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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기(氣)철학

의식(意識)과氣

by 윈도아인~♡ 2012. 3. 17.

의식(意識)과

 

 

지금까지 우리는 <기>라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며 경험에 의해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작용 내지 현상의 실재 가능성의 근거를 찾아 다녔다. 이 말에는 약간의 논리적 모순이 있다. 과학은 경험 즉 현상을 그 토대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라면 과학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더라도 당연히 그 실재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과학은 <기>를 `초자연현상'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는가? “경험”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기는 물리적인 측정 가능 양(量)이 아니기 때문에(적어도 아직 까지는) 학문적인 경험 즉 실험으로서는 확인이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에 대한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다. 즉 객관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 현상이 왜 객관적이지 못한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이 기는 의식의 작용인데, 의식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 중에서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의식이다. 의식이야말로 `주관'의 `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 이외의 다른 의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른 의식에 대하여 조사해 볼 수 있는 길은 어떤 조건하에서 그 의식의 반응, 즉 행동을 통하는 간접적인 방법뿐이다. 그래서 의식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인 심리학이 점점 행동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근래의 심리학은 의식을 영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능의 차원에서 다루려 한다. 이것은 마치 양자역학이 소립자의 행동만을 관측, 예측할 수 있고 그 본질에는 접근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양자역학의 문제도 그 원인이 소립자의 식 때문이며, 인간의 의식의 문제도 '의식` 때문인 것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다. 나는 그 정의의 하나로서 <생물은 의식을 가진 것>이라 제안한다. 이 정의는 기존의 생물에 대한 관념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 이외에도 많은 동물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식물, 그리고 더 하등생물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과연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생명의 탄생> 편에서 예로 들었던 아메바 뿐 아니라, 이러한 예도 있다.

 

“점액세균 콘드로마이세스 아우란티쿠스 Chondromyces auranticus의 일생은 바람결에 실려 다니다가 적당한 수분을 지닌 땅 위에 내려 앉은 작은 레몬 모양의 포자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곧 땅 위에서 발아하여, 막이 파열된 포자로부터 수천의 막대모양 박테리아들이 쏟아져 나온다. 움직이는 부분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데도, 이들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는 동안 각각의 박테리아는 모두 포식과 증식을 반복하면서 다수의 집단을 형성한다.

 

이들 사이에 연속적인 합병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것은 다시 규모가 큰 집단으로 서서히 발전해 간다. 마침내 그것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관찰 가능한 크기를 가진 무색의 거름 찌꺼기와 같은 덩어리로 성장한다. 그리고 토양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때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먼 곳까지 이동하기도 한다. 그 진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개의 박테리아는 마치 열을 지어 먹이를 찾아다니는 병정개미와 같이 바로 앞 박테리아의 뒤를 바짝 따라 붙은 상태로 움직여 나아간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아주 기묘한 사태가 벌어진다. 집단의 행진은 곧 중단되며, 개개의 박테리아는 모두 흙 찌꺼기와 같은 물질을 분비해 낸다. 그리고 이를 접착제로 삼아 마치 쌀가마니를 차곡차곡 위로 쌓아 올리듯 밑의 박테리아 위에 다른 박테리아가 올라타고, 다시 그러한 일이 계속 반복되어….높이 일 밀리미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만한 높이에까지 이른 집단은 대기 중에 포자를 방출함으로써 같은 생존 싸이클을 반복하는 것이다.”(라이얼 왓슨, “생명 조류 Life Tide, 박용길 옮김, 고려원미디어 발간”에서 인용)

 

이러한 예를 보면 박테리아가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물론 박테리아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의식’이 단순히 박테리아의 유전자에 그러한 행동이 모두 입력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박테리아의 DNA에는 그러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아메바의 예와 같이,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진 동일한 개체들이 제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은 동일한 유전정보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탄생> 편에서 말씀드릴 형태(개체)발생의 문제와 같다. 최소한 개개의 박테리아들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의식’은 가장 하등 생물인 박테리아뿐만 아니라, 동일한 결정을 계속 형성함으로서 ‘번식’하는 단백질의 일종인 프라이온 prion 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서 물질의 가장 기본 단위인 소립자에게서도‘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 절의 앞에서 생명체의 정의를 ‘의식을 가진 것’이라 했던 것은 글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였음을 여기서 확실히 해 두고자 한다.)

