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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 기(氣)철학

혜강 氣學에서의 인간 이해

by 윈도아인~♡ 2012. 3. 17.

혜강 氣學에서의 인간 이해 
 성 지 연*

 

 

혜강은 '하늘(天)과 사람(人)의 관계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갖게 된다. 하늘과 사람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은 무엇인가? 또, 다르면서도 같아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논의는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학의 '천인합일'의 열망을 혜강의 언어는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혜강은 '하늘과 사람'의 이해지평을 '運化와 推測과 變通'이라는 관점 위에 설정한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하늘과 사람의 같은 특질인 '운화'와, 사람만의 특질인 '추측', 그리고 추측이 확장되고 심화되는 '변통'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결국 사람은 추측과 변통의 공부로써 하늘의 운화를 터특해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工夫'야말로 하늘과 같아질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氣學이 추구하고 있는 天人之宜 및 天人一致는 '운화와 추측과 변통'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다름아닌 것이다.
혜강은 하늘과 사람은 '運化하는 氣'를 통해 하나이지만, 하늘은 스스로 그러한 自然일 뿐이고, 사람의 當然은 '추측과 변통의 공부'로 자연에 承順함이라고 논의한다. 그러나 혜강이 '자연과 당연'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늘의 자연성, 객관성, 보편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이기 보다, 오히려 사람의 당연성, 주체성, 구체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天과 人의 같고 다름에 관한 혜강의 논지는, 추측과 변통의 객관성과 공의성을 통하여 사람의 윤리를 하늘의 운화 속에 구현하려는 天人一致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주요어 : 하늘(天), 사람(人), 自然, 當然, 運化, 推測, 變通

 

1. 시작하는 말

 

전통적으로 동양의 인간이해의 지평은 '하늘(天)과 사람(人)의 연관' 속에 설정된다. 인간의 구조 자체가 하늘과 사람이란 두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다채로운 삶의 양상, 사람다움의 형태, 하늘 및 세계의 의미 등에 대한 사유의 무늬들은 '天道와 人道'에 대한 전통 사유를 다채롭게 장식해왔다.
惠岡 崔漢綺(1803∼1877)의 독자적인 학문인 '氣學'의 사유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도 이러한 하늘과 사람의 연관에 대한 본원적 구조를 구명하는데 놓여있다. 그는 자신의 철학관련 저술인 『推測錄』, 『神氣通』, 『氣學』, 『人政』등의 전편에서 '天과 人', '天道와 人道'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혜강 또한 인간을 '하늘과 사람'이라는 두 범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한다. 그는 '하늘(天)과 사람(人)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과 사람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무엇인가? 또, 다르면서도 같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연구는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결국 이것은 전통적인 유학의 '天人合一'의 열망을 혜강의 언어는 어떻게 풀어내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인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이돈녕은 혜강은 唯氣論과 神氣로써 天人一體觀을 해명하는 철학적 입장에 서 있다고 보았으며, 금장태는 혜강의 철학은 人道를 실현하는 철학으로 神氣, 運化의 존재론적 근거 위에 그의 철학이 지닌 인간학적 관심을 총합하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또 이현구는 혜강의 전체 저작을 통하여 가장 강조되는 주제가 바로 天과 人, 自然과 當然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손병욱은 혜강의 기학은 결국 天人之宜, 즉 天道에 바탕한 人道의 정립과 시행을 겨냥하는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들 선행 논의들의 결과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혜강이 파악하고 있는 하늘과 사람의 같은 특질인 '運化'와, 사람만의 특질인 '推測'과 '變通'이라는 핵심어에 주목하여 혜강 기학에서의 인간이해에 천착하고자 한다.
혜강은 '사람 안의 하늘'은 그것이 '하늘'이기 때문에 외재적 '하늘'과 동질적인 무엇이라고 보는데 그 동질성을 표현하는 개념이 '運化'이고 '氣'이다. 한편 '하늘 안의 사람'은 그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과 다른 주관성을 가지며, 그 주관적 특징을 표현하는 개념이 '推測'이다. 그러나 '하늘과 사람'은 분리된 독자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세계의 안과 밖이 떨어질 수 없는, 즉 하늘은 사람을 버릴 수 없고 사람은 하늘을 떠날 수 없는 불가분의 구조를 가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다름은 같음을 지향하며 사람은 하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혜강은 개개인이 지닌 그 지향된 의지를 '사회'라는 범주 속에 귀속시킨다. 사회는 곧 작은 하늘인 셈이다. '하늘 안의 사람'은 이제 '사람 안의 사람'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 및 보편성'으로의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이 '變通'이다. 즉 주관적인 사람의 추측은 합의적인 사회의 변통을 거치면서, 객관적인 하늘의 운화를 따르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의 객관화·보편화야말로 '추측에서 변통으로' 넘어서는 결절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혜강의 인간 이해의 지평을 '운화와 추측과 변통'이라는 세 가지 관점 위에 설정하고, 그의 철학적 저술을 중심으로 인간 이해에 대한 내재적 의미를 파악해가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하늘과 사람의 같은 특질인 '운화'의 의미에 대하여, 둘째, 사람만의 특질인 '추측'의 특성에 대하여, 셋째, 사람들 속에서 추측이 확장되고 심화되는 '변통'의 道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혜강이 이해하는 인간됨의 의의를 논구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운화와 추측과 변통'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혜강의 인간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추구하고 있는 天人之宜 및 天人一致의 강한 의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하늘과 사람의 특질, 運化

 

