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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 識의 흐름과 氣의 흐름

by 윈도아인~♡ 2012. 3. 17.

불교 / 識의 흐름과 氣의 흐름  

김성철 / 동국대, 중앙승가대 강사

Contents

氣一元論과 華嚴學
한의학의 氣와 十二處
理氣論과 名色

‘불교와 氣’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氣功으로 단련된 스님이 등장하는 쿵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그런 종류의 기는 별 관계가 없다. 간혹 기공 수련을 하는 스님들이 있긴 하지만 이는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불전에서 ‘氣’라는 용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잠재된 습관을 의미하는 ‘習氣va-sana-’라는 번역어가 있으나 그 의미는 본 글의 주제와는 무관하다. 氣에 대해 불교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氣에 대비될 수 있는 개념을 불교적 세계관 내에서 추출해보는 수밖에 없다.

중국문화권에서 말하는 氣 역시 다양한 맥락에서 쓰인다. 일원론적인 氣철학에서 말하는 氣, 한의학에서 말하는 인체의 경락을 순환하는 氣, 성리학의 理氣論에서 말하는 氣. 모두 氣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각이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어떤 문화권에서 쓰이는 개념을 다른 세계관을 통해 해석해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牽强附會로 인한 지적인 죄악intellectual sin을 저지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氣一元論과 華嚴學

 

불교에서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명멸하는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이를 끊임없는 氣의 흐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참 모습이다. 시공적 연장extension이 있다는 생각은 찰나적 변화를 간과한 착각이다.

남방 상좌부의 위빠싸나vipassana- 觀 수행에서는 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의 心身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사건의 흐름을 주시하도록 한다. 즉, 매순간 명멸하는 촉감과, 의식의 흐름 등을 주시하게 한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존재한다’거나, ‘내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굵은 생각들이 착각이었음[無我]을 자각케 한다. 그 결과 ‘내가 실재한다’는 생각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던 탐욕과 분노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문은 물론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모두 허구였음이 자각된다.

나의 삶은 그렇게 찰나마다 명멸하는 점들의 集積일 뿐이다. 불교의 唯識學에서는 그 한 점을 ‘識’이라고 명명한다. 즉, 이 세상은 그렇게 점멸하는 識의 흐름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니 그것을 識의 흐름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氣의 흐름이라고 해도 좋다. 주관과 객관을 분할하고, 나와 세상을 분할하며, 정신과 육체를 분할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타파하기 위해 識일원론이라는 가설을 내세운 것일 뿐이다. 이분법만 타파된다면 氣일원론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 이를 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즉, 오직 識의 흐름만 있을 뿐이지 대상으로서의 객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관념론은 아니다.

唯境無識이라고 뒤집어 이해해도 그 취지는 같다. 오직 객관세계[境]만 존재할 뿐 주관[識]은 없다. 모든 것은 풍경일 뿐이다. 주관적 현상으로 간주되던 나의 감정이나 망상들도 모두 예기치 못한 풍경일 뿐이다. 마치 갑자기 날아가는 까마귀의 모습과 같이. 정신과 육체를 분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식학의 識일원론과 氣철학의 氣일원론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불교적 識일원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객 이분법을 타파하기 위해 唯識學에 의해 설정되었던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무미건조한 한 점의 識은 華嚴的 세계관에 의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한 점에서 살고 있다. 나는 공간적으로는 한 점 먼지만한 자리에, 시간적으로는 한 찰나 속에 존재할 뿐이다. 분주하게 요동치는 나의 ‘주의력’이 머무는 찰나적인 바로 그 한 점 속에 내가 존재할 뿐이다. ‘나’라는 말을 붙일 것도 없다. 실제로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그 한 찰나 한 점뿐이다. 그러나 그 한 점은 무미건조한 무형의 한 점이 아니다. 華嚴學에서는 그렇게 微分의 극한에 위치한 한 찰나의 시간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펼쳐지고[一念卽是無量劫], 그 한 점의 공간 속에 온 우주가 빠져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선언한다. 예를 들어, 부두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것은 내 눈동자에 뚫린 한 점의 구멍 속에 빨려든 모습일 뿐이고, 수십 년 수천 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있어도 그것은 이 순간 한 점에 불과한 생각의 붓끝으로 그려낸 모습들일 뿐이다. 나는 한 점일 뿐이다. 매 순간 주의력이 머무는 그 한 점 속에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이 담겨 있다[一中一切]. 라이프니츠Leibniz의 單子Monad와 달리 화엄의 一微塵은 이렇게 온 공간과 온 시간을 향해 창문을 열고 있다.

