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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人間自由論

by 윈도아인~♡ 2012. 3. 17.

永遠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人間自由論

신창석 /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1. 어떻게 자유를 논할 것인가?

현대에 인간의 절대자유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사르트르이다. 그는 물론 사생활에 있어서도 최초로 시몬느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이라는 것을 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것도 절대자유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의지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절대자유의 주장에 대해 독일의 어떤 현대 스콜라철학자는 여담 삼아 이렇게 꼬집었다고 한다. “자식을 한번 키워봐라. 자식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있겠는가? 사르트르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절대자유를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자유를 주장할 자격조차 없다.” 이는 물론 절대자유에 대한 논리적 반격이라기보다는 강의 시간에 잠깐 나온 여담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물론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지만, 과연 온전히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사르트르가 절대자유를 주장한 것은 세계 제2차 대전의 충격에 따른 후유증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자유는 어떤 대립 개념과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의미와 영역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즉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느냐에 따라서 자유 자체의 종류도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진다.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강제로부터의 자유는 강제를 극복할 만한 힘을 말한다.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압박해오는 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을 말한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는 풍요를 말한다.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는 충분한 용기를 말한다.

규제로부터의 자유는 상위의 규제나 규제의 초월을 말한다. 숙명으로부터의 자유는 운명의 자기 성취를 말한다. 예정으로부터의 자유는 지정된 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말한다. 특정 신분으로부터의 자유는 사회의 개혁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각각 사용되는 자유의 의미는 그 때마다 다른 영역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대립개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자유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유의 언어적, 사회적 출처를 출발점으로 하여 인간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철학적 근거를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을 따라 고찰할 것이다.


2. 자유 개념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서구적 의미의 자유 개념은 언어적으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법을 기초로 헌법을 만들게 되었고, 그 헌법에 로마법에 기초하는 서양의 자유libertas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자유는 개념 이전에 사회 생활의 신분을 통해 구축되었다.
서구 사회는 일찍이 계급사회였으며, 대체로 자유인과 노예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노예servus에 반대되는 계급이 자유인liber, liberalis이었으며, 이 형용사적 명사인 리베르(자유인)로부터 추상개념으로서의 자유라는 이념과 사상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자유인과 노예는 사회계층을 나타내며, 사회계층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의미하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권력구조에서 비롯된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주해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1) 이에 대한 토마스 주해는 다음과 같다. “노예는 주인에게 속하며,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반면에, … 자유인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2) 결국 자유 개념은 노예와 자유인이라는 권력구조를 통하여 파생되었으며, 지배와 피지배라는 인간적 현실을 통하여 대두된다. 아니나다를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행복을 묻는 질문에서 이러한 권력 구조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가장 인간적 고통과 비극을 초래한다.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가장 좋은 것이 행복임에 틀림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권력인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행복이란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고, 가장 원하는 것은 가장 싫어하는 것과 正반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의 종(노예)처럼 사는 것이므로,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남을 종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3)

물론 이 구절은 행복이 권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논술적 기술에 따라 앞으로 부정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대론對論이다. 본론에 가서 토마스는 권력은 행복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실상은 모두들 남을 종처럼 부리는 권력을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남의 종처럼 사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남의 종처럼 사는 게 싫다면, 남을 종처럼 부리는 것도 싫어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 비극에서 권력자와 노예의 구조가 태동하며, 이 구조에서 자유와 구속의 개념이 발전되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자유의식도 사회적 상황을 넘어서서 자아 성취와 자기 만족의 관점에서 고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는 행위의 방식을 의미하며, 행위의 자유 내지는 결정의 자유는 인간 운명의 예정과 대립되게 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예정과 자유의 대립이라는 관점에 국한해서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다.


3. 인간의 행위는 예정된 것인가, 자유로운 것인가?

인간의 가장 큰 철학적 관심 중에 하나는 자신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 물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 행위行爲에 이르게 되었는가? 나는 내 자신의 자유로 이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어떤 불가항력적이고 의식할 수 없는 어떤 숙명에 의해 이 행위를 하게 되었는가? 나아가 매 순간 순간의 행위가 결국 한 생애를 이루기 때문에 삶 전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운명 전체에 대한 물음도 결국 내가 도대체 어떻게 지금 이 행위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속에 집약되어 있다.