天의 字義를 보면 『說文』에는 天은 顚으로서 지극히 높고 그 위가 없으므로 一字와 大字를 따른다고 하고, 또 『周禮』에는 天은 각각 그 쓰임에 따라 다른 이름을 붙였는데, 높여서 임금으로 쓰면 皇天, 원기가 광대하다는 뜻으로 쓰면 昊天, 사랑으로 덮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쓰면 旻天, 위로부터 아래를 감시한다는 뜻으로 쓰면 上天, 멀리서 볼 때 푸르다(파랗다)는 뜻으로 쓰면 蒼天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하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은 곧 상고시절부터 인간이 하늘을 어떻게 여겨왔는지를 대표하는 의미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詩人은 간 밤의 폭우와 무서리 속에서 아름다운 국화꽃을 피워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퍼붓는 천둥과 벼락 속에서 근원모를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렇듯 하늘에 대한 알지못할 외경심은 고금, 동서, 남북을 막론하고 시공을 따라 면면히 흘러온 인간사의 거대한 우러름이었던 것은 아닐까? 먼 옛날 孔子도 하늘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지만,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꽃피운 근대 유럽에서조차 그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主여! 이다지도 깊고 이다지도 아름다운 밤을 마련해 놓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이십니까? 나를 위해서이십니까? 바람은 훈훈하고, 열어놓은 窓 너머론 달빛이 들어오며 나는 하늘의 크나 큰 침묵에 귀를 귀울입니다. 오오! 나의 가슴은 宇宙萬象의 그윽한 예배 속으로 말도 없이 다만 황홀하게 녹아 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無我境으로 기도를 올릴 뿐입니다.

그러면 혜강은 저 전광석화가 격동하는 하늘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그가 본 하늘은 꽃도, 눈물도, 기도도 아닌 단지 氣였을 뿐이었다.

"天은 곧 大氣이다. 天은 곧 運化氣이다. 하늘은 氣의 큰 것이요, 氣는 하늘의 가득찬 형질로서, 통괄적으로 말하면 天이 곧 氣요 氣가 곧 天이다."

이러한 '天卽氣'라는 독창적인 天觀 및 그에 기초한 天人觀에서 혜강의 기학적 인간 이해가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의 天은 무형의 윤리적 근원인 理法天이며, 茶山이나 서학에서의 天은 인격적 신앙의 대상인 절대자자로서의 上帝天 또는 主宰天이다. 그러나 혜강에게서 天은 이법천도 상재천도 주재천도 아닌 새로운 의미의 自然天일 따름이다. 天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터인 대기와 자연으로서, 이는 단순한 물질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이자 생명체인 자연이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운화해가는 유형의 氣로 이루어진 자연이다.
혜강은 天 및 세계의 본질을 氣一元論으로 파악하면서, 氣는 형질로 理는 본체로 이해하는 성리학적 사고와는 달리, 형질기는 운화기에서 비롯하므로 같은 하나의 운화기라고 말한다. "地月日星과 만물의 형체는 형질의 氣이며 雨暘風雲과 寒暑燥濕은 운화의 氣인데, 형질기는 운화기로 말미암아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운화의 氣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 또한 운화하는 천지의 氣 속에 태어나 형체의 氣가 생기며 죽으면 다시 천지의 氣로 되돌아갈 뿐이다.
혜강의 氣哲學을 선행 기철학자 花潭 徐敬德(1489-1546)과 비교해보면, 화담은 "太虛는 맑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이름하여 先天이라고 한다. 그것은 크기가 한이 없고 앞이 없고 처음이 없어서 그 유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 담연하고 허정함이 바로 氣의 근원이다"라고 말한다. 즉, 화담은 太虛를 본체로, 氣를 현상으로 파악하는 二元論的 구조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혜강은 運化氣가 모여 形質氣가 된다고 함으로써, 氣의 본체와 작용을 포함하는 唯一論的 氣一元으로 氣를 파악함으로써, 선행 기철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면 혜강이 "운화하는 대기는 항상 피부와 뼈를 두루 적시나 물과 물고기가 서로 잊고 있는 것처럼 대기는 無形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그동안 왜 사람들은 이 유형의 氣에 무지했던가? 그 이유를 혜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질의 氣는 쉽게 보이나 운화의 氣는 보기 어려운 바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유형과 무형으로써 형질과 운화를 분별했다. 老氏의 空과 佛氏의 無는 모두 무형으로써 道와 學을 삼고, 心學 理學에서도 무형의 理로써 궁구하면서, 무형과 유형의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사실은 운화의 氣는 형질의 가장 큰 것이다."
朱子는 자연현상으로서의 天의 배후에 우주만물을 생성케 하는 근원인 무형의 理法, 즉 태극의 존재를 상정한다. "천지간에는 다만 動靜兩端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음이 있을 뿐이요, 또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을 易이라고 하는데 그 動하는 것과 그 靜하는 것은 반드시 동정케 하는 까닭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太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혜강은 변화하는 까닭은 태극이 아니라 단지 氣의 운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氣의 성질이 원래 활동운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氣가 우주 안에 충만하여 실날같은 빈틈도 없으며, 여러 별들을 운행시키고 만물의 조화가 무궁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저 활동운화의 기는 천지 사이에 가득 차서 천지의 정액과 인물의 호흡이 되는 것이니, 조화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신령이 이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다. 온 세상의 신령스런 것들이 모두 이 활동운화의 기를 얻어서 활동운화의 형체를 이룬 것이니, 비록 이 氣와 서로 떨어지려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혜강은 무궁한 조화를 드러내며 활동운화하는 氣의 신령스러움에 주목하여 새롭게 이름지어 '神'이라고 부른다. 혜강이 말하는 氣는 곧 神氣를 의미한다. 대기에 함유되어 있는 것은 천지의 신기이고, 사람의 신체에 함유되어 있는 것은 형체의 신기이다. 이 운화하는 신기가 곧 모든 사물의 근본이요 원천이며, 성리학에서 초월적·이법적·절대적인 우주의 본질로 지칭되는 理는 이러한 활동운화하는 氣의 내재적 속성, 조리, 법칙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 세상이 살아있는 커다란 氣 덩어리이고 사람과 만물은 모두 그 氣에서 생성된다면, 도대체 하늘과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東學의 경구 '人乃天'처럼 사람은 곧 하늘인가? 혜강은 이에 대해 상반된 대답을 들려준다. 天과 人은 같다고도 하고 또 같지 않다고도 하는 것이다.

