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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유·불·선·도·교

불교의 수행법

by 윈도아인~♡ 2012. 3. 17.

불교의 수행법  

Ⅰ.불교의 수행법
 
1. 看話禪
 
大慧宗 의 看話禪은 옛조사들이 깨닫게 된 公案을 참구하는 새로운 선수행의 방법이다. 公案이란, 관공서의 문서라는 뜻으로 법칙의 條文을 말하는 의미이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 없으며 반드시 순수한 절대성의 의미이다.  선문에서는 佛祖가 개시한 불법의 도리, 그것을 의미하고 있는데 학인들의 분별의식을 떨쳐버리고 참구하여 깨달아야 할 문제이다. 公이란, 성현들이 깨달은 그 길(轍)을 하나로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의 理致며, 案이란 성현들께서 그 깨달은 이치인 도에 나아가는 修行의 올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法을 만들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막고 끊기 위하여서였다. 따라서 한 사람의 臆見이 아니라 신령스런 佛法의 근원에 합당하고 妙旨에 계합하여 생사의 굴레를 타파하여 언어나 문자, 분별을 초월한 三世十方의 수많은 佛菩薩과 함께 똑같이 불법의 지극한 이치를 稟承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다만 사량분별인 그 마음을 한꺼번에 꽉 누르고 그곳에 話頭를 看하도록 하라" "예"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되 "拘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조주스님이 "없다(無)"라고 답했다. 이 無자라는 글이 여러 가지 비뚤어진 잘못된 지각을 쳐 부수는 무기이다.
 
大慧의 看話禪은 일체의 사량분별, 차별심을 억누르고 그곳에서 조주의 無자 話頭를 참구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公案은 분별심을 버린 절대적인 참선의 방편인 것이며 근원적인 자기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公案이 타파되기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公案과 대결해야 한다. "의심이 커야 깨달음도 크다"(大疑之下必有大悟) 했듯이 公案에 대해 의심을 집중시켜 자신이 의심과 하나가 되어 버리도록 하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一行三昧의 실천인 것이지 깨달음을 기다리는 待悟禪的인 漸修는 아니다. 큰의심을 전제로 한 公案禪의 수행적인 구조는 육조혜능이다.  사실 公案 看話禪은 疑團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며 의심이 나지 않는 公案은 의미가 없다.
 
2.默照禪
 
묵조라는 말은 원래 僧肇法師의 "肇論"에 있는 "성인은 깊은 마음으로 묵묵히 비춘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묵조선이라는 말은 대혜종고선사가 "莫作諸想하고 但參無字話頭"라는 선풍의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그것과의 구별로서 제시되어진 것이다.  
 
默이라는 것은 寂默의 뜻으로 언어나 분별을 떠난 세계로 불성의 실체를 그 근본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서 형태적으로는 요가적인 좌선수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照라는 것은 照了의 뜻으로 분별을 떠난 무심의 각성으로서 이러한 무심적인 마음을 상실하지 아니할 때 그가 처한 곳에서 자재할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주체인 청정한 불성은 그 스스로 비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默에 있어서의 무분별과 照에 있어서의 知이며 존재의 覺性을 말하는 것이다.다른 수행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좌선만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신비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헤아리며 집중하여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러한 묵조를 기반으로하여 일어난 선풍은 당대의洞山良价(807년 출생)선사에 의해서 開宗된 조동종에 의하여 명맥이 이어지면서 밀밀면면 只觀打坐를 주장하는 宏智正覺(1087-1157)선사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그 선풍을 드날리게 되었다.
 
묵조선의 중흥자라고 할 수 있는 宏智선사는 山西省 濕州 濕顯縣 출신으로 속성은 李씨로 11살에 淨明士에 출가하여 14살에 晉州 慈雲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宏智선사의 깨달음은 정화3년(1113) 그의 나이 23살 때 丹霞禪師(739-824)의 空劫以前이라는 선문답에 일어났다고 普燈錄에 전해지고 있다.  
 
선화6년(1124)에는 그의 나이 34살때 大聖普照寺에서 開堂하였다. 그후 소흥27년(1157)10월 8일 67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30년 가까이 그의 종풍을 드날렸다.
 
