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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선도(參禪道)~♡/♣ 참선학(參禪學)

선불교와 깨달음(자각)의 문제

by 윈도아인~♡ 2012. 3. 17.

선불교와 깨달음(자각)의 문제
 

 

 

1. 序言-문제의 제기


선불교는 自覺의 종교이다. 자각이란 각자가 스스로 직접 깨달음의 체험으로 완전한 지혜를 획득하여 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지혜의 종교, 생활의 종교라고 한다. 체험을 통한 지혜야말로 가장 완전한 지혜이며, 이것은 스승이 언어나 문자로 가르치고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불교를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禪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진실로 자기 자신의 존재와 참된 모습을 바로 깨닫고 아는 지혜인 것이며, 자기 자신이 一切 諸法의 진실한 實相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의 眼目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지혜는 선의 수행을 통한 자각, 즉 깨달음의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의 일반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때 선의 수행이라는 것은 각 종파라든지 각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중심은 자각(깨달음)을 통한 지혜를 체득하고 연마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지혜가 완전한 영역에까지 深化되고 淨化된 것을 붓다의 지혜와 똑같은 無漏智라든가 出世間智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석존의 깨달음㈛等正覺?을 통하여 체득한 것을 말한다.

법화경과 화엄경 등에서는 이러한 붓다의 지혜가 일체중생에게 본래 자연 그대로 두루 구족되어 있기에 이를 本來智, 自然智라고 하며 스승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각하여 체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無師智라고 말하고 있다.(주1)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붓다의 지혜가 일체중생들의 불성에 모두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가 선의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단번에 깨달아㈛頓悟? 부처와 똑같은 지혜를 갖추도록 見性成佛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각자의 本來面目인 불성을 깨달아 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眼目을 구족하여 중생구제의 자비구현과 인격적인 삶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다.

 

2. 선불교의 깨달음-見性成佛

 

선불교의 실천사상은 각자의 성스러운 불성을 깨닫고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자아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특히 見性成佛을 강조하고 있는데 見性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점을 돈황본 六祖壇經을 통해서 살펴보자.

여러분 나의 법문은 8만 4천의 지혜를 자유자재로 작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8만 4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없으면 반야의 지혜는 항상 자기의 본성에 있고 본성을 여의고는 반야의 지혜가 있을 수 없다. 이 理致와 法性을 깨달은 사람은 번뇌 妄念이 없으며 과거의 생각에 끄달림이 없고, 어떤 존재에도 집착함이 없다. 허망된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로가 진실의 자기인 것이다. 지혜로 觀照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를 취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見性成佛인 것이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見性說은 華嚴經이나 涅槃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고,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경전의 말씀에 의거하여 중국의 조사들이 그러한 사실을 선수행을 통하여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자신 있게 주장한 힘있는 말이다.

예를 들면 華嚴經 35권 [寶王如來性起品]에 "佛子여 여래의 지혜는 無相의 지혜, 無碍智는 중생의 身中에 구족되어 있다. 그러나 愚癡한 중생은 顚倒想에 뒤덮여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는 信心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여래는 중생들에게 가르치기를, 聖道를 깨닫게 하고 여래의 지혜는 중생의 身中에 있으며 중생과 부처와는 다른 것이 아님을 知見토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주2)

또 涅槃經 35권 [迦葉菩薩品] 등에서 자주 설하고 있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이나 法華經 「방편품」등에서 "일체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一大事因緣' 설법 등은 선불교의 見性成佛 사상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불교는 열반경 등에서 설하는 불성사상이 돈오사상의 근거로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주3)

말하자면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이 구족되어 있는 우리들이 각자 자기의 佛性을 깨닫고 반야의 지혜로서 일체의 존재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空의 실천으로 자유자재한 자기의 인격을 전개하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불성은 일체의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원이며, 萬法의 진실을 깨닫는 主體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만법의 근원인 각자의 불성을 먼저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佛性을 우빠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실체인 아트만(atman, 靈魂)과 똑같은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영혼은 영원불변한 윤회의 실체이지만 불성은 一切皆空이라는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토대로 一切皆空이라는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각의 주체를 말한다. 즉 불성은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一切皆空의 範疇 속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불성 역시 肉體와 더불어 因緣假合의 無常한 존재인 것이지 아뜨만(영혼)과 같이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見性은 자기의 '佛性을 본다'라는 말인데, '본다, 보다'라는 말은 결국 자신이 직접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눈으로 확인하여 더 이상 의심이 없도록 하는 직접적인 행위를 말한다. 경전의 말씀이나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불성을 선의 수행을 통하여 직접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철저한 확신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이나 法性은 만법의 理致이며 본질을 말한다. 즉 法性은 일체의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도리를 말하는데, 이 중에는 동물은 물론 무생물, 산천 초목도 포함된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잡다하게 제 멋대로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자적인 모양과 특성을 지니고 서로서로 相依相關 관계를 지속하며 존재하고 있다.

또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 대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어떤 불변의 법칙성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諸法, 혹은 萬法이라고 하며, 만법의 본질성을 불교에서는 佛性·法性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道혹은 理致(性理)라고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見性은 이러한 만법의 본질인 法性을 각자의 佛性에서 찾아보고 깨달아 더 이상 의심이 없도록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도 일체의 존재인 諸法이나 萬法에 포함된 것이며 이러한 만법의 본질을 깨닫는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들의 불성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만법의 본질인 불성과 법성, 혹은 道의 본질적인 사실을 각자의 주체인 本性에서 각자가 직접 깨달음의 체험으로 확인하는 것을 見性이라고 한다.

傳燈錄』4권 천태산 雲居智禪師장에 견성성불에 대한 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질문, "견성성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性品은 본래 청정한 것으로 湛然하게도 동요됨이 없다. 또한 有無나 淨穢, 長短, 取捨 등의 상대적인 입장에도 속하지 않는다. 성품의 本體는 맑고 청정(순수)하다. 이와 같이 분명히 보는 것을 見性이라고 한다. 性이 곧 佛이며 佛이 곧 性이다(性과 佛은 동일체이다). 性品을 본다면 곧 부처가 되는 것이다(大正藏 51권, p. 241 上)."

이 일단은 六祖壇經의 설법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불성은 청정하여 본래 有와 無, 깨끗함이나 더러움㈛淨穢?, 길고 짧음, 취하고 버리는 차별심이나 분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말한다.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 분별심은 중생의 번뇌 망념이다. 각자의 청정하고 순수한 근원적인 불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자기의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선불교의 실천사상은 각자의 성스러운 불성을 깨닫고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자아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특히 見性成佛을 강조하고 있는데 見性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점을 돈황본 {六祖壇經}을 통해서 살펴보자.

여러분 나의 법문은 8만 4천의 지혜를 자유자재로 작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8만 4천의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없으면 반야의 지혜는 항상 자기의 본성에 있고 본성을 여의고는 반야의 지혜가 있을 수 없다. 이 理致와 法性을 깨달은 사람은 번뇌 妄念이 없으며 과거의 생각에 끄달림이 없고, 어떤 존재에도 집착함이 없다. 허망된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로가 진실의 자기인 것이다. 지혜로 觀照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를 취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見性成佛인 것이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見性說은 {華嚴經}이나 {涅槃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고,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경전의 말씀에 의거하여 중국의 조사들이 그러한 사실을 선수행을 통하여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자신 있게 주장한 힘있는 말이다.

