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존재론(存在論: ontologia)

by 윈도아인~♡ 2012. 3. 17.

 

존재론(存在論: ontologia)

 

 

'존재론' 개념의 형성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각각 '존재론',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의 파악에 따르면 인식의 원리가 곧 존재의 원리가 되므로,

그런 경우 존재론과 인식론은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고,

다만 관심과 관점의 면에서 구별이 있을 뿐이다.

 

존재론이라는 우리말 어휘는 서양말 '온토로기아'(ontologia·ontology·Ontologie)의 번역어이다.

'온토로기아'라는 원 라틴어 철학 술어는 17세기 초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고크레니우스(R. Goclenius, 1547-1628)의 『철학사전』(Lexicon philosophicum, Frankfurt/M.

1613)에 최초로 등장한다(16. art.: 'abstractio').

 

여기에서 '온토로기아'(ontologia)는 말뜻 그대로 '존재에 관한 (철)학'(philosophia de ente)이라고 풀이

되어 있다.6)

 

철학사적으로 볼 때 '존재론'이라는 명칭은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학문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일부, 아니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과 형이상학[Metaphysica] 등에는 이미 거의 모든 존재론의 문제

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to on he on)와 이것에 자체

적으로 귀속되는 것에 관한 학문이 있다"(Aristoteles, Metaphysica, 1003a 21/22)고 하면서 이 학문을 "제일

철학"(prote philosophia)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1026a 24, 30 참조).

 

여기서 말해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와 이 존재자에 본래적으로 속하는 것은 '존재자의 있음[존재,

hoti esti]과 무엇임[본질, ti esti]'으로 해석되어 중세와 근대 초의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가 된다.

그러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한다[있다]'는 술어가 속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대상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의 탐구가 된다.

 

도대체 존재자는 왜 존재자인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관련하여 사람들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근원적인 존재자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근원적인 존재자에게 '신'(theos)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래서 '제일철학'의 문제는 신학(theologia)의 문제로 전이되었다.

 

이제 '존재론'은

미크라엘리우스(J. Micraelius, 1597-1658),

클라우베르그(J. Clauberg, 1622-1665),

하멜(J. B. Du Hamel, 1624-1704),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를 거쳐

볼프(Chr. Wolff, 1694-1754)에 이르러

 

'존재자 일반에 관한 학' 혹은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볼프의 강단철학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면서도, 새로운 철학을 구상한 칸트(I. Kant, 1724-1804)는

플라톤(Platon, BC 427-347) 이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까지 '학문'과 동의어로 쓰이

던 '철학'(philosophia)을 여타 과학들과 구별되는 전문 학문으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세분함으로써

존재론의 대상 영역을 확정하였다.7)

 

이제 존재론의 주요 문제들과 쟁점들을 살펴보자.

 

 

존재론의 문제와 쟁점들

존재론적 물음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무엇이다'고 대답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리고 과학적인 탐구에서도,

그 '무엇'이란 예컨대 장미꽃이거나 비둘기, 바위 혹은 생물, 무생물, 어떤 때는 세포나 H2O등을 지시

한다.

보통의 생활에서는

'그것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이런 유의 답을 모으려 하고, 그런 답을 얻으면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물음들의 바탕에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이 하나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장미꽃이든, 비둘기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혹은 용과 같은 상상적인 것이든,

 

그것은 반드시 '무엇이다'.

 

"도대체 이 '무엇임'이란 무엇인가?"는 그래서 어떤 물음보다도 근원적인 물음이다.

 

그런데 '무엇인' 것은 있거나 없거나다.

한 마리의 비둘기는 우리 집 지붕 위에 있고,

한 마리의 용은 그림으로는 있으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있음' (혹은 '없음')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무엇임' (혹은 '무엇 아님')과 '있음' (혹은 '없음')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철학자는 어떤 것이 무엇이 됐든, 그것이 꽃이든 새든, 세포든 H2O든, 삼각형이든 용이든,

그것이 '무엇'이며,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임을 보고, 어떤 것이 됐든 그것을 무엇이게 하고, 있게 하는

 근거, 원리를 묻는다.

 

그것은,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공기는 어떻게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것은 왜 '무엇'[본질, essentia, Wassein, Sosein]이며, '존재'[existentia, Daßsein,

Dasein, Wiesein]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어떤 한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 

이것은 과학적 물음의 대상이다 ??,

존재자 일반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다. 이것이 존재론의 근본 물음이다.

