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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에 있어 ‘자유’의 의미와 한계

by 윈도아인~♡ 2012. 3. 17.

로크에 있어 ‘자유’의 의미와 한계

강정인(서강대 정외과) ·문지영(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자유’가 한 사회 내에서 지향되고 보호되어야 할 핵심 가치로 확고히 인식되게 된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논자들에 따라 상이하고 더러 상충되기도 하듯이, 자유에 대한 인식 역시 단순하거나 명료하지 않다. 자유주의적 자유는 흔히 ‘소극적 자유’ 對 ‘적극적 자유’라는 유형 구분을 따라 설명되는가 하면 종종 ‘방임·방종’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자유라는 가치가 직면하는 가장 심각한 곤궁은 아무래도 ‘평등’과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일 것이다. 곧 자유가 평등과 대립·갈등적인 가치로 설정되어 자유에 대한 강조는 평등을 위협하며 심지어 훼손한다고 간주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는 계급적이며 불온한 가치로서 의심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중심 가치로 내세우며 등장한 자유주의가 그 발전 과정에서 줄기차게 받아온 비판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글은 존 로크John Locke의 사상에 나타나는 자유 개념의 내용과 그 함축을 살펴봄으로써 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로크는 자유주의를 “가장 최초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체계화한 사상가로 널리 인정된다(Gray 1986; Merquior 1991; 장동진 2001 등).

그 스스로 자유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전의 시대1)를 살았던 로크가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꼽힌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후대에 자유주의로 불리게 된 이념의 기본적인 문제 의식과 특성을 확연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의 ‘기원’으로서 로크의 사상은 당대의 절대주의 및 봉건적 사회 질서 속에서 자유가 중요한 의미를 획득해내며 새로이 핵심적 가치로 부각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로크의 자유 개념에 대한 이해는 자유주의적 자유를 이해하고 제대로 평가하는 데 있어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우선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이 배태된 역사적 배경과 그의 생애를 간략히 고찰하도록 하겠다. 이념 또는 사상이란 진공 상태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과 부단히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발전하고 쇠퇴한다. 로크의 자유주의 역시 그가 처한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며 전개되었다. 특히 로크에게 있어 자유의 문제는 당대 英國의 정치적 문제들에 깊이 연루된 삶을 살았던 그의 생애에 대한 고려 없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다음으로 로크의 자유 개념에 대한 고찰은 주로 《통치론》에 의거하여 진행될 것이다. 사실 경험주의 철학자로서 로크의 자유에 관한 이론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통치론》은 그의 철학적(혹은 추상적) 자유론이 정치적 실천의 영역에 적용된 형태로서, 곧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은 로크의 자유 개념을 자유주의 정치 철학의 발전과 관련하여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통치론》을 주 텍스트로 삼은 것이다.

논자들에 따라 《인간지성에 관한 서론》과 《통치론》에서 각각 제시되는 로크 사상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2) 하지만 권위있는 로크 연구자 다수는 로크의 형이상학과 윤리학, 정치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의미는 일관된 전체로서 그의 철학에 비추어서만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Polin 1969, 1). 특히 자유와 이성의 의미 및 관계에 관한 한 그의 모든 주요 저작들을 관통하는 일관적인 견해가 존재한다는 평가(Grant 1987, 192)가 설득력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통치론》의 자유 개념에 대한 독해는 《인간지성에 관한 서론》에 제시된 철학적 자유론을 그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 제4장에서는 앞장에서 추적, 재구성된 로크의 자유 개념이 자유주의 전통 속에서 갖는 의미와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로크의 인식은 이후 자유주의 발전 과정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로크의 자유 개념이 지니는 의미와 함께 그 문제점을 짚어보는 작업은 자유주의적 자유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적잖이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자유주의가 발전해온 세월만큼의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그의 사상 전반을 이루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자유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과 상이한 평가들이 내려져 왔다. 그 모든 측면을 전부 소화해내기는 어렵고, 다만 이 글에서는 로크 사상 내에서 여타 가치들, 예컨대 안전 및 소유와 관련하여 자유가 지니는 의미를 살펴본 후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2. 로크의 생애3)와 그의 사상의 시대적 배경

로크는 1632년 여름 영국 서머싯洲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으로 청교도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방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영국 내전 당시 의회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1646년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하기 전까지 로크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1652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입학했다.

