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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인간본성론

by 윈도아인~♡ 2012. 3. 17.

칸트의 인간본성론

 

문성학(경북대학교)

1. 서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중요성은 철학의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강조되어 왔던 물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물음이 그 물음의 중요성에 걸맞는 자기 자리를 찾게 된 것은 칸트에 이르러서이다. 칸트는 철학의 모든 물음들, 심지어 인간이 던지는 모든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귀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철학의 중심적인 물음으로 만들었다. 몬딘은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철학의 중심적인 물음임을 주장한 지 200년쯤 뒤에 내용상 칸트가 했던 말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최대의 문제이다. 인간 문제가 우리들 인간에게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물음들 예를 들어 지구, 하늘, 달, 별, 공기, 원자, 물, 원자, 세포 등에 관한 물음이나 심지어 신에 과한 물음조차도 우리 인간 존재와의 관련에서만 비로소 중요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칸트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는가? 필자는 이미 다른 곳에서 칸트가 인간을 가능적 무한자로 보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가능적 무한자라는 인간관의 관점에서 볼때, 칸트 이론철학에서 중요한 해석상의 문제들이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를 설명해 보였다. 우리는 인간을 가능적 무한자로 보는 칸트적인 인간관의 현대적 메아리를 코레트에서 듣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한한 존재 일반의 제한성을 돌파하고, 전체로서의 존재의 무한한 넓이에 이르기까지 팔을 뻗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신 그 자체가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모든 개별적인 인식작용은 항상 단지 유한할 뿐이다.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유작용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재의 무한한 지평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존재일반의 무한한 넓이에 이르기까지 손을 뻗친다. 이는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 인간의 정신이란 현실적 무한성(aktueller Unendlichkeit)의 의미에서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정신 즉 현실적으로 유한한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가능적 무한성(virtuellen Unendlichkeit)이라는 의미에서 무한하다. 바로 여기에 인간정신의 비밀이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성선 성악 논쟁에 대한 칸트의 입장이 비록 칸트 자신은 거부했지만, 변형된 절충론임을 밝히고, 그것이 가능적 무한자라는 인간관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II. 성선설과 성악설 사이의 전통적 논쟁에 대한 칸트적 입장


 

칸트는 성설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성악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3의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밝혀보려고 할 때, 우리는 당장 칸트가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선의지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서 칸트는 다음처럼 말한다.

이 세계 안에서, 아니 심지어 이 세계 밖에서도 조차도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uter Wille)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성, 기지, 판단력,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불려지던 정신의 다른 재능들과, 또는 용기, 결단성, 인내심 같은 기질상의 성질들도 의심의 여지 없이 많은 점에서 선하고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선물도 그것들을 사용하는 의지 -- 그래서 그것의 고유한 성질은 성격이라고 불려진다 -- 가 선하지 못하다면, 극히 악하고 유해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과연 칸트가 말하고 있는 '선의지'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하여간 칸트가 인간에게 그러한 의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일단 성선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선을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로 돌리면, 기독교의 원죄설을 연상시키는 '근본악'(radikale Böse)이란 개념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칸트는 단정적으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칸트는 성악설을 지지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칸트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식의 손쉬운 절충론을 택할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 절충론적 해석을 지지하는듯이 보이는 다수의 구절들을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인간 본성의 타락성(Bösartigkeit)은, 사람들이 '악의'라는 말을 엄격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즉 악을 악으로서 자기 준칙의 동기로 받아들이는 심정(준칙들의 주관적 원칙)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악의(Bosheit)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타락성은 오히려 심정의 전도라 불려져야 한다. 그것은 그 결과에 따라 악한 심정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이 악한 심정은 일반적으로 선한 의지와 공존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라는 종족 안에 내재하는 선의 종자가 단지 방해 받음이 없이 잘 발전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는 작용하는 악의 원인과도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구절들은 칸트가 성선설과 성악설 간의 논쟁에 있어서 절충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칸트가 이런 절충론적 입장을 배격하고 있음은, 그가 인간이 유사 이래로 더 사악한 상태를 향하여 가속도적으로 전락해 간다는 입장과 이 입장과는 정반대의 입장 즉 세상은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에로 끊임 없이 진행해 가고 있으며,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려는 소질이 인간 본성안에 발견되고 있다는 입장을 대비시켜 소개한 뒤 다음처럼 말하고 있는데서 밝혀진다.

