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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개선론/ 스피노자 (완역본)

by 윈도아인~♡ 2012. 3. 17.

지성 개선론/ 스피노자 (완역본)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Written by Spinoza, Baruch de(1632~1677)

 

 

 

지성의 개선에 대한, 또한 지성이 사물의 참된 인식으로 이끌어 주는 최선의 길에 대한 논문

나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부딪치는 매사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으며, 또 공포의 원인이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고 다만 그것에 의해 마음이 동요되는 한에서만 선도 되고 악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마침내 이렇게 결심했다.

곧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선으로서 일체의 다른 것을 버리고 오직 그것에만 마음이 감동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 오히려 한번 그것을 발견하고 획득하면 끊임없이 최고의 기쁨을 영원히 향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를 탐구하기로 "마침내 결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얼핏 보기에는 현재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곧 명예나 부가 여러 가지 이익을 얻게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내가 다른 새로운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명예나 부를 가능케 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경우, 만일 최고의 행복이 이러한 이익에 내포되어 있다면 나는 그러한 행복을 잃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사실은 이러한 것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도 오직 이것만을 위해서 노력했다면 나는 역시 최고의 행복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생활의 질서와 일상의 방식을 변경시키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가, 혹은 적어도 이에 대해 확실한 전망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최고의 선이라고 평가하고 있는―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다음 세 가지, 곧 부와 명예와 쾌락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로부터 우리들의 정신은 다른 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는 정도로 방해를 받는다. 우선 쾌락에 대해 말한다면 마음은 쾌락의 포로가 되어 마치 이것이 안주해도 좋을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때문에 다른 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크게 저지당한다. 한편 이러한 환락 다음에는 깊은 슬픔이 따르고 이 슬픔은 정신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을 혼란시키고 둔하게 만든다. 명예와 부를 추구해도 역시 정신은 적지 않게 혼란을 일으킨다. 특히 부가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될 때에는.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부를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에 의해 정신은 더욱 혼란을 일으킨다. 곧 명예는 언제나 그 자체가 선으로 생각되어 일체의 행동이 지향하며 궁극목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명예와 부)에 있어서는 쾌락의 경우처럼 후회가 따르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들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라도 소유하면 그럴수록 우리들의 기쁨은 증대하고 그 결과로 점점 더 이것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어떤 경우에 우리들의 희망이 배반당하면 깊은 슬픔이 생긴다. 끝으로 명예는 이것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사람들의 상식(captus)에 순응시켜야 하기 때문에 곧 사람들이 보통 피하는 것을 피하고, 사람들이 보통 구하는 것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것이 새로운 계획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그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나는 무엇이 나에게 더 유리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불확실한 선을 위해서 확실한 선을 포기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이 문제를 숙고해 보고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내가 곧 부와 명예와 쾌락을 버리고 새로운 계획에 전념한다면 앞에 말한 것에서도 명확히 귀결되듯이 그 본성상 불확실한 선을―그 본성상으로 불확실하지는 않지만(나는 부동의 선을 구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획득에 대해서 불확실한 선을―위해 그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또 계속해서 성찰한 결과 이 경우 오직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한 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악을 버리고 의심할 여지 없는 선을 얻으려고 노력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매우 위급한 위기에 놓여 있어서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전력을 기울여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약을 쓰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중환자가 그의 모든 희망을 이 약에 걸고 있어서 아무리 얻기 어려운 약이라도 이를 전력을 기울여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참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이미 우리들의 생존 유지를 위해 아무런 약도 공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즉, 부·명예·쾌락 등은 만일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이를 소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멸망의 원인이 되고, 반대로 이러한 것에 소유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부 때문에 박해를 받아 죽은 사람들의 예나, 재산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모험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생명을 우행(愚行; 어리석은 행위)의 대가로 치른 사람들의 예는 허다하다. 명예를 얻기 위해 또는 지키기 위해 비참한 고통을 맛본 사람들의 예도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끝으로 과도한 쾌락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사람들의 예는 무수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러한 재앙은 나에게는 모든 행복 또는 불행은 오직 우리들이 애착을 갖는 대상의 성질 여하에만 의거한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것만 같았다. 진정 사랑하지 않는 것을 위해서는 싸움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이 없어졌다고 해서 슬픔이 끓어오르지도 않고 남이 소유했다고 해서 질투가 생기지 않는다. 아무런 공포, 아무런 증오, 한마디로 말하면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로 이러한 모든 일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말해 온 가멸적 사물(可滅的 事物; 멸망할 가능성이 있는 사물)을 사랑할 때만 생긴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순수한 기쁨으로 마음을 채우고, 따라서 일체의 슬픔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이야말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며, 또한 모든 힘을 기울여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나는 '오직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한'이라는 말을 이유없이 사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바를 정신적으로는 이렇게 명료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나는 소유욕·관능욕·명예욕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단 한가지 분명히 알게된 것이 있었다. 곧 이러한 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동안만은정신이 위에서 말한 욕망으로부터 떠나 열심히 새로운 계획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매우 큰 위안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악이 어떠한 대책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사정에 있는 악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안에 처음에는 드물고 매우 짧은 동안 지속되었지만, 참으로 선한 것이 차츰차츰 나에게 명백해졌고 이것이 더 자주, 또 오래 지속하게 되었다. 특히 내가 화폐·관능욕 및 명예욕은 그 자체를 위해 추구하는 한,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을 얻는 수단으로 추구하지 않는 한, 유해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에 그렇다. 왜냐하면 만일 이러한 것들을 수단으로서 구하는 한, 정도를 넘는 일이 없고 결코 유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 만한 곳에서 우리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오히려 추구되는 목적에 기여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간단하게 내가 참된 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또 동시에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다. 참된 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주의해야 한다. 곧 선이나 악은 오직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곧 선이나 악은 오직 상대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동일한 사물이라도 다른 관계에 있어서는 선이나 악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완전하거나 또는 불완전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상 어떠한 것도 그 본성에서 본다면 완전하다든가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기(生起)라는 일체의 것은 영원한 질서에 따라, 또 일정한 자연법에 따라 생긴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한 다음에는. 그러나 인간은 무력하지만 그 사유로써 이 질서를 파악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보다 훨씬 강력한 인간 본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러한 본성의 획득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는 이러한 완전성에 자기자신을 이끌어가는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모두 참된 선이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본성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얻으려고 하는 본성이 어떠한 류(類)의 것인지는 적당한 시기에서 밝힐 생각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신이 모든 자연과 합일하고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내가 지향하는 목적은 이러한 본성을 획득하고 자기와 함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본성을 획득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이해시키고 그들의 지성과 욕망을 전적으로 나의 지성과 욕망에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선 첫째로 이러한 본성을 획득하는 데 충분할 만큼 자연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안전하게 여기에 도달하기에 알맞은 사회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셋째로는 도덕철학과 아동교육학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넷째로 또 건강은 이 목적에 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므로 모든 의학이 정비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기술은 어려운 많은 사항을 간단하게 해서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시간과 편의를 얻게 해주므로, 다섯째로는 기계학을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지성을 교정하고 처음에 가능한 한 지성을 정화하고, 그 결과는 지성이 정연하게 사물을 오류 없이, 그리고 가능한 한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만 한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내가 모든 학문을 한 목적이 하나의 목표에, 곧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하도록 노력한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에 있어서 우리들을 이러한 목적, 목표에 나가도록 하지 못하는 요소들은 모두 무용지물로서 배척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의 일체의 활동 및 사상은 이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목적에 이르도록 노력하고 지성을 바른 길에 들어서도록 노력하는 동안에도 필연적으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약간의 생활규칙을 선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1. 민중의 상식에 적합한 말로 말하고 또한 우리들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민중의 견해대로 할 것. 그러나 가능한 한 그들의 견해에 순응하면 우리들은 여기에서 적지 않은 편의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하면 우리들이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은 즐거이 귀를 기울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2. 쾌락은 건강 유지에 필요한 만큼만 향유할 것.

 

3. 끝으로 생명과 건강의 유지를 위해, 또 나라의 여러 풍습―이것이 우리들 목적과 반대되지 않는 한―에 따르는 데 필요한 만큼 돈이나 그밖의 물건을 구할 것.

