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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도(參禪道)~♡/♣ 참선학(參禪學)

見性의 心性論的 解明

by 윈도아인~♡ 2012. 3. 17.

見性의 心性論的 解明

 

- 祖師禪의 見性論 -

김태완*

Ⅰ. 서론

 

禪功夫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慧能의 門下에서 완성된 祖師禪에서의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見性成佛의 형태이다. 조사선에서 깨달음의 계기는 주로 스승과의 문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꼭 스승과의 문답만이 제자가 견성하는 機緣은 아니고, 事物의 知覺이 깨달음의 기연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조사선에서 見性의 기본적인 모델은 역시 스승과 제자 사이의 禪問答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直指人心과 言下便悟라는 형태이다. '말끝에 깨닫는다'(言下便悟)는 견성체험의 형식은 혜능의 頓悟 체험에서 발단이 되어 조사선의 선체험에서 일반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이것은 조사선에서의 깨달음이 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인 이른바 '禪問答'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그러나 깨달음 즉 見性이라는 사건이 새로운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本性을 自覺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자각이 어떻게 대화나 사물의 知覺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질 수가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혜능 이후의 중국 조사선에서 見性의 機緣이 되는 다양한 경험들을 조사해 보고, 그 경험들이 어떻게 見性으로 연결되는가를 心性論의 측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Ⅱ. 見性의 機緣

 

見性을 촉발하는 機緣은 주로 六根에 의한 知覺이다. 지각을 통한 견성의 다양한 사례들은 禪語錄이나 傳燈錄을 읽어 보면 쉽게 파악할 수가 있지만, 唐代에 번역된 眞言宗의 所依經典이면서도 그 내용이 禪에 관한 것이어서 禪家의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는 {楞嚴經}에서도 지각을 통한 다양한 깨달음의 기연들을 살펴볼 수 있다. {능엄경} 제5권에 기술되어 있는 25인의 보살과 아라한의 깨달음의 체험에 관한 이야기에서 깨달음의 기연들을 보면, 모습·소리·냄새·맛·촉감·통증·호흡·說法 등 六境을 知覺하고 觀察하여 깨달음에 이르거나, 念佛, 持戒, 觀法修行 등을 통하여 깨달음에 다다른다고 한다.
그런데 禪語錄이나 傳燈錄을 살펴 보면, 깨달음의 기연은 모두가 六根을 통한 知覺이고, 念佛이나 持戒나 觀法修行이 깨달음의 기연이 되는 경우는 없다. 예컨대 六祖의 경우처럼 경전 한 구절을 듣고서 문득 見性하기도 하고, 馬祖의 경우처럼 스승의 설명에 의해 바른 眼目이 열리기도 하며, 百丈이나 臨濟의 경우처럼 스승의 直指人心의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깨닫기도 하며, 香嚴의 경우처럼 자연물의 知覺을 통하여 문득 깨닫기도 한다.
이처럼 깨달음의 사례를 조사하여 見性의 機緣들을 형태별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데, 馬祖나 石頭 문하에서 편찬된 語錄 혹은 傳燈錄에 기록된 見性의 사례를 보면 대개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이들은, ①말을 들은 순간에, ②행위를 하거나 본 순간에, ③자연물의 소리를 듣거나 움직임을 본 순간에 문득 깨달았다고 하는 등이다. 이 가운데 善知識의 말을 듣고 깨닫는 ①의 경우가 가장 많다. 그 까닭은 역시 언어가 사람 사이 의사소통의 가장 주요한 수단이기 때문일 것이다.

 

1. 말 끝에 깨달음(言下便悟)

 

