 

불교에서 만유의 실체라고 보는 참마음[眞如]. 이 말에는 ‘절대(진리)’라는 의미와 ‘오직 마음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자는 주로 중국의 화엄종(華嚴宗) 계통에서 사용된다. 이 의미에서 마음은 사물과 구별되는 마음이 아니라 통상적인 사물이나 마음도 포함한 것이므로, 진여(眞如)와 같은 말이다. 후자의 경우는 유심(唯心)과 동의어로서, 이 마음은 범부(凡夫)의 마음이다. 인도의 대승불교에서는 주로 후자의 의미이지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두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일심법(一心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양자가 동일한 것이고, 오직 강조하는 측면이 다른 데 지나지 않는다.
23. 정토(淨土)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부처와 또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거주한다는 청정한 국토. 중생이 사는 번뇌로 가득 찬 고해(苦海)인 현실세계를 예토(穢土)라고 부른 데 대한 상대어이다. 시방(十方)세계에 제불(諸佛)의 정토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1세계에 2불(佛)이 병립해서는 안 되므로 제불이 나타날 국토가 현실세계 외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논리인데, 특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 극락세계, 약사불(藥師佛)의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를 정토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선종(禪宗)에서는 “오직 마음이 정토요, 자신의 마음이 미타(彌陀)”라고 하여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일심(一心) 외에 정토는 없다고 말한다.

 

<참조 1> 정토문(淨土門)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成佛)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중에 타력신앙(他力信仰)에 의존하는 방법. 정토종(淨土宗)에서 말법(末法) 사상에 근거하여 불교를 분류한 것 중의 하나로, 자력(自力)에 의존하는 성도문(聖道門)의 상대개념이다. 도작(道綽)의 《안락집(安樂集)》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성도문은, 이미 석가가 입멸(入滅)한 지 오래고 말법시대에 이른 현재, 그 내용이 심원하여도 중생이 이해할 수 없으므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일념으로 염불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에 들어갈 수 있는 정토문만이 시기에 걸맞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정토문에서는 일생 악업(惡業)을 지어도 임종시에 십념(十念)으로 계속하여 불(佛)의 명호(名號)를 염송하면 모든 장애가 자연히 소멸하여 왕생(往生)할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이 도작이 ‘차토입성(此土入聖)’을 성도문, ‘왕생정토’를 정토문이라고 한 것은 담란(曇鸞)의 난행도(難行道)·이행도(易行道)의 2도설을 계승한 것이지만, 말법사상에 결부시켜 시기에 상응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자력(自力) 신앙에 대한 타력(他力) 신앙에 해당하는 것으로 극악한 사람도 구제한다는 의의가 강조되고 있다.

 

<참조 2> 정토종(淨土宗)
아미타불(阿彌陀佛) 및 그가 출현할 정토의 존재를 믿고, 죽은 후 그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일파. 아축불(阿 佛)·약사여래(藥師如來) 등의 정토도 여러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아미타불의 서방정토가 대표적이다. 이를 미타정토라고 하는데, 이 미타정토의 신앙은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세친(世親)의 《무량수경우바제사(無量壽經優婆提舍)》 등에 나타나 있으나, 인도에서는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지는 않았다. 미타정토의 사상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179년 후한(後漢) 때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 번역된 것을 그 효시로 본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염불결사인 백련사(白蓮社)를 열어 주로 《반주삼매경》에 따라 견불왕생(見佛往生)하기를 바랐던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일반에게 널리 유포된 것은 《무량수경》 《관(觀)무량수경》 《아미타경》의 이른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번역에서 비롯된다. 중국 정토종의 시조라고 하는 담란(曇鸞)은 앞의 세 권의 저서를 주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주비바사론》의 난행(難行)·이행(易行)의 이도설(二道說)을 근거로 타력본원(他力本願)을 주장하여, 처음으로 정토교의 교의를 천명하였다. 또한 삼론종(三論宗)의 길장(吉藏),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 등도 《관무량수경》의 주석을 지은 것을 보아 정토사상이 보편화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당(唐)나라 때의 인물로 담란을 계승한 도작(道綽)과 그의 제자 선도(善導)가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당(唐)나라 때의 정토종은 말법(末法)사상이 팽배하던 당시에 시의적절하게 민중에게 전파시킬 수 있었다. 또한 혜일(慧日)은 720년경 인도 유학에서 돌아온 당시, 선종(禪宗) 측이 정토종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을 인도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한 데 대해, 선가(禪家)의 ‘공복고심(空腹高心)’을 비판하고 염불왕생을 강조하였다. 이에 선가에서도 공명하는 사람이 생겼다.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선정쌍수(禪淨雙修)’를 고취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리하여 천태종·율종(律宗)·화엄종(華嚴宗)에 속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정토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반 사회인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보급되었다. 한국의 경우, 신라시대에 원효(元曉)·현일(玄一)·경흥(憬興) 등이 정토신앙을 연구하였는데, 중국의 정토종이 말법사상이라는 위기의식에 바탕을 둔 것인 데 반하여, 한국에서의 정토사상이 미륵(彌勒) 계통의 현실긍정적 세계관과 관련지은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24. 미타신앙(彌陀信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念)하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의 왕생을 믿는 불교의 한 형태. 아미타불신앙·정토신앙이라고도 한다. 10겁(劫) 이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法藏)비구가 48원(願)을 세우고 보살로서 수행을 한 끝에 그 원을 다 성취,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미타불이 있는 곳이 극락정토인데 그곳에는 일체의 고(苦)가 없고 일체의 윤회(輪廻)도 없으며, 오로지 기쁨·평안만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살아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염하여야 한다는 신앙이다. 이같은 미타신앙은 인도·중국에서 일찍부터 유행하였던 까닭에 이 미타신앙에 관하여 설(說)하고 있는 경전·불서 등이 무려 200종을 넘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량수경(無量壽經)》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등인데, 이들을 미타 3부경(三部經) 또는 정토 3부경이라 부른다. 신라 선덕여왕 때 《삼국유사》의 기록과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를 썼던 것을 보면, 이때 한국에 미타신앙이 이미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25.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觀)무량수경》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세 경전. 불교의 정토종에서 근본경전으로서 중요시하는 석가가 여러 가지 번뇌에 물든 중생을 위하여 아미타불의 구제를 설한 내용이다. 성립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은 BC 1세기경 서북 인도에서, 《관무량수경》은 이보다 훨씬 뒤인 4∼5세기경 서북 인도 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량수경》을 대경(大經), 《아미타경》은 소경(小經)으로도 부르는데, 모두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으나, 관경(觀經)이라 부르는 《관무량수경》은 한역과 위구르어역만이 남아 있다. 특히 《무량수경》의 법장(法藏)보살의 본원(本願:범본에는 46원, 한역에는 36 또는 48원)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정토신앙이 신라에서 흥왕하여 정토3부경이 많이 알려졌는데, 통(通)불교적으로 종파에 관계없이 《아미타경》은 특히 널리 알려지고 있다.

26. 밀교(密敎)

 

비밀불교(密佛敎) 또는 밀의(密儀)종교의 약칭. 진언(眞言)밀교라고도 하는데,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대칭어이다. 밀교는 7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華嚴)사상·중관파(中觀派)·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인도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보통 밀교는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 성력(性力: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힌두교의 탄트라(tantra) 신앙과 결합되어 말기에 나타난 좌도밀교(左道密敎)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통적인 밀교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전신적(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의례(儀禮)의 체계를 갖는다.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바지라야나(vajra-yana:金剛乘)인데, 이것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바지라야나, 즉 금강승은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통일원리는 공(空)과 자비(慈悲)의 일치[空悲無二], 즉 반야(般若:지혜)와 방편(方便)의 일치로 나타난다. 이러한 금강승에는 사크티적(的) 경향, 즉 성력적 성격은 없다. 그러나 이슬람[回敎] 침입(약 1027∼87) 이후 성립된 구생승(俱生乘:Sahaja-yana)과 시륜승(時輪乘:kalacakra-yana), 그리고 금강승에서 갈라져 나온 탄트라승(Tantra-yana), 길상승(吉祥乘:Bhadra-yana) 등은 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밀교를 성력적인 뉘앙스를 갖는 탄트라 불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호칭은 아니라고 하겠다. 인도에서 티베트·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구생승 계통이다. 그러나 중국·한국·일본 등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아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 일반적으로 밀교에 대한 관점은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 주술조직(呪術組織), 또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철학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잡밀(雜密, 또는 呪密)이라 하여, 금기(禁忌)·부적(符籍)·주법(呪法) 등으로 표현하는 데 반해, 후자는 순밀(純密, 또는 通密)이라 부르는데, 7세기 후반에 차례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기본경전이다. 밀교의 두 가지 세계관인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는 이 두 경에 의해 설명된다.

 

<참조 1> 태장계(胎藏界, garbha-dhatu)
마치 태아가 모태에서 보호·양육되는 것과 같이, 여래(如來)의 ‘이(理)’, 즉 이성이 모든 중생 가운데 포함·내장되어 있다고 하는 밀교(密敎)의 세계상(世界像). 금강계(金剛界)에 대칭되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그 진리의 무한한 힘, 즉 여래의 대비(大悲)가 강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밀교에서는 우주 전체를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현현(顯現)으로 본다. 우리도 본래 대일여래와 동일하며 또한 대일여래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에 본래 불성(佛性)의 ‘이’와 번뇌를 깨뜨리는 ‘지(智)’의 양면이 있는 것은 그대로 대일여래에 ‘이’와 ‘지’의 양면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이’는 본각(本覺)·화타(化他)·인(因)을 의미하며, ‘지’는 시각(始覺)·자증(自證)·과(果)를 의미한다. 전자를 이법신(理法身)의 대일여래 또는 태장계, 후자를 지법신의 대일여래 또는 금강계라고 한다. 진실 그 자체의 세계가 태장계이며,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태장계 만다라(曼茶羅)이다. 역사적으로 태장계는 반야(般若)·중관(中觀)사상, 금강계는 유가행 유식학(瑜伽行唯識學)의 발전으로 생각된다.

 

<참조 2> 태장계 만다라(胎藏界曼茶羅, garbha- dhatu-mandala)
여래(如來)의 보리심(菩提心) 및 대비심(大悲心)을 태아를 양육하는 모태에 비유하여, 이로부터 세계가 현현(顯現)되며, 실천적으로는 이를 증득(證得)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 기본구조는 주로 《대일경(大日經)》 <구연품(具緣品)>의 대만다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중앙의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 및 그 주변의 변지원(遍知院)·관음원(觀音院)·금강수원(金剛手院)·지명원(持明院), 그리고 그 바깥의 석가원(釋迦院)·문수원(文殊院)·허공장원(虛空藏院)·소실지원(蘇悉地院)·지장원(地藏院)·제개장원(除蓋障院), 그리고 외곽의 외금강부원(外金剛部院)의 12대를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만다라는 실재와 현상의 관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대상, 밀교의 실천철학을 나타내기도 한다.

 

<참조 3> 만다라(曼茶(陀)羅, mandala)
밀교(密敎)에서 발달한 상징의 형식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 신성한 단(壇:성역)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으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본질(manda)을 소유(la)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컬었다. 그래서 윤원구족(輪圓具足)으로 번역한다. 윤원구족이란, 낱낱의 살[輻]이 속바퀴측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圓輪]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만다라는 크게 《대일경(大日經)》을 중심으로 하는 태장계(胎藏界)만다라와,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계(金剛界)만다라로 나뉜다. 태장의 세계는 모태(母胎) 중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듯이, 만물을 내장(內藏)하는 진리 자체의 세계를 석가로 구현화한 것이고, 금강계는 석가의 인식은 경험계를 초월한 인식이지만 그같은 인식을 근거로 하여 경험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체계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모습을 그린 정토변상(變相)을 흔히 정토만다라라고 부른다. 이러한 만다라는 관상(觀想)의 대상이기도 하며,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27. 경교(景敎, Nestorianism)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그리스도교 일파의 중국 명칭.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도 한다. 431년에 추방된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시리아를 거쳐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를 받아 존속하면서 교세를 넓혔다. 중국에는 635년(태종 9)에 대진국(大秦國:로마)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교한 데서 비롯된다.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래된 뒤 15년부터 약 50년 동안 번성했는데, 이는 국교라 할 수 있는 도교(道敎)에 기생했을 뿐만 아니라 당과 페르시아의 친선관계가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 송나라 때에 이르자 거의 잊혀졌고, 원말명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28. 화엄종(華嚴宗)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생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화엄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모두 완역한 것을 계기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한편 《화엄경》을 사경(寫經)·독송(讀誦)하는 화엄 신앙과, 이 신앙에 근거하는 신앙 단체인 화엄재회(華嚴齋會)도 발생하여 화엄종 성립의 기반이 성숙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두순(杜順)은 종래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여 화엄종의 제1조가 되었다. 새로이 중국에 전해진 현장(玄)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하면서 종래의 지론종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이며, 이 지엄의 학문을 계승하여 화엄종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이 현수(賢首)이다. 그 후 징관(澄觀)·종밀(宗密)이 나와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자선(子璿)·정원(淨源) 등이 화엄의 맥을 이었으며, 그 후 많은 선사(禪師)들의 사상에도 화엄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에서는 화엄사상을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 등이 크게 선양하였는데, 원효의 《화엄경소》는 현수의 《탐현기(探玄記)》에 인용될 만큼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상은 두순에게서 화엄 교학을 배운 적이 있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676)하여 화엄의 종지(宗旨)를 널리 편 이래 해동화엄종을 개창(開創)한 사람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의 심상(審祥:?∼740)은 당나라 도선(道璿)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학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十刹)’이라 하여 화엄학 연구의 중요한 사찰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 화엄학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랑(希朗)과,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의 북악(北岳)·남악의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균여(均如)는 이를 조화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불교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화엄·선(禪)·천태(天台)를 융합하였다. 그 후 어느 종파에 속하더라도 화엄학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전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일체즉일(一切則一)의 무한의 관계를 갖는 원융무애(圓融無)를 설하는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이다. 그 원융무애한 모습은 십현(十玄) 연기를 설하며, 그 이유로써 육상(六相:總·別·同·異·成·壤) 원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서 있다.