 

이러한 규칙을 세워놓고 나는 우선 무엇보다도 긴급한 일, 곧 지성을 개선하고 지성이 우리들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양식으로 사물을 이해하도록 하는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적 순서로서 내가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고 사물을 긍정 또는 부정을 사용해 온 모든 지각양식(知覺樣式)을 여기에서 거듭 반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 중 최상의 양식을 선택하고 동시에 개선하려고 하는 나의 힘과 본성을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심히 주의해 보면 모든 지각양식은 다음 네 가지로 환원된다.

 

1. 전문(轉聞; 다른 사람을 거쳐 듣는 것)하거나 혹은 제멋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기호(記號)로부터 얻는 지각.

2. 막연한 경험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지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 얻는 지각. 막연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적 사건에 지나지 않고 우리들이 이와 모순되는 다른 시계(視界)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사물의 본질이 다른 사물로부터 귀결―그러나 불충분하게―되는 경우의 지각.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결과로부터 원인을 귀결시킬 때라든가, 혹은 언제나 어떤 특성을 수반하고 있는 어떤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낼 때에 생긴다.

4. 끝으로 사물이 전적으로 그 본질에 의해서만, 혹은 가장 가까운 원인의 인식에 의해서만 지각되는 경우의 지각.

 

이 모든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

단지 전문(轉聞)에 의해서 나는 나의 생일이나 이러저러한 어버이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그밖에 비슷한, 결코 의심해보지 않은 일을 안다. 막연한 경험에 의해서 나는 미래에 죽을 것을 안다. 이것은 내가 마찬가지인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기간을 살거나, 동일한 병으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또 막현한 경험에 의해 나는, 기름은 불꽃을 내기에 알맞는 재료이며, 물이 불꽃을 끄는 데 알맞는 것임을 안다. 또 개는 짖는 동물이며, 인간은 이성적 동물임을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안다. 다른 사물로부터 귀결한다는 것은 예컨대 우리들의 감각은 이러저러한 신체에 의존하고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명백히 의식할 때에, 이 일로부터 곧 우리들의 정신이 신체와 합일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합일이 이러한 감각의 원인이라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것 따위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들은 도대체 감각이니 합일이니 하는 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혹은 내가 시력(視力)의 본성을 알고 시력에는 동일물이라도 멀리 떨어져 보면 가까이에서 볼 때보다 작게 보이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 미루어 태양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크다든지 하는 것처럼 그밖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끝으로 사물이 전혀 그 본질에 의해서만 지각된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경우이든가, 정신의 본질이 인식으로부터 정신이 신체와 합일하고 있음을 아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인식에 의해 나는 2와 3이 합치면 5가 되고, 또 만일 두 개의 선이 제3의 선과 평행이라면 두 개의 선도 서로 평행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인식에 의해 알 수 있었던 일은 매우 적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오직 하나의 예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 세 개의 수가 주어지고 그 제3수에 대한 관계가 제2수의 제1수에 대한 관계와 같은 제4수를 구한다고 하자. 이 경우 보통 상인은 제4수를 찾아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상인이 선생으로부터 증명 없이 옮겨 들은 셈을 그대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 4, 3, 6의 경우와 같이 제4수가 명백한 수에 있어서의 경험으로부터 보편적 원칙을 만든다. 곧 제2수에 제3수를 곱하고 그 결과를 제1수로 나누면 6이라는 수가 생긴다는 것을 경험하고, 이 셈을 거치지 않고 이미 비례수(比例數)로서 알고 있던 것과 동일한 수가 나온 것을 보고 그들은 이 셈이 언제나 제4의 비례수를 찾아내는 바른 셈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에 비해 수학자는 유클리드의 {제7서}의 정리 19의 증명에 의해 어떤 수가 상호 비례하는가를 안다. 곧 비례의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제1수와 제4수의 적(積; 곱하기)이 제2수와 제3수의 적과 같다는 특성으로부터 이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주어진 수의 비례관계를 충분히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것을 안다면 그것은 앞에 말한 정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직관적으로, 곧 아무런 셈 없이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최상의 지각양식을 선택하려는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을 간단히 열거할 필요가 있다. 즉,


 

1. 개선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본성을 정확히 알고 동시에 사물의 본성에 대해 필요한 만큼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

2. 이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상위점·일치점·반대점을 바르게 귀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사물이 어떠한 것을 견뎌내고, 어떠한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가를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4. 이것을 인간의 본성 및 능력과 비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면 여기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완전성이 쉽게 밝혀질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바탕으로 우리들은 어떠한 지각양식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양식에 대해서 말하면 이것이 매우 불확실한 것임은 잠시 미루어 놓는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든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轉聞)에 의해서는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의 본질도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어떤 사물의 개체적 존재성은, 후에 알게 되려니와 그 본질이 인식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전문에만 바탕을 둔 일체의 확실성은 학문에서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단순한 전문만으로는―여기에는 스스로의 지성이 선행되지 않으므로―결코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2의 양식에 대해 말하면 이것은 앞에서 구하던 비례의 관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양식이 매우 불확실하고 종국적이 아니라는 것은 잠시 보류하더라도 이러한 양식으로는 사람들은 자연의 사물에 대해 그 우유성(偶有性; 우연히 존재하게 되는 것)만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유성이 우선 인식되지 않는 한 결코 명확히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양식도 역시 배척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도의 양식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것에 의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사물의 관념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오류의 위험 없이 결말을 내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양식도 그 자체로서는 우리들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수단은 될 수 없다.

오직 제4의 양식만은 사물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하고 또 오류의 위험이 없다. 그러므로 이 양식이 특히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미지의 사물을 이러한 인식에 의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한 직접적인 것이 되려면 이 양식이 어떠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전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종류의 인식이 우리들에게 필요한가를 알게 된 이상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것을 이러한 인식에 의해 인식하는 길, 즉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선 주의해야 할 것은 이때 무한히 계속되는 탐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진리탐구의 최상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 탐구의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또 제2의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다른 제3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고, 언제나 동일하다. 실제로 만일 무한히 필요하다면 우리들은 결코 진리의 인식에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떠한 인식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 관계는 확실히 물질적 도구에 있어서의 관계와 같아서 투자의 경우와 같은 정도로 입증될 수 있다. 곧 쇠를 다루려면 망치가 필요하고, 망치를 얻으려면 망치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망치와 다른 도구가 필요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도구가 필요하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쇠를 단단히 만드는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사실상 인간은 처음에는 본유(本有)의 도구로써 인간의 매우 쉬운 도구를 불완전한 대로 애써서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것을 만든 후로는 그들은 비교적 만들기 어려운 다른 도구를 힘을 덜 들이면서도 비교적 완전하게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해서 차츰 가장 간단한 일로부터 도구로, 다시 이 도구로부터 다른 일과 도구로, 나아가 그들은 마침내 상당히 많고, 상당히 어려운 일을 약간의 힘을 들여 이룩하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성도 생득(生得)의 힘을 갖고 자기자신을 위해 지적 도구를 만들고, 여기에서 다른 지적 행동을 수행할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새로운 도구, 곧 더욱 탐구를 진척시킬 능력을 얻고, 이렇게 차츰 나아가 예지(叡智; Sapietia)의 최고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이러한 것임은, 무엇이 진리탐구의 방법인가를 이해하고 또 탐구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한 다른 새로운 도구를 만들려면 꼭 필요한 본유의 도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쉽게 밝혀질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논의를 계속하고자 한다.