예를 들면 {華嚴經} 35권 [寶王如來性起品]에 "佛子여 여래의 지혜는 無相의 지혜, 無碍智는 중생의 身中에 구족되어 있다. 그러나 愚癡한 중생은 顚倒想에 뒤덮여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는 信心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여래는 중생들에게 가르치기를, 聖道를 깨닫게 하고 여래의 지혜는 중생의 身中에 있으며 중생과 부처와는 다른 것이 아님을 知見토록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주2)

또 {涅槃經} 35권 [迦葉菩薩品] 등에서 자주 설하고 있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이나 {法華經} 「방편품」등에서 "일체중생은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一大事因緣' 설법 등은 선불교의 見性成佛 사상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불교는 {열반경} 등에서 설하는 불성사상이 돈오사상의 근거로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주3)

말하자면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이 구족되어 있는 우리들이 각자 자기의 佛性을 깨닫고 반야의 지혜로서 일체의 존재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空의 실천으로 자유자재한 자기의 인격을 전개하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불성은 일체의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원이며, 萬法의 진실을 깨닫는 主體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만법의 근원인 각자의 불성을 먼저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佛性을 우빠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실체인 아트만(atman, 靈魂)과 똑같은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영혼은 영원불변한 윤회의 실체이지만 불성은 一切皆空이라는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을 토대로 一切皆空이라는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각의 주체를 말한다. 즉 불성은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一切皆空의 範疇 속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불성 역시 肉體와 더불어 因緣假合의 無常한 존재인 것이지 아뜨만(영혼)과 같이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見性은 자기의 '佛性을 본다'라는 말인데, '본다, 보다'라는 말은 결국 자신이 직접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눈으로 확인하여 더 이상 의심이 없도록 하는 직접적인 행위를 말한다. 경전의 말씀이나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불성을 선의 수행을 통하여 직접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철저한 확신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이나 法性은 만법의 理致이며 본질을 말한다. 즉 法性은 일체의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도리를 말하는데, 이 중에는 동물은 물론 무생물, 산천 초목도 포함된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잡다하게 제 멋대로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자적인 모양과 특성을 지니고 서로서로 相依相關 관계를 지속하며 존재하고 있다.

또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 대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어떤 불변의 법칙성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諸法, 혹은 萬法이라고 하며, 만법의 본질성을 불교에서는 佛性·法性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道혹은 理致(性理)라고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見性은 이러한 만법의 본질인 法性을 각자의 佛性에서 찾아보고 깨달아 더 이상 의심이 없도록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도 일체의 존재인 諸法이나 萬法에 포함된 것이며 이러한 만법의 본질을 깨닫는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들의 불성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만법의 본질인 불성과 법성, 혹은 道의 본질적인 사실을 각자의 주체인 本性에서 각자가 직접 깨달음의 체험으로 확인하는 것을 見性이라고 한다.

{傳燈錄』4권 천태산 雲居智禪師장에 견성성불에 대한 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질문, "견성성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性品은 본래 청정한 것으로 湛然하게도 동요됨이 없다. 또한 有無나 淨穢, 長短, 取捨 등의 상대적인 입장에도 속하지 않는다. 성품의 本體는 맑고 청정(순수)하다. 이와 같이 분명히 보는 것을 見性이라고 한다. 性이 곧 佛이며 佛이 곧 性이다(性과 佛은 동일체이다). 性品을 본다면 곧 부처가 되는 것이다({大正藏} 51권, p. 241 上)."

이 일단은 {六祖壇經}의 설법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불성은 청정하여 본래 有와 無, 깨끗함이나 더러움㈛淨穢?, 길고 짧음, 취하고 버리는 차별심이나 분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말한다.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 분별심은 중생의 번뇌 망념이다. 각자의 청정하고 순수한 근원적인 불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자기의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3. 不思善 不思惡

선불교에서는 佛性을 自己本來面目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불성, 즉 본래면목을 선불교에서는 어떻게 깨닫도록 가르치고 있는지 六祖壇經을 통해서 살펴보자. 六祖壇經은 혜능의 구법이야기를 중심으로 남종의 돈오견성사상의 실천을 중심으로 엮은 선불교의 중요한 법문집이다.

六祖壇經에는 黃梅山 五祖弘忍 선사의 문하에서 혜능이 홍인문하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敎授師인 神秀와의 깨달음의 노래(心偈)로 홍인의 佛法과 그 印可證明인 袈裟를 전해 받은 뒤 홍인의 친절한 전송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大庾嶺 고갯마루에서 혜능의 뒤를 추적해온 慧明과 만나서 전개되는 드라마틱한 장면과 혜능 최초의 전법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이 이야기는 신회어록의 혜능전에 처음 등장되고 있는데, 단경의 작자는 이것을 소재로 하여 혜능전을 문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주4)

돈황본 단경에는 수백 명이 혜능을 해치고 가사를 빼앗으려고 뒤쫓다 모두 돌아가고, 옛날 三品將軍을 지내고 성품이 난폭한 陳慧順(慧明이 아님)이라는 사람만이 대유령까지 따라가 혜능에게 덤벼들었다.

혜능은 곧 法衣를 돌려주었으나 혜순은 반가이 받으려 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일부러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하기 위한 것, 가사는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혜능은 대유령에서 곧 법을 慧順에게 전했다. 혜순은 혜능의 설법을 듣자마자 곧 마음이 열렸다. 혜능은 혜순을 북쪽으로 찾아가서 교화하도록 하였다고 간략히 전하고 있다.(주5)

사실 여기는 혜능이 황매산 홍인의 문하에서 육조의 지위와 홍인의 법을 받고 다시 영남으로 돌아오는 어려운 구법 이야기의 한 대목이기에 대유령에서 혜능이 혜순에게 어떤 법을 설하였기에 곧바로 깨닫게 되었는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우리들이 일찍이 육조단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이 대목의 이야기는 혜능이 혜명에게 "善도 생각지 말고 惡도 생각지 말라"고 내린 유명한 법문인데 돈황본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되고 있는 자료는 현재로선 돈황본 神會語錄인데,(주6) 황벽의 傳心法要에서 단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재미있고 구체적으로 구성하였으며, 또한 선사상적으로도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약 믿지 못했다면 어찌 道明 상좌가 大庾嶺 고개까지 六祖를 찾아 갔겠는가? 그 때 六祖께서 질문했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가사를 구하려고 하는가?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도명 상좌는 "가사를 구함이 아니고 오직 법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육조는 설법했다. "그대는 잠시 생각을 거두어 들여서 善과 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善惡都莫思量?!"

도명 상좌가 이 말씀을 품승하였다. 육조는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와 같을 때 父母未生의 도명 상좌 본래면목을 나에게 가져오라!" 도명은 言下에 홀연히 깨닫게㈛默契? 되었다. 그리고 곧 예배하면서 말했다. "마치 물을 마시고, 물의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같이 제가 五祖 會上에서 30년 공부를 잘못하다가 오늘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육조가 "그렇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지시㈛直指人心?하고, 성품을 깨달아 성불㈛見性成佛?케 하심이 言說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라고 말했다(大正藏 48권, p.383下).

無門關 23칙에도 전하고 있는 유명한 일단인데, 육조 혜능이 '一切善惡 都莫思量'하라고 설법하자 도명이 言下에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문제는 혜능의 이 법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祖堂集 제3권 [南陽慧忠章]에도 다음과 같은 일단이 있다.

王詠의 門徒인 志心이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성불할 수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부처와 衆生을 동시㈛一時?에 놓아버리㈛放却?면 當處에 해탈한다."

