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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

by 윈도아인~♡ 2012. 3. 17.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

 

 

'형이상학'의 유래

 

우리말 '형이상학'은 서양말 metaphysica·metaphysics·Metaphysik의 번역어 '形而上學'에서 유래한

다.

원래의 말 'metaphysica'는 기원전 1세기에 안드로니코스(Rhodos의 Andronicos)가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322/1)의 저작들을 정리하면서 제목 없이 전해져온 존재에 관한 14권의 저술

을 자연학(physica) 뒤에 묶어 놓으면서 '자연적인 것[자연학] 뒤의 것'[tà metà tà physicà]이라고 명

명한 데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철학의 핵심 영역 중 하나인 형이상학의 내용을 미뤄 생각할 때,

당초에는 책 편집상의 순서를 지칭하던 '자연적인 것 뒤의 것'이라는 이 말이 책의 내용을 담은 '자연

적인 것 너머의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말로 전환된 셈인데,

그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사태에 부합하여 일어난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본디 '뒤에' 또는 '다음에'를 뜻하던 그리스어 'meta'가 중세에 라틴어 '위에'(supra) 또는 '넘어

서'(trans)의 의미를 얻음에 따라,

형이상학은 학문 소재의 성격상 자연학을 상당 수준 한 뒤에 연구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라는 뜻과 함

께, 형이상학은 자연학을 넘어서,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그것의 토대, 근거, 원리, 이를테면 도(道)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을 얻었다.

이미 그런 뜻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 Aquinas, 1225-1274)는 "metaphysica는 곧 transphysica를 일

컫는다"(In Boet. de Trin., q. 5, a. 1)고 말한 바 있다.

 

'metaphysica'에 '형이상학' 즉 '형상 위의 것[形而上者] 곧 도(道)'[『周易』, 繫辭上 十二: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명칭을 주는 것은 이 같은 의미 연관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겠다.

 

진정한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형이상학은 문자 그대로 '감각적인 것 너머의 것[tà metà tà physicà],

바꿔 말하면 자연 저편의 것에 관한 학문이다.

형이상학은 명칭상 자연, 곧 경험 대상의 총체를 넘어서는 것,

그러니까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학'이다.

 

이런 뜻에서 아직 '철학'이 과학과 구별되기 전, 모든 학문적 주제는 형이상학적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의 근대적 "학술 개념"(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38=B866)에 따라 말한다면,

철학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Kant, K.d.r.V.,

A713=B741; Logik: 『전집』 Ⅸ, S. 23)이다.

그러니까 철학은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들의 체계인 제 과학[分科學]과 구별되는가 하면,

또한 같은 이성 인식의 체계라는 점에서는 동류인 수학하고는, 수학이 "개념의 구성[作圖]에 의한"(

은 곳) 이성 인식의 체계, 곧 이성 개념을 직관에서 그려내는 인식의 체계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인 철학적 인식으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사고의 능력인 이성 자체, 곧 사고의 형식에 관한 순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대상들에 관한 순수 인식이다.

 

그 대상이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철학적 인식으로 인해 철학은 바로 서로 구별되는 두 영역을 갖는다.

 

첫째 영역은 '대상의 차이와는 관계없이 사고 형식의 원리(logos) 일반'에 관한 인식을 그 내용으로 갖

는바 이름하여 논리학(logica)이다. 논리학은 이를테면 철학의 형식적 부문이다.

 

둘째 영역은 반면에 대상과 인식 내용을 갖는 철학의 실질적 부문인바, 그것이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

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철학'으로서 형이상학은 취급하는 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금 두 분야로 갈린다.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바'의 것[存在者]에 관한 것인 '자연 내지는 존재 형이상학'과,

자유(自由) 즉 '스스로에서 비롯하는 바'의 것[當爲, 道德]에 관한 것인 '자유 내지는 윤리 형이상학'이

그것이다.

'존재 형이상학'은 순수 이성의 이론적[사변적] 능력 분석에 의거하고,

'윤리 형이상학'은 순수 이성의 실천적 능력 곧 자유의 분석에 의거한다.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개시하는 힘"으로서 자유를 주제로 삼는 자유 형이상학은,

자유에서 비롯하는 원리가 바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당위(當爲, Sollen),

 

그러니까 도덕(道德)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곧 도덕철학 내지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존재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존재자 일반의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과

한 존재자이긴 하지만 결코 감각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특수한 존재자들을 탐구하는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으로 나뉜다.

 

일반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존재자인 까닭을 탐구하고 모든 존재자에게 타당한 원리를 찾는 것이므로, 다름 아닌 존재론

을 말한다.

 

특수 형이상학

 

특수한 존재자를 다루는바, 그런 존재자는 자연을 초월해 있는 것이므로 오로지 이

성의 힘으로써만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그런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영혼·우주 자체·신인데,

그래서 영혼론·우주론·신학이 특수 형이상학의 내용을 이룬다.

 

좁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보통 자연 형이상학만을 지칭하는데,

이때 그것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서 얻은 "모든 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인식들[…], 순전히 개념들에

의거한 순수한 이성 원리들 일체"(같은 책, A841=B869)를 뜻한다.

 

순전히 개념들에 의한 순수 인식의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은 "사고 능력 자체의 본질로부터 얻어진" 것

인 바, "사고의 순수 활동들, 그러니까 선험적 개념과 원칙들"(Kant, 『전집』 Ⅳ, S. 472), 곧 인식 대상에 관

계하는 순수한 이성 사용의 최고 원리들이 그 내용을 구성한다.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다름 아닌 형이상학과 동일한 것인 철학은 그 내용을 이루는 순수한 이성 사용의

최고 원리들을 결코 경험으로부터,

 

그러니까 어떤 대상으로부터 얻어 갖는 것이 아니고, 이성 자신 안에서 찾아낸다.

철학은 이성 자신이 그것에 준거해서 대상을 다룰 이성 사용의 규칙을 밝혀내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입법자"라 하겠는데, 이것이 철학의 이른바 "일반 개념"(Kant,

K.d.r.V., A838=B866)이다.

 

엄밀한 학으로서 형이상학의 가능성

 

우리가 순수한 이성 인식의 한 체계, 곧 하나의 형이상학을 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고, 경험으로부터는 결코 아무것도

취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은 어떤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어디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도대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인가?

 

이성은

우리 이성 자신을 점검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 근거를 캐고,

이성은 경험적 원리의 도움 없이 어디에까지, 어떤 종류의 대상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규정하고,

또한 이성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 원리들과 함께 넘어서서는 안 될 경계선을 획정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에서 이성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전혀 이종(異種)적인 초감성적인 것으로 넘어서려

한다.

이때 더구나 이성은 지금 그가 감성 세계를 인식하는 데 쓰던 인식의 원리들을 가지고 그렇게 해보려

 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것과 초감성적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원리들은 초감성적인 것들에는 도무지 타당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이성이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자기 능력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인식해보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큰 위험과 착오가 있다.

 

이를 피하고 참된 형이상학을 위한 확실한 주춧돌을 놓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먼저 이성이 그 이론적 사용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이성 사용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일

이 필요하다.

칸트(I.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이 문제, 곧 순수한 이성이 대상과 관련해서 우리

를 어디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가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형이상학은 이런 작업을 통해 비로소 '엄밀한 학'으로서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周易』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1787).

_______, Gesammelte Schriften[『전집』], hrsg. v. der Kgl.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 v. der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zu Berlin, Bde. I-XXIV, XXVII-XXIX,

       Berlin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