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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서양철학

플라톤 사상의 근원

by 윈도아인~♡ 2012. 3. 17.

플라톤 사상의 근원

 

 

 

 

플라톤 [Platon, BC 428/427~BC 348/347]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나 중세, 또는 현대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다. 이들 중에 후세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플라톤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즉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요, 또 다른 한 가지는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이 적어도 13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다기보다는 플라톤파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사적인 면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른 어느 철학자보다도 더 많이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i) 유토피아에 대한 최초의 탐구, ii) 이데아론, 즉 오늘날까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보편개념의 문제, iii) 영혼 불멸론, iv) 우주론, v) 지각을 통하지 않는 상기사상에 입각한 지식론 등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어떠한 환경이 그의 정치 사상,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인 B.C. 428-427년에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귀족의 가문에 태어났으며, 그의 친척 중에는 30인 참주 정치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아테네가 패배하였을 때, 그는 아직 젊었으며, 그는 패배의 원인을 민주주의로 돌렸다. 그의 가족 제도나 사회적인 지위가 그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무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이상 국가의 모델을 스파르타에서 볼 수 있다고 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플라톤은 자신의 보수적인 입장을 감쪽같이 포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이상 국가가 암시하고 있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존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을 칭찬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일로 여겨 왔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은 언짢은 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비단 플라톤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이 겪는 공통된 운명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나의 목적은 그와 정반대로 그를 이해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체주의를 주장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을 대하듯이 별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으로 다루려고 한다.   플라톤에게 끼친 철학적인 영향으로 보아, 그가 스파르타를 좋아한 까닭이 있었다. 그에게 철학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대략 다음과 같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고 하겠다.


  플라톤은 그의 철학에 있어서 피타고라스로부터 오르피즘(Orphism)의 요소를 받았다(소크라테스를 통해서였든 아니든 간에). 그의 종교적인 영혼 불멸에 대한 내세적인 신앙과 종교적인 어조, 그리고 동굴의 비유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학의 존중, 지성과 신비주의와의 밀접한 혼합 등도 피타고라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로부터는 실재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으며, 시간적인 제한이 없다는 논리적인 귀결에서, 변화는 모두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주장을 취하게 되었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는 부정적인(negative) 입장, 즉 감관계에는 영속적인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견해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과 결합되어 지식이란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지성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결론은 피타고라스의 주장과도 일치된다.


  소크라테스로부터는 윤리 문제의 우월성과 세계관에 있어서 기계론적(mechanical)이라기 보다는. 목적론적(teleological)으로 다루는 경향을 본받게 된것이 아닌가 한다. 선이란 이념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어느 철학자들의 사상에 있어서보다도 그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사고 방식이 전제주의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기로'하자.
  첫째로 선과 실재와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상의 국가는 하늘의 모형을 가장 비슷하게 본딴 것이며, 변화는 전혀 없을 뿐더러 정적이며 가장 완전한 것이라야 한다. 그리하여 그 통치자도 영원한 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둘째로 플라톤도 다른 모든 신비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신앙에 확고한 한 가지 핵심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오직 체험에 의하지 않고는 본질상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입회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플라톤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이것은 동시에 지적이고 도덕적 훈련을 통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이런 훈련을 쌓지 않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면 반드시 나라가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세째로 플라톤의 원리에 입각한 훌륭한 통치자를 만들려면, 많은 교육을 필요로 한다. 얼핏 보기에 시라큐스의 폭군 디오니시우스 2세를 훌륭한 임금을 만들기 위해 기하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한 플라톤의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모든 지혜는 수학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니까. 이로 미루어 보아 그는 완전히 피타고라스 학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치적 견해는 과두정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네째로 플라톤은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처럼 여가는 지혜를 얻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은 지혜를 가질 수 없고 재산이 많거나 국가의 보호로 생활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만이 지혜를 습득할 수 있다는 귀족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사상을 오늘날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그 하나는 플라톤이 말하는 지혜가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지혜를 지닌 자에게 정치적인 권력을 맡길 만한 헌법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지혜]란 어떤 특수한 기술, 즉 제화공이나, 의사나, 군략가 등이 지니고 있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일반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니게 되면 보다 현명하게 다스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말하는 지혜란 선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지혜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와 아울러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고의로 죄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나 올바른 생황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견해는 실제에 있어서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여러 가지 이해 관계가 엇갈린 세상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가장 적절하게 타협해 나가는 것이 정치가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같은 계급이나 같은 민족은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갖게 되지만, 다른 계급이나 다른 민족은 서로 상반된 이해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물론 인류 전체의 공통된 이해 관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면에까지 나타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혹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절대권을 지니고 있는 여러 나라들이 존속하고 있는 이상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일반적인 이익을 도모하려면, 서로 상반되는 특수한 이해 관계에 따르는 부분적인 타협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지혜]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현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는 헌법이 있을 수 있을까? 의회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을 처리해 나가더라도 과오가 따르게 마련이며, 실제로 많은 과오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귀족들도 현명하다고만 할 수는 없으며, 왕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심지어 무류성을 주장하는 법왕까지도 끔찍한 조류를 범한 일이 허다하다. 정부를 대학 졸업자나 신학 박사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까? 혹은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그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법적으로 선출한 몇몇 시민이 실제로 전체 시민보다 더 현명한 것은 아니다.