묵조선을 대표하는 굉지선사의 기본사상은 只觀打坐, 修證不二, 默照, 消極性, 先定修慧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서 대혜선사에 의하여 묵조사선이라고 배척 받았지만 묵조라는 말은 굉지선사가 자주 사용한 말로서 이의 특징은 宏智語錄과 默照銘 잘 나타나 있다.

默照銘에 의하면  "禪이라는 것은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할 때 영묘한 작용이 분명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 비출 때에는 확연하여 텅비어 있지만 그 본성은 영묘히 작용하고 있다. 영묘히 작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비추며,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와 분별을 초월하고 있다."

또한 宏智語錄 제4권에는 "좌선하고 있는 사람은 수행도 깨달음도 없다. 그는 오염되지 않고 철저히 청청하며 진실로 완전하고 청정한 곳에 주목하여 그대로 받아들여 모든 번뇌를 없애고 몸으로 실천한다면 생사의 미혹한 세계도 원래 근거가 없고 출입에도 흔적이 없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일체의 모든 만물이 부처라는 사상에 입각한 묵조선은 우주의 모든 만유가 그대로 진실임을 나타내는 인간 정신의 혁명을 나타낸다. 묵묵히 只觀打坐하여 앉아 있지만 그 打坐한 곳에서의 정신적 역동성은 우주의 모든 만유를 포함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존재의 모든 허구성을 타파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즉 묵조선에 있어서 깨달음의 세계는 새로운 것이 아닌 원래 그 실체로서 구비되어져 있는 것이며, 修證不二의 사상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3. 默照禪과 看話禪의 比較

먼저 공안선의 실천구조는 사실 고대 인도의 요가 명상법과 내용적인 핵심이 거의 다를바가 없다. 마음을 어떤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켜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신집중은 요가수행의 본질이기도 하다. 대혜의 간화선도 인도의 요가 수행처럼 全身心을 총동원하여 의심으로 응집시키고 인도요가의 수행자들은 좌선명상의 그 자체가 목적이지만 공안선은 의심이 타파되어 자기의 근원적인 깨달음의 大悟의 수단으로 주장한다. 그가 단순히 좌선명상의 정신집중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枯木禪을 묵조의 邪禪이라고 심하게 배척하고 있다. 옛날 神會가 북종의 看心看淨의 좌선을 공격한 것처럼, 대혜의 간화선은 선불교의 병폐를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실천법이며 그가 묵조선을 邪禪이라 비난한 것은 주체적인 大疑가 결여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간화선이 공안을 참구하여, 자기의 근원을 마음에 照顧해 보는 道具라면 묵조선은 오직 묵묵히 스스로 비춘다는 묵조를 표현하는 말이다.

같은 비유로 明鏡이나 明珠, 空谷, 本圓, 本明, 本寂本靈 등이라는 말로 本來性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굉지어록 4권에는 "묵묵히 좌선할 때가 그대로 투철한 깨달음의 세계가 顯現하는 것이다." 라고 하며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묵조의 특징은 수행과 깨달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修證不二로 하고 있다. 묵조선은 그러한 깨달음을 묵조로 표현하고 있는데 大慧의 간화선은 체험적인 깨달음의 활동적인 표현에 반하여 觀照的인 깨달음의 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간화선은 깨달음의 활동적인 표현이라면 묵조선은 묵묵히 자기의 내면을 관하는 靜이라 비교해 볼 수 있다.

4.呪力

주력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주문의 힘이란 뜻이다. 긴 주문을 다라니라 하고,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한다. 다라니는 총지라고 번역하는데 무량무변하다는 뜻이 있으며 외우는 이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한다는 믿은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언은 만트라의 번역이려며 밀어라고도 번역한다. 참된 부처님의 말씀이며 비빌스런 깊은 뜻이 들어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일반적으로 쓰는 주문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즉 마음 속의 깊은 뜻을 조금도 꾸밈없이 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수식을 피한 단도직입적인 말이란 뜻이며 지극히 함축된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경전을 번역할 겨우 이 진언은 번역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의 발음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으나 거리감이나 신비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진언의 더 깊은 뜻은 간곡한 심중을 표현하는 호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때의 말은 통상적인 단순한 뜻을 넘어서 말로 표현하기 어러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5.看經