즉 나의 운명 전체는 내 자유에 달린 것인가? 아니면 어떤 숙명으로 예정된 것인가?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는 하나 하나의 외적 행위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행위의 결과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생각, 바로 이 “내적 행위”(결정, 결단)에 이르게 되는가? 이 물음은 또다시 두 가지 물음으로 압축된다. 즉 이 생각은 이미 예정豫定되어 있었는가? 아니면 내 자신의 자유自由에서 비롯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예정”과 “자유”의 갈등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 논쟁 역사와 문제 제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사상가들은 행위의 자유로운 공간을 긍정하거나 부정해 왔다. 자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물론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좌우되었다. 나아가 인간의 행위나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가, 자유自由로운가 하는 주장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때로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논쟁의 승패가 논쟁자들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했다. 행위의 예정과 자유에 대한 주장은 단순한 논리나 학문적 관심을 넘어서서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좌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인간의 행위가 처한 “예정”과 “자유”의 갈등을 문제시 삼은 것은 기원전 그리스의 스토아Stoa학파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학적自然學的 관점에서 행위의 자유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자연(본성)은 어떻게 이성적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의 고유한 행위를 위한 자유의 공간을 획득할 수 있는가? 즉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따라 자연을 파악한다.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이성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자연적 변화의 필연성이나 인과관계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적 이해의 방식은 자연의 필연적 방식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새가 날아간다”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소나무가 날아간다”라고 하면 불가해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 역시 필연적 법칙성에 동화하여 작용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필연적 법칙성을 이해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 법칙성에 따라 작용하는 이성적 인간의 행위나 운명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이성 역시 필연적 법칙성을 따르는데, 이성이 어떻게 자유로운 행위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인가? 즉 이성의 법칙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적 작용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간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기원 후 5세기에 이르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펠라지우스Pelagius는 인간행위의 예정과 자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정과 자유의 갈등이 종교적宗敎的 관점에서 문제시되며, 극단적 논쟁으로 전개된다. 즉 인간 운명의 궁극적 관심사인 구원은 하느님에 의해 미리 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와 업적에 달려 있는가? 구원은 하느님의 절대적 은총이라고 강조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개개인의 구원 역시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던 펠라지우스는 구원도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훗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행위의 자유로운 부분을 인정하지만, 여기서는 사회적 상황을 추월하여 자유를 강조하던 펠라지우스가 단죄된다.

이 논쟁은 또 다시 9세기에 이르러 고트샬크Gottschalk와 에리우게나Eriugena 사이에서 반복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한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政治的 관점에서 좌우된다. 즉 고트샬크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예정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거나, 아니면 악마의 나라에 속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구원이 개인의 업적과 무관하게 결정된 것이라면, 결국 인간은 이 세상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을 필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트샬크의 예정설은 당시 강력하던 카롤링 왕조와 세계화를 시도하던 가톨릭 교회의 의도에 반대되었다.

카롤링 왕조는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가톨릭 교회는 세계로 나아가려는 선교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이들의 의지를 위협하던 고트샬크의 예정설이 견제되었다.반대로 에리우게나는 주장하기를,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선善하시기 때문에 어떤 죄인의 파멸도 원할 수 없다고 한다. 악을 원하는 것은 절대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은 그야말로 超시간적으로 영원하므로, 아무것도 미리 보지 않고, 예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미리 정하고 늦게 일어난다는 식의 발상 자체는 시간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원성은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영원을 초월한 영원성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本質은 自由이다. 그래서 에리우게나는 죄인에 대한 처벌도 잘못 행사한 자유의 대가이며, 그 후회가 바로 지옥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리우게나의 자유론 또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구원에 필수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약화시키고, 카롤링 왕조의 법적 질서를 방해했기 때문에 단죄되었다.
그 후 14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하느님의 예정과 개인의 자유를 절충시키려는 고찰이 시도되었다. 근대로 오면서 칸트Kant는 자연적 필연성이 가지는 인과적 기계론causal mechanism과 인간의 도덕적 자기 규정을 분리시키고자 노력했다. 물질적 변화는 인과적 기계론을 따르며, 인간의 정신적 결정이나 자기 규정은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라이프니쯔Leibniz는 스피노자Spinoza에 반대하여 의지의 자유를 확고히 정립하고자 했다. 또한 헤겔은 세계와 역사를 지배하는 절대자를 설정했으나, 이에 반대한 개인의 결단이 대두되기도 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하이데거는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인본주의 편지》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대한 “예정”과 “자유”의 갈등은 각각의 시대가 직면한 여러 가지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점에서 달리 고찰되어 왔다.

