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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의 사상 ♡/유·불·선·도·교

[스크랩] 유, 불, 도 합일의 풍류(風流) 사상

by 윈도아인~♡ 2012. 3. 17.

유, 불, 도 합일의 풍류(風流) 사상

 

고운 최치원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노니
  온 세상에 날 알아 주는 벗이 드물구나
  창 밖에는 한밤의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고향을 향한 만 리의 마음이 인다

  (추야우중 계원필경)

 

1. 당나라 유학

 

  신라 말엽 868년 열두 살 어린 소년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고 있었다. 곁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전송하고 있었다. 아버지 최견일은 신라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를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은 장차 문장으로 당대와 후세에 이름을 떨칠 최치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보내면서 당부하였다. 최치원은 훗날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을 지어 올리면서 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려 할 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네가 십 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한다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그 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하여라" 당부하셨습니다. 신은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 않고 숼새없이 머리를 묶고 다리를 찌르는 노력을 하여 아버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진실로 남보다. 열 배 백 배의 힘을 기울여 노력한 지 6년 만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그 모습이 한눈에 그려질 정도로 비장하다. 아버지는 기필코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을 아들에게 당부하고 있고 아들은 그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성취하지 못하면 아들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당부가 너무도 절실하다. 열두 살이면 만리 타국 유학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가 아들을 통하여 실현해 보고자 하는 소망은 아주 간절한 것이었다. 그러한 소망을 갖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타고난 혈통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엄격한 골품제의 통일 신라였다. 그리고 최치원의 가문은 진골 가족에 비해 차별받는 육두품 귀족이었다.


  최치원은 결국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고 재능을 발휘하여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문장가가 되었다. 그가 남긴 글로는 스스로 엮어 펴낸 계원필경이 있고
왕명을 받고 지은 사산 비명을 비롯하여 많은 비문이 있다. 동문선이라는 책에 실린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그 가운데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된다.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을 동국의 문종으로 추앙하였고 동방 문학의 달마 조사라고
일컬었다

 

2. 골품제

 

  삼국 통일은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정비한 것은 그의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서이다. 늘어난 주민과 넓어진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행정을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여야 했다.


그를 위하여 신문왕은 유학을 정치에 반영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마립간 이사금등의 호칭이 중국식 호칭인 '왕'으로 바뀌고 국호와 연호 지명 등이 한자식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신문왕 때에는 국학이 설치되고 이어 원성왕 때에는 유학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과 문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 삼품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개혁은 사회 구조의 전면적 개편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지배적인 이념은 여전히 귀족 불교였고 신라 하대로 내려올수록 진골 귀족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으며 엄격한 골품제의 벽은 더욱 높아졌다. 삼국은 통일되었어도 화쟁의 논리로 상하를 아우르려는 원효의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라벌의 귀족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백성의 고난은 가중되었다. 같은 귀족이라도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등의 골품제에 의한 구분이 있었고 육두품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설령 탁월한 재능이나 경륜이 있더라도 진골 중심의 체계를 정치적으로 밑받침해 주는 구실밖에 할 수 없었다.


  육두품 이하의 지식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덕성을 갖추었더라도 행정 실무에 종사하는 기술자 이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두품 지식인들은 지배 체제의 큰 불만을 품었고 이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당나라 유학을 택했다. 당나라는 과거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 제국으로서 주변 민족을 무마하고 포섭하기 위하여 외국인을 과거에 의해 등용하는 빈공과를 두어 실시하였다. 육두품 지식인들은 당나라를 능력을 기르고 시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신라 집권층의 보수적인 의식에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였다.

 

  당나라 유학은 이를테면 인재를 능력에 따라 등용하지 않는 신라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유학의 형태는 당나라 측에서 비용을 대서 숙위라는 이름으로 공부하게 하는 것 신라 조정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 개인이 사비로 가는 것 등으로 다양했는데 837년(희강왕 2년)에는 당나라에 유학 간 학생이 한 해에 216명이나 되었다. 유학 기간은 10년으로 정하여 그 사이에 급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은 바로 그 일을 해냈던 것이다.

 

3. 성공과 번민

 

  머리를 묶고 다리를 찌르는 노력으로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2년간의 유랑 끝에 당나라 선주의 표수현위가 되었고, 이어 절도사 고변의 막하에서 4년간 종사관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고변을 대신하여 황소를 토벌하기 위한 격문을 써서 일약 문명을 날리게 되었다.