看經할 때는 경전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다. 동시에 그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이다. 이것이 看經의 수행방법이다. 이 중에서 중요하게 인식해야할  것은 귀로 듣는 일이다. 관새음보살이 바로 귀로 소리를 들음으로서 진리를 깨닫는 이야기를 능업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그 만큼 듣는 것이야말로 깨쳐들어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

禪家에서도 스승과 제자간의 禪問答을 보면 그 문답이 오고가는 그 순간 말 아래에 크게 깨치는 이야기를 어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문답은 엄연히 언어문자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 내용은 마음이 언어의 모순성과 한계성을 교묘히 피하고 바로 不立文字의 터널을 지나 깨침의 사자후를 보여준다.

禪이라는 것은 無心의 상태를 말한다. 禪的 마음에는 아무 내용물도 담겨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떠한 요구도 의문도 사념이 없는 무소유의 상태다. 어떠한 경전, 학문이나 철학서적 속에 담겨 있는 의미나 미묘한 이치도 이자리에서는 不立文字다. 아무 소용이 없다. <大乘起信論>에서는 깨친 마음의 상태는 마치 허공과 같이 텅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禪이 이와 같이 不立文字어떻게 간경이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간경이 선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看經이 바로 禪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간경소리를 귀로 듣는 것에서 찾고싶다. 물론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다고 다 진리를 깨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들어야만이 되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언어문자를 들으면서 언어문자에 빠지는 구두선이 되는냐 아니면 언어문자의 그물을 피하고 不立文字의 禪的 세계로 들어가는냐하는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간경은 분명 根境識의 三事和合에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경전이라는 대상(境)과 눈과 입과 귀라는 根과 대상과 근에 의하여 아는 마음인 識과의 三者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삼사화합의 인연을 알면 깨침이고 모르면 無明이다. 中論에서 인연은 무자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인연을 안다는 것은 인연 속에는 我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경전은 법이고 법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因의 힘을 가지고 있다.

冶父; 聞이여.

說誼;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합처 여별지하면 견처가 시진문이니라.

본래 한 정명이 나뉘어져 육화합(육경+육근=육식)이 되었으니 합한 곳에서 깨달으면 보는 곳이 참으로 듣는 것이니라.

  冶父; 간절히 경계를 따라가지 말지어다.

  說誼; 귀에 가득한 것이 소리가 아니거늘 듣는 것이 무엇이며, 확연히 내가 없거늘 듣는 자는 이 누구인가? 이같이 깨달으면 꾀꼬리 소리와 제비의 지저귐을 시끄러운 대로 맡겨두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면 궁상각치우(세상의 모든 소리)가 나를 항상 끌어당기리라. 그러므로 말하되 간절히 경계를 따라가지 말지어다.

 冶父; 원숭이는 고개위에서 울고 학은 숲속에서 우는데  조각 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물은 긴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내린 한 밤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하늘이 차가움을 알리도다.

  說誼; 학이 울고 원숭이 우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니, 누가 원통문이 크게 열림을 믿으리오. 듣는 곳을 돌이켜서 다시 듣는 곳에 마음 길이 끊어지면,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가득하더라도 번뇌가 되지 앟으리라. 듣지 않는 것이 일찍이 듣는 데 걸리지 않으니 낱낱 사물이 나를 위해서 무생을 말하도다.

               고요한 밤 가을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메아리여. 
               한 소리 울려 하늘이 차가움을 알려오도다. 
               또 일러라. 이것이 듣는 것인가. 듣지 않는 것인가. 
               담박한 것이 어찌 성색 밖에 걸릴 것이며 
               비어 고요함이 어찌 유무중에 떨어지리오.

