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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헤겔과 하이데거에서의 존재개념에 대한 고찰

by 윈도아인~♡ 2012. 3. 17.

헤겔과 하이데거에서의 존재개념에 대한 고찰


이  서  규(건국대)



[한글 요약]


이 글은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고찰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 하였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이성주의철학의 정점에 서 있었던 헤겔 그리고 서양의 존재론의 해체를 시도하면서 독자적인 현상학-해석학적 존재론을 정초하려던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헤겔은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고 나아가 스스로 절대자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정신현상학󰡕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때에 전개되는 내용은 주관성철학에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주관성철학을 거부하고 기초존재론에 입각한 독특한 존재에 대한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양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헤겔)과 현존재(하이데거)가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 물론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라는 개념이 헤겔의 의식과 구분되어져야 하지만 -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현존재와 관계하는 세계를 벗어난 초월적 세계, 즉 물자체 또는 실체의 세계라는 것이 부정된다는 점이다.



주 제 어 : 의식, 현존재, 존재이해, 존재, 존재자




1. 서론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중심적인 주제 중에 하나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이다. 일찍이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뿐이라고 말하면서 존재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라는 개념은 각각의 철학자들에게서 상이하게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서로 상이하게 이해되는 존재개념을 고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철학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절대적 관념론자라고 불리는 헤겔과 현상학적 해석학자라고 불리는 하이데거에서 전개되는 존재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헤겔은 이성철학의 정점에 서있던 철학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서양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전통을 완결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 반해서 하이데거는 그러한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해체하여 새로운 철학의 전통을 구축하려했던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이 양자의 철학자들의 존재개념을 비교 고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각각의 철학자들의 고유한 존재개념을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철학을 관통하는 중심적인 존재개념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1)

헤겔은 이전의 사상가들보다 더 극단적인 존재개념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특히 󰡔정신현상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자기의식의 단계를 거쳐 절대의식이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으로의 전개는 다름 아닌 학문의 체계를 완성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헤겔에 따르면 진리가 실존하는 참된 형태는 바로 진리의 학적 체계일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단순히 지(知)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인 앎(wirkliches Wissen)에 이르도록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하여 전통적으로 대립하였던 철학적인 장치들, 즉 보편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개념과 실재,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라는 대립쌍들을 변증법적으로 매개하여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인 존재를 제시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이 헤겔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현상학󰡕이 헤겔철학의 체계에로 들어가기 위한 서론 그리고 좀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헤겔철학의 체계의 일부라고 말해질 수 있다면,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가 소위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을 출발점으로 하여 전통적인 존재론을 해체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결정적인 저작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전통적인 인식론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었던 주관과 이 위에서 전개된 주관성철학(Subjektivitäts- philosophie)을 비판하면서 존재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구축을 시도한다. 여기에서 피력되는 존재에 대한 언급은 기초존재론적인 것인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후의 하이데거의 철학이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이해가 이전의 철학과 얼마나 구분되는가를 드러내준다. 이 글에서는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에서 출발하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들의 입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본론


1)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된 헤겔의 존재개념


(1) 감성적 확신에서의 존재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현상하는 지식’에 대해서 다루는 것인데, 그것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감각의 단계에서 절대적 지식의 단계로의 발전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헤겔이 강조하는 것은 변증법적인 발전인데, 이것은 헤겔철학의 주요한 방법론적 특징이며 그의 철학의 과제1)이기도 하다. 단순한 감각적인 지식이 절대적인 지식, 개념적인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고 그리고 발전하여야 한다는 것이 헤겔철학의 전제이자 결론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의 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며 인간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언(Vorre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이와 같은 요청에 따라 아직 감각적이며 통속적인 것 또는 개별적인 것에만 몰입돼 있던 인간을 그러한 상태로부터 끌어올림으로써 이제는 오직 그의 안목이 높이 떠 있는 별나라로 향하도록 하려는 힘겹고도 정성어린, 언뜻 보아 안타까우리 만큼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인간은 마치 신적인 것을 완전히 망각한 채 다만 티끌과 물에만 의존하는 한낱 벌레와 같은 순간적 생명을 지탱해 오기라도 한 듯이 보일 정도이다.”1)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현상하는 지가 절대적인 지로 지양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인 인식론의 문제인 주관과 객관, 자아와 타자의 갈등을 지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단지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 즉 어떻게 의식이 존재를 파악하여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기한다. 이러한 과정은 다름이 아니라 정신이 절대적 정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현상에 관한 이론”(die Lehre von den Erscheinungen des Geistes)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자기의 진정한 실존을 향하여 끊임없이 추동돼 나아가는 의식은 마침내 지금까지 자기와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단지 하나의 타자로서 존재하는 어떤 이질적인 것에 의해서 묶여 있는 듯이 보였던 스스로의 허상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선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의식이 마침내 현상과 본질이 동화되는 단계에 이름으로써 의식의 전개 및 서술이 또한 정신의 진정한 학이 성립되는 바로 그 점으로 합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의식 자체가 다름 아닌 자기의 본질을 포착할 때 마침내 그것은 절대지의 본성 자체를 뜻하게 될 것이다.”1)