  만일 적당한 훈련을 쌓는다면 정치적인 지혜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적당한 훈련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며, 여기서 또 다시 정당 문제가 야기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다는 문제는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남게 되며, 이것이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의 근거가 될 것이다.

 


플라톤의 유토피아

 

플라톤과 그의 제자


  플라톤의 가장 중요한 대화편 [국가론]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5권 끝까지)은, 이상 국가의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역사상에 인류가 그려 온) 많은 유토피아들 중에 가장 처음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여기서 도입한 결론의 하나가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권과 7권은 철학자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데 관련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곧 둘째 부분이다.


  세째 부분은 여러 종류의 법률에 대한 특징이나 결점 등을 논하고 있다. [국가론]의 명목상의 목표는 정의의 정의를 내세우는 데 있다. 그런데 그 정의에 대하여 미리 이렇게 매듭을 지어 놓는다. 즉 무슨 일에 있어서나 그 세부적인 것을 살펴보기보다 전체적인 것을 보는 편이 보다 용이하므로, 개인을 의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보다 의로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를 탐구하는 편이 좋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justice)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속성이 될 터이므로 우선 그런 국가에 대해 묘사하고 나서, 이 완전성 가운데서 어느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우선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대충 설명하고 나서, 거기서 발생하는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플라톤은 시민들을 세 계급으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평민 계급과 군인 계급과 통치자 계급이 그것이다. 이 통치자 계급만이 정치 권력(political power)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통치자 계급의 인원수는 다른 두 계급의 그것보다 훨씬 적어야 한다. 이 통치자 계급은 처음에 입법자가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세습적으로 상속되는 것이었다. 다만 유망한 소년을 선출하여 낮은 계급에서 높은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통치자 계급이 아래로 격하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통치자들이 어떻게 입법자의 뜻을 수행하게 하느냐이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교육적, 경제적, 생물학적 및 종교적인 여러 계획을 제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은 다른 계급들에게는 어느 정도로 적용시키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 계획 중의 일부는 군인계급에 적용시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플라톤은 주로 통치자 계급만을 문제삼고 있다. 이 계급은 전에 파라과이(Paraguay)의 제수이트파 (Jesuits)나 1870년까지의 교회국가의 승려 계급이나 오늘날 소련의 공산당과도 같은 특수 계급이다.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교육이다. 이 교육은 체육과 음악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이 양자는 우리가 오늘날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이 경우의 음악은 시적인 정서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체육은 우리가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한결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영국에서 흔히 말하는 교양은 신사(gentlemen)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 그런데 실은 영국에서의 신사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쓰게 된 것도 플라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플라톤 시대의 아테네는 어떤 면에서는 19세기 영국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자에 있어서 귀족 계급은 다 사회적인 특권을 즐기고 있었지만 정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상적인 행동을 통해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유토피아에서는 귀족층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엄숙, 예절, 용기 등이 교육에 의해 함양되는 주요덕목인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읽는 문학 작품이나 또는 음악 등을 엄격히 검열하여 허가된 것만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유모들까지도 그들의 어린이들에게 허락된 이야기 외에는 할 수 없다. 호머나 헤시오도스(Hesiodos)의 작품 등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의 작품에는 신들이 때때로 교육상 좋지 못한 행동을 한다. 어린이들은 신들에게는 결코 악이란 생기지 않는 것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신은 모든 것을 다 창조하지는 않고 다만 선한 것들만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호머나 헤시오도스의 작품에 보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교육에서는 청년들이 싸움터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게끔 길러야 한다. 우리의 소년들은 죽음보다 노예 상태가 더 나쁘다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따라서 그들은 울기도 하고 통곡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된다. 친구가 죽었기 때문에 우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세째로 크게 웃거나 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 그러나 호머의 작품에는 [축복받은 신들 사이에 언제나 크게 웃는 소리]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이 많다. 선생이 이런 글을 인용할 경우에 생도들에게 그런 환락이 나쁘다는 것을 타일러 줄 수 있겠는가?


