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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유·불·선·도·교

도교의 圓상징과 無極, 太極

by 윈도아인~♡ 2012. 3. 17.

도교의 圓상징과 無極, 太極

金 洛必 (仁荷大)

 


1. 머릿말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의 진리와 유교, 및 도교사상간의 상통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太極, 혹은 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自然, 혹은 道라고 하였으며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淸淨法身佛이라 하였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하더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
위의 언급에서는 태극, 도, 법신불을 유, 도, 불의 대표적 개념으로 제시하고 상호간의 상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태극(또는 무극)을 유교사상의 근원적 개념으로 밝히는 것은 주로 성리학을 염두에 둔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좀더 엄밀히 살펴보면 무극과 태극을 상호 관련시키면서 중요한 철학적 범주로 논의한 것은 도교사상에 그 연원이 있다. 본래 도교사상은 그 성립 초기부터 노자의 도사상을 중요한 철학적 기반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무극, 태극을 중시한다고 해도 도를 궁극적 개념으로 제시했던 노자이래의 전통이 소홀히 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와 도가사상의 회통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道論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고 도교사상사에서 원상징이 대두되고 이와 관련되어 무극, 태극이 거론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꾸어 말하면 도교의 원상징이 지니는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원상징의 보편성을 확인하려는데 초점을 두었다.
원불교의 원상징은 직접적으로는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체험에 바탕한 것이지만 역사적 측면에서는 볼때 선불교에서 제시된 다양한 원상징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원불교 원상징의 기본적 의미는 불교사적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며 이 분야에서의 연구업적도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각을 달리하여 도교사상사, 나아가 중국사상사에서 원상징이 거론되는 맥락에 유의하려고 한다. 이는 원상징이 거론되는 또 다른 중요한 전통을 드러냄으로써 원상징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일원상 진리에 관한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게 하자는데 목적이 있다.

 

2. {周易}에서의 神과 圓

 