 

<참조> 화엄경(華嚴經)
불교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 원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한국 불교전문강원의 교과로 학습해 온 경전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본(418∼420), 실차난타(實叉難陀)역의 80권본(695∼699), 반야(般若)역의 40권본(795∼798)이 있는데, 상기 2본 중 최후의 장인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는 것이다. 티베트어역은 80권본과 유사한 완본이 있다. 본경은 <60화엄>이 34장, <80화엄>이 39장, 티베트어역이 45장이지만, 실은 처음부터 현재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후에 《화엄경》으로 만들어졌는데, 필경 중앙아시아에서 4세기경 집대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장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것은 십지품(十地品)으로, 그 연대는 1~2세기경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이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본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60권본은 7처(處)·8회(會)·34품(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제1·2품)와 제2보광법당회(普光法堂會:제3∼8품)는 지상, 제3도리천회(利天會:제9∼14품)·제4야마천궁회(夜摩天宮會:제15∼18품)·제5도솔천궁회(兜率天宮會:제19∼21품)·제6타화자재천궁회(他化自在天宮會:제22∼32품)는 모두 천상이며,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회좌의 장소도 점차 상승하고 있다. 제7은 다시 지상의 보광법당회(제33품), 제8도 지상의 서다림회(逝多林會, 즉 祇園精舍:제34품)이다. 제1회는 불타가 마가다국(國)의 깨달음을 완성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때 불타는 비로자나불과 일체가 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보살이 차례로 불타를 찬양하는 노래를 읊는다. 긴 찬양의 노래가 이어진 다음, 이 아름다운 세계가 불타의 신력(神力)으로 크게 진동하고, 향기롭고 보배로운 구름이 무수한 공양구(供養具)를 비오듯 뿌린다. 이러한 세계를 연화장 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라고 한다. 제2회에서 불타는 적멸도량에서 멀지 않은 보광법당의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있다. 문수(文殊)보살이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를 설하며, 또한 10인의 보살이 각각 10종의 심원한 법을 설한다. 제3회부터는 설법의 장소를 천상으로 옮기고 여기서는 십주(十住:보살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생활방식, 즉 初發心住·治地住·修行住·生貴住·具足方便住·正心住·不退轉住·童眞住·法王子住·灌頂住)의 법을 하며, 제4회에서는 십행(十行:보살이 행해야 할 열 가지 행위, 즉 歡喜行·饒益行·無恙恨行·無盡行·離癡亂行·善現行·無著行·尊重行·善法行·眞實行), 제5회에서는 십회향(十廻向:수행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보살의 열 가지 행위), 제6회에서는 십지(十地)를 설명하고 있는데, 십지는 보살의 수행단계를 10종으로 나누는 것으로 《화엄경》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즉 제1은 환희지(歡喜地)로서 깨달음의 눈이 뜨여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경지, 제2는 이구지(離垢地)로서 기본적인 도덕으로 직심(直心)을 일으켜 나쁜 죄의 때를 떨쳐버리는 경지, 제3명지(明地)에서는 점차 지혜의 빛이 나타나, 제4염지(地)에서 그 지혜가 더욱 증대되고, 제5난승지(難勝地)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평등한 마음을 가지며,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일체는 허망하여 오직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으며, 제7원행지(遠行地)에서는 열반에도 생사에도 자유로 출입하고, 제8부동지(不動地)에서는 지혜가 다시는 파괴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목적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불타의 비밀의 법장(法藏)에 들어가 불가사의한 대력(大力)을 획득하고, 제10법운지(法雲地)에서는 무수한 여래가 대법(大法)의 비를 뿌려도 이를 다 증득(證得)하며, 스스로 대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의 무명·번뇌의 불길을 꺼버린다. 따라서 십지 전체를 통하여 보살은 자신을 위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이타행(利他行)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제7회에서는 지금까지의 설법이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으며, 제8회에는 선재(善財)라는 소년이 차례로 53명을 찾아가서 법을 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53명 중에는 보살만 아니고, 비구·비구니·소년·소녀·의사·뱃사공·신·선인·외도(外道)·바라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구도심에서는 계급도 종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화엄경》은 현상세계는 상호 교섭·활동하여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사사무애(事事無)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근거한다. 이 《화엄경》을 전거로 하여 후에 중국에서는 화엄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주석서로는 60권본에 대한 현수(賢首)의 《탐현기(探玄記)》, 80권본에 대한 징관(澄觀)의 《대소초(大疏)》가 가장 유명하다. 또한 《탐현기》의 선구로서 지엄(智儼)의 《수현기(搜玄記)》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인도에서는 《십지경》에 대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 등이 있다.

29.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키는 설. 약칭 풍수설·지리설이라고도 한다. 도성(都城)·사찰(寺刹)·주거(住居)·분묘(墳墓) 등을 축조(築造)하는 데 있어 재화(災禍)를 물리치고 행복을 가져오는 지상(地相)을 판단하려는 이론으로, 이것을 감여(堪輿:堪은 天道, 輿는 地道), 또는 지리(地理)라고도 한다. 또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수가(風水家) 또는 풍수선생·감여가(堪輿家)·지리가(地理家)·음양가(陰陽家) 등으로 부른다. 그들은 방위(方位)를 청룡(靑龍:東)·주작(朱雀:南)·백호(白虎:西)·현무(玄武:北)의 4가지로 나누어 모든 산천(山川)·당우(堂宇)는 이들 4개의 동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어느 것을 주로 하는가는 그 장소나 풍수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리고 땅 속에 흐르고 있는 정기(正氣)가 물에 의하여 방해되거나 바람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는 장소를 산천의 형세에 따라 선택하여 주거(住居)를 짓거나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인간생활의 행복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시작되어, 그것이 음양오행의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혼합되어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인간의 운명이나 화복에 관한 각종 예언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다시 초기 도교(道敎)의 성립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脫解王)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衰地)와 역지(逆地)는 이것을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記圖讖書)를 남겼다. 그 후 고려 때에 성행한 《도선비기(道詵記)》 등은 그 전체를 도선이 지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비기라 일컬어지는 예언서가 그의 사후 세상에 유전(流轉)되어 민심을 현혹시킨 일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사례가 많다. 고려 태조도 도선의 설을 믿은 것이 분명하여, 그가 자손을 경계한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도록 유훈(遺訓)하였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弓裔傳)>,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으로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들어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보하기 위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운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그 태반의 이유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이다. 즉 개경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구세력(舊勢力)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신 왕조의 면목을 일신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 밖에도 《정감록(鄭鑑錄)》을 믿고 계룡산이 서울이 된다는 등 실로 풍수지리설이 국가와 민간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 오늘날에도 민간에서는 풍수설을 좇아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운운하며 묘(墓)를 잘 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30. 미륵신앙(彌勒信仰)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 크게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2가지 흐름으로 나누나 근본적으로는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미륵의 대승설법이 이루어지는 복지사회에의 염원에서 나온 불교적 이상사회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인도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미륵보살상을 통해 간다라 미술의 유입기인 BC 2세기경부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미륵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룽먼[龍門]석굴의 미륵상들을 통해 6세기 북위 불교의 미륵신앙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어 백제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적인 치세를 흠모하는 정치를 펼치며, 신라의 화랑 또한 미륵의 화현(化現)인 국선(國仙)을 따르는 청년집단으로 결성되어, 고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형성되었다. 또한 미륵경전에서 강조된 10가지 착한 행위는 참회를 통해 지난 죄업을 소멸하는 수행을 낳게 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努 夫得)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설화는 대중 구제적인 방편과 함께 자신을 연마하는 미륵신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말세적인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 또한 미륵하생의 원용이다. 근세 한국에서 일어난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사회 갈등기에 일어나는 민중의 소망을 사회구제적인 미륵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이다.

 

<참조> 미륵(彌勒, Maitreya, 270 ?∼350 ?)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 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현재는 윤회의 마지막 일생을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미륵의 어원적인 뜻은 자비·우정을 나타내며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경전은 《슈타니파다(Suttanipada)》 인데 여기서는 브라만 출신의 16수행인의 한 사람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는 비구로 묘사된다. 이후 미륵의 역할은 초기 경전들에서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으며, 대승경전의 발달 후에는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차원 높은 대승불교의 교리를 설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설정된다. 소위 미륵 6부경의 성립단계에 와서는 미륵은 석가모니불과 같은 행적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이상적 인물로 정리된다.

31. 9산 선문(九山禪門)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禪宗)을 산골짜기에서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不立文字],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敎外別傳]는 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이것이 4구표방(四句標榜)인데,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서 무방하다.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禪敎)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이다. 당시 선사(禪師)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서 대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선승(禪僧)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郎慧無染)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들과 동격으로 병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대립보다는 선교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끔 한 것이다. 가령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祖師)들과의 관련내용은 1290년대 천책(天])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960년 무렵 혜거(慧炬)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인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뒤 시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으로 경색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말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인 보요선사(普耀禪師), 《조당집(祖堂集)》에서 높이 평가한 오관산 서운사 순지화상, 최치원이 높이 평가한 쌍계사 진감혜명은, 그들의 후예가 번성하지 못함으로써 9산선문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에 의한 활약, 이 두 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즉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하여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절과 산문을 동일한 대상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절이 산문으로 불린 이래의 산문이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정한 계통의 흐름이 계속하여 이어진 곳을 말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승들 대부분은 수미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선문의 계보 안에서 활동한 존재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비약하여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고려시대의 선종과 신라 말 고려 초의 9산선문이란 용어의 차이는 의식하건 않건 간에, 지역분포, 국가와의 관계, 선 수행의 내용, 각 산문과의 관계 등에서, 두 시대 간의 선종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용어로 쓰여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9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혁명적으로까지 보이던 선종이, 사실상 양심적인 개인의 지성만으로 만족하는 진보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반증한다. 이는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의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32.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系圖)

 

의상(義湘:625∼702)이 화엄학의 법계연기(法界緣起)사상을 서술한 그림시[圖詩].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하여 ‘본래부동명위불(本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7언(言) 30구(句)의 게송(偈頌)으로 법계연기사상의 요체를 서술하였는데, 중앙에서부터 시작하여 54번 굴절시킨 후 다시 중앙에서 끝나는 의도된 비대칭(非對稱)의 도형이 되도록 하였다. 게송의 앞에는 법계도 제작의 의도를 적고 뒤에는 법계도의 의미를 설명한 석문(釋文)을 붙였다. 법계도의 형태는 원래 흰색 바탕에 검은 색의 글씨로 게송을 적고 붉은 색의 선이 게송의 진행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각기 물질세계인 기세간(器世間)과 수행의 주체인 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깨달음의 세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상징하며 이와 같이 깨달음의 경지에 나타난 우주 전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법계도는 ‘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한다. 법계도의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취한 것은 석가의 가르침이 하나의 진리인 것을 상징한 것이고, 많은 굴곡을 둔 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방편이 달라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첫글자인 ‘법(法)’과 끝 글자인 ‘불(佛)’ 두 글자는 각기 수행방편의 원인과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서, 이 두 글자를 중앙에 둔 것은 인과(因果)의 본성이 중도(中道)임을 보인 것이다. 법계도의 게송은 진리의 실재를 서술한 ‘자리행(自利行)’과 진리의 공덕을 서술한 ‘이타행(利他行)’ 그리고 진리를 증득하는 과정을 서술한 ‘수행(修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리행’에서는 하나의 티끌과 전우주가 상즉(相卽)하고 한 순간이 영원과 상통한다는 《화엄경》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드러내었고, ‘이타행’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공덕이 중생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옴을 노래하였다. 또 ‘수행’에서는 수행자가 망상을 끊고 진리를 깨닫는 순간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의상은 이러한 사상이 방편의 가르침인 삼승(三乘)과 구별되는 화엄 일승(一乘)의 절대적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이 법계도는 의상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 조사 지엄(智儼)에게 수학할 때인 668년에 창작되었는데, 화엄의 진리에 대하여 서술한 책을 불사른 후 타지 않고 남은 210개의 글자를 가지고 게송을 짓고 법계도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게송과 <석문>의 많은 부분이 지엄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중국 화엄학과 달리 ‘수행’을 중요시하는 의상의 사상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특히 중국 화엄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자적인 ‘이이상즉설(理理相卽說)’을 주장하여 신라 화엄학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의상은 이 법계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제자들에게 인가의 표시로 수여하기도 하였다. 의상의 사상을 이은 신라의 화엄학은 주로 이 법계도에 기초하여 수행하며 법계도의 사상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의상의 문도들이 법계도에 대해 연구한 내용은 《화엄일승법계도기총수록(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에 수록되어 있으며, 고려 초의 균여(均如)와 조선 전기의 김시습(金時習)은 각기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및 《일승법계도주(一乘法界圖註)》를 찬술하여 <법계도>의 사상을 설명하였다.

