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지구촌의 사상 ♡/유·불·선·도·교

Yoga의 三昧, 智慧, 解脫에 관한 考察

by 윈도아인~♡ 2012. 3. 17.

Yoga의 三昧, 智慧, 解脫에 관한 考察  

   Ⅱ. 요가의 배경
   Ⅲ. "나"와 진실한 自我의 개념
   Ⅳ. 요가의 목표
   Ⅴ. 요가의 形而上學과 認識論
   Ⅵ. 形而上學과 解脫의 관계
   Ⅶ. 三昧 (sam dhi)
   Ⅷ. 각 三昧의 단계와 智慧
   Ⅸ. 結  語
   Ⅹ. 參考文獻
 
. 序  言
 
 ......(前略)  이 보고서를 준비하며 삼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고, 상캬적 형이상학과 요가의 실천수행법의 관계에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삼매의 개념과 여러 가지 삼매의 단계, 해탈과 상캬적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표이다.   
 
Ⅱ. 요가의 배경
 
이미 위대한 요가학자 파탄잘리에 의해 기술된 바와 같이 인간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자유는 영적 계발을 위한 요가적 실천의 기본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로 돌아가야 한다.  파탄잘리는 기본적인 요가의 실천에 대해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요가학파의 철학적 바탕을 제공하고 마음과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을 해방시키는데 요가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지적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식이나 의지, 느낌등 우리의 어떠한 정신적 단계보다도 우월하고 높은 궁극적 원리와 같이 순수한 자아를 밝히는 의식을 초월한 신비적 체험을 믿었다.  이 근본원리의 본질은 그것 자체로 지극히 신비적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납득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파니샤드의 시대에서조차도 그것의 모호함이 인정되고 있고 현자들은 그것이 눈으로 지각될 수도, 사고로 인지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자들은 무아경의 황홀한 느낌이나 순간적인 어떤 다른 종류의 심리학적 상태의 체험같은 것이 아닌 궁극적 본질의 존재를 믿었다.  그것은 진정한 자아나 궁극적 실재로 말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인도 신비사상의 뿌리는 이러한 자아에 대한 견해이다.  
 
Ⅲ. "나"와 진실한 自我의 개념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나"라는 말을 자문해보면, 언제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우리의 사전 속에서 가장 의미가 분명치 않은 모호한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가지 점에서 우리는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인지 혹은 다른 사람인지 의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말의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할때에는 그 말이 가장 그 의미를 붙잡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것이 어떤 일시적인 인격의 특정한 의식이나 느낌을 의미하거나 단순히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동안에 그 말을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정해야 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심오한 철학적 토론으로 들어갈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시도한 인도인들이 불멸하고 변함없는 자아로 이해한 것이 무엇인지는 설명되어져야만 한다.  다른 이들이 자아를 많은 것으로 믿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자아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많든 적든간에 자아의 본성에 대한 개념은 대부분의 인도 사상체계에서 같다.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 또는 사고에 의해 이해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순수하고 만족함이 없는 의식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들은 변하기 쉬운 것이지만 순수의식의 이러한 신비스러운 빛은 변함없는 것이다. 인도 사상체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가 수행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감각이나 생각, 의식, 느낌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자아가 분리되고 독립적인 존재처럼 쉽게 발견될 수 없다고 고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아의 본성과 관계없는 외부와의 연결의 연합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Ⅳ. 요가의 목표
 
상캬와 같은 形而上學 체계인 요가에서는 眞我(puru a)와 原質(prak ti)의 결합에 의해서 현상적인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다.  이 '나'라는 존재는 假我的인 존재로 그 근저에는 心(citta)이라는 現 存在를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基體가 있다.  이 心은 상캬의 buddhi, aha k ra, manas의 기능을 포함한 요가 특유의 심리기관이다.  따라서 이것은 원질이 전개한 것으로 진아의 解脫을 위해 작용하는 기관으로 그 본질은 물질이다.  
 