 

어떤 것은 도대체 어떻게 무엇일 수 있으며,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왜 도대체 없는 것[無]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存在者]이 있는가?"로 정식화된 존재론의 물음을 우

리는 라이프니츠에서(Leibniz,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ace, fondés en Raison, 수록: Philosophische Schriften, Bd. I, hrsg. v. H. H. Holz, Darmstadt 1985, S. 426 참조) 발견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또한 하이데거에서(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1935], S. 1f. 참조)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이 무엇인 것[存在者]보다 더 간단하고 쉬운데,

왜 사물들은 존재해야만 하는가?"

"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mehr Nichts?" ?? 이것은 '형이상학의 기본 물음'으로

서 물음들 가운데 물음이며, 최초의 물음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를 향하여, 그것의 존재 이유를, 궁극의 존재 원인을 묻기 때문이다.)

 

이 존재론의 기본 물음은 다음의 물음들을 함축한다.

 

(1) 도대체 무엇임[본질] 일반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존재]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2) 존재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엇으로 있다[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무엇임[본질]과 있음[존재]의 관계는?

 

(3) 어떤 존재자는 개별성 혹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갖는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산파인 어머니를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동시에 사람이고 생물이다.

    여기서 개별자 '소크라테스'와 보편자 '철학자', '사람' 혹은 '생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4) 어떤 존재자,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기원전 469년부터 399년까지는 존재하다가,

     기원전 399년 이후에는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왜 어떤 존재자는 있다가 없게도 되며, 없다가 있게도 되는가?

     모든 존재자가 이러한 성격을 갖는가? 항상 있기만 하는 존재자는 없는가?

 

(5) 도대체 '있다', '존재한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론의 물음과 관련된 쟁점들

 본질과 존재 일반의 근거 혹은 원리

존재자의 무엇임과 있음의 규정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며, 그 방식은 근원적인 존재자로부터 유래한

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 존재자의 존재 규정 일반은 존재자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의 사고 방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모든 존재자는 본질의 면에서나 존재의 면에서 그 존재자가 그러한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은 그 존재

자 자신 안에 혹은 밖에 있으되, 그 원인 역시 어떤 형태의 존재자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은 어떤 것을 무엇이게도, 있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규정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시원(始源), 근원적인 존재자로서의 신(神)의 개념이다.

 

낱말로서는 똑같이 신(theos, deus)이라고 표현되더라도,

존재자의 유래를 자연발생적으로 파악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의지적인 창조의 결실로 파악하는 유신론(有神論, theism)이 있다.

 

이 가운데

이신론의 신 개념은, 존재의 생성의 근거율 적용에서 하나의 예외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신론의 신 개념은 초월성과 인격성으로 인해서 많은 쟁론을 불러일으킨다.

 

이신론의 신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무엇인가가 존재함은,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확실하다(Descartes의 "cogito ergo sum."[Meditiones, Ⅱ; Principia Philosophiae, Ⅰ, 7; Discours de la méthode, Ⅳ, 1] 참조).

그리고 나를 나 자신이 있게 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를 있게끔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원인으로서의 존재자의 계열에서 최초의 존재자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고 시원(始源)이다.

 

그러니까 이 최초의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 원인을 더 이상 자신의 밖에 갖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자기 원인'(causa sui)이라 일컬어지고, 신(theos)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ens a se)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은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Descartes, Principia Phil., Ⅰ, §57 참조)이라는

의미에서 '실체'(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므로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m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

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재] 존재자'(ens realissimum)라고도 불리운다(Descates, Principia, Ⅰ, §§48-51;

Spinoza, Ethica, Pars Ⅰ; Leibniz, Monadologie, §§39-40 참조).

 

이신론의 신 개념으로써 세계의 발생을 설명할 때, 그런 견해는 보통 '유출(流出, aporroia, emanatio)설'이라고 불린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老子, 『道德經』 四十二: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하나[一者, to hen, 하나님]는 만물이되 유일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만물이 아니라,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Plotinos, Enneades, V, 2, 1: Peri geneseos)

 