  네째로 호머의 작품에는 푸짐한 연회를 찬양하는 글이 많으며, 또 어떤 대목에는 신들의 정욕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절제의 덕을 해치는 것이다. -참된 플라톤주의자인 잉에(Inge) 승정은, 자주 부르는 찬송가의 한 줄인 [승리한 자들의 고함소리, 축하하는 자들의 노랫소리]라는 부분을 좋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천국의 즐거움을 묘사한 장면의 한 줄인 것이다-그리고 악한 자가 행복하게 되고, 선량한 자가 불행하게 되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야기가 온유한 마음에 미치는 도덕적인 영향은 매우 불행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두 시인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플라톤은 연극에 대하여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선량한 사람은 불량한 사람을 모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극에는 악한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란 극히 드물며, 따라서 악한의 역을 맡은 연출가나 배우는 여러 가지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인들 뿐만 아니라 여자나 노예 등, 대체로 천한 사람들은 고귀한 사람들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이스에서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에서처럼 남자들이 여자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연극을 허용하여도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흠없는 남자 영웅 이외에 다른 등장인물이 섞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그의 [이상 국가]에서 모든 연극인들을 없애기로 하였다.
 
  이들 무언극들 연출하는 신사들이 매우 현명하여 무엇이든지 모방할 수 있을 경우에 우리 앞에서 그들 자신과 그 시를 공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아하고 고귀하며 놀라운 그들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나라에서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법률은 그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사 그들에게 향유를 붓고 명예의 관을 그들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을 경우라도, 우리는 그를 다른 토시로 보내야 할 것이다.


  다음에 음악에 대한 검열(오늘의 의미에서의)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리디아 사람들이나 이오니아 사람들의 음악은 일체 금지되어 있다. 리디아인의 음악은 비애를 나타내고, 이오니아인의 음악은 향락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도리아인의 음악(용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과 프리기아인의 음악(그 절제 때문에)만이 허용되었다. 또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음조는 단순해야 하며, 용기와 조화있는 삶을 나타내는 것이라야 한다.


  체육 훈련은 대단히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 생선과 쇠고기는 군 것 이외에는 먹지 말아야 하며, 조미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파자 종류도 허용되지 않는다. 플라톤은 그의 나라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의사가 필요없을 것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은 일정한 나이에 도달할 때까지 추하거나 악한 것을 못 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적당한 시기에는 그들을 [유혹]에 드러내 놓는다. 그들은 두려운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나쁜 쾌락에도 의지를 굽혀서는 안된다- 이런 시험들을 무난히 통과한 연후에 비로소 통치자가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


  소년들은 성장하기 전에 한 번은 전쟁 구경을 해야 한다. 물론 스스로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견학만은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은 통치 계급을 위해 철저한 공산주의를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는 분명치는 않지만 군인계급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통치자들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간소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들은 마치 군대의 진지에서 사는 것처럼 생활하여, 부대에서 공동으로 식사를 해야 하며 절대로 필요 이상의 사유재산을 가져서는 안된다.
 