그러나 현상 속에서의 인간에게는 이것이 존재하므로 '나'라는 현 존재가 가능한 것이고, 이것의 작용(v tti)에 의해서 인식이 있고 감정이 있고, 탐욕이나 증오 등의 번뇌가 있게 된다. 본질적 입장에서 이러한 모든 의식현상은 형이상학적으로는 眞我의 향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현상적 인간에게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요가에서는 이러한 假我的 존재인 心의 작용을 억제하여 현실 속의 苦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또한 그 작용이 억제되면서 발현되는 지혜에 의해 眞我를 자각하고자 하는 것이 요가의 목적이다. 그 억제방법인 요가수행은 요가사상의 핵심이므로 요가를 '심작용의 止滅(yogas cittav ttinirodha)'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렇게 현상적 의식작용을 억제하여 현실의 고뇌로부터 초극하고자 하는 방법은 모든 인도철학이나 종교에 공통된 부분이며 그래서 일상적인 심리상태를 지양하고 超心理的 상태에서 절대진리를 체험하고 자신의 절대적 생명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고통, 번뇌의 원인인 심작용은 무엇에 의해, 어떻게 해서 없앨 수 있는가? 또한 그것을 위해 어떠한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심작용은 바로 三昧와 그로 인해 발현되는 지혜에 의해 없어지는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바로 이 삼매와 지혜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요가가 목표로 하는 해탈사상을 살펴 보겠다.
 
Ⅴ. 요가의 形而上學과 認識論
 
철학체계로서의 요가는 전통적으로 상캬학파와 밀접히 연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몇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비록 상캬와 요가 모두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푸루샤가 있다고 주장하나, 상캬와 달리 요가학파는 신 vara, 혹은 지고의 푸루샤가 있다고 가르친다. 
 
어떠한 자아도 그것이 설사 독존(獨存) Kaivalya의 완전한 해탈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최고의 푸루샤와 동등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자와 달리 후자는 프라크리티에 속박된 적도, 속박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요가 학파에 의하면, 최고의 푸루샤는 물리적 생존의 고통과 비애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주체이다. 그러나 최고의 푸루샤가 실재의 전부는 아니다. 그외에도 프라크리티와 다른 푸루샤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프라크리티와 다른 푸루샤의 존재 때문에 최고의 푸루샤는 그 막대한 힘과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실재가 될 수 없다.  
 
요가 학파는 최고의 푸루샤의 존재에 대해 두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프라크리티는 순전히 물리적이어서 의식을 결하고 있으므로, 그것의 분명한 목표지향적 전개는 프라크리티 자체에 기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프라크리티의 전개 뒤에 최고의 지혜와 힘, 완전성을 가진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더욱이 프라크리티는 푸루샤와의 접촉이 없이는 전개할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다른 푸루샤들이 프라크리티와 접촉하여 전개를 시작하도록 하는 최고의 푸루샤가 필요하다고 요가학파는 말한다. 단지 그 현존만으로 최고의 푸루샤는 다른 푸루샤들이 프라크리티와 상호작용함으로써 그 전개를 시작하도록 영향을 주고 촉발시킨다. 그러나 최고의 푸루샤를 프라크리티나 다른 푸루샤들의 창조자라고 보지는 않는다. 최고의 푸루샤의 존재에 대한 또다른 논증은 완성의 단계 개념에 근거한다. 완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프라크리티는 낮은 경계이며, 푸루샤들은 다양한 완성의 정도를 가진 것이므로 완성의 상한 경계로서의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분명히 프라크리티가 아니라 푸루샤만이 그러한 존재일 수 있다. 그 가장 완성된 존재가 바로 신, 즉 최고의 푸루샤이다.  
 
파탄잘리 Pata jali 자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떤 이론적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요가 체계의 통합적 부분으로서 신을 도입한 이유는, 순전히 실천적인 것이다. 즉 지혜와 힘의 최고 완성의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수행자를 고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을 그 지고의 푸루샤에 완전히 순종시킴으로써 해탈의 최대 장애인 에고이즘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과 악을 극복하는 것이다 - Bhakti Yoga (신애의 요가). 그러나 모든 형태의 요가가 신에 대한 봉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요가는 무신론자에게도 자유와 해탈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Ⅵ. 形而上學과 解脫의 관계
 