  황소 토벌에 공을 세운 최치원은 더욱 높은 벼슬에 올랐고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황제의 대궐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당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출세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타국 생활이 주는 고독과 서글픔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최치원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세계 제국의 국제인이면서 엄연히 변방의 외국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느껴야 했던 소외감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 고민을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해내(당나라)의 누가 해외의 사람을 가엾게 여기리
  묻노라 어느 길이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가
  애초에 식록을 구하였을 뿐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였을 뿐 내 몸 위하지 않았다
  나그네 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국에 돌아가는 꿈이 아득히 멀구나(최문창후전집)

 

  "해내의 누가 해외의 사람을 가엾게 여기겠는가"라는 표현이 그가 변방의 힘 없는 나라 국민으로서 느끼고 겪어야 했던 소외감과 고난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비록 당나라가 세계 제국을 표방하고 외국인에게 과거 기회를 주고 벼슬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고 주변 민족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 황제에게 자금어대를 받을 정도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이 '당서' '문예열전'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규보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사실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학이 결국은 중국 문학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신라(한국)인이고 결국 그의 문학은 신라 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진골 중심 체제에서 차별받는 처지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갔으나 중국에서는 다시 외국인으로서 고난과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신라에서 육두품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차별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재능을 발휘하고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건만 출세에는 한계가 있었고 또 평가를 받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자신 만만한 학문과 재능으로도 급제후 "낙양에 유랑하여 붓으로 밥거리를 삼았다"고 술회한 것처럼 2년이나 벼슬을 얻지 못하고 방랑해야 했고 그 후에도 구석진 곳의 한직인 현위 벼슬을 지냈을 뿐 태반은 고변이라는 무장의 서기로 지내면서 그의 주장을 대필해 주기가 고작이었다.


  '토황소격문'으로 평가를 받은 뒤에 몇 차례의 승진도 했지만 앞서 말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이국인으로서 이제 더는 활로를 찾을 수 없었던 최치원은 귀국을 결심하였다. 이에 고운이라는 당나라의 시인이 아쉬워 시를 지었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글로써 중국 천지를 흔들더니만
  열여덟에 과거 마당에서 싸워
  단번에 급제 한 장 쏘아 맞혔네.

 

  최치원은 이렇게 답하였다.

  열두 살의 철모르는 나이에 중국에 실날같이 들어왔다가 은하인 양 찬란한 젊은 나이에 비단옷 입고 동국으로 돌아가려오(최치원전 삼국사기). 그리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귀국하게 된다.

 

4.한국 사상의 뿌리 찾기

 

동방 사상과 군자국

 

  최치원은 중국에서 화려한 문화에 접함과 동시에 이국인의 설움과 소외를 맛보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역시 신라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키운 안목으로 신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으며 자기 뿌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있으면서 느꼈던 고독과 소외감은 오히려 제 나라 신라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하였다.


  최치원은 본래 우리의 것 그리고 우리의 본바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 나라를 동방이라 하고 군자국이라 하였으며 우리 민족을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빛나고 성대하고 실다워서 온 누리를 비춰 주는 것으로는 태양처럼 고른 것이 없다 .


기운이 화평하고 만물의 성공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는 봄바람처럼 넓은 것이 없다. 봄바람이나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이 두 가지를 뽑아 특별히 하나의 신령함을 주어 군자의 나라에 태어나게 하였다(무염화상비명).

 

  동방에서 시작된다는 태양은 '빛과 밝음 그리고 흰색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형상을 표상한 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알'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우리의 고어에서 왕의 성으로 알고 있는 해가 실제로는 태양을 의미하는 '해'의 음역이며 왕의 호칭을 '불구내'라 한 것도 불구레(붉으레)라는 태양의 광휘를 취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그 시조인 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박은 '밝'이라는 광명을 나타내고 혁이란 붉은 적이 두 개 합하여 진 것이니 거서간을 '해의 밝음'을 나타낸 것이다. 거세는 세상에 거한다는 것이니 거서간을 박혁거세라고 이름붙인 것은 광명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근거로 하여 우리 나라를 빛날 환자를 써서 환국이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 고대 건국 신화에서 난생 설화가 주류를 이루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동방이라 함은 얼핏 보기에는 중국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동쪽이라는 뜻이지만 의미상으로 살펴보면 밝고 포용력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최치원은 이어서 "동방국의 사람은 성질이 유순하고 또 지기는 좋은 물건을 생산하게 하며", "군자국의 풍속은 예의가 바르고 작작하여 여유가 있다"고 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십 년 가까이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워한 것은 바로 '고향의 정신'이었고 '고향의 정신'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 뿌리의 확인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동방 사상이었고 군자국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우리는 밝고 포용력이 있으며 하늘을 숭상하는 군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유, 불, 도 합일의 풍류 정신