화엄학에서는 이러한 세계상을 帝釋天(Indra神)의 그물에 비유한다. 제석천의 그물은 그물코마다 보배 구슬이 달려 있는데 구슬 하나 하나마다 다른 구슬의 모습들이 重重無盡하게 모두 비쳐 보인다. 따라서 어떤 구슬 하나에 검은 점을 찍으면 순간적으로 다른 구슬 모두에 검은 점이 나타난다. 이를 ‘因陀羅網境界門인다라망경계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화엄적 세계관은 파동적 견지에서 구축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입자적 측면과 파동적 측면이다. 입자적 측면이란 局所的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고 파동적 측면이란 遍在的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커피잔의 모습이 책상 위에 존재한다는 일반적 관점은 국소적 측면에 대한 조망일 뿐이다. 그 커피잔의 모습이 이 방안에 꽉 차 있다는 편재적 측면에 대한 조망 역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편재적 측면에 대한 조망이 바로 화엄적 관점이다. 月印千江―남산 위에 걸린 달 하나가(국소성) 천 곳의 강에 비친다(편재성). 천 곳의 강뿐만 아니라 온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의 망막에 동시에 달의 영상이 맺힐 수 있는 것이다. 비단 커피잔이나 달의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모습이 허공에 편재한다. 눈에 보이는 모습들뿐만 아니라 소리와 냄새도 편재성을 갖는다. 따라서 산란 장소로 회귀하는 연어의 신비, 비둘기와 철새의 회귀 등도 화엄적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마치 눈을 가리고 종소리의 발원지를 찾아낼 수 있듯이 온 공간에 편재하는 정보들 중에서 자신이 목적하는 정보의 강도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온 우주에 편재하기에 나의 주의력이 머무는 어떤 하나의 점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온 우주에서 발생한 모든 정보들이 무한히 중첩되어 담겨 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뿐만 아니라, 소리, 냄새는 물론이고 전세계 수천, 수만 방송국과 모든 핸드폰에서 송신한 전파, 온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별들의 정보, 또 모든 의식의 파동 등 모든 것이 나의 주의력이 머무는 한 점 먼지만한 공간 속에 겹겹이 담겨 있는 것이다. 一微塵이 十方을 담고 있다는 화엄적 선언은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고 엄연한 사실이다. 화엄학으로 해석된 찰나적인 氣의 흐름은 ‘창문 없는 單子’의 흐름이 아니라, 이렇게 온 우주를 머금고 있는 一微塵들의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迷妄에 덮인 나는 그 중에서 내 인식의 거름종이를 거친 하나의 정보만 파악할 뿐이다.

 

한의학의 氣와 十二處

 

우리는 시각[眼], 청각[耳], 후각[鼻], 미각[舌], 촉각[身] 기관이라는 五官과 의식[意]을 통해, 각각 형상[色]과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감촉[觸]과 생각[法]을 파악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十二處’라고 부른다. 십이처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불교적 분류 방식 중의 하나이다. 십이처설의 취지는 그런 열 두 가지 영역 중의 그 어디에도 영원하고 자기동일적이며 자발적인[常一主宰]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我의 이치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열두 가지 영역으로 분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사과의 경우 그 모양과 색깔은 눈에 보이며, 씹히는 소리는 귀에 들리고, 향긋한 냄새는 코를 통해 들어오며, 새콤한 맛은 혀에 느껴지고, 그 단단한 육질의 감촉은 입술과 볼을 누르며, 그것이 사과라는 생각은 의식에 떠오른다.

