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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도(參禪道)~♡/♣ 참선학(參禪學)

명상(瞑想: Meditation)

by 윈도아인~♡ 2012. 3. 17.

명상(瞑想: Meditation)

 

명상(瞑想)이라는 말은 글자에서 의미하듯이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瞑)이라는 글자는 눈을 감아서 어두운 것을 의미한다. 즉 공간이 어둡다는 것이 아니고 눈을 감았기 때문에 눈을 감은 주체가 어두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명상은 평소에 생활할 때 접했던 눈에 보이는 것을 떠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또는 상태로 자기를 인도하여 어느 한 가지에 대하여 고요히 생각에 이르는 것을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구적인 명상은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란 말이 가리키고 있듯이 <깊이 생각하다.>, <계획한다.>, <묵묵히 생각한다.> 등으로 여겨지고 있다. 서구에서 개화한 기독교의 묵상기도는 서구의 명상의 한 형태이다.

보편적인 명상의 의미는 모든 생각과 의식의 기초는 고요한 내면의식이며 명상을 통하여 순수한 내면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명상이 발전한 동양적인 명상은 고요히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끊는데 까지 심화시켰다. 요가의 최고의 경지인 삼매(三昧)나 불교의 선(禪)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명상의 기원과 발전

 

명상의 기원은 인간의 시작과 함께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시작은 그다지 인간에게 유리하지 않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원시적인 종교가 시작되었으며 종교의 행위는 곧 완전하지 않은 인간의 자각이 있은 후에 하늘에 의지하고 하늘 또는 신(神)에게 인간의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이 명상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명상이 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상의 발전은 동 ‧ 서양이 다르게 발전하였다. 현대의 첨단 과학의 발전을 이끈 서구는 동양에 비해서 명상이 다양하게 발전하지 않았다. 서구의 명상은 서구의 정신문화를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의하여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형태가 기독교의 기도(祈禱)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곧 서구식의 명상이다.

한편 동양은 명상의 시작이 서양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발생과 같이하였지만 그 전개와 발전과정이 서양과는 다르다. 동양에서의 명상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여러 형태의 명상의 방법과 형식이 존재하게 되어 물질 중심의 문화를 이룬 서양이 물질문명의 취약점과 피해를 정신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한 동양에서 다시 말하면 명상에서 보완하려고 하는 현상이 최근에 일어나고 잇는데 그것이 웰빙 패러다임이다. 동양에서 명상을 발전시킨 주체는 인도에서 발생한 요가와 불교, 그리고 유교와 도교이다.

 

  (1) 요가와 불교

 

요가는 인간이 신(神)과 합일(合一), 즉 신과 같아지려는 훈련체계라고 할 수 있고, 그 훈련체계가 곧 명상이다. 현대의 스트레칭, 필라테스, 그리고 동양의 도인법 등에 많은 영향을 준 요가의 몸 움직임의 형태인 아사나(Asana)도 명상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요가 명상의 최고의 경지를 삼매(三昧)라고 하는 것에서도 요가는 하나의 명상 체계인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는 그 대상 신(神)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이 깨달음을 통해서 역설적(逆說的) 완전함인 공(空)에 이르려는 것인데 그 수행(修行)의 한 형태가 선(禪)이고, 바로 이것이 불교의 명상을 의미한다. 요가와 불교에서 발전한 여러 형태의 명상은 현대인의 심인성(心因性) 질환의 원인인 스트레스 치료에 많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심리학자와 의학계에서 임상적인 보고가 되고 있다.