그 곳에서 그는 희랍어와 히브리어, 아랍어 문헌을 포함하여 고전을 두루 섭렵했고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로버트 보일Robert Boyle과의 친교를 통해서 자신의 자연과학적 소질을 계발하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로크 역시 당대 자연과학의 새로운 경험적 방법의 성공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한동안 과학, 특히 의학이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로크는 1659년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일생 동안 보유할 수 있는 자격인 장학 연구생으로 선발되었고, 다음 해에는 그리스어 강사가 되었으며, 그 뒤 수사학 강사와 도덕 철학의 학생감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정치적 권위와 관용, 윤리학과 지식 이론에 관한 로크의 철학적 입장은 대부분 이 옥스퍼드 시절에 그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옥스퍼드에서가 아니라 당시 영국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 결정적인 국면을 맞았다.

직접적인 계기는 나중에 섀프츠베리 백작 1세가 되는 애슐리Lord Ashley 卿과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1666년 처음 그를 만난 로크는 그후 간종양 제거 수술을 통해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이 일을 계기로 애슐리 家의 고문 의사직을 제의받았다. 그리고 그 제의를 수락하여 1667년 런던에 있는 애슐리 저택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이후 그의 운명은 그의 후견인의 운명과 함께, 또 1683년 섀프츠베리가 죽은 후에는 그가 이끌던 정치적 집단(곧 휘그派)의 운명과 함께 부침浮沈을 거듭하게 되었다.

섀프츠베리는 1667년과 1683년 사이의 영국 정치 무대에서 두 극단적인 위치를 오갔다. 즉 한때 그는 찰스 2세의 궁정에서 가장 힘있는 정치적 인물이기도 했고,4) 그 궁정에 대한 정치적 반대파의 지도자로서 급기야 그 궁정을 전복시키려는 혁명 계획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로크의 정치적 상상력을 깊이 사로잡았으며 지적 활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영국에서 정치적 갈등의 핵심은 절대주의 왕권 및 종교적 관용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非국교도가 주축이 된 정치적 반대자들은 ‘王權神授說’에 기반한 절대권력을 거부하며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의 분리를 추구했다.