선지식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 경우를 '말 끝에 곧 깨닫는다'(言下便悟)라고 한다. '言下便悟'의 깨달음을 말하는 禪法은 육조혜능의 견성 체험에서 시작되어서, 마조와 석두 휘하의 南宗禪으로 계승되었다. 설법과 문답을 통하여 見性을 추구하며, '言下便悟' 또는 '一聞言下頓悟'라는 문구로 견성 체험이 표현되는 頓悟禪法은 {육조단경} 이전의 禪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혜능 이후에 융성한 마조와 석두 문하의 중국 조사선 전통의 선문헌에서는 깨달음이 거의 대부분 '언하변오'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사실은 곧 언하변오의 선법이 혜능에게서, 다시 말하여 혜능의 '언하변오'의 체험에서 始發되었으며, 동시에 혜능 이후 중국 祖師禪의 주요한 하나의 특징이 됨을 나타낸다. 그 예들을 살펴보면, 우선 마조 자신의 開悟의 체험도 역시 言下便悟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마조는 출가하여 처음에는 坐禪看心의 禪定을 닦는 데에 열심이었으나, 懷讓의 가르침에 의하여 禪定을 버리고, 회양과의 問答을 통하여 見性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마조록]에서 大珠慧海·大梅法常·藥山惟儼 등의 깨달음과 [백장록]에서 百丈懷海·여우노인 등의 경우와 [황벽록]에서 裵休의 깨달음과 [임제록]에서 臨濟의 깨달음 등이 言下便悟의 유형에 속한다. {전등록}에서 言下의 견성을 나타내는 일화 가운데, 趙州從 의 경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從 은] 다른 날 南泉에게 물었다.
"무엇이 道입니까?"
남전이 답했다.
"平常心이 道다"
"향하여 갈 수 있습니까?"
"향하려 하면 어긋난다"
"향하려 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道인 줄을 앎니까?"
"도는 알고 알지 못하고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하면 곧 망녕되게 깨닫는 것이고, 알지 못한다 하면 無記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로 의심할 바 없는 道를 통달한다면, 마치 虛空과 같아서 확 터이고 텅 비었으니, 무엇 때문에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하겠는가?"
從 이 이 말에 이치를 깨달았다
2. 행위 끝에 깨달음
한편 스승의 가르침은 學人의 묶인 마음을 풀어주는 說明이나 寸鐵殺人의 한 마디 혹은 格外語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 몸짓 또는 행동 등을 통하여 직접 自性의 작용을 나타내는 것도 있다. 이처럼 직접 자성의 작용을 보여주는 것을 直指人心이라고 하는데, 흔히 고함 지르기[喝], 방망이로 때리기[棒], 이름 부르기, 잡아 밀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자성의 作用을 직접 나타내는 것들로서 直指人心의 行爲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조가 코를 비튼 百丈의 경우·마조의 부르는 소리에 깨달은 亮座主와 汾州無業의 경우·마조에게 걷어차인 洪州水老의 경우·황벽의 몽둥이 세례를 받은 臨濟의 경우·임제에게 빰을 맞은 定上座의 경우 등은 이와 같이 행위에 의한 直指의 사례에 해당한다. 홍주수로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洪州水老가 처음 마조를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로가 막 절을 하는데 마조가 별안간 한 번 걷어찼다. 여기서 수로는 크게 깨닫고 일어나 손을 비비면서 "하하" 웃고 말했다.
"그것 참 신통하다, 신통해. 수많은 三昧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한 터럭 끝에서 그 근원을 알아버렸다"

 

3. 無情의 說法

 