 

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되는 의식과 자아의 문제는 인간이 아직까지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제일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되어 자아를 (완전히)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자기언급의 순환 논리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원래 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거리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의식 속에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자아란 자기인식과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인식'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외부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니까. 요절한 수학의 천재이며 인공지능의 선구자인 알란 튜링 Alan Turing이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하는 글에서 제안한 “모방 게임 imitation game"처럼 우리는 `생각'만으로는 기계(컴퓨터)와 인간의 의식을 구별할 수 없다. 기계와 인간의 다른 점은 자기인식에서 나오는 의지이다. 의지야말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나는 나이다“ 라는 대답을 주는 것이다(아! 우리의 `의지'도 자기언급의 모순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나는 모순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답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철학,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도 가장 큰 문제는 <심신 문제 mind-body problem>이다.  <심신 문제>란 ‘의식과 육체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의식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뇌 세포의 전기-화학적인 작용의 결과 또는 부수적인 현상인지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마도 물리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의식의 실재 여부를 판단 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의지’의 유무를 들겠다. 만약 유물론적 기계론자들의 주장처럼 의식이 물질의 기계적인 작용이라면, 그리고 물질이‘의지(식)’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물질’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의식에서 의지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의지’역시‘의식'의 일부분이므로 그 실재 여부를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유 의지> 편에서 다시 자세하게 검토하겠다.


나는 의지가 곧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의지를 가지고(포함하고) 있으며, 의지가 나를 (외부에 대한)나이게 해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서론>에서 말씀 드렸듯이 <식=의지에 의해서 발휘되는 기>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의)식과 기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이 단원의 주제이니까.


기계에 자아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Douglas Hofstadter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는 능력을 집어넣으면 컴퓨터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호프스태터의 생각에 찬성한다. 내가 소립자의 식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신비주의론자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철저한 환원주의적 인과율론자로서, 인간의 의식이 신에 의해서 주어진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 소립자의 식의 조직적 집합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범심론, 유물론, 기계론, 환원주의, 통합주의가 모두 들어 있다. 컴퓨터가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이러한 나의 생각--소립자의 식으로부터 인간의 의식의 형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 연구의 한 학파를 이루고 있는 <기능주의>는 인간의 뇌를 하나의 기계로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기능주의는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뇌 세포의 기능과 독립적인 의식의 요소를 인정한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물질과 독립적인 의식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의식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 의지가 있다면 그 근원인 소립자의 식도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나의 생각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사상 - 아니, 인간이 생긴 이래로 <정신과 육체>의 二重性 문제, 소위  mind-body problem 만큼 인간의 ‘정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온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정신>이라는 것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곧 <영혼>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도 직결된다. 모든 종교는 사후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만약 사후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 최대한의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선도 도덕도 사랑도 모두 가식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은 물질의 작용일 뿐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적 유물론은 그 유래가 오래다.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과 달리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에피쿠로스Epicuros 등은 당연히 "사후세계가 없다면 삶의 의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 대답은 당연히 "현세에서의 최대한의 쾌락의 추구"이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에게는 "선(善)한 것이 쾌락"이었지만, 영혼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않았던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쾌락이 선"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쾌락주의자를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따서 epicurean 이라 부른다(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했던 쾌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해방된 "아타락시아"라는 평정 상태로서, 타락적인 향락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다고 했음을 참고하시라). 이처럼 정신과 육체(물질)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크게는 정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일원론과 정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이원론으로 나눌 수 있지만,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일원론과 이원론도 몇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 뇌(신경)생리학자인 R. Sperry와 J. C. Eccles 의 견해를 참고해 보자. 두 사람 다 뇌의 작용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이다.


스페리는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적 일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은 <멘탈리즘mentalism>이라 한다.


“멘탈리즘이란 심리학에서는 행동주의 혹은 물질론과 대비되는 것이다. 멘탈리즘은 의식이 행동을 결정하거나 행동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그리고 마음의 특질은 비물리적 혹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이제 우리는 그것을 뇌 과정의 창발적 특성이라고 보고 있다.”