또한 각각의 주장은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부정되기도 했으며, 찬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세기를 거듭하면서 늘 새로이 포장된 채 다루어졌지만, 자유의 문제는 여전히 인간의 영원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갈등의 역사가 불필요했고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실 이런 사상적 갈등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의식을 성숙시켜 왔으며, 동시에 결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 현실적 유한성에 순응하는 이치를 깨달아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숙명이며,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수많은 구복신앙이나 샤머니즘은 이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정해진 숙명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구복신앙이나 샤머니즘이 태동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운명이 예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가 자유로이 이루어진다는 강력한 증명이 필요하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숙명과 자유라는 주제가 가진 현실적 역동성을 파악하고 이를 거론하였다. 그렇다면 토마스의 논쟁을 살펴보는 가운데 자유의 철학적 근거가 드러날 것이다.

3.2. 예정과 자유의 논증을 위한 전제

인간의 생애 전체는 행위의 연속이며, 그 행위들의 연결을 운명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인간의 운명이 숙명인가 자유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달려 있다. 내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사과를 먹을 것인지 배를 먹을 것인지는 손이나 입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손을 움직이고 입을 움직이는 근육에 달린 것도 아니요,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조직에 달린 것도 아니다.

이러한 운동의 연속은 원천적으로 내 생각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사과를 먹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것은 사과를 먹겠다는 생각에 달려 있으며, 이 생각에 따라 신경조직, 근육, 손, 입이 움직여 결국 사과를 먹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바로 사과를 먹겠다는 이 생각, 이 결정에 도달할 때, 이 결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인가 아니면 온전히 내 생각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내가 오늘 사과를 먹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해보자.

만약 사과를 먹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면, 첫째 그 예정된 노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미리 존재했어야 할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그 사과도 내 입에 들어오도록 어떤 여정을 통해 결정된 노정을 밟고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나의 결정을 바로 이 예정된 노정으로 움직이게 하는 현실적 영향력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즉 사과를 먹기로 내가 결정하도록 하는 어떤 현실적 영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 역시 예정되어 있다면, 그 개인의 변화나 행위는 물질들의 상호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작용하는 모든 예정된 노정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금 이 사과가 아침 식탁에 오르려면, 농부가 바로 그 사과나무를 키워야 하고, 나무는 영양을 받고 햇볕을 받아 결실을 맺어야 하며, 또한 특정의 상인이 상점으로 운반해야 하고 또 누군가가 바로 그 사과를 구입해야 하며 등등 끝없이 연결되는 수많은 물질적 운동이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물질적 변화는 결국 천체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어 있다. 천체 내의 모든 물질적 구성 성분이나 요소는 상호 작용과 반작용의 연결 고리를 통해서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 전체로서의 천체(우주)의 변화와 사과를 먹겠다는 나의 구체적 결정 사이에는 결정적인 상호 작용력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자로 가득한 우주에 있어서 하나의 작용은 다른 하나의 작용과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물과 사물간의 공간도 존재자요, 시간도 하나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존재로 가득 찬 천체(우주)에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모든 사물과의 상호 영향력이 없이 변화하거나 행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 자연과학은 이미 천체의 전체적 변화變化가 지상의 개별적 사물이나 물질(물체)에 끼치는 물질적 영향력影響力을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양의 변화나 달의 기울기가 밀물, 썰물, 해일, 태풍, 공기 밀도 등의 기상 변화에 미치는 영향과 태양 빛과 달, 행성의 기울기에 따른 기상 변화가 인간의 감성과 생리작용 그리고 심리적 변화에 끼치는 영향력을 현대 과학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생물학에서도 태양 빛과 온도 그리고 행성간의 인력이 생명체의 성장과 운동에 끼치는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과학의 증명을 토대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이런 천체의 변화가 인간의 행위를 조정하는가? 그것도 이미 설정되어 있는 어떤 노선과 구체적으로 일치하는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운전하는가? 여기서 천체의 변화와 인간 행위의 변동 사이에 있는 어떤 상관관계가 증명證明된다면, 결국 인간의 운명은 예정된 노선을 가지고 있고, 이 노선으로 운전된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상관관계가 반증反證된다면, 인간의 행위와 운명은 자유로운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대전》 제1부(Summa Theologica, Ia)에서 “천체가 인간적 행위의 원인이겠는가?”4)를 묻고 있다. 천체와 인간적 행위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의 반증은 다음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즉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항상 영향을 받는 것의 존재 방식에 따라 영향을 끼친다.” 이 세계는 즉 소리는 소리에 울리는 것에 소리로서의 영향을 미치며, 열은 열에 반응할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에 영향을 끼친다.