'하나'(一者, to hen)로부터 세계의 발생을 유출로 설명하면서, 그 '하나'를 단지 순서에 있어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세계 내재적인 것으로 보면, '자연과학적'인 세계 생성의 설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 생성의 설명에 대해서는, "그 '하나'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지만, 이신론은 이 질문 자체를, 그 '하나'는 궁극의 원인이므로, 더 이상 그 유래를 물을 수 없다고 배제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들 갖는다'는 존재 근거율에 단 하나의 예외가 인정되는 셈이다. 이 점 이외에는 유출설의 구성은 '논리적'이므로, 이신론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작업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사물[존재자]의 본질에 존재 방식은 그 원인에 따라 규정되며(Spinoza, Ethica, Pars I, 25 참조), 그 원인은 자연 안에 있다. 이 원인의 계열, 즉 존재자의 전 계열 자체가 자연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계의 시원(始源)으로서의 '하나'는 의지와 지혜를 가진 존재자이며, 그 '하나'의 의지와 지혜의 질서에 따라 만물의 본질과 존재의 양이 정해진다고 파악한다. 이런 '하나'를 신이라고 부를 때, 그런 견해는 유신론이라고 일컬어지며, 이때 신은 인격성을 가지므로, 보통 '인격신'이라고 불리고, 인격신으로부터의 만물의 유래를 '창조'(創造, creatio)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그 '하나'는 '하나님'('하느님'), 혹은 '창조주'라고 불리며,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 원리로 이해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는 […]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1 참조)

 

창조주로서 '하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악의 회개를 기뻐하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고, 간절한 소원에는 응답한다. ??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질들을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완전한 인격체'이다. 인격신으로 '하나'는 또한 자연 만물의 근원이면서도 자신의 피조물과는 위격(位格)에서 완전히 구분되어, 자연의 존재자들의 계열 중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초월자'이다.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신의 존재 설명에는 초논리적 요소가 불가피하게 개입되므로, 계시(啓示)에 의한 확인이나 신앙(信仰)이 요구되고,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몇 예를 살펴보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방식 가운데 철학사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방식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칸트에 의해서 각각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존재론적 증명' 방식은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제안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의 형식을 빌어 정리해 볼 수 있다(Anselmus, Proslogium, cap. 2, 3 참조).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성의 결여를 뜻하므로,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 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제안한 다섯 가지 증명 방식 가운데 세 번째와 다섯 번째 것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Pars I, q. 2, art. 3 참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말하자면 우연적이고 가능적인 존재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의 존재 근거가 자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우연적인 존재자들의 근거로서 그것들의 밖에 하나의 존재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 필연적인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전혀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의 사물들도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 그것도 일정하게 의도된 목적을 향하여. 마치 화살이 저 혼자 날아가지만, 궁수에 의해서 계획된 방향으로 날듯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들은 어떤 지적인 존재자에 의해 계획된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 이 운동의 기획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이외에 '이성론적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또 다른 증명 절차를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Descartes, Meditationes, Ⅲ 참조).

 

① 명석판명한 인식만이 참이다(데카르트의 '보편타당한 진리'의 기준으로서의 perceptio clara et distincta: ego-cogito-cogitatum).

② 명석판명한 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있다.

③ 원인 없이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이것은 '자연의 빛'으로서 이성이 주는 명명백백한 사유법칙이다],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을 있게끔 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④ 이 원인의 내용은 그 결과인 신의 관념의 내용보다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

⑤ 그런데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은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다는 것이다.

⑥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의 원인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거나, 내 의식 내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관념일 수가 없다. '나'나 내 의식 내의 또 다른 어떤 관념도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⑦ 그러므로, 내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은 내 의식 밖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⑧ 따라서, 내 의식 내의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신은 내 의식 밖에 실재한다.

 

이밖에도 라이프니츠는,

개별 사물들은 각종의 결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집합체인 세계는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계가 적절성의 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런 세계를 만든 자는 그러므로 완전한 자라 하여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다(Leibniz, Monadologie, §§54-57 참조).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지각된 것만이 실재'["esse is percipi"]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런데 자연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우리 인간이 지각할 때는 있다가

우리가 지각하지 않으면 없게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지각 중에 있어야 하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모든 것을 지각하는 무한자여야 한다고 보아,

그 무한자를 신이라고 논변한다(Berkeley,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sect. 3·89·147 참조).