삼매는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해지며 나타난다. 그러나 삼매가 요가의 목적은 아니다. 이것은 지멸잠재력 nirodha-sa sk ra 이 다른 번뇌성의 잠재력이 활동하는 것을 억제한 결과로 나타난 편안한 심리상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가는 삼매를 통하여 요가의 목적인 해탈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면 수행이라는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어떻게 무의지적인 삼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는 비약적인 초월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삼매의 경지는 자발적인 그것 자체의 방법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며, 그 경지는 각성에 비교된다. 또한 그때의 심리상태는 일반적인 판단과 추리 등의 사고작용을 첨가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직관(直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삼매는 주관의 존재는 잊혀지고, 객관만이 의식을 차지한 상태, 즉 주객미분의 의식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구조를 가진 삼매에도 차별이 있다. 삼매의 경지에 차별이 있는 것은 심작용의 대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투명한 보석이 그 곁에 있는 꽃의 빛깔에 의해 물들 듯이 인식 주체, 인식 기관, 인식 대상 중 그 어느 것에 머물러 거기에 물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이 객관적인 사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그 대상이 적어질수록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상과 같이 심작용을 멈추게 하고자 지멸잠재력을 발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또한 심작용이 완전히 멈추게 되었을 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지멸잠재력을 발현하는 요가의 수행목적은 심작용의 지멸이다. 이때가 바로 해탈의 상태이다. 요가도 인도의 타 학파와 마찬가지로 이 현실세계를 고로 보고 있다. 또한 이 고를 종식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확신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요가도 역시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요가는 고(苦)의 근본원인을 프라크리티와 푸루샤의 결합 때문으로 보고, 이 결합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마음(心)이 전개되고, 심작용에 의해서 애착이 생기고, 애착에 의하여 업(業) 등의 잠재력을 마음에 남긴다. 그 결과 윤회전생이 계속되는 고통의 세계가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요가수행의 목적이다. 수행에 의하여 심작용을 억제함으로써 프라크리티가 더 이상 전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심작용이 억제될 때 얻어지는 분별지(分別智)로 푸루샤의 순수청정함을 보는 것이다. 이때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와 결합하지 않은 독존(獨存)의 상태가 된다. 독존은 요가의 완성이고 최고의 목표이다. 이것은 해탈과 동일한 경지로서 푸루샤의 순수청정한 정신성이 프라크리티의 물질성과 결합하지 않은 상태, 즉 푸루샤 홀로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독존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심작용을 멈추게 하는 요가의 수행에 의하여 도달된 삼매(三昧)에 의한 것이다. 즉 삼매의 최고 경지인 무종자삼매에서 일체가 지멸될 때, 프라크리티의 전변은 끝이 난다. 이것은 프라크리티의 독존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삼매의 세계에서 나타난 분별지로 푸루샤의 순수청정함을 보고, 프라크리티와 다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푸루샤의 독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존은 푸루샤를 위한 목적이 없어진 삼속성(三質, trigu a)이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pratiprasava) 또는 푸루샤가 자기 본래의 성질에 머무르는 것 (prati  ha)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삼속성이 자기의 근원인 프라크리티로 돌아가는 것이 프라크리티의 독존이고, 푸루샤가 그의 본성에 머무르는 것이 푸루샤의 독존이다. 이 두가지의 독존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즉 프라크리티가 독존하면 푸루샤도 자연히 독존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때에 모든 苦는 사라지고, 輪廻도 끝난다.        
 
Ⅶ. 삼매(三昧, sam dhi)
 