 

  (2) 유교(儒敎)

 

유교는 동양 정신문화를 이끌어온 유불(儒彿道)의 삼교(三校)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발생이 공자(孔子)로부터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공자 당시의 시대가 춘추전국시대이다. 많은 나라들이 서로 다투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당시 중국사회에 대하여 정치적인 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상이 바로 유교(儒敎)가 태동한 실질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교는 인(仁)과 예(禮)를 중심으로 하늘에서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本性)을 지키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유교의 명상은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유교 명상의 특징은 정좌(靜坐)이다. 인간이 칠정(七情)에 휘둘리지 않도록 고요하게 바로 앉아 몸의 내면과 외면을 바로잡아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본성(本性)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퇴계 이황은 유교의 명상 형태인 정좌(靜坐)를 평생 수련하여 좌탈입망(坐脫入亡)으로 유명한데 곧 앉아서 임종한 것으로 유명하다. 퇴계는 유교 명상의 형태인 정좌(靜坐)를 평생 수련하여 일상의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수련의 전문가도 이루기 어렵다는 좌탈입망(坐脫入亡)한 것이다.

 

  (3) 도교(道敎)

 

도교는 인간이 신(神)의 경지에 이르는 심신(心身)의 완전함을 목적으로 하는 양생(養生) 종교(宗敎)이다. 도교의 명상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하였는데 도교의 명상은 인간이 본래의 완전함, 즉 선천(先天)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하여 수행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 명상의 특징은 몸의 동작과 자세에 호흡과 의식을 합하여 수행함으로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교는 인체를 정(精), 기(氣), 신(神)의 세 가지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기론(氣論)적 우주관과 신체관의 사상은 동양의 생리학과 의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동양의 대표적인 의학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이 도교의 이러한 우주관과 인체관의 영향을 받았다. 도교 명상의 특징은 심신의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4) 기독교의 기도(祈禱)와 명상

 

기도는 묵상(黙想 : meditation)의 형태를 취하는 기도와 관상(觀想 ; contemplation)의 형태를 취하는 기도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는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묵상으로부터 관상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관상으로부터 묵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묵상기도는 침묵 가운데 묵상하는 대상과 내용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머리속에서 깨닫고 확인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머리로 확인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고 듣고 동참하는 것이다. 이들 둘은 모두 정신적인 활동이지만, 깊이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묵상은 정신 집중의 지적(知的)인 면이 강하나 관상은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지적인 것을 넘어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을 확연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묵상이 관상으로 이어지고, 관상이 묵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비근한 예로서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과 사귄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을 알게 되면 그가 좋아지고, 좋아지면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된다. 또한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면 서로 좋아지게 되고, 다시 또 서로 이해하고 잘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도(祈禱)에 있어서는 무엇을 묵상하느냐 또는 무엇을 관상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묵상을 하거나 관상을 하는 대상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묵상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그러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묵상기도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진리와 내용을 음미(吟味)한다. 말에 담겨있는 참 뜻과, 그 진리를 추구하면서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 과정을 통해서 성경 안에 담겨져 있는 진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인격 안에 내면(內面)화되어 그 진리가 인격화(人格化)된다. 관상기도는 성서를 중심으로 해서 성서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대면함으로서 마음의 눈으로 진리를 보고, 그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도 같이 참여하여 하나님과 대면하고, 말씀을 드리고, 위로를 받고, 같이 행동하는 내적 경험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하나하나의 신비(神秘), 곧 영보(靈寶), 갱생(更生), 탄생(誕生), 치유(治癒), 가르침, 수난(受難), 부활(復活), 발현(發顯), 파견(派遣) 등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여,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이다.

 

2) 명상의 효과

 

명상은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이롭게 한다. 명상은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정신의 안정을 가져와 심리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정신이 안정되고 심리상태가 조화되면 생리대사가 원활해지고 생체 에너지의 활동이 정체가 없이 온 몸을 조절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그 기능이 안정된다. 많은 학자들은 명상이 자율신경의 기능에 영향을 주어 자율신경이 담당하는 심장의 활동과 항상성의 유지, 그리고 심리적인 안정에 이르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명상의 효과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에 일어나는 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일어나는 효과다. 명상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육신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선 몸이 유연해지면서 호흡이 안정된다. 피로가 훨씬 덜해지고 소화가 잘 된다. 잠을 편히 자게 되고 배변이 원활해진다. 따라서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으며 병에 걸려도 곧 회복된다. 이어서 마음에도 좋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리적인 안정과 함께 집중력이 높아진다. 사물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문제 해결 능력이 생기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감이 생겨 다투는 일이 현저히 없어진다. 매사에 긍정적이 되며 모든 일에 적극성을 가지고 임하게 된다. 특히 사고가 낙관적으로 바뀐다는 것이 큰 특성이다.

