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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학(氣哲學) 과 양명학(陽明學)

by 윈도아인~♡ 2012. 3. 17.

기철학(氣哲學) 과 양명학(陽明學)

 

 

1. 기철학(氣哲學)  

 

 

김용옥(金容沃)이 스스로 자기 철학에 붙인 이름이다.

 

김용옥의 기철학에는 크게 두 개의 줄기가 있다. 하나는 해석학(hermeneutics)이며 다른 하나는 탈이성주의(脫理性主義)이다. 그는 만고불변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이(理)를 부정하며,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로서의 이성(reason)의 지위를 의심한다.

 

그는 우주가 그저 기(氣)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라 주장한 왕부지(王夫之)의 입장을 수용한다. 이러한 기(氣)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동안 선험적ㆍ교조적 신념 차원에서 기(氣)에 덧씌워진 온갖 오해들을 걷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그가 도입한 방법이 해석학이며 이 점은 불트만(R. Bultmann)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유교와 도교 경전에는 기(氣)를 신비주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다. 김용옥은 우선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작업은 불트만이 제시한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 해석학을 통해 수행된다. 불트만은 성서에 담긴 참된 내용이 신화적 장막 안에 가려져 있다고 본다.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진짜 기독교적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선 먼저 이런 신화적 장막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탈신화화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행적을 신화로 치부하여 완전히 제거하고 그 안에서 이론적ㆍ윤리적 의미만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에는 강력히 반대한다. 신화의 장막은 걷어내어져야 하지만 신화라는 무대 자체까지 몽땅 내동댕이쳐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신화의 장막을 걷어내면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아름다운 무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성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기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우리는 돌부리를 때리면서 “때찌때찌” 거린다. 합리적 훈계보다는 아기와의 공감이 우선이다. “네가 부주의해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니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훈계는 어린이 단계를 벗어나 이성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아이들에게나 유효하다. 성서는 마치 어린 아기처럼 인간의 이성이 미처 성숙하지 않은 신화적 단계에 있는 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비합리적이고 신화적인 측면은 반드시 걷어내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기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합리적 훈계만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돌부리가 아기를 넘어뜨렸다.”고 하는 신화적 내용은 걷어버리되 “때찌때찌”라는 사건을 통해 어린 아기와 어른이 나눈 정서적 공감이라는 체험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라는 신화 자체를 버리게 되면 예수의 종교적 메시지 자체를 버리게 된다. “때찌때찌”라는 신화 자체를 버리면 어린 아기와의 공감이라는 소중한 체험까지 버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김용옥이 현재 진행 중인 유교ㆍ불교ㆍ도교ㆍ기독교 경전들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주석 작업은 이러한 해석학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주장들은 기(氣)에 관한 주장으로 수렴된다. 그는 경전을 통해 기(氣)에 덧씌워진 온갖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걷어내면서도 기(氣)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의미까지 신화와 함께 버림으로써 과학에 투항해서는 곤란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의 본질이 하나로 회통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온갖 신비주의를 거부하면서도 과학과 이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기(氣)를 해명하기 위해 일단 이성(reason)을 통한 엄밀한 과학적 검증절차와 과학적 성과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과학에게 모든 것을 기댈 수는 없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 문명이 빚어낸 온갖 부정적 측면들과 탈근대적인 시대의 흐름이 이런 입장을 갖게 된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氣)는 과학의 대상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기(氣)에는 이성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또 다른 질서가 있다. 바로 그 또 다른 질서를 발견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한의학(韓醫學)이다.