스승의 말이나 행위에 의한 直指人心의 가르침을 통하여 自性의 작용 곧 마음을 파악해내는 외에, 자연물의 소리나 움직임이 機緣이 되어 마음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馬祖가 말하듯이, 有情이든 無情이든 森羅萬象의 모든 현상은 전부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람의 말이나 행위와 마찬가지로 자연물의 모습·소리·움직임을 보고·듣고·느끼는 것들이 모두 마음을 보고·듣고·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森羅萬象이란 모두 마음에서 識으로 知覺되는 六塵境界이므로, 森羅萬象은 바로 識인데, 식은 곧 마음의 識이기 때문에 識을 지각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말과 행위에 의한 直指人心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자연물의 소리와 움직임은 見性의 機緣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선지식의 말과 행위가 아닌 자연물의 소리와 움직임을 無情의 說法이라고 말한다. 무정의 설법에 관해서는 南陽慧忠(?∼775)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또 물었다.
"무엇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慧忠國師가 답했다.
"담·벽·기와 조각이다"
"경전의 말과는 크게 어긋나는군요. {열반경}에 이르기를, '담·벽과 같은 無情을 벗어났기 때문에 佛性이라 한다'라 했는데, 지금 도리어 이것들을 佛心이라 하시니 心과 性이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미혹하면 따로 있지만, 깨닫고 보면 따로 있지 않다"
"경전에 이르기를, '佛性은 항상하고 마음은 無常하다'했는데, 이제 따로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대는 단지 말에만 의존할 뿐 뜻은 모르는구나. 비유하면, 겨울에는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지만 날이 따뜻해지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에는 性이 얼어서 心이 되지만, 중생이 깨달을 때에는 心이 녹아 性이 된다. 만약 無情에는 佛性이 없다고 한다면, 경전에서 三界唯心이라고 말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그대 스스로가 경전을 어긴 것이지 내가 어긴 것이 아니다"
"無情에 心性이 있다면 說法도 할 줄 알겠군요?"
"그들은 활활 타는 불꽃처럼 늘 설법하여 쉴 때가 없다"
三界는 唯心이므로 모든 無情이 法을 설하지만, 그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三界唯心의 佛法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한다. 無情說法의 典據는 {화엄경}의 唯心思想이지만, 이 唯心思想은 또 禪宗에 일관된 기본사상이기도 하다.
無情의 說法에 의하여 깨달은 일화는, {조당집}·{경덕전등록}·{오가어록}의 [ 山錄]과 [洞山錄] 등에 나오는 香嚴志閑의 이야기와 洞山良价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향엄지한은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으며, 동산양개는 물 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깨달았다. 스승에 의한 直指人心의 방법 가운데 흔히 無情物을 언급하거나 활용하는 행위도 無情說法과 같은 취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Ⅲ. 知覺經驗과 見性의 관계

 

앞 절에서 밝힌 견성의 기연들을 다시 살펴보면, 언어·소리·색·신체접촉 등 六根으로 知覺되는(=경험되는) 六境의 세계 모두가 견성의 機緣이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六境 모두가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인데, 육경 모두가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祖師禪의 心性論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祖師의 語錄에서 心性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면, 마조는 "만법이 모두 마음의 법이며 모든 이름은 모두가 마음의 이름"이라고 하였고, 황벽은 "18계의 경험세계가 그대로 한 마음"이라고 하였으며, 임제는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꿰뚫으니,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고,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이야기한다고 하고,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닌다고 한다"라 하고 있다. 따라서 그저 경험되는 모든 것이 다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조는 이것을 두고, "모습을 볼 때 그것은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인데, 그 까닭은 마음은 그 자체가 따로 마음이라는 어떤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의지하여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禪에서 말하는 마음 그 자체는 어떤 정해진 모양이나 위치도 없기 때문에 특정한 무엇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드러나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은 마음이므로, 어떠한 경험을 하든지 그 경험 속에는 마음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말하자면 경험이란 마음의 활동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마음은 본래 정해진 어떤 모양이나 위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경험은 그 주인공이 바로 마음이므로 경험을 통하여 마음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험과 마음은 이름은 다르지만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하여 알려지는 것만을 가지고 마음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경험을 통하여 알려지는 것은 곧 識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識이 곧 마음이긴 하지만, 식만 가지고 마음을 전부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識이란 근본적 마음[性]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마음[相]으로서 모습들의 생멸현상일 뿐이다. 