 

  (1) 명상의 구체적 효과 5가지

 

첫째는 체질이 강화된다. 호흡이 깊어지고 노폐물배출이 원활히 이루어짐으로  생리기능이 왕성해진다. 자연히 감기나 소화불량은 물론,  각종 병들을 이기는 힘(면역력)이 생긴다.

 

둘째는 척추와 관절이 균형이 잡히므로 신경통이나 견비통 요통 관절통 같은 귀찮은 증상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셋째, 처진 근육들이 활성화되어 탄력 있는 몸매가 되고 피부가 맑고 깨끗해져 언제나 활력과 매력이 넘치게 된다.

 

넷째는 정신의 조화로 늘 맑은 정신이 유지되고 주위와의 친화력이 높아지고 잠재능력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로 높은 의식의 소유자가 되어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 여유 있는 삶이 된다.

 

  (2) 현대의학의 임상적 효과

 

    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명상이 고혈압·심장병 등 신체적 질환까지도 치료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나 화병 등 마음에서 기인하는 심인성(心因性) 질환이 늘면서 서양의학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명상이 뜨고 있는 것이다.

 

    ② 절이나 산속에서 개인적인 수양차원으로 머물던 명상이 이제는 대체요법 중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명상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병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③ 강남성모병원 라이프스타일센터는 최근에 명상을 도입하여 현재 2기 과정이 끝난 상태다. 메타인지행동치료연구소(서울), 맑은 마음 정신과 병원(대전) 등도 명상을 인지행동치료에 접목시켜 사용하고 있다. 상계백병원이나 분당차병원 정신과에서도 시도된 적이 있다.

 

    ④ 서울대병원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명상은 몸을 이완시키고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알파파를 증가시키며 나중에는 알파파보다 더 느린 세타파가 나온다”고 하며 “뇌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활성화시켜 심장과 두뇌의 기능도 촉진시킨다”는 것이 임상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⑤ 이들 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는 명상은 미국 매사추세츠의대 존 카밧진 박사가 개발한 ‘마음챙김 명상(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이다. 명상을 과학화한 최초의 임상 프로그램으로 현재 미국 270여개 병원에서 행해지고 있다. 화두로 둘러 쌓인 선(禪) 명상이나 불교식 위빠사나 명상에 비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 얼마든지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 마음챙김 명상의 장점이다. 초기에는 ‘스트레스 해독제’로 시작됐으나 최근에는 고혈압·심장병, 통증 완화, 면역력 향상, 항암 효과 등 각종 질환에 대한 보조적 치료 효과에 관한 연구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⑥ 명상이 고혈압과 같은 심혈관질환에 효과적이라는 연구는 외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뤄진 바 있다.  한림대 의대 천연의학연구소 송동근 교수팀의 2005년 연구에 따르면 명상수련을 몇 년간 해 온 20명의 혈액을 조사해 본 결과 혈관을 이완시키는 작용을 하는 일산화질소(NO)의 농도가 일반인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⑦ 최근에는 명상이 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보고되고 있다. 캐나다 캘커리대 칼슨박사는 유방암과 전립선암 환자 58명에게 마음챙김 명상을 하게 한 결과 인터페론 감마, 인터루킨10과 같은 암환자를 우울하게 하는 효소를 감소시킨 반면, 인터루킨4와 같이 암세포의 성장을 늦추는 효소를 3배나 증가시켰다.

 

    ⑧ 명상은 우리 몸의 감각 메커니즘을 조절한다. 우리의 몸은 모든 감각이 통합된 시스템으로 이것이 조화롭게 균형 잡혀 움직여질 때 평화롭고 최대의 기능이 발휘된다. 몸의 구성단위인 수십조의 세포는 살아 있는 감각 단위로서 각기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세포들의 의식을 의도적인 지각활동을 통해 일깨우고 서로서로를 연결시켜 순수의식으로 고취하는 것이 명상이다.