참된 관념(실제로 우리는 참된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은 그 대상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원(圓)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원의 관념은 원처럼 원주(圓周)와 중점(中點)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관념은 신체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관념은 그 대상과 다른 어떤 것이므로 관념은 그 자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리라. 다시 말하면 관념은 그 형상적 본질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른 객관적 본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다른 객관적 본질은 그 자체로 본다면 실재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한히 계속된다. 예컨대 페테로는 실제적이다. 그런데 페테로의 참된 관념은 페테로의 객관적 본질로서 그 자체가 실재적이며, 또한 페테로의 자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페테로의 관념은 특수한 본질을 가진 실재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테로의 관념은 그것이 형상적으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객관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다른 관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페테로의 관념의 관념이 역시 다른 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스스로의 본질을 갖는다.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이것은 누구가 실험할 수 있는 일이다. 곧 사람들은 페테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확실해지는 것은 페테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페테로의 관념 그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고 페테로의 관념의 관념을 이해할 필요는 더욱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알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없고, 더구나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는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마치 3각형의 본질의 이해를 위해 원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러한 관념에 있어서 사정은 반대이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선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확실성은 바로 객관적 본질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상적 본질을 지각하는 양식 속에는 반드시 확실성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에 의해 다시 진리임이 확실해지기 위해서는 참된 관념을 갖는 일 이외에는 다른 표지(標識)가 필요하지 않음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알기 위해서는 알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한 사물의 충분한 관념 또는 객관적 본질을 갖는 사람만이 최고의 확실성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분명히 확실성과 객관적 본질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리는 아무런 표지도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일체의 의심을 제거하려면 사물의 객관적 본질, 혹은―같은 일이지만―관념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므로 여기에서 참된 방법은 관념을 획득한 후에 진리의 표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 자체, 혹은 사물의 객관적 본질 혹은 관념(이러한 것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다)을 적당한 질서를 갖고 추구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방법이라고 귀결할 수 있다. 따라서 방법은 필연적으로 추리의 방식이나 이해의 방식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방법은 사물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추론하는 일 자체에는 없고, 더구나 사물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없다. 오히려 방법은 참된 관념이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참된 관념을 다른 여러 지각으로부터 구별하고 참된 관념을 다른 여러 그 지각으로부터 구별하고 참된 관념의 본성을 탐구하며, 그 결과 우리들이 어떠한 이해 능력을 갖고 있는가를 알고 이렇게 해서 이해해야 할 모든 것을 그 규범에 따라 이해하도록 정신을 제어하며, 또한 보조수단으로서 확실한 여러 규칙을 부여하며 정신으로 하여금 무익한 일로 괴로워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방법은 반성적 인식, 혹은 관념의 관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이 귀결된다. 그리고 처음에 관념이 없으면 관념의 관념이 없으므로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주어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정신이 이렇게 인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방법이 올바른 방법이다. 또한 두 개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이러한 관념의 형상적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동일하므로 여기에서 가장 완전한 실재의 관념의 반성적 인식이 다른 여러 관념의 반성적 인식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장 완전한 방법은 주어진 가장 완전한 실재의 관념의 규범에 따라 어떻게 정신이 인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일, 곧 정신은 사물을 많이 이해할수록, 동시에 다른 새로운 여러 도구(관념)―이것을 사용해서 정신은 더욱 쉽게 이해의 길을 더듬는다―을 획득해 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전술한 바로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 속에 본유의 도구로서 참된 관념이 존재하고, 이 관념을 이해하면 동시에 이러한 지각과 다른 일체의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 방법의 일부가 있다. 그리고 정신이 자연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므로, 여기에서 방법의 이 부분은 정신이 이해는 바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완전하고 또한 정신이 가장 완전한 실재의 인식에 주의할 때, 곧 이를 반성할 때 가장 완전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 정신은 아는 바가 많으면 그만큼 스스로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 그런데 자신의 힘을 더 잘 이해하면 그만큼 쉽게 정신은 자기자신을 이끌고 자신을 위해 규칙을 세울 수 있고 자연 질서를 더 잘 이해하면 그만큼 쉽게 스스로 무익한 일을 멀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전방법(全方法)이 있다. 게다가 어떤 관념과 다른 여러 관념의 관계는 바로 그 대상과 다른 여러 사물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만일 자연 속에 다른 사물과는 아무런 상호관계도 없는 무엇이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것의 객관적 본질이 있다면 객관적 본질은 모든 점에 있어서 형상적 본질과 일치할 것이므로 이것은 다른 관념들과는 역시 아무런 상호관계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결론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자연 속에 현존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상호관계를 갖는 것은 이해된다. 곧 이 객관적 본질은 다른 관념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상호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관념들이 여기서 도출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관념이 다른 관념들과 상호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해의 걸음을 더욱 재촉하는 도구가 증가된다. 이것이 우리가 증명하려고 한 바였다. 또한 마지막으로 말한 것, 즉 관념이 전적으로 그 형상적 본질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의 정신이 전적으로 자연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념을 모든 자연의 근원과 원천을 재현하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이끌어 내서 이 관념이 다른 관념의 원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이란 정신이 주어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입언(立言)을 추론에 의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일이 그 자체로서 명백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곧 바르게 추론하려면 주어진 관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주어진 관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증명이 필요한 만큼 우리는 이 추론을 증명해야 하고, 또한 추론의 증명을 증명해야 하고 이러한 일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인간이 자연의 탐구에 있어서 우연히 이와 같은 과정을 밟는다면, 곧 주어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다른 관념들을 적당한 순서로 획득해 간다면 진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기자신을 밝히는 것이므로 인간은 결코 이 진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며 게다가 모든 것이 저절로 그의 인식 속으로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결코, 또는 드물게만 일어나므로 획득되지는 않는 것을 미리 숙고된 계획으로 획득하기 위해 위에서 말한 바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진리 그 자체와 올바른 추론 이외의 다른 도구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바르게 추론함으로써 추론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해 왔고, 또한 입증하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자기성찰에 익숙해진다는 이득이 있다. 그런데 자연을 탐구함에 있어서 적당한 질서로 탐구되는 일이 드문 이유는 우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후에 우리들의 철학에서 설명할 것이다. 다음은 뒤에 말하겠지만 여기에는 광범하고 정밀한 식별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매우 힘드는 일이다. 끝으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사(人間事)의 상태는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논급하지 않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는 자기자신을 밝히는 데 있어서, 왜 나는 곧장 무엇보다도 자연의 진리를 자연의 질서에 따라 보여 주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하고 또 경고하겠다. 곧 이 속에서 도처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역설 때문에 전체를 허위로 보고 물리치지 말도록, 오히려 우리들이 이것을 어떠한 질서로 증명하는가를 고찰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우리의 결론이 진리임을 믿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방법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 이유이다.

만일 그 다음에 어떤 회의론자가 있어서 최초의 진리 자체에 대해, 그리고 최초의 진리의 규범에 따라 도출된 모든 것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는다면, 근는 확실히 본심에 없는 말을 하거나 아니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선입견 때문에, 다시 말하면 어떤 외부적 사고 때문에 내면적인 마음도 역시 장님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자신조차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무엇을 긍정하든가 또는 의심하면서 자기가 긍정하거나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고, 더 나아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것을 절대적으로 단언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한에서만 자기는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침내 진리다운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입을 봉할 수밖에 없다. 필경 이러한 인간은 학문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생활상이나 사고상의 풍습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기의 존재를 구하는 일을 분명히 긍정하거나 부정할 것을 강요당하면서도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증명해 주면 그들은 그 논증이 바른지 혹은 미흡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정하고 용인하고 혹은 반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부정하고 용인하고 혹은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이 전혀 없는 자동기계(自動機械)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자, 우리들의 주제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지금까지 첫째, 우리들의 모든 사상을 지향할 목적을 알았다.