 

그는 사춘기 시절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관절염을 침술로 치료한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이를 통해 기(氣)의 진면목을 발견하여 기철학을 정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한의학을 통한 구체적 임상연구를 통해 사변적 철학이 발견해내지 못한 이론적 틀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아직 아무런 긍정적 결과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용옥 스스로도 이런 기대가 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라 고백하고 있다. 한의학이론의 핵심인 침술은 인체에 경락(經絡)이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아직 경락은 그 실체가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경락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용옥이 기대하는 기철학적 방법에 의해서도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경락의 실체를 과학적 방법에 의존해 밝힌다면 그것은 이미 기철학이 아니며 과학이다. 기철학적 방법으로 입증하려 하지만 아직 그 실마리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개별적인 병증들에 대한 경험적 검증을 통해 구축된 상한론(傷寒論) 또한 마찬가지다. 침술보다는 과학적 근거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과학적 검증절차를 거친 처방은 그 가운데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한론 자체의 논리로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잡다한 의학적 가설들이 망라되어 있을 뿐이다. 침술과 상한론 양 측면에서 한의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음양오행에 입각해 있는 한의학의 신비주의적 요소들을 탈신화화적 입장에 따라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한의학의 본질 자체가 신비주의일 가능성, 즉 탈신화화로 걷어내야 할 장막일 가능성에는 눈을 감는다. 이것이 바로 기철학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의 철학적 작업은 해석학적 측면의 성과만으로도 위대하다. 실상 20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철학자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은 김용옥이 유일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세상의 온갖 편견에 도전하고 치열하게 현실에 개입하며 좌충우돌 문제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기철학이다. 기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2. 양명학(陽明學)  

 

 

결혼을 앞둔 친구가 있다고 치자. 과연 얼마를 부조해야 할까? 대부분 친구와의 친밀도, 자신의 형편,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타인의 시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금액을 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금액은 친구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친구의 결혼식에 내야 할 부조금의 액수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정해져 있는 액수와 다른 금액을 부조할 경우 심각한 결례를 범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저지른 것으로까지 간주된다면 어떨까? 놀랍게도 성리학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조 중반기 이후를 내내 시끄럽게 만들었던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바로 그런 입장 때문에 시작되었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 예(禮)는 고정불변의 진리 그 자체이다. 우주의 자연적 법칙이 고정불변인 것처럼 인간의 도덕적 법칙도 정해져 있다고 보았다. 예(禮)란 그런 도덕적 법칙이 구체화된 항목들의 총체를 말한다.

 

임금이 죽었을 때 그 유가족들이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어야 한다는 조항은 단순히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된 관습이 아니라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런 법칙을 어기는 것은 단순히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진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예학(禮學)은 사회철학이 아니라 존재론이었다.

 

이런 숨 막히는 예(禮)의 규범화에 맞서 왕수인(王守仁)은 진정한 마음의 표현이 곧 참된 예(禮)라고 주장한다. 외부의 어떤 간섭이나 명령도 개입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집어 드는 것이 진정한 예(禮)이다. 본래의 순수한 마음이 시키는 것이 곧 진리이다. 마음이 곧 원리라는 원칙, 즉 심즉리(心卽理)의 원칙이 여기에서 도출된다.

 

양명학은 마음의 철학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나의 착한 마음이 부모에게 적용될 경우 효(孝)가 되고, 임금에게 적용되면 충성(忠)이 되며, 친구에게 적용되면 신뢰(信)가 된다. 내 마음 바깥에 효, 충, 신의 원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양명학은 지독한 주관주의 철학이다. 모든 진리가 내 마음 안에 갖춰져 있다고 믿는다. 이는 성리학의 입장과 다르다. 성리학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性)이 곧 우주적 차원의 원리(理)와 동일한 지평에서 논의된다. 이때 성리학이 말하는 본성(性)이란 인간의 본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의 만물들이 가진 본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즉리(性卽理)이다. 만물의 본성은 우주적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기(氣)의 차이로 인해 그 도덕적 차이가 생길 뿐이다.

 

성리학에 의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전부 원칙적으로 선(善)하다. 우주를 관장하는 원리인 원형이정(元亨利貞)과 인간을 규율하는 규범인 인의예지(仁義禮智)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성리학에 의하면 인간 이외의 사물들에도 인의예지가 발견될 수 있다.