이렇게 오관과 의식을 통해 인식된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경락을 따라 흐르는 氣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사과를 먹는 경우는 위에서 보듯이 십이처가 모두 동원 가능하다. 그런데 氣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면 氣의 존재는 허구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 모두가 십이처 전체와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림자’의 경우 눈에 보이고 의식에 포착되기는 하지만 소리도 없고 냄새나 맛, 촉감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의 경우는 들리기는 하지만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다. ‘바람’의 경우 그 감촉이 느껴지고 의식에 포착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나 맛도 없다. 기하학에서 정의하는 엄밀한 의미의 ‘점’이나 ‘직선’ 등은 구체적인 시각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의식 내에는 존재한다. 氣는 어떠한가?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란 경락이라는 통로를 따라 흐르는 것으로 촉각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될 뿐이다. 즉, 경락을 따라 흐르는 ‘기’란 십이처 중 촉각과 의식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침구술을 통해 그 氣의 흐름을 조절할 경우 우리 몸에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그림자가 감촉되지 않는 것이지만 햇볕을 가림으로써 열을 식히는 작용을 하듯이.

서양문화는 시각중심적oculocentric이다. 따라서 시각의 세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만을 객관적 사실로 인정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는 의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체를 해부하여 병소를 확인하고, 현미경을 통해 그 형태적 특질을 끝까지 추구하는 서양의학적 접근법은 시각의 세계만을 객관적 公論의 장으로 인정하려는 그들의 문화적 독특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한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시각의 영역보다 촉각의 영역이 더 중시되어 왔다. 촉각을 통해 상대의 신체적 변화를 진단하는 맥진법, 촉각에 의해 발견된 경락의 세계. 따라서 한의학을 객관적 의학으로 정립한다는 미명하에 촉각의 논리로 구성된 침구학 등의 원리를 모두 시각적 원리로 환원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몸에 느껴지는 바람과 같이 절대 시각화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촉각의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의학을 소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放棄되었던 무수한 촉각의 영역을 더욱 개발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촉각의 논리, 즉 氣의 論理를 발견해 내는 것이 한의학자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理氣論과 名色

 

주자가 말하는 理와 氣는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각각 형상과 질료, 보편과 특수 또는 이성과 감성에 대비된다. 자연물은 물론이고 인공물조차 理와 氣를 갖는다. 주자에 의하면 계단의 돌은 그 돌의 理를 가지며 대나무 의자는 대나무 의자의 理를 갖는다. 理란 사물을 생산하는 근본이고 氣란 사물을 생산하는 재료이다. 理란 관념적, 정신적, 추상적 영역에 속하고 氣란 물질적, 육체적, 구체적 현상을 지칭한다. 그리고 만물을 포괄하며 만물에 내재하는 최고의 理로서 太極이 설정된다.

이런 의미를 갖는 理氣에 대한 불교적 대응 개념을 구태여 찾아낸다면 名色na-ma-ru-pa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상의 정신적 측면을 지칭하는 名은 대개 理에 해당되고 물질적 측면에 해당하는 色은 氣에 해당된다. 그리고 색은 地大, 水大, 火大, 風大의 네 요소[四大]로 세분된다. 지대는 견고함을 그 특성으로 삼고, 수대는 축축함(또는 유동성), 화대는 따뜻함, 풍대는 움직임을 그 특성으로 삼는데, 이런 사대의 조성 비율에 따라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에 대해 名이 부여됨으로써 하나의 현상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名으로서의 理와 四大로서의 氣의 조합에 의해 구성된 사물의 실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모든 것들이 空하다고 선언한다. 불교적 이기론 즉, 명색론은 理의 극단에 위치한 無極으로서의 태극, 즉 空性의 자각을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된 도구적 교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