當學般若波羅蜜故得多聞故名爲大者 謂諸菩薩學般若故過去未來一切諸佛所說言敎 已說當說皆得遍聞如經言 過去諸佛已說現在諸佛今說未來諸佛當說 欲聞聞已自利亦利他人 當學般若波羅蜜

論曰菩薩有三昧名觀三世諸佛三昧 入是三昧 皆見三世諸佛聞其說法

問過去未來諸佛音聲至現在故菩薩得聞耶 聲不至現而三昧力能聞已滅未生音耶 若彼音聲至現在者 云何已滅重生於現 云何未生先現於今 若彼音聲不至今現則彼音聲已滅未生 未生已滅卽是無聲 云何得聞於無聲耶

答彼過未音雖不至今而能得聞三昧力故 如障外色雖物所隔而能得見天眼力故過未音聲當知亦爾 雖時有隔而能得聞 得聞曾有當有之聲非聞已滅未生之無 若彼過未諸佛力故聲至於今 而令聞者凡夫二乘皆得聽聞 非謂般若三昧之力 故此經言已說當說 當說卽是當有之音 已說卽是曾有之聲

問菩薩現能聞於曾當 佛豈不能令聲至 今若能令至不離前難 重生逆理不應理故

答誰言諸佛不能令至但說聞至非般若力 當知諸佛法輪音聲遍於三世無所不至 能至所至不可得 故如華嚴經言譬如章文字悉入一切數所入無所入 法輪亦如是 如來轉法輪三世無不至 所轉無所轉求之不可得 雖去來音至於今現而非重生亦非過理 所以然者 佛知三世長遠之劫卽是極促一念之頃 而不令劫促 亦不令念長 是故當知彼聲至今無重生逆理過失 如彼經言 無量無數劫卽是一念頃 亦不令劫短究竟刹那法 且止乘論還述本宗 生大人故名爲大者 四種大人皆從般若而得生故 如論說言一切世間中十方三世諸佛是第一大

6.위빠사나 명상법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수행법의 주제는 빛, 소리, 호흡, 마음 네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네가지를 집중하는 방법은 사마타(Samatha)와 위빠싸나(Vipassana, 觀)로 나눌 수 있다. 사마타 수행에는 위빠싸나의 혜(慧)가 없지만 위빠싸나 수행에는 사마타의 집중(止,定)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사마타와 위빠싸나에 대한 개념적인 차이를 살펴보고 위빠싸나 수행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법을 붓다의 대념처경(Maha Sati-patthama sutta, 大念處經)을 중심으로 보겠다.

1).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뜻

(1) 사마타 (Samatha, 止, 定, Tranquility)

하나의 명상주제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이루어지는 고요함(Calmness)과 평온(Tranquility)의 상태로 삼매(三昧, 止, 定)로 일컬어진다. 사마타의 특징은 흩어짐(산만함) 없이 한 곳에 집중하여 방황하지 않는 기능을 가진다. 반면 사마타의 집중력은 아무리 평온하고 환희를 느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은 사마타로 해답을 얻는다고 생각했었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 가기 전에 사마타 8선정을 완성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후 위빠싸나로 12연기를 관찰하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었다.

(2)위빠싸나(Vipassana, 觀, 慧, insight)

문자 그대로는 "꿰뚫어 봄"을 뜻한다. 영어로는 통찰력(insight)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팔리어로는 vipassana(觀)와 panna(智慧), sati(주시, attention)가 서로 대체 용어로 사용된다. 이것을 종합하면 "즉각적인 알아차림", "여러 현상(無常, 苦, 無我)을 봄", "현상 이전까지 꿰뚫어 봄"의 세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사마타가 인식(想)이나 의식(意識)의 수준에서 못 벗어나는 반면 위빠싸나는 의식 이전까지 꿰뚫어 볼 수 있으므로 깨달음이 가능하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실상을 밝혀내는 이치와 같다.

(3)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차이

2). 몸에 대한 관찰 (k yanupassana)

①호흡에 대한 마음집중

"그런데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떠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住)하는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숲속에서나 나무 아래서나, 빈방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마음을 챙겨서 앉는다. 그는 마음 집중하여 숨을 들이쉬고 마음 집중하여 숨을 내쉰다. 혹은 길게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혹은 짧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혹은 짧게 숨을 내쉬면서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온몸에 대해 느끼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수련하고 '온몸에 대해 느끼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라고 수련한다. '신체적 반응(身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수련하고 '신체적 반응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라고 수련한다.

이렇게 자신을 수련한다.