 

  동방의 군자국이라는 선민 의식을 가진 최치원은 동방 사상의 내용으로 '풍류'를 들고 있다. 풍류란 밝고 포용력 있는 하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유교와 도교 불교를 서로 다른 사상으로 보지 않고 세 사상을 조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는 난랑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삼교 사상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여기에서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으려는 그의 목적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는 실로 삼교를 포함한다. 들어가 집에 효도하고 나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에 처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선을 받들어 행하게 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삼교를 풍류라 하고 그 내용을 현묘한 도라 하였다. 유교의 가르침을 충효라 하고 도교는 무위 불언 불교는 선이라 하였으니 똑같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치원 사상의 일관된 맥은 태양이 하나인 것처럼 '도(진리)는 하나'라는 것이고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삼교가 궁극에서는 하나의 도로 통하여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 불, 도 삼교 사상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유, 불, 도의 도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한 스님의 비문을 쓸 때에도 불교에 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사서 오경은 물론 유교 경전을 두루 인용하고 노자, 열자, 장자, 회남자, 신선술 등 도가의 맥을 망라하면서 불교의 설과 비교하여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박학 다식을 보여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세 가지 사상을 하나로 융합되어 있거나 단계적 차이를 갖는 하나의 사상으로 파악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부처와 공자의 학문이 출발점을 달라도 귀법은 하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뿐 아니라 신라 전체가 공유하고 있던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화랑도로 대표되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화랑도 정신이야말로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사상에 뿌리를 둔 삼교 사상이 모두 용해된 대화해의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회 사상으로 발전한 철학 체계이자 종교적 신념이기도 하였다. 최치원이 현묘한 도라 한 것은 바로 이 화해 사상을 일컫는 것이다.


  중국에 있으면서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안목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최치원이 발견한 우리의 뿌리는 바로 화해와 조화의 큰 정신이었던 것이다.

 

5. 신선이 된 비운의 사상가

 

  최치원의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는 고뇌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사람이 아니었다.


  귀국 후의 최치원은 자기 뜻을 만족스럽게 펴 보이지 못했다. 귀국 직후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경륜을 펴 보려 하였으나 신라의 집권층인 진골 귀족들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라 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국가의 재정은 아주 궁핍한 상태였다. 진성 여왕의 실정은 극에 달하였고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이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최치원은 중앙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면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개혁안으로 시무책 10여 조를 제시하였으나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여졌을 뿐 실행되지 않았다. 육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에 올라 개혁에 힘썼지만 사회 모순을 외면하던 진골 귀족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자신의 충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라 왕실에 대한 그의 실망과 좌절은 아주 큰 것이었다. 그는 40여 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길을 택했다. 당시의 사회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빚어 내는 심각한 갈등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세속을 등지고 바람따라 구름처럼 떠돌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다음의 시는 당시에 그가 느꼈을 심정을 잘 전해준다.

 

  첩첩한 돌 사이 미친 듯 내뿜어 겹겹 봉우리 울리니
  사람 말소리는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림을 두려워하여
  짐짓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싸네

 

  그러나 최치원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족했던 것도 아니었고, 밭 갈고 김매는 농사꾼이 된 것도 아니었다. 당나라 유학이 그러했듯이 은거 또한 제 뜻을 펼 수 없는 현실에 맞서는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자 신라 말 삼최라고 불리던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가운데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언위는 고려를 택하였다. 최치원은 "계림(신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고려)의 곡령은 푸른 솔"(삼국 사기)이라는 서한을 왕건에게 보내 고려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나, 고려 왕조를 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야산에서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인로의 '파한집'에서는 최치원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는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다. 다만 갓과 신발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 아마 신선이 되어 간 것일 게다.

 

  갓과 신발만 남겨놓고 사라진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민간에서는 그것이 전설로 전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신선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어쨌든 현실에서 맛본 좌절과 안타까움을 자연으로 달래다가 끝내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만 것이다

 

(출처/naver blog~天長地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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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선혜(禪慧)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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