 

왕수인은 성리학의 입장에 따라 정말로 인간 이외의 사물들에게도 인의예지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대나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장장 일주일에 걸쳐 대나무를 뚫어지게 관찰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남는 것은 병뿐이었다. 대나무에서 인의예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 자체가 지금의 상식으로 보면 난센스이지만 성리학의 이론 구도에 따르면 그것은 난센스가 아니라 심각한 진리였다. 왕수인은 상식을 근거로 하여 성리학의 이론적 구도 자체를 거부한다. 대나무에는 인의예지가 없다. 따라서 성리학의 제일테제인 성즉리라는 원칙은 폐기되어야 한다.

 

나의 마음이 곧 절대적으로 선한 우주의 원리(理) 그 자체이다. 다른 어떤 외부적 교훈이나 학습 등에 기댈 필요가 없다. 저 깊숙이 자리한 본연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 자체가 진리의 구현이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여기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원리가 도출된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촉발하는 행동(行)은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知)과 당연히 합치하게 된다. 성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전을 힘들게 붙들고 머리 싸매며 우주의 원리(理)를 인간 바깥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모든 진리를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 외부의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객관적 법칙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된다. 양명학은 물리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양명학에는 심리학만 있다. 모든 외부 사물들은 내 마음의 창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 외부에 있는 일체의 것들(物)은 결국 사물이 아니라 사건(事)에 지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폭포도 사물이 아니라 내 눈을 통해 보는 사건이다.

 

왕수인이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맹자(孟子) 사상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이론적 해석이 큰 역할을 한다. 주희는 맹자의 주장 가운데 사덕(四德)과 사단(四端)에 주목했다. 인간에게는 선험적으로 사덕(즉, 인의예지)이라는 본성(性)이 갖춰져 있으며 이 사덕이 현실적으로 발현된 것이 사단(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는 정서(情)다. 마음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 사단으로 발동되는 과정에서 지휘자 노릇을 한다.

 

반면 왕수인은 맹자가 말한 내용 가운데 양능(良能)ㆍ양지(良知)에 주목한다. 양능이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갖춰져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딱히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어린아이가 배고프면 젖을 물고, 아프면 울며, 기쁘면 웃는 것, 우물에 어린 아이가 빠지려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 구해주는 것 등이 모두 양능의 증거이다.

 

양지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갖춰진 지식을 말한다. 물론 이때 말하는 지식은 도덕적 지식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무엇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인지에 관한 지식을 전부 타고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천적 앎은 바로 마음(心)의 내용이다. 마음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성리학에 의하면 마음이란, 인간이라는 컴퓨터를 움직이는 사용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컴퓨터는 본질적으로 완벽하다. 사용자가 부실하면 그 완벽한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다. 완벽한 컴퓨터를 잘 이해해야만 그 성능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 먼저 학습이 필요하다.

 

반면 양명학에 의하면 마음이란, 인간이라는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운영체제(OS)이다. 하드웨어는 운영체제가 시키는 대로 작동할 따름이다. 다행히 운영체제는 완벽하다. 다만 하드웨어가 운영체제를 구동시키기에 성능이 부족하고 용량이 적을 뿐이다. 완벽하게 주어진 운영체제를 일단 구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드웨어를 구동시키려면 우선 전원부터 넣고 운영체제를 돌려야 한다. 행동이 우선이다.

 

성리학이 결과주의라면 양명학은 동기주의이다. 성리학이 형식주의라면 양명학은 내용주의이다. 성리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이다. 성리학이 주지주의라면 양명학은 행동주의이다.

 

중국사상은 성리학과 양명학의 긴장 속에서 다양한 이론들을 창출하였다. 일본 또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정제두(鄭齊斗) 등 극소수의 양명학자들만이 용케 죽음을 면하고 양명학적 입장을 관철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정인보(鄭寅普) 등 몇몇 학자들이 양명학을 기반으로 하여 학문 활동을 펼쳤으나 끝끝내 양명학은 조선에서 단 한 번도 주류가 되지 못하였다. 동기보다는 결과, 내용보다는 형식, 행동보다는 지식, 주관적 개성보다는 객관적 규범을 중시한 조선의 역사는 너무도 강고하여 성리학 이외의 사상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근대 서구사상에 의해 멸절될지언정.

 

(출처/naver blog ~ 명랑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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