 

3) 수련과 명상

 

명상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부단히 개발해 왔으며 다양한 수단들을 생겨나게 했고 그것의 정점이 명상이다. 효과적인 명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명상에 들어가는 방법들을 시작하기 전에 명상하는 자, 즉 자기 자신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요소들은 크게 셋이 있다. 우선 육신이 있고 숨(호흡)이 있으며 마음(정신)이 있다. 인간 존재의 작용은 이 세 가지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벗어난 인간세계는 있을 수 없으며 아울러 이것을 벗어난 명상 역시 있을 수 없다. 명상은 그 세 가지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그것들(움직임, 호흡, 생각)이 우리를 진리(眞理)로 이끄는 견인차이다.

명상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명상이 마음, 정신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명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살아있는 주체로서의 몸, 즉 인간의 완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구조적 형상인 육신이 바로서지 않고, 허약하거나 척추가 심하게 틀어졌거나 한 상태에서 마음의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마음이 머무르고 있는 육신이 바르지 않고 심하게 틀어져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효과적이고 진정한 명상에 이르려면 육신과 마음을 바로세우는 수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명상에서의 가장 보편적인 자세는 정좌(靜坐)이다. 가장 높은 명상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신과 마음이 상호 협력해야 한다. 이 협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수련이다.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깊은 명상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바르지 않은 자세로 인하여 시간이 지나면 다리에 쥐가 나고 허리의 통증이 생기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육신의 틀어짐과 고통이 명상을 가로 막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대개 명상의 깊은 경지를 느껴보지 못하고 명상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육신의 수련이 안 된 상태에서 생각만으로 깊은 명상에 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의 깊은 통찰에 이를 수 있고 전신의 건강에 이르고자 한다면 장시간 바로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수련의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가장 바른 자세가 가장 안정적이다.

 

깊은 명상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마음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육신의 상태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명상은 행주좌와(行走坐臥)의 어느 자세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걷고 바로 달리고 바로 서고, 바로 앉고 바로 눕는 수련은 필수적이다. 절에 있는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이 바로 앉아 있는 모범적 자세이다. 우리는 그 자세를 통하여 석가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오랜 시간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때 부처의 앉은 자세가 바로 칠지좌법(七支坐法)46)의 규정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자세이다. 그것이 지금의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이다. 우리가 보통 수련을 하거나 수련 지도를 할 때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결가부좌는 가장 바르고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좌법이다. 결가부좌를 제외하고는 어떤 좌법으로도 몇 시간을 육신의 고통이 없이 계속해서 앉아 잇을 수 없다. 물론 결가부좌도 고된 수련을 거쳐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결가부좌가 안 된다고 반가부좌를 하거나 다른 좌법을 하거나 권하는 것은 궁극적인 명상의 경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선 자세도 입식 참장공(站樁功)의 완전한 자세를 수련해야 하며, 걷는 것과 눕는 것도 수련에 의하여 그 자세의 완성을 이루면서 명상에 임해야 한다.

 

  (2) 자세와 호흡, 그리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궁극적인 명상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세와 호흡, 그리고 의식, 즉 마음이 하나로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한다. 자세에 대한 수련을 할 때와 명상의 상태에서 자세는 같아야 한다. 또 흡흡 수련을 할 때와 명상 시의 호흡이 같아야 한다. 결국 가장 바람직한 명상의 상태는 자세와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궁극적인 명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자세와 호흡도 완전한 수련의 경지에 이른 때이다. 명상의 정도가 70%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자세와 호흡도 역시 같은 수련의 정도에 와 있어야 한다. 생각만 바로 하고 생각만 깊이 한다고 깊은 명상의 경지라고 할 수 없다. 명상의 기본적 요소인 이 세 가지가 무의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잇도록 끊임없이 수련해야 한다.