󰡔정신현상학󰡕의 전개는 ‘감성적 확신’(die sinnliche Gewißheit)에서 주어지는 소박한 앎에서 시작해서 절대지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에 각각의 단계는 복합한 과정으로 나누어져 고찰되지만, 그것은 의식이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에 이르는 것과 정신이 종교의 단계를 거쳐 절대지로 다가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에서 자기의식을 거쳐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방대한 단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의식, 자기의식 그리고 이성의 단계가 각각 세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매개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헤겔의 철학이 가지는 독특한 전개과정이다. 헤겔의 존재개념을 이해하려는 우리는 여기에서는 의식의 단계만을 살펴볼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의식의 단계에서 귀결되는 내용과 자기의 의식의 단계에서 귀결되는 내용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의식의 단계에서는 지식(Wissen)을, 그리고 자기의식의 단계에서는 지식에 대한 지식(Wissen vom Wissen)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식에 대한 지식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의식의 단계에서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살펴봄을 통해서 헤겔의 철학이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입장을 잘 나타낼 줄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사물의 존재가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단계는 어떤 단계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감성적 확신의 단계이다. 헤겔이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를 다루는 것은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단계는 의식이 절대지를 향해 가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데, 이 단계는 우리가 감각기관을 사용하여 사물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수용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는 의식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계에서 의식과 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감성적 확신은 의식이 직접적인 단계에서 가져다주는 대상과의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감성적 확신은 결코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이러한 직접적인 단계에서 절대지로의 이행 또는 발전의 필연성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적 확신은 절대지로의 항해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는 어떤 것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존재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결코 존재에 대한 개념적인 파악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절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먼저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상이 되는 知는 오직 그 자체가 직접적인 지, 즉 직접적인 것과 존재하는 것(das Seiende)의 知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우리도 역시 직접적인 혹은 단지 수용적인 자세만을 취할 수 있을 뿐, 결코 우리 앞에 나타나는 知에 대하여 추호의 영향도 입혀서는 안되며 또한 단순히 이해하려는 노력 이외에 그 어떤 개념적 파악을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1)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어지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만약 헤겔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존재가 궁극적인 존재라고 본다면, 즉 사물의 참다운 존재라고 본다면 우리는 헤겔이 감각주의(Sensualismus)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입장은 감각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에게 다가오는 존재는 매개되지 않고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일차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감성적 확신 속에서 주어지는 것을 “부유한 인식”(die reichste Erkenntnis)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감성적 확신은 가장 참다운 인식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직 대상으로부터 그 가운데 어떤 부분도 제외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직 있는 그대로의 완전한 모습을 지닌 대상을 눈앞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1) 직접적인 확신의 단계가 가진 특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마치 헤겔이 경험론자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 감성적 확신의 단계는 그것이 가진 대상과의 원초적인 만남의 가능성 이외에 결코 존재에 대한 어떤 ‘내용’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이 단계에서 의식과 대상은 단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그러한 직접적 확신의 단계는 그 자체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이 단순한 사실로서의 확신, 확실성은 가장 추상적이며 또한 가장 빈곤한 진리일 뿐이다. 이러한 감성적 확신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 다만 그것이 있는바(es ist)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진리는 오로지 사태의 존재(das Sein der Sache)만을 포함한다. 의식은 자신의 편에서 보면 이러한 감성적 확신 속에서는 단지 순수한 자아(reines Ich) 또는 자아는 그 속에서 순수한 이것(reiner Dieser)으로 그리고 대상은 순수한 이것(reines Dieses)일 뿐이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의 감각과 느낌1) 속에서 사태(Sache)인 것은 현재에 나타나지만, 인식론적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아직 앎이 아니다. 감각과 느낌은 아직 앎을 산출해내지는 않는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존재가 매개되지 않고 단지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즉 존재가 순수한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은 의식이 이러한 존재에 대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을 갖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헤겔이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참다운 앎이 성립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의 구분, 즉 지식(episteme)과 억견(doxa)를 구분하는 것과 연관된다.1)