스페리는 신경세포에서 신호를 발신하는 일에 있어서 뇌세포 자체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결정(명령)은 마음이나 의식이라고 하는 상위의 뇌의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은 프리고진 등의 <산일구조> 이론, 즉 열역학적으로 비평형에 있는 계에서 질서가 자발적으로 ‘창발’된다는 이론과, 카오스 이론, 즉 복잡계에서 질서가 창발될 수 있다는 이론(사실상 프리고진의 이론과 카오스 이론은 질서의 창발에 있어서 그 궤를 같이 하는 이론이다)에 의해서 뒷받침되어, 현재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이다. (물론 의식은 뇌세포의 전기-화학적 작용의 결과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의식은 물리법칙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한 환원주의적 견해를 가진 과학자의 숫자는 더 많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의식은 육체와 독립적인 존재는 아니되, 독자적으로 육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정신적’인 것으로서‘실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스페리의 정신’은 육체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에클스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유명한 과학철학자인 K. Poppers 와의 공저 “The Self and Its Brain, 1977”에서


“나의 인격적 독자성, 즉 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자기 의식은 나 자신의 자기 탄생에 대한 창발적 설명으로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의 자기 의식하는 마음 또는 독자의 자기 또는 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어떻게 하여 나의 혼은 진화적 기원을 가진 나의 대뇌와 연락하도록 되었는가”(김용정, “과학과 철학”,  범양사 출판부, 1996. 에서 인용)

 

이제 기와 관련해서 의식의 본질을 살펴보자.


의식에 대한 기능주의는 의식의 본질적 성분이 `정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의식이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원인은 뇌 세포의 전기 화학적 작용이지만, 그 결과 즉 의식 그 자체는 전기 화학적 작용 그 자체가 아니라는 입장인 것이다. 브라암스가 여러 가지 음표를 악보에 기입하여 교향곡을 작곡했지만, 음표들과 교향곡은 별 개의 `존재'라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종래의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전기 화학적 작용이나 음표라는 형이하학적인 것과 의식이나 교향곡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논리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전체주의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역시 형이상학적인 것과 하학적인 것들 사이를 함수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는 다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뿐이다.


이 문제의 근본은 의식이 실재인가 관념인가 하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내가 줄곧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은 “의식은 실재”라는 것이다. “브라암스의 교향곡 파사칼리아가 실재한다”라는 것과는 다르다. 의식은 현상이 아닌 실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 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이 말이 된다.
그러나 “의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방금 `의식의 본질적 성분은 정보'라 했지만, `정보'라는 말 역시 `의식' 못지 않게 애매한 말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오히려 `의식'보다 더 낯이 선 개념이다. 그러니 `실재로서의 의식'의 실체를 표현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이지만 우리에게는 달리 더 좋은 표현이 없다. 우리의 `의식의 멍에`인 언어의 한계인 것이다('나의 능력의 한계`라는 것이 옳겠지만).


`의식'은 `정보'를 그 기반으로 한다. 앞 서 나의 정의에 의하면 의식은 정보 그 자체와 정보처리 및 교환 능력이다. 그런데 물리학자, 과학철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그의 저서“삶과 온생명” 에서 “의식은 주체적으로 느껴지는 정보체계의 총체” 라고 정의하고 있다. 장교수와 나의 의식에 대한 정의에는 <주체적>이라는 단어만큼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의지'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책의 앞부분에서 '기'에 대한 정의를 생각할 때에 '주체성'을 그 기준으로 했었음을 기억하실 것이다. 결국 의식이란 <의지를 포함하는 정보 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의식에 대한 장회익 교수와 나의 정의는 일치하는 것이다.