앞에서 제출된 두가지 가설간의 논쟁은 하나의 선언적 명제, 즉 인간은 본성상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또는 윤리적으로 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주장이 그 밑바닥에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즉 이 선언명제는 과연 타당한가? 혹은 어떤 사람은 인간은 본성상 이 양자 중에 어느것도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혹은 다른 사람은 그와는 달리 인간은 동시에 선하기도하고 악하기도 하다고, 즉 어떤 부분은 선하고 어떤 부분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더욱이 경험은 선과 악의 두 양극단의 이러한 중간을 실증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윤리이론 일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은 행위에 있어서나 인간의 성품에 있어서, 가능한 한 도덕적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매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준칙은 그 정확성과 견고성을 박탈당하는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적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엄격주의자(Rigoristen)로 부르고 그 반대론자들을 자유주의자들(Latitudinarier)로 부른다 그리고 이 자유주의자들을 다시금 중립적인 자유주의자들 혹은 무관심주의자들(Indifferentisten)과 연합의 자유주의자(Latitudinarier

der Koalition) 혹은 절충주의자들(Synkretisten)로 구분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칸트의 입장이 전통적인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니며 그렇다고 절충론도 아니라면, 과연 칸트의 입장은 무엇인가?


 

III. 인간의 본성과 자유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아니면 선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악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접근방식은 현대식으로 표현해서 인간 속에 선이나 악의 유전인자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마치 늑대는 포탈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유전인자를 자신 속에 갖고 있으며, 양은 온순한 초식동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유전인자를 갖고 있듯이, 인간도 어떤 유전인자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에 대한 이러한 접근방식은 그 배후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이라는 생각을 숨기고 있는 것이 된다. 동물들의 행동은 유전자에 입력된 명령에 따라 환경과 교섭하며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인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에게는 선의 유전자나 악의 유전자같은 것은 없다. 인간에게는 단지 자신의 행위준칙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사실을 추리할 수 있다.

 

첫째로, 기존의 성선설과 성악설 간의 논쟁은 근본적으로 길을 잘못 찾아든 것이 된다. 만약 인간의 선함과 악함이 인간 속에 있는 유전자 탓이라면, 그 성격이 악한 경우에는 그 책임이 자연에게 있는 것이 될 것이고 그 성격이 선한 경우에는 그 공로 역시 자연이 차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이 "그의 성격의 창시자"다. 그러므로 "도덕적 악을 자유와 인간 행위를 통해 규정하려는 칸트의 태도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의 자체를 처음부터 거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도덕법칙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심성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을 수는 없다. 즉 "인간은 또한 어떤 부분에서는 도덕적으로 선하면서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악할 수도 없다. ; 왜냐하면 어떤 면에서 인간이 선하다고 한다면 이는 그가 도덕법칙을 그의 준칙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이 또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악하다고 한다면, 의무의 수행에 있어서 도덕법칙은 유일하고 보편적인 것이므로, 선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악하기도 한 사람에게는 도덕법칙과 관계하는 그의 준칙이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본성(Natur)이란 표현은 -- 통상 그렇듯이 -- 자유에 의한 행위들의 근거와 정반대의 것을 의미할 때는, 도덕적으로 선하다든가 악하다고 하는 술어들과 단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인간의 본성이란 말을 "단지 (객관적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자유 사용의 주관적 근거"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주관적 근거는 다시금 그 자체 자유의 행위(Actus der Freiheit)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도덕법칙에 대한 인간의 선택의지(Willkür)의 사용 또는 오용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으며, 그의 내부에 있는 선 혹은 악을 도덕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든지 악하다고 말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칸트에 의하면, 악의 근거는 경향성을 통해 선택의지를 규정하는 대상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택의지가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기 위하여 스스로 설정하는 규칙 즉 준칙 안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준칙에 관해서 하필이면 그 준칙을 택하고 그와 반대되는 준칙을 택하지 않는 그 주관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고 물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이 근거가 결국 그 자체로 어떤 준칙이 아니고 단순히 자연적 본능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유의 행위라고 생각한 준칙의 채택이 자연적 동기에 의해 규정된 것이 되는데, 이는 이미 확립된 진리인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다든가 혹은 악하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선한 준칙 혹은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최초의 근거가 인간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IV. 선에의 소질과 악에의 성향


 

칸트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선에의 소질(Anlage)을 세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로, 생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성(Tierheit)의 소질. 둘째로, 생물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자인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성(Menschheit)의 소질. 셋째로, 이성적이며 동시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인격성(Persönlichkeit)의 소질이 그것이다. 동물성의 소질은 물리적이며 단순히 기계적인 자기애, 즉 '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애'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자기보존의 소질, 종족번식의 소질, 공동생활 즉 교제의 소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동물성의 소질들 중에서 자기애의 소질이 잘못 발전하면 폭식의 악덕을 낳고 자기보존의 소질이 잘못 발전하면 방탕의 악덕을 낳으며 교제의 소질이 잘못 발전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야만적인 무법성의 악덕을 낳는다. 인간성의 소질은 '비교하는 자기애'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자신의 행 불행을 판단하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성 속에 있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소질들을 단지 문화에의 동기로 사용하기를 원하지만, 이 역시 잘못 발전하면 시기와 배은망덕 그리고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일 등의 악덕이 된다. 마지막으로 인격성의 소질은 그 자체로 선택의지의 충분한 동기가 되는 도덕법칙을 존경하는 능력이다. 과연 인간 안에는 그러한 능력이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칸트는 다음처럼 답한다.