  금이나 은은 사용할 수 없다. 부유하지 않다고 해서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 도시의 목적은 시민 전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어느 한 계급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부유하거나 빈곤한 것은 다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그 어느 것도 존재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대하여도 이상한 논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도시 국가는 승리를 하여 전리품을 얻으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으므로 동맹국을 얻기가 매우 쉬우리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겉으로는 부득이한 체하면서 공산주의를 가족에게까지 적용시킨다. 그는 말하기를 동포들은 아내나 아이들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하기가 매우 곤란하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난점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우선 처녀들이 소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되어 있다.

 

 즉 음악이나 체육, 전술 등 모든 것을 소년들과 함께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점에 있어서나 완전한 남녀동등이 이루어진다. 남자를 훌륭한 통치자가 되도록 하는 교육은, 또한 여자들도 훌륭한 통치자가 되게 할 것이다. 남녀가 다 근본적인 성질은 같기 때문이다. 남녀 간에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정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여자는 철학적인 소양이 많으며, 따라서 통치자가 될 만하다. 또 어떤 여자는 전쟁을 좋아하므로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입법자들은 통치자들을 선출하는 한편, 일정수의 남성들과 여성들을 같은 집에서 지내고 식사도 함께 하도록 결정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결혼도 매우 색다르게 하게 된다. 이 일정수의 부인들은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 일정수의 남자들의 공동의 아내들이다. 즉 아무도 자기 개인의 아내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어떤 연회를 베풀어 일정한 인원수를 유지하기에 알맞는 수의 신랑 신부들을 초대한다. 그들은 이것을 일종의 운명으로 믿도록 한다. 사실은 그 도시국가의 통치자들이 이 운명을 우생학적인 원리에 의해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훌륭한 종자들이 자식을 낳도록 조종할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에게서 데려가며, 어느 부모도 어느 아이가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도록 하고, 또 어느 아이도 누가 자기 부모인지 모르도록 할 것이다. 병신 자식이나 지능이 낮은 부모의 자식들은 [어떤 신비로운 비밀 장소에 데려갈 것이다]. 국가에서 허용되지 않는 결합에 의해 생긴 아이는 비합법적이라고 인정될 것이다. 어머니는 20세부터 40세 사이라야 하며, 아버지는 25세부터 55세 사이라야 된다. 이 연령 밖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성교는 할 수 있지만, 임신을 했을 경우에는 강제로 유산을 시키거나, 또는 출생과 동시에 죽여버릴 것이다.


국가에서 조종한 결혼을 한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의사 발표도 할 수 없으며, 그들은 오직 이것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견지에서 순종해야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옛 시인들이 즐겨 축복하던 그 일반적인 정서생활은 금지된다.


  아무도 누가 자기 부모인지 알지 못하므로 자기 아버지가 될 만한 나이에 해당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며, .또 이와 같이 하여, [어머니]가 되고 [형제]나 [자매]도 될 것이다(이런 일은 야만인들 사이에는 흔히 있으며, 선교사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와 [딸]이나 또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결혼해서는 안되지만, [형제]나 [자매] 사이의 결혼은 전적으로 폐할 수는 없다(플라톤이 좀더 깊이 고찰하였던들 실은 자기는 [형제-자매] 사이의 결혼 이외의 다른 결혼을 인정치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매우 드물게 일어날 것이라고 오해를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 [딸]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 플라톤의 적절한 조정을 받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젊은이는 결코 늙은이를 때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아버지를 때리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가 낳는 유리한 점은 개인 소유의 감정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이 제거되면, 공적인 정신(public spirit)이 지배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이 제거되는 것이며, 또한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에 순응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승려들이 독신생활을 하게 되는 동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헨리 씨 리(Henry. C.
Lea), [승려의 독신생활사](A History of Sacerdotal Celibacy) 참조] .
  이제 이 체계의 신학적인 면을 생각해 보기로 하차. 나는 지금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인정된 그리이스신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주의-정부가 시민들에게 믿도록 설득해야 하는-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는 속이는 일을 정부의 한 특권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에 의하면 정부가 이처럼 속이는 것은 마치 의사가 약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치자들이 조종하여 결혼을 시키지만 마치 운명에 의해 결합된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문제는 아니다.