도교에서 원상징이 사용된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도교에서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 {주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교사상과 도교사상은 중국에서 발생하여 오랫동안 서로 상보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중국인의 세계관과 삶의 철학에 부단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이 두가지 사상은 직접, 간접으로 {주역}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며 형성,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따라서 후에 유교, 및 도교에서 무극, 태극을 핵심개념으로 중시하거나 및 이를 일원상으로 상징하게 된 현상을 이해하려면 {주역}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먼저 살펴볼 것은 {주역}에서의 象의 개념이다. {주역}, <繫辭>上에서는 {주역}이 제작된 연유에 관해 "성인이 괘를 베풀어서 그 상을 보고 말을 덧붙혀 길흉을 밝히고"라고 밝힌다. 성인이 괘의 상을 통해 인간사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상은 괘상, 곧 팔괘나 64괘의 괘상을 뜻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64괘의 각 爻辭의 상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의 뜻은 무엇인가? <계사>, 상에서는 이에 대해 " 성인이 천하의 다양한 것을 보고 그 모습을 견주어 그 사물의 마땅함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상이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사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상이란 의미이다. 여기서의 사물은 각각의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사태를 의미할 수도 있다. 사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계기에 관해서는 "하늘이 象을 드리워 길흉을 나타냄에 성인이 이를 형상화하며"라고 말한다. 성인이 자연계를 관찰한 끝에 가장 적절한 상징을 형상화했다는 의미이다. 관찰을 통해 형상화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이고 卽物的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乾卦나 坤卦에서 보듯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측면이 많다. 결국 성인이 포착한 의미를 괘의 형태로 표현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성인이 상을 세워 그 뜻을 다 드러내며 "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주역}의 設卦傳에서는 8괘가 상징하는 다양한 사물에 관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건괘는 하늘, 임금, 아버지, 금등을, 곤괘는 땅, 어머니, 가마솥등을 상징한다. 8괘가 서로 중첩되어 형성된 64괘의 괘상이 상징하는 의미에 관해서는 64괘의 명칭을 통해 간략히 규정되어 있으며 384효(爻)의 효사에 대해서는 각 효사가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8괘에서 64괘, 384효로 세분화될수록 그것이 지시하는 상황이나 사물이 보다 구체화되며, 역으로 384효에서 8괘로 요약될수록 지시하는 의미는 보다 함축적이다. 8괘는 다시 건과 곤의 두 괘로 집약될 수 있으며 간단히 요약하면 음과 양으로 귀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다양한 구체적 사물로 나타날 때와 나타나기 이전의 모든 것에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 <계사>, 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蓍草의 덕은 두렷하고 신묘하며 괘의 덕은 방정하면서 아는 작용을 지닌다."
그렇다면 두렷하고 신묘함을 갖춘 시초의 덕이란 무엇인가? <계사전>에서는 이를 구체적 사물을 의미하는 '物'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神'으로 표현한다. 또한 신을, 역의 원리 자체라는 의미로 '易'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신의 성격은 구체적으로 한정하기 어려우나 만물의 변화를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다. 이 규정하기 어려운 신의 성격은 세 가지 방향에서 설명된다. 첫째 자연변화가 헤아릴 수 없는데서 알 수 있듯 신의 작용은 무한한 다양성을 함축한다. 둘째 따라서 신은 시간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를 <계사전>에서는 "신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역은 일정한 체가 없다(神無方 易無體)"라고 표현한다. 셋째 "오직 신인 까닭에 빨리 아니해도 능히 이루며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나니"라고 한데서 알 수있듯 신에는 상호 모순되는 성격이 융합되어 있다.