우리 안에 있는, 도덕법칙에 대한 단순한 존경의 능력은 도덕감정인데, 그것은 그 자체로서 자연적 소질의 목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의지의 동기인 한에서만 그런 목적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자유로운 선택의지가 그러한 도덕감정을 그의 준칙 안에 통합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의지의 성질은 선한 성격이다. 그리고 대체로 자유로운 선택의지의 모든 성격들이 그렇듯이, 그러한 선한 성격은 획득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소질 즉 그것에 어떠한 악도 전혀 접합할 수 없는 소질이 우리의 본성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칸트는 도덕법칙과 그것에 대한 순수한 존경의 감정이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법칙의 이념과 존경이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해 있음을 증명한 것만으로 존경의 능력이 인격성의 소질이라고 불리워지기에 합당치 않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항상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피와 살을 갖고 행위하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만 인격을 말할 수 있는데, 칸트는 선험적인 도덕주체에 있어서만 그 양자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해 있음을 증명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존경을 동기로서 우리의 준칙 안에 채용하는 주관적 근거는 인격성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덧붙인다. 칸트에 의하면 이 세번째 소질만이 그 자체로서 실천적 이성, 즉 무조건적으로 법칙을 부여하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인간이 선을 지향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인간 안에 있는 근원적 소질이 선하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인간은 아직 선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 선에의 소질은 소질인 한, 근절될 수도 부패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의 근원적 소질을 회복한다고 함은 상실된 선의 소질을 회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내용으로 하는 선의 동기는 상실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선에의 소질을 회복한다는 말은 단지 모든 준칙의 최고 근거인 도덕법칙의 순수성을 확립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칸트는 인간의 본성 안에는 선에의 소질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악에의 성향이 있음도 인정한다. 인간은 선에의 소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선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인간이 악에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은 단지 자유로운 선택의지의 규정으로서만 가능한데, 이 선택의지는 자신이 택하는 준칙을 통해서만 선 또는 악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는 말은 인간이 도덕법칙을 의식함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여러가지 성향이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알렌 우드는 다음처럼 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선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악에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연적 소질 덕택에 인간은 도덕적 이성의 자극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도덕적 이성의 자극보다도 그의 경향성을 더 선호하려는 경향성으로 인하여 제한한다는 말이다.

칸트는 인간성 속에 있는 악에의 성향을 인간 심정의 연약성, 인간 심정의 불순성, 심성의 사악성으로 나누어 고찰한 뒤에, "악에의 성향은 인간적 본성과 뒤썩여 짜여져 있음"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악에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근본적이며 생득적인 악으로 불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생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 초래된 악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득적인 악의 근거는 감성 및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연적 경향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성은 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감성은 천부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그것의 창시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감성에서 유래하는 경향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성과 경향성은 우리가 유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생득적인 악의 근거는 도덕적으로 입법하는 이성의 부패성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이성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법칙 자체의 권위를 파괴하고 이 법칙으로부터 생기는 구속력을 부인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존재에 합당한 도덕법칙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법칙이 전혀 없이 작용하는 원인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는 모순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칸트의 인간본성론은 맹자류의 주자학에서 말하는 사단칠정론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주자학에 의하면 칸트의 이성에 해당하며 본연지성으로 간주되고 있는 사단은 선이고 칸트의 감성에 해당하며 기질지성으로 불려지고 있는 칠정은 악이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감성과 이성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감성이나 이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서 발생한다. 칸트는 자신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근본악도 기실은 그 책임이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 칸트가 말하는 근본악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칸트는 인간의 행위 즉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은 도덕법칙과 그것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에서 행하겠다는 원칙에 의해 행해진 행위이거나 자기애라는 주관적 원리에 편승한 감성의 동기에 따라 행하겠다는 원칙에 행해진 행위이거나이다. 인간은 항상 이 두 원칙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존재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감성의 동기들을 그의 준칙 안에 채용하기도 하기도 하고 또 도덕법칙을 선택의지의 충분한 근거로서 자신의 준칙 안에 채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둘을 그의 준칙 안에 받아들이므로 또 이 양자 중의 어느 것이라도 그것만으로 의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충분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준칙의 차이가 단지 두가지 동기(준칙의 실질적 내용)의 차이와 마찬가지라면, 즉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법칙인가 감성인가라는 문제라면,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하며 동시에 악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서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순이다. 따라서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차이는 그들이 준칙 안에 채용하는 동기들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동기의 실질적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칙의 형식의 종속관계에 즉 그가 이 둘 중의 어느 것을 다른 것의 조건으로 삼는가에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관한 한,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이 전무한 상태에서 행해진 행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경향성의 영향력을 전혀 느낌이 없이 행해진 행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과 감성의 경향성이 뒤썩인 상태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행위의 선악이 행위를 규정하는 동기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래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법칙이라면 선한 행위이고 감성이라면 악한 행위하고 한다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면서 동시에 악할 수는 없다.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도덕법칙을 자신의 행위 준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도덕법칙 대신에 자기애를 자신의 행위준칙으로 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말한 이유에서 인간은 선하면서 동시에 악할 수가 없는 데, 이는 도덕법칙과 자기애가 동등하게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리하여 인간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러한 행위의 수행조건인 도덕법칙, 자기애 및 그의 경향성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최고의 조건으로 삼고 나머지를 그 최고의 조건 아래에 종속시켜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에게는 자기애에 따라 행동한다는 원칙을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원칙보다 하위에 두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상위에 둘려는 강력한 전도에의 성향을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성 안에 있는 근본악이다. 이러한 악에의 자연적인 성향은 결국은 자유로운 선택의지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 악은 모든 준칙들의 근거를 부패시키기 때문에 근본적인(radikal)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자연적 성향으로서의 인간의 힘으로는 근절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절은 선한 준칙들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준칙들의 최고의 주관적 근거가 부패한 것으로 가정된다면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에의 성향은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본성의 타락성은 '악의'라는 말을 - - - - 악을 악으로서 자기 준칙의 동기로 받아들이는 심정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악의'는 아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타락성은 심정의 전도라고 불려져야 한다. 그것은 그 결과에 따라 악한 심정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는 칸트의 말은 잘 이해가 된다. 칸트는 근본악에 대한 자신의 이런 관점에서 통상적으로 해석된 기독교의 원죄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원죄설을 새롭게 해석한다. {성서}의 [창세기] 타락설화는 신의 명령으로 주어진 "(도덕)법칙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를 능가하는 감성적 충동의 우월성을 행위의 준칙으로 채용하며, 마침내 죄를 범하는" 인간의 모습 즉 근본악에의 성향에 굴복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개체로서의 아담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가 매일 꼭같이 그렇게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라는 성경 말씀의 참된 뜻이다.