 

그러나 이상의 여러 신의 존재 증명이 논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이들 증명은 선(善)을 상주고 악(惡)을 징벌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칸트가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논리적으로 허위임을 밝혀 냄으로써(Kant, K.d.r.V., A567=B595-A704=B732 참조),

그 후로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의 존재의 입증은 그러니까 이제는 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오로지 종교-신학적인 문제라 볼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 없는 존재자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주장이 됨으로써,

존재론의 근본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가령 우리는, '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자일 수 있는가?'·

'신은 도대체 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인가?'라고 다시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근거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본질'이니 '존재'니 하는 것은 존재자를 인식하는 의식의 규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의식되는 존재자'로 국한된다. '

누구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란 따라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재론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철학함의 기본 태도인 확실성의 토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실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무의미한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한

다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 논의는 의식의 초월성에 관한 인식론적 쟁론에로 이어진다.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의 관계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관계 문제는 유한자의 성격 반성에서 대두됐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존재자들은 일정 기간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 사실은, 어떤 무엇인 것이, 그러니까 일정한 본질을 가진 것이 존재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존재'가 그 '무엇인 것'과 함께 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특히 스콜라 철학에서 유한자의 그러한 유한성이

그것이 그 존재함에서 타자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한자와 그것의 존재의 지주(支柱)인 근원적인 존재자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결부되어 생각되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무엇'으로서 '존재'하며,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자는

그 '무엇' 즉 본질(essentia)과 그 존재(existentia)의 결합체(compositio)이며,

 

이때 본질과 존재는 실질적인 차이(distinctio realis)를 갖는다는 견해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제

기되었다.

 

'무엇인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존재란 무엇인 것의 우연적 속성에 불과하다.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어떤 것은 여전히 무엇인 것이므로,

존재와 본질은 전혀 별개의 것(res)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별을 통하여 단지 가능적이던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고,

현실적으로 실재하던 것이 소멸하기도 하는 사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70-1308)는 존재와 본질은 실질적인 구별이 아니라,

'존재'란 무엇인 것의 양태(modus)라 하고,

수아레즈(Suarez, 1548-1617)는 '존재'는 그 자체로 무엇과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

것의 양태도 아니며,

무엇이 '있다'·'없다' 라는 것은 단지 개념상의 구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아레즈가 말하는 '개념'이 인간의 의식작용의 일종으로 해석된다면,

있음과 없음은 실질적인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것의 양태도 아니고 한낱 의식작용이 됨으로써,

그의 생각은 '존재'가 사고의 형식이라는 칸트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고 이 문제 역시 실재론(??)과 관념론(??)의 갈등에 포섭된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공자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원효는 사람이다. ?? 

공자, 소크라테스, 원효를 개별적 존재자라고 한다면,

이것들 모두를 포섭하는 '사람'은 보편적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 노트에 연필로 그린 정삼각형이 있다.

내 기하학 책에 인쇄된 둔각삼각형이 있다.

칠판에 분필로 그려진 예각삼각형이 있다.

나는 이제 이들 삼각형들을 모두 지워버린다. ?? 그러면 삼각형은 더 이상 없는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선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선이다.

이웃에 친절함은 선이다. ?? 

이때 낱낱의 선한 행실들과 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금강산은 아름답다.

대금 소리는 아름답다.

이사도라 던컨의 손끝은 아름답다.

고야의 '마야'는 아름답다.

?? 이들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다움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와 같은 예들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별자들과 보편자의 관계에 관해서,

이른바 보편자는 개별적인 것들의 공통 징표에 의한 한낱 개념 내지는 이념[이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 것들은 보편자라는 원본(原本)을 다소간에 닮았거나 본뜬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립적 견해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ousia]론의 차이에서도 이미 볼 수 있다.

 

개별자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하지만,

그 개별자들에 공통인 보편적 성질들은 존속한다.

뿐만 아니라, 개별자들은 그 보편성 가운데 약간씩을 결여한 채로 존재하며,

따라서

개별자는 보편자를 닮았다.

보편자는 영구불변적이고 그런 뜻에서 실재라고 한다면,

개별자는 이 실재를 닮았으나 명멸하는 것으로 그런 뜻에서 실재의 모상(模像) 내지는 현상이다.

 

이 보편자를 개별자들의 이데아로서 절대 불변적인 참된 것으로 파악하는 플라톤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으로서 개체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 중에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간다고 본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종(種)이나 유(類)의 표상으로 이해된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문제는

중세에 논리학과 희랍적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앙이 뒤섞여 하나의 격렬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보통 '보편논쟁'이라고 부른다.

 

논쟁은 에리우게나(J. S. Eriugena, 810-877)가

'실재론'적 견해를 피력한 데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하고 자신 안에 포섭하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

적으로 실재하는 것(res)이다.