33. 북종선(北宗禪)

 

선종(禪宗)의 한 주류로서 5조 홍인(弘忍:602∼675)의 제자 신수(神秀:?∼706) 문하의 선(禪). 홍인의 제자인 혜능(慧能:638∼713)이 강남(江南)에서 교화하였기 때문에 남종선(南宗禪)이라 하는 데 대하여, 신수와 그의 제자 의복(義福:652∼736)·보적(普寂:651∼739) 등이 주로 낙양(洛陽)·장안(長安) 등의 북지에서 선을 폈기 때문에 북선·북종 또는 북종선이라 한다. 다만 북종이라는 호칭은 후세에 신회(神會:685∼760)가 스스로 선의 정통임을 주장하여 남종이라 자칭한 데 대한 것이기 때문에 남종이 우월하고 북종이 열등하다는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북종에 속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북종이라 하였던 사실은 없었다. 북종선의 특색은 신수의 관심론(觀心論)과 오방편설(五方便說)에서 보듯이 단계적 수행을 설하는 점에 있으며, 이 점이 후세에 신회가 배격한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4·5조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복·보적이 입적(入寂)할 때까지는 북종선의 전성기로서 남종선이 도저히 미치지 못했으나, 그 후 신회·혜충(慧忠:?∼775) 등에 의한 남종선의 북방전파로 점차 쇠퇴하였다.
<참조> 남종선(南宗禪)
당(唐)나라 혜능(慧能)에 의해 성립된 불교 선종(禪宗)의 일파. 혜능과 동시대인 신수(神秀)와 그 계통을 북종선(北宗禪)이라고 하는 데 대한 대칭어이기도 하다. 북종선이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단계적 깨달음[漸悟]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남종선은 《금강경(金剛經)》을 근거로 행동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頓悟]을 주장한다. 이를 가리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고 하나, 후대에는 남종선이 특히 발전하여 선종이라 하면 남종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선종의 기본 종지(宗旨)는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할 수 있는데, 혜능에게 있어 견성성불은 인간의 본성을 대상화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깨달음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며, 이것을 알고 난 다음 불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아는 것이 그대로 불타라는 것이다. 즉 성불은 불타가 되는 것이기보다 불타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성불은 점오가 아니라 자성(自性)이 곧 진불(眞佛)임을 깨우치는 돈오이다. 이러한 사상의 줄기는 후에 임제종(臨濟宗)·위앙종(仰宗)·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법안종(法眼宗) 등의 5가(五家)를 형성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임제종 계통이 유입되어 9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고 그 후 한국불교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34.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35. 변려문(騈儷文)

 

중국 고대의 한문체(漢文體). 변려체(騈儷體)·변문(騈文)·사륙문(四六文)·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로, 변(騈)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중말기(中末期)에 시작되어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唐)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걸교문(乞巧文)》 중 “변사려륙금심수구(騈四儷六錦心繡口)”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변려문의 필수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개념 및 문법적인 기능이 서로 대응하는 2개의 구(句)로써 대구(對句)를 이루어 문장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② 문장의 전편(全篇)이 4자구(四字句)를 주로 하고, 6자구(六字句)를 이에 따르도록 구성한다. ‘사륙문’이라는 호칭은 여기서 나왔다. ③ 구말(句末) 및 구중(句中)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평측(平仄)을 안배(按排)하고 문장의 운율을 알맞게 다듬는다. ④ 고전(古典) 문장을 잘라서 쓰는, 이른바 단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문장에 세련미를 갖게 한다. 변려문의 귀족적인 문체는 과도한 수사주의(修辭主義) 경향으로 말미암아 중당(中唐) 때 한유(韓愈) 등이 일으킨 산문개혁운동에 의하여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이미 《문선(文選)》이 애독되면서 이 문체가 성행하였으며, 고려 때까지 계속되었다.

 

36. 다라니(陀羅尼, dharani)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呪文). 비교적 긴 장구(章句)로 되어 있는 주문으로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 번역하며 불법(佛法)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는 힘이다. 즉 뛰어난 기억력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총지란 하나를 기억함으로써 다른 것까지 연상하며 다 기억한다는 뜻이고, 능지란 여러 선법(善法)을 능히 지니고 있다는 뜻이며, 능차란 악법을 능히 막아 준다는 뜻이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진언(眞言)과 다라니를 지송(持誦)함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다라니>는 대부분 산스크리트를 번역하지 않고 음사(音寫)하였다. 그 이유는 번역으로 말미암은 의미의 제한을 방지하자는 것과 그 신비성을 간직하자는 데 있었다.

37. 가섭(迦葉, Mahakasyapa, ?∼?)

 

석가의 십대(十大) 제자 중 한 사람. 음을 따서 마하가섭(摩訶迦葉),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대구씨(大龜氏)라고도 한다. 인도 왕사성(王舍城)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란만 미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비팔라 나무 밑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로 비야리성(城)의 가비리라는 바라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세속적인 욕망의 허무함을 깨달아 아내와 함께 출가하였는데, 그 후 석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를 깨쳐 자기 옷을 벗어 석가에게 바친 후 부처가 주는 마을 밖의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옷의 천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고 한다. 욕심이 적고 족한 줄을 알아 항상 엄격한 계율로 두타(頭陀:금욕 22행)를 행하고, 교단(敎團)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부처의 아낌을 받았다. 어느 날 사위국(舍衛國)의 고요한 숲 속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 헌옷을 입은 채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속으로 경멸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여러 비구(比丘)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잘 왔다. 가섭이여, 여기 내 자리에 앉아라.” 하고는, 가섭존자가 얻은 훌륭한 공덕이 자기자신이 얻은 공덕과 다를 바 없다고 칭찬하면서, 석가는 모든 무상(無上)의 정법(正法)을 가섭에게 부촉(咐囑)하며 자신이 죽은 뒤 모든 수행자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그를 십대 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하였다. 한때 바사성(婆娑城)에 머물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석가가 열반(涅槃)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쿠시나가르의 천관사(天觀寺)로 달려가 스승의 발에 예배한 후 다비(茶毘)의식을 집행하였다. 이어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아난(阿難)과 우바리(優婆離)로 하여금 경(經)과 율(律)을 결집(結集)하도록 하였다. 석가가 죽은 뒤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가 되었는데, 선가(禪家)에서는 그를 부법장(付法藏) 제1조(祖)로 높이 받들고 있다.

38. 도선(道詵, 827∼898.3.10)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속성 김(金). 호 옥룡자(玉龍子). 전남 영암(靈岩) 출생. 15세에 지리산 서봉인 월류봉(月留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고, 4년 만인 846년(문성왕 8) 대의(大義)를 통달, 신승(神僧)으로 추앙받았다. 이때부터 수도행각에 나서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운봉산(雲峰山)의 굴속에서 참선삼매(參禪三昧)한 후, 태백산(太白山) 움막에서 고행하였으며, 전라도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머물다가 죽었다. 헌강왕의 초빙으로 궁중에 들어가 왕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죽은 후 효공왕이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다. 저서에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외에도,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

39. 방벌(放伐)

 

중국 전근대기(前近代期)의 정권 교체시에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정권탈취 방식. 선양(禪讓)이 천자의 지위를 유덕자(有德者)에게 이양해야 한다는 사상에 따른 형식인 데 대하여, 이것은 인의(仁義)를 무시한 포악한 천자를 무력으로 방축(放逐)하고 정벌(征伐)해야 한다는 사상에 따른 방식으로, 유가적(儒家的) 사상에 의한 것이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쳤고,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몰아냈다는 데서 정통성을 인정받는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 역사에는 선양의 형식도 보이나, 대부분의 왕조 교체는 농민 반란을 배경으로 하는 무력 혁명, 즉 방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1> 선양·방벌(禪讓放伐)
중국 역대 왕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규범적인 두 가지 방식. 유가(儒家)에서 전승한 고대사에 의하면, 제요(帝堯)는 민간의 효자 순(舜)을 사위로 삼고, 불초한 아들인 단주(丹朱)를 제쳐놓고 유덕(有德)하며 천명(天命)을 받아야 할 순에게 자발적으로 양위(讓位)하였다. 제순(帝舜)도 마찬가지로 우(禹)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으나, 우의 아들 계(啓)는 하왕조(夏王朝)를 세습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걸(桀)에 이르자, 탕(湯)은 무도한 군주인 그를 무력으로 방벌(放伐)하여 은왕조(殷王朝)를 일으켰다. 은의 주왕(紂王)도 역시 폭군이어서 주(周)의 무왕(武王)은 아버지인 문왕(文王)의 업(業)을 이어 은을 멸망시키는 것은 천명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맹자(孟子)는 탕무(湯武)의 무력혁명인 방벌과 요순(堯舜)의 선양을 시인하였다. 그 후 역사상의 혁명은 야심과 실력으로 수행되었으나, 한족(漢族) 또는 한화(漢化)한 북적(北狄) 간의 왕조교체는 선양의 형식으로 위(魏)의 조비(曹丕)에서 송(宋)의 태조(太祖)까지 중세에 10여 회 행하여졌다. 선양의 관념은 멀리는 왕망(王莽)의 찬탈에 있었고, 가까이는 청(淸)의 선통제(宣統帝) 퇴위조(退位詔)인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말에도 있다. 번거로운 의식(儀式)과 신비적인 이론의 뒷받침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송 이후의 종족간의 흥망과는 달리 민중까지 휘말리는 대규모 유혈을 피할 수 있었다.

 

<참고 2> 역성혁명(易姓革命)
타성(他姓)에 의한 왕조의 교체. 왕조에는 각각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으므로 왕조가 바뀌면 통치자의 성도 바뀌게 되며, 신구(新舊) 왕조의 교체는 천명(天命)을 혁신하는 행위라 해서 혁명이라 불린다. 이와 같이 왕조가 교체되는 일은 방벌(放伐)이라 해서 신왕조가 구왕조를 무너뜨리거나, 선양(禪讓)이라 해서 평화적으로 천자(天子)의 지위를 물려받아도 천명에 따른 한 정당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무너뜨린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맹자(孟子)에 이르러 혁명시인의 사상으로 정비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혁명은 오늘날 revolution의 역어(譯語)로서의 혁명과는 그 개념이 다르지만, 중국의 역대왕조는 특히 선양혁명(禪讓革命)의 형식을 빌려서 구왕조에 대신하는 신왕조의 정통성을 보존하려 하였다. 한국에서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의 신왕조 창건이 이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0. 교사(郊祀)

 

옛날 중국에서 지배자, 즉 주로 천자(天子)가 수도 100리 밖에서 행하던 제천의식(祭天儀式). 교제(郊祭)라고도 한다.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서경(書經)》에 주(周)나라 때에 이미 교사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제후(諸侯)가 행한 경우도 있으나, 통일제국(統一帝國)이 형성된 이후에는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의식이 되었다. 교사의 내용이나 시행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한(漢)나라 때의 교사는, 하늘의 명을 받고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천자가 서울의 남쪽 교외에 원구(圓丘)를 쌓고, 밤에 섶을 불태워, 거기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에 의하여, 치정(治政)의 실적을 하늘에 보고한 의식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경우 하늘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아울러 제사를 지냈다는 설이 있다. 이같은 전통에 따라, 한나라 이후의 역대 왕조(王朝)의 천자는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교사를 행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되었다. 명(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는 수도 베이징[北京]의 남교(南郊)에 천단(天壇)을 쌓은 후 교사를 행하였으며, 청(淸)나라 때에는 이것을 개수(改修)하여 원형(圓形) 3층의 장려한 천단을 이룩하였다. 교사 의식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고려·조선 시대에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중국의 그것에 비하여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교사의 대상도 천지·자연과 농잠(農蠶) 관계 등 다양하며, 시행장소도 서울의 동·서·남·북교(郊) 등으로 확대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동지(冬至)에 남교에서 제천의식을, 하지(夏至)에는 북교에서 제지의식(祭地儀式)을 행하였다. 고려·조선 시대의 교사 중 제천의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원구제(圓丘祭) 정도가 있다.

41.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자연계의 현상과 인간행위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중국의 사상. 이러한 관계는 길조(吉兆)에 관해서도 존재하지만, 특히 천변지이(天變地異)나 사람에 대한 재해와 인간의 행위의 대응에 주목할 경우에는 재이설(災異說)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상의 기초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서, 인간계의 음양과 자연의 음양이 각각 대응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남성·군주·부(父)는 양, 여성·신하(臣下)·자(子)는 음, 자연의 하늘·태양·한발(旱魃)은 양, 지(地)·월(月)·홍수는 음이며, 천변의 일식(日蝕)은 양이 음에 침해되는 것으로 군주가 신하 또는 황후에게 침해당하는 것의 반영이며, 지진은 조용해야 할 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황후나 신하의 횡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사상은 전국 말기(戰國末期:BC 3세기)에 일어나 한대(漢代)에 성행하였는데, 처음에는 음양설에 의거한 합리적인 측면이 강했으나, 나중에는 자의적(恣意的)인 대응을 하게 되어 정쟁(政爭)의 도구로 화했다.