또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부처와) 相應할 수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善惡을 모두 함께 思量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佛性을 보(깨닫)게 될 것이다." (1-119)

傳燈錄 8권에도 南泉普願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善惡을 모두 생각하지 않을 때 나의 本來面目을 還元하라㈛不思善, 不思惡, 思總不生時, 還我本來面目來?"라고 설하고 있다.(주7)

 

황벽은 宛陵錄에도 "어떻게 해야 三界를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思量하지 않는다면 當處에서 곧바로 삼계를 벗어난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는다면 見性成佛도 이루고, 중생들이 고통받는 三界도 초월할 수가 있으며, 해탈할 수가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남종의 조사 혜능의 설법으로 잘 알려진 "善도 생각 말고 惡도 생각 말라.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생각하지 말라"라는 일단에 주목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말은 신회의 壇語에서 처음 주장한 선불교의 실천사상인데, 신회는 북종의 觀心看淨㈛자기의 마음을 관하고, 마음의 청정함을 살핌?의 좌선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남양 혜충의 설법에도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당시 남종선의 실천사상으로 널리 주장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조어록에도 "어떤 견해를 가져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자성은 본래 구족한 것이다. 단지 善惡의 事中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을 수도인이라고 한다. 善을 취하고 惡을 버리며, 空을 觀하여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것은 조작된 마음이다. 또 만약 밖을 향해서 구하려고 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주8)

즉 선을 취하려고 하는 마음, 악을 멀리하려고 하는 이 마음이 다름 아닌 조작된 망념이니 이러한 조작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마조의 설법으로 "평상심이 다름 아닌 道이다"라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汚染? 않도록 하라. 무엇이 더럽힘㈛汚染?이 되는가? 다만 生死의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 작위성으로 조작하여 취향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두 汚染이 된다. 만약 곧바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是非가 없고, 取捨도 없고,斷常도 없으며, 凡聖 등의 차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인 것이다.(주9)

마조는 평상심에 대하여 作爲性(造作)이 없는 마음, 是非, 取捨, 斷常, 凡聖 등 상대적인 분병이나 차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의 그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조는 이러한 조작과 분별심을 汚染이라고 하고 있는데, 본래부터 청정하고 결여됨이 없이 구족된 평상심(本來心)을 스스로 善惡, 凡聖, 取捨 등의 상대적인 분별심과 차별심을 일으켜 번뇌 망념으로 더럽혀 흐리게 만들었다라는 의미이다.

寶林傳 제8권 보리달마전에는 이러한 마조의 설법에 의거하여 조사선의 사상적인 근거에서 달마의 입을 통해 조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惡을 보아도 미워하지 말고, 善을 봐도 닦으려 하지 말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현명함을 쫓지 말며,

미혹함을 내 던지고 깨달음을 취하려 하지도 말라.

大道에 도달하여 한계적인 量을 초월하고,

佛心에 통하여 法度를 뛰어 넘었으며,

凡과 聖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초연한 사람을 조사라고 한다.(주10)

선과 악, 범부와 성인 등 어느 한쪽 어떠한 차별심을 일으켜도 자기의 마음은 벌써 어느 한쪽에 집착되어 속박된 삶이 되고 만다. 선불교의 실천은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일체가 텅 빈 空의 세계에 주체적인 자기가 자유롭게 유희의 삶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 범부와 성인이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나는 실천법은 어떤 것인가? 결국 선과 악 이 두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생각하지 않는 실천 방법은 선과 악, 혹은 범부나 성인,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상대적인 분별심, 차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기 본래의 청정한 佛性(本來面目)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분별심에서는 선이나 악, 범부나 성인, 깨끗함이나 더러움 등 필연적으로 그 어느 한쪽 밖에 취할 수 없지만 근원적인 자기의 佛性(本來面目)인 本來心에서는 결국 선과 악, 범부나 성인, 깨끗함이나 더러움, 취하거나 버림 등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생각 모두를 한꺼번에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선과 악을 한꺼번에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와 같을 때에 父母未生 도명의 본래면목을 나에게 還元하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善惡을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을 때가 근원적인 불성으로 되돌아간 경지이며 이때가 바로 父母未生의 本來面目이 還元된 것이다.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으로 되돌아갔을 때에 비로소 善惡, 凡聖 등의 상대적인 구별과 차별심인 번뇌 망념은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면 근원적인 佛性(本來心)으로 되돌아가는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이야기해 보자. 자기와 자기 妻가 老母를 모시고 고향 길을 가는 도중에 큰 장마를 만났다. 젊은 아내가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 가다가 갑자기 많은 장마비에 징검다리가 떠내려가면서 노모와 아내가 동시에 물 속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당신은 누구를 먼저 건지겠는가? 라고 질문을 해 보면 대개의 사람은 두 가지 대답으로 나눠진다. 어떤 사람은 老母부터 구해야 한다고 하는 동양의 윤리적인 가치 기준을 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老母는 살만큼 살았으니까 젊은 아내를 구해야 한다고 하는 실리적인 사고주의자도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주장과 견해로 나눠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이러한 두 가지 차별적인 견해로 살아온 생활이 몸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진실과 지혜로운 삶에 대한 자신의 자각적인 사유 없이 그냥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의 주장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번뇌 妄想의 알음알이(知解)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판단은 直觀智의 작용을 말한다. 이것을 반야지혜라고 말하는데, 각자의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에서 곧바로 작용되어 행동으로 옮겨지는 無分別智를 말한다. 즉 동양의 윤리적인 가치관에 기준을 두고 老母부터 구출해야지, 아니면 나하고 오래 살아가야 할 젊은 아내부터 구출해야지 하는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에 근원적인 본래심의 직관적인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佛性의 작용에 어떤 필터의 가치기준이라든가, 개념이라든가 윤리적인 가치관이나 실리적인 사고의 분별작용이 개입하지 않은 直觀적인 행동으로 손부터 내밀어서 누구든지 구출하는 일이라 하겠다.

만약에 윤리적인 가치 기준으로 노모부터 구해야겠다, 아니면 실리적인 사고의 판단으로 젊은 아내부터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이것은 노모와 아내에 대한 분별심, 차별심, 번뇌, 망념의 知解 작용이기 때문에 반드시 엄청난 부작용을 낳게 된다. 노모를 구한다면 아내를 못 구하게 되고, 어떤 한 쪽을 선택하면 어느 한 쪽은 내 버리게 되는 것이 된다. 노모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노모부터 구출했다면 효자 소리는 듣겠지만 아내를 못 구했으니까 아내를 죽인 꼴이 되고 그에 대한 罪責 意識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아내를 구하고 노모를 구하지 못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로 노모를 구하지 못한 罪責感을 평생 짊어지게 된다. 이처럼 순간의 분별심, 차별심, 번뇌, 망념은 엄청난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에 선불교에서는 佛性을 깨닫고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부작용이 따르지 않는 지혜의 작용은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에서 어떠한 사량분별과 차별심에 의한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죄책의식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을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라는 선불교의 실천은 노모와 아내에 대한 차별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에 근원적인 불성의 직관적인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선과 악을 생각하여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한 분별, 차별의식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놔두고 자기의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선과 악은 동시에 모두 함께 사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실천 수행을 見性, 혹은 頓悟見性, 見性成佛이라고 한다. 見性은 각자의 본래 불성(성품)으로 되돌아간 경지를 말하며, 본래의 불성으로 되돌아간 것을 見性成佛이라고 한다. 見性은 일체의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知解 분별과 편견과 어떠한 윤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生死解脫의 경지인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선과 악이란 차별적인 개념 이외에 凡聖, 淨穢, 取捨, 生死 등 다양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모두 똑같이 중생의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부처의 절대적인 佛性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한 실천사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범부의 세계에서 성인의 세계로 나아가는 연속적인 단계의 수행이 아니라 범부와 성인의 경지를 모두 한꺼번에 초월하는 수행인 것이다. 善惡을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는 실천과 똑같다. 선승들이 자주 주장하는 生死解脫이나 生死를 超越한다는 선불교의 실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生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 妄念이며, 死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번뇌 妄念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번뇌의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인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간 경지가 그대로 生死解脫이며 生死를 초월한 경지가 되는 것이다.

불법은 마음으로 깨닫는 心法이기 때문에 善惡, 生死, 凡聖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 분별심을 중생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심을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선불교의 실천 수행인 것이다.