특히 無方, 無體에 관해 唐의 역학자인 孔潁達은 {周易正義}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첫째 신은 그 처소나 행위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無方이다. 둘째 두루 노닐며 운동이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으니 이 또한 무방이다. 無體의 뜻은 첫째 저절로 변하지만 그 변화의 유래를 알지 못한다는 것, 즉 형체가 없다는 뜻이고 둘째는 변화를 따라가므로 하나의 정해진 체가 없어 無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은 태극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주역} <계사전>에서는 이에 관해 별다른 언급이 없다. 후세의 주석가들은 신과 태극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신, 또는 태극을 어떻게 상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구체적 상황과 사물을 팔괘와 64괘로 상징할 수 있듯 가장 적절한 상을 찾는 문제이다. 이에 신의 성격을 원이라 규정한데서 짐작할 수 있듯 가장 적실한 상징으로서 원상징이 대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역}에서 상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법이 제시된 이래 漢代에 이르자 상과 이에 관련된 數에 의거하여 자연의 변화와 인간사를 규명하려는 경향, 이른바 象數學이 널리 확산되었다. 한대의 易學을 특징지우는 象數易學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수역학은 괘나 효가 지시하는 사물을 너무 구체적으로 나열하거나 서로의 관계를 견강부회식으로 연결시키는 폐단을 낳았다. 이에 위진시기의 인물인 王弼은 상수학의 폐단을 지적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상의 본뜻을 살리고 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得意忘象論을 제시한 것이 그것이다. 다음은 득의망상론의 요지이다.
"상은 뜻에서 나온 것이며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이다. 뜻을 드러내는데는 상과 같은 것이 없고 상을 다 드러내는 데는 말과 같은 것이 없다. 말은 상에서 나오며 상은 뜻에서 나온다. 말이 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을 탐구하여 상을 볼 수 있다. 상은 뜻에서 나오기 때문에 상을 탐구하여 뜻을 볼 수 있다. 뜻은 상에서 다 드러나며 상은 말에 의해 드러난다. 말은 상을 밝히기 위해 있는 것이므로 상을 얻으면 말은 잊는다. 상은 뜻을 간직하기 위해 있는 것이므로 뜻을 얻으면 상은 잊는다."
왕필의 득의망상론은 상의 본질이 어떤 사상이나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음을 밝히므로써 상수학의 폐해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결과적으로 상의 존재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그 한계를 지적하는데 역점이 두어졌다. 따라서 왕필의 입장을 계승한 義理易에서는 일반적으로 상수학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도교수련가(특히 內丹思想)들사이에서는 한말 魏伯陽의 {周易參同契}가 출현한 이래 특히 상을 통해 수련단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상은 수련단계나 원리를 표현하는데 매우 적절하고 유용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후에 이러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청대 劉一明의 {象言破疑}이다. 그는 우선 왕필이 천명한 기본입장, 즉 상이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므로 뜻을 얻으면 상을 잃는다는 관점은 일단 긍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입장을 긍정하면서도 상의 적극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象言이란 직접적이거나 분명한 표현이 아니나 빈 말이나 특이한 말도 아니다.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듯 말이 지시하는 것이 증거가 있어 상을 취하여 참을 밝히는 말이다. 후인들은 그 의미를 궁구하지 않고 단지 상에 집착하는 것에 그쳤다. 유학자는 이를 보고 괴이하여 경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도가에서는 이를 피상적인 상으로 여겼다. 심지어 상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생각하므로써 백가지 노력이 모두 구부러진 길과 삿된 행에 흘러 스스로 性命을 헤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상이란 허탄하거나 특이한 표현법이 아니라 내단수련의 원리나 단계를 밝히기 위해 매우 필요한 수단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상의 본의를 잃었을 때 초래되는 혼란이나 부작용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적극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3. 도교 원상징의 흐름