  플라톤은 통치자 이외의 사람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통치자까지도 속기를 바라는 [일종의 충성스러운 거짓](one royal lie)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거짓에 대해서는 꽤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이 세가지 인간을 만들었다는 가르침이다. 즉 최상의 인간은 금으로 만들고, 다음 가는 인간은 은으로 만들었으며, 대중은 놋이나 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금으로 만든 사람을 통치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금으로 만든 사람은 통치자가 되기에 알맞고, 은으로 만든 사람은 군인이 적합하며, 그밖의 사람들은 수공업을 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와 같은 계급에 속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승진이 아니면 강등이 되어야 한다. 현세대에 이러한 신화를 믿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다음 세대에나 그 후손들은 전혀 의심치 않도록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이 신화에 대한 신앙은 두 세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정당하다. 일본 사람들은 천황이 [태양의 여신]의 후예이며,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일본이 제일 먼저 세워졌다는 가르침을 받아 왔다. 대학 교수라 하더라도 이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은-그것이 설사 학문의 영역에 국한되더라도-반국가적인 행위로서 단정되어 왔었다. 플라톤은 이런 종류의 신화에 대한 신앙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철학에 합당치 않으며, 또한 지성을 저해하는 종류의 교육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가론]의 표면상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정의는 4권에 가서 내려진다. 즉 정의란 누구나 각자 자기의 일을 하여 (남달리) 분주한 자가 없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 도시국가는 그 나라의 상인이나, 군인, 또는 통치자들이 각각 자기의 맡은 일을 하고,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일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의롭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오늘 우리가 자연스럽게 [정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지는 않다. 이렇게 번역된 그리이스어의 낱말은 그리이스 사상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말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말은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을 상기하는 것은 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모든 사물은 필연적으로 그로부터 나온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물은 그가 저지른 부정으로 하여, 적당한 시기에 질서를 따라, 서로 보상하고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이스인들은 철학이 있기 전에 이미 우주에 대하여 어떤 상념과 감회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의하면 모든 인간과 사물은 다 정해진 장소와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우스의 주재로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제우스도 다른 것을 다스리는 이런 법칙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운명이나 필연성의 관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대로 천체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는 이 한계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투쟁이 생긴다. 어떤 비인격적인 초 올림푸스의 법(super Olympian law)이 이 불손을 처벌하여, 침범자가 짓밟으려던 영원한 질서를 되찾는다.

 

 이러한 견해가 거의 부지불식간에 철학으로 스며들었다, 이러한 견해는 헤라클레이토스나 엠페도클레스의 우주론 같은 투쟁의 우주론(comologies of strife)에 있어서나, 파르메니데스의 학설과 같이 일원론적 학설에 있어서 꼭같이 (이러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이나 인간법(human law)에 대한 신앙의 근원이 되며, 확실히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의 개념이 비롯된 근원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정의]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보다 법률에서 쓰이는 의미가 플라톤의 개념에 더 가깝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정의를 평등과 관련시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정의]는 [법률]과 거의 같은 말로 쓰일 때에, 그러니까 [법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는, 주로 재산의 소유권과 관련되며, 이것은 평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는 [국가론]의 첫머리에서 [정의]를 정의하여 빚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정의]는 불충분하여 곧 버림을 받지만, 그 정의 속에 어떤 내용만은 끝내 남게 마련이다.


  플라톤의 정의에 몇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첫째로 그의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권력이나 재산의 불평등이 전혀 불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통치자들은 모든 권력을 독점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공동체에 가장 현명한 성원들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정의에 의거하면, 불의는 단지 통치 계급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다른 계급에도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 일어나게 될 뿐이다. 통치 계급에 속하는 자녀들이 그 출생이나 교육에 있어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자녀들보다 거의 반드시 현명할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플라톤이 시민들의 승진과 강등을 허용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일 정치에 대한 정확한 학문과 그 법칙을 준행할 수 있는 확실성을 가진 자가 있다면, 플라톤의 체계를 더욱 중요시해야 쌀 것이다. 축구에서 실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을 축구단에 넣는 것을 불의(unjust)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 그렇게 함으로써 팀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축구도 아테네인들의 정부처럼 민주주의적으로 배정하기로 한다면, 자기 학교를 위해 축구를 할 학생들도 제비(lot)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경우는 축구와는 좀 다르다. 누가 제일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그의 재능을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의 계급 및 당의 이익을 떠나, 또는 자기의 어떤 신조를 .떠나서 공정하게 일반 대중을 위해 유리하도록 사용할 것이라고 단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둘째로, 정의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definition)는 전통적인 노선이나, 또는 자기 자신의 노선을 따라 어떤 윤리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조직된 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의는 각자가 자기 일을 하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각자의 일이란 무엇일까? 어떤 나라, 예컨대 이집트나 잉카 왕국 같은 나라에서는 세대가 변해도 아무런 변동도 생기지 않는, 따라서 부친의 직업이 그대로 자기의 직업이 되는 나라에서는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법적인 부친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직업은'자기의 취미에 따라 결정되거나 또는 그의 적응성에 대한 국가의 판정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아마도 플라톤이 바란 것은 확실히 후자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은 고도의 기능을 필요로 하지만, 국가에서 해로운 것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시를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나폴레옹의 일 같은 것을 그렇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누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인은 정부의 목적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통치하는 자는 철학자인데, 그들은 혁명가일 필요가 없다. 철학자는 언제나 플라톤을 이해하고 그의 의견에 찬동하게끔 되어 있으니까.