불성을 본다고 하는 見性成佛이나 불성을 깨닫는다고 하는 선불교의 깨달음은 각자의 불성을 마음의 눈으로 확실히 보고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불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또한 차별심, 분별심, 조작된 마음을 텅 비우고 일체의 번뇌 妄念이 없어진 그 경지를 말한다. 마음을 텅 비웠을 때 선과 악, 凡聖 등의 차별과 분별심을 없애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零(0)이라는 숫자는 實數는 아니지만 플러스(plus)로 시작되는 무한대의 숫자와, 마이너스(minus)의 무한대 숫자를 전부 포용하고 있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을 일체의 차별, 분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서, 마음을 허공과 같이 텅 비워 버리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空의 실천사상을 단순한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임제가 '體究練磨'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좌선과 선문답 등의 수행으로 직접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여 身心으로 체득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좌선을 기본으로 하는 선불교의 참선수행은 각자의 불성을 자각하고 견성성불하는 구체적인 수행인 것이다.

각자의 불성으로 되돌아가는 수행구조는 廓庵의 十牛圖에서 그림으로 잘 제시하고 있는데, 7번째 그림에는 목동이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서 한가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즉 자기 집에서 기르든 잃어버린 소를 찾아서 산천을 두루 헤매다가 소를 찾아 본래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서 일체의 번뇌 망념을 떨쳐버리고 한가히 자기 집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선불교에서는 각자의 집을 自家 혹은 安心立命處라고 하며, 본래의 자기 집에 되돌아와서 자기 자신의 일상 생활을 편안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경지를 安心立命이라고 한다.

自家는 근원적인 각자의 佛性(본래면목)을 비유한 것이며, 소를 찾아 헤맨 산천 초목은 차별 분별의 세계를 말한다. 불법은 心法이기에 이것을 각자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서 설명해 보면, 집은 일체의 번뇌가 없는 편안한 佛性(본래심)을 상징하고, 산천 초목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은 상대적인 차별, 분별세계에서 번뇌 妄念의 중생심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쓸데없이 산천을 헤매며 중생심으로 고생하지 말고 각자의 본래심(佛性)의 집으로 되돌아가 일체의 번뇌와 망념을 초월한 부처의 경지에서 편안하게 자신의 참된 삶을 지혜롭게 살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이 선불교의 見性成佛인 것이다.

이러한 見性成佛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혜능은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善惡, 凡聖, 取捨, 淨穢, 長短, 生死 등의 차별심과 번뇌 妄念의 중생심을 근원적인 불성(본래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마치 不安의 숲에서 헤매다가 평안한 본래의 自家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 어록에 자주 언급되는 還源, 還元, 還歸本處, 歸家, 還鄕 등은 이러한 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상 선불교의 실천 수행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절대(覺)의 세계 迷惑의 세계 (차별, 분별, 상대적인 경계)

      

佛性 善 凡 取 淨 美 長 老母

本來心 ←―――

平常心 惡 聖 捨 穢 醜 短 妻

自家(평안) 숲과 산악

安心立命處 不安(苦)의 경지, 초조, 두려움, 공포

 

4. 좌선 수행과 깨달음-念起卽覺 覺之卽失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는 실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선불교에서는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이러한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선불교의 좌선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살펴보자.

먼저 선불교의 좌선은 돈황본 六祖壇經에서 다음과 같이 좌선의 정의를 설하고 있다.

南宗禪에서 좌선의 실천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남종선에서 가르치는 좌선의 실천이란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이 無碍한 것을 말한다. 즉 밖으로는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라고 하며, 자기의 佛性을 깨달아 산란됨이 없는 것을 禪 이라고 한다.

(此法門中, 何名坐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 見本性 不亂爲禪)

남종선의 좌선은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을 선의 실천으로 통합한 새로운 선불교의 실천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경계에 걸림 없이 무애자재함은 공의 실천을 말하며 일체 경계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차별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일체의 경계에 埋沒되지 않은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불성을 깨달아 산란됨이 없다고 함은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간 상태를 말한다. 즉 頓悟見性의 입장인데,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의 경계에 무애자재하게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六祖壇經의 설법을 토대로 하여 선불교에서는 좌선 수행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잠시 臨濟錄의 설법을 통해서 佛性(본래심)을 자각하는 좌선 수행의 실천방법을 살펴보자.

만약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하면 生死의 바다에 浮沈할 것이다. 번뇌는 妄念에 연유한 것이니 妄心이 없으면 번뇌에 어찌 구애되리요. 애써 분별하여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으면 자연히 잠깐 사이에 道를 얻으리라. 그대들이 다른 곳에서 분주히 三阿僧祗劫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결국 生死를 벗어나기 어렵다. 무사히 선원에서 坐禪牀에 가부좌하고 앉아 좌선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大正藏 47권, p.500 上).

여기 임제가 말하는 生死는 번뇌가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生死心, 즉 生滅心이다. 선과 악, 범부와 성인을 구분하는 마음은 모두 사량 분별하는 번뇌의 妄念이며 生死心인 것이다. 이러한 生死에 윤회하는 번뇌 망념을 벗어나기 위해서 밖을 향해 道를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선원에서 좌선 수행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설한다.

臨濟錄에는 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생사해탈의 좌선 수행의 실천 방법을 설하고 있다.

여러분! 지금 그대들이 目前에서 작용하는 자네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그대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고 곧장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르치지 말라! 밖을 향해도 얻을 법이 없고, 안으로도 역시 얻을 것이란 없다. 그대들이 내가 입으로 한 말을 취하려고 하는데 모든 妄念을 쉬고 또 쉬어㈛休歇? 무사히 지내는 것이 제일이다. 이미 일어난 妄念은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그냥 내버려둬라. 이와 같이 좌선 수행한다면 그대들이 十年 行脚한 수행자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大正藏 47권, p. 500 下).

불법은 각자의 마음으로 깨닫는 心法이다. 혜능이 '道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하고 마조가 '평상심이 바로 道'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佛道를 닦고 수행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좌선은 마음으로 본래심을 깨닫고 불도를 이루는 구체적인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임제를 비롯하여 모든 선승들이 "밖을 향해서 진리나 도를 구하려 하지 말라㈛莫向外馳求?"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임제는 자신이 하는 말에도 끄달리지 말고, 일체의 망념을 쉬고 무사히 본래심을 깨닫는 좌선 수행을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즉, "이미 일어난 妄念은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그냥 내버려 두라㈛已起者莫續, 未起者 不要放起?"라는 일절은 선불교의 좌선 수행에 要諦가 되는 설법이다.

이미 일어난 번뇌 妄念을 망념으로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수행은 자신이 번뇌의 妄念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좌선 수행으로 자신이 번뇌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에 망념은 계속되지 않게 되고, 중생심의 망념에서 근원적인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祖堂集 제6권에 洞山 화상은 망념과 깨달음을 病과 藥으로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問, 如何是病 무엇이 病인가?

師曰, 瞥起是病 잠깐 일어난 妄念이 病이다.

進曰, 如何是藥 무엇이 藥인가?

師曰, 不續是藥 妄念이 계속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藥이다.


 

이 일단은 宗鏡錄 38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주11) 좌선 수행의 잘못된 점(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로잡아 실천해야 할 것인지 처방(藥)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임제의 설법에서 주장한 좌선 수행과 똑같은 입장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좌선 수행의 실천 정신은 大乘起信論에 토대를 둔 荷澤神會의 설법에서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가 있으며, 종밀의 都序나 황벽의 宛陵錄 등에서도 많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좌선 수행의 기본적인 실천 방법인 것이다.(주12)

宋代 宗?이 편찬한 坐禪儀에서는 이러한 선불교의 좌선 실천 수행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일체의 善과 惡을 모두 한꺼번에 思量하지 말라.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도록 하라.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면 망념은 곧 없어진다. 이렇게 오래 오래 수행하여 일체의 반연을 잊게 되면 자연히 자기와 경계가 하나가 되리라. 이것이 좌선의 要術인 것이다㈛一切善惡 都莫思量, 念起卽覺, 覺之卽失, 久久忘緣, 自成一片, 此坐禪之要術也?(大正藏 48권, p.1047 中).