만약 칸트가 말하는 근본악이란 것이 도덕법칙과 자기애의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인간이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더 우선시키려는 강력한 자연적 보편적 성향이라고 한다면,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예찬된 선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애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도덕법칙을 자기애의 원칙보다 상위에 둘려는 의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동일한 하나의 인간 속에는 근본악에의 성향과 선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칸트는 성선 성악 논쟁에서 절충론적인 입장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

 

V. 칸트는 성선·성악 논쟁을 무효화 시켰는가?


 

성선설과 성악설 간의 논쟁은 인간은 본성상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를 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이 때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은 유(類)로서의 인간이지 개별적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문제를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관점에서 개별적 인간의 문제로 바꾸어 다루고 있다. 칸트의 입장을 보다 자세히 요약하면 다음처럼 될 것이다.

유로서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는 잘못 제출된 문제다. 유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유라는 것 뿐이다. 전통적인 성선 성악 논쟁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이란 것은 자유를 떠나서 논의될 수는 없다. 그 자유가 올바로 행사될 때 선이 되고, 잘못 행사될 때 악이 된다. 그런데 선과 악의 주체는 유로서의 인간일 수가 없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도덕법칙과 자기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자유로운 개별적 인간이다. 바로 그 때문에 항상 구체적인 개별적 인간만이 도덕적 공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로서의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물어서는 안되고, 그 본성이 자유인 개별적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관한 한, 우리는 어떤 일률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물음 자체가 유로서의 인간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자유인 개체로서의 인간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면 그는 선한 인간이 되고 잘못 사용하면 악한 인간이 된다.

성선 성악 논쟁에 자유를 개입시킴으로써, 그 논쟁 자체를 무효화시키려는 칸트의 이런 시도는 과연 성공하고 있는가? 인간은 자유로운 사실을 고려해 넣기 시작하면, 성선 성악 논쟁은 무의미해진다는 칸트의 생각은 많은 설득력을 갖고 있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자유'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칸트는 성선 성악 논쟁을 무효화 시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새로운 절충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칸트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선에의 근원적 소질"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악에의 성향"도 인정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것은 인간이 바로 선에의 소질과 악에의 성향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선택하는 선택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에의 소질과 악에의 성향은 인간의 자유를 구성하는 양 축이다. 어느 한 쪽이 없어도 인간은 자유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본성상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는 선한 측면도 있고 동시에 악한 측면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절충주의자의 입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칸트가 '소질'(Anlage)과 '성향'(Hange)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가 절충주의자가 아님을 밝힐 수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소질과 성향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어떤 존재자의 소질이란 말로써 우리는 그 존재자에게 필수적인 구성요소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구성 요소들의 결합방식 -- 이것에 의해 그 존재자가 존재하게 된다 -- 으로 이해한다. 소질들은, 그들이 어떤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그 소질들이 없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경우 그들은 우연적인 것이다.