근본적 마음은 늘 그대로이지만 그 작용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마음은 시시각각 바뀌는 無常한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아는 것을 두고 마음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경험에만 빠져 있는 사람을 두고 마음을 알지 못하는 顚倒된 중생이라고 한다. 전도되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경험이 마음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말단적인 것임에도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우리 모두가 경험 즉 마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마음 그 자체를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고 있다(直指人心)고 할 수 있는 경험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경험만을 보고 있을 뿐 마음 그 자체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험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양 없는 근본적 마음[性]은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懷讓은 이와 관련하여 馬祖에게 마음의 눈(心地法眼)으로 道와 무상삼매를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결국 마음은 意識的 경험기관인 이른바 六根을 통하여 識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이 열리어 마음을 보게 되는 것을 일컬어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六根을 통해 意識的으로 경험되는 세계만을 알고 있을 뿐이지만, 깨달은 자(=부처)는 六根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心地法眼)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다.
道는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 마음의 눈을 통하여 본다는 말에 관해서는, 達摩의 著作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唐中期 조사선의 禪法을 논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第五門悟性論}에도 같은 취지의 말이 있다.
무릇 道는 寂滅을 體로 하고, 닦음[修]은 相을 떠남을 宗으로 한다. 그러므로 經에 이르기를, '寂滅이 菩提이니 諸相을 滅하는 까닭이다'라 한다. 부처[佛]는 깨달음[覺]이다. 사람에게 깨닫는 마음이 있어서 菩提의 道를 얻는 까닭에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經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相을 떠남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한다'라 하니, 이것은 相이 곧 無相의 相임을 아는 것이다. 無相은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 오직 지혜로써 알 수 있을 따름이다
寂滅無相인 菩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아는 것이라 한다. 懷讓이 道와 無相三昧는 肉眼이 아니라 마음의 눈(心地法眼)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은, {悟性論}에 따르면 바로 지혜로써 깨닫는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혜의 눈 혹은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相]이 아니라 그러한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근원이 되는 순수한 마음 그 自體를 自覺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을 本體와 作用이라는 구조를 통하여 설명한다면, 우리 앞에 나타나서 경험되는 모든 모습은 전부 마음의 작용이라는 측면에 해당된다. 따라서 모습을 가지고 경험되는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드러나는 모습들이 마음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작용에 의하여 드러나는 모습에만 매여서 작용 그 자체인 마음의 본체, 즉 모든 모습을 작용해 나타내지만 그 자신은 아무 모습도 없는 마음 그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이른바 顚倒된 衆生이다.
스스로는 아무 모습이 없으면서 모든 드러나는 모습의 근원으로서 작용하는 그것을 마음의 본체라고 한다면, 이러한 마음의 본체는 六根으로는 지각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여 마음의 본체를 보는 器官은 제7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이다. 이 마음의 눈은 마음의 본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눈이다. 識이라는 知覺이 主觀과 客觀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마음의 눈이 마음을 알아보는 것은 모습 없는 마음이 스스로를 自覺하는 일이므로 주관과 객관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각활동은 아니다. 自覺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확인하는 것일 따름이다.