삼매란 선정과 같지만, 다만 명상의 대상에만 의식이 있고 그 자체(=마음)에는 없는 상태이다. 수행자가 응념으로부터 선정으로 진보함에 따라 집중도 증대되고, 따라서 일상적 사고에 있어서보다 대상을 더욱 명료하고 자세히 알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응념과 선정의 단계에서는 모든 교란이 제거되고 마음이 단 하나의 대상에 지배된다. 그럼에도 아직은 수행자가 대상의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수행자의 자아의식이다. 이 의식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수행자와 대상 사이를 가로막아 대상이 그 본래 모습으로 인식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교란은 선정으로부터 삼매의 단계로 나아감에 따라 제거되며, 이 상태에서는 마음의 모든 자의식이 사라지고 대상은 그 본래 면목으로 비추어진다. 응념으로부터 선정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본질적으로 마음의 주관적 본성인 마음 자체의 활동과 역할의 잔여의식은 점점 약해지고, 대상에 대한 집중은 더욱 강해진다. 수행자가 드디어 삼매의 상태로 나아가면 마음 자체에 대한 잔여의식은 완전히 소멸되고 대상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즉, 마음과 대상, 주관과 객관의 융화가 일어난다. 여기서는 더 이상 두 사물이 없으며, 대상도 아닌 오직 하나의 순수의식이 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선 의식의 구조와 대상의 구조가 일치한다.  
 
"마음의 작용(citta-v tti)이 거의 소멸된 자에게는 인식주체와 인식, 그리고 인식대상이 색깔있는 표면에 놓인 투명한 보석과 같이 서로 완전히 융합된다."   - yoga s tra Ⅰ.41 -
 
삼매에서 마음(citta)은 명상의 대상에 강력하게 집중되어 있으므로 관찰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일상적 인식이 초극되고 대상과의 合一感이 있게 된다. 여기서 대상이란 실재의 유한한 측면이다. 대상의 목적은 단지 초심자에게 집중의 초점을 주는 것이며, 그 대상이 수련생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과정을 돕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그것이 브라흐만, 부처, 道,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되건 神性 혹은 절대자가 모든 實在속에 내재한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실재의 어느 측면이건 명상의 대상으로 선정될 수 있다. 그것은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의 일부일 수도 있고, 쉬바나 깔리같은 브라흐만의 이미지일 수도 있으며 혹은 가장 秘敎的차원에서 의식 자체의 흐름, 즉 자신의 명상의 대상으로 취해진 마음(citta)일 수도(=無種子 三昧) 있다.  
 
요가에서는 이와 같이 대상을 초점으로서 시작하지만, 제한된 상징이며 따라서 다만 부분적으로 실재를 중재하거나 현현시킬 수 있는 유한한 대상은 초극될 것이 기대되며 오직 그때만이 실재가 완전하게 보여진다. Patanjali가 최고의 신비적 상태로 여기는 것은 실재와의 무제한적 일치라는 이 최종상태(대상 없는 三昧)이다. 이제 네 가지 단계의 점증하는 순수 대상 三昧와 무대상적 三昧(實在와의 직접적, 무제한적 합일성)에 대한 Pata jali의 기술을 검토해 보겠다.
 
有對象 三昧의 네 단계 가운데서 가장 낮고 가장 불순한 것은 有尋(savitarka)이다. Patanjali는 그것이 불순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상을 지시하는 관습적인 말( abda)과 그 대상의 개념적 의미(artha), 그리고 대상 자체에 대한 직접지각(j  na)이라는 요소들이 의식 내에서 혼합됨으로써 대상에 대한 사뜨바의 반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Vyasa는 대상에 대한 이 혼합된 경험이 두 가지 원인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현생과 전생에서 사물을 분류하기 위해 명칭을 사용해 온 습관적 방식에 의해 야기된 왜곡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그 순간에 특유하게 일어나는 대상의 지각에 의해서라기보다 우리의 언어와 문화의 인습적 언어에 지배되도록 하는 의식 내면의 혼합력(vikalpa)을 갖는다.  예를 들면 한 어린이를 바닥모를 아름다움과 위엄과 가능성, 그리고 조용하고 반성적인 분위기의 갈색 눈을 가진 어린이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어린이'로 보는 것과 같다.  vikalpa 혹은 혼동의 또 다른 원인은 대상의 지각이 우리 마음속에 환기시킨 개념적 의미(예를 들면 '어린이는 소중히 아껴야 할 신의 선물이다' 혹은 '어린이는 정서적 좌절의 지속적인 원천이며, 은행 통장을 고갈시키는 존재다')에 토대한 인식적 추리이다.  그러나 인식적 추리는 자신의 문화나 믿음에 속하는 전통적 사상체계(예를 들면 기독교적 견해, 혹은 유물론적 견해)로부터 수용된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상적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 대부분에겐 바깥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차단시키고 명상의 대상과 하나가 될 정도로 충분히 집중을 했을 때조차도 달성된 三味의 종류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정형화시킨), 치우치고 왜곡된 사고로 물들이는 습관에 의해 흐려진 것이다.
 