나는 성향(propensio)이라는 말로, 인간성 일반에 대해 우연적인 한에서 경향성(습관적 욕망, concupiscentia)을 가능케 하는 주관적인 근거라고 이해한다. 성향은 실로 생래적일 수 있으나, 그런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그 성향이 선한 것이라면) 획득된 것으로, 또는 (그 성향이 악한 것이라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초래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질과 구별된다.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는 성향을 다음처럼 규정한다.

성향이란 그 욕망 대상의 표상에 선행하는, 어떤 욕망 성립의 주관적 가능성이다.

칸트는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성향들이 결국은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말하고 싶어한다. 모든 도덕적 악의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있음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던 칸트로서는, 모든 도덕적 악의 근원인 악에의 성향 즉 근본악조차도 그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근본악이 모든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천부적인 것, 생득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인간은 근본악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되며, 근본악에 대해 책임을 지우려면 그것은 모든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일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런 딜레마적 상황에서 칸트는 근본악이 인간의 인간의 생래적이고 근원적인 소질은 아님을 말하기 위해, '악에의 성향'으로 부르면서, "성향은 실로 생래적일 수 있으나, 그런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처럼 들린다. 이 말은 성향의 생래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말을, "생득적이라 하더라도 (그 성격이 악하다면) 그 책임이 자연에 있다거나 또는 (그 성격이 선하다면) 자연에게 그의 공로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 자신 그의 성격의 창시자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칸트의 말에 비추어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우선시키려는 생득적 생래적인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근본악은 생득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근본악은 생득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의 '생득적'이 사람들이 흔히 '생득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때의 '생득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성향은 실로 생래적일 수 있으나, 그런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칸트의 말이 이렇게 해석되는 것이 옳다면, 칸트가 선에의 소질과 근본악 혹은 악에의 자연적 성향이 인간의 본성과 함께 밀접하게 짜여져 있음을 인정한다는 그 사실에 근거하여, 칸트를 절충론자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하게 보일 수가 있다. 그리고 칸트가 절충론자인가 아닌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선에의 소질과 악에의 성향이 생득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의 오류론과 연결시켜 더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짐을 보게 된다.

 