Ⅳ. 見性의 心性論的 의미

 

앞에서 마음을 언급하면서, 六根을 통하여 경험되는 드러나는 마음과 육근을 통하여 경험되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드러나는 마음은 곧 六境이라는 경험 내용을 가지는 識이고, 드러나지 않는 마음은 識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깨달음이란 경험으로 드러나는 마음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一心을 이와 같이 경험 가능성을 기준으로, 경험 가능한 마음과 경험 불가능한 마음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것은 禪宗 心性論의 중요한 특징이다. 여기서 경험 가능하다는 것은 곧 相이 있다는 것인데, 선종 심성론에서는 마음을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과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은 生滅하여 無常하다는 특색이 있고,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은 生滅이 없이 恒常한 것이며 머무는 장소도 없으므로 虛空과 같다고 한다. 그리하여 有相의 心은 假有이며 無相의 心이 實相이라고 하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無相의 心인 實相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無相의 心을 性이라 하고, 有相의 心을 相이라 하여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 禪宗의 心性論에서는 일반적이다. 宗密의 {都序}에서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性이고, 인연따라 변하는 것이 相이지만, 性과 相은 모두 一心 위의 뜻[義]임을 알아야 한다. 性과 相을 2宗으로 보고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眞心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心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다만 이것을 八識이라고만 여기고, 八識이 곧 眞心이 因緣에 따른 뜻임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馬鳴菩薩은 一心으로 法을 삼고, 眞如와 生滅의 二門으로 뜻을 삼았던 것이니, {起信論}에 말하기를, "이 마음에 의지하여 大乘의 뜻을 드러내면, 心眞如는 性이요 體이며, 心生滅은 相이요 用이다"라 한 것이다
法은 一心이고, 眞如니 生滅이니 性이니 相이니 하는 것은 一心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말이다. 無相인 性은 不滅이고, 相은 假有로서 生滅하는 것이다. 相은 六根을 통하여 識으로 경험되는 것인 반면, 性은 六根을 통하여 識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心地法眼을 통하여 自覺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心性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見性이 성립하는 메카니즘을 살펴보자.
견성의 機緣이 되는 스승에 의한 直指人心의 행위나 無情의 說法은 앞에서 보았듯이 識이라는 知覺의 경험이다. 다시 말하여 견성의 기연은 相의 측면을 통하여 一心을 지각하는 경험이다. 한편 見性은 性을 파악하는 것인데, 性은 無相이므로 六根을 통한 識의 경험으로 性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識이라는 지각경험인 機緣이 경험자를 見性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문제는 식과 성 사이에는 경험되고 안되고 하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지각경험과 見性의 이러한 차이에, 바로 見性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 까닭에, 直指人心의 가르침이나 無情의 說法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見性을 체험하는 禪者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경험의 측면에서 보기에는 知覺經驗과 見性이 서로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裏面을 뒤집어 보면 이 둘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있다. 그것은 性과 相이 각각 一心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둘의 관계는 不一不二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識으로 相을 경험하는 것도 一心을 경험하는 것이며, 識이 아닌 心地法眼으로 性을 파악하는 것도 一心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識을 통하여 相을 보되 相만 보는 것이 아니라 一心을 알아차린다면, 그 一心의 다른 측면인 性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識으로 相을 보되 相을 相으로 보지 않고 一心으로 본다는 것은, 바로 相을 보면서 동시에 性을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金剛經} [四句偈]의 "만약 諸相을 非相이라고 본다면 곧 如來를 보는 것이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을 가지고 풀이해 보면, 諸相을 非相 즉 性으로 보는 것이 바로 如來를 보는 것 즉 見性이라는 뜻이다. {第五門悟性論}에서도 性을 보는 것과 相을 보는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눈이 色을 볼 때에 색에 오염되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에 소리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모두 解脫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으면 눈이 禪門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귀가 선문이 된다. 묶어서 말하면, 色의 性을 보는 자는 항상 해탈하고, 色의 相을 보는 자는 항상 구속된다.
그러므로 見性이 깨달은 자의 태도라면, 諸相을 그대로 相으로 보는 것 즉 見相은 衆生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처는 見性하고 중생은 見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相을 보면서 동시에 그것을 性으로 볼 때 비로소 一心을 보는 것이고, 性을 보지 못한다면 여전히 하나의 측면인 相만을 볼뿐이므로 완전한 一心을 본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이 識으로 경험할 수 있는 말·소리·몸짓 등을 통하여 直指人心하는 행위도 단순히 識으로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 識을 통하여 識 너머의 一心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圓悟克勤이 깨우친 機緣을 보면, 바로 이 점에서 法演 화상은 [小艶詩]가 法다운 데가 있다고 한 것이다.  悟의 스승인 法演 화상은 어느 날 陳提刑이라는 居士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檀郞이 목소리를 알아주기를 바라서이다.'"
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곁에 모시고 섰다가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제형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을 알아들었을 뿐이다."
"단랑이 목소리를 알아줬으면 하였는데,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면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악!"
원오는 이 말에 갑자기 느낀 바 있어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나래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이것이야말로 그 소리가 아니겠느냐'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印可를 받았다.