 

  (3) 호흡과 명상

 

"빛나는 경험, 이 경험은 숨을 마시고 내뿜는 두 호흡 사이에서 시작된다

숨이 들어왔다가 나가기 직전, 바로 그 곳에 축복의 근원이 있다."

 

이것은 쉬바의 말이다. 호흡이 들어올 때에 주시하라. 그 호흡이 나가기 직전, 한 순간 또는 찰라지간에 호흡이 정지하는 때가 있다. 들숨이 있고 나면 찰라지간 호흡의 정지상태가 있은 다음 날숨이 있다. 숨을 내뿜고 나면 호흡의 정지상태가 있고 그 다음에 다시 호흡이 들어온다. 숨이 나가거나 들어오기 직전, 거기에 호흡이 정지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깨달음이 가능하다. 숨을 쉬고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라. 숨 쉬지 않을 때 그대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호흡이 정지하는 이 순간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그대는 이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

들숨은 탄생이고 날숨은 죽음이다. 날숨은 죽음과 동일하고 들숨은 삶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숨을 한번 내뿜고 들이마실 때마다 그대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다는 것이다. 이 들숨과 날숨 사이의 간격은 매우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 간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그대는 호흡이 나가는 것을 알고 호흡이 들어가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들숨과 날숨 사이의 간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 명상법을 해보라. 돌연 그대는 호흡이 정지하는 그 지점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대에게 덧붙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이미 거기에 있다. 다만 의식의 각성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명상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호흡이 들어오는 것을 자각하라. 다른 것은 모두 잊고 오로지 호흡이 들어오는 것만 주시하라. 그 호흡의 통로를 주시하라. 이 호흡이 콧구멍에 닿으면 그것을 느껴라. 그 다음 호흡이 안으로 들어가게 하라. 철저하게 자각하는 상태에서 호흡과 함께 움직여라. 호흡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라. 결코 이 호흡을 놓치지 말라. 호흡보다 앞서지도 말고 그 뒤를 따라가지도 말라. 호흡과 똑같이 움직여라.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호흡보다 앞서지도 말 것이며,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가지도 말라. 호흡과 동시에 움직여라. 호흡과 의식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호흡이 들어가면 그와 동시에 그대도 들어간다. 그래야만 들숨과 날숨 사이의 지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호흡과 더불어 안으로 들어가고, 호흡과 더불어 밖으로 나와라. 호흡과 동시에 들어갔다 나오고, 또 들어갔다 나오기를 계속하라. 붓다는 이 명상법을 특히 애용했다. 그래서 이 명상법은 불교의 방편이 되었다. 불교의 전문 용어로 말하면 이 명상법은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깨달음은 이 명상법에 기초한 것이다. 오직 이 명상법에 의해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호흡을 의식하고 자각하는 이 명상법을 계속하면 어느 날엔가 그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 사이의 정지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각성이 예리하고 깊어지면, 그대의 각성이 하나의 괄호 안에 응집되고 통합되면 세상 전체가 그 괄호 밖으로 밀려난다. 오직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만이 그대의 세계이다. 그대의 의식 전체가 호흡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이렇게 되면 그대는 돌연 호흡이 존재하지 않는 정지의 지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매 순간 호흡과 더불어 움직일 때, 더 이상 호흡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돌연 호흡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호흡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다. 호흡이 완전히 정지했다. 그 정지의 순간에 지고의 축복이 있다.

 

4) 요가와 불교 명상 

 