일체의 善惡을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는 혜능의 설법은 구체적인 좌선의 실천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善惡, 凡聖, 生死 등의 차별심과 분별심의 망념이 일어나면 먼저 자신이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이 좌선을 하면서도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자신은 중생심의 번뇌 妄念 속에서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선 중에 妄念이 일어난 사실을 자신이 자각하게 되면, 곧바로 자신의 佛性(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됨으로 妄念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좌선 수행은 철저하게도 자신이 불성을 깨닫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구체적인 실천인 것이다. 善惡, 凡聖, 取捨 등의 상대적이고 분별적인 생각인 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불안이 없는 평안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일상 생활을 무애자재롭게 전개하는 삶인 것이다.

 

5. 깨달음의 구조 

1) 本覺과 不覺, 그리고 始覺

 

선불교의 중심적인 사상은 萬法의 근원이며 자각적인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깨달음의 불성으로 이를 일체의 차별적인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무애자재하게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것이다. 즉 대승불교의 실천정신인 반야사상과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을 선의 수행으로 일체화하였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특히 見性成佛을 강조하면서 佛性의 깨달음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선수행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수행의 실천방법은 大乘起信論에서 주장하고 있는 수행구조를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불교에 있어서 如來藏 佛性思想의 전개상 隋唐의 각 종파불교에 최대의 영향력을 미친 名著가 大乘起信論이다. 眞諦의 번역으로 알려진 이 책은 地論宗, 攝論宗의 사람들에 의해 선전 유포되었고 法藏을 통해 화엄교학의 확립에도 크게 역할을 다했으며, 더욱이 一乘 佛敎家 전체로 볼 때 불교 수행과 실천구조의 이론적인 지지를 뒷받침해 주게 되었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깨달음(本覺)과 不覺의 사상적인 구조나 一行三昧의 선수행과 실천적인 구조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도 역시 大乘起信論이다.

기신론의 기본적인 입장은 법계의 一元論으로 그것에 衆生心의 兩面性을 밝히고 있다. 즉 如來藏(佛性)- 眞如 自性이 본래 청정한 측면과 如來藏(불성)-阿賴耶識(alaya)으로서 三細六?(세 가지의 미세한 번뇌와 여섯 가지의 거친 번뇌)를 낳는 隧染의 면이 서로 얽힌 소위 여래장 연기를 설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本覺과 始覺, 不覺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大乘起信論에 의하면 중생은 如來藏心에 의해 本覺이지만 三細六?에 의해 汚染되어 不覺 혹은 未覺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여래장심이 대승의 信心(보리심)을 일으켜 여러 가지 바라밀의 실천 수행을 닦음으로 인하여 번뇌 妄念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실천 수행에 의해 깨달은 지혜의 최초의 단계가 있는데, 이것은 始覺의 第一步인 것이다. 그로부터 수행이 진보되어 깨달음㈛覺?의 작용이 점차로 완전하게 되어 수행이 완성하게 된 곳에 始覺과 本覺이 합체한다. 따라서 始覺이란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지혜의 진전을 말한다. 말하자면 始覺이란 不覺의 상태가 본래의 깨달음㈛本覺?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작용인 것이다.

本覺과 不覺은 서로 상대하는 이름이다. 本覺은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음으로 本覺의 반대는 不覺 밖에 없다. 즉 우리들의 마음은 깨달음의 경지인 本覺의 상태거나, 아니면 차별 분별심을 일으켜 번뇌 妄念에 떨어져 깨닫지 못한 중생심의 不覺 상태이거나 그 어느 한쪽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 그 兩者의 중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覺, 悟?은 미혹㈛迷?에 대립되는 말이며, 미혹하지 않으면 또한 깨달음이라는 것도 사실 없는 것이다.

따라서 迷惑함을 실체㈛實?로 할 수가 없고, 또한 깨달음㈛悟?의 조건으로 해서도 안 된다. 大乘起信論에서 本覺과 不覺 그리고 始覺이라는 三者의 辯證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실천에 근거한 것이고 최후에는 唯佛與佛의 세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大乘起信論에 "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 하고 心源을 깨닫지 못했음으로 究竟覺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보살의 지위에 있는 수행자는 방편을 두루 닦아 만족하고, 一念相應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마음에 처음의 번뇌나 모양㈛相?이 없으며, 微細한 망념도 遠離하였기 때문에 심성을 볼 수가 있으며, 그 心性에 常住하는 것을 究竟覺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주13)

여기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煩惱妄念이 처음 일어나는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마음에 망념이 일어났음을 자각할 때 망념은 없어지고 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一念相應이란 始覺이 本覺(본래심)에 합쳐진 것을 말한다.

그런데 大乘起信論에서는 本覺과 不覺 사이에 始覺을 두어 중생의 미혹한 不覺에서 본래의 本覺으로 되돌아가려는 불성의 작용을 설하고 있다. 大乘起信論에서 주장하는 始覺은 대승불교 수행에 여러 가지로 응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살의 求道 원력과 菩提心이기도 하고 깨달음의 본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수행의 방편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송대 간화선의 수행구조인데, 대혜 종고가 "始覺이 本覺에 합치는 것을 부처㈛佛?라고 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간화선은 始覺門적인 수행구조라고 할 수 있다.(주14)

간화선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방편을 사용하고 있는데, 始覺을 本覺에 합치는 방편수행으로 공안을 참구하도록 하고 있다. 즉 공안을 드는 것이 始覺이요, 참구하는 것은 본각에 합치는 것이다.

이러한 大乘起信論의 주장에 반하여, 唐初 선종의 僞經인 金剛三昧經에서 주장한 一覺은 그 究竟性을 나타내는 것으로 한 걸음 발전된 주장이다. 즉 金剛三昧經에서 주장한 一覺了義란 일체중생의 同一한 本覺인 것이고 無覺으로써 깨닫㈛覺?고, 깨닫고서는 覺에 머물지 않는 唯一心인 것이다.(주15)

이러한 唯一心이 달마의 二入四行論이나 홍인의 修心要論 등 선의 어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金剛心, 혹은 金剛佛性, 金剛心地라는 말이다. 달마의 理入說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금강심은 凡夫나 성인이 둘이 아니며, 自他도 없고 有無도 아닌 불성에 住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의 住한다는 말은 無住의 住인 것이다. 그것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의 智地에서는 해탈의 道가 끊어지고 이미 끊고서 無住地에 들어가지만 출입이 없다. 心處에 決定性地가 있지 않다"라고 논하며 밝히고 있다.(주16)

2) 차별의 세계에서 절대의 세계로

 

사물을 둘로 나누어서 이를 상대적으로 대비하고 차별심을 일으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적인 생활의 습성이라고 할 수 있다. 善惡, 凡聖, 美醜, 長短, 頓漸 등 이러한 二元의 세계를 탈피하지 않고 우리들이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차별과 분별심의 작용인 것이다.

분별은 문자 그대로 사물을 둘로 나누어서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다. 일체의 언어나 언어에 의한 일체의 판단은 二相의 분별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左右, 上下, 善惡 등등 모두가 상대적인 언어로 되어 표현되고 있다. 黑白을 나눈다거나 是非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처럼, 모든 판단이 이렇게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인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실 모든 論理는 始終 옳고 그름㈛眞僞?의 문제를 안고 있기에 안에서 말하면 시비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법칙이 성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인 입장의 주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左나 右, 옳고 그름의 비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知的 이해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是非, 善惡의 차별과 구별이 있기 때문에 상대가 판단한 성질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知的 분별은 결국 방편의 성질을 탈피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고는 달리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일체의 모든 가르침이 방편 법문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인용한 六祖壇經의 혜능의 설법에서도 8만 4천의 번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8만 4천의 방편의 약이 필요한 것처럼, 일체의 佛說은 방편법문인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不立文字나 敎外別傳은 이러한 본질적인 불교의 정신을 올바르게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장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은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의 二元을 초월하여 어떤 대상이나 존재와의 分離를 없애고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깨달음의 세계(佛性)에서 통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大乘起信論에 始覺이 本覺에 합쳐진 一念相應의 경지를 究竟覺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미혹의 중생심이 좌선 방편의 수행을 통해서 근원적인 불성(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凡夫나 聖人, 善과 惡, 깨달음과 미혹 등등,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하여 일체의 사량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각자의 근원적인 本來心(佛性: 眞如自性)의 절대적인 세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차별 분별의 중생심이 자각을 통하여 각자 본래의 청정한 佛心(眞如自性)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실 깨달음은 이미 미혹한 사람을 위하여 임시로 설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미혹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미혹이란 자기의 본래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인데, 잃어버렸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미혹한 그 衆生心 가운데에 이미 잃어버린 본래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衆生心과 佛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인 것이다. 미혹할 때는 우리의 마음 전부가 중생심이 되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 깨닫게 되면 전부가 그대로 불심(佛性)이 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미혹으로 잃어버린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자기의 佛性(본래심)에 어떤 새로운 무엇이 그곳에 첨가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처음부터 자기의 본래심(마음)은 분명히 있다. 또한 잃어버렸다고 해서 마음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미혹과 깨달음에 관계되지 않고 일체의 사량분별과 차별에서 초월한 본래의 그 마음을 조사선에서는 平常心이라고 하며 그러한 本來心인 인간의 平常心을 깨닫고 되찾는 가르침을 心地의 法門이라고 한다.(주17)