  그럼 플라톤의 공화국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대답은 진부한 것이다. 그의 국가는 인구가 비슷한 다른 나라와 전쟁이라도 하면 승리를 거둘 것이며, 또 국내의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생활이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그 고정성으로 말미암아 예술이나 과학은 발달하지 못할 것이며, 이 점에서도 스파르타와 유사하다.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뛰어난 전쟁 기술이나 충분한 식량같은 것이 확보한 전부라고 하겠다. 플라톤은 아테네가 기근과 전쟁에 시달리던 시기에 살았으며,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악을 피하는 것을 정치에서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토피아]를 진지한 심정으로 창안해 내었다면, 거기에는 그 창조자의 이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그럼 잠시 이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상이란 무엇보다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입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안락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상과 욕망의 대상은 어떻게 다른가? 이상의 그것은 비개인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이상을 품은 자와는 전혀 특수한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상 이상은 누구에게나 욕구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즉 이상은 욕구되는 것이지만,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누구나 다 먹을 것을 넉넉히 갖게 되고, 누구나 다 친절히 대할 것을 욕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남들도 이것을 원하기를 욕구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나는 전혀 비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윤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실은 이 윤리는 나의 욕망이라는 개인적인 터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욕망은 나와 아무 관련이 없을 경우에도, 여전히 내 욕망으로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명 어떤 사람은 누구나 과학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누구나 예술을 이해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의 욕망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차이 때문이다.


  (이상 속에) 개인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토론에 있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가령 누가 나더러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너는 누구나 다 행복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너는 독일 사람들의 행복을 원해야 하고, 그밖의 사람들의 불행을 원해야 한다. ]여기서 [해야 한다]는 말은 나더러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독일인이 아니므로,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독일인 이외의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개인적인 이상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니체의 영웅은 기독교의 성자와는 다르다. 그러다 이 양자가 모두 비개인적으로 숭배를 받는다. 하나는 니체주의자들에게 숭배를 받고, 하나는 기독교인들에게 숭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양자의 차이를, 우리의 욕망을 떠나서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상을 결정할 방도가 없다면, 윤리적인 견해 차이는, 오직 감정적인 호소에 의하거나, 힘에 의해 판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전쟁에 호소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사실에 관한 문제는 과학이나 과학적인 관찰에 호소할 수 있지만, 윤리에 대한 근본 문제는 그런 방도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논의는 자연히 선전력(propaganda power)을 포함한 힘의 투쟁으로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예서는 조잡하게나마 이런 견해를 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통해서 표명하고 있다. 이 사람은, 플라톤의 대화편의 등장 인물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실재 인물이었다. 그는 칼케돈에서 태어난 소피스트로 유명한 웅변술의 스승이었다. 그는 B.C. 427년에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첫째 희극에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라는 노인과 플라톤의 형제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와 함께 정의에 대하여 재미있게 논의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는 점점 비위에 거슬려, 그런 유치하고 무의미한 논의에 대해 욕지거리를 퍼붓고,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위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기는 했지만, 애매하기 짝이 없으며, 단단하게 항의하지 못한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근본 문제가 제기된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말들은 사용하는 사람이 잔소리만 늘어놓을 뿐이 아닌가, 거기 어떤 표준이 있는가? 만일 표준이 없다면, 트라쉬마코스가 내리는 여러 가지 결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표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하여 종교는 단순한 대답을 내리는 것 같다. 즉 신이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를 결정짓는다. 다시 말하면, 신의 뜻에 어울리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완전히 정통적인 것이 못된다.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신은 선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의 뜻과는 독립된 어떤 선의 표준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쾌락은 선이다]와 같은 진술 속에, [눈은 회다]와 같은 진술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어떤 객관적인 진리나 허위가 있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는 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실제의 목적을 위해서 근본 문제에 대한 토론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나는 그 '객관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탐구자의 전부 또는 사실의 전부가 진리성에 대해 일치되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눈은 희다거나, 시저가 암살되었다거나, 물은 수소와 산소로 되어 있다는 것 등은 [진리]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사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에 있어서도, 그와 같이 견해의 일치를 볼 수 있는 진술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것은 개인 행위의 규칙을 위해서나, 정치학설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학적인 진리는 무엇이든 간에, 힘 있는 단체들 사이에 어떤 윤리적인 견해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힘이나 선전에 의하거나 또는 그 양자를 다 발휘하여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플라톤에게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셈이다. 그른 극적인 소양을 발휘하여,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입장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공평치 못한 논조로 이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플라톤은 선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또 그 성질도 분명히 밝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이에 대해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지적인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실(fact)에 대한 과학적인 문제에 견해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에 반드시 어떤 과오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 것이다.