요가는 인도에서 약 5000년 전부터 행해져 왔던 듯하다. 예컨대 그 무렵의 인더스 문명 유물 가운데에 요가 포즈를 취한 신상(神像)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요가와 비슷한 무언가가 그때부터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보다 확실한 요가의 기원은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성립된 베다(Veda)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은 거기에 나타나는 소마(soma) 의식을 요가적 실천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제사 의례를 담당했던 제관들은 환각제의 일종인 소마라는 버섯즙을 마시고서 망아(ecstasy) 상태에 들어가곤 하였다. 이 소마 의식에는 단식이라든가 묵언 따위의 고행과 함께 주문의 암송이라든가 명상의 실천이 포함된다. 바로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발달된 요가의 원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요가의 구체적 용례는 기원전 5-6세기 무렵의 우빠니샤드(Upaniṣad) 문헌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예컨대『카타 우빠니샤드(Kaṭha-Upaniṣad)』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참나(自我, ātmān)를 마차의 주인으로 알고 육체를 마차로 알라. 지성(知性, buddhi)을 마부로 알고 마음(意, manas)을 고삐로 알라. [다섯의] 감각기관을 말로 알고 그것의 대상을 말이 달리는 길로 알라....   다섯 감각기관이 마음과 함께 쉬고 지성도 작용을 하지 않을 때 이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을 확고하게 억제하는 것을 요가(yoga)라고 한다.” 여기에서 요가란 감각기관․마음․지성을 억제하여 동요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외부적 여건에 동요하지 않도록 내면의 심리와 정서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요가의 용례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주변 여건에 스스로를 적응시킬 줄도 알아야 하고, 부정적인 태도와 정서를 다스리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러한 연후라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요가란 마음작용의 가라앉힘이다. 그때 보는 자(觀照者, draṣṭu)는 본래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라는 『요가수뜨라』의 경구 또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요가는 우리에게 어떤 거창한 환경적․물리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변모시킴으로써 ‘마차의 주인’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바로 이점에서 요가와 불교 명상은 일단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1) 사마타와 위빠사나

 

세상살이의 불공평이 자신에게만 억울하게 적용된다고 투정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유 없는 무덤이 없듯이 그러한 주장에도 나름의 설득력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투정이나 불만은 당사자의 태도라든가 마음가짐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사람을 접하게 될 경우, 우리는 일단 진정하고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충고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탐냄이나 애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일컬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정서적 요인들에 더 많이 좌우되곤 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명상이 사마타(止, samatha)이다. 사마타란 부정적 사고와 정서를 가라앉힌 상태로서 ‘평정’ 혹은 ‘고요함’을 일컫는 전문 술어이다. 사마타는 들뜨거나 흥분된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한 여러 기법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쉬는 숨을 일부러 길게 하는 호흡법이 있다. 혹은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떠올려 거기에 몰입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사마타는 ‘마음작용의 가라앉힘’으로 정의되는 요가의 본래적 의미와 통해 있다. 또한 이것은 일정한 집중의 상태를 의미하는 쟈나(禪, 禪定, jhāna)라든가, 모든 산란함이 멈춘 경지인 삼매(三昧, samādhi)까지를 포섭한다. 즉 선정과 삼매는 사마타의 한 단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마타는 내면적인 향상을 위한 첫 걸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적인 동요와 흥분을 다스려야만 올바른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대의 요가 전통은 이러한 사마타에 초점을 모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평정과 고요함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한때 고요해진 마음이라 할지라도 내․외의 여건이 변화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영속적인 평안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새롭게 고안된 명상이 위빠사나(觀, vipassanā)이다. 위빠사나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를 여실하게 관찰한다.”라는 의미이다. 주관적인 바람이나 의지를 배제하고서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위빠사나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종국에는 탐욕과 불만 따위의 부정적인 정서를 근본적으로 내려놓게 된다. 그동안 선망해 왔거나 혹은 혐오해 왔던 그 무엇의 실제를 확인함으로써 탐냄도 성냄도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통해 얻어진 평안의 경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줄 수 있다.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요가 전통에서는 사마타 명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즉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보다는 내면의 고요함에 대한 추구가 우선시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붓다(Buddha)는 위빠사나라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여 보급시켰다. 즉 사마타에 머무르지 않고 진리의 통찰로 나아가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명상 기법을 가르친 것이다. 당연히 이 방법은 일대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종파의 명상 기법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기불교 이후 정형화된 요가학파의 가르침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요가수뜨라』에 나타나는 ‘보는 자(觀照者, draṣṭṛ)’, ‘홀로 머무름(獨存, kaivalya)’, ‘진리를 식별하는 지혜(識別知, viveka-khyāti)’ 등의 비중 있는 용어들에서 위빠사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요가수뜨라』에는 마음(心, citta)이든가 생각(尋, vitarka), 평정(捨, upekṣā) 등과 같이 불교로부터 차용한 술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불교 명상은 요가라는 토양 위에 발생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독특한 측면을 지녔다. 실재(reality)에 대한 통찰만이 내면을 다스리는 영속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요가계 전반에 확산시켰다.