헤겔에 따르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는 것은 이 단계에서 파악되는 존재를 결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존재에 대해서 갖는 감성적 확신은 아직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매개작용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성적 확신에서 발견되는 존재, 즉 존재 일반(Sein überhaupt)은 의식이 추측하는것(meienen) 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감성적인 것을 표명할 때에도 또한 이를 일반자라는 뜻으로 언표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 다시 말하면 일반적인 이것이며 또한 무엇이 있다(es ist)라는 경우에도 존재 일반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때 우리는 비록 일반적인 이것, 혹은 존재 일반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일반자를 언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을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결코 이와 같이 감성적 확신 속에서 추측하는 것(meinen)을 말로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언어는 좀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어서 모름지기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스스로의 사념, 속된 견해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실로 일반자야 말로 감성적 확신의 진리이며 다시 언어는 오직 이러한 진리만을 표현할 뿐이므로 말로 나타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된다.”1)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단지 순수한 존재(reines Sein)로서 드러날 뿐이다. 여기에서 대상이, 즉 어떤 것이 순수한 존재로서 드러날 뿐이라는 것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인 감각이나 느낌을 통해서는 어떤 것이 ‘매개되지 않고’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어떤 것이 매개된다는 것은 의식이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사용되지 않는 반성작용 또는 구성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이러한 매개작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단계에서의 의식은 단지 자아(Ich)일뿐 그 이외의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은 이 단계에서 사물이 있는 바의 것을 단지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의식이 사물과 직접적으로 만날 때, 의식은 사유라든가 표상이 아니며 그리고 사물도 어떤 성질을 갖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물이 단지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는 단순히 ‘이것’이나 ‘단일자’만 인지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감성적 확신에서 파악되며 그리고 ‘이것’으로 지칭되는 이 순수한 존재는 결코 부정적인 계기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감성적 확신에서 파악되는 존재의 순수한 직접성은 의식과 사물이 서로 어떤 식으로든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존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과 같은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을 이루며 동시에 그 확신을 스스로의 진리로 표명하는 순수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는 지금까지 논술된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개입돼 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의미의 감성적 확신이란 결코 단 하나의, 바로 옆에 있는 순수한 직접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이 순수한 직접성을 나타내는 단 한 가지 예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결국 순수한 존재마당서 눈에 띄는 수많은 구별 중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바, 그것은 즉 이른바 감성적 확신으로 받아들여진 단순한 존재 속에서는 어느덧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두 가지의 이것들, 즉 자아로서의 이것과 대상으로서의 이것이 서로 구분되고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양자간의 차이를 놓고 볼 때 바로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중의 어느 편도 단지 직접적으로 감성적 확신에 다다라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은 매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어디가지나 나는 하나의 타자를 통해서,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 확신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또한 반대로 이 사물의 측면도 역시 어떤 타자를 통해서, 즉 다름 아닌 자아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띌 수 있었다는 것이다.”1)

순수한 존재와 의식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감성적 확신은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있는 단일자와 관계하지만 의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헤겔은 ‘감각적 확신’의 끝 부분에서 순수한 존재는 그것이 결코 단일자로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여기에서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이것은 헤겔에 따르면 필연적인 과정인데, 왜냐하면 의식이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만 머무르면 결코 앎으로의 도약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지각의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직접적 확신은 결코 진리의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진리란 어디까지나 일반자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는 하나의 이것(das Dieses)만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1)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은 이렇게 개별자로 주어진 ‘이것’이 결코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단계에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2) 지각의 단계에서의 의식과 존재

헤겔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감성적 확신을 통해서 주어지는 존재가 가장 구체적이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추상적이고 빈약한 존재라는 점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렇게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이것”으로 주어진 존재는 결코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감성적 확신은 의식에게 단지 소박한 단계의 존재를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이 감성적 확신에서 주어진 존재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존재의 이해가 한층 더 승화되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와 힘의 단계, 즉 오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의식은 이러한 세 개의 단계를 거쳐서 더 이상 의식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의 단계에로 진입한다.