 

둘째, 우리들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최상의 지각양식이 어떠한 류의 것인가를 알았다. 셋째, 정신이 바르게 출발하기 위해 거쳐야 할 최초의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았다. 곧 어떤 주어진 참된 관념을 규범으로 해서 정확한 여러 법칙에 따라 탐구의 걸음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이 일을 바르게 하려면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참된 관념을 다른 모든 지각으로부터 구별하고 정신을 다른 지각으로부터 멀리하는 것, 둘째, 미지의 것이 이러한 규범에 따라 지각되기 위한 규칙들을 부여할 것, 셋째는, 그리고 끝으로 우리들이 쓸데없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이 방법을 안 다음에, 우리는 넷째로, 이 방법은 우리들이 가장 완전한 실재의 관념을 가진 경우에 가장 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에 가능한 한 빨리 이러한 실재의 인식에 도달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방법의 제1부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참된 관념을 다른 지각으로부터 구별·분리하고, 허위의 관념, 허구화한 관념 및 의심스러운 관념과 참된 관념을 혼동하지 않도록 정신을 제어하는 데 있다. 이 일을 나는 여기서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할 생각이다. 이것은 독자를 이 필요한 일의 사색에 오래 머물지 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또한 이 세상에는 참된 지각과 다른 모든 지각 사이에 있는 구별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관념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곧 이전에는 잠이 깨어 있을 때 자기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일단 꿈속에서 자기가 확실히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부터는 자기가 눈을 뜨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게 된 사람들과 비슷하다. 이것은 수면과 각성의 올바른 구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는 각각 지각의 본질을 논하고 이를 그 가장 가까운 원인에 의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님을 다짐해 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은 철학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방법이 요구하는 바, 곧 허구된 지각, 허위의 지각 및 의심스러운 것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며, 또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피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첫째, 허구된 관념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지각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사물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전적으로 본질에 대한 것인데, 허구의 대부분은 존재한다고 고찰되는 것에 대해서 일어나므로 우선 이것에 대해서 단지 존재만이 허구되고, 따라서 이러저러한 존재 상태에서 허구된 것은 이해되었거나 이해될 수 있다고 가정되고 있는 경우에 대해 말하겠다. 예컨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페테로가 집에 돌아간다든가, 나를 방문한다든가 그밖의 비슷한 관념을 허구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관념이 무엇에 대한 것일 뿐 필연적인 것, 또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른 것은 존재하는 것이 그 본성에 모순되는 것, 필연적이라고 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본성에 모순되는 것, 가능한 것이라고 한 것은 그 본성상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모순이 없고 오히려 그 존재의 필연성, 혹은 불가능성은 우리들이 그 존재를 허구하는 한 우리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원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외부적 원인에 의거하고 있는 그 필연성, 혹은 불가능성이 우리들에게 알려지면 우리들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허구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만일 신 또는 전지전능한 자가 있다면 그는 절대로 아무것도 허구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들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아는 이상 자기의 존재, 또는 부존재(不存在)에 대해 허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광경을 허구할 수 없다. 또 신의 본성을 아는 이상, 신의 존재 또는 부존재를 허구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이 그 본성에 모순되는 괴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 즉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허구는 영원의 진리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곧 나는 어떠한 허구도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여기 미리 주의해 두어야 할 것은 어떤 사물의 본질과 어떤 사물의 본질 사이의 차이는 그대로 전자의 현실 혹은 존재와, 후자의 현실 혹은 현실 사이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아담의 존재를 일반적 존재성을 통해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아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실재 일반의 본성을 염두에 두고 아담은 하나의 실재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는 보다 일반적으로 파악되면 그만큼 개념이 혼란하고 또 그만큼 쉽게 모든 사물에 귀속된다. 반대로 존재가 보다 특수하게 파악되면 그만큼 명료하게 이해되고 또 그만큼 그것 아닌 다른 사물에―자연의 질서를 고려하지 않고―귀속시키기가 어렵다. 이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허구라고 말하지만, 사태가 표상되고 있는 대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경우에 대해서 고찰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지구는 반구로 접시 위에 놓인 반원의 등 같다고 말하거나,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고집하거나, 그밖의 이와 비슷한 일을 말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를 주의하면 우리들은 여기에서 말한 바와 저촉되는 것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다만 내가 일찍이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도 그 잘못을 범하거나 범할 가능성이 있다―우리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고 우리가 허구할 수 있는 것, 적어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사실 우리는 그 불가능성도, 필연성도 알지 못하는 한에서만 허구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지구는 둥글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 나는 내가 앞서 어쩌면 범했거나, 혹은 범할 뻔했던 과오를 상기하고 그 다음에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같은 과오를 아직도 범하고 있거나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허구 내지 상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허구하는 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불가능성도, 필연성도 알지 못하는 한에서이다. 사실상 그 어느 쪽인가를 이해했다면 나는 전혀 아무것도 허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지 어떤 시도를 해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다시 한번 말해야 할 것은 논쟁의 경우 세워지는 가설에 대해서이다. 때로는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도 가정을 한다. 예컨대 불타고 있는 초를 전혀 불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거나, 혹은 상상적 공간에서, 곧 어떠한 물체도 없는 곳에서 불타고 있다는 가정을 하자고 말하는 경우이다. 후자와 같은 경우는 명백히 불가능하다고 이해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가정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아무것도 허구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예에서는 나는 타고 있지 않은 다른 초를 상기하고 (혹은 앞서의 초를 불꽃 없이 개념하고) 이 초에 대해 사유한 바를 불꽃에 주의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앞서의 초에 대해 이해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둘째의 예에서 주위에 있는 물체를 우리들의 사상으로부터 떼어내고 그 자체로서 관찰되는 초의 관찰에만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키려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초가 스스로 궤멸할 하등의 원인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만일 주위의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초와 그 불꽃은 언제나 불멸이리라는 것, 그밖의 이러한 일들을 결론짓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허구가 아니라 오히려 진지한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전적으로 본질에 대해서, 혹은 어떤 현실 곧 존재와 함께 본질에 대한 허구를 살피기로 하자. 여기서는 정신은 이해하는 바가 적을수록, 지각하는 바가 많을수록 그만큼 커다란 허구능력을 갖고, 또한 이해하는 바가 많으면 그만큼 허구능력이 감소하는 데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위에서 우리가 사유하는 한은 자기가 사유하는 것 또는 사유하지 않는 것을 허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물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이상, 무한대의 파리를 허구할 수는 없다. 또 영혼의 본성을 인식하는 이상, 그것이 사각형이라고 허구할 수는 없다. 비록 말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런데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자연을 인식하는 바가 적으면 적을수록 사물을 쉽게 허구할 수 있다. 예컨대 나무가 이야기하거나, 인간이 순식간에 돌이나 샘으로 변하거나, 거울속에 환영이 나타나거나, 무(無)가 유(有)가 되거나 신이 인간이나 동물로 변화하는 등 무수한 일들을.

사람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구를 한정하는 것은 허구이지 지성은 아니다. 곧 내가 무엇인가를 허구하고 이것이 내가 허구한 대로 실재한다는 것을 어떤 자유에 의해 승인하기로 정한 이상 그 결과로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예컨대 내가 물체의 본성을 이러저러하다고 허구하고, 나의 자유에 의해 이 본성이 허구한 바대로 실재한다고 믿기로 결심한 후에는 아마 무한대의 파리 같은 것을 허구할 수는 없고, 또한 영혼의 본질은 허구한 후에는 이것을 4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을 음미해 보자. 우선 그들은 우리들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든가 용인하든가 한다. 만일 용인한다면 그들이 허구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지성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부정한다면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이 말하는 바가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보기로 하자. 곧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정신은 자기자신이나 존재하는 사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자신 속에도, 다른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을 감각하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은 전적으로 자기의 힘만으로 사물과 대응되지 않는 감각 혹은 관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을 부분적으로는 신처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들, 혹은 우리들의 정신은 어떤 자유를 갖고 있는 결과로 우리를, 혹은 우리들의 정신 자체의 부정(否定)의 자유조차도 구속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허구하고 이것을 승인한 후에는 정신은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거나 혹은 허구할 수가 없고, 게다가 이 허구 때문에 다른 일도 최초의 허구와 모순되지 않도록 사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여기서 그들 자신이 이 허구설(虛構說)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 검토하고 있는 바와 같은 부조리한 일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는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다. 오히려 그들을 이러한 미망에 남겨 놓고, 오히려 우리들은 그들과 나눈 대화에서 우리들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어떤 진리를 찾아내자. 즉 정신이 허구되고 따라서 그 본성상 거짓인 일에 대해 숙고하고 이해하며, 또한 여기에서 도출되는 여러 결과를 올바른 질서에 따라 도출하도록 움직일 때에는 쉽게 허위가 드러나고, 또한 만일 허구된 일이 그 본성상 참이라면 정신이 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움직이며 여기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결과를 바른 질서에 따라 도출하기 시작할 때에는 어떠한 중단도 없이 정연하게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 말한 거짓 허구를 보고 지성이 홀연히 나타나 그 부조리함을, 또 여기에서 다른 여러 가지 부조리가 도출됨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물을 지각하는 한 결코 허구에 휘감길 염려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순식간에 동물이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경우, 이것은 매우 막연한 말이며, 따라서 정신 속에 하등 명료한 개념, 다시 말하면 관념, 곧 주어(主語)와 객어(客語)의 연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있다면 동시에 정신은 어떻게 해서, 또 왜 이러한 사상(事象)이 생겼는지 그 수단과 원인을 가려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경우 주어와 객어의 존성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또한 최초의 관념이 허구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최초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모든 관념이 도출된다면 허구라는 경솔은 차츰 사라질 것이다. 또한 허구된 관념은 명석 판명치 못하고 오직 혼란한 것이며, 또 모든 혼란은 정신이 정돈된 사물이나 많은 요소로 합성된 사물을 부분적으로만 인식할 뿐이고 인식된 것과 인식되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각각의 사물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요소에 대해 아무런 구별 없이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하므로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긴다.