영향력 있는 정치 인사로서 섀프츠베리는 복고적인 영국 국교회주의에 맞서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1667년에 로크는 《관용에 관한 시론》을 저술하는데, 그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섀프츠베리와 교분을 맺고 있었던 데서 직접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비국교도 집단의 종교적 자유 문제에 관해 옥스퍼드 시절 지녔던 다소 보수적인 관점5)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관용을 옹호하며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가 이 《시론》에서 도달했던 실천적인 판단은 섀프츠베리의 견해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고 간주된다. 로크는 이 글의 서두에 정치 권력의 유일한 목적이 사회 구성원들의 선, 안전 및 평화를 실현하고 보장하는 것이며, 정부 활동은 오직 그러한 목적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정치 이론의 핵심을 간결하게 압축해놓고 있다. 여기서 이미 절대군주제의 관념은, 그것이 왕권신수설에 근거하든 아니면 인민의 양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되든, 거부된다. 《시론》에 제시된 이 같은 입장은 후일 《관용에 관한 서한》에서 훨씬 정교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섀프츠베리가 관련된 한 차례 극적인 정치적 위기가 1679년 ‘배척법안’─곧 찰스 2세의 동생이자 가톨릭 교도인 요크 公 제임스James Duke of York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려던 법안─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찰스 2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섀프츠베리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다. ‘배척위기’의 기간이던 그 다음 4년 동안 그는 찰스 왕정에 대항하는 전국적인 정치운동을 조직·지도하였는데, 그것은 국왕의 권한에 대한 헌법적 제한을 강화하고 선출된 하원의 권리를 보호하며 요크 공 제임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로크의 《통치론》은 왕을 포함한 토리파와 휘그파가 팽팽하게 대립하던 이 ‘배척위기’의 와중에서 섀프츠베리가 주도한 휘그파의 입장을 정치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구상되어 그 초고에 대한 집필이 늦어도 1683년경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크의 《통치론》은 시기를 달리하여 쓰인 두 개의 긴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론〉은 로버트 필머卿Sir Robert Filmer에 의해 개진된 바 있는 왕권신수설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고,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제2론〉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간의 사회계약과 동의에 의한 정부, 저항권 등으로 대변되는 그의 정치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로크의 후견인이자 특별한 동반자로서 섀프츠베리의 정치적 운명은 실패로 끝났다. 섀프츠베리는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에 반대하며 몬머스 公을 지지했고, 그 일로 인해 네덜란드로 피신했다가 1683년 1월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섀프츠베리와의 정치적 공감 및 교분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 자신의 안전 역시 위협당하고 있다고 믿은 로크는 1683년 9월 섀프츠베리가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실제로 1685년 찰스 2세가 죽고 몬머스 공의 반란이 진압된 후 로크의 이름은 새 정부에 의해 반란 음모와 관련된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그리하여 로크는 한동안 익명으로 살았으며, 나중에 사면령이 내려진 후에도 계속 네덜란드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명예혁명이 성공한 다음 해인 1689년 2월 메리Mary 공주를 호송하는 배에 동승하여 귀국했다. 네덜란드에 머물렀던 이 기간 동안 로크는 섀프츠베리에 대한 봉사로 인해 그가 연루되었던 모든 정치적·공적 책임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철학적 연구에 투신할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여러 해 동안 몰두해왔던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의 집필을 완성하고 《관용에 관한 서한》을 쓴 것은 바로 이 몇 년 동안이었다.

영국으로 귀국한 후 로크는 서양 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을 비롯한 일련의 저작들의 출판과 더불어 그리고 명예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친한 친구들이 정계의 고위직에 취임하게 됨에 따라 ‘영광된 만년’을 맞이하였다. 이제 그는 정계와 학계에서 두루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1704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그에게 남아있던 15년 동안 그가 관여한 일은 여전히 다양했다. 그리고 그 중 몇 가지는 혁명의 정착과 영국의 번영을 위한 업무들로서,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었다.

또한 로크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의 개정판을 출간했으며, 《관용에 관한 서한》을 옹호하기 위해 그 비판자인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의 조너스 프로스터Jonas Prost와 장기간에 걸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또 교육과 경제문제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말년에 로크의 주된 관심사는 신학으로서 1695년에 그는 《기독교의 합리성》이라는 제목의 책을 익명으로 출판했다. 로크의 최후 저작은 그의 사후 출판된 것으로, 使徒 바울의 서한들을 주해한 글이다.

로크는 1704년 10월 에식스주의 오츠에 있는 그의 친구 매섬Masham 부인의 시골 저택에서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마침내 그는 익명으로 출판된 그의 모든 저작들에 대해 자신이 저자임을 전적으로 인정하였다.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이 전개된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로크 자신의 정치적 동기에 대한 이상에서의 고찰을 바탕으로 이제 그의 자유 개념을 추적, 재구성해 보도록 하자.