존재가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 이어서 존재를 일반자로 발견하는 단계가 지각(Wahrnehmung)이라는 단계이다.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내용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은 지각이라는 단계로 진입하여 구체적인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어야 한다. 이때에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에로의 이행은 의식이 일종의 도약을 이룩하는 것이다. - 이러한 도약은 헤겔의 변증법의 전개에 있어서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지각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의식이 갖는 소박한 감각들과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헤겔에 따르면 그 이유는 지각의 단계에 이르러서 의식은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단지 개별자로서 자신과 대상을 생각하는 것과는 구분된다.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이러한 시선돌림은 어떤 새로운 의식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전환의 계기는 의식이 이미 감성적 확신에서 간직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사물들을 더 이상 개별자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성질들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 있을 때에는 결코 획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대상(존재)은 이미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주어졌던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지각의 대상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개별자로 파악되었던 일반자인 것이다. 여기에서 의식이 지각의 단계에서 하는 작업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개별자를 일반자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작업은 직접적인 것을 추상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1)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이 다양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물들을 경험한다는 것은 의식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는 올바르게 언급될 수 없었던 일반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존재는 그들이 다양한 성질들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 때문에 사물의 성질들은 다양하게 언급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금이라는 사물의 성질은 흰색, 짠맛 그리고 각짐 등등이다. 이러한 성질들은 각각 소금과 관계되지만 각각의 다른 성질들과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이렇게 지각의 단계에서 사물이 다양한 성질들을 가지는 것을 “또한”(auch)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러한 또한 속에서 사물의 각각의 성질들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여러 가지 성질들은 하나의 단순한 여기 속에 뭉쳐져서 그들 모두가 서로 밀착되고 삼투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다른 어떤 것과 구별되는 저 혼자만의 여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마다가 어디서나 다른 것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모두가 다른 많은 여기에 의해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호 침투해 있는 상태에서도 결코 서로를 촉발하는 일이 없다. 즉 백색은 입방체를 촉발하거나 변형시키지도 않으며 또한 이 두 요소가 짠맛을 바꾸어 놓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 하나하나의 성질마다가 단순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할 뿐이니 결국 이들은 모든 여타의 것은 그대로 방치해 둔 채 다만 스스로의 무관심만을 나타내는 또한 이라는 입장에서 자기 이외의 것들과 관계할 따름이다.”1)

비록 이렇게 서로 무관심한 성질들이 비록 서로의 성질들과 모순되지 않으면서 양립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사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막연한 일반성을 드러낼 뿐이다. 여기에서 다양한 성질들이 단지 동근원적(gleichursprünglich)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한다면, 이러한 성질들은 사물의 존재에 귀속하는 특정한 성질로서 받아들여 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어떤 성질이 다른 성질과 구분되는 특정한 성질이 되려면, 한 성질은 다른 성질들과 대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성질은 다른 성질을 부정하여야만 한다. 헤겔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기된 이러한 관계 속에서 관찰되고 또 전개된 것은 다만 긍정적 일반성의 특성을 의미할 뿐이었지만 이제 여기에는 또 한 가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측면이 드러난다. 즉 이상 얘기되었듯이 만약 수많은 특정한 성질들이 서로 전적으로 무관심한 상태에 있어서 이들 모두가 다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만을 고수하는데 그친다고 한다면 결코 이러한 성질들은 특정한 자기규정을 받는 것으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건 그것이 규정된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각기 그 성질들이 서로 구별되고 또 타자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대응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라야만 하기 때문이다.”1)

이런 점에서 보면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사물이 갖는 성질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데, 그것은 다른 성질과 동근원적이며 스스로에게만 관계하고, 다른 편에서는 다른 성질들과 대립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의식이 사물의 존재를 지각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러한 지각의 단계에서 오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지각하는 의식이 대상에 대해서 어떤 것을 추가하거나 배제한다면 여기에서 오류가 생기게 된다. 지각을 통해서 의식은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오류는 전적으로 의식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지각작용을 통하여 서로 상호 배타적인 상태의 성질들을 서로 구분하고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이 지각의 단계에서 갖고 있는 오류가능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의식은 이러한 오류의 가능성을 그 스스로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의식은 자기 자체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여기에서 지각의 본질적 측면은 의식으로 하여금 지각작용으로부터 야기된 오류가능성 또는 허위성이 바로 그 의식 자체에 귀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3) 힘(Kraft)의 단계에서의 의식과 존재

의식은 지각의 단계를 거쳐서 우리에게 사물의 존재에 대한 경험-사물을 일반자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이 얻어내는 것은 참다운 일반자가 아니라 단지 감각적으로 주어진 일반자일 뿐이다. 이러한 일반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개별자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물론 지각의 단계에서 의식은 이러한 갈등, 대립을 극복하려고 시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각의 단계에서의 의식에게는 과도한 것이다. 헤겔은 이 점을 󰡔정신현상학󰡕 3장 “힘과 오성”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선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변증법에서 듣는 것, 보는 것과 같은 감각적 수용상태를 지나서 지각단계를 넘어서고 난 뒤에 마침내 사상의 형태를 띠게는 되었으나, 아직도 여기서 말하는 사상은 이와 같이 분화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의식을 무조건적인 일반성 속에서 통합한 것뿐이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 뜻하는 무조건적인 것이 한낱 단순하게 정지돼 있는 본질로 간주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또 다시 자기존립을 고수하는데 급급한 한쪽으로만 치우친 극단(Extrem des Fürsichseins)을 의미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는 이 무조건적인 것에 대해서 다름 아닌 비본질적인 것이 맞서게 될 뿐 아니라, 다시 이와 같은 비본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한에서 이 무조건적인 것 자체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의식은 여기서 지각작용에서 비롯된 기만성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의식은 여기서 그와 같은 제약성을 지닌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 집착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자신에게로 복귀하기에 이른 것이다.”1)