물론 이 세계는 물리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천체는 순수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에,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의 행위가 천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 중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물질적 차원에 있느냐에 따라서 물질적 천체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순수 물질적 존재인가? 아니면 물질적이고 육체적 부분 이외에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은 육체적 기초를 이루는 물리(물질)적인 부분realis 뿐만 아니라, 식물(생명)적인 부분vegitabilis, 동물(감각)적인 부분animalis 그리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부분rationalis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의미의 인간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부분 내지는 영혼이 마비되었다면, 그는 정신 이상자 내지는 금치산자일 것이다.

나아가 감각적 부분이 마비되었다면, 그는 식물인간일 것이다. 심지어 식물적 성장 내지는 작용기능마저 정지되었다면, 이제 그는 모든 생명성이 빠져나간 순수물질로 남을 것이요, 이제 그의 다양한 물질적 구성요소는 성장하거나 살아있는 육체로서 기능하지 않고 원래 그 물질의 변화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즉 육체 속의 수분은 증발하거나 부패하고, 나머지 물질적 요소들도 마르거나 분해되면서 원래의 물질적 변화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학적으로는 사망exitus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온전한 인간의 물질적 구성 요소에는 식물적 생명이 배어 있고, 생명적 구성 요소에는 감각적 생명이 배어 있고, 감각적 구성 요소에는 정신ratio, mens적 생명, 즉 영혼이 배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천체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것에 영향을 끼치므로, 물리적 영향력으로 생명력에, 생명력에 대한 영향으로 감각에, 생명력과 감각에 대한 영향으로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인간은 바로 이 정신에 따라 행위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향 자체에 있어서 영향을 주는 것은 영향받는 것의 전제조건이고, 영향을 주는 전제조건은 영향받는 것에 단순히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성의 구체적인 방향, 강도, 양, 질을 동시에 미리 결정한다. 구르는 당구공이 가진 방향, 각도, 속도 등이 고스란히 타격 하기 이전의 큐cue에 실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인간 정신의 결정 방향, 강도, 속도도 천체의 변화에 따른 물리적 변화에 달려 있다는 것이 예정설의 기초이다.

그런데 이런 논증의 결론은 이미 정신이나 영혼을 물질의 분비물로 보는 유물론적 대전제와 자연 변화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인과적 기계론causal mechanism의 법칙성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논증은 정신이 물질의 분비물이라는 사실과 기계적 필연성만이 자연 변화의 법칙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 즉 정신이나 영혼이 일종의 물질성이라는 것과 이 세계에는 물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때에만 성립된다.

이 세계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살아있는 자와 시체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살아있는 자의 육체적 변화와 시체의 변질 방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국 자유의 문제는 여기서 물질과 非물질, 즉 물질과 생명성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로 전이된다. 물질을 원래의 변화 방식과는 다르게 움직이게 하거나 변화하게 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3.3. 자유의 근거로서의 생명 혹은 영혼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인간적 특성을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다. 인간만이 가지는 가장 인간적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라 불릴 수 없고, 인간으로 행세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서양철학에서 물질에 대립하는 생명 내지는 그 자체로 非물질인 바의 생명 그 자체는 혼魂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적어도 생명이라 불리든 혼이라 불리든 非물질이라는 의미에서는 동등한 존재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즉 물질적 구성물로서의 육체를 살아있도록 하는 것을 생명이라 부르는데, 생명 그 자체는 물질과는 다른 존재론적 차원에 있으므로 결국 혼이라고 명명된다. 여러 가지 생명의 차원 가운데서 특히 인간의 생명을 영혼anima rationalis이라 부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영혼이란 우리 안에 살아있는 생명의 제일 원리이다anima dicitur esse primum principium vitae in his quae apud nos vivunt”라고 정의한다.5) 이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살아있다vivere, vita는 말의 의미와 원리principium, arche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1) 먼저 원리原理란 어떤 사태나 과정의 출발점을 뜻한다. 그래서 어떤 사태의 출발점으로서의 원리는 그 사태의 원인causa, aitia과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여기에 하나의 선線이 현존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선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원리는 무엇인가? 즉 그 무엇에 의해 그리고 그 무엇을 출발점으로 하여 여기에 하나의 선이 현존하게 되었는가? 먼저 원인이란 결과의 대립 개념으로서,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왜라는 물음의 대답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 이 선이 존재하는가?