"天人이 본래 둘이 아니다... 天氣와 人氣는 둘로 나뉠 수 없으니, 氣를 들어 말한다면 天人이 일치하고 형체를 들어 말한다면 大小의 차이가 있다."
"사람과 만물의 형체에 들어있는 기는 '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것을 人氣, 物氣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氣로써는 동일하되 그 형체의 차이로 말미암아 대소의 다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혜강이 大小의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늘과 사람을 구분짓는 '크고 작은'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의미를 논하기 전에 먼저 다음의 글에서 '하늘의 큼'에 대해 확인해보자.

"하늘은 만물을 낳는 데 뜻을 두지 않으나, 만물 스스로가 하늘의 힘을 빌어 생겨난다. 땅도 만물을 기르는 데 마음을 두지 않으나, 만물 스스로가 땅의 힘을 빌어 길러진다... 태양이 하늘에 솟으면 많은 그림자가 그 형질에 따라 생기는데... 이것이 어찌 태양이 그림자를 만들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는가? 태양은 다만 불같이 밝으면서 하늘의 궤도를 돌 뿐이고, 만물이 각기 그 형체에 따라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하늘은 無思無意하다. 오직 자연 그 자체일 뿐이다. 사람은 큰 하늘 속에서 오직 스스로 그림자를 만들어가야 하는 작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그림자란 무엇을 말하는가?
혜강은 "天道가 유행하여 實理를 만물에 부여하였으니, 사람의 道는 오직 만물에 부여된 실리를 생각하여 어김이 없고 사특함이 없어야 하는 바, 유행의 理는 바로 天道요, 推測의 理는 바로 人道"라고 하면서, 하늘의 道와 사람의 道를 같다고 하지 않고 명확히 구분한다. 또 "하늘에는 人心의 推測하는 理가 없으며 오직 氣를 배포하는 理만이 있다"고 하면서, 그림자를 만드는 사람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즉 혜강이 강조하고 있는 사람의 道란 바로 만물에 부여된 유행의 이치를 어김없고 사특함이 없이 추측해내는 공부를 일컫는 것이다.
여기서 혜강의 관심은 하늘과 사람의 大小의 차이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의 일, 즉 공부의 바른 길을 드려내려는 것일 따름이다. 결국 하늘의 큼을 따르는 공부의 길이야말로 곧 하늘과 사람이 다르면서도 같아지는 방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東學의 경구 '人乃天'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의 글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自然은 天地의 流行之理이다. 當然은 人心의 推測之理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연을 표준으로 삼고 당연을 공부로 삼는다. 자연은 天에 속하여 인력으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은 人에 속하며 이것으로 공부를 삼을 수 있다. 當然의 밖에 또 不當然이 있으니, 마치 仁 밖에 不仁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당연을 버리고 당연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 중에도 또 우열과 순박이 있으므로, 갈고 다듬는데 자연으로 표준을 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공부의 바른 길이다."

즉 혜강은 공부의 바른 길을 세 가지 관점으로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공부의 표준이다. '自然=天=流行之理'는 그 자체로 완전한 표준이므로, '當然=人=推測之理'는 이러한 자연을 따라 공부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늘의 운화에 따라 마땅한 사람의 운화를 찾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둘째는, 공부의 방법이다. 공부를 이루어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에 담긴 추측지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혜강이 하늘과 다른 사람의 특질로 나타내는 '추측'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는, 공부의 자세이다. 당연에는 우열과 순박이 있으므로 갈고 다듬어가는 것이 바른 공부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변통시키며 공부의 켜와 층을 이루며 조금씩 성숙해 간다는 말에 다름아닌 것이다.
요컨대, 공부의 표준은 '운화'로, 공부의 방법은 '추측'으로, 공부의 자세는 '끊임없는 변통'으로 간명하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늘과 사람의 같고도 다른 특질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혜강은 다른 어휘로 이러한 뜻을 강조한다.
"활동운화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아 그 조리를 분석해 보면 活이란 존양하여 추측하는 것이요, 動이란 강건하되 順하여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요, 運이란 헤아려서 두루 돌게하는 것이요, 化란 변통하여 융화하는 것이다. 오직 공부의 활동운화만이 사람이 본디부터 몸에 지니고 있는 활동운화를 가지고 大氣의 활동운화를 계승하여 天人을 일치시키고 사물을 一貫케 한다."

하늘과 사람은 운화하는 氣 속에 같이 있다. 그 運化氣는 성리학의 理도 심학의 心도 아닌 단지 자연 그 자체일 뿐이다. 사람은 유행하는 氣를 나누어 가진 존재이며, 사람이 하늘과 같아지는 바는 표준인 자연을 따라 당연을 공부 삼으며 사람의 추측지리가 하늘의 유행지리를 따를 때인 것이다. 이러한 추측지리는 끊임없는 변통의 과정 속에 하늘과 사람의 마땅한 바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 확장되고 심화되면서 이루어져갈 뿐이다.
그러면 이제 하늘과 다른 사람의 특질, 추측에 대해 논구해보자.