헤겔에 따르면 이렇게 지각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다음단계가 오성의 단계이다. 이러한 오성의 단계는 자신에 대한 존재(Fürsichsein)와 타자에 대한 존재(Sein-für-Anderes)의 구분을 지양시키는 단계이다. 오성의 단계에서는 감성적 확신과 지각에서 서로 대치되던 개별자와 일반자, 이 양자가 서로 ‘통합’되어진다. 헤겔은 이러한 양자의 통합을 염두에 두어서 무제약적-일반자(das Unbedingt- Allgemei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의식은 지각의 단계에서 자기의 개념을 아직 개념으로서 포착하지는 못한다. 물론 지각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일반자를 만나지만, 이때의 일반자는 아직 개별자들과 대립하는 감성적인 일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오성의 단계에서의 의식은 개념을 개념으로서 파악(Erfassen des Begriffes als Begriff)하는 단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성의 역할은 아직 반성되지 않은 개념에 머물러 있는 지각에서 의식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즉 오성은 개별자를 일반자로 그리고 일반자를 개별자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헤겔은 오성이 가진 이러한 능력을 다름이 아니라 “힘”(Kraft)이라고 부르는데, 용어법적으로 보면 철학사에 있어서 힘이라는 개념은 드물게 사용되는 것이다. 헤겔은 힘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의식은 감성적 확신의 단계와 지각의 단계를 벗어나서 힘의 발현으로 나타난다. 이때에 힘은 현상세계로서의 감성적 영역을 넘어서 진리의 세계, 즉 초감성적인 세계로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1)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힘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특성은 힘은 외화 된다는 점이다. 힘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때 힘은 타자에 대한 존재(Sein für anderes)가 된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표출된 힘은 다시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힘이 갖는 두 번째 특성이다. 헤겔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에게로 귀환하는 것을 힘의 본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힘이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에로 귀환하는 과정은 서로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힘은 자기 자신을 표출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이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다. 의식이 감성적 확신과 지각의 단계에서 파악한 존재는 오성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오성의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감성적 단계와 지각의 단계를 거친 의식은 이제 개별자와 일반자, 사물과 성질들, 힘의 표출을 거쳐서 자기에 대한 앎을 경험하게 된다. 헤겔은 “힘과 오성”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결국 우리는 현상계에서 노정되는 내면적 존재를 통해서 오성이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상 자체임을 알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대립하는 여러 힘 사이의 유희로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희의 절대적이며 일반적인 계기와 또한 그러한 운동을 지탱해 나가는 유희라는 것, 그리하여 실제로 오성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경험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

오성을 단계를 지나서야 비로소 의식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헤겔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라고 부른다. 즉 감성적 확신과 지각 그리고 오성의 단계를 지나면서 의식은 비로소 자신의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사물의 존재는 의식이 자기의식이 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의식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는데, 이것은 또한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의식이 자기의식의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언급하는 것은 관념론자인 헤겔이 설정하는 필연적인 이행과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된 하이데거의 존재개념


(1) 존재이해와 현존재(Dasein)

하이데거가 목표로 하는 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이다. 이러한 해체작업에 있어서 주요한 출발점은 다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비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작업을 1927년에 간행된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서양 형이상학의 중요한 개념인 존재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이미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할 때부터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1923년 여름학기에 행해진 󰡔현사실성의 해석학󰡕(Hermeneutik der Faktizität)을 통해서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전개시킨다. 하이데거가 교수자격논문을 발표한 이후부터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훗설의 후임이 되기까지의 저술들은 존재비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존재와 시간󰡕은 이러한 존재비판의 내용을 가장 심도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1)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를 위해서 존재비판을 하는 도상에서 󰡔존재와 시간󰡕에서-비록 이 책은 하이데거의 의도대로 완결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머무르지만-하이데거가 시도하는 것은 첫 번째로 주관-객관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이러한 시도는 현상학적-해석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하이데거는 이 위에서 󰡔존재와 시간󰡕에서 다양한 사상가들, 예를 들면 데카르트, 칸트, 헤겔, 쉘러, 훗설 등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우선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존재와 시간󰡕 전반부를 살펴보면 쉽게 언급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로 존재가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개념은 명확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존재를 ‘규정 불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존재를 자명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를 쉽게 이해하고 있으므로 존재를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존재이해는 결코 올바른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요청하게 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를 언급하는 방식은 헤겔의 방식-비록 그 내용과 의미는 구분되어져야 하지만-과 유사하다. 직접적인 것에서부터 매개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존재를 언급하는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의 직접성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적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전기의 하이데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존재의 ‘현사실성’(Faktizität)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존재의 직접성을 잘 드러내는 용어라고 볼 수 있겠다.