 

도교사상사에서 도교수련의 원리나 단계와 관련시켜 일원상의 상징이 사용된 것은 {주역참동계}가 출현한 이후이다. 청대의 毛奇齡에 의하면 원래 {주역참동계}에는 <水火匡郭圖>, <三五至精圖>등이 첨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수화광곽도>는 중앙에 일원상을 배치하고 일원상의 주위에 坎卦와 離卦를 원형으로 늘여 합한 것이다. 감괘나 리괘는 인체내의 水火二氣를 상징하므로 일원상은 陰陽二氣의 바탕이 되는 一氣를 상징한다. 한편 <삼오지정도>는 금목수화토의 오행이 하나로 귀일함을 상징하는 그림으로서 일원상은 오행이 합일됨을 상징한다. 모기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상징은 이미 {주역참동계}가 성립될 당시에 제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역}의 태극과 {도덕경}의 무극을 연결시키며 태극과 무극을 도교의 핵심개념으로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당말의 陳 이다. 태극이 {주역}에서 우주의 근본적 존재로 간주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주역}외에 {장자}에서도 태극이란 표현이 보이나 장자의 경우는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가장 끝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태극이 도교사에서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수당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太上老君開天經}에서 그 예가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우주생성의 과정을 밝히면서 太易, 太始, 太初, 太素 이후에 태극의 단계를 제시하고 태극은 음양오행이 완전히 갖추어진 단계라고 보고 있다.
한편 무극은 {도덕경}, 제 28장에서 "참된 덕은 어긋남이 없어 무극에 돌아간다."라고 한데서 최초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무극은 만물이 그곳으로 돌아가야하는 근본적 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후 {도덕경}에 관한 주석의 하나인 {河上公章句}에서는 이에 대해 "사람이 능히 천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으면 참된 덕이 자기에게 간직되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으면 장생하여 몸을 무한한 세계에 귀의시킬 수 있다."라고 주석하였다. 이후부터 도교수련가 사이에 무극을 최고의 수련경계로 삼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고려할 때 무극과 태극이 거론된 것은 도를 氣論的 우주생성론과 연결시키는 경향과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진단의 우주생성론은 <無極圖>, <先天太極圖>등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무극에 관해서는 "무극은 태극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은 한 점의 텅비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서 이른 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기의 가장 원초적 상태를 무극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태극은 "한기가 서로 섞이고 융합하여 일만기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태극이라 부른다. 이는 바로 내 몸이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이다."이라고 말한다. 그의 사상에서 무극은 바로 도를 의미하며 태극은 도에서 나온 一氣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극도>는 진단이 화산의 석벽에 각인했다는 그림인데 청초의 인물 黃宗炎은 <圖書辨惑>에서 '方士修煉之術', 즉 내단사상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풀이한다. 그는 또 <太極圖說解>에서 그 그림은 태극에서 음양오행이 나오고 음양오행의 변화에 따라 인간과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역으로 소급하여 인간이 도와 합일함을 지향하는 수련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그림은 수화광곽도와 삼오지정도를 결합하고 수련의 초단계와 마지막에 일원상을 배치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 周濂溪의 <태극도>와 완전 동일하다. 다만 그림의 해석에서 성리학과 도교의 입장이 달라진다. 도교적 시각에 의하면 최초의 일원상은 금단이 형성되는 씨앗(玄牝之門이라고 함)으로 풀이되며 마지막 일원상은 금단이 완성된 상태, 또는 무극(즉 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선천태극도>는 청대인물 胡謂의 {易圖明辨}에 실린 <天地自然之圖>가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된다. <선천태극도>는 인체내의 陰陽二氣가 역동적으로 순환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태극기의 태극을 세로로 세워놓은 그림에 팔괘가 둘러싼 모습을 보이고있다. 그 그림을 살펴보면 {주역참동계}로부터 乾坤을 인체에, 坎離를 水火에 배당한 입장이라든가 팔괘의 방위배치등에 관한 것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선천태극도>에서의 태극은 음양이기가 합일된 일기를 의미하는데 정태적이 아니라 그안에서 음양이기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태적 기를 의미한다.
진단이후 도교사상들간에는 무극, 태극과 도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에 관해서는 대체로 세 갈래의 해석이 있다.
첫째 진단과 같이 무극을 만물의 시원인 道로 보고 무극에서 나온 최초의 一氣를 태극으로 보는 관점으로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입장이다. 예를 들어 元代의 杜道堅의 {道德玄經原旨}에서는 " 태극은 사물이 최초로 발생할 때의 혼돈한 太一이며 무극은 태극이 생겨나기 이전의 太虛이다."라고 말한다. 이어 그의 {玄經原旨發揮}에서는 " 도는 무극이다. 역에 태극이 있다는 것은 도에서 一이 생긴다는 뜻이다. 일에서 二가 생긴다는 것은 태극에서 양의가 생긴다는 뜻이다."라 하여 도와 무극을 일치시킨다.