3. 로크의 자유 구분: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벌린Isaiah Berlin이 소극적(혹은 부정적) 자유와 적극적(혹은 긍정적) 자유로 자유의 개념을 구분하면서 자유주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로 규정·옹호(Berlin 1969)한 이래 그러한 유형 구분은 자유를 설명하는 데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7) 벌린이 그러했듯이 자유를 가로막는 것의 실체는 오직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뿐으로 한정하고, 자유의 구속 원인을 행위자 내부에서 찾는 것은 자유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오도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소극적 자유 예찬론자들이 한편에 있는가 하면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을 소극적 자유로, 밀 이후 근대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을 적극적 자유로 규정하며 자유주의 내에서의 근본적인 발상 전환을 소극적 對 적극적 자유의 유형 구분을 통해 설명하는 견해도 존재해 왔다.

보다 급진적인 경우는 소극적 자유가 보다 완전하고 구체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보다 적극적인 자유관에 의해 보완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요컨대 자유를 불간섭으로 해석하는 전통적 견해는 행위자가 선택을 행사함에 있어 외부로부터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주목할 뿐 그러한 선택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나 수단에 대한 고려는 배제함으로써 자유의 본질적인 측면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에서 적극적 자유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분을 적용할 경우, 자유주의의 기원으로서 고전적 자유주의자의 범주에 속하는 로크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로써 설명될 법하다. 그러나 설혹 로크 자신이 자유를 외부적 간섭이나 구속의 부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그저 단순히 소극적 자유로 규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의미의 개념 사용이 소극적 자유 對 적극적 자유의 구분을 전제로 한 선택적 결정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틀이나 유형 구분을 소급해서 적용하는 일은 자칫 저자의 원래 의도나 논의의 전체 맥락을 무리하게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할 자유’와 대비하여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자유 개념으로 로크에 있어 ‘자유’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종종 그것을 과도하게 단순화할 뿐 아니라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편협한 해석을 결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통치론》의 전체 문맥에서 로크가 사용하고 있는 자유 개념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에 대한 로크의 생각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언급이다.

인간의 자연적 자유란 지상의 우월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서 타인의 의지나 입법권에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연법만을 자신의 준칙으로 삼는 것이다. 사회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유란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서 제정된 입법권 이외에는 어떤 입법권하에도 있지 않으며 그 입법부가 위임받은 신탁에 따라 제정한 법 이외에는 어떠한 의지의 지배나 어떠한 법의 제약하에도 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로버트 필머卿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며 어떠한 법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가 아니다.

정부하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유란 일정한 법률, 곧 그 사회에서 설립된 입법권이 제정하고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법률을 가지는 것이다. 그 규칙이 규정하지 않는 모든 사안에서는 나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자유, 즉 다른 인간의 변덕스럽고, 불확실하고, 알려지지 않은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이다. 자연의 자유가 자연법 이외에는 어떠한 구속하에도 있지 않듯이 말이다(22).8)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로크가 자유를 ‘자연적 자유’와 ‘사회안에서(혹은 정부하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유’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어느 경우에도 자유가 법(률)과 연관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첫 번째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자유가 자연법의 구속하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며, 이런 의미에서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이지 ‘방종의 상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6). 그리고 이처럼 자연법을 그 한계로서 갖는 자연적 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人身, person을 처분할 수 있음’으로 이야기된다(4, 6, 123).