󰡔존재와 시간󰡕에서 직접적인 단계에서의 존재이해를 잘 드러내는 용어는 실존적(existenziell)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실존론적(existenzial)이라는 용어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존재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비록 하이데거는 실존적이라는 용어와 실존론적 이라는 용어를 󰡔존재와 시간󰡕 전반에 걸쳐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지만, 실존적인 것에서 실존론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하려는 프로그램의 기본입장이다.

이렇게 존재의 직접성에서부터 출발하는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와 숙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서 󰡔존재와 시간󰡕을 시작한다. 나중에는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에서 현존재인 인간을 “존재의 이웃”(Nachbar des Seins)이라고 표현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인간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놓여있다. 현존재와 존재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관계는 󰡔존재와 시간󰡕에서는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라는 용어로 잘 표현된다. 여기에서 존재이해라는 용어는 현존재를 다른 여타의 존재자와 구분되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다른 존재자들은, 예를 들면 책상, 연필은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이해는 현존재인 인간만이 가지는 존재와의 친밀감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규정성(Seinsbestimmtheit)이다”1)라고 공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이해는 현존재의 분석, 즉 현존재분석론(Daseinsanalytik)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인 실험에 있어서 근본적인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다. 존재이해는 우선적으로 현존재와 존재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존재이해가 다른 것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존재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밝히고 있다. 즉 존재는 현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이해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것은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이해로서의 존재이해 속에서 개시되어 있다”1)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언급을 따르자면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이해는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의미를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제약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이러한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즉 존재이해가 선존재론적으로(vorontologisch)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결코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수 또는 표상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주제들인 존재물음(Seinsfrage), 실존과 실존수행(Existenzvollzug)은 전적으로 이러한 존재이해의 가능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2) 사물(Ding)과 눈앞-존재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성으로서의 존재이해는 현존재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존재와의 연관성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성을 언급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물음과 존재론적 차이(ontologi- sche Differenz)를 통해서 존재의미를 파헤쳐 나가려고 현존재분석을 시도하는데, 이것은 또한 현존재와 존재자들의 존재를 기술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만나는 것을 기술하는 것은 ‘세계’(Welt)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 특히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의 구축을 위해서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자를 만나면서 드러내는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존재가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와 관계하는지,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절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을 통해서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과정, 즉 감성적 확신에서 지각을 거쳐 오성을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헤겔의 입장은 인식론적인 것이며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가 사물의 존재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가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존재론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내용은, 헤겔과 연관시켜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물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인데, 이것은 의식이 사물의 존재를 파악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헤겔의 입장과 비교될 수 있다.

현존재가 만나는 존재자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세계 내에 주어져 있는 모든 존재자를 내부세계적 존재자(inner- weltliches Seiende)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분명하게 사물(Ding)이라는 용어와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1).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우선적인 것은, 현존재는 인식론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사물들과 만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곳곳에서 언급하듯이 인식이라는 것은 이미 현존재와 존재자들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가 사물(Ding)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내부세계적인 존재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부세계적 존재자는 현존재가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는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존재자들을 내부세계적 존재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세계적 존재자들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현존재와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에 의존적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존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이해를 통해서 존재의미를 발굴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가 현존재중심적인(daseinszentrisch) 입장을 띤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가 내부세계적 존재자 전체와 관계하는 것을 교제(Umgang)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이중에서 특히 다양한 내부세계적 존재자들과 구체적으로 교제하는 현존재의 활동을 조달(Besorgen)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자들을 조달하면서 있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는 유화물감, 붓 그리고 칼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데,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들을 조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다양한 재료들과 관계하듯이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세계 내에서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우선먼저 어떤 식으로 존재자와 만나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관계하는 내부세계적 존재자를 우선적으로 눈앞존재자(das Vorhandene)라고 부른다.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의 조달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의 눈앞에 놓여 있는 모든 존재자들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러한 눈앞존재자라는 존재방식은 현존재에게 사물의 존재가 그 모습을 우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라는 용어는 하이데거의 용어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눈앞존재자라는 용어는 어떤 인식론적인 파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1), 현존재의 실존수행 속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인 만남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는 단순한 사물로 파악되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눈앞존재자는 이미 현존재의 둘러봄(Umsicht) 속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현존재가 우선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인 눈앞존재자는 어떤 이론적인 세계에서 파악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져서는 안 된다. - 물론 하이데거에게는 이론적인 세계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어떤 세계도 결코 상정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기초존재론 내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은 존재론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조달, 들러봄은 현존재가 실용적인 관점에서 존재자와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앞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와의 관계를 충분히 예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현존재와 만나는 존재자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특성을 드러내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막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들은 결코 나와의 구체적인 관계를 나타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인 내가 책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읽어 내려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가 존재자를 눈앞존재자로만 파악하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자를 어떤 것(etwas)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현존재의 손에 쥐어져서 구체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 이러한 단계에서의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헤겔의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파악되는 사물의 존재방식과 비교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눈앞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좀더 구체적인 존재방식을 획득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부세계적 존재자가 그 자신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눈앞존재자의 존재방식을 넘어서서 보다 구체적인 존재방식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내부세계적 존재자는 우선적으로 눈앞존재자라는 존재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즉 현존재와의 만남을 벗어나 있는 존재자는 결코 상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에서는 사물 자체(Ding an sich)라는 것은 결코 상정되어질 수 없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이점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즉 현존재가 조달함에서만 존재자가 드러난다고 보는 하이데거의 입장이 데카르트적인 실체개념-실체로서 사물(res)-그리고 칸트적인 물자체의 개념을 결코 상정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1)