요가 수뜨라 Ⅰ:42에 대한 브야사의 주석의 후반부에서 대상 三味의 두 번째 단계는 과거의 언어 사용의 습관과 추리적 사고의 치우친 유형이 마음으로부터 제거된 것으로서 정의된다. 그 때만이 사뜨바 즉 의식의 수정같은 측면이 라자스, 즉 정서적 모호로부터 벗어나서 대상이 마음 속에서(단어의 의미와 혼합되지 않은) 자체의 뚜렷한 본성을 드러낸다. 이 상태에 대한 전문술어는 無尋三昧(nirvitarkasam dhi)이며, '뚜렷한 神秘的 知覺'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적 혹은 추리적 지식 이른바 신비가(yogin)들에 의해 가르쳐진 진리, 그들이 고차적 지각 형태(nirvitarka)로부터 배운 진리의 씨앗 혹은 바탕이 되는 것은 이 순화된 지각상태라고 브야사는 말한다. 바짜스빠띠 미쉬라는 그의 주석에서 요기 혹은 신비가는 그 자신이 진리를 직접 체험하기 때문에 그러한 진리를 언어화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자비 때문에 신비가는 이들 진리를 말한다. 그러나 말함으로써 언어와 상상의 사용으로 인해 라자스 혹은 정서적 왜곡을 첨가시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두 낮은 단계의 對象 三昧는 대상의 거치른 혹은 외적인 형태에 기초한 반면, 두 높은 단계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사물의 原子的 혹은 小宇宙的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내적 본질로 향한다. 그러한 상태에 대해서 요가 수뜨라 Ⅰ:43과 44에 기술되어 있으나, 그 구분은 개념화를 거부할 정도로 미묘하다.
 
세 번째 단계는 有伺三昧(savic rasam dhi)이다.  有伺(savic ra)경험에 있어선 의식의 흐름에 대상과 너무도 완벽하게 同一化되어 마음은 '그 자신의 본질을 결여한' 것 같다. 브야사의 이 말은 에고의식의 완전한 상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일종의 멍청한 상태로 빠지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상자가 대상에 사로잡혀 있어 경험을 갖고 있는 자로서의 자기의 에고에 대한 별개의 각성이 남아 있을 여지가 없음을 뜻한다.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외적 특성과 내적 성질들의 그 모든 생생함에 있어서 대상은 자신의 모든 주의를 요구한다. 경험에 주어진 유일한 특성들은 대상 자체에 의해 제공된다. savic ra상태에선 대상의 각성은 그 거치른 형태와 소우주 혹은 내적 본질을 모두 포함하지만, 그러나 공간과 시간에 있어 현재에 제한되어 있다. 수행자의 대상 인식(하나가 됨으로써 아는것)은 완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있어 현 순간에 한정된 인식이다.
 
對象 三昧의 마지막 단계인 無伺三昧(nirvic rasam dhi)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 현순간에의 한정이 초극된다는 점에서만 savic ra와 다르다. 이제 요기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므로 그는 현 순간뿐 아니라 그 과거 상태와도 하나가 되며,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완전히 공유한다. 공간과 시간의 마지막 제한이 초월된다. 브야사에 따르면 신비적 상태는 그 자신의 본성을 비우고 대상 자체가 될 때 nirvic ra 상태에 도달한다. 이것이 유한한 대상에 대한 도달가능한 최고 수준의 지식이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낮은 의식 수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고 직접적이다. 그리고 Pata jali 요가의 심리학적 관점에선 두 가지 높은 차원의 對象 三昧는 완전한 자기 망각, 혹은 아집이 없는 상태(egolessness)를 특징으로 한다. 신비적 의식이란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됨으로써 더 이상 의식의 대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은 초극되고, 다만 순수한 사뜨바 의식이 대상의 형상으로 서서히 변형되면서 사물 자체(svar pa)가 그 자체만으로 빛나도록 한다.
 