3) 轉迷開悟

 

우리들의 마음에 깨달음의 마음과 미혹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미혹한 마음이 바로 깨달음의 마음인 것이다. 따라서 또한 깨달음의 마음이 바로 미혹한 마음이다. 이것은 善과 惡, 眞과 妄, 煩惱와 菩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모두 양극단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 一心의 兩面性을 나타낸 것이다. 禪은 이러한 양면성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상대적이고 분별적인 마음의 번뇌를 모두 拂拭하고 초월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 살도록 주장하고 있다. 즉 차별에서 절대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을 轉迷開悟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轉이란 그 중추적인 一心의 작용을 말하며, 자각적인 작용이며 자기 비판, 자기 성찰, 즉 깨달음의 체험을 통하여 迷惑의 衆生心을 본래의 佛心으로 전환하게 하는 자기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轉迷開悟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미혹을 굴려 깨달음을 열다'라는 말인데, '굴리다'란 말은 회전하고 있는 것으로 미혹한 자체를 굴리는 것이다. 그것은 ' 미혹을 벗어나다'라든가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거기에는 항상 미혹한 것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또 달리 轉에는 反轉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마치 사진의 필름을 구울 때처럼, 黑·白으로 하는 것도 포함되고 있는 것인데, 轉은 이와 같이 黑白, 善惡, 迷悟 등과 같은 두 가지의 상대적인 사실이 하나에 포함되고 있는 운동인 것이다. 회전이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마치 둥근 공이 굴러다닐 때와 같이 미혹 그 자체가 조금도 변질하지 않는 그대로 여러 가지 미혹이 나타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된다.

회전이란 일정한 방향성이 없으며 四角型의 상자를 굴릴 때와 같이 안정성도 없이 항상 意外性과 多樣性에 넘치는 운동이다. 미혹을 굴려서 깨달음을 연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放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둥근 공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또 본래의 위치에 되돌아오고, 본래의 근원적인 상태로 되돌아갔다고 하는 단정이나 결정이란 결코 성립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포함하여 운동이기에 거기에는 소위 진보의 관념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혹을 굴려 보았다고 해서 반드시 깨달음에 가까워진 보장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을 굴려서'라고 말하는 轉은 미혹을 굴려서 깨달음을 여는 轉換, 혹은 轉向의 회전 작용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頓悟見性이란 말로 강조하고 있는데, 頓悟에는 한 점의 흐림도 없는 지혜의 작용이, 또한 미혹한 것에는 한 점의 광명도 없다는 二者 擇一적인 구조가 있다. 즉 半은 깨닫고 半은 미혹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깨달았으면 모두 한꺼번에 몸 전체가 참된 깨달음인 것이다. 즉 大乘起信論에서 주장한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깨달음의 本覺이거나, 아니면 깨닫지 못한 중생심의 不覺이거나 그 어느 한쪽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 그 중간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證道歌에서는 "한 번에 곧바로 깨달아 여래의 경지에 直入한다㈛一超直入如來地?"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直入이란 의미는 종이의 표면을 옆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表面에서 裏面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다. 겉㈛表?의 안쪽㈛裏?에는 全面 裏側이 열리고 있다. 거기에 一超라고 하고 直入이라고 하는 소식이 있다. 중생의 不覺에서 곧바로 부처의 경지인 本覺으로 直入하는 깨달음의 구조를 말한다. 直入하는 작용이 一心의 轉換이며, 미혹을 굴려서 깨달음을 열도록 하는 自覺인 것이다.

馬祖 道一이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닫고, 또다시 미혹하지 않는다. 태양이 나올 때 어둠과 합쳐지지 않는 것처럼 지혜의 태양이 나오면 번뇌의 어둠과는 함께 하지 않는다"(주18)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깨달음과 미혹함의 絶對斷絶性과 非共存性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종이의 表裏는 不二一體이며 이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인 것이면서도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이 한 장의 종이의 表裏인 것처럼, 미혹과 깨달음도 사실 不一이면서 不二의 관계이다. 따라서 깨닫게 되면 완전히 깨닫는 것이고 미혹하면 완전히 미혹한 것이지 半迷 半悟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4) 迷惑과 깨달음의 차이

돈황본 六祖壇經의 '참된 부처를 깨닫는 해탈의 노래'에 "미혹하면 부처를 보질 못하며 깨달으면 곧바로 부처를 본다"라고 하고, 또 "부처는 중생이 있기 때문이며 중생을 여이고 부처는 없다. 마음이 미혹하면 부처도 중생이고 깨달으면 곧바로 중생이 부처이다. 어리석게 되면 부처도 중생이며, 지혜를 얻으면 중생도 부처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뿐이라고 설하고 있다.

즉 한 마음 미혹하면 중생이고, 한 마음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말이다.

傳燈錄 30권에 澄觀(738∼839)이 皇太子의 질문에 대답한 [心要]에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쫓게 되나니 法과 法은 천차만별이라 사람이 같지 않고, 깨달으면 法이 사람을 따르나니 사람마다 하나의 지혜로 萬境과 융합된다"라고 설하고 있다.(주19)

여기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쫓고…'라는 말은 원래 首楞嚴經제2권에 보이는 말인데, 사람이 진리를 쫓고 따르는 것을 미혹이라고 하고 진리가 사람을 쫓고 따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입장을 말한다.(주20)

이 말은 달마의 安心法門 등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원래 究竟大悲經 제3권에 "미혹할 때는 法으로 法을 쫓지만 깨닫고 나면 法 그 자체가 그대로 法이며, 法은 動轉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주21)

달마의 悟性論에 "대개 미혹한 사람은 깨달음에 미혹하고 깨달은 사람은 미혹을 깨닫는다. 正見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空性인 사실을 알고 곧바로 迷悟를 초월한다. 迷悟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이며 正見이라고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주22)

傳燈錄 제29권에 "미혹할 때는 空 가운데서 色(사물)을 보고 깨닫게 되면 사물(色) 속에서 空을 볼 수가 있다㈛迷時以空爲色, 悟卽以色爲空?"라는 말도 똑같은 주장이다.(주23)

원래 미혹함이란 본래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본래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非本來的인 미혹을 前提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혹함도 깨달음도 본래는 모두 없는 것이지만 미혹하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며 비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래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혹함은 이미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미혹함에 포함된 깨달음도 결국은 미혹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傳燈錄 제29권에서도 志公和尙이 "迷悟는 본래 차별이 없으며 色空도 구경에는 똑같은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주24)

臨濟도 "깨달음은 住處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菩提無住處, 是故無得者?"라고 설하고 있다. 이 말은 본래 維摩經 [觀衆生品]에서 유래된 말인데, 菩提나 煩惱도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不可得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不可得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주25)

傳燈錄 제28권에 馬祖道一이 "미혹할 때는 識(분별)이 되고, 깨닫게 되면 지혜가 된다. 이치에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미혹은 自家의 본심에 미혹한 것이며, 깨달음은 自家의 本性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주26)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는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慧海도 頓悟要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見性은 범부가 아니며 단번에 上乘을 깨닫는 것이다. 凡과 聖을 초월하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凡聖을 논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생사와 열반을 초월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事理를 설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지혜의 작용에 자유자재하다. 미혹한 사람은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구해 얻을 것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많은 세월을 기약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단번에 불성을 본다(大正藏51권, p.441 下).