'소옥아! 소옥아!'하고 부를 때, 檀郞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그 말이라는 현상이 생겨나는 根源을 파악하는 것이 곧 佛法이라는 스승 法演의 말을 듣고 圓悟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껍질을 깨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앞의 잣나무'라는 公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뜻임을 알려 준 것이고, 그리하여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見性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啄同時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원오가 깨달은 것을 해설해 보면, '소옥아! 소옥아!'하는 말이나 '뜰앞의 잣나무'하는 말이나 '악!'하는 喝의 외침이나 '꼬끼요!'하는 닭의 울음이나 모두 그 相으로 따라가면 제각각 다른 것들이지만, 그 性으로 돌아가면 모두 同一한 一心의 作用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을 듣고 헤아림을 뛰어넘어 一心의 작용과 契合하도록 하는 것이 禪問答에서 스승이 직지인심을 행하는 목적이다. 作用과 契合한다는 것은 곧 見性을 의미한다. 一心은 순수한 작용으로서의 性-곧 淸淨心이다-과 그 작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相-곧 染汚心이다-으로 나누어 말해지는데, 六根으로 知覺되는 相을 따라가지 않고 순수 작용인 性을 파악하는 것이 바로 見性이다. 相으로 보면 모든 경험은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지만 性으로 보면 모두가 同一하다. 그러므로 見性한 입장에서는 세계를 一味平等한 一法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相으로 경험되는 識의 경우에는 六根이라는 主觀이 六境이라는 客觀을 認識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識의 경험은 主觀과 客觀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一心의 파악이란 識을 넘어서 相이 없는 性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主觀과 客觀이라는 인식구조를 말하기가 곤란하다. 우선 性은 無相으로서 一味平等이므로 主客으로 나눌 수가 없고, 억지로 나누어 본다고 하더라도 認識者도 性이고 認識對象도 역시 性이므로 主客의 二元的 인식구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見性은 곧 自己確認이라고 해야 한다. 이 까닭에 見性은 廻光返照라고 하는 것이고, 性을 인식한다고 하지 않고, 性에 契合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相과 性을 동시에 보아서 전체로서의 一心을 통찰하는 것을 일러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相의 세계인 六塵境界 속에 있더라도 동시에 六塵境界를 벗어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世間 속에 있으면서 世間을 벗어나 구속받지 않는 것을 일러 解脫이라고 한다. 따라서 깨달아 해탈한다는 것은 결국 一心을 통찰하고 一心에 契合하는 것이다. 그리고 一心을 통찰하고 一心에 契合한다는 것은 바로, 다양한 相인 識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無相인 一味淸淨한 性을 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相을 보면서 어떻게 동시에 無相을 보느냐 하는 것이다.
相에 관해서야, 누구나가 識으로 경험하는 六塵境界가 모두 相이므로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性은 無相이므로 누구나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見性한 善知識들만이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性에 관해서는 선지식의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다. 먼저 黃檗의 이야기를 보자.
배상공이 황벽에게 물었다.
"見性이란 어떤 것입니까?"
"性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性이니, 性으로써 다시 性을 볼 수는 없다. 또 듣는 것이 그대로 性이니 性으로서 다시 性을 들을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性이라는 견해를 짓는다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性 밖에 곧 하나의 다른 法이 생겨난다. 저 經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보는 그것을 다시 볼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그대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으려 하느냐?"
性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性을 본다고 하면, 보여지는 性이 따로 있고 보는 그 무엇이 따로 있어서, 그 무엇이 性을 보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性의 바깥에 따로 그 무엇이 있어서 性을 본다고 한다면, 그러한 性은 性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는 작용이 곧 性이고 듣는 작용이 곧 性이다.
여기서 보거나 듣는 작용이란 것은, 보는 내용이나 듣는 내용인 眼識과 耳識을 가능케 하면서도 眼識도 耳識도 아닌 無相의 순수한 작용 그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용은 眼識과 耳識을 가능케 하는 작용이므로 眼識이나 耳識과 늘 함께 하면서도 또한 眼識이나 耳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眼識이나 耳識과는 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作用이 性이다. 이때 識은 끊임없이 生滅하는 無常한 것으로서 相이긴 하나 假相인 반면, 相이 없는 순수작용 그것은 識을 끊임없이 生滅케 하지만 그 자신은 生滅이 없는 不生不滅의 것이므로, 無相이지만 오히려 實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性을 作用이라고 하는 것은, {傳燈錄} 제3권 菩提達摩 대사의 章에도 나타나 있다. 佛性에 관한 達磨와 異見王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異見王이 노하여 물었다.
"무엇이 깨달음[佛]입니까?"
波羅提가 답했다.
"性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스님께선 性을 보십니까?"
"저는 佛性을 봅니다."
"性은 어디에 있습니까?"
"性은 作用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작용이길래 나는 지금 보질 못합니까?"
"지금 작용이 드러나 있으나, 王께서 스스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있습니까?"
"왕께서 作用하시면 이것(=性) 아님이 없으나, 왕께서 만약 작용치 않으시면 그 [性의] 體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작용할 때에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나타날 때에는 8곳입니다."
"그 8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오."
바라제는 곧 偈頌으로 설명했다.
母胎에 있을 땐 몸이라 하고, 세간에 처하여서는 사람이라 한다.
눈에 있으면 본다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 하며,
코에 있으면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으면 말한다고 하며,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달린다 한다.
나타날 때에는 항하사 세계에 빠짐 없이 나타나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 속에 있다.
아는 이는 이를 佛性이라 하지만, 모르는 자는 이를 精魂이니 하고 부른다.
이와 같이 나타나는 一心의 作用에 관해서는 臨濟도,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꿰뚫었으니,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고,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이야기한다고 하고,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닌다고 한다"라고 똑같이 말하고 있다.
이처럼 識으로 파악되지 않는 性을, 識을 生滅시키는 작용으로 파악하여, 識과 性은 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禪宗의 心性論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相인 識을 생멸시키는 작용인 性과, 性에 의하여 생멸하는 識으로 나타나는 相의 두 측면이 서로 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一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심성론의 입장에서 보면, 迷惑과 깨달음은 모두 一心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미혹은 자기의 本心에 미혹한 것이고 깨달음은 자기의 本性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미혹이란 一心의 작용 곧 性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인 識만을 알고, 그 識을 만드는 작용인 性을 모르는 것이므로, 왜곡되게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깨달음이란 識과 함께 그 性까지 알아서 마음을 온전히 다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왜곡되게 알려지는 마음이라는 것은 性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서, 識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Ⅴ. 결론