 

첫째로, 만일에 가장 단순한 사물에 대한 관념이라면 그것은 명석 판명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물은 부분적으로는 인식되지 않고 완전히 인식되거나, 또는 인식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많은 요소로 합성된 사물이 사유에 의해 가장 단순한 모든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에 따로따로 주의한다면 모든 혼란은 사라질 것이다.

셋째로, 허구는 단순한 것일 수는 없고, 오히려 그것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물과 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혼란한 관념의 합성으로부터,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여러 가지 관념에 대해 승인하는 바 없이 한꺼번에 주의하는 데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단순한 것이라면 그것은 명석 판명한 것이고 따라서 참이며 또한 판명한 여러 관념의 합성으로부터 생긴 것이라면, 그 합성도 역시 명석 판명한 것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원의 본성을 인식하고 사각형의 본성을 인식한 이상, 우리는 이미 이 두 가지를 합성해서 원을 4각이라고 하거나, 영혼을 4각이라고 하거나 그밖의 이러한 합성은 하지 못한다.

다시 간단히 결론을 말하고 허구가 참된 관념과 혼돈될 염려는 없다고 하는 까닭을 말하겠다. 처음에 다룬 첫째의 허구, 곧 사물 자체가 명석하게 파악되는 경우에는, 만일 명석하게 파악된 사물이나 그 존재가 본성상 영원한 진리라면 이러한 사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허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대해 만일 파악된 사물의 존재가 영원한 진리가 아닌 경우에는 우리들은 오직 사물의 존재를 그 본질과 비교하고 동시에 자연의 질서에 주의하는 데 전념하면 된다. 두 번째 허구, 곧 자연 속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사물 및 행위에 대한 여러 가지 혼란한 관념에 대해 승인하는 바 없이 한꺼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한 이 허구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장 단순한 사물은 허구없이 이해되며, 합성에 의해 된 것도 이를 합성하는 가장 단순한 여러 부분에 주의하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부분을 짜맞추어서 참되지 않은 행위를 허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와 동시에 어떻게, 또 이러한 일이 생기는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가 이해되었으므로 이번에는 허위의 관념의 고찰로 옮겨가서 허위의 관념은 무엇에 대해 일어나는가, 또 어떻게 해서 우리들은 허위의 지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허구된 관념에 대해 고찰을 마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허구된 관념과 허위의 관념의 차이는 오직 후자에 있어서는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이미 주의한 바와 같이 표상이 스스로 생기는 경우 그 원인―이것에 의해 그 표상이 자기의 밖에 있는 사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허구의 경우처럼 판단할 수 있는―이 의식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눈을 뜨고 깨어 있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위의 관념은 허구된 관념과 마찬가지로 본질이 인식되어 있는 사물의 존재에 대해서 생기든가―더 적절히 말하면 관계하든가―아니면 본질에 관계한다. 존재에 관계하는 것은 허구와 마찬가지로 교정될 수 있다. 즉 인식된 사물의 본성이 만일 필연적 존재를 포함한다면 우리들은 그 사물의 존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반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반대로 사물의 존재가 그 본질처럼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필연성 혹은 불가능성이 외부적 원인에 의거하는 경우에는 모든 허구를 설명할 때 말한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허구와 마찬가지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에 관계하는, 또는 본질과 행위에 관계되는 다른 종류의 허위의 관념에 대해 말하면, 이러한 지각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 혼란한 지각으로부터 합성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언제인가는 혼란하다. 예컨대 사람들이 숲이나 우상이나 짐승이나 그밖의 어떤 것에 신령(神靈)이 살고 있다든가, 단지 합성하기만 하면 지성이 생기는 물체가 있다든가, 죽은 자가 사고를 하고 산보하고 이야기한다든가, 신이 속는다든가, 그밖의 이러한 일들을 믿을 때와 같다. 이에 반해 명석 판명한 관념은 결코 거짓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명석 판명하게 파악되는 사물의 관념은 가장 단순하거나 혹은 아주 단순한 여러 관념으로 합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주 단순한 여러 관념으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한 관념이 거짓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각자가 무엇이 참, 곧 지성인가, 또한 동시에 무엇이 거짓인가를 알기만 하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런데 참된 것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확실히 참된 사유와 거짓 사유는 단지 외부적 특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적 특징에 의해서 구별된다. 즉 어떤 건축가가 어떤 건물을 질서정연하게 개념한다면, 가령 그러한 건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그 사유는 역시 참되어 이 사유는 건축들의 존재 여부에 의해 변하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예컨대 페테로가 존재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페테로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러한 사유는 그 사람에게는 거짓이며, 설사 페테로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참이 아니라고 말해도 괜찮다. 페테로가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페테로가 존재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들에게만 참이다. 여기에서 관념 중에는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의 최선의 규범을 갖기 위해(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사상을 주어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규정해야 하며 방법은 반성적 인식임을 말했기 때문에), 또한 지성의 여러 특성을 알기 위해 이제는 정녕 이 점을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참된 사유는 사물을 그 제1원인으로부터 인식하는 데 있다고 하는 차이로부터 생긴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앞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점에서 참된 사유는 거짓 사유와 매우 다르지만,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까닭은 원인을 갖지 않고 자신에 의해, 또 자신에 있어서 인식되는 어떤 원리의 본질을 바르게 표현하는 사유도 역시 참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사유의 형상은 다른 사물과 관계없이 그 사유 자체내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을 원인으로서 인지하지 않고 오히려 지성의 능력이나 본성 자체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신의 지성은 만물의 창조에 앞서 있고, 또한 아직 존재하지 않던 사물을 지각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모방해서 우리들이 만일 성정이 아직 존재하지 ?았던 새로운 것을 지각했다(확실히 이러한 지각은 어떠한 대상으로부터도 생길 수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정당하게 다른 지각이 도출된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해서 생긴 모든 사유 내용은 참이고 또한 어떠한 외부적 대상으로부터도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지성의 능력과 본성에만 의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참된 사유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을 사유 자체 안에서 구하고 지성의 본성으로부터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 우리들은 그 대상이 우리들의 사유의 힘에 의거하고 있고, 자연 속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충분히 알고 있는 참된 관념을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관념에 있어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바라는 바를 더욱 쉽게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공[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나는 임의의 원인을 허구하고 반원이 가운뎃점의 둘레를 회전해서 그 회전으로부터 공이 생긴다고 했다고 하자. 이 관념은 틀림없이 참되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연계에 있어서는 어떠한 공도 아직 이렇게 해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이것은 참된 지각이며, 또 공의 개념을 형성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 지각이 반원의 회전을 긍정하고 있지만 이 긍정은, 만일 이것이 공의 개념 혹은 이러한 운동을 규정하는 원인의 개념과 결부되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사실, 즉 절대적으로 말해서 이 긍정이 단독적인 것이라면 거짓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정신은 반원의 운동이라는 반원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으며, 또 운동을 규정하는 원인의 개념으로 생기지도 않는 것을 긍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위는 예컨대 반원의 운동 또는 정지처럼 단지 어떤 사물에 대해서 우리들이 이 사물에 대해 형성한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긍정한다고 하는 점에만 있다. 여기에서 단순한 사상은 참될 수밖에 없다고는 결론이 나온다. 예컨대 반원운동, 양(量) 등 단순한 관념들이다. 이러한 관념에 포함된 긍정은 이러한 개념과 일치하고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류의 불안 없이 임의로 단순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다만 어떠한 능력이 우리들의 정신이 이러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가, 또 이 능력이 미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상 이것을 알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의 이러한 능력이 무한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떤 사물에 대해 이 사물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을 긍정할 때 그것은 우리들의 지각의 결함,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기형적인 결함 있는 사상, 즉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반원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정신 속에 단독적으로 존재할 때에는 거짓이고, 공의 개념 또는 이러한 운동을 규정하는 어떠한 개념과 결부되면 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명확한 일이지만 참된, 곧 충분한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 사유하고 있는 실재의 본성에 속한다면 불충분한 관념은 확실히, 우리들이 사유하는 실재의 일부분이고 이 사유자의 사상의 어떤 것은 완전히,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만 우리들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들 속에 생길 수 있다.