42. 훈요 십조(訓要十條)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遺訓). 신서 10조(信書十條)·십훈(十訓)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총애하던 중신(重臣)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주었다고 하며, 《고려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한다. 주요 내용을 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車峴) 이남 금강(錦江) 이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훈요 10조》는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견해가 천명되었고, 불교숭상과 풍수지리설의 혹신(惑信)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後嗣)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상은 호국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당시 성행한 풍수·도참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태조는 이를 그의 실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정책면에 적응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훈요 10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신민에게 공개될 유훈은 아니었다.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43.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

 

고려 초기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 982년(성종 1)에 “중앙관 5품 이상은 모두 봉사(封事)를 올려 현재 정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라”는 성종의 명령이 있자, 당시 최승로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관직으로 인사권을 담당한 중견 관료로서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크게 태조 이래 경종까지 고려 왕의 정치를 평가한 <5조치적평(五祖治績評)>과 <시무28조>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시무28조>는 현재 22개조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상소의 내용을 보면, 불교에 대한 비판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광종 때 공덕제를 실시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없애자고 건의한 것(2)에서 시작하여, 과다한 보시 행위의 제한(4)과, 승려가 궁궐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총애 얻는 것을 금지하고(8),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비판했으며(20), 불보(佛寶)의 전곡(錢穀)을 고리대로 이용하는 것(6)과, 승려가 객관(客館)이나 역사(驛舍)에 유숙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하고(10), 사찰의 남설(16)과 금·은을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등 불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였다. 물론 이는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추구한 최승로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했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를 믿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 하여 불교의 개인 종교적 차원을 인정하였다. 반면에 토속신앙과 관련해서는 팔관회·연등회의 축소(13)와 음사의 제한 등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를 제한하려는 입장을 보였다(21). 다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7), 토호의 가옥 규모를 제한하거나(17), 신민(臣民)의 공복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귀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다만 국왕권의 전제화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시위군의 숫자를 감소하거나(3), 궁궐의 노비와 말의 숫자를 축소하고자 했으며(15), 국왕이 신하를 예로써 대우해야 함(14)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은 삼한공신과 세가 자손의 예우를 주장하고(19), 노비 문제에서 광종과 같은 급진적인 해결을 비판한 점(22)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최승로는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중국 문물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1). 이는 광종 때의 지나친 모화(慕華) 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려 초기 유학자에게 자주적인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북방의 오랑캐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방비해야 함을 지적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하였다(1). 결국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통해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지향하였고, 그것이 성종에 의해 수용되어 고려 전기 사회를 정비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점이 시무 28조가 갖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44. 전호(佃戶)

 

송(宋)나라 때부터 중화민국(中華民國)시대에 걸쳐, 농업경영에서 일반화한 소작농가의 통칭. 중국에서는 태고시대의 씨족제도가 무너지고, 토지사유가 생기기 시작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 소작 경영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였다. 호족(豪族)의 대토지소유, 장원(莊園) 등이 발달한 후한(後漢)·위(魏)·진(晉), 그리고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남의 땅을 소작하는 관습을 가(假), 혹은 가전(假田)이라 하였으며, 소작인을 전객(佃客)이라 했는데, 대체로 토지에 묶여 있는 가내노예(家內奴隸) 혹은 농노와 같은 존재였다. 당(唐)나라 말기에서 송나라에 걸쳐 농업생산성이 향상되고, 한편 국민의 강남(江南) 이주와 그 지방의 개간이 진척됨에 따라 지방경제가 발전하였으며, 따라서 능률적인 소작 경영이 보급되었다. 송나라 때의 전호는 지주와 소작계약을 맺고,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유민이었으나 경제적·신분적 지위는 역시 미약하여, 소작료 이외에 지주가 부당하게 노동력과 생산물을 징수하여도 이에 저항할 수 없는 예속적인 처지에 있었다. 법률적으로도 열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특히 후진 지역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전대(元代) 이후, 인구가 집중하고, 농업·상업·수공업이 한층 발달한 강남을 중심으로, 전호에 의한 소작제도는 더욱 보급되었다. 따라서 생산성의 향상, 상업화, 지주의 도시이주 등으로 전호의 지위 향상이 현저해졌으며, 그 사회적 신분도 지주와 거의 대등할 정도가 되었다. 더욱이 청(淸)나라 때부터 중화민국 시대에 걸쳐,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수익권(使用收益權)이 분리된 이중적인 소유관계가 발달함에 따라, 전호의 권리는 더욱 증대되어 영구소작권이 성립되었다.

45. 중화사상(中華思想=華夷思想)

 

중국 문화가 최고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 만방에 퍼져야 한다는 중국의 민족사상. 예로부터 한족(漢族)이 품고 있는 자기 민족 중심의 사상이다. 중화의 배후에는 항상 이적(夷狄)이라 하여 이민족을 천시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중(中)은 ‘중앙’이라는 뜻이며, 화(華)는 문화라는 뜻이다. 이 사상은 원래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론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왕자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유교에서는 왕자가 살고 있는 중국의 땅은 물론, 그 변경이나 새외(塞外)의 지역도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화’의 영향은 멀어질수록 희미해지지만, 중화문화가 미치지 않는 ‘화외(化外)’의 땅이라 하더라도 ‘왕화’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중화문화의 세계라고 한다. ‘왕화’사상은 전국시대(戰國時代:BC 5∼BC 3세기)로부터 진(秦)·한(漢)나라에 걸쳐 형성되었다. 당시의 군주는 문무(文武) 관료를 양성하였고, 내외에 대하여 형벌이나 무력으로써 권력을 강화하였으나, 유가(儒家)에 속하는 사상가들(孔子·孟子·荀子) 등은 군주의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중시하였다. 광활한 중국 땅에 안정된 정권을 확립한 한왕조(漢王朝)는 그들의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왕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뒤 청나라에 이르는 2000년 동안 황제정치체제 밑에서 유교 관료, 지식인층에 의해 정착되었다. 왕자의 덕을 중핵으로 하여 생각된 세계질서 속에서는 종족적·민족적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찍이 춘추시대(春秋時代:BC 8∼BC 5세기)까지는 융(戎)·적(狄)·만(蠻)·이(夷)라 하여 중화세계로부터 차별과 배척을 받던 이민족도 ‘왕화’를 기준으로 하면, 중화세계 속에 포함된다. 그 대신 한족(漢族)의 문화양식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의 가치는 부정되고 만다. 외국에서 통상사절이 와서 ‘조공(朝貢)’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왕화’사상은 무한하게 퍼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국경관념이나 영토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19세기 이후 이른바 열강이 비교적 용이하게 중국의 영토나 이권을 분할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측에 명확한 국경이나 영토관념이 없었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6.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설치하였던 특별기구. 무신정권이 국정을 농단(壟斷)하던 중기 이후, 고려의 전정(田政)은 무신을 배경으로 한 권문(權門) 때문에 문란해져 국가재정과 직결되는 공전(公田)은 불수조(不輸租:免稅地)의 특권을 가지는 사전(私田)으로 변화하여 농민을 귀족의 경작자로 삼는 병작반수제(竝作半數制)의 확대를 이루어 국가재정은 극도로 약화되어 갔다. 1260년 원종(元宗)이 즉위한 전후를 기해서 몽골의 강력한 내정간섭으로 왕권이 약화되자 몽골 세력을 등에 업은 권신세력도 공전을 대대적으로 사전화하고, 여기에 딸렸던 농민(良人)을 겸탈(兼奪)·천례화(賤隷化)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적 기반은 무너져 갔다. 전민변정도감은 이러한 전정의 문란을 시정·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69년(원종 10)에 처음으로 설치한 이래 88년(충렬왕 14)·91년(충렬왕 17)·1362년(공민왕 11)·81년(우왕 7)·88년(우왕 14) 등 여러 차례 설치되어 전정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개혁시도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충렬왕 때에는 막대한 토지를 겸탈한 환관(宦官) 등 왕의 측근 및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권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였다.

47. 팔부 신중(八部神衆)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天)·용(龍) 등 8종의 신장(神將). 팔부중·천룡(天龍)팔부중이라고도 한다. ① 천:천계에 거주하는 제신(諸神). 천은 삼계(三界:欲界·色界·無色界) 27천으로 구분되나, 지상의 천으로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도리천(利天:三十三天)이 최고의 천이며, 제석천(帝釋天)이 그 주인이다. ② 용:물 속에 살면서 바람과 비를 오게 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 호국의 선신(善神)으로 간주되며 팔대용신(八大龍神) 등 여러 종류가 있다. ③ 야차(夜叉):고대 인도에서는 악신으로 생각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사람을 도와 이익을 주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④ 건달바(乾婆):인도 신화에서는 천상의 신성한 물 소마(Soma)를 지키는 신. 그 소마는 신령스런 약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건달바는 훌륭한 의사이기도 하며, 향만 먹으므로 식향(食香)이라고도 한다. ⑤ 아수라(阿修羅):인도 신화에서는 다면(多面)·다비(多臂), 즉 얼굴도 많고 팔도 많은 악신으로 간주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조복(調伏)을 받아 선신의 역할을 한다. ⑥ 가루라(迦樓羅):새벽 또는 태양을 인격화한 신화적인 새로서 금시조(金翅鳥)라고도 한다. 불교 수호신이 되었다. ⑦ 긴나라(緊那羅):인간은 아니나 부처를 만날 때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 때로는 말의 머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무의 신이다. ⑧ 마후라가(摩羅迦):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음악의 신. 땅속의 모든 요귀를 쫓아내는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룡팔부중’에 관한 기록은 《법화경(法華經)》 등의 대승불교 경전에 보이며, 사천왕(四天王)의 전속으로 기술되고 있다. 경주 석굴암의 조각은 경전의 묘사와는 달라 신라시대 신앙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48. 법안종(法眼宗)

 

중국 선종(禪宗)의 한 파. 당나라 때에 크게 발전한 선종은 제6조(祖) 혜능(慧能)의 남종(南宗) 계통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되었는데, 법안종은 송(宋)나라 초기 성저우[昇州:江蘇省]의 청량원(淸凉院)에 머물며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 일족의 귀의를 받아 크게 선풍을 불러일으킨 법안선사인 문익(文益)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덕소(德韶)·도항(道恒)·의유(義柔) 등 많은 선승이 배출되어 저장[浙江]·푸젠[福建]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법안종은 공안염롱(公案拈弄)을 특색으로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제2조 덕소는 천태(天台)의 교학과 선을 융합하였으며, 제3조 연수(延壽)는 염불정토(念佛淨土)사상과 선의 일치를 주장하고 《종경록(宗鏡錄)》을 지어 제종을 체계화하였다. 강남(江南) 지방에서 화려하게 전개되었던 법안종도 북송(北宋) 때에 이르러, 운문종(雲門宗)의 대두와 그 융합적 성격으로 급격히 쇠퇴하였으나, 그들의 특징인 공안염롱은 운문종, 나아가 임제종(臨濟宗)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49. 천태종(天台宗)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 )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 후난성[湖南省] 남부 화룽현[華容縣] 출신의 지의는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河南省 남단)에서 혜사(慧思)에게 사사하여 선관(禪觀)을 닦고 《법화경(法華經)》의 진수를 터득한 뒤, 진릉[金陵:南京]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많은 귀의자를 얻었지만, 575년 38세 때 저장성[浙江省]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은둔하여 사색과 실수(實修)를 닦았다. 이것이 천태종 성립의 단서가 되었으며, 지의는 《법화경》에 따라 전불교를 체계화한 《법화현의(法華玄義)》, 천태의 관법(觀法)인 지관(止觀)의 실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마하지관(摩訶止觀)》 《법화경》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의 이른바 <법화삼대부경(三大部經)>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중국·한국·일본을 일관하는 천태교학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도 전래의 불교를 중국 불교로 재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문하인 장안(章安) 관정(灌頂)을 필두로 지위(智威)·혜위(慧威)·현명(玄明)을 거쳐 제6조 담연(湛然)으로 교학이 전승되었다. 그들은 지의의 삼대부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하여 《석첨(釋籤)》 《묘락(妙樂)》 《보행(輔行)》을 저술, 천태 교의를 선양하였고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까지 전개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쇠했던 불교가 북송 때에 부흥하여 12조인 의적(義寂)과 그의 동문 지인(志因)의 양계통에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는데, 전자를 산가파(山家派), 후자를 산외파(山外派)라고 한다. 의적의 제자 의통(義通), 그 문하 지례(知禮)의 계통이 송대에 융성하여 천태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남송(南宋) 대에는 선월(善月)·지반(志盤) 등이 강학에 뛰어났고, 원대(元代)에는 불교 전반의 교학적인 쇠퇴와 함께 쇠하였지만, 명대(明代)에 다시 부흥하여 선(禪)과 정토(淨土)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명 말기에는 지욱(智旭)이 교학을 진흥시켰다. 지의는 《법화경》의 정신을 근거로 전불교 경전에 의의를 부여하여 오시(五時:華嚴時·鹿苑時·方等時·般若時·法華涅槃時)의 교판, 화의사교(化儀四敎:頓敎·漸敎·密敎·不定敎) 및 화법사교(化法四敎:藏敎·通敎·別敎·圓敎)로 구분하였으며, 공(空)·가(假)·중(中)의 삼관(三觀)을 교의의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일상심(日常心)의 일념 가운데 지옥으로부터 부처의 경지가 내재한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사상과 일체가 원융(圓融)한 실상(實相)을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천태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다. 신라의 현광(玄光)은 지의에게 법을 전한 혜사(慧思)에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으며, 신라의 연광(緣光), 고구려의 파약(波若) 등은 직접 지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고려 제관(諦觀:960년 중국에 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는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하였다. 의천의 문하에 교웅(敎雄)·계응(戒膺)·혜소(慧素) 등이 유명하며, 그 후에도 덕소(德素)·요세(了世)·천인(天因) 등이 교세를 떨쳤다. 이와 같이 천태종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크게 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척불정책으로 쇠퇴하였다.
50. 임제종(臨濟宗)
중국 불교 선종(禪宗) 5가(家)의 한 파.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臨濟) 의현(義玄)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의현은 황벽의 법통을 잇고, 당나라 선종(宣宗) 때 진주(鎭州)의 임제원(臨濟院)에 있던 승려로, 그의 선풍(禪風)은 특별히 준엄한 수단으로 학인들을 제접(提接)하여 종풍(宗風)을 떨쳤는데, 그의 6대 법손은 석상(石霜) 초원(楚圓)이 있고, 그 밑의 황룡(黃龍) 혜남(慧南)과 양기(楊岐) 방회(方會)가 두 파로 갈라졌다. 그들 후대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송나라 때는 그의 종풍이 더욱 번창하여, 원(元)·명(明)나라에까지 상당한 세력을 뻗쳤다. 한국의 선종은 대개가 이 임제종풍이었는데, 태고(太古) 보우(普愚)와 나옹(懶翁) 혜근(惠勤) 이후부터는 확실하게 임제종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51. 백련사(白蓮社)

 

4세기 말∼5세기 초 중국에서 결성된 불교의 비밀결사. 백련화사(白蓮華社) 또는 연사(蓮社), 또 채식주의여서 백련채(白蓮菜)라고도 하였다. 진(晉)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332~414)가 여산(廬山)의 호계(虎溪)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혜영(慧永)·혜지(慧持)·도생(道生) 등의 명덕(名德)을 비롯하여 유유민(劉遺民)·종병(宗炳)·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치소(緇素:僧俗) 123명을 모아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 앞에서 맹세를 세우고 서방(西方)의 정업(淨業)을 닦게 하였는데, 그 절에 백련을 많이 심었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승사략(僧史略)》 하권에 보면, “진송(晉宋) 때 여산의 혜원법사가 심양(陽)에 화행(化行)함에 고사(高士)와 일인(逸人)이 동림(東林)에 잇따랐다. 모두 향화(香花)를 바치기를 원하였으므로 뇌차종과 종병·장전(張詮)·유유민·주속지(周續之) 등이 함께 백련화사를 만들어 미타상(彌陀像)을 세우고 안양국(安養國)에 왕생(往生)하기를 구하니 연사(蓮社)라 하여 사(社)의 명칭의 시초가 된다.”고 하였다.