이처럼 미혹은 분별적인 識(vijnana)의 작용인 것이며, 차별적인 意識이기 때문에 凡과 聖, 생사와 열반, 事와 理를 구별한다. 따라서 진리나 깨달음을 구해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깨달음은 지혜(prajna)이며 凡과 聖, 생사와 열반 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차별을 초월하여 理事圓滿의 大用三昧로서의 작용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원래 구하려고 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지며, 드러나게㈛現成? 되는 것이다. 즉 깨달음은 항상 불성의 작용으로 현재 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며 결코 미래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대상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의 '如實知見'에서 '如'라는 한 글자로서 표현하고 있다. 여기의 如는 존재의 實相임과 동시에 선의 깨달음(지혜의 작용)의 본질이기도 하다.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如實知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如實한 것을 본다고 하는 인식의 본질과, 如實하게 보려는 인식(지혜)의 작용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의 현장에서는 사람은 三界(미혹의 세계)를 초월할 수가 있다.

法華經 [壽量品]에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如實하게 알고 보아㈛知見? 生死에 물러나거나 또한 나옴이 없다. 또한 세상에 있거나 滅度함이 없으니, 진실도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며, 같지㈛如?도 않고 다르지㈛異?도 않으며, 三界를 삼계 같지 않게 본다"라고 말한 것도 대개 이와 같은 소식을 설한 것이다.(주27)

如를 空으로 바꾸어 말할 수가 있다. 眞如와 眞空을 같이 보는 경우도 있다. 空에 대해서나 존재의 모양으로서 空相과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空觀이 일치한다. 그러한 존재와 인식의 一如不離性의 現前을 해탈이라고 하며, 이것을 현실성의 초월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6. 깨달음과 지혜

 

1)智慧와 知識(知解)

선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의 체험으로 얻은 붓다의 지혜는 단순한 어떤 존재나 사물의 인식이 아니라 불성의 본래적인 작용인 것이다. 즉 자각의 주체인 불성이 일체의 만법을 본래 그대로의 모습㈛諸法實相?을 일체의 사량 분별이나 차별심 없이 자연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또한 분석적이고 부분적인 인식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종합적인 불성의 직관적인 인식 작용을 말한다.

智慧를 梵語로는 prajna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pra는 전체적·일체적·근본적이란 의미이며, jna는 인식이란 의미이다. 한편 사물을 인식하는 識은 범어로 vijnana 라고 하는데 여기의 vi 는 부분적이고 분할적이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는 붓다의 입장에서 일체의 사량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불성의 작용이며, 識은 중생의 입장에서 분별 분석을 통한 사물의 인식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분별적인 인식은 부분적인 것이며 어느 한 부분을 통한 인식 작용이 된다. 예를 들면 눈으로 인식할 경우 眼識의 작용이고, 귀로 들어 인식할 경우 耳識의 작용이 되는 것처럼 부분적인 인식이 된다.

이러한 부분적인 인식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을 우리들은 知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식과는 구분된다. 분석과 실험을 통하여 어떤 존재의 사실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인식된 지식은 객관성과 일반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하나의 개념으로 정리되어 상식화된다.

그러나 지혜는 각 개인이 선의 수행으로 깨달음이라는 종교적인 체험에서 얻어지는 주관적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각자 불성의 본래적이며 直觀的인 작용이기에 실제의 일상생활의 지혜와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直觀은 전체적이고 온전한 佛性의 무분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반야(prajna)의 직관이라고 한다. 사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의 지혜는 空의 실천을 통하여 체험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반야의 直觀을 '무분별의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불성 전체가 직관하며, 근원적인 우리들의 본래심이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활용되기 때문에 이를 불성의 全體作用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2) 本來智와 後得智

 

그런데 지혜라고 할 경우는 불성에 구족된 본래적인 작용으로 能觀(보는 주체)의 입장인 것이며 당연히 所觀(보여지는 대상)의 法性(理致)과 상대하는 것이 된다. 法性(理致)을 단순한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지혜는 완전하고 최고인 반야의 지혜가 아니고 能所, 즉 주관과 객관, 보는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없어져버린 一如 三昧의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能觀의 智와 所觀의 法性(理致)이 완전히 둘이 아닌 하나로 되어 버린 것이 완전하고도 순진 청정한 불성 본래의 지혜이며, 이를 근본 無分別智라고도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理致란 만법의 참된 진실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실, 혹은 진리란 허망하지 않고 참된 이치를 의미한다. 즉 일체 만법의 참된 모습, 諸法의 實相에 일관되어 관철되고 있는 절대의 理致이며 추상적인 법칙인 理法을 전체적이고 본래적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체의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諸行無常?'이라는 理致와 法則은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사물에 일관되어 관철되고 있는 진리(진실)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가 인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잠시라도 머무름이 없이 시시각각 生住異滅, 혹은 生老病死라는 과정으로 모양이 변화되고 있는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理法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일체의 모든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존재㈛諸法?를 理致 理法이라고 하고 眞如라고도 하며 法性, 法界라고도 한다.

인간의 경우 우리들의 佛性인 本來心이 일체 존재의 實相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자각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心性, 一心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존재의 참된 제법의 法性(이치)을 파악하는 불성의 지혜가 근본 무분별적인 本來智인 것이며, 또한 本來智와 일체 존재의 진실된 理致, 理法이 완전히 하나㈛一如?가 된 것이 眞如 法性인 것이며, 선에서 말하는 自性, 心性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말은 번거로운 단계를 일체 뛰어넘어 곧바로 각자의 불성을 깨닫고 절대 완전한 만법의 法性(理致)과 하나가 되어 本來智를 체득하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며 성불인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참선 수행을 통해 근원적인 본래심을 자각하고 견성성불을 했다고 하여 부처님과 같은 一切智가 구족되는 것은 아니다. 본래심을 자각함은 만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구족하기 위한 수행인데, 인간은 체험된 사실만을 토대로 하여 지혜의 안목이 형성되는 것이다. 불성(본래심)에 구족된 지혜를 根本智라고 하고, 다양한 번뇌와 고뇌를 수행과 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를 後得智라고 한다.

根本智는 本來智, 自然智 無分別智 혹은 如理智라고도 하고, 一切皆空의 도리를 깨닫고 만법의 근본에 되돌아가 절대 平等의 진리에 계합하여 주관과 객관의 일체 차별과 분별을 없앤 超絶的인 眞智로서 모든 지혜의 근본이며, 또한 後得智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根本智라고 말하는 것이다.

後得智 또한 불성에 구족된 根本智와 나란히 佛智이다. 後得智는 진리를 깨달아 根本智를 얻은 뒤에 다시 因果法의 세간적인 有相 차별에 대한 분별의 世俗智, 淺智를 일으켜 하나 하나 응용하는 지혜이다. 그래서 如量智, 權智, 俗智라고도 한다.

사실 인간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일어나는 다양한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은 根本智의 안목이라기보다는 고뇌와 수행을 통해서 체득한 체험의 지혜(後得智)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일반적으로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의 고뇌와 번뇌가 8만 4천이나 되기 때문이다. 8만 4천이란 고정된 숫자가 아니고 무수하게 많다는 의미인데, 무수하게 많은 중생들의 번뇌 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하는 법문의 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구제를 위해서는 다양한 방편으로 치료할 법문의 약이 필요한 것인데, 이러한 방편의 법문은 체험을 통한 지혜의 약인 것이다.