VI.{순수이성비판}의 오류론의 입장에서 본, 성선 성악 논쟁에서의 칸트의 입장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두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결합해 있는 존재이며, 이 양자가 결합함으로써만 인식이 성립할 수 있다. 그는 이 사실을 {순수이성비판}의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서 설명하고 있다. 학자들은 칸트가 감성과 오성이 결합될 수 있음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에머리히 코레트나 리하르트 크로너는 칸트가 감각적 직관과 개념적 사유의 대립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칸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간을 가능적 무한자로 보는 칸트의 인간관의 입장에서 밝힌 바 있다. 성선 성악 논쟁에 있어서 칸트의 입장이 절충론이 아닌가 여부를 검토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칸트가 감성과 오성이 결합해 있는 존재에게만 인식이란 것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칸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감관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감관이 항상 올바로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감관은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이건 오류이건, 또 오류로 인도하는 것으로서의 가상이건, 그 어느 것이나 판단 중에서만 즉 대상과 우리 오성의 관계 중에서만 발견된다. 오성의 법칙에 완전히 일치하는 인식에는 오류가 없다. 감관의 표상 중에도 (감관의 표상은 판단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는 없다. 그러나 자연의 어떤 힘도 저절로 자기 본래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오성도 그 자체로는 (다른 원인의 영향이 없다면) 오류를 범하지 않겠고, 감성도 그 자체로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오성은 자기의 법칙에 따라서 활동하기만 하면 그 결과(즉 판단)는 그 법칙과 반드시 일치하기 때문에 오성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 의하면 인간이 오류를 범하건 진리를 쁹아내건 그것은 전적으로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과실이나 공로다. 칸트 이전에는 사람들은 주로 감성은 오류의 근원이고 이성은 진리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칸트는 앞서 살펴본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오류나 진리의 근원은 감성이나 이성 자체가 아니라,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오성적인 존재인 인간의 판단행위 자체다. 칸트는 성선 성악 논쟁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감각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감성뿐만이 아니라 자기애, 행복에의 갈망도 도덕적 악의 원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악은 자유로운 결단의 결과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는 이성을 선의 근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약 인간의 실천이성 즉 의지가 도덕법칙을 따르기만 하는 의지라면, 그런 존재에게는 선과 악의 구분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존재는 자기분열과 자기갈등을 의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식에 있어서 오성이 그 자신만으로써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칸트에 의하면 선이나 악의 근원은 이성이나 감성이 아니라,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행위 자체다. 인간은 한편으로 감성적이기에 자기애와 그에 따른 경향성의 유혹을 받지만, 다른 한편 이성적이기에, 이성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도덕법칙을 무시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자기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고,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도덕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그가 행하는 행위의 실질적 동기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모든 인간은 다소간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칸트는 필경 자신이 성선 성악 논쟁에서 절충론자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차이는 그들이 준칙 안에 채용하는 동기들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동기의 실질적 내용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칙의 형식의 종속관계에 그가 (자기애의 주관적 원리와 도덕법칙: 필자 집어넣음) 중의 어느 것을 다른 것의 조건으로 삼는가에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인간은 도덕법칙을 자기애 아래에 종속시키려는 생득적 성향 즉 근본악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애를 도덕법칙 아래에 종속시켜야만 한다는 선의지의 요구를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인간에게는 이 두가지 선택지 이외에 다른 제3의 선택지는 없다. 그러므로 선하면서 동시에 악한 인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칸트는 인간의 선악을 어떤 인간이 준칙 안에 채용하는 동기들의 차이에서 판별하는 대신에 자기애와 도덕법칙 중에서 어느 하나를 다른 것의 조건으로 종속시키는 준칙들 간의 형식적 종속관계에서 판별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절충론자라는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 있는가? 비록 칸트가 인간의 생득적 근본악과 선의지를 성선 성악 논쟁에서 흔히 말하는 '악'과 '선'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인간의 생득적 근본악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악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 그 선에 대해 인간은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의지와 근본악 그 자체는 궁극적으로 도덕법칙과 자기애라는 두가지 구성요소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인 한, 우리는 칸트에게 절충론자로서의 측면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도덕법칙과 자기애는 인간 삶의 두가지 구조적 조건으로서 이 조건 자체를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은 아니다. 물론 칸트의 말대로 어떤 사람은 도덕법칙을 자기애 아래에 종속시키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자기애를 도덕법칙 아래에 종속시키는 선택을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 앞서 말한, 삶의 두가지 구조적 조건을 선택한 것은 아니기에, 그것에 대해서 책임질 수는 없다.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삶의 두가지 구조적 조건 -- 이 조건에서 근본악이 생겨나고 선의지가 생겨난다 -- 을 선험적 생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는 유선유악론자로서의 변형된 절충주의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칸트적인 절충론이 어떤 점에서 '변형된' 것인가? 통상 전통적으로 인간은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칸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성은 악이고 이성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절충론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칸트는 감성 그 자체는 악이 아니고, 이성 그 자체는 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이중성에서부터 자기애를 도덕법칙에 종속시키려는 선의지와 도덕법칙을 자기애에 종속시키려는 근본악이 생겨나며, 그리고 이 양자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변형된' 절충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성 안에 있는 근본악에 대해서 그것이 인간의 책임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칸트가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타락을 신이 아담에게 준 자유의지의 오용에 기인하며, 따라서 타락의 책임은 유혹자인 뱀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담의 타락을 미리 알고 있었던 신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통상적인 기독교 교리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 잘못된 주장이다. 근본악 즉 '자기애를 도덕법칙보다 우선시키려는 자연적이고 생득적인 성향'은 자기애와 도덕법칙이라는, 인간 삶의 두가지 선험적 조건 따라서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우리는 근본악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에 부합한다. 더군더나 <모든 인간은 악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생득적으로 근본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말은, 칸트 식으로 풀이하면, 어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인간도 <자기애를 도덕법칙보다 상위에 두려는 타고난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 만을 말해줄 뿐이다. 물론 그 인간은 동시에 자기애를 도덕법칙 아래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선의지의 요구를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근본악은 아직 현실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애와 도덕법칙 중에서 어느것을 상위에 둘 것인가로 갈등 중에 있는 인간은 아직 현실적으로 악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인간은 선의지와 근본악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잠재적으로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변형된 절충론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잡재적으로 선하기도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한 어떤 인간이 현실적으로 어떤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할 때,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그는 선하면서 동시에 악할 수는 없다. 이로써 성선 성악 논쟁에서의 칸트의 입장을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로서의 인간의 잠재적 도덕성에 관한 한 칸트는 절충론자라면, 개별적 인격체의 현실적 도덕성에 관한 한 칸트는 엄격주의자다. 이 경우 칸트가 절충론자라는 말의 의미는 칸트가 인간에게는 선의 요소와 악의 요소가 뒤냣여 있음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칸트가 선험적으로 유로서의 인간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 가능성인데(그리고 칸트가 선험적 윤리학을 정초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유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 가능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유의, 이 자유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는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데 -- 선이면서 동시에 악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처럼 인간이 가진 가능적 자유가 선이 되거나 악이 되게 하는 구조적 조건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가능적 자유는 아직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란 점에서 '변형된 절충론자'인 것이다.