52. 유서(類書)

 

중국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들을 내용이나 항목별로 분류 편찬하여 알아보기 쉽도록 엮은 책의 총칭. 지금의 백과사전과 비슷한 것이다.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편집한 《숭문총목(崇文總目)》과 《신당서(新唐書)》의 <예문지(藝文志)> 등을 유서(類書)라 부르기 시작하여 그 호칭이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것이다. 가장 오래 된 유서는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칙편(勅編)인 《황람(皇覽)》 120권이 있으며, 그 후 양(梁)나라의 《화림편로(華林遍路)》 620권, 이어서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 등이 편집한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 360권이 있으나, 모두 현존하지 않고 다만 《황람》과 《수문전어람》의 극히 일부분만 전해질 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유서 중에서 최초의 것은 당나라의 우세남(虞世南)이 수(隋)나라에서 벼슬할 때 엮은 《북당서초(北堂書抄)》 160권이 있으며, 구양순(歐陽詢) 등이 칙명으로 편집한 《예문유취(禮文類聚)》 100권은 당대(唐代) 유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또, 유서 중에서 제1호로 손꼽히는 송(宋)나라 이방(李昉) 편집의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은 55개 부문으로 나누어 인용서(引用書)만도 1,690종에 달하고, 처음에는 《태평편류(太平編類)》라 이름지었던 것을 태종(太宗)이 1년을 걸려 이것을 읽었다고 하여 《태평어람》으로 개제(改題)한 것이다. 이 밖에도 서견(徐堅)의 《초학기(初學記)》 30권, 백거이(白居易)의 《백씨육첩(白氏六帖)》 30권, 진요문(陳耀文)의 《천중기(天中記)》 60권, 왕응린(王應麟)의 《옥해(玉海)》 200권, 《연감유함(淵鑑類函)》 450권, 《패문운부(佩文韻府)》 106권 등 수십 종류의 유서가 있다. 유서의 양부(良否)는 그 인용방법, 원전(原典)의 양부, 편집의 솜씨 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나, 유서의 성질상으로 볼 때에는 편의성(便宜性)이라는 점이 중요시되기도 한다. 또, 때로는 먼저 발간된 유서 등을 습용(襲用)하기 때문에 많은 과오를 범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수록된 원전이 나중에 일실(逸失)되었을 경우에는 그 책은 유서에서만 볼 수 있게 되므로 귀중한 의미가 있다.

53.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 또는 그 자리. 일찍이 한(漢)나라에서 황제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관례가 생겼으며, 당(唐)나라에서는 한림원(翰林院)에 이를 전담하는 관직을 두면서 어전강의가 점차 제도화되었다. 특히, 북송(北宋)에서는 경연관(經筵官)의 직제가 더욱 정비되고 강의교재도 체계화되었으며, 강의일정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는 경연이 내용 없는 형식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에 예종이 이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무신정권 때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서는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경연정치’가 나타났으며, 경연은 가장 중요한 정치협의기구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실권자인 쇼군[將軍]을 대상으로 유교 경서를 강의하는 관례가 있었으며,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는 천황에게 강의하는 의식이 생겼다. 경연관의 직제는 일단 송대에 정비되었고, 원대 이후에 약간의 변화를 거쳤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를 더욱 보완하였다. 경연관은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관리 약 30명, 즉 3정승(1품)을 포함한 1~2품 대신들과 승정원의 6승지(정3품) 및 홍문관(처음에는 집현전)의 부제학(정3품) 이하 정9품에 이르는 관원 1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강의는 주로 홍문관원이 맡았다. 교재는 4서 5경과 역사 및 성리학 서적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강의하였다. 4서 5경의 경우에는 주석집(註釋集)을 정독하였고, 역사서는 통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정은 매일 아침에 조강(朝講)을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포함하여, 세 번 강의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강에는 대신 2~3명, 승지 1명, 홍문관원 2명(이상 경연관), 사헌부와 사간원 각 1명, 사관(史官)이 교대로 참석하였으며, 주강과 석강에는 승지·홍문관원·사관만이 참석하였고, 왕은 매번 참석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연은 교육제도일 뿐만 아니라, 정책협의기구로서의 기능도 컸다. 강의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정치 현안들을 협의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조강에는 국왕을 비롯하여 의정부·육조·승정원·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 권력의 핵심부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정책을 협의하기에 편리하였다. 본래 조선왕조는 군주와 신하들이 연석회의가 따로 없었으며, 주요 관청 사이의 정책협의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경연은 중요한 정책협의기구로 발전하였으며, 왕의 일상생활 및 정치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의 이 특이한 정치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축소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54. 소격서(昭格署)

 

조선시대에 도교(道敎)의 보존과 도교 의식(儀式)을 위하여 설치한 예조(禮曹)의 속아문(屬衙門). 도교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구상화(具像化)한 상청(上淸)·태청(太淸)·옥청(玉淸) 등을 위하여 삼청동(三淸洞)에 성제단(星祭壇)을 설치하고 초제(醮祭) 지내는 일을 맡아보았다. 태종 이전에는 소격전(昭格殿)이라 하여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1466년(세조 12) 관제개편 때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관원으로는 영(令:종5품) 1명, 별제(別提:정6품) 2명, 참봉(종9품) 2명과 잡직(雜職)으로 15명의 도류(道流)를 두었다. 도류는 도사(道士)라고도 하며 4품으로 거관(去官)되었는데, 이들은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얻은 사람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 후 도교를 배척하는 유신(儒臣)들의 조직적인 운동과 조광조(趙光祖)의 끈질긴 폐지 주장에 따라 1518년(중종 13)에 폐지되었고, 이 때 제복(祭服)·제기(祭器)·신위(神位)까지 땅에 파묻었다. 25년 복설(復設)되었으나, 92년(선조 25) 임진왜란 뒤 다시 폐지되었다. 소격서는 후한(後漢) 말 장릉(張陵)이 발전시킨 도교가 고려에 전래되어 예종이 도교의 기도 대상인 천존상(天尊像)을 옥촉정(玉燭亭)에 모셔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신격전(神格殿)이라 하였다. 삼청동의 제단에는 삼청전(三淸殿)·태일전(太一殿)·직숙전(直宿殿)·십일요전(十一曜殿)을 두어 영험(靈驗)에 따라 각 전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는데, 삼청전에서는 옥황상제·태상노군(太上老君)·보화천존(普化天尊) 등 남자상(男子像)을 모셨고, 태일전에는 여자상을 모셔 칠성제수(七星諸宿)를 제사하였으며 그 밖의 전(殿)에서는 사해용왕(四海龍王)·명부십왕(冥府十王) 등을 제사하였다. 여기에 딸린 도류들은 백의(白衣)와 오건(烏巾)을 착용하여 영보경(靈寶經) 등 경문(經文)을 외우며 치성을 드렸는데, 축원하는 글을 푸른 종이에 써서 불사르는 등 의식의 절차는 엄숙하고 복잡하였다.

55. 유향소(留鄕所)

 

고려 말~조선시대 지방 군(郡)·현(縣)의 수령(守令)을 보좌한 자문기관(諮問機關). 수령의 아문(衙門)에 다음가는 중요한 관아라 하여 이아(貳衙)라고 불렀으며, 향소(鄕所)·향소청(鄕所廳)이라고도 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의 사심관(事審官)에서 유래된 것으로, 초기에는 덕망이 높고 문벌이 좋은 사람을 사심관으로 삼다가 말기에는 전함(前銜:전직) 품관(品官)들을 사심관에 임명하면서 유향품관(留鄕品官)·한량관(閑良官)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들 유향품관·한량관들이 자의적(自意的)으로 유향소를 만들어 지방자치의 기능을 맡았다. 유향소는 벼슬에서 은퇴한 이들 지방 품관을 우두머리로 뽑아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鄕吏)의 악폐를 막는 등 민간자치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태종 초에 와서 차차 지방 수령과 대립하여 중앙집권을 저해하는 성향을 띠게 되어 1406년(태종 6)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그 폐지가 불가능해지자 28년(세종 10)에는 유향소의 설치를 다시 명하여 각 유향소의 품관 정원을 정하고 이를 감독하는 경재소(京在所) 제도를 강화하였으며, 수령의 비행(非行) 여부를 논할 수 없다는 법이 마련됨에 따라 유향소의 자치적 성격은 크게 줄어 들어 품관들은 위축된 지위의 보존을 위해 수령들과 타협 결탁하기도 하였다. 유향소는 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그들의 일부가 이에 가담함에 따라 다시 폐지되었는데, 이때 폐지된 이유 중의 하나는 유향소가 수령의 편에 서서 백성을 침학(侵虐)함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뿌리를 내린 유향소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꾸준한 복설(復設)운동의 결과 88년(성종 19)에 다시 부활되어 향임(鄕任), 혹은 감관(監官)·향정(鄕正)의 임원을 두게 되었는데, 이들 임원은 주(州)·부(府)에 4,5명, 군에 3명, 현에 2명의 정원을 두었으나 후대에는 창감(倉監)·고감(庫監) 등의 직책이 생겨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56. 사창(社倉)

 

조선시대 각 지방의 사(社:행정단위로서 현재의 면)에 두었던 곡물 대여기관(穀物貸與機關). 의창(義倉)과 같은 기관이나, 의창은 각 읍에서 관장하는 국영이며 사창은 민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두고 흉작에 대비하는 제도로서 출납도 민간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나 모자라는 일부의 원곡을 의창에서 배당하여 주었기 때문에 관의 감독을 받았다. 사창의 운영은 ① 묵은 곡식을 대출하고, 무이식으로 신곡을 받으며, ②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아들이고, ③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아들이는 등 곡식으로 빈민을 구호하였다. 사창제도는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의 제창으로 실시되었다. 조선에서는 1436년(세종 18) 충청감사 정인지(鄭麟趾)가 의창의 원곡(元穀) 감축과 그 보충으로 인한 군자곡(軍資穀)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함께 민영의 사창을 설치할 것을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39년 호조참판 이진(李)이 사창을 설치하여 군자곡 대출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사창은 민간의 곡식으로 민간이 관리하기 때문에 사창의 취식(取息)은 국가와 관계 없는 농민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정책 입안자(立案者)의 목적은 사창의 취식을 통하여 의창 원곡의 부족으로 인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려는 데 있었다. 44년 7월 의정부에서 사창법을 건의하여 집현전에서 연구하게 하였으나 반대의견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48년 대구군지사(大邱郡知事) 이보흠(李甫欽)에게 명하여 대구군에서 사창제도를 시험하게 하여, 이보흠은 군내에 13사창을 설치해서 200섬의 본곡을 의창곡으로 배당하여 주고 1섬(15말)의 대출에 3말의 이식을 부가하게 하였으며, 취식에 성적이 좋은 사장(社長:사창의 책임자)에게는 상직(賞職)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51년(문종 1) 경상도관찰사 이인손(李仁孫)에게 명하여 금산(金山)·거창(居昌)·영천(永川)·경산(慶山)·인동(仁同)·신녕(新寧)·산음(山陰)·지례(知禮)·하양(河陽)·군위(軍威) 등에 사창을 시험하게 하였다. 대개 사창마다 원곡 200섬을 지급하여 1년간의 1섬 대출에 3말의 이식을 부가하지만 흉년에는 이식을 면제하였고, 이식이 500섬에 이르면 원곡 200섬은 의창에 반납하였다. 사창을 관장하던 사장은 9품산직(九品散職)에 임명하며, 이로부터 500섬 증가 때마다 일자(一資)를 올려 주기로 하였다. 52년 대구군지사로부터 장령(掌令:종4품 사헌부의 관직)으로 승진된 이보흠은 48∼51년 3년간 대구의 사창곡을 연산하여 이식이 모두 2,700여 섬이 되고, 각 사창은 모두 원곡과 이식을 합하여 400여 섬이 저축되어, 앞으로 5,6년을 계속하면 사창의 저축이 1,000여 석에 이를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57년(세조 3)경에는 군자곡의 대여에도 1섬에 4말의 이식을 부가하였고, 59년에는 군자곡의 이식도 1섬에 3말씩 부가하게 되어 사창의 이식과 같아졌다. 따라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사창의 취식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 사창 폐지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창은 이미 원래의 기능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그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 70년(성종 1) 호조의 제의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적인 규모에서 정부의 지원 아래 시행되는 사창법의 혁파를 의미할 뿐, 지방 양반의 사창 실시는 있을 수 있었다. 1684년(숙종 10) 예조판서 이단하(李端夏)가 만들어 바친 7개조의 사창 절목(節目)을 반하(頒下)하고 그 실시를 권장하였으나 신통치 않았고, 1797년 북관(北關)에 사창을 실시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윤선거(尹宣擧)·이이(李珥)는 각기 고향에, 송시열(宋時烈)은 회덕(懷德)·청주(淸州) 두 곳에 사창을 실시하는 등 사적(私的) 사창도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1867년(고종 4) 호조판서 김병국(金炳國)의 건의에 따라 폐단이 많은 환자(還子)제도를 폐지하고 절목을 마련, 사창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각 면에 사창을 설치, 근실하고 부유한 자를 백성으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사창을 관장케 하고, 관의 관여 없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며 이식은 1할씩으로 하여 대전납(代錢納)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失權)하자 사창법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57. 향음례(鄕飮禮)