대승불교의 정신은 四弘誓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엾은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서는 한량없는 법문과 위없는 불도를 이루어야 한다. 다양한 중생들의 번뇌 병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나 조사들이 체험을 통해서 중생구제를 위한 지혜의 약으로 제시한 방편법문의 事例가 경전이며 어록인 것이다.

인간은 경험과 체험을 통한 지혜야말로 확실하고 힘있는 완전한 지혜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체험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한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중생들의 모든 고뇌와 번뇌의 병을 모두 다 직접 체험하여 이에 대한 처방의 방편법문과 약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중생구제의 방편법문으로 제시한 경전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익혀서 이를 자신의 수행과 간접체험으로 만들어 자신의 지혜와 인격형성의 좌표로 삼고, 중생구제의 방편법문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경전과 어록을 통한 다양한 지혜의 말씀을 통해 각자 올바른 불법수행의 방향을 설정하여 폭넓은 사상의 심화를 이루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경전을 읽고 어록을 배우는 의미는 선각자들이 체험하여 제시한 다양한 깨달음의 지혜를 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히기 위한 것이다. 즉 다양한 체험의 事例와 判例를 배우고 익혀 자신의 지혜로 만들고 사상적인 深化를 위한 것이다.

또한 後得智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것이나 자동차 고장시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고장 事例를 배우고 익혀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불교에서 깨달음의 세계, 자각의 경지를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로 不立文字와 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각자가 직접 물을 마셔 보고 그 물의 차갑고 따뜻함을 스스로 느껴보고 자각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로 冷暖自知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師資의 전법을 강조하고 있는 선에서는 傳法의 방법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다고 하는 '以心傳心'이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하여 전할 수 없기에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르침이나 경전에 새겨진 글자에 불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새겨진 글자를 이정표로 하여 각자가 부처님이 제시한 그 길을 직접 걸어가서 체험을 통하여 진실된 불법을 깨닫게 될 때 敎外別傳의 소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3) 菩提와 涅槃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 혹은 해탈의 세계를 菩提(bodhi)와 열반(nirvana)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유마경 등 대승불교에서도 '煩惱卽菩提', '生死卽涅槃'이라는 말로 대승불교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주28) 煩惱나 生死는 사량 분별의 작용으로 중생의 경지를 말하며 보리와 열반은 제법의 참된 실상과 法性, 佛性을 깨닫고 일체의 사량 분별과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붓다의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번뇌나 깨달음이 하나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하나이며, 중생이 곧바로 부처인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 '煩惱卽菩提, 生死卽涅槃'이란 말이다.

사실 華嚴經에서도 "마음과 중생, 부처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불교는 중생이 깨달아 달리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 진실을 깨닫고 생사의 번뇌가 끊어진 그대로가 부처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주29)

다시 말해서 사바(saha)세계를 벗어나 달리 부처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통하여 사바세계가 그대로 부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와 열반은 똑같이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고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菩提는 인간의 知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智慧이고, 涅槃은 인간의 情적, 혹은 情意的인 영역으로 禪定의 수행으로 체득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대개 우리들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知·情·意 셋으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知的인 錯誤와 情, 혹은 情意적인 迷惑이 있다. 知的인 착오를 일으키면 正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眼目이 없어 사물의 참된 이치와 도리는 물론, 諸法의 實相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된다. 이를 無明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知的인 錯誤로 사물에 집착(法執)되고 所知障이 일어난다.

또한 情意的인 미혹은 맹목적인 인간 마음의 動搖(흔들림, 술렁임)이기 때문에 사물의 도리나 제법의 理致를 아는 지혜가 있고 없고 할 것 없이 사람을 괴롭힌다.

情意的인 미혹은 자기에 집착(我執)이 생기며 煩惱障이 일어난다. 이러한 情意的인 미혹의 극복은 오로지 禪定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으며, 선정으로 체득되는 깨달음의 세계가 涅槃寂靜의 경지이다.

따라서 知的인 착오㈛無明?가 해결되면 제법의 이치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열리고, 감정적인 마음의 波浪(번뇌)이 수습되면 바로 그곳에 평온하고 청명한 정신(안정)이 되살아나게 된다. 菩提는 正法의 眼目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여는 지혜의 완성을 말하며 涅槃은 선정의 수행으로 체득되는 본래적인 마음의 평온과 인격의 완성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의 완성과 인격형성을 구현하는 실천으로 선정과 지혜를 수행의 요제로 제시하고 있으며, 선정과 지혜로서 보리와 열반의 경지인 깨달음의 세계를 체득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 깨달음(悟)의 前後

 

祖堂集권1, 제5조 제다가존자의 傳法偈에 "철저히 깨닫고 보면 깨닫기 이전과 다름이 없다㈛悟了同未悟?"라는 말이 있다.(주30) 이 말은 頓悟 見性하여 철저히 만법의 근원을 깨닫고 난 뒤나 자기가 일찍이 깨닫기 이전이나 경계는 한결 같다라는 말이다. 깨닫기 이전에는 만물의 부림을 당하여 자유롭지 못하고 경계에 끌려 다녔지만 깨닫고 난 뒤에는 일체의 만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란 말이다.

때문에 선에서는 '大悟는 도리어 미혹함과 같다(悟却迷)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주31)

여기서 말하는 大悟는 大小의 상대적인 大가 아니라 일체를 포용하여 남음이 없다는 절대적인 의미이다. 즉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 입장이다. 말하자면 중생의 迷妄을 해탈하는 것이 깨달음이며 또 더욱이 그 悟處를 추월한 것이 大悟인 것이다.

본래 크게 깨닫게 되면 미혹이 없지만 중생의 미혹함을 구하기 위해 중생계와 같이하여 미혹함을 나투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迷悟 一體의 입장인데, 却迷 이외에 또 달리 大悟는 없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물(H20)을 분석하여 물의 속성을 수소 2와 산소 1의 결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철저한 실험을 통해 알았다고 해서 물의 맛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인간의 일상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물이 물인 그 사실이며 물과 자기와의 관계, 그리고 그 물을 자기의 삶으로 가꾸는 생활의 지혜와 방법뿐인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어떤 사실을 새롭게 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물에 대한 본질을 확실히 알았다는 그 사실 이외에는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제다가존자가 읊은 傳法偈에 '깨닫고 보면 깨닫기 이전과 다름없다'라고 하는 말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碧巖錄26칙 백장의 獨坐大雄峰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깨닫고 난 뒤라고 해서 별달리 기특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매일 매일 백장산에서 좌선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깨달음의 극치는 깨닫고 그 깨달음을 초월했을 때 任運 無作의 세계가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外形)은 깨달음이라든가 佛道라든가 하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개념화된 의식이 전혀 없으며 未悟 혹은 佛道를 지향하기 이전의 모습과 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前後의 소식을 蘇東坡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廬山은 煙雨, 절강은 潮水

그곳을 구경하지 못하면 후회할 걸세

구경하고 돌아와도 특별한 일은 없네

역시 廬山은 烟雨, 折江은 潮水의 모습일 뿐.


 

蘇東坡(1036∼1101)가 廬山의 東林常總 선사에게 나아가 철저히 참선하여 깨닫고 지은 詩라고 한다. 산은 山, 물은 물이요, 버드나무(柳)는 본래 푸르고(綠) 꽃은 붉은 빛을 띄고 있는 것처럼, 대자연의 일체 모든 존재가 각자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 별달리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체험을 통하여 얻은 지혜로 만법의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如實知見할 뿐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깨닫기 이전처럼, 사람은 옛 사람과 다름이 없지만, 옛날에 살던 방식과는 다른 지혜로운 생활을 무애자재롭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가 깨닫기 이전은 만법의 부림을 당하는 것이고 깨닫고 난 뒤에는 만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지혜를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출처/daum blog ~ 阿羅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