 

VII.성선 성악 논쟁과 칸트의 인간관

 

이제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왜 인간에게는 그가 도덕법칙을 의식하고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결의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종종 그 법칙으로부터의 이탈을 부추켜 다른 준칙을 받아들이게 하는 성향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시금 감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오류의 근원이 아니며 오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는 칸트의 주장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순전히 감성적이기만 한 존재 예컨대 하등동물에게는 인식이란 것이 없다. 그것들은 감각적 본능에 즉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게는 개념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단지 감각적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각작용에 대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말할 수가 없다. 예컨대 꿈 속에서 빨간 사과를 본 사람의 경우, 그가 꿈 속에서 빨간 사과를 보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꿈 속의 빨간 사과를 구성하고 있는 감각자료 역시 깨어 있을 때 그가 본 빨간 사과를 구성하는 감각자료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순전히 감성적이기만 한 존재에게는 인식이란 것이 없다. 따라서 이런 존재에게는 진리와 오류의 구분을 모른다. 이런 존재는 인식 이전의 존재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오성적인 존재에게도 인식이란 것이 없다. 순수하게 감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순수하게 오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그것이 자신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기만 하면 그 판단이 법칙에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존재는 인식 초월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존재는 진리와 오류의 구분을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오성적인 존재 즉 인간에게는 진리와 오류의 구분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감관으로써 지각한 것을 오성으로써 판단하는 존재다. 인간만이 인식적인 존재다. 그는 오류와 진리 사이에서 탐구하는 존재다.

칸트는 앞서 말한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도덕의 문제를 다룬다. 사람들은 감성을 그 자체로 악의 근원으로 이해하지만, 칸트는 이를 부정하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순전히 감성적인 존재에게는 악이란 것은 없다. 우리는 흔히 늑대는 악한 동물이고 양은 선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늑대나 양에 대해서 도덕적 범주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오로지 자기애의 본능에 따라 살 뿐, 그 어떤 도덕적 당위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애(특수자의 요구)와 도덕적 당위(보편자의 요구) 사이에서 전혀 갈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갈등을 유발시키는 한 축인 도덕적 당위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도덕 이전의 존재다. 그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모른다. 그러면 순전히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어떤가? 이런 존재는 그 자체가 보편자이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갈등의 한 축인 특수자의 요구 즉 자기애와 그에 수반되는 경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처럼 순전히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자의 의지를 신성한 의지니 혹은 도덕법칙을 따르는 의지니 하는 말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존재는 선악을 초월한 존재로, 선악의 구분을 알고는 있지만 그 구분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 순전히 감성적인 존재가 윤리 이전의 존재라면, 순전히 이성적인 존재는 윤리 초월적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 존재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인간은 자기애라는 특자수자로서의 요구와 도덕적 당위라는 보편자로서의 요구를 자기 속에서 동시에 느끼고 갈등한다. 그런대 칸트에 있어서 자기애의 요구는 감성에서 생겨난 것이고 도덕적 당위의 요구는 이성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인 이유는 인간이 감성과 이성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문에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구분이 존재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만이 인식적인 존재요 윤리적인 존재인 이유는, 인간만이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성적'과 '이성적'은 칸트적 인식론의 문맥에서는 인간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양극성이요, 칸트적인 윤리학의 문맥에서는 인간성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이중성이다. 그러면 감성이란 무엇인가? 감성은 근본적으로 직관능력이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작관을 감성적 직관으로 부른다. 감성적 직관은 그 본질상 유한한 것에 대한 직관이다. 바로 그 때문에 칸트는 [이율배반론]에서 인간적 직관은 무한한 것을 한꺼번에 직관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간이 무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위를 계기적으로 보태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칸트 인식론에 있어서는 사유가 직관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석하면서, 칸트 철학을 유한성의 철학으로 풀이한다. 칸트 철학을 유한성의 철학으로 풀이한 것은 잘못이지만, 하이데거가 직관의 본질을 유한성에서 찾은 것은 올바른 일이다. 감성이 유한성과 관계 맺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구체성, 제한성, 특수성과도 관계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이성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이성을 무제약자, 보편자와 관계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성은 완전성, 무한성, 통일성과도 관계 맺고 있다. 감성은 유한성과 이성은 무한성과 관계 맺고 있다면,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존재요 곧 가능적으로만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인간이 가능적 무한자라는 칸트의 인간관이 칸트의 인식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이미 졸저 {칸트철학의 인간학적 비밀}에서 충분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칸트의 그런 인간관이 칸트의 윤리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이 가능적 무한자라는 것은 인간이 어떤 고정된 즉자 존재 즉 사물 존재가 아님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인간이 헤겔식으로 표현해서 즉자적인 대자 존재 즉 사물적이면서 자기 의식적인 존재도 아님을 말해준다. 인간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존재요 활동하는 존재로, 그것은 어떤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싸르트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아닌 바의 어떤 것'이다. 인간이 '그것이 아닌 바의 어떤 것'인 한, 그것은 자기모순적인 존재다. 이는 인간이 끊임 없이 '그것임'을 부정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모순성은 인간이 특수성과 보편성의 요구를 자기 내부에서 동시에 느끼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이 인간의 역동성을 규정한다.