 

3. 사람의 특질, 推測

 

혜강은 하늘과 다른 사람만이 가진 특질, 즉 인간만이 가진 특징인 인식능력과 사유과정을 '추측'이라는 독특한 용어로 표시한다. "운화가 하늘과 사람의 운행이라면, 추측은 사람의 인식이다." 추측이란 사물을 헤아리는 이치로써, 이는 자연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과 사유의 원리이다. 하늘은 너무 크고 사람은 너무 작아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다 알 수 없다해도, 그래도 사람이 할 일은 추측의 공부라는 것을 혜강은 확신하였다.

"천지로부터 나를 본다면 대양의 포말이요, 만물로부터 나를 본다면 평지의 한 모래알이다. 그러나 나의 추측으로 천지를 본다면 無始보다 앞서고 無終보다 뒤까지 가며 땅덩어리를 받아들이고 끝없는 하늘을 담는다. 추측으로부터 만물을 본다면 터럭 끝이라도 분석하고 금석이라도 뚫고 들어간다."

성리학에서는 天은 본연의 이치로, 性은 본연의 이치가 마음에 구유된 것으로 상정된다. 이는『中庸』의 "하늘이 명한 것을 性, 性을 따르는 것을 道, 道를 따르는 것을 敎"라는 어구와, 『孟子』의 "마음을 다하는 자는 性을 알고, 性을 알면 하늘을 아니,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性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바"라는 어구를, 인간 본연의 도리란 내면의 성찰을 통하여 마음속에 내재된 본연지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朱子는 自然을 형이상인 理法的 理와 형이하인 물질적 氣와 質의 결합으로 보면서, 인간에게 내재된 이 理法的 理가 人性의 근거가 된다고 논한다.
그러나 혜강은 推와 測의 개념을 과감하게 『중용』의 道와 敎에 대치시키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킨다.
"하늘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本性이고, 이 本性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

즉 미루어 잘 관찰하고 확인하는 推를 性을 따르는 道의 자리에, 미룬 것에 따라 재고 헤아리는 測을 道를 따르는 敎의 자리에 대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본연의 도리는 내면의 性에 대한 성찰이 아닌 人·物에 대한 미루고 헤아리는 추측작용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야말로 성리학의 공부법인 '궁리'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택하는 기점인 셈이다. 사람은 유행지리에서 배포된 추측지리를 익히고 다듬는데 따라 추측이 생겨나는 것이니, 추측은 곧 하늘의 이치를 찾아가는 天人一致의 공부요, 천인운화기를 얻는 공부인 것이다.

"理는 하나인데 天理流行者를 流行之理라고 하고 전일에 경험한 것을 미루어 앞으로 다가올 사물과의 이치를 헤아리는 것을 推測之理라고 한다.... 그러므로 人心推測之理로 하여금 天道流行之理에 어긋남이 없게 되기를 기약할 것이다."

여기서 혜강이 '流行之理와 推測之理', '天道와 人心'의 형태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마치 體와 用, 본질과 현상으로 나누어 전자가 후자를 주재하고 후자는 전자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논리와 유사하게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은 성리학적 논리와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첫째, 혜강은 인심과 천도를 '人心은 氣之發, 天道는 本然之性'이라는 성리학적 이분법으로 귀속시키지 않으며, 인심과 천도, 추측지리와 유행지리는 모두 활동운화하는 氣의 크고 작은 양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둘째, 혜강이 '유행지리는 天道요, 추측지리는 人道'라고 하면서 하늘과 사람의 다른 바를 구분하는 이유는, 오직 추측의 능동적 특이성 및 공부의 이유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는 "사람의 추측이 천리에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미룸(推)이 마땅했느냐 마땅치 않았느냐에 달렸고, 그 미룸의 마땅하고 마땅치 않는 것을 추구해 보면 그것은 오직 헤아리는(測) 규모에 달려 있을"뿐이라고 하면서, 인심이 천도로, 추측지리가 유행지리로 지향하기 위해서는 오직 사람 마음 속의 정확한 추측의 이치가 확보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혜강은 추측의 과정을 밖에서 얻는 단계, 안에서 물들이는 단계, 다시 밖에 베푸는 세 단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파악한다. 이는 인식이 실현으로 드러나는 전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大學』의 8조목도 추측의 세 과정으로 해석된다.

"天人運化는 여러 번 증험하여 그것을 밖으로부터 얻고 모습을 이루어 안에 간직하고 기회에 따라 밖으로 향해 쓰니, 격물·치지는 그것을 밖에서 얻는 것이요, 성의·정심은 그것을 안에 간직하는 것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그것을 밖에서 쓰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나의 감각기관[주체]-나의 추측지리[매개체]-대상 사물[객체]' 간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이미 통하게 하는 신기가 있고 또 통할 수 있는 여러 감각기관이 있으며, 내 몸 밖에는 통하는 것을 증험하는 만물이 있어 각각 그 신기를 드러내며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人情과 物理는 제규를 통하여 밖에서 얻어 안에 습염하였다가 드러내어 쓸 때에는 이것을 밖에 베푸는 것이니, 거기에서 들어오고 머무르고 나가는 세 단계의 자취가 뚜렷하다.... 대개 사람 몸의 神明한 氣는 오직 통찰과 습염의 능력이 있을 뿐이요, 이밖에 형태를 가지고 말할 단서는 없다. 밖에 있는 인정과 물리는 여러가지 감각기관[諸竅諸觸]을 통하여 안에 거두어 모으는 것이다.... 당초에 거두어 들인 것이 정밀하고 깊으면 그 뒤에 꺼내어 쓰는 것도 또한 정밀하고 깊으며, 수입한 것이 거칠고 미천하면 발용도 또한 거칠고 미진하다."