 

  (2) 위빠사나의 원리

 

초기불교의 명상 관련 가르침을 대표하는 경전으로서 『대념처경(大念處經,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 DN. II. 290-315쪽)』이 있다. 거기에 알아차림(知, sampajañña)과 마음지킴(念, sati)이라는 심리적 기능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이들이 위빠사나 명상을 가능케 해주는 두 가지 원리이다. 먼저 알아차림에 대해서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그때그때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용어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알아차림(知)이란 무엇인가....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잠들거나 깨어나거나 이야기할 때나 침묵할 때에도 알아차림으로 행한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다.”   

 

사람들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러저러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대부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순일한 알아차림으로 지내는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밥을 먹는 경우,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찬을 집거나 밥알을 씹는 따위의 동작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서 먹는 시간은 실제로 극히 짧다. 우리는 밥을 먹는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 속에서 보낸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생각 속에서 번뇌와 더불어 먹는다. 다른 일상사도 대체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또한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 휘말린다. 현재를 벗어나는 순간 갖가지 내면의 욕구와 불만과 흐릿함이 몰려든다. “백년을 못 살 인생이 천년 걱정을 하면서 산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현재의 순간을 벗어남으로써 부풀려진 허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직면하게 되면 별 볼일 없는 일들에 지레 겁을 먹고 허둥대는 양상이 다반사이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으로 현재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의도하는 것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습관적인 상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로 사물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자는 의미이다.  

한편 마음지킴(念, sati)이란 정처 없이 과거와 미래로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대상에 붙잡아 두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잡념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실토하곤 한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방황하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서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알아차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알아차림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마음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되돌린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지속하는 것’을 마음지킴이라고 한다면, 다시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는 것’을 알아차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은 위빠사나의 통찰을 이끄는 양 날개 구실을 한다.  

마음지킴의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不忘, saraṇa)’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제반 현상을 무관심하게 버려두지 않고 돌보는 것(ārakkha)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정신차림․ 깨어있음․ 새김․ 마음챙김 등으로도 옮겨진다. 또한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감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즉 눈․ 귀․ 코․ 혀․ 육신․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기민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러한 마음지킴은 여타의 심리적 요인들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탐욕이나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마음이 발생했을 때 그들을 지긋이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누그러져 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스스로를 다스려 나가는 심리적 제어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 차후 살펴보겠지만, 현대 심리치료에서 주목하는 위빠사나 명상의 치료 기제 또한 이 마음지킴에서 찾아진다.  

마음지킴은 위빠사나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불교 명상을 특징짓는 고유의 술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특정한 명상 기법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고, 위빠사나와 사마타 전체를 포섭하는 쓰임을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위빠사나의 전형적인 실천 기법으로 알려진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수행을 풀어 옮기자면 ‘마음지킴을 확립하는 네 가지 명상’이 된다. 또한 호흡에 대한 관찰 명상으로서 ‘입출식념(入出息念, 安般守意, ānāpānasati)’을 옮기자면 ‘들숨․날숨에 의한 마음지킴’이 된다. 이들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명상 기법들로서, 자체 내에 통찰을 의미하는 위빠사나와 평온을 의미하는 사마타의 경지를 포함한다. 즉 이들을 실천해 나가다 보면 마음의 고요함도 얻을 수 있고 사물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지킴은 위빠사나를 가능케 하는 원리인 동시에, 위빠사나와 사마타 전체로 연결되는 이중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념처(四念處)  

 