둘째 무극을 理로 삼고 태극을 이기의 혼합체로 삼는 관점이다. 원대의 牧常兆의 {玄宗直指萬法同歸}에서는 "무극은 순수한 理를 말한다. 이가 있은 후에 기가 있는 것인데 이기가 혼합되어 있는것이 태극이다.", 또는 "무극은 태극의 眞無이며 태극은 무극의 妙有이다. 진무는 性의 비롯이며 묘유는 기의 비롯이다."라고 말한다.
셋째 태극이 바로 무극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李道純의 {全眞集玄秘要}에서는"'無極而太極'이란 그 지극함을 알수 없을 정도로 지극함을 말한 것으로서 사사로운 뜻으로 헤아릴 수 없다. 태극의 앞에 무극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라고 말한다. 이 입장에는 둘째와 대체로 비슷하지만 이기를 나누지 않는 점이 다르다.
원대의 兪琰은 무극을 따로 세우지 않는다. 그는 저서인 {易外別傳}에서 <先天圖>라는 그림을 통해 도교수련의 원리를 밝힌다. {역외별전}이란 그 명칭이 암시하듯 일상적으로 이해된 {주역}외에 따로 비밀스럽게 전수된 본질을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유염은 그것을 <선천도>내에 숨어 있는 비밀을 통해 밝힌다고 말하고 그것이 바로 {참동계}에서 밝히려는 내단사상의 원리라고 보았다. 그가 "{역외별전}은 <선천도>의 環中의 비밀로서 위백양의 {주역참동계}의 사상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선천도>는 일원상이 중심에 자리잡고 주위에 복괘에서 곤괘에 이르는 64괘가 고리처럼 배치된 구조를 가리킨다. 이는 진단의 <선천팔괘도>와 일맥 상통한다. 여기서 64괘가 고리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정기가 부단히 순환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그림에서 중심에 있는 일원상이 곧 환중이다. 환중은 {莊子}, <齊物論>에서 유래된 표현으로서 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에서는 원래 텅빈 마음으로 무궁하게 사물에 응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유염의 <선천도>에서는 환중이 우주적으로는 태극을, 내적으로는 마음을 상징한다. 결국 그는 무극을 언급하지 않고 도와 태극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주역참동계발휘}에서도 일원상을 태극, 및 도로 규정한 바 있다.
진단이나 유염 외에도 도교수련의 경계나 기본원리를 나타내기 위해 일원상의 상징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들중 원상징의 사용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된 것은 청대 유일명의 {상언파의}이다. 그는 먼저 인간의 생로병사의 과정을 일원상을 중심하여 일원상이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설명한다. 가장 최초의 상태가 바로 무극으로서 그는 이를 胎中面目이라고도 말한다. 그는 태중면목에 관해 소리도 냄새도 없고 지극한 하나의 無라고 보고 先天眞一之祖氣라고 말한다. 무극면목에 최초로 후천적 요소가 들어가 선후천이 혼연히 어울려 있는 것이 최초의 시작, 즉 始極이다. 이것을 그는  兒面目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태극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기를 중심하여 무극과 태극을 구분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는 진단의 입장과 상통된다.
보통의 삶은 태중면목에서 영아면목을 거쳐 늙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지만 도교수련을 통하면 역으로 소금하여 태중면목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태중면목과 영아면목을 흰 바탕의 일원상으로 상징하며 그후 후천적 기질에 점차 물들어 가는 것은 일원상안에 검은 점이 발생하여 점차 확대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반대로 수련을 통하여 태중면목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에 관해 그는 太空虛無라 부르고 이 역시 일원상으로 상징한다.
한편 유일명은 수련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금단의 형성을 역시 일원상으로 상징한다. 금단은 수련이 다 이루어진 후의 완성된 인격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성의 싻을 최초로 형성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완성된 후의 상태는 앞에서 말한 태공허무에 해당하는데 금단에 관해 그는 圓陀陀, 光灼灼, 淨裸裸, 赤  등으로 그 모습을 형용한다.
조선조의 내단사상가인 權克中의 일원상 상징도 주목할만하다. 권극중은 일원상을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밖의 검은 원둘레는 선천일기이며 안의 흰 바탕은 無極眞空이다. 一氣는 비롯이 없기 때문에 원둘레 역시 시작의 기점이 없으며 眞空은 형상화될 수 없기 때문에 흰 바탕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것이다. ... 중략 ... 나는 일찌기 理氣가 서로 떠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움직일 때에는 이가 기안에 있으며 고요할 때에는 기가 이안에 있다. 이 원상은 즉 움직일 때를 형용한 것으로서 밖에 검은 원주가 있고 안에 흰 바탕이 있는 것은 이가 기가운데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고요할 때에 기가 이안에 있는 것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는 일원상 자체내에서 검은 선은, 先天一氣를, 검은 선 안의 부분은 무극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그림에 관한 설명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는 무극과 태극을 동일시하므로 그는 일원상을 태극(즉 理)와 선천일기(즉 기)가 융합된 모습으로 풀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무극안에 기가 포함된 상태는 일원상으로도 그릴 수 없다고 보는 점이 독특하다.