이에 비해 사회적 자유는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제정된 입법권과 그 입법부가 위임받은 신탁에 따라 제정한 법’의 제약하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일정한 법률을 가지는 것”이 된다. 이로부터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간의 대비는 자연법과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설립된 입법권이 제정하고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법률”간의 대비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크는 인간이 자연상태를 떠나 사회상태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자연적 자유와의 “결별”이라거나(123)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시민사회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일(95)로 표현한다. 이것은 그가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를 상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 차이란 자연법과 시민사회의 “일정한 법률”이 갖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자연법이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신의 뜻으로서 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한 ‘이성’을 통해 감지된다(6, 25). 그러므로 인간이 자연법에 따른다는 것은 그 자신의 이성적 판단 또는 마음의 소리에 따른다는 의미가 된다. 즉 자연법이란 일정한 시·공간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구체적인 법률이라기보다 보편적·초월적인 법으로서 특정 개인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는다. 바로 이 점이 사회상태의 “일정한 법률”과 갖는 차이이며, 또한 그것은 자연상태를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계약을 진행시키도록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일정한 법률, 곧 그 사회에서 설립된 입법권이 제정하고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법률을 가지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자유가 동시에 “시민사회의 구속”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人身, person을 처분할 수 있”는 자연적 자유의 내용 자체가 사회상태에 들어와 포기 혹은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라는 자유의 행사 방식이 사회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공통된 법률”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 곧 로크에게 있어 자유는, 자연적 자유든 사회적 자유든간에, 법(률)과 연관되며 법(률)에 기반한 것으로 혹은 법(률)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은 쉽사리 이해될 수 있다. 곧 자유는 이성에의 복종과 동일시되며, 이성은 법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성의 법은 자연법이며, 자유로운 인간은 상위법으로서의 자연법과 그 대리물인 실정법 둘 다에 의해 지배된다. 로크는 자유와 이성, 이성과 법간의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합법적인 정부에 대한 복종과 개인의 자유를 연결시키고 나아가 자의적인 절대 권력의 지배와 대비하여 (합법적인 정부로서의) 자유주의적 정부를 정당화했다. 로크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정부는 일반법의 형태로 이성이 지배하는 정부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자유를 굳이 “법률을 가지는 것”으로서 설명했던 로크의 의도는 자유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사실상 관심의 초점이 ‘자유’보다 자유에 대한 ‘구속’이 무엇으로 인한 어떤 성격의 것인가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준다. 비유컨대, 만일 로크에게 있어 자유를 ‘외부적 간섭의 부재’로 규정한다면 이때 그가 중요시한 것은 외적 간섭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그 간섭의 기원과 성격인 셈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주장한 바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23)를 이해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소극적 자유 개념으로서 로크의 자유를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으)로부터의 자유’로 표현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지 모른다. 그러나 로크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과 그의 정치적 입장을 감안할 때 여기서 오히려 부각되어야 할 것은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체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한 구속을 인정했으며, 그 내용과 한계를 구명하고자 했던 것이다.9)

로크가 자유를 법과 연관지어 제시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그에게 있어 자유란 단순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자유는 대개 권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 사실 로크 자신도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자유를 권리로 규정한 바 있다(123). 또한 시민사회의 법률이 타인의 침해로부터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거기서 자유란 권리로서 보호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왜 로크가 자연적 자유를 가정함에 있어서조차 자연법이라는 한계를 적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작품”(6)이라는 그의 종교적 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유일하며 최고인 주인[곧 하느님]의 하인으로서 그의 명령에 의해 그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졌”다고 믿는(6) 로크로서는 인간이 그러한 삶의 목적에 따라 살며 또 살아야 한다고 보았던 게 당연하다. 로크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에 부합해서 살 수 있도록 신으로부터 이성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자연법을 따르도록 하고 사회계약을 명하는 이 이성은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가 된다.10) 로크가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119)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본성으로서의 자유는 권리보다 의무쪽에 가깝다. 즉 본성으로서 인간의 자유는 로크에게 있어 ‘영원한 구원’이라는 인간의 지상 목표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정념들passions이 그러한 목표에 거스르는 것을 열망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의 의지를 결정하여 보다 나은 혹은 보다 합당한 것을 선택하고 실제로 자유로운 행동의 성취를 유발하는 인간의 판단력judgement을 의미하게 된다.11)

여기서 자유로울 의무란 이성적일 의무,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의무일 것이다. 로크가 자유 개념을 다름 아닌 법(률)과 연관지어 제시한 것은 ‘정당한 구속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자유의 의무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유효한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각주내용>

1)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예는 1810년 절대주의에 맞서 저항했던 스페인 의회파가 그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던 것이라고 한다(Merquior 1991, 2). 영국 정치의 맥락에서 그 용어는 1860년대에 휘그당 내 보다 급진적 멤버들이 자신들의 당을 자유당(the Liberal Party)이라고 부르면서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Ryan 1999, 298).