불교에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네 가지 수행법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기 위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가운데 첫 번째 수행 방법이다. 사념주(四念住)·사의지(四意止)·사념(四念)이라고도 하며, 자신의 몸[身]과 감각[覺]과 마음[心]과 법(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 가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념처(身念處) · 수념처(受念處) · 심념처(心念處) · 법념처(法念處)의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신념처는 자신의 몸과 관련된 현상, 즉 호흡·동작 등을 관찰하여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몸 안팎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육신은 죽어서 썩을 부정(不淨)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수념처는 느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감각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깨달아 음행·자녀·재물 등의 즐겁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실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苦]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심념처란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따라 변화하고 생멸하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욕심이 있다면 욕심이 있는 참뜻을 알고, 욕심이 없다면 욕심이 없는 참뜻을 알아 모든 마음의 참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법념처란 정신적 대상에 대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는 수행법이다. 앞의 세 가지 외에는 자아라고 할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통하여 생기는 번뇌의 생멸에 대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사념처는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같기 때문에 수행자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여 어느 하나만이라도 성취하면 곧 해탈하여 궁극적으로 아라한과를 얻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중생을 깨끗하게 하여 괴로움을 없애고, 나쁜 법을 없애고, 바른 법의 이익을 얻게 하니, 그것이 곧 사념처’라 하였다. 석가모니가 개발한 비파사나 수행법의 한 부류로서, 주로 남방불교 승려들이 사용한다.

 

  (3) 불교 명상의 독특성 

 

요가학파의 명상은 좌법(坐法, āsana)이라든가 조식(調息, prāṇāyāma) 따위의 육체적 수련 단계를 반드시 포함한다. 즉 몸의 긴장을 이완하기 위한 갖가지 포즈들과 함께 호흡의 조절을 통해 심신의 안정을 꾀하는 다양한 기교들을 가르친다. 이들 육체적 조절법은 본격적인 명상 수련의 예비적 과정으로 행해지곤 하였다. 이 방식은 명상을 처음 접하는 초심자나 건강이 허약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행자는 이러한 과정을 걸쳐 선정(禪定, dhyāna)이나 삼매(三昧, samādhi)로 구성된 심리적 단계로 넘어갔다. 이러한 요가학파의 가르침은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불교의 명상은 오로지 정신만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다. 특히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육체를 조작하는 기법에 관한 일체의 언급을 삼간다. 모든 현상에 대해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다만 관찰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입출식념(入出息念, ānāpānasati)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을 길거나 짧게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와중에 내면의 감정과 정서를 왜곡 없이 지각하게 되고, 또한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가르친다. 위빠사나의 와중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게 되면 관찰해야 할 현상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조작 자체에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가 미세하게 스며있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 명상은 예비적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소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심지어 육체적인 통증이라든가 심리적인 갈등과 같은 부정적 현상들마저 통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관찰하는 까닭에 살아가는 전 과정을 명상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통찰만으로도 부정적인 정서와 심리를 다스릴 수 있다. 예컨대 격앙된 감정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오롯하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은 격앙된 상태를 억지로 제거하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관찰 대상으로 삼는 까닭에 가능하다. 즉 감정의 발생과 변화와 소멸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으로써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화들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  

불교 명상은 육체에 대한 조절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까지 보았다. 그것이 새로운 탐냄과 집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 명상은 요가학파 달리 육체적 수련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견 편향된 가르침으로 오해될 여지마저 남긴다. 그러나 불교 명상은 바로 여기에서 요가학파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독특성을 발한다. 육체적인 조절을 전제로 하는 명상은 개인적인 실천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다. 몸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영역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조절을 위주로 하는 명상은 타인과의 관계 문제에서 개방된 특성을 지닌다. 예컨대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는 내면의 심리적 영역에 속한 것임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주력하는 초기불교의 명상은 심신의 건강은 물론 윤리적․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바로 이점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영역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히 전형적인 명상 관련 가르침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불교 명상과 요가학파의 그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심신수련론(2010 1학기 명지대 대학원 바둑학과 강의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