요가에 있어서 신비적 실현의 최고수준은, 유한한 대상에의 집중이라는 제약 조차도 벗어날 때 달성된다. 요가 수뜨라 Ⅰ:50과 51은 無種子(nirb ja) 즉 대상없는 三昧의 확립을 기술하고 있다. 요가는 더 이상 대상에 대해, 神(이슈와라)과 같은 존귀한 대상에 대해서조차 명상하지 않는다. 이제 의식은 그 자체로 돌아가서 자신의 자기 조명적 본성과 하나가 된다. 상캬 이론과 요가 심리학에 따르면, 이 상태에서는 다만 순수 智의 의식만이 있다. 에고(aha k ra), 意, 감관이라는 낮은 '여과기관들'은 그들의 구성요소인 라자스, 혹은 정서와 더불어 탈각 혹은 초월된다. 존재하는 것은 참다운 자아(Puru a)의 순수한 의식에 현현되는 오직 본래의 實在 자체 뿐이다.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라는 힌두의 우빠니샤드적 가르침은 개별적 에고, 즉 aha k ra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한다. 동양적 관점에서 볼때에 개별적 에고라는 제한요소가 제거됨과 더불어 완전한 신비체험은, 그 실재가 단지 명상의 한 초점으로서 유한한 대상의 한정된 형태에만이 아니라 완전성에 있어서 체험될 것을 요구한다. 비록 명상의 대상이 신성, 신 자신의 화현일지라도 한정된 화현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실재의 완전성은 감소된다. 그러므로 요가에 있어서 최상의 단계는 의식이 자신의 스스로 빛나는 본성과 하나가 되는 無對象的 三昧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브라흐만이다' 혹은 '내가 부처다'와 같은 문구로 지시되는 경험, 바로 그것인 것이다.
 
Ⅷ. 각 三昧의 단계와 智慧
 
1. 三昧와 智慧
 
파탄잘리 Pata jali 에 의하면, 수행자는 삼매경에서 두뇌에 한정된 사고로부터 벗어나 각(覺) buddhi 혹은 지혜(智慧) praj 라고 하는 직관(直觀)을 얻는다. 수행자가 현현된 우주에 있어서 대상의 더욱 미묘하고 깊은 측면을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 직관을 통해서이다. 파탄잘리 Pata jali 에 의하면 이지의 영역에는 직접적 인식 praj, 지식 j  na , 증언 abda 이라는 세 가지 바른 인식의 원천 pram  a이 있다. 증언이란 언어에 근거한 인식이다. 지식이란 지각과 추리에 근거한 인식이며, 모든 경험과학은 이 속에 포함된다. 진지(眞智)란 삼매경에서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에 대한 참다운 인식으로서 바로 요가에서 추구하고 있는 인식이다. 이 인식은 감관을 통한 인식과 달리 오류와 착가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수행자의 인식은 철저히 직관적이고 비개념적이다. 이것은 이성과 이지의 영역 바깥에 있는 무엇을 뜻하며 개념적 , 간접적, 이지적 인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요가적 인식이 반드시 이지와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지와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탄잘리 Pata jali 는 또한 유상삼매(有想三昧, sampraj  ta sam dhi)와 무상삼매(無想三昧, asampraj  ta sam dhi)의 단계를 구분짓는다. 전자에서는 인식이 위에서 말한 세 종류로 분리된다. 삼매의 절정인 후자에서는 대상에 대한 순수하고 참된 내적 인식이 얻어지며, 수행자는 마음과 대상을 합일시킴으로써 실재의 대상을 인식한다. 수행자는 그 자신의 의식 속 더욱 깊이 침잠함으로써 대상이 아닌 순수 주관의 상태를 깨닫는다. 그는 또한 프라크리티와 얽혀 있다는 일상적 느낌이 착각과 무지 avidy의 소산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 ja sam dhi), 즉 씨앗 혹은 대상을 전혀 갖지 않는 삼매에서 수행자 자신이 곧 대상이 된다. 이것이 모든 요가의 궁극적 목표인 최고 의식의 달성이며, 초월적 주관성의 실현이고, 불사의 푸루샤로서의 자성을 발견한 자아이다. 프라크리티와 전혀 구별되는 영원한 푸루샤로서의 참 존재를 인식한 자는 독존(獨存, kaivalya), 즉 속박과 무지로부터의 절대적 자유의 상태를 이룬다.
 