(3) 규정된 존재로서의 손안존재자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제시하는 또 다른 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존재자보다 더 구체적인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손안존재자(das Zuhandene)라는 존재방식이다. 그렇다면 손안존재자는 어떤 존재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손안존재자는 현존재와 가장 구체적으로 만나고 있는 존재자를 일컫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손에 쥐어져 지금 쓰이고 있는 붓의 존재방식이 바로 손안존재자이다. 지금 화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 붓은 옆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다른 붓들과는 달리 지금 화가에게서 구체적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손안존재자는 현존재의 둘러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존재자인데, 하이데거는 특히 이러한 구체적인 존재자를 도구(Zeug)라고 부른다.

도구라는 용어는 생소한 용어처럼 들리지만, 하이데거는 이 용어를 통하여 현존재에게 존재자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이데거가 손안존재자를 도구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적인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용어의 적절한 사용이 아니라, 어떻게 눈앞-존재자가 도구인 손안존재자로 존재방식을 바꾸게 되는가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현존재가 우선적으로 내부세계적 존재자를 만나는 방식은 눈앞존재자라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눈앞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에-있음(Vorhandenheit)을 통해서는 결코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자신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존재자가 현존재의 눈앞에 주어져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눈앞존재자는 현존재에게서 사용되어지는 한에서만, 즉 현존재가 어떤 구체적인 용도(Um-zu)를 위해서 손에 쥐고 사용될 때에만 구체적인 존재자, 즉 손안존재자로 변화된다. 현존재에 의해서 눈앞존재자가 손안존재자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관심에 따라서, 그 용도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사용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눈앞존재자 또는 손안존재자라고 불려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손안존재자가 가지는 존재방식은 손안에-있음(Zuhandenheit)이다. 손안에-있음의 존재방식을 가지는 존재자는 눈앞에-있음의 존재방식을 가진 존재자보다 현존재와의 더 구체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눈앞존재자가 손안존재자라는 존재자로 변환되는 과정은 헤겔이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지각의 단계에로의 변환을 언급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하이데거와 헤겔의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헤겔은 개별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일반자를 언급하는 지각의 단계에로의 이행을 발전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발전이 자신의 󰡔정신현상학󰡕의 전개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역설하지만1), 반면에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눈앞존재자에서 손안존재자로의 이행은 결코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러한 이행이 발전과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 또는 눈앞에-있음과 손안에-있음이라는 존재방식은 결코 어떤 것이 우선적인 것이라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들을 서로 상이한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현존재가 존재자와 관계하는 방식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관심에 따라서 눈앞존재자는 손안존재자로 그리고 손앞존재자는 다시 눈앞존재자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1) 예를 들면 지금 화가에게 사용되는 붓은 화가의 필요에 의해서 좀더 작은 붓으로 대체될 수 있는데, 이때에 손안존재자로서 사용되는 붓 대신에 작은 붓이 화가의 손에 쥐어지기 때문에, 이전에 사용된 붓은 다시 눈앞존재자로 그의 존재방식이 변환된다. 우리는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의 관계를 통해서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를 언급할 때 강조하려는 것이 한편으로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이 현존재에 의존한다는 점-이것은 기초존재론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후자는 현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하이데거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의 도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1)라고 말한다. 이것은 본래 눈앞존재자인 존재자가 도구로서의 손안존재자로 변환되어 현존재와 구체적으로 관계하지만, 이러한 손안존재자인 도구는 결코 독립된 존재자로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화가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서로 서로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긴밀히 연관성을 갖고 있다. 팔레트는 물감을 짜놓는데, 기름은 물감을 적당한 농도로 희석시키는데, 나이프는 물감을 떼어서 캔버스에 밀어 바르는데 쓰이는데,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각각의 도구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기름은 물감과 관계하여 물감을 녹이는데, 붓은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에 바르는데, 팔레트는 물감을 짜서 희석시키는 장소로 등등. 각각의 도구들은 서로의 용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내주는데, 이런 점에서 도구들은 그것이 손안존재자인 한에서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이러한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도구전체(das Zeugganze)라고 부르며, 각각의 도구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관계를 지시(Verweisung)라고 부른다.