 

보편자를 이렇게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입장을 '실재론'(realism: realis ?? res)이라고 부

른다.

??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실재론은, 보통 관념론-실재론의 대립 개념에서 말하는 실재론과 다르

다. 

?? 이 보편자 실재론은 개념 간의 논리적 포섭 관계가

존재자의 산출 및 포함 관계라고 파악한다.

 

보다 더 보편적인 개념 즉 상위 개념이 층층의 하위 개념

즉 점점 덜 보편적인 개념들의 바탕에 놓여 있듯이,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의 기체(基體)로서

다양한 개별자들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며,

개별자들은 이 기체의 여러 가지 상태(status)라고 생각된다.

 

보편자 실재론과는 반대로 보편자란 한갓 명사(名辭, nomen)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유명론(唯名論: 名目論, nominalism)이라고 일컫는다.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기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경험되는 개체이며,

개체는 판단에서 '바탕에 놓이는 것'(hypokeimenon, substratum) 즉 실체(substantia)이며,

반면에 보편자의 논리적 의미는 판단에서 술어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실체, 실재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실재하는 개체들에 공통으로 붙여진 명칭 혹은 공통의 부호이며 낱말이고,

낱말이란 말소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소리란 혀와 입이 만든 공기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찍이 보에티우스(A. N. S. Boethius, 480-

524)는 정의했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것만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여러 개별자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나,

하나의 사물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은 인간의 언어 습관 내지 사고 습관일 따름이며,

진짜로 있는 것은 개별자뿐이다.

 

보편자의 실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성주의(rationalism)로 기울듯이,

개별자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쉽게 감각주의(sensualism)로 기우는데,

그것은

개별자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감각경험에서 성립하는 반면,

보편자는 결코 감각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에 대해서 절충적 견해를 취한 사람들도 있는데,

아델라르드(Adelard of Bath, 1090-1160)와 아벨라르드(P. Abelardus, 1079-1142)의 생각이 언급될

 만하다.

아델라르드의 견해는 보통 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라고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보편자는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체 안에 내재한다(uiversalia in re)고 본다.

 

실재하는 것인 개별자는 자기 안에 다른 개별자들에게도 공통인 일정한 성질을 갖는다.

이 유사성(consimilitudo)은 개별자들에게 무차별적인 것이고,

유(類)는 그 안에 포섭되는 모든 종(種)들에,

종은 그 안에 포섭되는 모든 예(例)들에 무차별적으로 내재한다.

 

개념주의(conceptualism)라고 불리는 아벨라르드의 주장에 따르면,

보편자는 실재하는 것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갓 공기 운동으로서 말소리일 수만도 없다.

말소리가 여느 공기 운동과는 달리,

언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며,

이 보편적 의미란 다름 아닌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이 본질 규정에서 똑같은 것(conformitas)을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보편자란 개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 규정 즉 개념이다.

 

그러나

보편논쟁에서 문제가 되었던 보편자와 개별자는, 주로 피조물로서의 자연 존재자를 지시하는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이 문제가 수학적 존재자나, 선의 이념이나 미의 보편성의 탐구에 관련이 될 때는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의 기능, 특히 상상력이 하는 역할을 고려하여

보편자는 관념으로, 이상으로, 형식적 원형으로 이해되고,

개별자는 그 보편성의 얼마간씩을 구체적으로 현시 혹은 담지하는 것으로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유한 존재자와 무한 존재자의 구별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짙푸르던 초목도 쓰러져 사라지고,

단단하기만 하던 바윗돌도 분해되어 사라지며,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각성시켰던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죽었듯이,

나도 죽고 너도 마침내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존재의 끝을 의미하는가,

존재 방식의 변경인가?

과연 존재는 시작되고 끝나고 하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과 관련하여,

철학자들은 존재자들을 유한 존재자와 무한 존재자로 형식적으로 구분하곤 했다.

 

만약 무한 존재자가 있다면,

그런 존재자에게는 존재의 시작도 끝도 없을 것이고,

그 까닭인 즉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신 안에 갖음이고,

그래서

'자기 원인적 존재자', '

자기로부터의 존재자'(ens a se)로 불리고,

 

일정 기간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존재에 시작과 끝을 갖는 존재자가 있다면,

그 까닭은 그 존재가 타자에 의존되어 있음일 것이고,

그래서 '타자로부터의 존재자'(ens ab alio)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금 신의 문제와 관련되어,

궁극적으로 저 '타자'는 신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혹은 모든 자연 존재자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

아가되,

자연 자체는 모든 존재자를 낳고 모든 것을 포섭하는 자이니,

자연이 바로 신이라고 파악되기도 한다.