비구들이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그 제자가 물레를 오래 돌리면서 '나는 오래 돌린다'라고 알아차리고 짧게 돌리면서는 '나는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듯이 이와 같이 비구는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라고 알아차리며 또는 짧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리고 짧게 숨을 내쉬면서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온 몸에 대해 느끼면서 숨을 들이쉰다' '온몸에 대해서 느끼면서 숨을 내쉰다' '신체적 반응을 가라앉히면서 숨을 들이쉰다.' '신체적 반응을 가라앉히면서 숨을 내쉰다'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수련한다.

이와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혹은 밖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여 안팎으로 함께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혹은 몸에서 생겨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또는 몸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또 몸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몸이다'라고 그 자각(念)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지금 현재 대부분의 동남아 위빠싸나 선원에서는 호흡수련(Anapana sati, mindfulness of breathing) 으로 지도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법을 코끝이나 입술 주변 등에 숨결이 강하게 와 닿는 부분에 집중하여 감각의 변화, 의식의 변화 등을 관찰한다. 오직 미얀마의 마하시 수도원에서만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여 배가 일어날 때는 "일어남", 꺼질 때는 "사라짐"하면서 관찰한다. 한마디로 들숨, 날숨을 통하여 선정을 계발하고 몸과 마음의 삼법인 ( 無常, 苦, 無我)을 관찰하여 몸과 마음의 본성을 철견(徹見)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면, 상기 원문에서는 "알아차린다"로 번역했는데, 이는 팔리어로는 반야(panna)의 동사형인 pajanati를 쓴다. panna의 동사형인 pajanati를 이해하면 위빠싸나 수행은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이 단어 한 마디에 수행의 핵심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붓다가 사마타 8선정을 다 성취하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었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빠싸나로 12연기를 관찰하고 무상 정등 정각(無上 正等 正覺)을 이루신 후에 "나는 법에 대한 5가지를 얻었노라"고 선포했다. 그 5가지가 "눈(眼, cakkhu), 지(智, nana), 혜(慧, panna), 밝음(明, vijja), 빛(光, aloka)"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반야 지혜(panna)를 수행에 임하는 초보자에게 바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대상이 있는 의식인 오온(五蘊)과 대상을 꿰뚫어 보는 반야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위빠싸나 수행은 대상이 있는 의식, 즉 생 . 멸(生 . 滅)하는 오온을  무생멸심(無生滅心)인 반야지헤로 관찰하게 한다. 여우는 여우 새끼를 낳고 사자는 사자 새끼를 낳는다. 사마타 수행은 처음부터 생멸심에 의지하는 반면 위빠싸나 수행은 무생멸심인 반야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무생멸의 질정인 적멸(寂滅)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반야의 알아차림으로 숨이 길면 길다고 알아 차리고 짧다고 알아 차린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한다. 요가나 선도에서처럼 숨을 의도적으로 길게 하거나 멈추는 것이 없다. 의도적인 것은 아(我)가 포함된 욕망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집중하면 전심전력으로 계속해서 관찰하면서 분명한 앎으로 위와같이 알아차려 나갈 때 몸에서 생(生)했다가 멸(滅)해 가는 현상과 그 원인을 자각(自覺)한다. 이때 생(生)함은 팔리어로 사뮤다야(samudaya)이다. 사뮤다야는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대상과 함께 일어나는 연기적인 조건의 생태이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를 관찰할 수 있다.

호흡의 원인은 무명, 욕망, 업, 공기, 음식이다. 기타 몸에 대한 현상원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 "안팎으로 함께"에서의 안팎은 나와 남의 몸과 마음상태도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들숨, 날숨이나 배의 움직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면 우선 호흡의 길이를 관찰하고, 그 다음 배의 형태나 모양을 관찰한다. 관찰이 깊어지면 몸 전체 혹은 배의 움직임과 더불어 다른 느낌들이 관찰된다. 이 느낌의 처음, 중간, 끝을 관찰하면 정(定)의 상태도 깊어지게 되어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게 되어 잘못된 가아(假我)에서 벗어나 탐, 진, 치를 제거하고 자신의 참성품을 발견하게 된다.