2) 예컨대 Arblaster(1984) 등이 그러하다.

3) 이 부분은 주로 강정인(1996)을 요약했으며, 부분적으로 존 던(John Dunn, 1995)과 코플스톤(F. Copleston 1991)을 참조했다.

4) 애슐리 卿은 1672년 섀프츠베리 백작의 작위를 받고 찰스 2세 정부의 대법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로크를 성직록(聖職祿) 담당 서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로크는 섀프츠베리가 의장으로 있던 무역 및 플랜테이션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이 자격으로 로크는 “캐롤라이나 정부를 위한 기본적 헌법”을 기초하는 데도 관여하게 되었다.

5) 당시 그는 비국교도 집단들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종파주의자의 견해에 맞서, ‘무관한 사항(곧 신이 특별히 명하거나 금한 것이 아닌 사항)’에 관한 한 전적으로 시민행정관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6) 로크의 《통치론》은 1688년의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다음 세기에 영국 정치를 지배하게 된 휘그당의 원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통치론》이 명예혁명 직후에 출간되었고, 로크 자신 역시 그 책의 “서문”에서 그 저작이 명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로크 연구가들은 명예혁명과 《통치론》간의 이러한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특히 1950년대 피터 래슬릿(Peter Laslett)의 연구이래 로크 사상에 대한 최근의 주요한 연구들은 명예혁명이 《통치론》의 중요한 ‘출판동기’ 중의 하나는 될지언정, 로크가 원래 《통치론》을 집필하게 된 주된 ‘저작동기’는 아니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현대 로크 연구의 권위자인 래슬릿은 《통치론》이 ‘배척위기’의 와중에서 사실상 혁명에 대한 요구와 선동으로서 집필된 것이지, 이미 일어난 혁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집필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통치론》은 그 집필 동기에 있어서 ‘배척위기’와 관련된 저작이지 명예혁명과 관련된 저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강정인(1996) 240~243을 참조.

7) 벌린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소극적 자유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각자가 자기 뜻대로 행위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에 비해 적극적 자유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상태나 능력”을 뜻한다. 그는 적극적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공동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이 전체주의자 등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그 개념을 거부했다(Berlin 1969, 특히 122, 131~144).

8) 이 글에서는 강정인·문지영이 옮긴 《통치론》([제2론]의 번역)을 원전 텍스트로 하였다. 편의상 괄호 안에는 절의 번호만 기입하였음을 밝힌다.

9) 이것은 ‘사회계약’에 대한 가정이 로크의 정치사상 내에서 갖는 의미와도 부합한다. 로크에게 있어 사회계약론의 핵심은 공동체의 정당한 기초를 제시하는 데 있었다. 즉 사회계약론을 통해 로크가 의도했던 바는 일체의 공동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공동체적 삶을 거부하는 것이었다기보다 공동체의 ‘정당한’ 기초와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새로이 구성·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해석한 연구로는 Rosenblum(1987), Holmes(1993), Tully(1993) 등을 참조할 것.

10)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구절들을 참조하라: “우리는 이성적 존재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자유롭게 태어났다. […] 나이가 들어 이성을 가지게 되면 자유도 더불어 따라온다.”(61);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 이성을 가지는 데에 근거한다.”(63)

11)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유를 ‘마음의 능력’ 또는 ‘생각하는 힘’으로 설명하는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에서 특히 현저히 드러난다. 여기서 자유는 좋음(the good)에 대한 능력 혹은 좋음으로의 경향을 의미하는데, 로크가 이런 식으로 자유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은 영원한 구원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을 인간의 의무가 신에 의해 그의 본성에 새겨져 있다는 종교적 신념이 그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관해서는 《인간지성에 관한 시론》, 특히 제2권(Book II)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