그리하여 혜강은 객관적인 운화의 방식에 질료적으로 다가서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야말로 인간의 존재경험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추측은 먼저 내 몸이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기관들에서부터 시작된다. 혜강은 묻는다. "사람에게 있는 여러 감각기관[諸竅諸觸]에 말미암지 않고도 능히 人情과 物理를 통달할 수 있겠는가? 또 그 감각기관에 말미암지 않고도 능히 인정과 물리를 모으고 흩어 신기에 물들일 수 있겠는가? 또 그 감각기관에 말미암지 않고도 능히 사람이나 물건과 접하여 보답하고 취할 수 있겠는가?"라고.
단연코 혜강은 인간경험의 다양성을 몸소 체험하는 우리 몸을 떠나서 이루어지는 궁리는 어떤 형태로든 공허한 관념론의 허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心學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性命을 '探究'하는 것이 아니라 '貪究'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心學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감각기관을 비루하고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性命을 貪究한다.... 만약 자기 형체에 있는 통하는 여러 기관을 버리고 사람이나 사물에 통하기를 구하거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통한 것을 버리고 오직 허망한 그림자나 번득이는 빛과 같은 것을 궁구하는 것은, 학문을 깊이 통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성리학이나 심학에서 실재에 대한 경험 현상은 선험적인 性과 理의 궁리 속으로, 또 순수직관인 心 속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혜강은 이러한 선험적 관념론은 인간 존재를 그 총체성의 맥락 위에서 드러내는데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부딪침의 경험을 도외시하고는 생활세계 속의 인간 존재의 복잡다기한 존재양상을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선험적인 관념과 순수심의 지향으로 환원되어진 격물에서가 아니라, 내 몸의 감각기관과 유형의 사물이 접하는 직접 경험의 사태 그 자체만이 의지적인 인간행위의 추측의 단서와 공부의 방향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物을 버리고 일을 헤아리면 일이 아득하여 계제가 없으나 物을 가지고 일을 헤아리면 일이 절근하여 조리가 있으며, 物은 천지가 생성시킨 것으로 백성이 날로 쓰고 항상 행하는 것이므로 物을 버리면 일을 베풀 곳이 없고 그 측량함에도 법칙이 없으니 옆에서 듣는 사람도 시비를 분별할 근거가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혜강의 物에 대한 강조는 관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구하는 다음 인용 속에 투명하게 드러난다.

"옛 사람은 대체로 얻어 온 근거는 말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부터 발용하는 단서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안으로부터 얻은 근거를 따져 물으면 '太極의 이치는 처음부터 품부되어 있다는 것인데, 다만 기질의 가리움으로 인하여 간혹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周易』에 이른바 '이전의 말과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 덕을 축적한다'는 것과, 『論語』에 이른바 '많이 듣고 많이 본다'는 것과, 『大學』에 이른바 '격물치지'라는 것이, 과연 밖에 있는 인정과 물리를 걷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기질의 가리움을 제거하는 공부라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말을 상대하여 우열을 하나하나 석연히 분별하고자 하면 비록 평생을 걸려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대로 버려두고, 조리가 있고 실효가 있는 것에 나아가 일을 마칠 따름이다."

혜강의 관심은 오직 조리있고 실효있는 공부였을 뿐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태극의 이치가 아니었다. 그러한 궁극의 원리, 초월적인 理, 무형의 理는 평생을 걸려도 해결할 수 없는 虛理일 뿐이었다. 혜강의 實理는 '유행하는 이치의 본원'이라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지류·초엽'이라는 현상적 존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행하는 이치의 궁극적인 본원은 자세히 알기 어려운 것이니, 사람들이 힘쓸 것은 다만 그 支流나 抄葉을 따라 앞을 미루어 뒤를 헤아릴 뿐이다. 그 궁극의 원리를 논하려 하면 그 형세가 혼륜하지 않을 수 없어 추측이 그 능력을 쓸 수가 없고, 그 실리를 버리면 모두 광영허탄함에 빠져 추측이 그 功을 나타낼 수 없다."

그리하여 혜강은 성리학에서의 궁리법을 추측법으로 대치하면서, 修己의 기준을 마음속의 궁리가 아닌 사물에 접한 추측에 둔다. 궁리에 힘쓰는 사람은 모든 이치가 모두 내 마음에 갖추어졌다고 여겨 나의 마음의 궁구가 미진할 것만을 걱정하나, 추측에 힘쓰는 사람은 지난날의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였던 氣를 미루어 옳고 그름을 헤아리고, 미룬 것을 변통하여 다시 헤아려서 바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혜강에 따르면 추측이 제대로 행해진 상태를 '通'이라 하는데, 통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경험을 나의 神氣가 받아들이는 형질통에서, 형질통을 따라 비교하고 헤아리는 추측통으로 나아간다. 이는 감각적 인식을 통하여 논리적 인식으로 변화해 나가는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형질의 통을 근거로 추측의 통을 통달하려면 나의 주관을 가볍게 여기고 대상의 사물을 주장하는 객관성이 깊어야, 거의 하늘과 사람을 통할 수 있게 되어 잘못이 적다." 처음의 감각기관을 기초로 한 형질통은 추측과 증험과 변통을 거듭해가면서 남김없이 두루 통하는, 즉 통의 궁극인 '周通'에 이르른다. 이는 나의 형질을 매개로 한 추측지리가 대상의 유행지리에 부합되는 人情과 物理를 정확히 인식하게 된 상태를 일컫음이다.
이러한 추측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거듭된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사람은 추측을 통하여 지식과 경험을 확충시켜 나갈 뿐이다. 즉 사람은 하늘과 다른 특수한 능동적 기능인 추측 작용을 통해, 경험적 사물에서부터 실증적 근거를 끌어내고 또 증험과 변통을 통하여 현재의 人情과 物理를 적합하게 바꾸어 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이 天으로부터 품수받은 것은, 일단의 神氣와 氣가 통하는 여러 구멍(諸竅) 및 四肢로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뿐 달리 다른 것은 없다. 어릴때부터 장성하도록 얻은 바 지각과 사용한 바 추측은 모두 스스로 자신이 얻은 것이지, 天이 내게 준 것이 아니다. 善과 不善은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