②행동 태도(몸의 움직임): 行, 住, 坐, 臥

 "다음으로 또 비구들이여, 비구는 가면서는 '나는 가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서서는 '나는 서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앉아 있으면서는 '나는 앉아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누워 있으면서는 '나는 누워있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어떠한 상태로든 몸이 놓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혹은 밖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혹은 몸에서 생겨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또는 몸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또 몸에서 생(生)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몸이다'라는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행(行), 주(住), 좌(坐), 와(臥)에서 몸의 움직임에 대해 빈틈없이 미세한 현상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나가는 수행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관찰없이 지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수행한다. 단지 알아차릴 뿐 이렇게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관찰해 가면 행동하기 이전의 의도(aim)가 관찰돠어 몸의 올바른 행위(身業)가 이루어진다. 즉 급한 행동, 신경질적인 행위 등이 다스려지고 부수적으로 여행을 할 때도 피로감이 덜하다. 그치고 몸의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여 몸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주된 동작

 몸의 움직임에 대해서 삶에 대한 주의력으로 관찰한다. 몸의 동작, 여기에 수반되는 거친 감각에서부터 미세한 감각, 신체 각 기관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수관(隨觀)해 나간다. 호흡에서 "몸 전체를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쉰다(마쉰다)"와 비슷하지만, 여기에서는 호흡이 아닌 동작 위주이다.

 <경행 Walking Meditation>

 경행은 호흡과 더불어 주된 수행법중의 하나이다. 집중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똑바로 일정하게 걷는 연습부터 한다. 빨리 걷거나 천천히 걷거나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한다. 스텝은 1단계에서 6단계까지 나누어서 가르치는 곳도 있다. 보통 발바닥이나 발목 밑에 집중하여 "들어올림", "앞으로 나감", "내려 놓음"의 3단계로 수련한다. 이때 발바닥, 땅과의 접촉에서 감각, 무릎, 다리의 근육, 당기는 힘, 의도 등을 관찰한다. 경행의 한쪽 끝에 다다르면 "서 있음", "서있음", 둘째는"듣고자 함", "듦 듦", 앞으로 가고자 할 때는 "가고자 함", "감 감" 이렇게 명칭을 붙여 주면서 수행하면 효과적이다. 돌아서기 전에 잠시 멈추어서서 마음 상태를 관찰해 보기도 한다.

 손은 배위에 포개어 놓고 시선은 2-3미터 앞에 고정시킨다. 기타 일을 하거나 일상 생활에서는 의자에 닿아 있는 엉덩이나 등 부분의 감촉, 일할 때의 손발에 손발에 닿는 감촉을 관찰해도 좋다.

 <모든 행동에 대한 올바른(분명한) 알아차림>

 "다음으로 또 비구들이여, 비구는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나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앞을 볼 때나 뒤를 볼 때나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며, 구부릴 때나 펼 때나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린다. 옷(가사)을 입거나 발우를 들 때도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먹고 마시고 씹으면서 맛볼 때도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리며 대소변을 볼 때도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린다. 가면서나 서서나 앉아서나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말할 때나 잠잠히 있을 때나 모든 상황에서 이를 명확하게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혹은 밖으로 몸에서는 몸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안팎으로 함께 몸에서는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혹은 몸에서 생겨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또는 몸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또 몸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몸이다'라는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관찰하는 경우이다. 이 때 행동하기 전의 "의도""생각"도 관찰해야 한다. 여기에는 네가지 분명한 이해가 있다.

① 삽따가 삼빠쟌나 (Satthaka-Sampajanna) : 언행(言行)이 유용한지 아니한지 관찰한다.

② 삼빠야 삼빠쟌나 (Sappaya-Sampajanna) : 언행이 유용하더라도 적절한지 아니한지를 관찰한다.

③ 고짜라 삼빠쟌나 (Gocara-Sampajanna) : 계속해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빈틈없이 쉬지않고 알아차려 나가는 것을 말한다.

④ 아하모아 삼빠쟌나 (Assammoha-Sampajanna) : 계속해서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해 나갈 때 무상, 고, 무아 등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구분할 수 있고, 경행이나 일체의 행동에서 "의도""원인과 결과" 등을 관찰하고, 무상(無常)을 이해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나"라고 착각하는데 관찰이 깊어지면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조건적인 현상" 즉 상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외의 신(身), 수(受), 심(心), 법(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부족하나마 여기서 맺고자 한다.

(출처/만갑이네 글판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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