지시라는 용어는 손안존재자로서의 도구들이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잘 나타낸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7절에서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시의 기능을 표시(Zeichen)라는 용어로 나타내는데, 이것은 손안존재자로서의 도구들이 서로 긴밀하게 자신들의 존재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이상하다면 그것은 엔진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도구 또는 도구들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표시한다.

손안존재자의 존재는 이러한 지시와 표시라는 구조를 가지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서 도구들의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도구들이 오로지 현존재의 둘러봄(Umsicht) 속에서 쓰여질 때만 그 연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표시의 나타남, 즉 망치의 망치질은 존재자의 속성이 아니다”1)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시와 표시라는 역할은 현존재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의 둘러봄 속에서 드러나는 손안존재자인 도구들의 존재특성을 쓰임새(Bewandtnis)라고 부른다. 쓰임새는 손안존재자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현존재의 실천적인 둘러봄 속에서 파악되어진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용어이다. 도구들은 현존재에 의해서 쓰여지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쓰임새를 갖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구들 하나하나가 쓰임새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구들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현존재에 의해서 도구들은 그 각각의 쓰임새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적인 용도(Wozu)는 무엇을-위함(Worum- willen)이다. 무엇을-위함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러한 존재가 본질적으로 문제인 현존재의 존재와 항상 관계한다.”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8절에서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 갖는 내적인 관계를 “유의미”(Be-deutung) 그리고 이러한 내적인 관계성 전체를 “유의미성” (Bedeutsamkeit)이라고 부른다. 유의미는 각각의 존재자들이 갖는 지시와 표시가 현존재에 의해서 파악될 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유의미성은 현존재가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용어이다. 이런 점에서 유의미와 유의미성을 현존재가 존재자들의 존재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자신의 현상학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 현존재중심적인(daseinszentrisch) 하이데거의 입장을 적절하게 나타내주는 것이다.

우리는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자를 파악하는지를 존재자의 존재방식, 즉 눈앞에-있음과 손안에-있음의 언급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이 절대적으로 현존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가 도구라고 부르는 손안존재자의 존재방식은 존재자의 존재가 얼마나 현존재에 의존적인가를 잘 나타내 준다. 이런 점에서 󰡔존재와 시간󰡕 15-18절에서 언급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그 의미상 구분되어져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18절 끝 부분에서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우선적으로 만나는 내부세계적 존재자1)의 존재(손안에-있음), 두 번째로 손안존재자로 발견될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는 눈앞존재자의 존재(눈앞에-있음) 그리고 세 번째로 존재자를 눈앞존재자 또는 손안존재자로 만드는 현존재의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세 번째의 존재방식을 “실존론적”(existenzial)이라고 부르면서, 앞의 두 가지 존재방식과 구분하고 있다.1) 왜냐하면 눈앞존재자와 손안존재자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제시하는 결과의 일부분인데, 이러한 결과는 하이데거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존재를 기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감성적 확신과 지각 그리고 오성의 단계에서 어떻게 사물의 존재가 드러나는지 그리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어떻게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즉 의식을 통해서 어떻게 존재가 현상되는가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현존재에게 존재자가 드러나는 과정을 기술한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는 ‘현상’이라는 용어가 공통분모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헤겔과 하이데거는 소위 칸트철학의 결과였던 현상계와 물자체의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물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논리적이든 존재론적이든-의식과 현존재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과 하이데거는 서로 다른 철학적인 내용을 전개한다는 것이 간과되어져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망각의 역사”(Geschichte der Seinsvergessenheit)라고 단정하면서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하는데, 이때에 헤겔의 존재이해도 이러한 비판대상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비록 의식이 직접적으로 주어진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사물의 존재를 감지하지만, 이것은 의식의 작용을 통해서 반드시 매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의식에게 주어진 직접성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좀더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단계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의식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을 거쳐 절대적 의식(절대자)의 단계까지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존재를 매개하는 것, 즉 개념적 사유라는 것을 존재파악의 중심내용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하이데거에게는 이러한 개념적 사유란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는 결코 사물의 존재를 올바르게 기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현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개념적 파악의 과정은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자를 만나는 것은 이론적인 파악 속에서가 아니라 현존재의 구체적인 들러봄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는 이러한 만남은 인식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는 헤겔과는 달리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의 우위가 존재한다.

끝으로 논자는 한편으로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존재개념을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인식론, 존재론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이해에 대한 논의가 별도로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양자의 존재개념에 대한 이해가 시기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이들이 후기에 전개하는 존재개념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