혜강에게서 하늘의 운화는 앎이나 관념의 형식 속에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추측이 궁리의 인식 단계를 넘어서 사물에 접하여 미루고 증험을 통해 헤아려서 변통하는 데까지 나아가며, 또 구체적 현실에 맞게 변화되고 적용될 때라야만 하늘의 운화에 닿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운화를 들어서 아는 것은 운화를 보고서 깨닫는 것보다 못하고, 운화를 말하며 밝히는 것은 운화를 실행하여 증험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운화와 추측이 만나고 소통하고 변통하는 곳은 결국 삶의 구체적 조건, 즉 생활 세계 속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변통의 장에서 사람들 속의 작은 하늘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4. 사람들 속의 운화, 變通

 

추측은 내 몸의 신체적 동기와 사물과의 경험적 동기의 다양한 연관 속에서 운화의 본성을 결합시킨다. 즉 내 몸의 신기와 사물의 물리가 결합되면서 운화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증험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과의 만남에 노출되면서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나아간다. 혜강은 추측과 운화는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 속의 소통이라는 실현의 차원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곧 추측과 변통의 결절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결국 통하지 못한 사람은 다만 자기 몸이 있는 것만을 알거나, 아니면 자기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추측과 객관적인 변통이 본질적으로 내 몸을 통해 밀접하게 세계와 연관되어 있음은, 그 양자가 상호독립된 실체로서 관계하는 이원적 구조로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식과 실현의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나의 추측은 사람들 사이에서 맥락과 조리를 찾는 변통을 통하여 하늘의 객관적인 운화를 지향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혜강은 "몸은 홀로 나 한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億兆의 몸이 있고, 마음은 홀로 나 한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억조의 마음이 있기에, 억조의 마음을 통합해서 中正을 뽑아 내어 마음의 법을 삼고, 억조의 몸을 통합해서 人道를 집대성하여 수신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
결국 사람들과의 변통 속에서 비로소 나의 추측은 활동적이 된다. 변통없이는 인간의 추측구조가 제대로 밝혀질 수 없고, 추측없이는 변통이 의미원천을 드러낼 수도 없다. 추측은 변통의 구조 속에서만 완전한 체험이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의 감각기관을 떠나서 이루어진 추측의 사유가 관념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변통의 소통구조 속에 들어서지 못한 추측 역시 추상의 담 속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다.
혜강은 "만물에 유행하는 이치는 자연의 법칙이 있으므로 더하거나 덜할 수 없으나, 추측하여 생긴 이치에는 상황에 따라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느냐 하는 차이가 있으므로 변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변통의 공부야말로 추측의 이치를 드러내고 증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의 몸에 신기를 생성하는 요소는 네 가지이니, 첫째는 하늘, 둘째는 토질, 셋째는 부모의 정혈, 넷째는 듣고 보아서 익히고 물든 것이다. 앞의 세 조목은 이미 품수한 바가 있는 것이므로 소급하여 고칠 수 없으나, 뒤의 한 조목은 실로 변통하는 공부인 것이다."
여기서 하늘, 토질, 부모의 정혈은 생득적이고 불변적인 신기의 體라면, 듣고 보아서 익히고 물들이는 것은 후득적이고 가변적인 신기의 用이다. 변통의 공부에서 주목되는 지점은 가변적인 바로 그 지점이다. 시시로 변하면서 새롭게 다가오고, 개별적이고도 연관적인 그 지점이야말로, 듣고 보고 익히고 물들인 내 몸의 습염과 경험과 추측을 사람들 속에 드러내고 소통시키는 변통의 장인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소통되고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사물을 제대로 추측하고 변통하지 못하는 잘못됨과 어긋남만을 되풀이하는 사람에 대해 혜강은 단언한다. "그들은 지난날의 습염에만 집착하고 자기의 익힌바만 고집하면서, 결국 고루하고 둔하며 억지고집만 부리는 사람이 되거나, 멍청하여 어리석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거나, 당연한 것을 버리고 이상한 것만 좋아해서 索隱行怪하는 사람이 되고야 만다"고.
혜강이 변통이라는 맥락 속에 개인적인 추측을 들이대는 이유는 내 몸의 주관성을 사람들 속의 보편성 속에 이입시켜 소통시킴으로써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남이 통하는 것을 내가 통하지 못하면, 나의 신기에 편벽되고 막힌 것이 있는 것을 증험할 수 있으니, 통하느냐 통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제 마음대로 단정하거나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혜강이 말하는 변통이란 삶의 복잡한 이치를, 그것이 형성되고 소통되는 삶의 문맥 안에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선험적 의식을 모든 의미와 본질의 원천으로 파악하면서 무형의 이치에만 매몰되는 성리학적 관념론에 대해, 객관화된 경험과 추측과 변통의 도리를 삶의 이치의 출발점으로 삼는 혜강 특유의 반발이기도 하다.

"方所도 없고 형체도 없어 만세토록 궁구해도 증험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해 있더라도 논하지 말라."