이제 이상의 것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본절의 첫 부분에서 던졌던 물음, 즉 <왜 인간에게는 그가 도덕법칙을 의식하고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결의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종종 그 법칙으로부터의 이탈을 부추켜 다른 준칙을 받아들이게 하는 성향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해보고자 한다. 인간에 있어서 감성과 결부된 특수성의 요구는 윤리적인 문맥에서 자기애와 그에 수반되는 경향성으로 표현되며, 이성과 결부된 보편성의 요구는 도덕적 당위로 표현된다. 인간은, 아무리 선한 인간이건 아무리 악한 인간이건, 이 두가지 요구를 자기 속에서 함께 느낀다. 이 경우 우리는 먼저 왜 인간이 자신의 자기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악이고 도덕적 당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선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다. 가능적 무한자로서 인간의 천부적 임무는 가능적 무한 그 자체의 본질에서 밝혀진다.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무한성, 완전성, 보편성의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무한성의 요구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무한성의 요구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무한히 노력하는 것 자체가 바로 가능적 무한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애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은 무한성, 완전성, 보편성의 요구를 유한성, 불완전성, 특수성의 요구에 종속시킴을 의미한다. 이는 가능적 무한자로서의 인간이 가능적 무한이기를 그치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인 한, 자신 속에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한성, 불완전성, 특수성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단지 천부적으로 무한성, 완전성 그리고 보편성을 향해 무한히 나아가게끔 되어 있으며, 그렇게 나아가는 역동성 자체를 통해서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있는 존재에 있어서만 그것은 죄가 된다.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무한성과 보편성은 그 자체로는 선이 아니다. 단지 그것들을 꿈꾸며 그것들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성 그 자체를 통해서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에 있어서만 그것들은 선이 된다. 그런 존재에 있어서는 유한성과 불완전성과 특수성에다 보편성과 완전성과 무한성을 종속시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부정하고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특수성의 요구와 보편성의 요구 사이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는 보편성의 요구를 특수성의 요구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왜 인간에게는 그가 도덕법칙을 의식하고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결의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종종 그 법칙으로부터의 이탈을 부추켜 다른 준칙을 받아들이게 하는 성향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인간이 감성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이라는 사실이 칸트적인 윤리학의 문맥에서는 인간성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이중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기에 보편적인 요구를 의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를 느끼지만, 다른 한편 감성적이기에 자기애의 유혹을 쉽사리 물리치지 못하는 존재다. 요컨대 인간은 가능적 무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사실상 근본악은 나의 이성의 심연에 가로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성이 가능적 무한자로 해석될 수 있는 한, 이 말은 핵심을 적중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칸트가 인간의 본질을 자유에서 찾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대 가능적 무한의 본질이 자유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한자란 곧 무제약자를 의미하는 데, 제약된 것들이란 결국 범주적 인과법칙적으로 규정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능적 무제약자라는 것은 인간은 인과법칙적으로 규정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자유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현실화시기기 위해 애쓰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으로 머물 수가 있다. 칸트에 있어서 인간은 인간 그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제인 셈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중에 매순간 되어가는 것,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과제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방황하는 존재다. 왜냐하면 괴테의 말대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VIII. 결 론

 

우리는 인간을 가능적 무한자로 보는 칸트의 인간관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선 성악 논쟁에 있어서 칸트의 입장이 '변형된 절충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인간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선의지'를 언급한 칸트가 인간의 '근본악'에 대해 침묵할 수가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혹자는 칸트가 {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인간의 본성 안에는 근본악이 있다고 말한 것은 {실천이성비판}이나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의 낙관적인 인간 이해를 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근본악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인간 이해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적 무한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자신의 인간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자기 철학의 중심적인 모티브로 삼고 있는 칸트 같은 철학자가 인간의 '선의지'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미셀 데스프랜드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적절하다 할 것이다.

나는 - - - - 그것(근본악 ; 필자 집어넣음)이 칸트 사상에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어떤 종교적 정통파를 용인하려는 정신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일원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신학적 사유로부터 칸트가 끊임없이 이탈되면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며, 사실의 세계와 도덕적 이상의 세계 간의 균열에 대한 통찰과 그 양세계의 궁극적 화해에 대한 신앙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보다 깊고 활기찬 종교적 감각이 완만하게 발전하면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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