  플라톤과 트라쉬마코스의 견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철학사를 진술하는 이 마당에서는, 이 중요성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며, 여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장소가 못된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가 좋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 중에서 윤리의 .객관성을 믿고 있는 사람은, 그 공화국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트라쉬마코스와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입증이나 반증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당신이, 플라톤이 원하는 국가를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가 문제이다. 만일 당신이 좋아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며,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또 만일 많은 사람들이 이 공화국을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더라도 그 판별은 이성이 내릴 수는 없으며, 실제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힘만이 판별할 성질의 문제이다.]


  이것은 오늘까지 문제되고 있는 철학의 한 과제이다. 양쪽에 다 존경할 만한 철학자들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플라톤의 견해에 아무 논박도 하지 않고 덮어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객관적인 기준으로 합의를 얻게 되는 견해일지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결과들을 동반할 수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갈릴레오(Galileo)와 같은 과학적인 혁신가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처음에는 아무도 별반 찬동하지 않는 그런 견해를 발표했으나, 드디어 거의 모든 사람의 찬동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논증을 수단으로 하여 찬동을 받은 것이며, 감정적인 호소나 국가적인 선전, 또는 힘에 의해 그런 찬동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대중의) 일반적인 견해 이상의 어떤 표준을 갖고 있음을 의미 한다.


  윤리적인 문제도, 위대한 종교적인 스승들에게서는, 어떤 유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자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윤리적인 혁신은 분명히 대중의 견해 이상의 어떤 표준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 표준도 과학적인 문제에 있어서처럼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단지 이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은 오늘의 유토피아와는 달리 실제로 세워져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건 결코 공상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로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 여러 가지 조항들 중에서 많은 것이 실제로 스파르타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철인 통치는 피타고라스가 기도했던 것이며 플라톤 시대에도 역시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하는 아키타스가 타라스에서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것은 플라톤이 시실리아 및 남부 이탈리아 지방을 방문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각 도시국가에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현인들을 초빙해 오는 일은 당시의 한 관례가 되어 있었다.


 솔론(Solon)은 아테네를 위해 이를 행하였으며, 프로타고라스는 투리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였다. 당시의 식민지들은 모국의 각 도시국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주의자들의 한 집단이 스페인이나 골(Gaul, 고대 프랑스)의 어느 해변에 플라톤이 제창하는 공화국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플라톤에게는 시라큐스에서 이 기회가 마련되었다. 시라큐스는 카르타고와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해 오던 큰 상업 도시였다. 어떤 철학자라도 이런 처지에서는 별로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와서 마케도니아가 일어나, 작은 도시국가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고, 소규모의 정치적인 실험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출처/naver blog ~ 天長地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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