또한 주의해야 할 일은―이것은 허구에 대한 논술에서는 별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가장 착오를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상상력에 있어서 나타나는 일이 지성에도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명석 판명하게 개념될 때, 판명한 것이 혼란한 것으로부터 구별되지 않는 한, 확실성, 곧 참된 관념이 판명하지 못한 관념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스토아 학파의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사람들이 영혼에 대하여 말하고 영혼을 불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오직 혼란을 일으키며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미세한 물체가 모든 다른 물체에 침투하여 스스로는 어떤 것의 침투도 받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또 이해했다. 이러한 모든 일을 동시에 상상하고 여기에 이 공리의 확실성을 결부시켜서 그들은 까닭없이 정신의 가장 미세한 물체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가장 미세한 물체는 분할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모든 지각을 주어진 참된 관념의 규범에 따라 음미하고, 한편 처음 말한 바와 같이 전문이나 막연한 경험으로부터 아는 것에 대해 근심하도록 노력하는 한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래의 대상에 있어서 개념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물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것은 사람들이 모든 자연의 제1의 요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생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질서를 무시하고 사유해 나가고, 자연을 참이긴 하지만 추상적인 공리와 혼동한 결과 스스로 혼란에 빠져서 자연의 질서를 전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가능한 한 추상적인 방식을 피하고 될 수 있는대로 자연의 제1요소로부터, 다시 말하면 자연의 근원과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면, 결코 우리들은 이러한 착오에 빠질 염려는 없다.

그런데 자연의 근원적 인식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추상적인 관념과 혼동될 염려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추상적으로 파악될 때에는 모든 보편개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은 지성 속에서 언제나 이에 대응하는 개체가 실제로 자연속에 존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확대된다. 또한 자연에는 거의 지성이 알 수 없을 만큼 사소한 차이를 가진 것이 허다하게 존재하므로(만일 추상적으로 개념화한다면) 쉽게 혼동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자연의 근원은 후에 보다시피 추상적 내지 보편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고,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넓게 이 개념이 지성 속에서 확대될 수도 없다. 또 가변적인 여러 사물들과는 아무런 유사성도 갖지 않으므로 우리들이 진리의 규범을 갖는 한 이 관념에 대해 결코 혼란에 빠질 염려는 없다. 곧 이것은 유일무한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보편적 실재이고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허위의 관념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남은 문제는 의심스러운 관념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이 우리를 의혹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또한 동시에 어떻게 이러한 의혹을 제거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정신의 실재적 의혹에 대해서이며, 또한 흔히 있는 일이거니와 마음으로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말만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교정하는 것은 방법의 임무가 아니라 오히려 집요한 연구와 교정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의혹도 의혹받고 있는 것만에 의해서 정신 속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만일 정신 속에 하나의 관념밖에 없다면 이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불문하고 아무런 의혹이나 확실성도 없다. 오직 단 하나의 감각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관념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의 감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혹은 오히려 의혹받는 것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만큼 명석 판명하지 못한 다른 관념 때문에 생긴다. 예컨대 경험이나 그밖의 다른 일로 감각의 기만에 대해 사유한 일이 없는 사람은 태양이 보이는 것보다 큰지 작은지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태양이 지구보다 훨씬 크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감각의 기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의혹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감각이 가끔 자신을 기만한 것을 알고 있으나, 이 경우 단지 혼란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로 감각이 기만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혹을 한 다음 감각에 대해 참된 인식을 얻어 사물은 멀리 떨어지면 감각에 의해 어떻게 표상되는가를 알 때, 다시 의혹이 제거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일, 곧 우리들을 매우 확실한 일에 있어서도 속이는 어떤 기만하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참된 관념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신에 대해 아무런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했을 때에 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만일 우리들이 모든 사물의 근원에 대해 갖는 인식에 주목하고 신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3각형의 본성에 주목할 때 3각형의 세 각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료하게 알려주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러한 의심은 지속되지만, 만일 신에 대해서도 3각형에 대해 갖는 그러한 인식을 갖는다면 모든 의혹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떤 최고의 기만자가 우리들을 기만하는지 않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3각형에 대해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기만자가 존재하는지 않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해서도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기만 하면 우리들이 명석 판명한 관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혹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처음에 탐구해야 할 일을 중단 없이 사물의 관련에 따라 바르게 탐구해 간다면, 그리고 문제의 해결에 나서기 전에 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안다면, 그는 가장 확실한 관념, 다시 말하면 명석 판명한 관념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혹은 어떤 긍정 또는 부정에 대한 마음의 주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 또는 부정은, 만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물의 인식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해질 어떤 것에 부딪치지 낳았더라면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혹은 언제나 사물을 질서에 따라 탐구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상은 내가 방법의 제1부에서 말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성의 인식에 또 지성의 여러 힘에 이바지하는 것은 모두 빠짐없이 말하기 위해 나는 다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싶다. 이때 특히 주의할 것은 기억은 지성의 도움을 받아서도 강해지고, 지성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강해진다는 것이다. 곧 전자에 대해 말하면 사물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 그럴수록 쉽게 머리에 남고,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 쉽게 잊혀진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연결되지 않은 많은 말을 전달하는 경우 그 사람은 내가 같은 말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는 경우보다 훨씬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다음에 지성의 도움 없이도 강해진다고 한 것은 상상력 또는 공통감각(共通感覺)이 유형적(有形的)인 개별적 사물로부터 촉발되는 그런 힘에 의해서이다. 나는 개별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개별적인 것에 의해서만 촉발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단 한 가지 연애극만을 읽었을 뿐이라면, 그 사람은 많은 연애극을 읽지 않는 한, 이 연애극을 가장 잘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이 이야기만이 상상 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많은 연애극을 읽었다면 모두가 동시에 상상되고 또 쉽게 혼동된다. 또한 나는 유형적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형체 있는 것에 의해서만 상상력은 촉발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억은 지성에 의해 강해지고, 또 지성의 도움 없이 강해지므로 여기에서 기억은 지성과는 다르고, 또 지성 자체에 있어서는 기억도 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기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뇌에 있어서의 인상(印象)의 감각이 일정할 때에 일어난 것으로서 마음에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기(想起)에 대비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상기에 있어서는 정신은 마찬가지로 이러한 감각을 의식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간단없는 지속에 있어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감각의 관념은 감각의 지속과는 다르며 또한 기억과도 다르다. 그러나 관념 그 자체가 괴멸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철학에서 음미하기로 하자. 그리고 만일 이것이 매우 부조리하게 생각되더라도 우리의 주제를 위해서는 오직 사물이 개별적일수록―앞에 든 극의 예에서 명백하듯이―기억에 용이하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게다가 사물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일수록 그만큼 기억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가장 개별적인 사물은 그것이 오직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 결코 우리들의 머리에서 사라질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참된 관념과 다른 지각들을 구별했고 또 허구된 관념과 허위의 관념 등은 상상력에 기인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신체는 꿈꾸면서, 혹은 깨어서 여러 가지 자극을 수용함으로써 외부적 원인으로부터―정신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생기는, 우연하고 말하자면 연락이 없는 여러 가지 감각에 기인한다는 것을 말했다. 여기에서 상상력은, 단지 그것이 지성과 다른 것이며 거기에 의해서 정신이 수동의 관계에 놓이는 것이기만 하다면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해석해도 좋다. 실제로 우리가 그것이 막연한 것이고 정신을 수동적으로 하는 것임을 아는 이상,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해서 지성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이것을 피할 수 있는가를 아는 이상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든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신체 이외에의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상상력이나 신체나 신체의 성정(性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지금 말한 대로 그것이 막연한 어떤 것임을 아는 이상 어떻게 해석하든 차이가 없다.