실은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서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의지, 주체성>이 과연 우리의 의식에 기본적인 능력, 본질로서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생물학과 철학에서 현재 미해결 과제로서 많은 학자들의 논쟁 거리가 되어 있다(실은 이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과학적인 답을 얻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의지> 편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의식의 대외 영향력, 즉 기는 “정보의 전달”일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다. 이 결론(가정)에 의해서 의식과 기의 작용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 정보의 전달 과정에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지만 ‘교감(交感)’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거시적인 세계, 즉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서 모든 과정이 에너지의 소모를 필요로 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정보의 전달, 즉 기가 발휘될 때에 에너지가 필요(소모)할 것이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의식은 기의 에너지를 어디서 공급받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의식이 뇌 세포들로부터 받는 전기 화학적인 에너지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의식의 작용도 전기 화학적인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는 결론이 되고, 그렇다면 의식도 물질적인 것(현상)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대다수 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서,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뇌의 총체적인 작용 기전은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였지만, 뇌 세포들 사이의 정보(신호)전달 기전은 거진 알려져 있으며, 그 과정은 분명히 전기-화학적 과정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와 식>의 근거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나는 아예 과학적 근거를 배제하였을 것이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기, 식 역시 알려진 물리법칙을 벗어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과학적 사실에서 기와 식의 실재를 인정할 수 있는 빈틈을 찾을 수 없다면 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를 느낀다고 말하더라도 기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이 물질적인 현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자유의지와 식>에서 더 자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과 식>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기본적 물리작용의 과정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지 않는 가역과정이다. 비가역과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거시세계에서의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프리고진이 말하는 “소산(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소립자의 작용 등 기본 물리적 과정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법칙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두 개의 전자가 서로 만나서 서로를 밀쳐내는 힘을 주고받은 다음 서로 멀어지는 물리적인 상호작용 과정에서 두 전자의 에너지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상호작용 또는 정보의 교환작용에 있어서 반드시 에너지의 소모가 수반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준다. 따라서 의식의 작용도 대부분은 에너지의 소모를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그 가장 기초에 있어서는 에너지의 소모가 없이 순수하게 정보의 교환(‘감응’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의식은 그 대부분을 물질적인 작용에 근거하고 있지만, 물질적인 현상과는 독립적인 작용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예일대학 물리학, 자연철학 분야의 명예교수인  H. Margenau는 “뇌나 신경이나 감각기관 같은 복잡한 신체 시스템에서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너무 작기 때문에 확률론적인 양자역학적 효과가 지배하므로, 복잡한 유기체에서 에너지는 자동으로 공급된다. 마음이 이 과정에 작용 즉 심신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마음이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즉, 의식은 마치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의 존재양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가 확률장인 것처럼  일종의 장으로서 존재하고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확률장은 에너지장이 아니다. 공간적 위치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의식이 뇌에 정보를 줄 때에도 에너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의식을 ‘확률장’과 유사한 형태로 보는 가설은 형태창조장  morphogenic field  가설과 매우 유사하다.


뇌세포의 시냅스에서의 신호전달에 대한 연구로 1963년도 노벨상을 수상한 J. C. Eccles는  “의식이 물질에 작용하는 것은 확률장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는 “주체적 의식이 대뇌보다 우위에 있다….이와 같이 무엇인가 중심적인 핵, 즉 내적인 자아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무엇인가 별다른 존재로서 사후에도 잔존해 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의식은 신경중추에 작용하여 신경현상의 동적인 시공 패턴을 변용시켜 신경현상 이상의 고차의 해석적 제어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K.C.Popper & J.C.Eccles, The self and its brain, 1977”)


“…그러므로 나는 나의 독자의 자기 의식하는 마음 또는 나의 독자의 자기 또는 영혼의 초자연적 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전혀 새로운 일단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어떻게 하여 나의 영혼은 진화적 기원을 갖는 나의 대뇌와 연락하게 되었는가? 이 초자연적 창조라고 하는 생각에 의해서 나는 나의 자기의 독자성이 유전적으로 경정되어 있다고 하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논의를 회피할 수가 있다. 나의 대뇌의 유전적 독자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험된 자기의 독자성이 자기나 영혼의 독립적 기원에 관한 이 가설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 자기나 영혼은 대뇌와 연결됨으로서 나의 대뇌가 되는 것이다”


즉, 의식이 확률장을 통해서 시냅스 소포의 방출확률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의식(대뇌)의 작용을 제어한다는 가설이다. Torpe 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신적인 현상이 생리학적 내지 생화학적 현상을 추월한다는 의미로 정신은 물질을 초월한 존재라 하였다.

 

 기는 의식 또는 식의 자연스러운 작용의 일부분이지, 기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기 문화권”이라 불리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기'는 알았지만 `식'을 깨닫지 못했다. `식'을 깨달은 것은 불교뿐이다. 기 문화권에서는 기를 우주의 본질로 간주하지만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중의 하나인 식의 외부 작용 기전으로 볼뿐이다.


`일체 유심조 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출처/naver blog ~ 天長地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