 

'나'의 죽음, 우리 인간의 죽음의 의미 탐구에서 비롯해서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생명의 발생과 소멸의 의미의 문제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생명

의 원리로서의 '영혼'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인간 존재자에 국한되면,

마음(心)과 몸(身)의 구별 유무를 따지는 심리철학의 문제가 된다.

 

?? 마음을 축약 발음해서 '맘'이라 표기하고, 맘과 몸을 합해서 '뫔'이라고 표기하면,

 이원(二元)적 선입견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마음-몸 곧, 뫔의 문제가

세계 내의 모든 자연 존재자에게 확대되면 이른바 정신과 물질의 문제가 된다.

 

 '있음'[존재]의 의미의 문제

 

존재론에 얽혀 있는 많은 문제들은,

반성해 보면,

'있음'[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은 데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있다'고 할 때,

'있다'는 무엇을 뜻하며,

'없다'와 구별되는 징표 내지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없다가 있게 되고, 있다가 없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존재론에 얽혀 있는 문제들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무엇이 있다가 없어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존재자[有]가 비존재자[無]로 전환되는 것이고,

없던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은, 비존재자[無]가 존재자[有]로 되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모순 관계인 이 두 항 사이의 상호 이월(移越)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가능한 두 답이 고려될 수 있다.

 

첫째로, 발생 소멸은 오직 모든 존재자를 주재(主宰)하는 자의 창조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답이 유효하려면, 그 '주재자'의 존재가 납득되어야 한다.

 

둘째로 가능한 답변은, 발생 소멸이란, 한 시점에서 무엇[예컨대, 甲]이던 것이 다른 시점에서 그 무엇

          이 아닌 것[예컨대, 乙]으로,

         혹은 한 시점에서는 무엇으로 인식될 만한 것이 없다가,

         다른 시점에서는 무엇으로 인식되는 것이 나타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때엔 '무엇으로 있다'는 '무엇으로 있다고 인식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없다'의 기준은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 이유로 대치된다.

 

용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의 동물로 '있고',

하느님은 존재하지만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삼각형은 칠판 위에 그리면 있다가 지우면 없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나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다.

이처럼 '있다'는 매우 다의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들을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최고의 유(類)적 술어들을 모아

'범주'(categoria)들이라고 불렀을 때,

 

'있다'는 그런 범주의 하나로 생각되지 않는다.

 

후에 칸트는

'있다'를 양태의 범주로 파악하고,

'있음'에는 세 가지 양태가 있으며,

그 양태는 존재자의 성질[속성]이 아니라, 사고하는 의식의 무엇인 것에 대한 태도라고 규정한다.

 

칸트가 제시하는 바,

의식이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태도를 정할 때 규칙으로 쓰이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Kant, K.d.r.V., A218=B265f. 참조).

 

첫째, 공간·시간상에 나타나고 수량으로 재어질 수 있고, 다른 것과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즉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가능적으로 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적 존재자다.

 

둘째,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 그런 것은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자다.

 

셋째, 어떤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인과관계나 상호관계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반드시 있다.

        그런 것은 이를테면 필연적 존재자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있다'의 기준에 따라 존재자 개념을 가지게 되면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론적 물음에서 함께 묻고자 했던 많은 '존재자'들이 존재론의 물음과는 아무

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된다.

 

가령 영혼이니 신이니 하는 것 등은 더 이상 '존재자'라고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 예는,

존재론의 물음은 근본적으로 '존재'[있음]의 의미 문제로 환원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공동번역 『성서』

老子, 『道德經』.

Anselmus, Proslogium.

Aquinas, Th., Summa Theologiae.

Aristoteles, Metaphysica.

Berkeley, G.,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__________, Principia philosophiae.

__________, Discours de la méthode.

Heidegger, M.,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1935).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1787).

Leibniz, G. W., Philosophische Schriften, Bd. I, hrsg. v. H. H. Holz, Darmstadt 1985.

_______________, Monadologie.

Platon, Phaidros.

Plotinos, Enneades.

Spinoza, B., Ethica.

Wolff, Ch., Philosophia prima sive ontologia

(출처/네이버블로그~퍼플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