이에 반해 참된 관념은 단순하거나 혹은 단순한 여러 관념들로 합성되어 있어서 어떻게 해서, 또 왜 사물이 존재하고 또 생기(生起)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이 객관적 결과들이 정신 속에서 그 대상의 형상성(形相性)에 대응해서 진전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살펴 왔다. 이것은 옛사람들이 참된 지식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나아간다고 한 말과 같은 의미이다. 다만 그들은 내가 아는 바로는, 지금의 우리와는 달라서 정신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활동하고, 말하자면 일종의 영적 자동기계(靈的 自動機械)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로써 우리들은 처음으로 가능한 한 우리들의 지성에 대한 식견을 얻었고 또 참된 관념의 규범을 얻은 결과, 참된 것이 허위의 것 또는 허구의 것과 혼동될 염려가 없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왜 결코 상상력 밑에 들어오지 않는 일들을 우리가 이해하는가, 상상력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이 혹은 지성과 전혀 모순되거나, 혹은 일치하는가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우리들은 상상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 지성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에 따라 일어나고, 정신은 상상작용에 대해서는 수동적 관계에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상상력과 지성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커다란 오류에 빠지는가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컨대 연장(延長)은 반드시 장소적(場所的)이며 유한하지 않으면 안된다든가, 그 부분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든가, 그것은 만물의 제1의 그리고 유일의 기초라든가, 또 그것은 어느 때에는 다른 때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한다든가, 그밖의 이와 비슷한 일들을 사람들은 믿고 있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전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 말은 상상의 일부이므로, 다시 말하면 말이 신체의 상태에 의해 막연히 기억 속에서 합성됨에 따라 우리는 많은 개념을 만들어 내며, 충분히 조심하지 않는 한, 언어도 역시 상상과 마찬가지로 많은 원인이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언어는 민중의 기호와 상식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는 지성에 있어서가 아니라 상상력에 있어서의 사물의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성에 있어서만 존재하고 상상력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때때로 비물체적(非物體的) '무한한' 등의 부정적 명칭을 부여한 사실로부터 또 실제에 있어서는 긍정되고 있는 많은 것을 '창조되지 않은', '의거하지 않는', '한없는', '불사(不死)의' 등처럼 부정적으로―그리고 거꾸로 부정된 것을 긍정적으로―표현하는 사실로부터 명확하다. 이것은 확실히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상상하기 쉽고, 따라서 우선 최초의 인간의 머리에 떠올라서 적극적 명칭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긍정이나 부정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언어의 본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성을 모르면 우리는 쉽게 그것을 참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밖에 우리들은 혼란―지성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을 일으키는 다른 커다란 원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우리들이 상상력과 지성을 구별하지 않는 경우, 보다 상상하기 쉬운 것을 우리들에 대해 보다 명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상상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은 후에 할 일을 앞서 함으로써 인식을 진행시켜 나갈 참된 질서를 전도하고 정당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끝으로 이 방법의 제2부에 이르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이 방법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표적을 밝히고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을 말하겠다. 우리들의 표적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 곧 신체가 받는 우연한 자극으로부터가 아니라 순수한 정신으로부터 생긴 관념을 갖는 것이다. 또한 모든 관념을 하나로 환원시키기 위해 우리들은 가능한 한 우리들의 정신이 자연의 형상성을 그 전체에 대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있도록 관념을 연결하고 질서를 부여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 일에 대해서 말하면 우리들의 궁극목적을 위해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물이 전적으로 그 본질에 의해서는, 또는 그 가장 가까운 원인에 의해서든 파악될 필요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만일 사물이 그 자체로 존립해 있다면, 곧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원인(causa sui)이라면 전적으로 그 본질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야 하고, 만일 사물이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고 존재를 위해 원인이 필요하다면 가장 가까운 원인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결과를 인식한다는 것은 원인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인식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물의 탐구에 종사하는 한, 결코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단지 지성 속에만 있는 것을 실재하는 것과 혼동하지 않도록 충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히려 최상의 결론은 어떤 특수한 긍정적 본질로부터, 곧 진실하고 정당한 정의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보편적 공리로부터는 지성이 개체로 하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공리는 무한한 범위에 걸쳐 있어서 어떤 개체의 고찰을 위해 다른 개체를 고찰할 때보다 더 많이 지성을 규정한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한 바른 길은 어떤 주어진 정의로부터 새로운 여러 가지 사상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더 잘 정의할수록 정연하고 쉽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방법의 제2부 전체의 요점은 첫째보다 좋은 정의의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둘째로는 이러한 정의의 발견법을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정의의 조건에 대해 말하겠다.

정의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적 본질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본질 대신 어떤 특유성으로 정의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자칫하면 남의 오류를 적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예들은 무시하고 단지 어떻게 정의되든 차이가 없는 어떤 추상적 사물, 예컨대 원을 예로 들겠다. 만일 원이 가운뎃점으로부터 원주(圓周)에 그어진 선이 서로 같은 어떤 도형이라고 정의한다면 누구든 쉽게 이 정의가 원의 물질을 조금도 나타내지 못하고 오직 그 특성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말한 대로 도형이나 그밖의 관념적 실재에 대해서는 별로 영향이 없지만, 자연적 실재에 대해서는 영향이 크다. 물론 사물의 여러 특성은 그 본질을 알지 못하는 한 바르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본질을 간과한다면 우리들은 자연의 연결을 재현할 지성의 연결을 반드시 전도하고 우리들의 목표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실패를 피하기 위해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1. 만일 창조된 사물이라면 정의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가장 가까운 원인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원은 그 법칙에 따라 한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이 움직이는 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이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의는 명확하게 가까운 원인을 포괄하고 있다.

2. 사물의 개념, 곧 정의는 다른 것과 결부시키지 않고 오직 그것만을 보고 여기에서 사물의 모든 특성이 귀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앞에 든 원의 정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의 가운뎃점으로부터 원주를 향해 그은 모든 선은 서로 같다는 것은 이 정의로부터 명확히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의의 필연적 요건임을 주의해서 생각하면 명백한 일로서 일부러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2의 요건으로부터 모든 정의가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자명하다. 나는 여기서 지성에 의한 긍정을 말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이해되면서도 어휘의 결핍으로 때때로 부정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언어상의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창조되지 않은 사물의 정의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1. 이 정의에서는 모든 원인이 배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물은 자신의 설명을 위해 자기 자신의 본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2. 일단 그 사물을 정의한 이상, 이것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날 여지가 있어서는 안된다.

3. 이 정의에는 실질상 형용사도 될 수 있는 명사가 포함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어떤 추상적 개념에 의해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4. 그리고 끝으로(이 점을 주의하는 것은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이 정의로부터 그 사물의 일체의 특성이 귀결되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은 모두 주의해서 생각하면 명백한 일이다.