 

4. 도교 원상징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상징에 의해 상징되는 것은 우주의 긍극적 도(무극, 또는 태극)나 내단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최종적 경지인 金丹이다. 도는 우주의 근원을 의미한다면 금단은 구도노력의 결정체, 즉 도를 내면화하여 얻어진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두가지는 결국 내용상에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양자간에는 뉴앙스의 차이가 존재하며 사상사적 변천에 따라 각자의 개념이 지니는 의미도 조금씩 변모한다.
일원상이 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거론되는 경우 그 도는 기본적으로는 노자의 도나 {주역}의 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도교사상사에서 이해되는 도는 기론적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도가 기론적 맥락에서 거론될때무극과 태극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무극과 태극의 의미는 앞에서 살펴보았듯 다양하게 규정되고 있으나 일반적인 입장은 무극을 一氣 이전의 절대 無의 세계로, 태극을 음양이기로 분화되기 전의 선천일기로 보는 것이다. 일원상이 무극을 상징하는 경우 일원상은 천지가 발생하기 이전의 혼돈한 선천의 세계를 상징한다.
원상징이 최초로 사용된 <수화광곽도>의 경우 일원상은 수화이기의 합일, 즉 음양이기의 합일을 의미한다. 이는 그후에 제시된 다양한 원상징에 공통된 기반을 형성한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인체내의 두가지 생명의 원동력이 합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혀보면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의 합일, 나아가 더욱 근원적으로 추구하면 乾坤(천지)의 합일을 의미한다. 이는 對極의 합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원상이 금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론된 경우는 어떠한가? 금단이란 개념은 葛洪의 {抱朴子}에서 최초로 나타나는데 이에 의하면 금단은 金液(액화된 금)과 還丹의 합성어이다. {포박자}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른 방법에 의해 합성된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환단의 경우는 이를 다시 세분하여 太淸神丹, 九鼎神丹등 여러 종류를 제시하고 있다. 어쨌든 양자 모두 이를 복용하면 신선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포박자}에서는 이를 上藥이라고 부른다. {포박자}에서 두 가지를 중시하는 이유는 금이 지니는 불변성과 환단이 지니는 還元性에 있다. 이 두가지는 신선의 두 가지 특징인 불사와 造化力을 상징한다. 불사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조화력이란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누리고 자연과 같은 조화력을 지님을 의미한다. 내단사상의 원경으로 받들어지는 {주역참동계}에서도 금단의 개념은 불변성과 조화력이라는 두가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외단의 경우와 달리 금단은 어떤 물질적 대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심신의 수련을 통해 인간이 영원하고 자유로운 인격으로 재탄생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내단, 외단을 막론하고 금단이 지닌 두가지 성격은 근본적으로는 노자의 {道德經}에서 밝힌 道論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는 현상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스스로는 영원불변한 존재로 파악된다. 이러한 불변과 변화라는 두가지 측면이 영원성과 조화력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교의 원상징이 금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론된 경우 변화와 불변의 합일이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금단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은 性命合一의 의미이다. 한대무렵부터 도교수련가들은 육체적 생명의 보전(養形)과 마음의 보전(養神)이 아울러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을 확립하였다. 이 관점은 당말무렵부터 불교와의 사상적 교섭을 거치면서 性命雙修論이라는 사상으로 발전한다. 성명쌍수론이란 마음의 측면을 性, 기의 측면을 命으로 규정하고 양자의 조화로운 수련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인간생명의 본질을 마음으로 파악하여 마음의 수련에만 치우치는 경향과 기로만 파악하여 육체의 보전만을 도모하는 양극단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의 수련에만 치우치면 관념적 초월에 그쳐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고 호흡등을 통한 기의 단련에만 그치면 수명만 연장될뿐 참된 도를 체득할 수 있는 지혜광명을 얻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양자의 수련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때 금단이 형성된다고 보므로 일원상은 결국 심신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몇가지 함의는 사실상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중 가장 근원적인 것은 絶對無로서 음양의 조화, 변화와 불변의 합일, 마음과 몸의 조화등도 여기에 바탕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