결국 혜강은 선험적 性理의 궁리, 心의 순수직관, 無에 대한 집착 등은 '우주를 통관하지 못하고 자기의 익힌 바만 고집하여 지키면서' 사람의 인식을 끝없이 삶에서 이반시키는 틈새만을 확대시켰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통풍되지 못하는 앎과 삶, 접속회로를 잃어버리고 겉도는 이론과 실천'들에 빠져 성실이 아닌 허탄의 경지를 헤메고 있다고 신랄히 비판한다.

"성실의 精華와 虛誕의 경지는 한계를 서로 접하고 있으니... 만약 통하는 것의 한계를 넘어 지나치면 허탄의 경지로 들어간다... 가까운데 있는 것으로는 형질의 내부에 있다는 所以然者요, 밖에 있는 것으로는 천하사람의 귀와 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것을 통할 수 없는 것이라 이른다. 이런 것은 혹 스스로 통했다고 말하더라도 누가 그 통한 것을 믿겠는가?"

혜강은 학문이 토구하는 삶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고 믿기 때문에, 인식론적 선험의 이치가 아닌 삶 속에서의 해석학적 이치들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것은 단답의 엄밀성이 아닌 다답의 엄숙성이, 선험지의 명증성이 아닌 일상의 애매성이 세상과 접점에서 비틀거리며 실존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인간의 존재사를 더 정직하게 드러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강은 유폐된 자의식에 의해 수행되는 궁리와 치양지의 탐구방식이 아닌, 만남과 사귐과 대화의 변통 속에 들어서고 긴장과 강박과 차이를 버텨내며, 화이부동의 장벽 안에서 성숙의 지평을 지양해 가는 것이다.

"오직 보고 듣고 열력하여 익힌 것과 얻은 것에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르므로 남이 통한 것을 혹 나는 능히 통하지 못한 것도 있고 내가 통한 것을 남이 혹 능히 통하지 못한 것도 있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남이 통한 것을 거둬 모아서 나의 통하지 못한 것을 통하고, 내가 통한 것을 널리 알려서 남이 통하지 못하는 것을 통하게 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변통은 시시각각 삶의 복잡성, 애매성, 엄숙성 속에서 간단없이 흔들리며 사람의 무늬와 시간의 굴곡들을 정직하게 그려가는 지금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주목하면서, 맥락을 살피고, 事理를 살피며, 관습과 편견을 과감히 거부하고, 이 땅의 一理를 찾아가는 행위이다.
"진정한 변통이란 먼저 시세의 같지 않음을 살피고 다음으로 사물의 마땅한 바를 살펴서 조치하되 옛사람들과 같거나 다른 것에 구애되지 말고 오직 현재의 人情과 物理를 적합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변통이란 사람사이의 가장 적합한 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하고, 해야할 바를 하게 하는 적실한 상황을 찾아가는 요동이다. 변통의 道는 천지의 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사이의 일에서 두루 미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변통에 익숙한 사람은 순서에 따라 행동하여 동작에 여유가 있지만 변통에 서툰 사람은 행동이 불안하고 동작이   스럽다." 변통에 능한 사람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인 실천지(phronesis)가 있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에 관해서 잘 살필 수 있는 사람이며, 또 전체적으로 좋은 생활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훌륭하게 살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개인의 이상과 사회적 소통이라는 두 삶의 양상을 조화하는 변통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서로의 쓰임 속에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사람이 모두 서로 쓰이게 된 뒤에야 人道가 밝아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섬길 수 있는 길을 이루어 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행해질 수 있도록 행동하고, 임금은 신하가 충성할 수 있도록 정치를 베풀고, 신하는 임금이 의롭게 할 수 있도록 도모함을 꾀하고, 남편은 아내가 순종할 수 있도록 행동하고, 아내는 남편이 온화하도록 행동하고, 어른은 아이가 공손할 수 있도록 행동하고, 벗은 서로 믿을 수 있도록 행동하여야 하되,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이 믿도록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이에 나를 믿게 되는 것이다."

변통이 추측으로부터 연역되고 추측이 변통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은 논리적인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변통이 추측에서 도출되고 추측이 변통 속에 실현되는 변증법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사유의 터를 깊고 넓게 가꾸어가는 지난한 과정일 따름이다. "오직 보고 들은 경험의 많고 적음과 멀고 가까움에 따라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은 차등이 있는 것이며, 내 몸의 감각기관이 진취하는 정도에 따라 민첩하게 통달하여 기미를 살피고 나타나지 않은 것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순환 과정은 먼저 내 형체에서부터 근원하며 사물에서 익혀지고 다시 사람들 속에 드러나면서 확장되어간다.

"열력하고 경험하며 추이하고 변통하는 것이 모두 형체에 근원하여 사물에서 끝나는 것이니, 만약 발용의 근원을 닦아 밝히지 아니하면 어찌 발용의 끝을 정돈할 수 있겠는가?"

경험하고 추측하고 변통하며 하늘의 운화를 터득해가는 이치는 언제나 내 몸이 시작이요 인정과 물리를 터득함이 그 끝이다. 그리하여 혜강은 "허망이나 邪曲을 통한 사람은 제규제촉을 通의 門路로 삼지 아니하고, 또 인정과 물리를 통하는 것의 증험할 바탕으로 삼지 않으니, 이로써 이미 그 근원과 끝을 잃어버렸으며, 다만 허망한 그림자와 환상만을 일삼으며 마땅히 통하지 않아야 할 것을 잘못 통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의 추측이 개입하여 드러나는 변통은 사고하는 자아의 주관성의 영역과 분리할 수 없는 상호관계 안에 있다. 이런 이유로 변통은 필연적으로 주체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은 사람들과의 소통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리학이 주장하는 주관적 자아를 거부하는 객관적인 자아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곧 사람들 속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아인 것이다.