그 선을 그은 사람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선의 원인原因은 선을 그리고자 생각하고 실행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면 이 선은 어디서부터 현존하기 시작하였는가? 이에 대한 대답에 해당되는 것이 그 선의 원리principium이다. 선 그 자체로 고찰할 때, 선은 이 점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이 선의 원리는 점點이다. 그리고 이 점은 현실적으로 그 다음에 따라나오는 선과 동질의 것이다. 즉 이 선이 분필가루로 구성되어 있으면, 선의 원리인 이 점도 분필가루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인은 결과結果와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는 반면에, 원리는 그 결과結果와 동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영혼이란 생명의 제일원리第一原理라는 정의에 의하면, 결국 영혼은 생명의 출발점이요, 생명과 동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2) 살아있다는 것은 혼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살아있다고 부르는가? 토마스는 《철학대전》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든 살아 있다는 말을 쓰는 것은, 그것들이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에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크게 지각되지는 않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유사한 의미로 살아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빗물 통의 물이나 고인 물은 살아 있다고 하지 않지만,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살아있는 물’(生水)이라 하며,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銀(수은)에 한에서도, ‘살아있는 은’(生銀)이라 부른다. 물론 魂이 있는 것(생물)과 같이, 움직이게 하는 것과 움직여지는 것이 합성되어서 그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들만이 본격적 의미에 있어서 그 스스로 움직인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단지 생물에 대해서만 본격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외적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며, [그 외적인 것이야말로 움직임을] 야기 시키거나, [움직임에 방해되는 것을] 격리시키거나, [어떤 것을 움직임 안에] 놓는다. 감각 작용도 움직임(變化)과 함께 있기 때문에, 감각 자체의 고유한 작용을 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여, 비록 그 작용(活動) 자체는 움직임과 무관해도, ‘살아있다’고 불린다. 따라서 인식 행위, 욕구 행위, 그리고 지각 작용도 살아 있는 행위이다.”6)

인용문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토마스는 아주 상식적 측면에서 영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런데 생명체란 일반적으로 魂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살아 있는 것에 대해 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외적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이든 생명이든 그 자체는 관찰이나 경험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혼을 가진 생명체나 생명체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뿐 혼이나 생명 그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어떤 외적 현상은 결국 그 현상의 근원이나 원리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근거나 출발점이 없는 사실적 현상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이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자세히 분석해 보면, 결국 움직여지는 것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합성되어 있다. 그리고 오직 이렇게 움직여지는 것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만이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요, 생명체이다. 여기서 움직여지는 것은 생물의 물질적 부분, 즉 생물의 신체에 해당된다. 그래서 생물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부분은 그 자체로는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반면에 그 물질적 부분을 움직이게끔 하는 것, 즉 신체를 살아있게끔 하는 것은 최소한 물질적인 것인 것일 수 없다.