2. 삼매의 단계
 
- 유상삼매(有想三昧, sampraj  ta sam dhi)와 무상삼매(無想三昧, asampraj  ta sam dhi)
구체적인 어떤 대상이나 추상적인 어떤 생각의 도움으로, 즉 공간 안에서 혹은 어떤 상념에 관한 일점에 자신의 생각을 집중, 고정시킴에 의해서 삼매가 성취될 때 이것을 유상삼매(有想三昧, sampraj  ta sam dhi)라고 한다. 한편, 그것이 외적이든 심적이든 간에 어떤 관계와도 분리된, 즉 타자의 개입이 없는 존재에 관한 완전무결한 포용인 하나의 '합일'을 얻을 때 무상삼매(無想三昧, asampraj  ta sam dhi)가 실현된다. 유상삼매는 그것이 진실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케 하여 모든 종류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의미에서 해방의 한 수단이지만, 무상삼매에서는 전생의 모든 심적 기능의 인상(印象, sa sk ra)이 소멸되며, 또한 과거의 소행에 의해서 이미 작동된 업력이 정지된다. 또한 유상삼매에서는 대상을 향한 묵상을 제외한 일체의 심리적인 기능이 정지되는데 비해서 무상삼매에서는 모든 '의식성'이 사라지고 모든 심리적인 기능이 봉쇄된다.  여기서는 인상을 뒤에 남기는 어떤 마음(心, citta)의 흔적도 없게 된다.  유상삼매는 응념(dh r  a)과 선정(dhy na)을 통해서 얻어지고, 무상삼매는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도발되지 않는 경지를 의미한다.    무상삼매는 요가 행자의 장기적인 노력을 요하는데, 유상삼매의 몇 가지 단계를 충분히 체험하기 전에는 달성되기가 어렵다. 이것은 선행하는 무수한 응념과 선정의 정상(頂上)이기 때문이다.  
 
유상삼매는 분명히 몇가지 단계를 구분한다. 여기서는 아직 절대적 불변의 상태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1) savitarka 유심(有尋) : 이치를 따지는 것  2) nirvitarka 무심(無尋) : 이치를 따지지 않는 것  3) savic ra 유사(有伺) : 숙고적인 것  4) nirvic ra 무사(無伺) : 초(超) 숙고적인 것의 네 단계 [유종자삼매 有種子三昧] 가 구별되고 있다. 파탄잘리 Pata jali 는 상기한 네 단계와 병행하는 또 다른 네 용어를 사용한다 : 1) vitarka 심(尋) 2) vic ra 사(伺)  3)  nanda 환희(歡喜)  4) asmit  아상(我想, 自己意識) [유상삼매 有想三昧]
 
첫번째 단계인 유심삼매에서는 생각은 명상의 대상과 '그 대상의 본질적인 전체성'에서 일치한다. 하나의 대상은 물(物), 념(念), 명(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대상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세가지 면들이 명상을 하는 동안에 수행자의 마음(citta)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유심삼매는 그 대상의 질료적(거친, 조잡한)인 면을 통해서 성취된다. 이것은 대상에 관한 직접적인 지각으로 그 대상의 과거와 미래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그것은 덧없는 시간 속에 있는 대상을 추적하는 것 뿐이다. 그 다음 단계인 무심삼매는 기억이 그 기능을 멈춘 뒤에, 즉 언어상이나 논리상의 연상작용이 그친 뒤에, 대상의 이름과 의미가 비워질 때, 대상의 본질과 더불어 사념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반영할 때의 심의식이다. 여기서 마음은 '나'라는 현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인식행위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으며, 대상은 하나의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자료로써 직접적으로 파악된다. 이상의 삼매들은 대상들의 외형적인 단일성에 관한 전념과 명상에 의해서 성취되는 상태(인식)이다. 이 상태를 넘어가면 유사삼매의 경지로 나아가, 마음은 물질적인 대상들의 외면에 멈추지 않고 tanm tra 라고 불리는 에너지의 극미핵(極微核)을 곧바로 인지하며, 수행자는 물질의 이러한 미세하고 정교한 면에 관해서 명상한다. 여기서 그는 아만(我慢, aha k ra)과 원질(原質, prak ti)을 간파한다. 그러나 이 명상에는 여전히 시공(時空)에 대한 의식이 수반되고 있다. 이 tanm tra 가 그 동적인 본성으로 인해서 산출하는 느낌을 체험하지 않고, 마음과 tanm tra 가 동일하게 될 때 실현되는 상태가 무심삼매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계의 물리적인 세계의 본질 속으로의 마음의 진정한 침잠이다.  
 