 

매년 음력 10월에 개성부·제도(諸道)·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길일을 택하여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술을 마시며 잔치한 예절. 고을의 관사(官司)가 주인이 되어 연고(年高)하고 유덕(有德)하며 재행(才行)이 있는 사람을 주빈(主賓), 그 밖의 유생을 빈(賓)으로 하여 서로 모여 읍양(揖讓)하는 예절을 지키며 주연을 함께 하고 계(戒)를 고한 예절이다. 본래 중국 주대(周代)에 제후(諸侯)의 향대부(鄕大夫)가 고을의 인재를 뽑아 조정에 천거할 때, 출향에 앞서 그들을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베푼 전송(餞送)의 의례가 전래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1136년(고려 인종 14) 과거제도를 정비하면서 제주(諸州)의 공사(貢士)를 중앙으로 보낼 때 향음주례를 행하도록 규정한 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오례의(五禮儀)》의 상정(詳定)과 더불어 일반화되었다.

58. 과전법(科田法)

 

고려의 문란한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1391년(공양왕 3)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으로 삼은 토지제도. 고려의 토지제도는 경종·목종·문종 때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문종 때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의 제정 실시 후 사전의 확대와 과점(過占)의 모순을 자아냈다. 더욱이 무신란(武臣亂) 이후 권문세족들의 농장확대와 사원전(寺院田)의 팽창으로 국가경제의 파탄과 농민들의 생활고는 극심하였고, 관료들에게 분급할 전지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종 때 급전도감(給田都監), 충선왕 때 전민추쇄도감(田民推刷都監),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고 농장 몰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근거하에서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사전개혁을 주장하였고,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전제개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온건한 개혁파 조민수(曺敏修)·이색(李穡) 등의 반대가 있자 이들을 축출하고, 우왕(禑王)의 아들 창왕(昌王)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90년(공양왕 2)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91년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개혁은 귀족의 경제적 파괴이며 신흥 사대부에 의한 새 왕조인 조선조(朝鮮朝)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이다. 당시의 토지결수(土地結數)를 보면, 경기도의 실전(實田) 13만 1755결(結), 황원전(荒遠田) 8,387결, 과전·공신전·별사전(別賜田)·능침전(陵寢田)과 경기 내의 관아(官衙)에 속하는 공해전(公田)으로 하고, 지방의 실전 49만 1342결, 황원전 16만 6643결은 공전으로 하여 군전(軍田)으로 삼았다. 과전법의 특색을 보면 개혁의 원래 취지는 전시과의 기본원칙에 환원함으로써 관료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은 국유(國有)가 원칙이며,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며,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직산자(職散者)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고, 사전인 경우는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전시과와는 달리 시지(柴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전호(佃戶)가 전주(田主)에게 50 %의 조(租)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전·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과전으로 지급될 땅 1/3을 하삼도(下三道:충청·전라·경상도)로 이급(移給)하였다. 세원(稅源)의 감소와 식량부족으로 31년(세종 13)에는 하삼도 사전을 다시 경기로 이환(移還)하게 되었고, 34년에는 공해전을 축소 정리하여 과전을 보충하였으며, 43년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세(田稅)를 개혁하여 세율을 낮추고, 20년마다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양안(量案:토지대장)을 작성하고, 호적을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곧 과전법의 폐단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현직관료에 한하여 최고 110결~10결까지 과전을 지급하였다. 이 제도는 관료의 퇴직 후 또는 사후(死後)에 대하여는 아무 보장이 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재직 중의 수탈(收奪)이 심하였다.

 

<참조 1>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
조선 전기 1443년(세종 25)에 전세(田稅)의 개혁을 위해 설치한 임시관청. 이보다 앞서 1436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두어 공법(貢法)의 제정 및 그 내용을 논의하도록 하였으나,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의정부와 호조에서 43년 11월 토지의 등급에 상관없이 단위면적을 일정하게 하는 경묘법(頃畝法), 토지의 등급을 다섯으로 나누는 5등전품제(五等田品制), 해마다 작황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눠 전세를 차등 징수하는 연분9등제(年分九等制) 등의 골격을 갖춘 전세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이 안이 마련된 직후에 구체적인 시행요목을 정하고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 등급을 책정하는 일을 맡을 임시기구로서 설치하여, 진양대군(晋陽大君)을 도제조에, 의정부 좌찬성 하연(河演), 호조판서 박종우(朴從愚), 중추원지사 정인지(鄭麟趾)를 제조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문물법제(文物法制)에 밝고, 그 동안의 논의과정에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중신이었다. 앞서 마련된 세제안을 몇몇 지역에 적용해 본 후 44년 6월에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는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각 등급의 면적을 정하는 결부제(結負制)를 채택한다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의정부·육조의 논의를 거쳐, 여기에 앞서 마련된 연분9등법을 아울러 공법으로 확정하였다. 청안(淸安)·비인(庇仁)·광양 등 6개 고을에 시험 적용한 후, 50년 전라도부터 시작하여 전국에 걸쳐 시행하였다. 기록상으로는 62년(세조 8) 3월 이후의 활동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참조 2> 직전법(職田法)
조선 전기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收租地)를 분급한 토지제도. 과전(科田)은 경기도 내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하였기 때문에 관리 수의 증가와 과전의 세습, 토지의 한정 등으로 인하여 양반관료층 내부에서 점차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또한 토지 소유권자인 전객(佃客)의 수조권자인 전주(田主)에 대한 항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1466년(세조 12) 현직·전직 관료를 막론하고 지급하던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직전(職田)이라는 명목으로 현직에 있는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였다. 이때 전직관료만 토지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관료의 미망인이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도 폐지하였다.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리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일 뿐만 아니라, 세조의 집권을 시인하고 그 아래에서 관리로서 봉사하는 사람에게만 생활의 기반을 보장해주는 정치적인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또한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성장, 농민경제의 발달에 따라 토지의 소유자인 전객의 권리와 사적 소유권이 안정되어 가는 추세를 반영하여, 전주의 직접적인 전객 지배를 차단하고 국가가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간 것이었다. 이는 곧 통일신라시대 이래 지속된 봉건적 경제제도였던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 점유관계가 폐기되고 토지 소유권에 기초한 농업생산관계가 점차 부상하는 새로운 발전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제도의 실시로 퇴직 혹은 사망한 뒤의 경제적 보장이 없어진 관료들이 재직 중에 전객에게서 전조(田租) 및 볏짚을 규정 이상으로 징수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국가에서는 수조율과 볏짚의 징수량을 규정하고, 전주인 관리들의 직접적인 답험손실(踏驗損實)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의 수탈은 계속되어 전객농민의 항거도 그만큼 심각해져, 1470년(성종 1) 직전세(職田稅)로 전환하고,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수조하여 관료나 공신에게 해당액을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관료의 직접적인 수조권한이 폐지되어 국가에서 토지 및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편 15세기 말 이후 직전의 부족과 재정의 고갈이 만성화되면서 직전세의 일부 혹은 전부를 국가재정으로 전용하는 정책이 자주 실시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직전세의 지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급액도 줄어들고 연분(年分)도 거의 하하년(下下年)으로 고정되어 직전의 경제적 의미는 미미해졌다. 반면에 사적 토지 소유권은 더욱 성장하여 관리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점차 그들의 주된 경제기반으로 삼았다. 16세기 중엽 거듭되는 흉년과 전란으로 재정이 더욱 악화된 것을 계기로 1556년(명종 11)에 직전 분급의 중단을 공포한 후 이것이 장기간 계속됨으로써 직전은 유명무실해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직전의 소멸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 관계의 해체와 동시에 사적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지배 관계, 지주전호제의 본격적인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59. 육상산(陸象山, 1139∼1192)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호 존재(存齋)·상산(象山). 시호 문안(文安). 이름 구연(九淵). 저장성[浙江省] 출생.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관직에 올랐으나 곧 물러나 귀계(貴溪:江西省廣信府)의 상산에 강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당시 유일한 석학이었던 주자(朱子)와 대립하여 중국 전체를 양분(兩分)하는 학문적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사상적 계보로는 모두 정호(程顥:明道)·정이(程:伊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다만 주자가 정이천의 학통에 의한 도문학(道問學:問學第一)을 보다 존중한 데 반하여, 상산은 정명도의 존덕성(尊德性:德性第一)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성즉이설(性卽理說)을 제창하였고, 상산은 치지(致知)를 주로 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창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유심론(客觀的唯心論)과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으로 불린다. 주·육(朱陸)의 교유는 1175년 여조겸(呂祖謙)의 권고로 아호사(鵝湖寺:江西省 鉛山縣)에서 처음 이루어져 평소의 강학(講學) 요점에 대한 논변(論辨)을 벌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여 도의적 교유는 변하지 않았다. 상산의 학문은 그의 제자 양자호(楊慈湖) 등에 의하여 장시[江西]·저장[浙江] 각지에서 계승·성행하였다. 한때 주자학에 의하여 압도되기도 하였으나,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에 이르러 다시 계승·발전하였다. 주요저서에 어록(語錄)·서간(書簡)·문집(文集)을 수록한 《상산선생 전집》(36권)이 있다.

60. 삼종 칠거(三從七去)

 

중국 고대 봉건사회에서 여자의 3가지 복종의 의무와 일곱 가지 버림받을 조건. 《의례(儀禮)》 <상복례(喪服禮)>에 보면, 여자에게는 삼종의 도리가 있는데 시집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시집 가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복종한다고 했다. 《주역(周易)》 64괘(卦)의 해설에 의하면, 건(乾)은 남자를 상징하며 건강(健剛)을 덕으로 하여 여자를 지배하고, 곤(坤)은 여자를 상징하며 유순(柔順)을 덕으로 하여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이것으로 남녀의 지위(地位)를 정립하였다. 칠거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아들을 못 낳는 것, 음란한 것, 투기(妬忌)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 등으로 되었다. 다만 《소학(小學)》 명륜편(明倫篇) <칠거>의 집해(集解)에, 아들이 없다거나 나쁜 병이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버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61. 칠출 삼불거(七出三不去)

 

7가지 내쫓을 이유가 있는 아내라도 내쫓지 못할 3가지 경우. 칠거삼불출이라고도 한다. 동양의 율령법(律令法)에서 남편의 일방적 의사표시로써 아내와 이혼하는 일을 기처(棄妻)라 하고, 기처의 이유가 되는 7가지 사항을 칠출 또는 칠거(七去)라 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원인이 있어도 이혼할 수 없는 3가지 경우를 삼불거 또는 삼불출(三不出)이라 하였다. 칠출은 《의례(儀禮)》 《대대례(大戴禮)》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에 보편적 원리로서 채택되어 있는 성훈(聖訓)이다. 《대대례》의 본명편(本命篇)에, “부인에게는 7가지 내쫓을 사항이 있으니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고, 아들이 없으면 내쫓고, 음탕하면 내쫓고, 질투하면 내쫓고, 나쁜 병이 있으면 내쫓고, 말이 많으면 내쫓으며, 도둑질을 하면 내쫓는다. 또 3가지 내쫓지 못할 경우가 있으니 보내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면 내쫓지 못하고, 함께 부모의 3년상을 치렀으면 내쫓지 못하며, 전에 가난하였다가 뒤에 부자가 되었으면 내쫓지 못한다(婦有七去, 不順舅姑去, 無子去, 淫去, 妬去, 有惡疾去, 口多言去, 竊盜去. 又有三不去, 有所取無所歸不去, 與共更三年喪不去, 前貧賤後富貴不去)”고 하였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당률(唐律)이 법제화하여 호혼율(戶婚律)에서, “모든 아내에 칠출 및 의절(義絶)할 죄상이 없는데도 이를 내쫓는 자는 1년 6월의 도형(徒刑)에 처하고, 비록 칠출을 범하였더라도 삼불거가 있는데도 이를 내쫓는 자는 곤장 100대를 때린 뒤 다시 함께 살게 한다. 만약 나쁜 병이 있거나 간통한 자에게는 이 율을 적용하지 아니한다(諸妻無七出及義絶之狀, 而出之者, 徒一年半, 雖犯七出, 有三不去, 而出之者, 杖一百追還合. 若犯惡疾及姦者, 不用此律)” 하였다. 명률(明律)도 이 당률을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모두 아내를 보호하기 위하여 규정한 것이었다. 한국에도 이 규정이 계수되었으며, 본조에 해당하는 죄를 소박정처죄(疏薄正妻罪)로 하여 비첩(婢妾)이나 기첩(妓妾)과 애욕에 빠진 자를 처벌한 실례가 많았다. 칠출삼불거는 조선 후기까지 이혼의 원인이었으나, 오늘날의 민법제도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않으며, 협의상 이혼과 재판상 이혼만이 가능하다.