또한 나는 위에서 최상의 결론은 어떤 특수한 긍정적 본질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관념은 보다 특수하면 그만큼 판명하고 명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능한 한 많은 특수성의 인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질서에 대한 문제로 옮겨가겠는데, 우리들의 모든 지각이 질서정연하게 되고 합일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지성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만물의 원인이며, 그 객관적 실재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관념의 원인인 실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동시에 이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때에는 우리들의 정신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완전하게 자연을 재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우리들의 정신은 자연의 본질·질서·합일성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모든 관념을 언제나 장녀적 사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가능한 한 원인의 서열에 따라 하나의 자연적 사물로부터 다른 자연적 사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추상적·보편적 개념으로 이행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추상적·보편적 개념으로부터 구체적 사물을 이끌어 내거나, 구체적 사물로부터 추상적 개념을 이끌어 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어느 쪽이나 지성의 참된 진행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일은 내가 여기서 원인의 서열이라고 하는 것은 가변적 개체의 서열이 아니라 다만 확고하고 영원한 사물들의 서열이다. 생각컨대 가변적 사물의 서열을 파악하는 것은 무력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사물은 무한히 많고 또 동일한 사물 안에도 무한히 많은 상태가 있어서 지각의 상태가 그 사물의 존재 또는 부존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는 그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은 것이다. 곧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영원한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변적 개체의 서열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가변적 개체의 본질은 그 서열, 곧 존재하는 순서로부터는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순서로부터는 이끌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순서는 외부적 특징, 관계 혹은 좋게 말해서 상태 등 사물의 내적 본질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본질은 오직 확고하고 영원한 사물로부터, 동시에 참된 법전(法典)으로서, 이 사물들에 새겨져 있고 또 이에 따라 모든 개체가 생기(生起)하고 질서를 갖는 법칙으로부터만 탐구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가변적 개체는 내적으로, 또한 본질적으로 이러한 확고한 사물들에 의거하며, 후자 없이는 전자는 존재하는 것이나 파악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고하고 영원한 사물들은 비록 개체라고 하더라도 그 편재(遍在)와 매우 광범한 능력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보편 개념, 즉 가변적 개체의 정의의 류(類)와 같은 것이며 또 모든 사물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다.

그러나 위와 같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이러한 개체의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곤란이 따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앞서서 이해되는 순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것들의 존재의 서열로부터 탐구될 수는 없고, 또 영원한 사물로부터도 탐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한 사물에 있어서는 이러한 모든 것은 본성상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물과 그 법칙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 이외에 필연적으로 다른 보조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보조수단을 다루기에는 여기는 적합하지 못하고, 또한 그것은 우리들이 영원한 사물들과 그 필연적 법칙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갖고, 또한 우리들의 감각의 본성을 알고 난 다음이 아니면 필요하지 않다.

개체의 인식을 다루기 전에 특히 논해야 할 보조수단이 있다. 이것에 의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감각의 용법을 알고 또 탐구되는 사물을 규정하기에 충분한 실험을 특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행하는 것을 알고, 따라서 마침내 그 사물이 영원한 사물들의 어떠한 법칙에 따라 생기했는가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그 사물이 어떠한 내적 본성을 갖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적당한 때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주제로 되돌아가서 오직 영원한 사물들의 인식에 도달하는 데 필요하고 또 위에서 말한 조건에 따라 그 정의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다루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들은 앞에서 말한 바를 상기해야 한다. 곧 정신이 어떤 사상에 대해 이를 숙고하고 여기에서 정당하게 도출되는 여러 결과를 바른 질서에 따라 도출하도록 움직이는 경우, 만일 이 사상이 거짓이라면 정신은 이 사상이 허위임을 갈파하지만, 만일 참이라면 아무런 중단없이 정연하게 여기에서 새로운 여러 진리를 이끌어 낸다. 실로 이것이 우리들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초로부터만 우리들의 사상은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모든 것 가운데서 제1의 사물을 탐구하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사상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기초가 필연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방법은 바로 반성적 인식이므로 우리들의 사상을 인도할 이 기초는 진리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의 인식 및 지성과 여러 특성과 힘의 인식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것이 인식되기만 하면 우리들은 확고히 의거할 기초를 갖게 되고 또한 지성이 능력의 한도 내에서 영원한 사물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물론 지성의 능력에 비례해서이지만―길이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제1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참된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사유의 본성에 속한다면 지성의 힘 내지 능력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여기서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성의 힘과 그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 우리들의 방법의 주요 부분이므로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해석을 사유 내지 지성의 정의 자체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정의를 발견하는 아무런 규칙도 갖지 못했고, 또한 이 규칙의 발견은 지성의 본성, 즉 정의와 그 능력이 인식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므로 지성의 정의는 그 자체로서 명석하거나, 혹은 우리들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정의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명석하지 않다. 그러나 지성의 여러 특성은 우리들이 지성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선 그 본성이 인식되지 않으면 명석 판명하게 이해하는 지성의 여러 특성에 주의한다면 지성의 정의는 저절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기서 지성의 여러 특성을 열거하고 주의깊게 관찰해서 우리들에게 있는 본유(本有)의 도구에 대해 논하기로 하자.

내가 특히 주목했고 또 명석하게 이해한 지성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지성은 확실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지성은 사물이 지성 속에 객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형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안다.

2. 지성은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지각한다. 곧 어떤 종류의 관념을 절대적으로 형성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관념은 다른 관념으로부터 형성한다. 예컨대 양(量)의 관념은 다른 사상을 고려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형성되지만, 운동의 관념은 양의 개념을 고려에 넣고서야 형성된다.

3. 지성이 절대적으로 형성하는 관념은 무한성을 표현한다. 이에 반해 다른 것으로부터 형성하는 것은 한정된 관념이다. 예컨대 지성은 양의 관념을 원인에 의해 지각하므로 지성은 양을 통해 원인을 한정하고 있다. 어떤 평면의 운동으로부터 입체가, 선의 운동으로부터 평면이, 점의 운동으로부터 선이 생긴다고 지각할 때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은 양 자체를 이해하는 데 소용이 없고 오직 양을 한정하는 데 소용된다. 우리는 이러한 지각을, 말하자면 운동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운동은 우선 양 자체가 지각되지 않으면 지각될 수 없다는 데에서 이 점은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선을 형성하기 위한 운동을 무한히 계속할 수 있지만 만일 무한한 양이라는 관념을 갖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4. 지성은 부정적 관념보다 먼저 적극적 관념을 형성한다.

5. 지성은 사물을 지속의 형태보다도 어떤 영원한 관점에 있어서, 또한 무한수에 있어서 지각한다. 혹은 오히려 사물을 지각할 때 수나 지속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을 상상할 때에는 일정한 수, 일정한 지속, 일정한 양 밑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6. 우리들이 명석 판명하게 형성하는 관념은 우리들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생기는 듯하며 절대적으로 우리들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 같다. 혼란한 관념에 있어서는 반대이다. 곧 혼란한 관념은 때때로 우리들의 뜻과 어긋나게 형성된다.

7. 지성이 다른 것으로부터 형성하는 사물의 관념은 정신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정될 수 있다. 예컨대 타원형의 평면을 한정하기 위해 끈에 부착하는 연필이 두 개의 중심의 둘레를 운동한다고 허구하거나, 어떤 주어진 직선에 대해 언제나 동일한 일정한 관계를 갖는 무수한 점을 파악하거나, 그 정각(頂角)보다 부각(俯角)이 더 큰 사면(斜面)에 의해 절단된 원추체(圓錐體)를 생각하는 등 무수한 방식으로 제한된다.

8. 관념은 대상의 보다 많은 완전성을 표현할수록 완전하다. 예컨대 우리들은 작은 집을 설계한 건축가에 대해 장엄한 전당을 설계한 건축사 정도로 경탄하지는 않는다.

사유에 관계되는 나머지 사항, 예컨대 사랑·기쁨 등에는 나는 개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현재의 계획과 관계가 없고 또 지성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한 바르게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 지각이 전적으로 제거되면 이러한 것들도 제거된다.

 

허위의 관념 및 허구된 관념은 우리들이 충분히 밝힌 바와 같이 이것들을 허위, 또는 허구라고 부를 만한 적극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인식의 결함으로부터만 허위 또는 허구로 고찰된다. 그러므로 허위의 관념 및 허구된 관념은 허위이고, 허구인 한에서 우리들의 사유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본질은 지금까지 검토해 온 적극적 특성들로부터 탐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여러 특성들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다시 말하면 그것이 존재하면 이것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제거되면 이것도 제거되는 공통의 것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