이러한 네 단계들을 유상삼매(有想三昧, sampraj  ta sam dhi), 유종자 삼매(有種子三昧, b ja sam dhi)라고 한다. 각 단계들이 물질의 근본 토대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오는 의식에 대하여 종자와 같은 경향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무상삼매는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 ja sam dhi)의 경지이다. 유상삼매의 네 단계를 실현함으로써 절대지(絶對知)의 능력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무종자 삼매의 경지로 향한 열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절대지는 존재하는 것(being)과 아는 것(knowing)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존재론적 완전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삼매에 정착한 심의식(citta)은 순수자아(puru a)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으며 생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무상삼매는 보살십지(菩薩十地)의 마지막 단계인 법운삼매(法雲三昧)라고 불리기도 한다. 25번째의 원리인 순수자아(puru a)가 원질(原質, prak ti)에 종속되어 있는 다른 24개의 원리들에 대한 자신의 독립성을 알아차리게 될 때, 요가행자는 26번째의 원리인 최고아(最高我), 곧 신(神,   vara)을 감지한다.  
 
Vy sa 에 의하면, 유상삼매의 경지에 있는 수행자는 아직도 자신의 정화된 의식과 순수자아 사이의 차이를 인식한다. 이 차이가 없어질 때 무상삼매가 달성된다. 개개의 모든 의식상태(v tti)가 제거되고, 지각되지 않는 인상(印象, sa sk ra)들만이 남는데, 어느 순간에도 결코 지각되지 않는 이러한 미세한 인상들조차 소멸되면, 여기에서 결과적으로 진정한 삼매 -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 ja sam dhi)가 드러난다.
 
Ⅸ. 結   語
 
지금까지 요가에 있어서의 지상의 목적인 解脫과 그 달성을 위한 수행으로 얻어지는 최고의 경지인 三昧와 그로부터 발현되는 智慧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여기에서 나는 진정한 해탈이란 바로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즉 삼매의 상태에서 체험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발현되는 어떠한 지혜에 의해서도, 그로 인해 알게 되는 진아(眞我)의 모습과 푸루샤의 독존(獨存)이란 단지 수행에 의해 그 상태에 이르른 사람의 인식일 뿐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망사와 같은 소수의 학파를 제외하고 모든 인도철학적 관점에서 공통되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그치지 않는, 그에 기반한 개인의 수행 정진과 체험(=해탈)인 것이다. 나 자신도 인도철학을 공부하는 철학도로서 한번 쯤 수행을 해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Ⅹ. 參 考 文 獻
 
Fundamentals of Indian Philosophy, R.Puligandla(李芝洙 譯), 民族社, 1991
印度哲學の自我思想, 카나쿠라 엔쇼 金倉圓照(文乙植 譯), 圖書出版 如來, 1994
요가의 理論과 實踐, 李泰寧, 民族社, 1988
Yoga : Immortality and Freedom, Mircea Eliade(정위교 譯), 高麗苑, 1989
印度哲學 第 2 輯(요가 修行에 대한 考察 / 李泰寧), 印度哲學會, 民族社, 1992
초월의 길 해탈의 길, Swamiji(李泰寧 譯), 圖書出版 如來, 1995
古典요가의 理論과 實踐에 대한 硏究, 東國大學校 大學院 印度哲學科, 李泰寧, 博士學位論文, 1992  

 

(출처/만갑이네 글판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