62. 향약(鄕約)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일향약속(一鄕約束)·향립약조(鄕立約條)·향헌(鄕憲)·면약(面約)·동약(洞約)·동계(洞契)·동규(洞規)·촌약(村約)·촌계(村契)·이약(里約)·이사계(里社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다.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를 단위로 시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보통 몇 개의 자연촌을 합친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목천동약(木川洞約)과 영조 때의 퇴계학파 최흥원(崔興遠)이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증보하여 사용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 유명하다. 또한 1571년(선조 4)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西原鄕約)》과 이를 자신이 수정 증보하여 77년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18세기 중엽 이후 재지사족을 매개로 하던 기존의 수취체제가 수령에 의한 향약의 하부구조로서 공동납체계 속에 포함되면서 그 성격이 변모되어갔고, 동계운영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층민의 요구와 입장이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층민이 참여하기를 꺼리거나 하계안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사족이 주도하는 동약에서의 운영권은 기층민간의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류(村契類) 조직과 마찰을 일으키고 점차 기층민의 입장이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동학(東學) 등 주자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위정척사운동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측에서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63. 고증학(考證學)

 

중국의 명(明)말~청(淸)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이 학풍이 일어난 배경은 현실 문제는 접어두고 이기(理氣)니 심성(心性)이니 하는 공허한 형이상학, 이른바 송학(宋學)에 대한 반발과 반청(反淸)감정, 시대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송학이란 이름에 맞서서 이를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렀다. 학문 방법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을 5가지로 나누어 ① 훈고학(訓學) ② 음운학 ③ 금석학 ④ 잡가 ⑤ 교감학(校勘學)으로 분류한다. 이 학풍이 중국에 끼친 영향을 보면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하여 정치·민생(民生)이 우선이란 이론을 제공했고 학문 연구는 정확한 음운과 뜻[訓], 역사적 고증이 있어야 하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학자는 염약거(閻若Q)·호위(胡謂)·모기령(毛奇齡)·만사대(萬斯大)·만사동(萬斯同) 등이다. 이 학파가 극성기에 오파(吳派)와 환파(派)로 분파하였는데 오파에서는 혜동(惠棟)이 영수가 되고 환파에서는 대진(戴震)이 영수였는데 오파는 순수한 한학(漢學)을, 환파는 음운·훈고·수학·천문학·지리학·수리학(水利學)을 연구했다. 대진의 제자엔 단옥재(段玉裁)와 왕염손(王念孫) 부자(父子)가 있다. 이 고증학은 영·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김정호(金正浩)의 《마과회통(麻科會通)》,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64. 예송(禮訟)

 

조선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복상(服喪)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 차례의 사건. 궁중의례를 둘러싼 논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현종대 두 차례의 예송의 배경은, 각 학파 내지 정파 사이에 있던 예학적(禮學的) 기반의 차이였는데, 이후 정국의 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사건이다. 이는 17세기의 조선 사회에서 이념적 규정성이 정치적·사상적으로 큰 변수로 작용하였음을 뜻한다. 1차 예송(기해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趙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 사회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禮論)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는 3년상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통은 인조-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적장자가 유고시 적장손)가 잇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여기에 1차 예송의 예론적 배경이 있다. 즉, 왕가라는 특수층의 의례가 종법(宗法)에 우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었다.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를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기왕의 적통이 끊어지고 새로운 적통에 의해 왕위가 이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왕위계승이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종법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경우, 효종은 왕통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할 일이었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에서 1년상을 주장한 데 반하여 남인 계열에서는 윤휴(尹)·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이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나옴으로써 1차 예송이 본격화되었다. 남인측의 주장은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논리는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남인측의 주장은 “왕자예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효종은 당연히 장자가 되는 것이며,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3년의 복을 입어야 할 것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왕실전례에 대한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단순한 예론상의 논란이 아니라, 그들이 우주만물의 원리로 인정한 종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으며, 이는 현실적으로는 권력구조와 연계된 견해 차이였으므로 민감한 반응으로 대립한 것이다. 1차 예송은 예론상으로는 종통문제를 변별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었으나, 결국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국제기년복)에 의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서인의 예론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인정권은 현종 연간에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법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 문제는 결국 2차 예송의 빌미가 되었다. 2차 예송(갑인예송)은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 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됨으로써 효종의 장자·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올랐다. 즉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부이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 복제는 대공복(大功服: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꼬리표를 붙여서 대공복으로 복제를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계의 서인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결국에는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계기를 이루었다. 예송은 사상적으로 서인과 남인 사이의 예학적 전통의 차이가 내재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정국의 변동을 가져오는 등, 예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건이다. 2차 예송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서인 송시열 계열과 비송시열 계열, 남인세력, 왕실의 입장 등 다양한 변수가 게재되는 등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었지만, 여전히 1차 예송에서의 예학상의 문제가 논쟁의 본질을 이룬다. 이것은 곧 17세기의 경우 서인과 남인 내에서 있어온 예학적·학문적 특성이 현실적인 권력상의 복잡한 여러 변수에도 불구하고 예송의 전개과정에서 저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인은 김장생(金長生)으로부터 이어지는 예학적 전통 속에서 주자학을 절대 신봉하는 반면, 근기남인은 원시유학인 육경(六經)을 중시하면서 고학(古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가졌으며, 이러한 경향성은 권력구조(權力構造)의 측면에서도 각각 신권 중심, 왕권 중심의 두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65.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儒敎)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 원래 유교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당쟁이 격렬해지면서부터 그 뜻이 매우 배타적(排他的)이 되어 유교의 교리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 그 교리의 해석을 주자(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육상산(陸象山)·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 같은 것도 조선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숙종(肅宗) 때의 대학자인 윤휴(尹)가 유교 경전(經典)을 주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하여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좋은 예이다.

66. 양명학(陽明學)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송대에 확립된 정주이학(程朱理學)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이학(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원리와 원리 실현의 소재[氣]를 엄격히 구별하여,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수정파(修正派)·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67. 양전(量田)

 

고려·조선 시대 토지의 실제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측량 제도. 전국의 전결수(田結數)를 정확히 파악하고, 양안(量案:토지대장)에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탈세를 방지하며, 토지경작 상황의 변동을 조사하여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田稅)의 징수에 충실을 기함에 실시 목적을 두었다. 《경국대전》에는 모든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① 정전(正田:항상 경작하는 토지), ② 속전(續田:땅이 메말라 계속 농사짓기 어려워 경작할 때만 과세하는 토지), ③ 강등전(降等田:토질이 점점 떨어져 본래의 田品, 즉 등급을 유지하지 못하여 세율을 감해야 하는 토지), ④ 강속전(降續田:강등을 하고도 농사짓지 못하여 경작한 때만 과세하는 토지), ⑤ 가경전(加耕田:새로 개간하여 세율도 새로 정하여야 하는 토지), ⑥ 화전(火田:나무를 불태워 경작하는 토지로, 경작지에 포함시키지 않는 토지)으로 구분하여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 그 결과를 양안에 기록하며, 양전을 할 때는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령·실무자의 위법사례를 적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력·경비 등이 막대하게 소요되는 대사업이라 규정대로는 실시하지 못하여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더 지난 뒤에 실시하기도 하여,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3) 전제개혁(田制改革) 때와 조선의 태종·세종 때에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고, 성종 때 하삼도(下三道:경상·전라·충청)에 부분적으로 실시한 것과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한 국토를 정리하기 위하여 지역별로 차례로 시행된 일이 있다. 양전할 때의 측량 요령으로는 토지의 형태가 뚜렷하지 못한 곳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만들며, 경사진 곳은 별도로 토지의 형태를 만들어서 측량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쓰이는 척도(尺度:量田尺)도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달라 고려 때는 지(指:뼘)였으나, 조선에서는 세종 때부터 주척(周尺)을 써서 1등전척(一等田尺:주척으로 4.77척∼현재의 3.148척, 이하 같음), 2등전척(5.18∼3.419), 3등전척(5.70∼3.762), 4등전척(6.43∼4.244), 5등전척(7.55∼4.983), 6등전척(9.55∼6.303) 등으로 하였다. 양전의 결과 나타난 고려 말 및 조선시대 전국의 전결수(田結數)는 아래 표와 같다.

68. 대동법(大同法)

 

조선시대 선조 이후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防納:代納),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 등은 공물의 세목을 쌀로 통일하여 납부하도록 주장하였다. 특히 이이는 1569년(선조 2)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해지고 국가수입이 감소되자 1608년(선조 4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한백겸(韓百謙)의 건의에 따라 방납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경기도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 중 10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6말은 경기도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24년(인조 2)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에서도 실시되었는데, 연해(沿海)지방은 경기도의 예에 따랐고, 산군(山郡)에서는 쌀 5말을 베[麻布]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51년(효종 2)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실시, 춘추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에 5말씩 도합 10말을 징수하다가 뒤에 2말을 추가 징수하여 12말을 바치게 하였다. 산군지대에서는 쌀 5말을 무명[木綿] 1필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 전라도에서는 58년(효종 9) 정태화(鄭太和)의 건의로 절목(節目)을 만들어 토지 1결에 13말을 징수, 연해지방에서부터 실시하였다. 산군 26읍에서는 62년(현종 3)부터 실시하였는데, 부호들의 농간이 적지 않아 현종 6년에 폐지되었다가 다음해에 복구되었고, 뒤에 13말에서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경상도는 77년(숙종 3)부터 실시하여 1결에 13말을 징수하였는데, 다른 지방과 같이 1말을 감하여 12말을 징수하였다. 변두리 22읍은 쌀을, 산군 54읍은 돈[錢]·무명을 반반씩, 그 외 4읍은 돈과 베로 반반씩 바치게 하였다.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 대동법을 모방한 상정법(詳定法)을 실시하였는데, 1결당 쌀 12말을 징수하는 외에 별수미(別收米)라 하여 3말을 더 받았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함경도와 평안도는 제외) 실시된 뒤 세액도 12말로 통일하였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大同錢]으로 대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 후에도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따라서 백성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생겼으며,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되었기 때문에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는 전세수입의 부족을 메웠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1894년(고종 31)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하여 결가(結價)를 결정했을 때 지세(地稅)에 병합되었다.

69. 공거제(貢擧制)

 

고대 중국에서 제후·지방장관이 천자에게 매년 유능한 인물을 추천한 제도. 중세 이후 과거제도가 확립된 뒤에도 사용되었다. 당(唐)나라 개원(開元) 연간의 고시위원장을 지공거(知貢擧)라 하였으며, 명(明)나라 이후의 과거에는 학교제도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정계(正系)의 시험 이외에, 방계(傍系)의 추천으로 폭이 넓어졌다. 청(淸)나라 때에는 각 지방의 독학관(督學官)이 수재(秀才:3급관 자격자) 중에서 우수한 자를 발공하여 중앙으로 보냈다.

70. 체아(遞兒)

 

조선시대에 현직을 떠난 관리의 신분과 생활을 일시적, 또는 일정기간 동안 보장해 주기 위해서 설정한 벼슬. 그러한 관리의 직책을 체아직, 체아직에 지급되는 녹봉(祿俸)을 체아록이라고 한다. 문관·음관(蔭官)·무관의 당상관(堂上官) 이상과 삼사(三司:弘文館·司憲府·司諫院)와 춘방(春坊:世子侍講院)의 관원 등이 임기가 차서 교체될 때, 이들을 대우하기 위하여 실무가 없는 중추원(中樞院)이나 오위(五衛)의 군직에 임명하여 녹봉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군함체아(軍銜遞兒)라고 하였다. 또한 공신(功臣)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들을 후대하여 녹봉만을 지급하기 위해 임명하는, 직무 없는 관직인 원록(原祿)체아직도 있었다. 이 밖에 기술직으로서, 정원은 한정되고 자격자는 초과되어 1년에 4개월 정도씩만 교대로 근무하는 체아직도 있었다. 특히 오위에는 상호군(上護軍:정3품)부터 부사용(副司勇:종9품)까지 460명의 실무 없는 체아관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 군함체아에는 무관보다도 실직이 없는 문관을 임명하여 그들의 신분과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71. 나주 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

 

1755년(영조 31)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을 일으킨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24년 나주로 귀양갔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들 광철(光哲)과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수차의 변란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부류들과, 소론 중에서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흡수하고, 우선 민심동요를 위하여 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김윤(金潤)·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 등과 같이 사형당하였으며,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갔다. 그 밖에도 윤지의 일당인 심정연(沈鼎衍)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72. 도참 사상(圖讖思想)

 