"나의 나날의 체험과 시도를 미루어서 인물의 나날의 체험과 시도를 견주어 보며 내가 아는 것은 누적하고 모르는 것은 단련해서 人物이 체험했거나 체험하지 못한 것에 나아가 質正하되, 한갓 내가 알고 알지 못하는 것만 가지고 나의 알고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말며, 그렇다고 人物의 알고 알지 못하는 것으로도 여기지 말 것이니, 이것이 곧 眞知이다. 이미 그것을 알아 지나친 것은 물러나게 하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나아가게 하는 것이 곧 변통이다."
眞知를 찾아 내 몸이 직접 변통해가는 과정은 곧 내 몸의 氣의 운화이다. 이러한 진지를 體認하였는가 하지 못하였는가는 마치 "子莫이 中을 잡듯이 지키고만 있으면 이는 운화하는 氣는 알지 못하는 것이니 설사 일을 성사시킬 수 있더라도 法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혜강의 말처럼, 오직 반복하여 논난하고 적절하게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데에서만 보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통한 眞知가 "밖에서 쓰일 때, 밝게 아는 곳에는 힘이 생기고 專一하게 힘쓰는 곳에는 知가 통달하는 것이라, 이것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전일하게 하면, 하늘과 사람의 大道에 아무런 결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5. 맺는 말

 

혜강의 인간이해는 언제나 天과 人 그리고 物의 연관구조 속에서 규정된다. 그의 독특한 사상이 드러나는 지점은 天道와 人道 사이에 사물경험의 공간을 부각시키면서, 하늘의 이치를 사람들 사이의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공간 속에서 확보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天-物-人', '天理-物理-事理', '自然-工夫-當然', '天道-推測-人道'등의 세 축의 중심에, 경험적, 구체적, 실천적, 가변적인, 주체적, 능동적인 '사람의 삶'이 자리잡는 것을 말한다. 혜강의 物理에 바탕한 구체적인 인간됨의 사유는 太極과 理氣論으로 일관해 온 성리학의 관념적 사유를 지양하면서, 사람에 대한 논의를 '저 하늘 속의 본질'이 아닌 '내 삶 속의 만남'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혜강에 따르면 하늘과 사람은 運化하는 氣를 통해 하나이지만 그 형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자연과 당연으로 구분된다. 즉 하늘은 스스로 그러한 自然일 뿐이며, 사람의 當然은 추측과 변통의 공부로써 자연에 승순함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혜강에게 있어 사람이란 추측과 변통의 공부로써 하늘의 운화를 터득해가는 존재이며, 이 '工夫'야말로 하늘과 사람이 같아질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혜강이 '자연과 당연'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늘의 자연성, 객관성, 보편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이기 보다, 오히려 사람의 당연성, 주체성, 구체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운화와 추측과 변통'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혜강이 추구하고 있는 天人之宜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天과 人의 같고 다름에 관한 혜강의 논지는, 추측과 변통의 객관성과 적실성을 통하여 사람의 윤리를 하늘의 운화 속에 구현하려는 天人一致의 강한 의지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늘과 사람의 다른 점은 결국 인간됨의 특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이란 공부하는 존재, 성숙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에게서 사람들 속으로 또 자연 속으로 나아가며 확장되고 심화되는 성숙은, 오직 거듭되는 사람의 추측과 변통의 과정을 통하여 드러날 뿐이다. 혜강이 생각하는 天人之宜, 즉 대기운화에 따르는 사람의 공부, 天道에 바탕한 人道는 다른데 있지 않다. 하늘[자연]이 말없이 활동운화하며 새롭게 생명을 이어가는 것처럼, 사람[당연]도 끊임없이 추측하고, 또 사람들 속에서 변통의 道를 찾으며 성숙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란 활동운화하는 氣처럼 늘 변화하고 새롭게 바뀌어가는 생명의 흐름이며, 그것은 또한 성숙의 과정이다. 대상과 경험과 나와 세계의 해석학적 순환의 고리는 마치 천지자연의 운행의 고리처럼 끝없이 흐르며 우리는 그 삶 속에서 다만 공부하고 살아가며 성숙해갈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혜강의 언어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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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terpretation of Haegang's Human Understanding in his Kihak

­Seong, Ji-yeon­

 

This paper is on the difference and sameness of the Heaven and the Human in the thought of Haegangs Kihak. Haegang says the Heaven and the Human are same in the context of difference, but different in the context of sameness. I want to search for the ontological, cosmological reasons why the Heaven and the Human are same and different. First of all, we should ask what it means when he mentions the concepts, difference and sameness.
We could find out some new original comments on the old traditions of those in the Kihak of Haegang. In the face of these problems, Haegang manipulates through the complex situations with three main concepts, Un-wha, Chu-chuk, Byun-tong.
According to Haegang, the Heaven and the Human are the one and the Same in the Ki of streaming Unwha. But the Heaven could achieves itself automatically(Jayun) in this cosmos, but Human should achieve himself or herself in the way of ritual, Ye, (Dangyun) in this world. Haegang says the latter ought to try to conform itself to the former by way of Kungfu, namely realizing Chu-chuk and Byun-tong.
In Haegans's view, the differenciation of the Heaven and the Human is needed not for stressing the universality of the Heaven but for accentuating for the activity of Human being. We could conclude that in his Kihak, Haegang wanted to realize the Human Ethics perfectly in the level of heavenly Unwha. For this purpose, he discussed Chu-chuk and Byun-tong in the diverse contexts of the sameness and difference of the Heaven and the Human.
※ Key word : Heaven(天), Human(人), Jayun(自然), Dangyun(當然), Un-wha(運化), Chu-chuk(推測), Byun-tong(變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