생물의 물질적 부분은 움직여지는 부분이지 움직이게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명의 원리는 물질적 부분을 그야말로 하나의 그렇게 살아 있는 신체로 규정하게끔 하는, 즉 인간의 경우 하나의 살아있는 육체로서 움직이게끔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리는 살아 있는 육체의 현실태現實態이다. 여기서 육체는 “살아있음”(생명존재)을 현실태로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가능태요, 살아있을 수 있는 재료요 기초로 파악된다. 그래서 생물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움직여지는 부분(물질적 부분)은 그 부분을 움직이게끔 하는 부분의 존재방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즉 각각의 움직여지는 부분은 성장혼(식물혼anima vegetabilis)과 결합함으로써 식물이 되고, 감각혼(동물혼anima animalis)과 결합함으로써 동물이 되고, 영혼anima rationalis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된다. 성장하는 것에 있어서 물질을 재료로 성장하게끔 하는 것이 성장혼成長魂이요, 감각하는 것에 있어서 감각하게 하는 것이 감각혼이며, 사고하는 것에 있어서 사고하게끔 하는 것이 영혼이다. 그러므로 최하위 단계에서 물질적인 것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성장혼이요, 성장혼이 깃들어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감각혼이요, 감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영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지향하는 현실태이다. 즉 영혼은 가능성 내지는 재료로서의 육체를 규정하는 제일의 실체적 현실성이다. 여기서 눈, 귀, 입과 같은 육체의 각 부분들은 영혼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에 있어서 이차적인 것이요, 보고, 듣고, 말하는 작용을 야기시키는 이차적 원리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는 근본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리에 속하며, 자유는 이러한 영혼의 기능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영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기도 한다. “영혼이란 생명을 가질 수 있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연적이고 조직적 육체의 제일 현실태(행위)이다quod [anima] est actus primus physici corporis organici potentia vitam habentis.”7) 여기서 인간의 생명으로서의 영혼은 오직 수동태일 뿐인 인간의 물질적 부분을 움직이게 하는 제일의 현실태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수동적 육체의 능동적 부분이며, 이러한 능동의 방식에 대해 우리는 자유인가, 아니면 예정인가를 물을 수 있다.8)

3.4. 영혼(정신)에 있어서 자유의 증명

살펴본 바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생명生命의 다양한 종류가 가지는 존재론적 차이를 간과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발견되는 非물질로서의 생명체는 생명성의 차원에 따라 3가지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의 생명성이 물질을 원래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데도 세 가지 형태의 결합이 발견된다. 물질과 식물적 생명의 결합, 다시 말해서 식물이 되기 위한 물질과 성장혼의 결합이 있다. 나아가 물질과 성장혼의 결합에 감각혼이 더해지는 결합, 즉 동물이 되기 위한 결합이 있다. 마지막으로 물질과 성장혼, 감각혼의 결합에 영혼(정신)이 더해지는 결합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의미의 인간이 되기 위한 결합이다.

여기서 토마스는 생명이 물질적인 것에 배여 있는 종속성(식물)과 감각이 생명체에 배여 있는 종속성(동물) 그리고 영혼(정신)이 감각성에 배여 있는 종속성(인간)은 동일한 방식의 종속성이 아니라, 각각 전혀 다른 방식의 종속성從屬性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은 정신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간의 영혼(정신)은 이성理性과 의지意志라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이성과 의지가 얼마나 물질적 영향력 아래 있느냐에 따라서 정신 행위의 예정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성과 의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물질적인 것이나 천체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이성의 정신적 인식은 감각이 전달해 주는 감각적 인식 내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감각은 물체로부터 표상이나 초상을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개념을 파악하고 명제(문장)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작용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이나 물체의 물리적 영향권에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물론 의지도 어떤 면에서는 물질과 직결된 물리적이고 생리적 욕구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의지의 직접적 대상은 감각적 사물事物이 아니라, 이성이 전해 주는 정신적 개념槪念이다. 심지어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자신의 “욕구”라는 개념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단호히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우선적으로 의지의 할 일이다.

사실 의지는 감각의 영향을 받는 이성의 인식 결과를 자신의 의욕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意志는 이러한 대상을 의욕意慾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적어도 理性보다는 물리적 영향권을 넘어서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인간적 행위는 본능이나 감각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이성으로 심사숙고한 정신적 대상을 의지로 결정하는 행위이다. 물론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는 대체로 감각적 욕구를 따른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비록 인간이 행하는 인간의 행위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서 행하는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와는 구별된다.

토마스는 이성intellectus으로 숙고하고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liberum arbitrium하여, 자기 자신의 권리potestas로 행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행위를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행위란 그야말로 감각이나 본능의 영향권을 벗어나 이성적 척도로 재고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는 감각적인 것을 직접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인식하여 제공하는 개념적인 것을 선택한다. 즉 사고의 세계에서 성적 욕망이냐 참된 사랑이냐, 재물이냐 명예냐, 복종의 안락함이냐 자유의 고통이냐, 실리냐 명분이냐, 구차한 연명이냐 장렬한 자기희생이냐 등을 숙고하여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의지 행위이다.