 

頓悟의 사례는 六祖의 경우처럼 경전 한 구절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法眼이 열릴 수도 있고, 馬祖의 경우처럼 스승의 설명에 의해 바른 眼目이 열릴 수도 있으며, 백장이나 임제의 경우처럼 스승이 코를 비틀거나 두들겨 패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마음을 알아챌 수도 있으며, 香嚴의 경우처럼 수동적인 우연한 경험을 통하여 마음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 까닭은, 보고·듣고·접촉하는 등의 모든 경험이 전부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祖師禪에서 말하는 마음에는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六根을 통하여 識으로 경험되는 六塵境界의 相이 모두 마음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虛空처럼 識으로는 경험할 수는 없지만 識을 만들어내는 作用인 性이 또한 마음의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드러나는 모습으로 경험되는 마음과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는 마음은, 사실 論議의 편의상 하나의 마음을 두 측면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고,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다시 말하여, 識으로 경험되는 마음인 六塵境界의 相의 세계는, 곧 識으로 경험되지 않는 마음인 性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相과 性을 말하지만 相과 性은 본래 하나인 一心이고 따로 나누어진 무엇은 아니다.
그러나 衆生은 識으로 드러나는 相만을 알고 性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方便上 나타나지 않는 마음인 性이 경험으로 나타나는 마음인 相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고 하여 見性해야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相은 假相이고 性이 實相이라 하는 것이지만, 진실을 말하면 相이니 性이니 하는 것이 따로 없고 다만 一心일 뿐이다. 이 때문에 識으로 경험되는 相을 통하여 마음을 나타낼 수가 있고, 이와 같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을 일러 直指人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識으로 경험되는 마음을 相으로만 알고 있는 범부중생은, 비록 善知識이 말·소리·몸짓 등을 통하여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어도 그것을 다만 相으로만 볼 뿐 마음으로 보지는 못한다. 즉 보이지 않는 마음인 性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見性의 어려움이 있고, 또 見性이 비연속적인 超越의 경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즉 이제까지의 경험 속에서 有形의 相으로만 알았던 識이 동시에 無形인 性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려면, 識의 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초월적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識의 껍질을 부수고 見性하는 것은 마치 六根 이외에 다시 하나의 눈을 더 얻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懷讓은 馬祖에게 心地法眼으로 道와 無相三昧를 본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처럼 見性이란, 마음이 마음 자신을 自覺하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華嚴經}

{大般涅槃經}
{楞嚴經}
{六祖壇經}
{四家語錄}(卍續藏 119)
{臨濟錄}-宣和本-(大正藏 47)
{第五門悟性論} (大正藏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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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仰錄} 禪林古鏡叢書13(경남: 장경각, 불기2538)
{曹洞錄} 禪林古鏡叢書14(경남: 장경각, 불기2538)
大慧宗 , 백련선서간행회 역, {宗門武庫}, 禪林古鏡叢書 25(경남: 장경각, 불기2540).
無比 譯註, {백운스님어록-白雲和尙語錄-}(서울: 민족사, 1996).
鈴木大拙, {禪問答と悟り}(鈴木大拙禪選集 新裝版2, 東京: 春秋社, 1978).
柳田聖山, {禪籍解題-2, 唐代禪籍-} 殷勤 中文譯({俗語言硏究} 第三期, 1996, 卷末資料).
김태완, [중국 조사선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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