예언을 믿는 사상. 도참은 세운(世運)과 인사(人事)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며 은어(隱語)를 많이 사용한다. 중국 고대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허강[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하도(河圖)의 도(圖)와 참(讖)이 합쳐서 이루어진 말로 보이며, 참위(讖緯)라는 말보다 먼저 생겼다. 중국 주(周)나라 말기, 천하가 오래도록 혼란에 빠지게 되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渴求)하며 살길을 찾아 방황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의 욕구에 호응하여 일어난 것이 도참사상이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부서설(符瑞說)·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을 혼합하여 천변지이(天變地異)를 현묘(玄妙)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기(史記)》 <노자전(老子傳)>에, 주(周)나라 태사(太史) 담()이 진(秦)나라의 헌공(獻公)을 만난 자리에서 도참을 진언(進言)하기를 “진나라가 처음에 주나라와 합치고, 합쳤다가 떨어졌는데, 500년 후에 다시 합치게 되고 그 때부터 17년이 경과하면 패왕(覇王)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참설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그 예언이 적중하여 진나라의 소왕(昭王)이 주나라를 멸하고 그로부터 17년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하여 패업(覇業)을 성취하였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도사(道士) 노생(盧生)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도참을 진언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胡)입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시황은 그 말을 믿고 군사를 보내어 흉노족(匈奴族)을 격파하고 북쪽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그러나 실지로 진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시황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의 학정(虐政)이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득세했을 때, 우물 속에서 꺼낸 흰 돌에 “안한공 망에게 알린다. 황제가 되리라(告安漢公莽爲皇帝)”는 8글자가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왕망은 이것을 근거로 야심(野心)을 성취하였고, 그 후부터 제왕(帝王)이나 제왕이 되고자 하는 자가 이것을 많이 모방했다. 도참의 폐해(弊害)가 커졌기 때문에 위(魏)나라의 고조(高祖), 수(隋)나라의 문제(文帝), 송(宋)나라의 태조(太祖), 원(元)나라의 세조(世祖) 등이 모두 이를 금하였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 이미 도참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보면, 660년(의자왕 20)에 귀신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라고 연거푸 외치고 나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를 파게 하니, 길이 90 cm쯤 들어가서 거북 한 마리가 나왔는데,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는 참언(讖言)의 구절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참설이 구체화한 것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도선국사(道詵國師) 때부터이다. 고려의 건국과 관련된 도참설로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최치원이 지은 “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松嶽靑松)”란 참언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현종(顯宗)은 조상의 건국사업을 은밀히 도왔다고 하여, 동왕 11년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증직(贈職)하고, 13년에는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 또 《고려사》 <태조세가(太祖世家)>에도 철원(鐵圓:태봉의 도읍)의 고경참(古鏡讖)이 나온다. 그것은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철원에서 이상한 노인에게 거울을 사서 벽에 걸었더니 햇빛에 비치어 147자(字)의 참문(讖文)이 보였는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이 참문은 고려 일대(一代)를 두고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그의 <훈요10조(訓要十條)>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중 신돈(辛旽)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송도기쇠설(松都氣衰說)>을 이용하여 충주로 천도(遷都)하기를 주청(奏請)하기도 하였다. 현재 민간에 돌아다니는 유일한 비기(秘記)로 풍수(風水)와 도참을 결부시켜 새 왕조의 출현을 예언한 《정감록(鄭鑑錄)》이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과거에는 《정감록》에 현혹되어 10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

73. 정감록(鄭鑑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운명·생민존망(生民存亡)에 관한 예언서·신앙서. 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풍수지리설·도교(道敎)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룩되었으며, 조선의 선조인 이담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하나 그 종류가 많아 40∼50종류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감록》이라 하면 《감결(鑑訣)》을 비롯한 여러 비기(記)에다 《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을 합친 비기의 집성을 말하기도 하고, 단순히 《감결》 하나만을 떼어서 말하기도 한다. 그 명칭도 많지만, 《정이감여론(鄭李堪與論)》 《정이문답(鄭李問答)》 《정감록(鄭堪錄)》 《감결》 《징비록(懲錄)》 《정인록(鄭寅錄)》 등의 이본(異本)이 있다. 현재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규장각본 《정감록》:필사본. 1책, ② 김약술(金若述) 소장본 《정감록》:필사본. 1책,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정감록》:활자본. 국판. 163면. 1922년 발행, ④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면, ⑤ 자유토론사 장판(自由討論社藏版)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 《정감록》:4×6판 등을 들 수 있다.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黨爭)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난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

 

74. 김항(金恒, 1826∼1898)

 

조선 후기 역(易)의 대가. 자 도심(道心). 호 일부(一夫). 충남 논산(論山) 출생.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심취하였고 예문(禮文)에 조예가 깊었다. 최제우(崔濟愚)·김광화(金光華)와 함께 이운규(李雲圭)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스승은 그에게 공자(孔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천시(天時)를 받들 것이라고 말하였다. 1881년 이운규가 전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을 19년 만에 정신계발로 스스로 깨우치고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의 명사(命寫)를 끝마쳤다. 85년에 《정역(正易)》을 완성, 그 후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주역》을 풀이하고 체계화하여 한국역학 정립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75. 황건의 난(黃巾-亂)

 

2세기 말 중국에서 일어난 농민대반란. 머리에 누런 수건을 썼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요적(妖賊)이라고 불리는 빈궁농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2세기도 절반이 지나면서 중앙에서는 관료·외척·환관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천재·질병·기근이 계속되어 민중은 빈궁해지고 유민(流民)은 격증하였다. 순제(順帝:재위 126∼144) 때의 사람, 우길(于吉)은 장수(長壽)를 설하는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저술하였는데, 영제(靈帝:168∼188) 때의 장각(張角)은 우길의 가르침과 민간의 신앙 등을 종합하여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를 주창,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부르고, 죄과에 대한 반성과 참회로 질병을 치유하고 태평세대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며 제자를 각지로 파견하여 포교에 노력하였다. 이 가르침은 곧 하급관리와 빈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화북(華北)·화중(華中)에서 강남지구에까지 퍼졌다. 또, 장각은 신도 약 1만 명으로 전국 36방(方)의 교단조직을 편성하였는데, 각 방은 또한 방(方)이라고 하는 장군에게 통솔된 군사적·정치적 조직이기도 하였다. 후한 왕조는 이를 탄압하여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신도의 단결은 견고해졌고 반권력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장각은 스스로 천공(天公)장군이라 하고, 두 아우를 지공(地公)·인공(人公) 장군으로 임명한 후 한(漢)나라를 대신하여 제위(帝位)에 오른다고 예언하고 황건을 표지로 거사를 기도하였다.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184년 격문을 전교단에 띄워서 36방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사태가 중대한 데 놀란 조정에서는 권력싸움을 중지하고 무장(武將)을 파견하여 진압하려고 하였다. 장각이 죽자 황건의 주력은 쇠퇴하였으나, 이에 호응하여 각지에 흑산(黑山)·백파(白派) 등 농민군이 봉기하고, 서북으로부터는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어 후한 통일왕조의 멸망은 재촉되었다.

76. 오두미도(五斗米道)

 

중국 후한(後漢) 말에 장릉(張陵)이 쓰촨[四川] 지방에서 창시한 종교, 또는 그 교단. 천사도(天師道)의 별칭이다. 치병(治病)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으로 태평도(太平道)와 함께 도교(道敎)의 원류(源流)이다. 패국풍(沛國豊:지금의 江蘇省 북변) 사람인 장릉이 쓰촨의 구밍산[鵠鳴山]에서 장생(長生)의 도를 닦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오두미(五斗米)를 내게 한 데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 이들은 마침내 교단을 형성하였는데, 이 교단을 ‘미적(米賊)’이라고도 하였다. 오두미도는 모든 질병은 죄과 때문이라고 하며, 일종의 치유기도로서 병자에게 부수(符水)를 마시게 한 다음, 자기의 죄과를 3통(通)의 서류[三官書]에 쓰게 하여, 이를 천·지·수(天地水)의 신에게 바치고 다시는 죄과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함과 동시에, 죄에 대한 보상을 함으로써 병이 치유된다고 주장하였다. 교단의 교법은 장릉의 손자 노(魯)의 시대에 정비되었는데, 노는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고 초학(初學)의 제자를 귀졸(鬼卒), 신자를 간령(姦令)·좨주(祭酒) 등으로 불러 제정(祭政)일치의 종교 왕국을 성립하였다. 노의 아들 성(盛)은 장시[江西]의 룽후산[龍虎山]으로 옮겨 도를 계승하고, 진대(晉代) 이후에는 지식층이나 귀족 중에도 이 교를 믿는 자가 많았다.

77. 동학(東學)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사람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참조 1>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산업·수공업·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제1차 농민운동】 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 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참조 2> 동학 20개조 폐정 개혁안(東學十二個條弊政改革案)
1894년 6월, 전주(全州)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이 관군과의 휴전조건으로 제시한 12개 조항의 정치개혁안.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관군의 반격으로 5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데 이어, 청군(淸軍)과 일군(日軍)이 개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리한 데다가, 청·일 양군이 충돌 직전에 있는 위급한 시기에 정부군과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선무공작에 순응하고, 폐정개혁안의 수락을 조건으로 강화하고 전주성에 철병하였다. 이때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숙원을 없애고 공동으로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 처리할 것, ③ 횡포한 부호를 엄중히 처벌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게 한 평양립(平壤笠)을 폐지할 것, ⑦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가할 것, ⑧ 무명의 잡부금을 일절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일본과 상통하는 자를 엄벌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면제할 것, ⑫ 토지는 균등하게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이다. 동학은 이를 실시하기 위하여 전라도 53개군에 집강소(執綱所)라는 일종의 민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동학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갑오경장을 통하여 계급타파·인재등용·과부재혼·노예폐지, 탐관오리의 처벌, 천민차별의 철폐 등 그 일부가 수용되었다.

 

<참조 3> 천도교(天道敎)
조선 후기 1860년(철종 11)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창도과정】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종교사상】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수행체제】 천도교의 수행은 개인적으로는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청수봉전(奉奠)·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천도교의 약사(略史)】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혁명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에 의해 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35∼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45년 8·15광복 이후 국토가 양단되자 북한에서는 천도교 북조선종무원과 천도교 청우당(靑友黨)을 조직, 활동하였는데 280만 교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천도교의 조직과 현황】 천도교의 조직은 교조가 제정한 접(接)이 기본을 이루면서 포(包)와 도소(都所)로 발전하였다. 접은 40∼50호를 단위로 한 기본조직이며, 포는 여러 개의 접을 포용하는 조직이다. 이 접과 포의 조직은 모두 전교자(傳敎者)와 수교자(受敎者)의 인간관계를 통한 지역적인 조직이다. 이것이 천도교로 바뀌면서 1906년부터 발족한 지방교구제와 병존하게 되어 양원 조직을 이루었다. 즉 접을 토대로 한 조직으로 연원(淵源)조직이 있는 한편, 행정구역 단위로 마련한 교구조직이 있다. 연원조직은 접 → 교훈 → 도훈 → 도정으로 200호 단위의 조직이며, 교구조직은 면에 전교실, 군에 교구, 중앙에 중앙총부가 있다. 94년 현재, 교회 조직은 최고결의기관으로 전국대의원대회와 중간 결의기관으로 종의원(宗議院)이 있고, 집행기관으로는 종무(宗務)위원회가, 감사기관으로는 중앙감사원이 있다. 또 재산을 관리하는 천도교 유지재단이 있다. 용담수도원 등 수도원이 10개, 2,000개 교구에 교도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 연호(年號)는 창도 해인 1860년을 ‘포덕(布德) 1년’으로 하는 포덕 연호를 쓰고 있다.

 

<참조 4> 시천교(侍天敎)
이용구(李容九)가 손병희(孫秉熙)의 천도교 계열에서 이탈하여 창립한 동학의 한 종파. 동학의 지도자들이 관권의 탄압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친일적인 정치활동을 하고 있던 이용구는, 1906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가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립하자, 천도교의 순수교단화에 반대하고 친일적 단체를 표방하였다가 제명당하자 김연국(金演局) 등과 함께 시천교를 창립하였다. 그 명칭을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으로 시작되는 천도교의 주문에서 따온 것 같이 교의(敎義) 자체는 천도교와 별 차이가 없다. 출범 후 얼마 동안은 천도교를 능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기도 하였으나, 한일합병(韓日合倂)에 앞장을 서는 등 친일적 행동으로 민중의 신망을 잃고 점차 교세가 약화되었는데, 이용구가 사망하자 유명무실화하였다.

78.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고종 31)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외세배척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일 양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청은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청의 거절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의 결과 조선에서의 청의 종주권(宗主權)은 부인되었고, 대신 일본의 지배를 전적으로 인정해 주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청국의 조선에 대한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침략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확립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어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김홍집·김윤식(金允植)·김가진(金嘉鎭) 등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이 설치되었다. 이 기관은 중앙과 지방의 제도·행정·사법·교육·사회 등 제반문제에 걸친 사항을 3개월 동안 208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었으며,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1차개혁 때에는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아문(八衙門)으로 개편,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2차개혁 때는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없애고 새로운 관리임용법을 채택하여 종래의 문무·반상(班常)의 구별을 폐지하였다. 지방제도의 개혁은 8도(道)를 23부(府)로 고쳤다가 다시 13도로 고쳤다.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행정체제를 중앙에 예속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부(度支部)에서 관장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또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에 의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실시와 도량형(度量衡)을 개편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다. 군사제도는 군대수와 무기의 제한 등 지엽적인 것만을 개혁하여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까지의 병력이 불과 9,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아 독립국가로서의 군대기능은 미약하였다. 사법제도는 행정기구에서 분리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2심제(二審制)가 채택되었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開港場裁判所)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서 특별법원을 두었다.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두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지방은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을 맡아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하였다.
이 개혁의 중요한 내용은 사회적인 개혁에 있다. 반상(班常)의 계급타파, 문벌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인신매매의 금지, 천민대우의 폐지 등 전통적인 양반체제 하에서의 신분제도를 철페하였다. 이 외에 죄인의 고문과 연좌제(連坐制)의 폐지, 조혼금지, 자유의사에 의한 과부의 재혼, 양자제도의 개정, 의복제도의 간소화 등 인습적인 전통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갑오개혁은 조선 개국 이후 500년을 이어온 구제도를 일신한 제도상의 근대적 개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 따라 강행된 타율적인 개혁이므로 국내의 항일세력은 크게 반발하였다. 또한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고 이와 함께 친러적인 세력이 등장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출처/育士道(육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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