심지어 의지는 이러한 선택을 위해 만물이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 “자체 보존의 법칙”을 초월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의 의지는 이성의 눈에 자신의 자체 보존보다 더 높은 것으로 비치는 어떤 초현실적인 것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나 자기 자신의 보존 자체를 희생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의지를 통해 자기 자신의 극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물리적 세계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이성은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는 사랑, 의리, 영원성, 자유, 행복 등을 자기 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의지는 이렇게 파악된 것을 자신의 보존을 넘어서까지 갈구할 수 있다.9)


4. 의지의 자유와 자기 예정

결국 의지의 선택 대상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제공하는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지의 결정은 천체의 영향권밖에 있다. 천체의 변화와 의지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상관 관계도 설정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의지를 운전하는 의지 외적 영향력이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영향력이 없는 한 예정된 노정이라는 가설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인간 자신이 물리적 세계에 몸담고 있는 한, 인간의 운명도 물리적, 생리적 관점에 국한해서는 예정되어 있으며, 결국 예언가나 점술가들도 물리적이고 감각적 세계의 흐름을 간파하여 이와 직결된 인간의 행위나 운명을 부분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떤 구체적 행위의 선택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이고 본능적 능력을 사용할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지는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의지에 의한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다.

그리고 예정이나 필연의 가능성은 이러한 의지의 선택 행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지가 선택한 사항이나 목적에 따른 제2차적 행위, 즉 의지의 선택 사항을 수행하기 위한 세부적 행위 내지는 외적 행위야말로 그 이전의 선택 사항에 의해 예정되며, 그 선택에 대해 필연성을 가지게 된다. 즉 목적으로서의 “서울행”을 의지가 결정한다면, 그 다음에 서울로 가는 행위는 “서울행”이라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필히 예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의 선택 능력에는 자유를 설정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을 수행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외적 행위에는 예정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정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지, 의지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예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적 행위는 자기 운명의 의미와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여정이나 방법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 앞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며, 선택의 자유는 행위로 실현된다. 나아가 자유로운 행위는 언제나 목적을 위한 행위다. 따라서 자유 그 자체는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그것도 목적 즉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최종목적인 바의 행복 앞에서는 자유가 없다. 인간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인 반면에, 궁극목적으로서의 행복은 선택이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언제나 좋은 것, 선, 선으로 보이는 목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좋은 것으로서의 선은 현실적으로 나에게 차등적으로 대두된다. 즉 나에게 대두되는 선善이나 목적들은 현재 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상황, 관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대두된다. 즉 내 앞에 대두되는 개별적 선이나 목적이 얼마나 나의 궁극적 행복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이성적 인식과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결국 한번의 자유를 행사하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자유와 동시에 책임이 주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비싼 동전의 뒷면은 책임이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아이러니이다.


<각주내용>

1) Met.[Aristoteles, Metaphysia], 1, 2, 982b; 25 이하.

2) In met.[=Thomas Aquinas, In Metaphysica], 1, c.3.

3) S.Th[Summa theologica], Ia-IIae, q.2, a.4, obiec.3.


4) S.Th. Ia, q.115, a.4: Utrum corpora caelestia sint causa humanorum actuum.

5) S.Th. I, q.75, a.1, c.a.

6) Summa contra Gentiles. I, 97, n.3: Vivere secundum hoc aliquibus attributum est quod visa sunt per se, non ad alio moveri. Et propter hoc illa quae videntur per se moveri, quorum motores vulgus non percipit, per similitudinem dicimus vivere: sicut ‘aquam vivam’ fontis fluentis, non autem cisternae vel stagni stantis; et ‘argentum vivum’, quod motum quendam habere videtur. Proprie enim illa sola per se moventur quae movent seipsa, composita ex motore et moto, sicut animata. Unde haec sola proprie vivere dicimus: alia vero omnia ad aliquo exteriori moventur, vel generante, vel removente prohibens, vel impellente. - Et quia operationes sensibiles cum motu sunt, ulterius omne illud quod agit se ad proprias operationes, quamvis non sint cum motu, dicitur vivere: unde intelligere, appetere et sentire actiones vitae sunt.

7) S.c.G. II, c.61; STH I, q.76, a.4, ad 1.

8) 신창석, 《성공적 행위를 위한 테마철학》, 대구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76면 이하 참조.

9) 신창석, 《성공적 행위를 위한 테마철학》, 대구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51면 이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